top of page

요약본 목차

1/ 과학에서 경험주의와 실증주의

2/ 경험주의와 실증주의의 몇 가지 문제

3/ 경험주의에 대한 몇 가지 대안들 (과학사회학)

4/ 규칙준수로서 합리성 ㅡ 문화, 전통, 해석학 (윈치) [링크 바로가기]

5/ 비판적 실재론과 사회과학 (바스카) [링크 바로가기]

 

 

(이하 『사회과학의 철학』 요약본 목차 1~3항에 대한 내 요약이며 옆 컬럼에 내 의견이 게시될 것이다.)

우리는 사회과학이 ‘진정한 과학’이고자 한다면 과학에 대한 경험주의의 해명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할 것이며, 이 주장이 어디서 적합하며 어디서는 적합치 않은가를 논의하기 위해, '경험주의’로 알려진 가장 영향력 있는 자연과학 철학에서조차 여러 상이한 접근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실증주의'와 '해석주의' 극단 사이에 위치한 대안적 과학 모형을 살펴보는 데로 이를 것이다.

 

앞 부분은 자연과학에 대한 경험주의적 견해와 경험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자연과학적 지식의 특징을 해명하는 경험주의에 대한 가장 유효한 비판은 과학을 역사/사회적으로 위치한 실천으로 인식하는 접근에서 제시된다. (그렇지만 과학에 대한 사회/역사학적 접근 자체도 지식주장을 제출하고 경험적인 연구방법을 사용하는 등의 ‘과학적’ 특징을 보인다ㅡ그것들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 논의에서 시작해서, 사회과학들 또는 일부의 사회과학들은 과학적인 것이지만 자연과학과 동일한 방식으로 과학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입장들에 대한 검토로 나아갈 것이다. 이 접근은 경험주의보다는 합리주의 (rationalism) 전통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사회과학에서는 이 전통을 자주 해석주의자(interpretivist) 전통이라고 부른다. 합리성 개념은 다함의적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비교할 것이다.

 

이것들을 기초로 해서 근래의 발전인, (1) 비판적 실재론과 (2) 체계적인 상대주의를 살펴볼 것인데, 여기서 앞 부분에서 제시한 것보다 정교한 견해들이 제시될 것이다.(본 요약에서는 체계적인 상대주의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2장/ 과학에서 경험주의와 실증주의

 

1. 경험주의

근대과학의 역사와 지식이론(인식론)의 역사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다. 관찰과 실험에 크게 의지하는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과학은 그것의 방법과 지식주장을 경험주의 지식관에 입각하여 정당화하곤 했다.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과학을 최고 형태의 진정한 지식으로, 때로는 유일한 형태의 진정한 지식으로 취급함으로써 답례하곤 했다. 20세기 들어 경험주의 철학자들 (논리실증주의자 칼납과 ayer 등) 은 한쪽의 진정한 지식으로서 과학과 다른 쪽의 종교, 등과 같은 여러 믿음체계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긋는 일에 주력했다. 그 점을 입증하고자 할 때 경험주의자들이 부딪히는 한 가지 어려움은, 자기들도 과학서 제외된다는 점이었다.

 

여기서는 과학에 대한 경험주의 견해를 7가지 기본 교의에 입각해 특징짓기로 한다.

1] 개인의 정신은 ‘백지상태’로 출발한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감각 경험 및 세계와 우리의 상호작용에서 우리의 지식을 획득한다.

→ 17~18세기에 경험주의자들은 몇몇 형태의 관념의 연쇄(association of ideas)를 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학습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이론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이것은 지식을 생등적 관념이나 본능의 계승에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획득한다는 견해를 지배했다. 오늘날 경험주의자들은 이것을 반드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지식의 획득이나 습득의 과정(발견의 맥락)과 믿음이나 가설이 참인가 여부를 시험(정당화의 맥락)하는 과정의 구분을 중시한다.

 

2] 진정한 지식주장이라면 어느 것이거나 경험(관찰, 실험)에 의해 시험할 수 있다.

 

→ 어떤 주장을 사람들이 참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그 주장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어떠한 증거가 나타나더라도 당신의 주장을 참이라고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결코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두번째 교의 진술이 오해낳을 수도 있다는 걸 지적하자. 경험주의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진술을 그것이 참이 아니더라도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지식 또는 과학적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진술이 참 또는 거짓이라는 점을, 증거의 현실적인 원천 또는 가능한 원천을 준거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증거가 그 진술에 유리하거나 불리할 것인가를 명확히 할 수 없거나, 또는 그 진술을 믿는 사람은 어떤 증거가 나타나도 계속 그 진술을 믿을 것이기에, 과학적 지식에서 배제되는 것. 이 후자의 가능성이 중요한데, 진술에 대한 시험가능성은 그 진술의 속성의 문제이기보다는 그 진술을 믿는 사람이 그 진술에 불리하게 보이는 증거에 반응하는 방식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에 반하는 것으로 보이는 증거를 만날 때 그 믿음을 버릴 것인가 유지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일단 우리가 인정하면, 이것은 믿음이나 지식을 시험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시험이 어떤 지식주장에 대한 결정적인 긍정적 증거나 부정적 증거를 제공하는 일은 있다고 하더라도 드물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새로운 증거의 중요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경정하는 데는 판단이 작용한다. 현실에서 합리적으로 주의깊게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과 어떤 증거가 나오더라도 독단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고집하는 사람을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과학과 가짜 과학을 엄격하게 구분하고자 하는, 그리고 관찰 실험에 의한 ‘시험가능성’이라는 기준을 과학의 기초로 삼고자 하는 경험주의 과학 철학자에게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주장의 특별한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가설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증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관한 정당한 의견차이의 범위를 좁혀야 한다. 이렇게 하는 분명한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설이나 과학적 진술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을 매우 제한함으로써 그것이 제시하는 지식주장을 그 가설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증거들과 매우 긴밀하게 묶는 것이다. 가령 '모든 백조는 희다'는 진술은 불리한 증거인 희지 않은 백조를 단 한 번이라도 관찰한다면 논박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주어진 일정한 집합의 관찰을 기초로 지식 주장의 진리성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확신의 정도(확증confirmation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일련의 규칙을 찾아내는 문제라고 생각하여 수학적 확률이론을 적용하려는 정교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3] 진정한 지식주장은 관찰할 수 없는 존재들이나 실체들에 관한 지식주장을 배제한다.

 

→ 신의 의도나 자연의 목적 등에 호소하여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배제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러 과학분과들과 과학적이라고 하는 학문분과에서 연구자들은 관찰 불가능한 실체들이나 힘에 호소한다. 예컨대, 뉴턴의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은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공전, 달의 궤도, 조수의 움직임, 지표면 근처에서 자유낙하체의 가속운동 등 그밖의 여러 현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중력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물질은 미립자나 원자로 이루어진다는 이론과 유사하다. 원자 수준이나 분자 수준의 과정을 탐지하는 도구가 개발되기 한참 전에 그 이론은 과학적인 것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도구가 이미 개발된 오늘날에도, 그 도구를 사용한 관찰과 측정에 대한 해석은 이론적 가정에 의지한다. 여기에는 물질에 대한 원자론의 견해가 참이라는 가정도 포함되어 있다.

 

관찰 불가능한 실체와 힘에 호소하는 다른 견해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령 생물체는 자발성과 목적성을 보여준다는 견해이다. 생물체의 이런 독특한 특징은 생명의 힘에서 기인한다고 vitalist 생물학자들은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부 반대론자(생물체의 화학적 구조에 입각하여 설명을 찾아내고자 한 유물론자)에게 비판되었고, 근래에는 무의식, 초자아 등과 같은 관찰불가능한 실체들을 상정하는 정신분석학을 경험주의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4] 과학적 법칙은 경험의 일반적인 유형, 즉 반복적인 유형에 관한 진술이다.

 

→ 근대과학의 성과 대부분은 자연에서 보는 규칙성에 관한 일반적 진술의 축적이며, 이것은 '과학의 법칙' 또는 '자연법칙'으로 불린다.

 

멘델의 법칙은 통계적 유형이며, 멘델은 단지 이런 통계적 일반화를 만들어내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 일반화에서 이 유형이 생물학적 유전과정 자체의 성질에 대해 갖는 함의를 거슬러 추론(reasoned back)했다.

 

이러한 과학적 일반화의 사례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경험주의의 견해가 그 사례와 얼마나 잘 또는 빈약하게 부합하는가를 알아볼 수 있다. 경험주의는 관찰이나 실험으로 시험가능한 진술들만 과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런 식으로(관찰들의 단순한 요약으로) 제시하기는 힘들다. 첫째, 태양계 밖의 인력들을 일정한 것 또는 실용적 목적에서 관계없는 것으로 취급한다(태양계는 자연발생적인 폐쇄 체계로 존재한다)는 이론적 가정이 경험적 관찰과 함께 매우 복잡한 계산의 기초와 결과를 만든다. 둘째, 이 법칙의 적용범위, 그것의 진리성을 결론적으로 확인하는 데 필요한 가능한 관찰의 범위는 무한하게 크다. 사실상 그 후의 과학발전은 뉴턴 법칙의 지위를 제한된 적용범위를 갖는 근사치로 수정했다. 그렇지만 그 법칙이 보편성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그 이후 그것의 한계를 시험하고 그것을 개정하는 데서 과학의 진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과학의 법칙이, 필연적으로 범위가 한정된 관찰이나 실험의 결과 (그 법칙의 기초가 되는) 를 넘어서는 주장을 그것의 본성에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라돈 220의 반감기가 52초라는 사실을 소수의 표본에서 확인하면 과학자들은 간단하게 이것이 다른 표본들에 대해서도 참일 것이라고 상정한다.)

과학의 법칙이 보여주는 비약, 즉 한정된 수의 사례들에 대한 관찰에서 '언제나' 그런 규칙성이 일어날 것이라는 보편적 주장으로의 비약은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이것은 흄의 '귀납'의 문제problem of 'induction'로 알려져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경험주의자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비교적 약한 시험가능성의 기준에 호소하는 것이다. 즉, 축적된 관찰에 의해 어떤 진술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면 시험가능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은 귀납의 문제를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확증하는 사례들을 아무리 많이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보편법칙의 주장이 함축하는 무한한 숫자의 가능한 관찰에 비한다면 그것은 무한하게 작은 비율일 뿐이다.)

 

5] 어떤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 현상이 과학적 법칙의 사례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을 종종 과학적 설명의 ‘포괄법칙 모형’이라고 부른다.

→ 예를 들어보자(예A).

 

우화는 낮의 길이 d 더하기 기온 t의 조합에 의해 결정된다.

4월 17일, 개체군 p는 온도 t에 노출되었고 낮의 길이 d는 이미 넘어섰다.

-----------------------------------------------------------------------------------

그러므로 개체군 p는 4월 17일에 우화했다.

 

기온과 낮의 길이를 우화와 연결하는 보편법칙에 대한 진술

실제 낮의 길이와 기온을 명시하는 개별 진술

​-----------------------------------------------------------------------------------

잠자리의 우화, 즉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사건을 서술하는 진술

 

이는 '포괄법칙'과 개별조건을 조합함으로써 설명해야 할 사건을 예상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법칙은 과거의 경험의 단순한 요약을 넘어서는 주장을 한다. 법칙을 단순히 과거 관찰의 요약으로 취급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예측을 위한 근거를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적 법칙 vs. 우연적인(우발적인) 일반화.

 

후자에 해당하는 예는 '모든 백조는 희다'이다. 이때 세계의 다른 지역의 백조도 흴 것으로 기대하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반면 전자처럼 어떤 일반화를 법칙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그것이 단순한 동시 발생을 넘어서는 규칙성을 내장하고 있다거나, 예외는 불가능한 것으로 배제한다거나, 사건은 법칙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경험주의자에게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과학적 법칙이 제시하는 주장처럼 강력하고 포괄적인 주장을 관찰과 실험에 의해 결정적으로 시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포퍼는, 진술의 시험가능성을 그것이 반증에 개방되어 있는가 여부의 문제로 취급했다. 그런데, 반증의 논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실험을 수행하는 방식에 기술적 결함이 있었다거나 도구를 잘못 읽었다거나 결과를 잘못 해석했다거나 하는 가정이 제시되면, 어떤 '논박'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그것을 그 법칙을 포기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시험가능성을 검증의 문제(경험주의)로 보거나 반증의 문제(포퍼)로 보거나 간에, “어떤 특정한 증거가 기존 믿음의 포기나 유지를 정당화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피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포퍼는 과학의 뚜렷한 특징은 결국 가설과 증거 사이의 논리적 관계의 문제이기보다는 연구자가 자신의 지식주장의 반증가능성을 규범적으로 약속하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6]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그 현상이 일반법칙의 실례나 ‘사례’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안이라면, 법칙을 알아냄으로써 우리는 그러한 유형의 현상이 장차 발생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다. 설명과 예측의 논리는 동일하다. (symmetry of explanation and prediction)

 

7] 과학의 객관성은 시험가능한 사실 진술과 주관적인 가치판단의 명확한 구분에 의존한다.

 

2. 실증주의

19세기 프랑스 철학자 콩트는 일반적으로 ‘실증주의’와 ‘사회학’이라는 두 가지 용어를 만든 것으로 인정받는다. 콩트는 젊은 시절에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인 생시몽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한 형태의 지식이나 믿음체계에서 다른 형태의 그것으로의 진보적 전환이 역사를 지배한다는 역사관을 발전시켰다. 초기의 신학적 단계는 형이상학적 단계로 대체되고, 이 단계에서는 사건들을 추상적 실체들에 입각하여 설명한다. 차례로 이것은 과학적 단계로 대체되는데 여기서는 지식이 관찰과 실험에 기초를 둔다. 프랑스혁명의 후폭풍 속에서 저술활동을 하면서 그리고 정상성(normality)과 사회적 안정의 복구를 열망하면서, 콩트는 계속되는 갈등과 무질서가 인권 등과 같은 낡은 형이상학적 원리의 존속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한 개념과 원리는 사회의 옛 질서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부정적(네거티브) 작업엔 효과적이나, 혁명이후 시기에는 사회적 조화를 재건하기 위한 포지티브(실증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실증적 지식은 과학이었다. 하지만 콩트가 문제라고 생각한 것은 지식의 각 분야들이 세 단계를 거치지만 모두가 동시에 과학적 성숙에 도달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은 모두 과학적 단계에 도달했지만, 인간의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삶에 대한 해명은 여전히 과학 이전, 즉 형이상학적 단계에서 꾸물거리고 있다고 콩트는 주장했다. 콩트는 과학적 학문분과로서 ‘사회물리학’ ‘사회학’을 확립하고자 했다. 콩트이래 ‘실증주의’라는 용어는 대규모 자료묶음, 양적 측정, 통계적 분석 방법을 사용하는 사회과학 접근을 규정하는 데 (흔히 경멸적인 내포와 함께) 사용되었다.

 

우리는 실증주의를 더 엄밀하고 협소한 의미로 다음 4가지 특성 공유로 정의할 것이다.

 

1] 자연과학의 특징에 대한 경험주의의 해석을 받아들인다.

2] 과학을 최고 형태의, 심지어 유일하게 진정한 형태의 지식으로 평가한다(이건 대부분 근대 경험주의자의 해석이기에 1에 포함된다).

 

→ 비교적 최근까지도 과학에 대한 경험주의적 해석이 지배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고 다른 형태의 믿음체계보다 과학이 우월하다는 것을 경험주의가 분명하게 정당화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증주의자가 경험주의의 과학관을 받아들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과학적 방법을 인간과학에 확장한다는 실증주의의 주장은 논란거리임이 분명하다(★ 해석적 접근 파트 참고).

 

 

3] 경험주의자가 제시하는 것과 같은 과학적 방법을 인간의 정신적/사회적 삶에 대한 연구에도 확장할 수 있고 확장해야 하며 그것으로 이들 학문분과들을 사회<과학>으로 확립할 수 있다.

 

→ 뒤르켐은 자살에 관한 저서와 그의 방법론의 고전인 <사회학 방법의 규칙>에서 사회가 그 자체로 하나의 실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련의 논증을 사용한다. ‘사회적 사실들’ 즉 이 실재를 구성하는 사실들은 각각의 개인들에 독립하여 존재하며 그가 ‘구속력’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에게 행사한다. 가령 각 개인들은 사회 – 그것의 제도들과 관행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 각각은 우리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면 서로 의사소통해야 하며 그러므로 필요한 숙련skills을 익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 환경’ 또는 ‘주위’의 기존 규칙들을 따르도록 강요된다.  (…) 뒤르켐은 이것으로 특정 종류의 사실, 즉 개인들과 그들의 정신상태 또는 생물학적 특징에 관한 사실과 구별되는 사회적 사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통계적 유형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가장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는 이런 부류의 사실은 그것을 연구주제로 삼는 구별되는 과학, 즉 사회학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4] 일단 믿을 만한 사회과학적 지식을 확립하면, 그것을 적용하여 사회 속의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를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 있다. 사회개량을 위한 기획에서 사회과학의 역할에 대한 이런 접근은 종종 ‘사회공학’이라고 부른다.

 

→ 경험주의의 '포괄법칙' 모형이 보여주는 과학적 설명의 논리적 형식은 그러한 지식과 정책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가를 알려준다.

 

이혼율이 높다면, 아동범죄율이 높을 것이다.

이혼율이 높다.

---------------------------------------------------------------

그러므로 아동범죄율이 높다.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가(과연 이혼율인가?)에 대한 비판들 중 어느 것도 '사회공학'이라는 실증주의적 관념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할 순 없는데, 더 정확한 자료 수집과 더 정교한 분석 방법등을 사용하여 다른 가능성 각각을 다룰 수 있끼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비판노선도 있으며, 이것을 다음 장에서 다루겠다.

 

3장/ 경험주의와 실증주의의 몇 가지 문제

 

사회과학에서의 실증주의 : 인간의 사회적 삶에 관한 연구에 자연과학에서 성공을 거둬온 설명의 방법과 형태를 확장하여 사용함으로써 사회 연구를 과학적인 기초 위에 놓고자 하는 시도. 이렇게 하면서 실증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특정 형태의 경험주의 지식이론에 의지했다.

 

과학적 방법을 인간의 사회적 삶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에 관한 비판노선을 취하는 반-실증주의자들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근본적인 차이들을 주장한다.▼

1] 인간은 law-governed(자연과학), 인간은 rule-governed(사회과학)

2] 가치판단 배제하는 방법으로 일반법칙을 발견(자연과학), 가치-유관적value-relevant 설명(사회과학)

3] 자기 자신이 이미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는 연구주제를 체계적으로 연구(사회과학)

우리는 위의 이러한 논증들을 해석적 접근 파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여기서는, 이쪽 논증이 아니라, 과학의 방법을 사회연구에 확대하려 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에 대한 견해'를 문제시하기로 한다. 자연과학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대안적인 견해에 의지하여 사회를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는데, 이때 우리가 대안적인 과학모형을 염두에 둔다면 자연과학과 사회연구 사이의 차이점과 유사점에 대한 새로운 쟁점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1. 경험주의의 몇 가지 문제

 

1] 개념과 경험

 

여러 학문분과에서 모든 지식을 경험에서 얻으며 본유관념은 없다고 주장하는 경험주의에 의문을 제기했다. 먼저, 현대의 과학적 언어학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촘스키는 우리가 언어 습득을 경험주의의 관점에서 설명하기에는 어린이의 언어 경험이 너무도 제한적이고 파편적이라고 주장했다.잘 형성된 문장을 무한하게 많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능력은 생득적인 언어 습득 성향 뿐 아니라 모든 언어에 공통적인 '심층 문법'에 대한 생득적 지식도 전제한다.

 

지식습득이 감각 경험의 흐름 속에 보이는 규칙성의 유형을 인식하는 문제에 그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다른 증거 원천들이 있다. 가령 자기 처를 모자로 혼동하는 남성이라는 삭스가 만난 불행한 환자의 문제는 시력이 아니라 그가 확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시각 인상의 흐름을 해독하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었다. 이처럼, 사람들을 식별하고, 얼굴을 알아보고, 풍경을 해석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잘 작동하는 감각기관을 보유하고 있는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개념적인 정리와 해석이라는 능동적 과정 ㅡ이것에 대해 우리가 대체로 깨닫지 못하는ㅡ을 포함한다.

 

모든 경험은 어느 정도는 세계에 대해 우리가 그 이전에 획득한 개념 지도에 의해 형성되며, 이것은 경험에 대한 '개별' 진술 또는 사실 진술이 경험을 개념적으로 질서 짓는 능력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본적인 능력(직관의 형식들, 오성의 범주들 처럼)을 전제해야 한다는 이러한 접근은 칸트의 저작을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2] 과학의 법칙, 시험가능성과 해석

 

우리는 과학적 진술은 경험적으로 시험가능해야 한다는 경험주의의 요구에 담긴 몇 가지 난점들을 탐구했다. 만약 이런 요구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과학자는 훨씬 더 제한적인 성질을 갖는 가설들을 제출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과학의 법칙은 관찰의 단순한 요약으로, 즉 경험적 일반화로 취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면 과학적 설명은 그것의 설명력을 상실할 것이고, 과학적 예측은 불가능할 것이며, 다른 연구에 대한 중요한 자극제가 되지 못할 것이다. 과학적 진술의 이런 특징은, 과학적 법칙이 기존의 증거가 엄격하게 함축하는 것을 넘어서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해석에 의존한다. 이런 특징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시험가능성에 대한 훨씬 느슨한 기준, 즉 새로운 관찰은 단지 가설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것일 뿐 가설을 결론적으로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기준을 채택해야 한다.

 

그런데 시험가능성에 관해서는, 경험과 해석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과 관련된 또다른 어려움이 있다. 일부의 증거에 대해 우리의 기존 믿음을 확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기각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 결정은 늘 주관적 판단을 포함한다. 따라서 상이한 관찰자들은, 혹은 상이한 시점에서 동일한 관찰자들은 동일한 “토끼-오리 그림”에 대해 근본적으로 상이한 방식의 해석을 한다. 이처럼 동일한 증거에 대한 상이한 해석의 가능성은 과학의 실천에서 경험주의의 설명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겉보기에 가설과 갈등하는 증거를, 가설을 재해석하거나 그 증거를 재해석함으로써 선호하는 가설과 늘 부합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협약주의(conventionalism)'에서 이것이 논의된다.

 

둘 이상의 이론적 시각 사이에 체계적인 해석의 불일치가 있는 상황은 언제나 서로 엇갈리는 논쟁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결정적인 실험이나 결정적인 시험의 사례로 구실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경쟁하는 이론들이 서로에 대해 이런 종류의 관계를 가질 때 '공약불가능하다(incommensurable)'고 말한다.

 

3] 과학에서 이론적 실체

 

멘델은 완두콩의 다음 세대의 특징 속에서 관찰가능한 유형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생식세포 속에서 전달된 어떤 알려지지 않은 요인에 입각해서 설명했다. 이 요인을 유전자로 명명했는데, 멘델 이후의 연구는 그것을 복합적인 유기분자 DNA의 배열로 판별했다.

 

경험주의자가 과학의 이러한 특징을 한 가지 방식은, 그런 실체에 관한 진술을 유용한 허구, 즉 그것의 형식적(수학적) 내용에 힘입어 과학적 예측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허구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을 도구주의(instrumentalism )라 부른다.

 

4] 과학의 설명에서 이론의 역할

 

그렇지만 이론적 실체라는 쟁점에 대한 경험주의의 상당히 인색한 이런 접근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고 근대과학이 주장하는 새로운 부류의 실체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과 어긋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에는 과학의 진보의 내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거시 및 미시 구조 속에서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복합체를 점진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A)

우화는 낮의 길이 d 더하기 기온 t의 조합에 의해 결정된다.

4월 17일, 개체군 p는 온도 t에 노출되었고 낮의 길이 d는 이미 넘어섰다.

----------------------------------------------------------------------------------

그러므로 개체군 p는 4월 17일에 우화했다.

 

과학적 설명에서 이론의 성질과 역할에 대해 우리는 어떤 견해를 취할 것인가 ? 예A의 포괄법칙 모형은 관찰가능한 현상들에 대한 유형 수준에서의 단순한 설명의 논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모형이 과학에서 설명이 담당할 수 있는 역할 모두를 포괄하지는 않는다. 적절한 과학적 작업은 (잠자리 발생과 기온과 낮의 길이를 연결하는) 관찰적 일반화를 확보하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과학적 이론을 필요로 할 때 시작된다. 일단, 이러한 관찰적 일반화가 확립되면 적어도 세 가지 묶음의 그다음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1째, 기능적 설명 ㅡ 개체군의 생존과 번식의 방식이, 문제의 행위들이 더 넓은 전체 속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만들어낸다고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

2째, 잠자리의 이러한 행태 유형 자체가 생기고 개체군 속에서 확립되는 것에 대한 ‘역사적 서사’와 관련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생물학자는 이 묶음의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일종의 다윈적 자연선택 이론에 의존할 것이다.

3째, 내적 구조 및 과정-기온과 낮의 길이 등과 같은 외부의 자극이 잠자리 애벌레의 형태 변화에 연결되는-과 관련된다. 이것은 관련된 잠자리 종들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해부학 및 생리학적 탐구를 수반한다. 차례로 이것은 성장 및 발달에 관련된 생리학적 과정(호르몬 분비, 세포분열 분화)과 그 과정 조절 발생 기제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한 또다른 질문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애벌레 발달의 발생적 측면을, 관련된 개체군 수준의 적응의 진화에 대한 다윈적 서사의 해명에, 그리고 차례로 기능적 설명에 되돌려 연결할 수도 있다.

 

5] 이론 고안에서의 추론과 창의력

 

과학자는 이미 확보한 관찰적 일반화를 심사숙고하면서 생기는 질문에 대한 타당한 답으로 이론을 고안한다. 그러한 답을 고안하는 과정은 과학적 상상력과 창의력을 필요로 한다. 경험주의 과학철학자는 다루지 않는 이론의 <고안>과 관련된 논리, 더 광범위하게는 추론의 종류에 관해 분명히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 추론 : 이론적 설명을 위한 타당한 후보로 취급할 수 있는 이론 고안의 범위에는 제한이 있다. 특히 제안된 설명은, '만약' 참이라면 관찰된 유형을 '해명해줄' 어떤 것, 그리고 배경적 지식을 고려할 때 '충분히' 참'일 수 있는' 어떤 것을 언급해야 한다. 철학자 핸슨은 과학에서의 이런 종류의 창의적 작업의 논리를 '전제들에 대한 탐색에서의 결론'이라고 지적했으며, 이런 종류의 추론을 (퍼스를 따라) 귀납과 연역과는 구별되는 형태로, '역행추론(retroduction)'이라고 부른다.

 

ⓑ 창의력 : 다윈의 진화론은 '선택적 교배'에 의해 가축과 식물에 변화를 일으키는 품종개량가의 활동과 야생의 개체군 속의 변종들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선택'에서 환경조건의 작용 사이의 유추를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과학적 이론의 구성에서 비유와 유추를 사용함은 과학과 과학이 속한 더 광범위한 문화적 맥락 사이의 중요한 연결점이다. 이 연결점은, 과학적 지식이 실제로는 인지되지 않은 가치 입장과 문화적으로 특수한 가정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사회학자들, '관점' 인식론(standpoint epistemologies) 주장자들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이것은 과학이 오로지 사실 증거에 형식논리적 규칙을 적용한 결과로서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유의할 것은, 과학에서 비유를 사용함이 반드시 과학을 문화적 맥락으로 '환원하는 것'을 정당화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의 유추 추론의 전개에는 다른 유추 추론의 전개와 상이한 제약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Lopez, 1999)

 

6] 이론적 설명의 유형

 

이것은 앞서 1째~3째로 나눈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구성된 이론의 유형이다. 그중 우리는 세번째 종류의 이론적 설명을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세번째 종류의 이론적 설명은 관찰가능한 현상의 유형(완두콩의 이어지는 세대의 특징이나, 낮의 길이와 기온과 잠자리의 우화 사이의 관계 등)에서 시작하여 관찰들의 기저에 있는 미시구조에 대한 분석을 통한 관련 인과관계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다. 여기서의 기본착상은, 어떤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 사물을 해체하고 그 구성요소들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명을 위해 더 깊게 탐색하면 할수록 우리는 조각들을 그것의 구성요소들로 분할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물론 어떤 지점에서는 이것이 부분들에 관한 가설을 만드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며, 우리는 과학에서 “관찰 불가능한 실체들”에 호소하는 것의 정당성이라는 오래된 문제로 되돌아갈 것이다.

 

과학적 설명에서 이론이 수행하는 이런 종류의 역할을 경험주의 과학철학은 ‘가설연역’ 모형(hypothetico-deduction model)으로 표현한다. 이 모형에 따르면, 과학자는 관찰가능한, 거시수준의 유형을 해명하기 위하여 이론적 실체들이라는 '미시구조'와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고안한다. 미시수준의 실체들과 과정들을 서술하는 진술은 이론의 '가설적' 측면이다. 일단 이론적 가설을 만들어냈따면, 이론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을 서술하는 진술을 이론적 진술에서 연역해낼 수 있고, 이것이 이론의 '연역적' 측면이다. 이론이 참이라면,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을 서술하는 진술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일반적으로, 이론적 진술과 그 이론이 설명하고자 하는 관찰들에 대한 서술 사이의 관계는 과학철학에서 논쟁적인 영역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상이한 <분석수준들> 사이의 관계이며, 그러므로 각각의 수준에 초점을 맞추는 상이한 학문분과의 전문성의 지위도 문제가 된다.

 

앞서본 것처럼, 경험주의자들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에서 멀리 벗어나는 과학적 이론화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계가 본질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종류의 사물과 유형으로 구성된다고 간주하는 상당히 평면적인 존재론을 제시한다.

 

여러 종류의 ‘실재론자’들은 이러한 사유 경향에 반대하는데, 그들은 과학이 이룬 성과의 하나는 일상적인 관찰로는 접근할 수 없는 실체들과 과정들의 전체적인 범주들을 발견한 것이라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비판적 실재론 파트)에서 논의할 것이지만, 여기서는 두 종류의 실재론자를 구별할 만하다.

 

첫째 종류의 실재론자 ㅡ 과학적 설명이 늘 거시적인 것에서 미시적인 것으로 움직인다고 간주한다. 사물을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에 입각해서 설명하며, 부분들은 <그것들의> 부분들에 입각해서 설명한다. 이 입장은 가장 근본적인 미립자와 그것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에 도달하게 되는 종착점이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 원칙적으로 복잡성의 수준이 높은 조직의 움직임은 우주를 구성하는 이러한 기초적인 구성요소에 입각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종종 ‘물리주의’라고 부르는 종류의 과학적 형이상학이며, ‘환원주의’의 한 가지 사례이다.

 

둘째 종류의 실재론자 – 이 견해에 따르면, 각각의 수준은 그 자체의 독자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의 ‘위’ 또는 ‘아래’ 수준에 관한 이론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독립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상이한 과학들의 상대적 자율성을 옹호하는 이런 주장의 근거 중 하나는, 창발적 속성이나 창발적 힘 (높은 수준의 조직체가 보유하는, 그러나 낮은 수준에서 연역해낼 수는 없는) 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각 수준의 특수성을 고려하는, '반환원주의적' 실재론을 주장하는 데 사용된다.

 

7] 설명과 예측

 

경험주의 과학관은 설명과 예측이 대칭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이론의 가설연역모형은 이 관계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 과학관이 이 모형을 모든 종류의 과학적 설명에 적용하는가 ? 가령, 앞에서 보았듯, 잠자리 개체군의 동시 우화 현상은 관련된 종의 진화 과정에서 왜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일어났는가에 관한 역사적-서술적 종류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경우, 하나의 적합한 이론은 일종의 다윈식의 진화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윈의 가설을 이론이라고 인정하지만, 그것이 어떤 이론적 실체들을 가설화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그것은 특정 종의 형성이나 그것의 특징이 어떠할 것인가에 관한 특정한 예측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다윈의 이론을 사용하여 특정한 새로운 종의 형성을 예측할 수 없는 이유는, 첫째, 자연이 오로지 개체군 속에 우연히 존재하게 된 이용가능한 변종들 가운데서 '선택'한다는 것으로서, 그런 변종들을 발생시키는 유전적 돌연변이와 재조합의 과정은 이론에서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세세한 환경의 압력에 관해서, 특정 시점에 특정 개체군에 작용하고 있을 적응력에 관해서 이론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윈 진화론의 경우에서는, 개별 사례의 설명에 이론을 적용하는 것은 단순히 존재하고 있는 ‘초기조건’의 서술에 법칙 진술을 결합하고 설명해야 할 현상을 연역하는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사실상 이론이 하는 일은, 각각의 사례에서 적절한 역사적 서사를 향하도록 실질적인 연구를 안내하는 약간의 발견적 지시물을 제공하는 것이 전부이다.

 

8] 과학에서 가치

 

경험주의자는 가치판단을, 세계에서 즐거움을 더 얻고 고통을 줄이려는 행위의 결과에 관한 위장된 사실 진술로 취급하거나, 아니면 느낌이나 선호의 단순한 주관적 표현으로 취급할 수 있다. 가치판단에 대한 '주관주의적' 견해는 20세기 경험주의자들 사이에 가장 널리 퍼진 것이며, 경험주의자들은 과학에서 가치판단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관찰과 실험과 형식적 추론을 사용하여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엄밀한 시도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렇지만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과학은 필연적으로 실험과 관찰과 형식논리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모든 관찰은 개념적 해석이라는 능동적 과정을 포함한다. 이론구성은 상상력을 사용하는 창의적 활동이다. 과학에서 비유의 역할은 훨씬 더 넓은 문화에서 착상을 이끌어내는 것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과학이 어떻게 가치관여를 포함하지 않을 수 있는가 ?

 

이것에 대한 경험주의자의 한 가지 반응은 이론을 '고안하는' 창의적 활동과 이론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경험적으로 '시험하는' 과정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론 시험과정이 개별 과학자의 가치 선호에서 생기는 편견을 억제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논리학의 형식적 규칙과 방법론적 엄밀함의 지배를 받는다. 경험주의적 견해의 핵심적 직관은 과학은 우리가 '좋아할' 세계가 어떠할 것인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과학은 오로지 과학자가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증거를 보면서 자신이 중시하는 가설을 기꺼이 포기해야만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과 가치의 경험주의적 구분에 대해 세 종류의 비판을 구분할 수 있으며, 그 중 마지막 비판노선은 경험주의적 핵심적 직관은 유지하면서 그러한 것(세계가 무엇인지 분명해지려면 자신의 편견을 버려야 한다든지) 역시 가치 관여를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즉, 과학에는 본래 불가결하게 가치가 포함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부 여성주의적 접근에서는 이것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연구 대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생산을 목표로 하는 실천으로 간주되는 과학에 필수적이며 과학을 지원하는 규범 및 가치와, 이런 목표에 방해가 되거나 부적합한 가치는 여전히 구분할 수 있다는 문제가 남는다.

 

2. 실증주의의 그 밖의 문제들

 

1] 과학의 우월성

 

과학과 형이상학과 신학이라는 사유 양식은 대안으로서 경쟁 가능한 기능적 등가물이라는 (전제)에 대해 두 종류의 반대가 가능하다. 첫째, 신학과 형이상학은 세계의 성질에 대한 해명을 제공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를 위한 명령적 규범도 도출하고자 시도한다. 그것들은 그것의 신봉자들에게 특정한 행위 규칙을 지키고, 다른 것들이 아니라 특정 종류의 제도적 장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험주의적 과학관이 주장하듯 과학에서 가치를 배제하면 과학은 '만약' 이런저런 정책을 실행한다면 결과가 '어떠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협소한 과제만을 제한적으로 다룰 것이다. 따라서 (가치-배제된) 과학은 신학과 형이상학이 수행하는 기능을 대체할 수 없다.

 

둘째, knowledge that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know-how 혹은 tacit knowledge가 있고, 경험주의자들은 사회적 삶이 진술이나 명제 형태(전자)로 변형할 수 없는 지식(후자)에 상당히 의존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사회적 삶에서 후자는 핵심적으로 중요하고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 사회에 대한 자연과학 ?

 

자연의 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의 (그렇지만 반드시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는) 사회에 대한 과학적 연구 같은 것이 있거나 또는 있을 수 있다는 견해는 흔히 자연주의(naturalism)로 불린다. 베버, 윈치, 하버마스(뒤에서 '해석적 접근'으로 다루며, 본 요약에선 윈치를 중심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는 반-자연주의자이며, 콩트 같은 실증주의자들은 자연주의자이다. 그렇지만 경험주의의 과학관에 대한 비판은, 그리고 이제 우리가 경험주의에 대한 잘 다듬어진 대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실증주의적이지 않은 형태의 자연주의>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우리는 나중에 여성주의적 접근(본 요약에서 다루지 않음)과 비판적 실재론을 다루면서, 과학에 대한 이 두 비경험주의적인 이해가 사회과학의 실천에 갖는 함의에 대해 자세히 고찰할 것이다.

 

4장/ 과학, 자연, 사회 ㅡ경험주의에 대한 몇 가지 대안들

 

1960년대 초반까지 영어권 나라들에서는 여러 형태의 경험주의가, 포퍼의 '반증주의' 접근과 함께 자연과학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지배했다. 이들 두 가지 전통은 과학이 다른 형태의 지식이나 믿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견해를 내세웠다.이들은 경험적 증거의 수집과 분석을 지배하는 규칙, 오직 시험가능한 (또는 반증가능한) 진술만을 과학적 지식의 집적체에 허용하는 규칙,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는 규칙 등이 과학적 지식주장을 특히 신뢰할 만한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과학의 누적적인 실행 전체가 자연세계에 대한 참인 해명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접근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의 합리성과 객관성을 낙관적으로 옹호하는 견해를 비판하는 대안들이 발전했으며, 그런 대안들이 제시되었다는 사실은 과학에 대한 정통 경험주의적 견해의 장악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이 장에서는 그러한 과학에 대한 비경험주의적 해설들을 검토할 것이며, 대안적 견해 중 하나인 비판적 실재론은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려 한다.

 

1] 베버, 머튼, 과학사회학 (생략)

 

2] 역사적 인식론(historical epistemology)과 구조적 맑스주의

 

경험주의에서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맥락과 무관하게 과학/비과학을 구분하는 어떤 추상적 기준을 확립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과학이 점점 더 많은 사실적 지식을 수집하고 점점 더 진리에 접근하는 점에서 유일하게 누적적이며 진보적이라고 주장한 것을 아래 논자들은 비판할 수 있다.

 

프랑스의 전통은, 코이레, 바슐라르, 캉길렘 등이 대표자인데, 과학의 역사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견해의 기초로 삼았다. 이들은 과학의 맥락적 조건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과정에 더 민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전통은 비과학적 믿음 유형과 과학을 구별하는 강한 입장은 유지하면서, 역사적 연구를 통해, 과학의 분과들이, 과학 이전의 오류 및 환상의 그물(network)과 싸움을 통하여 형성된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상식이나 전 과학적 사유는 단순한 무지나 지식 결여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지식에 저항하는 완고하고 강력한 근원이라는 것이다. 과학이 확립된 후에도 이러한 오류 투성이(tissue of errors)는 계속 존재하며, '인식론적 장애'의 형태로 새로운 과학의 잠정적인 성과를 침공한다고 위협했다.

 

이들에 의하면, 과학적 관념들은 하나씩 고안되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문제틀problematics 속에서 공존한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과학을 형성하는 개념들의 그물이 있기 때문에 과학자는 일련의 질문들을 제기하고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공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동전의 이면에는, 또한 각각의 개념들의 그물이, 즉 각각의 문제틀이 다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배제한다>. 이것은 과학을 어느 정도는 ‘완전한’ 지식으로 보는 모든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며, 과학적 지식과 특정한 일련의 이론적 질문 사이의 관계를 예시한다. 질문이 다르다면 우리는 다른 과학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문제틀이라는 개념의 또 다른 귀결은, 과학의 변동이 필연적으로 단속적이고 비누적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과학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상호연결된 허위의 그물을 뒤집어야 한다. 이 순간을 그들은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break)이라 불렀고, 알튀세르와 푸코가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이론적 실천은 사유(thought)-객체의 형태로 지식을 생산하는데, 과학의 경우 이것은 실재(real)-객체와 상응한다(이것은 이것에 대한 지식의 생산과정과 무관하게 그리고 생산과정의 외부에 존재한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과학서 이러한 상응이 실제로 지속된다는 것을 어떻게 보증할 것인가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없다면,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결정적인 구별은 유지할 수 없다. 

 

탈알튀세르적 지식 및 문화사회학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결과로 진리와 허위의 인식론적 문제나 사람들의 믿음에서 독립되어 있는 실재세계에 대한 준거에서 추상하여 언어와 문화과정에 대한 분석으로 이동했다 (ex. 푸코, 라클라우와 무페). 그렇지만 알튀의 기획과 계속 씨름하는, 즉 지식생산의 사회적 실천으로서 과학이라는 모형과 지식에 대해 독립적인 것에 <관한> 인식으로서 지식이라는 실재론적 견해를 결합하고자 하는 논자도 있다.

 

1970년 초에 처음 발전한 비판적 실재론은 이것을 시도했으며, 알튀세르가 강력하게 제안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아내고자 했다. 비판적 실재론 입장의 중심은, 일련의 과학적 실천에 관하여 초월적 논증(transcendental arguments)을 사용하는 것이다. 초월적 논증은 실제의 어떤 것(예컨대, 과학적 실험)에 대한 논란이나 논쟁의 소지가 없는 서술을 받아들여 전제로 삼고, 그 다음 ‘이것이 가능하려면 무엇이 참이어야 하는가’의 질문을 제기하는 논증이다.  예컨대, 누구도 논란 삼을 수 없는 과학적 실험이 가능하려면 세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

 

로이 바스카는 과학적 실험을 사례로, 지식에 대해 외부적인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가 특정한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그리고 인간 행위자가 그 세계에 개입하고 개입의 결과를 찾아낼 수 있어야만 실험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러한 논증은 과학을 (1) 역사적으로 변화하고 사회적 위치를 차지한 인간의 실천으로 보는 견해와 (2) 특징적으로, 그것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활동하는 객체들(과 관계와 과정 등)에 관한 지식의 생산을 목적으로 삼는 사회적 실천으로 파악하는 인식을 결합한 것이다. 

 

3] 쿤에서 스트롱 프로그램까지

 

ⓐ 쿤 (구체적으로는 따로 다룰 것이므로 생략) : 철학적 논쟁은 쿤이 주목한 과학 변동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과정을 받아들이면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에 대한 점점 더 적합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과학의 합리성을 믿는 것이 가능한가 여부를 논의의 핵심으로 삼았다.

 

ⓑ 파이어아벤트 : 그렇지만 일부 과학철학자들은, 상이한 패러다임 사이의 급진적 공약불가능성 및 패러다임 선택을 위한 이론중립적인 시험의 결여라는 쿤의 초기 명제에서 훨씬 더 급진적인 상대주의적 결론으로 나아갔다. 이들 가운데 파이어아벤트는 가장 대담하고 유명하다. 과학적 사유에서 핵심적인 전진으로 인정받게 된 것들은 사실상 기존 과학적 방법에 대한 고의적인 파괴(breaches)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과학이 규칙의 파괴에 의해 진보한다면, 과학의 적절한 구호는 'anything goes'이어야 한다. 파이어아벤트는 과학과 비과학을 가르는 방법론적 원칙은 없으며,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다른 형태의 이해들보다 과학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할 근거도 없다고 주장했다.

 

ⓒ 라카토스 : 그렇지만 일부 논자들은 역사적 분석을 사용하여 과학의 합리성을 옹호한다(Lakatos, 1970). 라카토스의 용어 '연구 기획'은 쿤의 '패러다임' 개념과 유사한 것이다. 패러다임처럼, 과학적인 연구 기획은 경험적 연구에 규칙(발견법heuristics)과 주제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관련 분야에서 연구자들을 충원하고 그들의 활동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정상과학'). 연구 기획 발전의 '초기부터' 과학자들은 분명히 반대되는 증거에 부딪히더라도 그들의 기본적인 명제나 가설(기획의 '핵심core')을 계속 정당하게 사수할 수 있다. 그들은 임시 가설들(ad hoc hypotheses)이라는 '보호대(periphery)'로 핵심을 둘러쌈으로써 이 핵심을 반증으로부터 정당하게 보호할 수 있다. 이것은 미발달한 연구 기획의 지지자들이 그 기획의 설명적 잠재력을 실제로 보여줄 수 있는 정도로 그 기획을 발전시킬 기회를 갖기 위해 필요하다. 장기적으로, 그 기획은 가망 없는 예측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확증하는 정도까지 성공하는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 연구 기획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도 이것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 기획은 퇴보적인 것(degenerating)이며, 성공적인 기획으로의 전환은 진보적인 것(progressive)이다.

 

ⓓ 스트롱 프로그램 : 이 접근에 대한 고전적인 진술에서 David Bloor는 그것을 네 가지 방침에 입각하여 정의한다. 인과적 설명을 추구하고, '참된' 믿음과 '허위의' 믿음을 공평하게 다루며, 가능한 한 '참된' 믿음과 '허위의' 믿음을 동일한 사회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며(대칭성 원칙 !), 이런 방침을 지식사회학 자체가 제공하는 설명들에도 적용하는 것(성찰성 원칙).

(이것에 관해 참고할 만 한 것은 김경만의 『과학지식과 사회이론』이다.)

 

4] 성찰적 전환 : 자연과 사회의 '구성성'

 

1980년대 초, 과학사회학의 '스트롱 프로그램' 및 그와 연관된 접근의 신봉자들에게는 새로운 방향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근본적인 비판노선은 스트롱 프로그램의 체계적 회의주의가 가지고 있는 비일관성, 즉 자연과학자들이 제시하는 실재와 관련한 주장은 체계적으로 의심하면서 과학의 논쟁을 설명할 때 도입하는 사회학적 변수들에 관해서는 '실재적인 것'이며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비일관성을 지적했다. 스트롱 프로그램은 회의주의를 성찰적으로(reflexively) 확장하여 사회학자들 자신의 설명적 개념과 방법에도 적용해야만 일관성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이제 자연을 사회문화적 구성물로 간주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 설명변수로 이용해온 개인적이거나 집합적 행위자들과, 그들의 이해관심과 권력관계와 동맹 등을 ‘문제화’하게 되었다 (★여기에 관해서는 길버트, 멀케이, 울가, 라투르에 관한 내 다른 요약본을 참고하라).

 

 

※ 참고 문헌

Chalmers, What is this thing called science ?, 1999 ㅡ 과학철학에 대한 뛰어난 현대의 소개

Lopez, The Discursive Exigencies of Enunciating the concept of Social Structure, 1999

Lakatos, Falsification and the Methodology of Scientific Research Programmes, 1970

 

위로가기

scientific reduction과 관련성 찾을 필요

(보편법칙과 통계적 일반화 : 과학 vs 사회과학)

개념정리 : empiricism과 positivism 필요

알튀세르와 과학에 대한 조사 필요

  • Facebook Clean
  • Twitter Clean
  • Instagram Clean

© 2023 by CHEFFY. Proudly created with Wix.com

업데이트 구독하기

축하합니다! 사이트가 구독됩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