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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피히테의 이론적 지식학에 관련한 독일관념론 수업의 딕테이다.)

 

  1. 독일관념론이 갖고 있는 문제는 : 칸트의 체계가 칸트의 후계자들이 생각하기에 실천이성과 이론이성 사이의 통합적 고리가 없다는 생각과, 만약 통합적 고리가 있다면 칸트철학 전체를 묶어낼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원리가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논쟁을 시작하다가, 독일쪽에서 나왔던 표현주의와 맞물리면서 독일관념론이 갖고 있는 독특한 사유방식이 출현.

  2. 피히테는 칸트에 많은 부분 충실. 표현주의 영향이(또한 낭만주의 영향이) 가장 적은 철학자. 이 강의에서는 칸트와 피히테의 연결고리를 설명할 것.

  3. 칸트체계가 갖고 있는 부조화 : 이론이성과 실천이성 사이의 연결고리가 없다. 이론이성은 자연에 관련된 것. 실천이성은 인간의 도덕에 관련된 것. 자연은 인과필연성에 의해 지배받고, 인간의 도덕은 자유의 영역. 필연적 세계와 자유의 세계 사이의 연결고리를 칸트 철학체계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

  4. 칸트의 후계자들은 이론이성보다 실천이성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 피히테는 그 부분을 철학적 체계로 만들어서 제시. 이렇게 우위에 두는 전제가 무엇인가?

 

  1. 표상 - '앞에 서 있다' - 무언가가 의식 앞에 나타나 있음.

  2. 이것은 이론이성의 영역이다. 이론이성은 우리 외부에 있는 것이 내 의식에 그대로 비추어지고, 그 비추어진 세계를 내가 온전히 설명해낸다는 것을 전제로 함. 내 정신이 어떤 경우에도 바깥에 있는 것에 작용을 미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마음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조건을 극복 불가능. 칸트는 이 필연적인 세계를, 그 세계가 갖고 잇는 조건 그대로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이론이성을 말했던 것. 피히테가 보기엔, 자연적 대상 조차도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 자연물도 인간이 일차적으론 표상적으로 인식하더라도 자연물을 인간이 바꾸어낼 수 있다고 봄. 인간이 무엇을 인식할 때 자연이 주는대로 인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봄. 표상능력보다는 인간이 갖고 있는 의욕, 욕구의 능력이 더 큰 능력이라고 봄. 욕구의 능력 때문에 인식되어지는 대상을 인간의 욕구에 비추어서 바꾸어내게 됨.

  3.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바꾼다. 이 도구 역시 불편하면 끊임없이 바꾼다. 인식에 주어지는 대상 조차도 인간의 욕구에 의해 끊임없이 달라질 수 있다.

  4. *객관적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실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가 그것을 바깥에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그 사실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표현. 어떤 대상을 의욕한다, 어떤 대상을 본다, 라고 말할 때 그 사실을 포착해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꾸어내려고 하는 인간의식의 활동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될까? → 사행.

  5. Tat / handlung.

  6. 사실 / 행위.

  7. 사 (바깥에 있는 자연물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 행

  8. (주어진 사실은 인간의 의식활동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 인식론의 무지 – 인간의식과 관련맺고 있는 tat를 바깥의 무엇인가와 연결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발발)

  9. →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실은 인간이 욕구나 의욕을 가지고 만난다.

  10. → 자연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욕망하는 활동을 통해서 그 사실을 본다.

  11. → 인간의 욕망에 의해 변형되어지거나 변형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연물은 주어진다.

 

  1. '행'을 인식하는 것은 직관을 통해서 : 지적 직관.

  2. 지적 직관은 칸트가 적극 피하려고 했던 개념. 의식활동하는 그 대상을 우리가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고, 의식활동 그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며, 후자는 직관을 통해서 파악되는 것. 영국경험론을 통과하면서 모든 직관은 경험적이라고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직관' 앞에 '지적'이란 말을 붙이게 된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어진다. → 그 대상은 감각경험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직관이 아니고, 인간마음의 활동을 인간이 직접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직관'으로 표현. 인간의 의식활동 자체는 인간이 사실을 확인하듯 확인할 수가 없다 → '직관'.

  3. '직관'은 행위자체에 대한 인식. 인간의식의 가장 본질적 부분을 '사행'이라 말할 때, 데카르트 – 인간의 의식은 어떤 경우에도 독자적으로 나타날 수 없다. 인간 의식은 자기자신이 드러나기 위해선 어떤 대상을 빌려와야 한다. 어떤 대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도 그 대상을 욕구하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양자의 관계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등장, 이 양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관계'가 필요. 투박한 형태로 '변증법'의 개념이 피히테에서 정리가 된다.

 

  1. 표상 활동 근저에 인간의 의식활동이 있다. → 사행 제시.

  2. 사행은 자기가 관계맺는 대상과 관련해서 그 이름을 갖는다. 지각한다, 판단한다, 추리한다....만 했기 때문에 놓칠 수 있는데, 그 근저에 사행이 갖는 의미는 사행은 항상 '욕망(욕구)하는 활동'.

  3. ▽ 이론적 지식학의 3가지 명제.

  4. ⓐ '나는 존재한다 => 자아는 그 자신을 정립한다'. 코기토 에르고 줌의 다른 이름. 지식학의 근본적 원리로 '사행'이라는 것을 염두해보면, 의식을 빼보고 나면,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의식이 가장 근원적이라고 말하면, 나는 존재한다. 존재의 방식 = 사유활동. 사유활동은 지식학의 가장 근본적 요소이자 제1원리.

  5. 존재를 하기 위해서 자아는 그 자신을 정립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이 의식활동을 하지 않으면 자아를 포착할 수 없다. 마음이 자아로 존재하려면 대상이 주어져야 한다. 자아가 대상을 인식하면서 자신을 포착하기에 그 자신을 정립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 자신을 정립한다고 말할 때, 인간은 자아를 인식하는 것인가? 내가 외적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가능한데, 인식하고 있는 내 마음을 인식할 수 있나? 인식할 수 없기에 피히테가 만든 개념이 '직관'이다. 직관은 인식이 아니다. 내가 나를 인식한다고 말하면 그 나는 의식의 대상이 되어 있기에 참된 나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인식의 대상으로 포착하는 물질적 실체와 같은 그러한 나는 없다.

  6. 사행에서 행은 지적직관을 통해 포착된다. 나는 존재하는 방식은 사행으로 존재하고 사행의 원천은 행위에 있기에 이 행위는 직관을 통해 포착되는 것이고, 자아가 그 자신을 정립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자아가 대상으로 정립되는 말이 전혀 아니다.

  7. 칸트는 경험적 자아와 선험적 자아를 구분한다. 자아는 그 자신을 정립한다고 말할 때, 이 자아는 선험적 자아에 가깝다. 자아가 경험적이란 말은 자아자체를 대상으로 세웠다는 말(흄- 내적경험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자아가 없다고 할 때 그는 경험적 자아를 염두에 둔 것이다). 피히테의 자아는 대상이 될 수 없기에 경험적 자아일 수 없다. 칸트의 선험적 자아와는 어떻게 구별될까? 칸트의 선험적 자아는 순수오성개념을 담고 있는 논리적 주체. 그것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에 관한 인식 조건으로만 있는 것이지, 의욕을 할 수 없다. 그러나 피히테는 사행은 근본적으로 의욕이라고 하며 그로 인해 우리가 표상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논리적 주체로서의 선험적 자아라곤 말할 수 없다(칸트를 바꾸어내었다).

  8. ⓑ '자아는 비아를 정립한다'. 이때 비아는 etwas x라고 볼 수 있다. 인식론이 지식의 실재성을 근거로 하기 위해 설명하여야 하는 부분이다. 인식론적으로 비아를 정립하는 것을 '소박 실재론'이라고 말한다(ex, 로크 ; 감각에 무엇인가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 외부에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피히테에서 비아는 '소박'한 '실재' 인가? 피히테는 이 부분을 칸트식으로 설명해낸다. 우리 감각에 무엇인가가 다양잡다하게 주어지면 감성이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으로 만들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순수오성개념인 범주를 가지고 그것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칸트). 우리가 무엇을 보았다고 했을 때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우리가 가진 감성의 조건에 의해 이미 우리 안에 대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기 나무가 있다'는 판단을 내려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 이 부분이 지식으로 성립될 수 있는 조건. 내가 경험적 대상을 보고 정물 건물 뒤에 나무가 있다고 동의한다면 그 관계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인식의 요소로서 있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표현하며 나는 이미 감성의 조건 속에 대상이 들어와 있고 그것이 선천적 조건이므로 누구든 그걸 그렇게 본다. 그것에 대한 인지 판단을 내릴 때, 그것도 순수오성개념의 관계 개념을 가지고 판단한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 수 있다.

  9. → 여전히 이원론처럼 남아 있는 것 ; 감성의 조건 속에서 다양잡다한 무언가를 받아들였다고 말할 때 이 다양잡다한 것의 조건으로서 물자체가 있어야 한다. 이런 부분에 오면 흄이 '이미지를 갖고 이 이미지를 촉발하는 무엇이 있다고 가정하고 이 가정 때문에 외부에 실재가 있다고 하는 전제를 세운다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도 이는 증명할 수 있으므로, 있으나 마나'. 칸트의 경우도, '다양잡다를 촉발하는 무언가가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논리적 요청에 의해서 우리 바깥에 있어야 한다' → 하나마나한 말.

  10. 우리가 이미 감성의 조건을 통해 어떤 대상을 보고, 그때, 우리 욕구가 시간공간의 형식을 가지고 외적 대상을 볼 때, 시간공간의 평면적인 틀로만 대상을 인식하지 않는다. 내 욕구가 어떤 대상을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리게 하는 동인이 될 수 있다. 객관적 질료가 주어지고 거기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욕구가 우리가 보는 대상이 어떤 대상인가를 만드는 데 결정적 요소. 그렇다면, 잡다한 것을 촉발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필요 없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 자체는 이미 우리 의식의 활동을 통해 구성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 어떤 경우에도 구성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11. 칸트가 생산적 구상력이라 말한 것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다양잡다한 것들이 주어지고, 우리가 판단을 내린다 말할 때, 이 판단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전혀 아니라는 측면에서이다. 그럼 피히테는? 우리 욕구가 칸트같은 경우는 감각질료의 인식의 선천적 조건을 덮어씌우는 것이지만, 무언가가 감성오성의 형식 속에 들어와서 나에게 이미지로 포착된다고 말하면, 욕구의 대상으로 포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와 전혀 다른 구도. 생산적 구상력이란 말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대상에 관해서 우리 욕구가 거기에 투영되어 있는 생산적 구상력. 우리가 앎에 관해서, 칸트 이후로 세월이 지나면서, 객관적으로 무엇이 있어서 우리가 앎의 욕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의 욕심, 욕구가 앎의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모든 인식은 인간이 갖고 있는 관심으로부터 출발한다(하버마스). 생산적 구상력을 칸트식과 다르게 사용한다 할 때, 생산적 구상력은, 인식에서 주어지는 표상에 관한 구상력이 아니라 인식에 무엇인가 주어진다 표상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표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내 욕구/욕망이 만들어낸 표상이다. 생산적 구상력이란 말은 칸트와 전혀 다른 의미로 만들어졌다.

  12. '사'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우리 의식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행' – 우리의 사유활동, 의식활동, 인간의 존재활동이 있다고 말할 때 이 존재활동 자체가 욕구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욕구에 의해서 이 사실이 구성된 것이다. 생산적 구상력에 의해서.

  13. 결국은 피히테는 이런 tathandlung을 가지고 이론적 지식학을 성립시킬 때 그걸 체계적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세 번째 원칙을 만들어낸다. 자아와 비아 사이의 관계 – '자아는 자아 속에서 가분적 자아와 가분적 비아를 반정립시킨다'. 가분적 자아를 정립시킬 뿐만 아니라 가분적 비아를 자아에 대립시켜 만들어낸다. 결국은 '사행'이 있다고 말하면 '행' 자체가 자기자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비아를 정립시켜야 한다. 이 양자의 관계 속에서 보면 사유활동=자아가 이걸 정립함과 동시에 정립된 자아에 대해서 비아를, 양자의 나누어진 관계 속에서 보면 '반정립'시킨다. 이건 정립되고 이건 반정립된다고 할 때, 기본적 핵심은 자아를 정립하는 것 속에 있다. 비아는 부차적인 측면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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