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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피히테의 실천적 지식학에 관한 독일 관념론 강의의 딕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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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소박하게 말한다 : 인간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이 경험된 것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인간 의식 속의 내용물이다. 그러면 인간 의식 속이라고 말하면 늘 데카르트 설명할 때 말했다시피, 의식은 그 자체로 어떤 경우에도 드러나지 않지만 의식을 드러내는 방식을 생각해보자. 의식은 내용(→ 관념)을 담고 있으므로, 의식이 담고 있는 관념의 유형에 따라 마음의 유형을 나누어볼 수 있다. 대상들이 있으면 이 대상들에 관련맺는 마음을 우리는 '지각한다'고 말한다. 어제 했던 일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생각해보면 '상상한다', '회상한다', '기억한다'고 말하는데, 이것들은 내가 과거의 경험을 불러낼 때 불러내는 마음의 관계를 가지고 이름 붙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데카르트는 코기토를 말한 것이고 코기토는 자기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코기토가 아닌 무엇인가를 자기 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피히테 식으로 말하면 '자아는 자기자신을 정립한다'는 것이다. 자아는 자기스스로 정립할 수 없고 비아를 통해서 자기자신을 정립한다. 따라서 '자아는 비아를 정립한다.' 나 아닌 것을 세워야지 비로소 나에 관한 인식을 세울 수 있다. → 데카르트의 구도[요컨대 기본적으로 의식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의식이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담긴 내용은 의식이 아니므로, 의식 안에 있으면서도 의식과 다른 것이다.]를 피히테가 가져온 것이다. 이것이 뒤의 헤겔로 가면 '자아의식은 타자의 의식을 통해서 성립되는 것이다'가 되면서 내용이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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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무와 여러분의 모습은 내 마음 속에 표상으로 들어와 있다. 의식이 있고 의식 활동이 있고 의식활동은 항상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고, 이렇게 이야기해볼 수 있는 건데. 인식의 확실성은?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이 어떻게 객관적 지식이 될 수 있을까? 평면적으로 의식을 증명한다거나 의식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의식 활동을 하여 '내가 안다'라고 말할 때, 나는 내 마음 속에 담고 있는 이 대상을 객관적으로 아는 것인가?” 이걸 문제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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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나의 대상을 보고 어떤 인식의 대상을 갖는다고 말할 때, 하나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내용은 항상 보편이다. 구체적 개별물을 지시해서('저기') 나무가 있다고 말할 때, '나무'라는 것은 보편 개념이다. 감각으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의 개별자이지만 그것의 인식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단어를 통해서 한 개별자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감각경험도 보편자가 없는 한에 있어서는 인식될 수 없고 존재를 가지지 못한다. 데카르트가 갖고 있는 조건 속에,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개념들이 어떻게 지식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 데카르트의 철학 속 구도를 만든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경험할 때, 모든 경험의 근저에 '본유관념'이 있고, 그 속에 논리적 공리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경험하면서 판단을 내린다고 말할 때, 우리 마음이 갖고 있는 형식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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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논리적 공리가 우리 마음 속의 가장 근본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기본적인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본유관념). 본유관념의 논리적 형태가 칸트이다. 칸트는 본유관념이란 개념을 '선천적 조건'이라고 말한다. 본유관념을 인간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의 유형을 모두 분석한 이후에 판단의 유형을 12가지로 추려내어서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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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경험적인 걸 가지고 있고, 경험을 이루고 있는 내용적 요소를 인간의 마음 속에서 추상적인 관념의 형태로 찾아내었다. 추상적 관념이 어디로부터 연유하는가? → 신의 존재를 증명. 칸트는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근본적 구조가 그런 것이라고, 경험 이전부터 인간의 이성의 활동이 있다고 말하며, 그것을 '선천적 조건'이라고 말한다. 인간 마음이 있고 인간 마음의 기능적 작용이 있다고 말할 때, 이 기능적 작용을 담보해내는 것이 본유관념이라 말하는데, 이 기능적 작용이 갖고 있는 근본적 구조가 논리적 구조를 갖고 있다(→ 선천적 조건)는 것이다. 물론 칸트가 감성의 조건을 논할 때 논리적 조건을 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식이 성립되고 감각경험이 주어지는 어떤 대상이 성립된다고 말할 때 이 모든 조건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 조건'일 수밖에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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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심리적 사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심리적 사건을 유형별로 나누어보면서 말한 것이다. 칸트 입장에서 보면, 심리적 사건은 경험적인 것이기에 필연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칸트는 이 속에 내용을 다 빼고 선천적 조건을 논하면서, 이 선천적 조건이 경험적 내용과 관련맺어 작용을 하면 선험적인 것이 된다(그러므로 선천적 조건이 선험적인 것도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천적 조건을 다 가지고 있는 담지체가 무엇일까? → 선험적 자아, 순수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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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구체적 한 인간으로서 산다고 말할 때, 이 구체적 인간은 어찌되었든 경험적 내용을 갖고 있다. 칸트는 경험적 내용을 밀어내고 철학체계를 말을 했지만, 인식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외부의 경험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를 보고 선천적 구조를 만드는 것이지만, 데카르트가 경험했던 경험적 내용을 배제할 수는 없다. 경험적 내용을 다 갖고 있는 자아 → 경험적 자아. 인간의 마음이 경험적인 어떤 내용을 담으면 이건 심리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는) 심적인 것, 경험적인 것, 내용적인 것, (반대는) 형식적인 것, 선천적인 것을 갈라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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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적인 내용을 다 묶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경험적 자아고, 형식적 조건을 다 묶어서 갖고 있는 것을 선험적 자아다, 라고 할 때, 이 두 자아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이는 칸트의 이원론적 틀이다. 칸트는 선천적 조건을 말하면서 데카르트를 가져왔는데 문제는, 경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선천적인 것 사이의 분리를 극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이분법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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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외부에서 주어진 것에 의해서만 반응한다고 한다면 다른 모든 생명체들처럼 자극이 주어지면 반응하는 시스템, 즉 생의 욕구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게 된다. 인간은 외부적 여러 조건, 신체로 말미암은 여러 유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관해서 하고 말고의 결정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인간의 '의지' 또는 '자유'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과적 사슬에 매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과적 사슬로부터 떨어져나와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경험적 자아가 있고 선험적 자아가 있는데 이것들은 실제로 결합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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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가진 욕망이 있고, 이것에 따라 인간이 움직이는데, 이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이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인간의 힘, 의지가 있다고 말해보면, 인간 안에는 욕망을 컨트롤/조율하고 어떤 욕망을 따를지를 선택하는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유는 욕망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적 조건이 주어졌을 때 자유는 비로소 자기자신의 자유를 실행한다. 그렇게 보면 경험적 자아와 선험적 자아 사이의 연결고리는 없지만, 이 경험적 자아가 전체적으로 욕망으로부터 내용을 부여받았다고 해볼 수 있는 것이고, 선험적 자아라고 말하는 것은 인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냥 조건이다. 인간이 욕망을 취사선택한다 말할 때, 인식이 성립될 수 있는 선천적 조건을 덧씌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인간은 어떤 대상을 본다. 그러므로 선험적 자아라 말하는 것은 인간이 행위하려는 의지에 따라서 경험적 세계에 개입하는 것과 관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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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경험적 자아와 선험적 자아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것 자체가 바로 경험적 자아와 선험적 자아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므로 물자체가 있고 인식의 내용이 있을 때, 물자체가 인식의 내용 속에서 평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안다'가 아니라,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인간이 가진 조건을 물자체 쪽에 영향을 준다. 이럴 때, 인간이 가진 '행위'가 굉장히 중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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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인식에 있어서 우리가 어떤 경험적인 것이 주어지고, 우리가 경험적인 것에 오성적 조건을 적용시킬 때, '구상력'(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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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식을 성립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구나 생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고, 또 이론적인 측면은 이 생의 욕구에 비해 부차적일 가능성이 크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행동/행위/자유를 생각해보니까, 바로 인식이라는 영역 자체가 그런 것들이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영역이라는 것. → 칸트가 가진 실천이성의 영역을 칸트 이후의 사람들이 실천이성의 우위를 주장하게 되는데, 피히테는 그 대표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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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의 이론은 앞에 '자아', '비아'란 개념들도 칸트처럼 인식의 확실성을 성립시키기 위해 설정한 것이 전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이 자기가 사는 세상에 의지를 통해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 tathandlung인 것. 이론적 지식학에서 '자아가 비아를 정립한다'고 말할 때, 실천적 지식학에 가면, 이론이란 것 자체가 실천적 지식학의 부수물이기에, '자아는 비아를 구성해야 한다', 인식론적으로가 아니라, 직접적 실천을 통해서. 그래서 실천적 지식학에서는 '자아는 비아를 규정하는 것으로서 자기를 의식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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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우리가 생각을 해보자. 우리가 그냥 인식한다고 말할 때는 “바깥에 무언가를 절대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나?” → 근대학문의 과학의 문제. But, '자유'란 측면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외적 대상을 본다고 말할 때, 이건 그냥 우리가 외부에 있는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 외부를 본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내 속에 있는 욕구/욕망/충동을 가지고 어떤 외적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 대상을 선택하여 가지거나, 왜 갖지 못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거나, 자기 행동을 그 생각으로 말미암아 바꾸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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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을 내가 어떤 의욕/욕망을 가지고 그 자연물을 갖는 것이므로, 평면적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욕구/욕망 자체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외부 대상을 바꾸어버린다. 이걸 '실천'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인간이 사는 삶의 장에서보면, 기본적으로 인간은 실천을 통해 자기가 사는 삶의 공간을 다 바꾸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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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데카르트로 돌아가서 설명해보자. 인간의 의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의식 아닌 것을 빌려와야 한다. 이것은 인식론적 틀이다. 인간은 어떤 다른 존재를 가지고 와서 자기자신을 의식한다. 내가 어떤 욕구를 가진다 해보자. 그냥 바깥에 보는 대로 내가 욕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 욕구에 따라서 바깥을 보는 것이기에, 내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어떤 대상을 포착하게 된다. 그 대상이 포착한 자체로 내 욕구를 충족시켜주는가? 어떤 경우에도 내가 포착하는 식으로 외부 대상은 나에게 욕구 충족을 시켜주지 않는다. 나의 의지가 바깥에 있는 무엇인가를 바꾸어내어야 한다. 내가 욕구를 갖고 있다고 말하면 어떤 노력을 통해 외적 대상과 관계맺어야 하며, 이것은 능동적/적극적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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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인간이 갖고 있는 실천적 지식이 기본이 된다(이론적 지식보다). 우리가 피히테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런 정도가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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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데카르트에서, 의식이 자기자신의 존재가 없기에 다른 것으로부터 존재를 끊임없이 빌려온다. 그럼 내가 여기 있는 교탁을 봄으로 말미암아 내가 있다는 것을 안다. A를 보면서 → B를 보면서 내 자신의 존재를 충족시킨다. 이는 수동적이다. 그렇다면 내 자신이 스스로 존립할 수 없기에, 이걸 존립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외부대상에 관련한 욕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자기자신의 존재욕구를 갖는다고 말할 때, 존재욕구는 수동적인 것이 전혀 아니므로, 외적인 활동을 통해 그걸 증명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바깥을 바꾸어야 하며 그 바깥을 통해 자기자신을 보여주어야 한다(ex, 용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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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잡한 욕구를 전면적으로 다 표현하는 것을 실천적 지식학이라 한다. 인간과 인간 간에 표현되는 실천적 지식학은 '윤리학', 추상적 여러 사람과 관계되는 실천적 욕구가 있다면 '국가론/법'이 될 것이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어야지, 피히테가 실천적 지식학을 가지고 말하고자 하는바가 뚜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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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가지고 있던 이론적 지식학은 전부 인식론적이라는 생각을, 칸트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 피히테는 발견한다. 따라서, 실천이성이라는 우위라는 것 자체가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고 피히테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피히테, 셀링, 헤겔을 보면 전부다 '국가'라는 것에 관한 이론적 틀이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