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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김경만의 『과학지식과 사회이론』에서 라투르와 울가의 공동연구,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길버트와 멀케이의 담화분석, 과학사회학의 성찰적 전환에 대한 부분을 내가 요약한 것이다. 앞으로는 스트롱 프로그램, 뒤로는 민속방법론적 접근이 본 요약에서 누락되었는데 직접 찾아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6장/ 실험실 연구II
1] 라투르와 울가의 실험실 연구의 방법론적 특성
라투르와 울가도 (블루어와 반스의) 스트롱 프로그램에 가장 중심적인 '대칭성' 명제를 받아들여, 현재 옳다고 생각되는 과학지식이나 틀렸다고 평가되는 지식 둘 다에 대해 분석자 ㅡ사회학자나 인류학자ㅡ의 평가를 배제한 채, 같은 종류의 원인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들은 스트롱 프로그램처럼 사회적인 이해 관계를 과학지식의 생성 변형을 설명하는 궁극적 원인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스트롱 프로그램류의 거시사회학적이고 역사사회학적 연구와는 다르게, 라투르와 울가는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매일매일의 지엽적인 활동을 통해서, 어떻게 외부 세계에 대한 '명제'나 '진술'을 '사실'로 변환시켜나가는가를 분석한다.
이들은 완전한 인류학적 strangeness를 가지고 연구를 하는 것이나, 과학자 스스로가 제공한 설명과 묘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연구를 하는 것 ㅡ 양 극단의 방법론의 중간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사실 생산 과정(science in the making)에 대한 '제3의 설명'을 제공하려 한다.
2] 신경내분비학(Neuroendocrinology) 연구소의 실험실 문화
라투르와 울가의 사회학적 연구는 어떻게 여러 연구팀이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티로트로핀 분비 물질(약칭 TRF)을 몇 년 동안의 연구와 논쟁, 설득을 통해 아무도 의심치 않는 하나의 과학적인 실재로 변환시키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들은 왜 TRF 또는 그와 연관된 성장 호르몬을 '구성물'(a construction)이라고 부르게 되었는가?(이하 절)
3] 과학적인 사실의 구성과정
그들은 바슐라르에게서 “현상적 기술”(phenomenotechnique)란 개념을 빌려 온다. 실험실에서 하나의 숫자군이나 그림 또는 곡선으로 변형되기까지의 모든 작업 '과정'은, 일단 곡선 등을 얻게 되면 잊혀진다. 그리고 그 곡선은 실재하는 '물질', 즉 연구 대상과 직접 '대응'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기록'은 어떤 개념이나 이론을 직접적으로 확증해주거나 반증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일단 기록된 후에, 이 기록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된 수많은 물리적 조작을 담당하는 기기와 그것들의 특정한 배열들은 잊혀진다. 하지만 기기와 그것들의 특정한 배열이 없다면, 과학자들이 말하고 논의하는 대상인 “기록” ㅡ곡선과 숫자ㅡ 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드러, 생물학적인 정량 없이는 어떤 물질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정량은 단순히 외부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물질을 얻는 데 사용된 방법이 아니라 그 분석 자체가 외부 물질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구성'(constitute)한다. 이런 맥락에서 라투르와 울가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 현상들은 단순히 어떤 물리적인 도구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의 물리적-도구적인 기록 장치들에 의해서 완전히 구성된다. 과학자들이 객관적인 개체라고 표현하는 이런 인공적인 실재는 실제로는 기록장치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다. 바슐라르가 “현상적 기술”이라고 부른 이런 실재는 그것이 물리적인 도구들에 의해서 구성됨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현상처럼 보이게 된다.(하단 001, 64쪽)
위 인용문은 만일 '기록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 반대의 경우, 즉 외부세계에 기인한 현상은 기록장치가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실재론은 거부하고 있다. 외부세계의 접근이 기록장치를 통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없다면, 왜 우리는 기록장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외부세계를 “상정”해야 하는가하는 논지다. 그들은 “기록장치의 생산물=외부세계의 물질”이라는 등식에 긍정적이다. 그들에 따르면 전통적인 데카르트식 이분법 (주체와 객체) 은 이른바 '물리적인 조정'(material arrangements) 이외의 '초월적 실재'를 상정하는데, 이들은 이에 반대한다.
이들에게 무엇이 과학적인 사실이냐는 전통적인 과학철학이나 상식처럼, 명제의 진리값을 명제와 '독립적'인 '주어진' 실재와 대응시킨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적인 명제는 다른 여러 사람이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과학적인 사실이 되기도 하고 인공물이 되기도 한다. 특정한 시공간에서 어떤 명제가 갖는 사실성(facticity)은 그 명제가 얼마나 많은 positive modality를 갖는가에 달려 있지, 이 명제가 얼마나 외부세계를 잘 재현하고 있는가와는 상관이 없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부르디외의 'field theory'를 수용한다.(002)
라투르는 과학지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흔적도 구성된 흔적도 없는 주인이 없는 객관적 지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가를 설명하고자 기호학을 사용하는데, 이 예를 003에서 인용해보면 아래와 같다.
: 1 : 성장 호르몬을 촉진하는 호르몬(GHRH)의 주된 아미노산 구조는 Val-His-Leu-Ser-Ala-Glu-Glu-Lys-Glu-Ala다.
2 : Andrew Victor Schally 박사가 (GHRH의 주된 구조)를 발견했기 때문에, 병원에서 성장을 촉진하는 호르몬을 사용해서 난쟁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에 대한 연구가 가능해졌다.
3 : Schally 박사는 오랫동안 그의 뉴올리언스의 실험실에서 (GHRH의 구조가 Val-His-Leu-Ser-Ala-Glu-Glu-Lys-Glu-Ala)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점을 야기한 우연은 이 구조가 서투른 실험자들의 실수로 만들어진 순수한 뇌 추출물을 오염시킨 물질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헤모글로빈(hemoglobin) 구조와 같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1이 2에 삽입되면 앞으로 유용한 연구의 기반이 되는 과학적인 사실이 되고, 3에 삽입되면 확실한 결론이 없는 공허한 문장이 될 뿐이다. 2처럼 어떤 문장을 그 문장이 생성되는 '지엽적인 공간'과 우연에서 분리시키고, 그 결과 문장의 사실적인 지위를 향상시키는 문법 양태를 positive modality라고 한다. 반대로 3처럼 1을 그것이 생산되는 특정 시공간으로 끌어들여 그 문장이 생산된 시공간의 특정한 상황을 언급함으로써 문장의 사실적인 지위를 떨어뜨리는 양태를 negative modality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라투르에 따르면 어떤 문장은, 그것이 어떤 형태의 다른 문장에 삽입되는가에 따라서 더 사실적이기도 하고 덜 사실적이기도 한다. 그 자체로서 주어진 문장은 사실도 허구도 아니다. 사실이 되기도 하고 허구가 되기도 하는 것을 결정하는 요인은 이 문장이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어떻게 사용되는가다(003).
위의 예를 좀더 연장시켜보자.
4 : 만일 문제가 되는 우연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schally 박사의 논적인 Roger Charles Louis Guillemin 박사가 제기한 문제다. 따라서 헤모글로빈과 GHRH의 아미노산 구조가 같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4를 읽고난 독자는 제약회사에 투자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3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을 믿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이런 결정을 위해 필요한 정보는 결국 기유맹 박사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만일 독자가 기유맹 박사가 섈리 박사를 질투해서 경쟁자의 발견에 회의적인 판단을 한 것이라고 믿으면 4를 믿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이 독자가 기유맹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믿으면 4를 믿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헤모글로빈과 GHRH의 아미노산 구조가 같다는 것인데, 이 문제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생리학에 대한 더욱 깊은 지식이 필요하다. 피가 몸에 대한 중대한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고도 두 개의 같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까. 기유맹의 정직성과 생리학에 대한 의문은 다음과 같은 반박을 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5 : 불가능한 일이다 ! 그 둘은 같은 구조를 가질 수 없다. 그와 같은 주장은 분명히 섈리의 실수로 일어난 것이다. 어쨌든 기유맹이 섈리보다는 더 믿을 만한 사람이다. 학술지에서 언급하고 제조되었고, 심지어 의사들에게 판매까지 되었을지라도 나는 GHRH를 절대 믿지 않는다.
이런 논의는 계속될 수도 있겠지만 편의를 위해 여기서 줄어도록 하자. 이런 주장을 접하게 되면 독자는 복잡한 게임에 들어온 느낌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5가 사실이라면 4는 틀린 주장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3이 더 신빙성 있는 사실로 간주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과학적인 사실로서의 1은 기각될 것이다. 반대로 5가 만약 기유맹의 숭배자에게서 나온 이야기이고, 그가 생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4는 믿을 만한 주장으로 변환된다. 따라서 3은 잘못된 것으로 간주되며 결과적으로 1의 과학성이 다시 확립될 것이다.
최초의 명제 “A는 B다”가 아무런 문법적 양태(modality) 가 없는 단계에 이르면, 이것은 아무도 이 명제의 타당성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기존의 신화 ㅡ받아들여진 지식의 저장고 ㅡ에 흡수되고, 바로 '기록장치'와 연결된 의미를 확보한 과학적인 명제가 된다. 라투르가 여기까지 이르면서 보이고자 하는 점은 “어떤 명제의 지위는 나중의 명제들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실제로 라투르가 기호학에 의거해서 과학적 명제의 진리값이 결정된다는 것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명제가 과학적인가 아닌가는 이 명제가 삽입된 다른 명제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과학활동과 그 생산물이 완전한 하나의 자족적이거나 밀봉된 '기호체계'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4] 과학지식의 구성성에 대한 비판과 반론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슐라르의 '현상적 기술'에서는 관찰할 수 있는 현상 자체가 그 현상을 '구성'해낸 '기록장치' '때문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라투르와 울가는 “'진짜 TRF'는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1969년에 발견되었다”와 같은 전통적인 실재론적인 가정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TRF를 다시 인공물-허구-로 만들 수도 있다. TRF가 하나의 실재가 되는 과정에서 작동된 'positive modality'를 제거할 수 있도록 이 과정을 계속 소급한 다음, TRF에 관한 명제에 'negative modality'를 삽입하는 것이다. 구성된 것은 다시 해체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서 '분리와 역전의 모형(splitting and inversion model)'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을 짚고 넘어가자. 라투르와 울가는 실재가 우리로 하여금 많은 대안 중에서 특정한 어떤 대안을 믿게 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의 역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일단 어던 명제가 변환과정을 거쳐서 '과학적인 실재'가 되어버린 후에는 구성적인 변환과정이 모두 잊혀지고, 마치 '외부세계'에 항상 있어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던 '개체'가 그 개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야기한 원인인 양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성된 개체(실재) 자체가 구성과정에서 분리되어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갖게 되며, 이제는 거꾸로 명제를 믿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됨을 의미한다. TRF라는 '실재'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모형에 의하면, 일단 TRF가 사실화된 후에는 TRF가 허구일 것이라는 가능성은 배제된다. 여기서 “진리대응론”이 복구되고 신화의 중요한 부분들이 창조된다. 여러 개의 대안 중 하나가 '사실화되고 안정화'되면, 사후적으로 이것이 단 하나의 주어진 길이었던 것처럼 변환되고 만다. 따라서 “실재는 논쟁 종식의 결과이지 결코 원인이 될 수 없다”(003, 177).
▶ 과학적인 실재론자 vs. 라투르와 울가
라투르와 울가는 Roy Bashkar의 『A Realist Theory of Science』의 실재론을 반격하면서 그들의 '분리와 역전 모형'을 옹호한다. 바스카에 의하면, 우리가 과학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존재하지만, 그런 대상에 대한 과학 지식이 없는 세계를 상정하면서 그의 실재론을 전개한다. 이런 세계에서는 실재가 발견되거나 이야기되지도 않지만 여전히 실재는 어떤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가령 Paul Karl Ludwig Drude가 금속이 전기를 전도한다는 것을 발견하기 전에도 금속은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바스카는 이렇게 독립적인 실체는 우리와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라투르와 울가에 의하면 “금속이 전기를 전도한다”는 명제는 ㅡTRF의 경우와 마찬가지로ㅡ 이 명제를 성립시키기까지의 과정에 들어간 노력과 논쟁을 모두 무시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무엇이 '금속'인가, 무엇이 '전도체'인가는 이것들을 정의하는데 필요한 '기록장치'와 독립적으로 정의될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다시 바슐라르의 '현상적 기술'로 돌아가서 실재를 정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라투르와 울가는 TRF가 존재하지 않거나, 성공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관점을 옹호하는 것인가 ?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TRF가 “그것의 존재를 가능케 한 바로 그 사회적인 실천의 연결망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인 실천의 연결망 '안'에서는 TRF가 실재하며, 여러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5]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등장과 이질적 결합
『행동하는 과학』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두 가지 점에서 『실험실 생활』의 주장을 수정,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명제의 변환에 참여하는 행위자들에 단순히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통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까지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명제 변환 과정의 종말은 명제의 '사실화' (또는 허구화)이며, 사실화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분리와 역전 모형에서, 명제가 이미 존재하는 어떤 실재를 '재현'한 것으로 변환된 것을 말한다. 라투르는 네트워크 안에 편입됨으로써 특정한 재현을 가능케 하는 모든 것을 행위자(actants)라고 부른다. 둘째, 라투르는 스트롱 프로그램의 '대칭성 명제'가 너무 좁게 정의되었다고 비판하며, 대칭성을 더 확장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요소의 첨가로, 스트롱 프로그램의 약점이 보완되었다는 시각이 생겨났다. 아래에서 『행동하는 과학』의 논리전개를 따라가보자.
우선 과학적인 사실의 '안정화'에 개입하는 라투르의 'actants'란 무엇인가 ? 라투르에게 어떤 명제의 진리값은 과학자들뿐 아니라, 과학을 이용하려는 사람, 그것을 금전적으로 도와주는 사람과 비인간적 요소들을 연결하는 이질적인 요소로 구성된 결합(heterogeneous association)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의 예를 길지만 들어보자. 우리가 지금 당연시하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디젤엔진은 19세기에는 신뢰할 수 없는 작동이 불규칙적이며 문제가 많은 것이었다. 카르노의 열역학을 영향을 받은 디젤은 온도를 상승시키지 않고도 점화할 수 있는 엔진을 만드려고 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료를 주입하고 연소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이 시점에서 디젤은 여전히 문헌의 세계 속에 있었다. 디젤에게는 그가 저술한 책과 특허, 그리고 켈빈 정도가 동맹의 전부였으며, 많은 사람은 그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디젤이 직면한 문제는 이차원적인ㅡ문헌에서만 가능한ㅡ 엔진을 삼차원의 움직이는 엔진 원형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때, 스팀엔진의 저조한 성능에 점차 실망하던 독일의 MAN이란 기계제조회사가 디젤의 교섭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후 4년동안 디젤과 MAN의 엔지니어들은 만족할 만한 엔진의 최초 원형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여느 실험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필요한 여러 요소와 자원이 동원되었으며, 30년동안 MAN에서 축적되었던 피스톤과 밸브 기술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연료 연소에 대한 여러가지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엔진의 크기가 차에 장착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비싸져서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었다. 따라서 디젤은 그의 책에서 제시된 아이디어를 대폭 수정하고, 엔진의 디자인도 대폭 수정해야만 했다. 이 시점에서 디젤 엔진에 첨가된 요소의 수가 상당히 늘어났다. 애초에 카르노의 열역학, 디젤의 책, 특허, 켈빈의 지지에 더해, MAN과 몇몇의 엔진모형들, 여러 명의 엔지니어, MAN의 노하우, 여기에 관심이 있던 몇몇 기업, 새로운 공기주입방식 등등이 추가된 것이다.
이것은 디젤의 아이디어가 이미 다양한 인간과 비인간적 요소들을 묶는 행위자-네트워크를 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디젤 엔진은 그 후에 시장에서 시판되었으나 여기저기서 결함이 발견되었다. 결국 디젤은 파산하게 되고 급기야 자살을 시도한다. 그후 10년 이상이 지나 디젤엔진은 많은 엔지니어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드디어 1908년에 신뢰성있는 블랙박스 -TRF와 같은 과학적인 사실-로 자리잡게 된다. 이때 디젤이 그의 권리를 주장했으나 거부당한다. 왜냐하면 디젤이 아이디어의 최초발언자였으나, 결국 신뢰성 있는 엔진을 만든 것은 그가 아니라 수많은 엔지니어와 기계 제조회사들의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어떤 명제가 어떻게 수많은 행위자의 행동과 진술에 의해 '사실' 또는 '허구'로 변해가는가에 대한 동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동맹 구축과 확산에 실패하면 타당성이 결여된 단순한 인공물이 될 수 있는 대상이나 진술도 그것에 성공하면 확실한 지위를 갖는 '과학적인 사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라투르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사실을 구성하려는 사람의 일차목표는 이러한 네트워크의 확장을 위해 행위자를 네트워크 안에 영입시키고, 그들의 행위를 통제하는 것이다. 많은 행위자를 네트워크 안에 영입시키면 시킬수록 이 네트워크는 더 '실재'에 가까워지고, 영입에 실패하면 '허구'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사실을 생산해내려는 사람의 과제는 “인간 행위자를 끌어들이고 나서 인간 행위자를 붙들어 두드록 사물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을 생산하려는 사람은 어떻게 명제에 positive modality를 더해줄 수 있는 행위자를 끌어들일 수 있을까 ? 라투르에 따르면 이것은 '이해의 번역'(translation of interests)에 의해서 가능하다. 사실의 생산자는 단순히 동맹을 끌어들이는 노력을 해야할 뿐 아니라, 이 동맹이 계속 그를 추종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해의 번역'은 사실 생산자가 그가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의 이해를 자신의 목적에 맞도록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이해에 맞는 행위를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에 기반을 두고 라투르는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한다. 한 명제가 과학적인 사실로 변환되는 데 사람들 뿐 아니라 사람이 아닌 요소들(non-human factors)도 똑같이 참여하고 있다면, 궁극적으로 과학적인 실재라고 일컬어지는 '사실'은 사람과 사람이 아닌 사물들에 의해서 '공동생산'된다. 이런 추론이 옳다면, 과학적인 사실 ㅡ명제의 안정화ㅡ 이 생산되는 바로 이 시점에서 자연과 사회가 “동시”에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마치 배타적 범주처럼 사용해왔던 '사회'와 '자연'이란 단어가 실은 과학적인 사실의 구성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결합되고, 이 결합의 결과가 과학적인 사실의 구성을 설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제 여기서 마지막 추론이 가능하다.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결합되어서 어떤 시점에서 동시에 무엇이 '사실'인가를 구성한다면, '자연'도 '사회'도 과학적인 사실의 안정화를 설명하는 데 우선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이미 분리와 역전의 모형에서 보았듯이, 명제의 안정화와 사실화는 이미 외부에 존재하는 '자연세계'의 인과적인 역할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논쟁이 끝나고 명제가 사실화된 것의 '결과'다. 마찬가지로 위에 제시된 추론은 '사회적인 것'도 논쟁의 종식이나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원인으로 사용될 수는 없고, 오직 논쟁이 끝나고 무엇이 사실인가가 결정된 후에야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는 점을 나타내준다.
: 과학자와 공학자를 추적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자연세계는 어떤 것인지를 (사전에) 알 필요는 없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알 필요가 없다. 완전히 모양을 갖춘 사회(fully-fledged society)를 상정하는 것은 자연세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상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실의 구성을 추적하는 데는 똑같이 악영향만을 줄뿐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자연세계에 대해서 주장된 것은 사회에도 대칭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003, 143p)
이 인용문에서 중요한 점은 '사회에도 대칭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문구다. 스트롱 프로그램의 대칭성 명제는, 우리로 하여금 논쟁의 종식을 설명할 때, 어떤 '고정된' 실재를 먼저 상정하고 이 고정된 실재, 또는 자연세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합리적이고, 여기서 벗어나면 '비합리적'이란 종래의 비대칭적인 설명을 파괴하려는 시도였다. 노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는 분석자가 상정한 “자연세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우리는 오직 논쟁이 종식되고 나서야 자연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스트롱 프로그램에서는 분석자가 상정한 이미 고정된 자연세계, 외부세계를 논쟁 종식을 '설명'하는 설명자(explanans)로 상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가 맞다고 받아들이는 지식이나, 틀렸다고 기각하는 지식 모두가 공히 같은 종류의 원인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된다.
라투르는, 블루어가 자연세계를 설명자로 사용하는 것을 해체하거나 파괴시킨 것에 만족하지 않고, 블루어가 과학논쟁과 사실 생산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연세계 대신에 사용한 '사회적'이란 것 -집단의 이해관계와 사회 내에서 힘의 분포- 조차 해체하거나 파괴하려 했다. 라투르는 스트롱 프로그램에서 집단과 전문적인 이해관계, 과학사회 내/외의 힘의 구조 등으로 표현되는 '사회'도 논쟁 진행의 궤도와 종식을 설명하는 설명자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자연세계가 그랬던 것처럼 논쟁 종식 전까지는 사회도 '어떤 요소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도 자연세계도 행위자-네트워크의 확장 또는 축소의 궤적과 크기에 따라 “동시”에 결정된다.
(디젤의 예를 상기해보자. 디젤 엔진이 완전히 하나의 블랙박스가 되고 상업화되기 전까지는 행위자-네트워크 안에 있는 어떤 요소 ㅡ우리가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사람(그리고 집단), 그리고 어떤 과학사상(ideas)ㅡ 도 '고정'된 형태를 띠지 않았으며, 계속적으로 서로 결합하거나 탈각(disengage)되는 과정을 통해서 변형됐다. 따라서, 스트롱 프로그램을 추종하는 사람들처럼, 어떤 '고정된' 이해관계를 가질 뿐 아니라 고정된 경계를 지닌 집단을 사전에 '상정'하고 이것들을 설명자로 사용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과학자들과 그들의 동맹-물론 여기에는 사회과학자도 포함된다-이 그들의 작업을 끝낸 후에야만 자연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사회는 어떤 요소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가 대답될 수 있다.)
이것이 라투르가 주장한 '확장된 대칭성'이다.
6]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문제점
라투르에 따르면, 과학사회학자는 시공간을 통해서 어떤 명제가 과학적인 사실로 변환되는 과정(당신이 지금까지 모아온 통제 요소, 003, 140p)을 '기술'(describe)하기만 하면 된다. 무엇이 통제적인 요소들인가, 는 통제적 요소들과 통제 효과 간의 '인과적'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 라투르는 '통제적'인 요소가 사람들 행위의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해석학이 아닌 모종의 인과적인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연과 사회를 둘 다 이런 인과적인 요인의 후보에서 배제시켰으므로, 그가 상정한 인과적인 요인 -통제 요소-이 무엇인가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라투르는 행위자-네트워크의 크기가 시공간에 따라 변화함으로써, 하나의 명제가 과학적인 사실이나 허구로 변환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적인 자원을 결여하게 된다.
또한 섀핀은 라투르가 '왜' 행위자들이 네트워크에 가담하고 탈퇴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논쟁의 결과뿐 아니라 논쟁의 궤족을 '설명'할 자원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004)
7장/ 담화분석과 성찰적 과학사회학
멀케이와 길버트에 의해 주도된 비판을 고려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과학사회학자들이 사용한 두 가지 연구방법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첫째는, 과학사가들과 스트롱 프로그램을 옹호하는 과학사회학자들이 주로 사용한 역사적인 방법이며, 둘째는, 콜린스나 크노르 세티나 등 이른바 실험실 연구를 한 과학 사회학자들의 '면담'을 사용한 방법이다. 멀케이와 길버트에 따르면, 과학자의 진술이 신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될 만큼 과학자가 자신들의 행위와 믿음에 대해 얘기한 내용은 이런 얘기가 생산되는 '사회적인 맥락과 상황'에 따라서 변화한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그들이 처한 입장에 '유리'하거나 그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실험을 해석한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자의 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사회학자들이나 과학사가들이 과학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1] 담화분석 사례연구 : 화학삼투압에 대한 과학적인 합의 (005)
길버트와 멀케이는 화학삼투압에 대한 과학자들의 역사와 과학사회학자들의 설명 모두가 궁극적으로 해석을 통한 구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과학적인 합의는 과학자나 과학사가, 과학사회학자들의 해석을 떠나서 존재하는 객관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들 분석자들의 해석을 통해 얻어진 '구성물'이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특수한 입장을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과학적인 합의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얘기하기도 하며,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얘기하기도 한다. 이와 다르게, 과학사가와 과학사회학자들은 어떤 특정 시점에서 과학 논쟁이 종식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과학적 합의를 거론한다.
길버트와 멀케이는 화학삼투압 이론으로 생화학에서 중요한 상을 받은 스펜서라는 생화학자가 수상기념 강연에서 설명을 위해서 제시한 그림에 대한 생화학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조사하곤 다음을 발견했다.
첫째, 생화학자들 담화의 가변성 때문에 이들에게 어떤 확정적이고 특정한 믿음을 귀속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해 생화학자들은 그들이 처한 사회적인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이런 합의에 대해 각각 서로 다른 해석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합의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경우에는 이런 합의는 매우 허구적이며 깨지기 쉬운 합의라고 말한다.
둘째, 과학적인 합의에 대한 어떤 이론이나 역사적이고 사회학적인 설명도 과학적인 합의의 대상이 되는 '이론'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화학삼투압 이론의 의미는 각각의 과학자에게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 이론은 각각의 과학자들에게 어떤 '다른' 것을 의미한다.
셋째, (005, 115쪽 그림) 그림은 스펜서 화학삼투압 이론에 대한 지지 유형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해갔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이 그림에 나타난 과학자들을 면접해본 결고, 이들은 이 영역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얘기할 때 포함되어야 할 과학자들의 집합을 서로 다르게 정의하고 있었다.
따라서, 길버트와 멀케이는 이런 합의가 스펜서나 사회학자와 같은 '분석자'가 연구 영역의 경계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와, 이런 영역에서 누가 중요한 참여자인가를 결정하는 것에 따라서 깨질 수도 있고, 성립될 수도 있다고 결론짓는다.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스펜서는 넣어야 될 사람은 빼버리고, 넣지 않아야 할 사람을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 이 문제는 결국 누가 과학 합의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에서 '주인공'으로 포함되어야 하는가라는 멤버십의 '경계'에 대한 문제로 귀착된다. 길버트와 멀케이에 따르면, 이 경계는 과학합의에 대해 서술한 스펜서와 같은 과학자와 과학사가, 그리고 과학사회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가변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버트와 멀케이가 권고하는 과학사회학의 방법론은 어떤 것일까 ? 길버트와 멀케이는, 과학사회학자와 과학사가가 과학자들의 담화 자체를 분석함으로써, 변화하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과학자들이 그들의 행위와 믿음을 어떻게 설명하는가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길버트와 멀케이는, 단순히 담화의 사회적인 맥락과 여기서 생산되는 담화의 성격만을 연결시킴으로써, 담화가 보여준 패턴화된 성격에만 천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자들이 '왜' 어떤 믿음과 행위를 하는가에 대한 객관적 설명을 하고자 하는 시도는 기각되어야 한다. 그 대신에 과학사회학자는 '어떻게' 과학자들이 그들의 말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구성'해나가는가만을 연구해야 한다.
2] 구성의 구성성 : 성찰성과 담화분석
길버트와 멀케이의 담화분석에 대한 비판들은 008.
울가의 비판 : 담화분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다른 학자들의 작업에서 찾아낸 확정적 설명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이 왜 그들 자신의 담화분석에는 적용되지 않는가에 대한 이유를 제공해야만 한다. 그들도 결국 담화의 성격에 대한 확정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008, 488p)
비판자들은 길버트와 멀케이도 그들의 면접자료를 '분류'하고 '해석'해야만, 그들이 주장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길버트와 멀케이의 담화분석도 결국 '구성'된 것이라는 주장이 이들 비판의 핵심이었다. 재밌는 점은, 멀케이가 이들 비판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의 오류를 인정했다는 데 있다.
멀케이가 비판자들의 옳음을 인정한 것 뒤에는 그의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에 대한 전망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새로운 이론적인 전망은 울가가 이른바 '과학사회학'의 성찰성이라 명명한 것이다. 이런 성찰적인 과학사회학의 핵심은, 자연과학자의 연구 대상 ㅡ자연세계ㅡ이 그들의 상호작용과 협상을 통해 '구성'되는 것처럼, 과학사회학자들의 연구대상 ㅡ즉, 과학자들의 상호작용과협상ㅡ에 대한 사회학적인 설명도 과학사회학자들의 해석 작업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다.
이러한 인정은 결과적으로 모든 '설명'은 구성된 것이고, 다시 해체될 수 있는 것이므로, 어떤 설명도 다른 설명보다 인식론적으로 우위를 가질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렇다면 성찰적인 과학사회학이 지향하는 바는 끝없는 해체인가 ?
4] 과학지식 사회학에서 언어와 재현의 문제 (009)
'성찰적 과학사회학'자들은, 과학이론들이 단지 과학자들의 언어적인 실천의 물화(reification)인 것처럼, 과학에 대한 과학사회학자들의 설명도 하나의 언어 구조(verbal structure)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런 언어구조가 실재를 구성하므로, 과학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사회학적, 역사적 설명 가운데 어느 것이 실재를 더 잘 재현하고 있다고 얘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과학에 대한 여러 과학사회학적인 설명을 그것들의 사실적인 내용에 의해서라기보다, 신화적인 '정합성'(mythical coherence)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후기구조주의와 그들의 구성주의적 접근 간의 유사성을 이곳저곳에서 언급한다.
후기구조주의의 바르트(010) : 바르트에 따르면, 실증사학의 관점에서 씌어진 역사에서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한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사람이 사용한- '기호'에 대한 언급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그 결과 “역사는 그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취급된다”. 바르트에 따르면, 실증주의 역사가들은 고립되고, 스스로는 서로 연결되지 않고, 정합성이 없는 사건에 레비-스트로스가 허구적인 틀(fraudulnet outline)이라 부른, 특정한 언어적인 재현의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하나의 질서 잡힌 이야기를 구성해나간다. 바르트는 구조의 '자족적인' 성격에 대한 구조주의자들의 강조와, 이런 구조가 외부 지칭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주장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역사가가 그의 내러티브를 통해 구성하는 실재가 어떤 것인가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각 요소의 사실성에 의존하기보다 이런 요소들이 가지고 있는 '관계'나 '구조'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자들은, 언어를 사물의 질서를 나타내는 '중립적인 아이콘'(neutral icon)으로 간주했던, 따라서 사물 중에서도 언어에만 특권을 부여했던 데카르트나 칸트와는 대조적으로, 언어가 '진리' 또는 '지칭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 대신에 이들은 일련의 텍스트망(textual network)은 “언어적인 실천(discursive practice)에서 얘기되는 대상을 체계적으로 구성” 해나간다는 푸코의 주장에 동의한다. 언어적인 실천은 재현의 정확성에 천착한 전통적인 인식론의 관심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푸코들에게 언어는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구성되는 '불투명한' 어떤 것일 뿐이다. 이것은 역사적이고 사회학적인 내러티브 생산에서 언어의 '구성적' 역할을 깨닫게 한다.
※ 유의할 만한 참고문헌
001 Laboratory Life : The social Construction of Scientific Facts (Latour & Woolgar)
002 The Specificity of Science Field 와 The peculiar history of scientific reason (Pierre Bourdieu)
003 Science in Action (Latour)
004 « Following Scientists Around », Social Strudies of Science 18 : 533~550
005 Open Pandora's Box (Gilbert and Mulkay)
006* Experiments are the Key : Participant's Histories and Historian's History of Science
007* What is the Ultimate Question ? Some Remarks in Defense of the Analysis of Scientific Discourse, Social studies of science12 : 309~319
008 laboratory studies (woolgar) ; Talking of talking, writing of writing : Some reflections on gilbert and mulkay's discourse analysis ; Talking history (shapin) ; hierarchy of scientific consensus and the flow of dissensus over Time, philosophy of the social science 26 : 3~25 (kyung-man kim)
009 Explaining Scientific Consensus : the case of mendelian genetics
010 the discourse of history (barthes)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