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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헤겔의 논리학에 대해 다룬 독일관념론 수업의 딕테입니다.)

 

  1. 경원양이 셸링이 말했던 구조가 헤겔과 닮았다고 표현했는데, 헤겔 구도와 닮은 꼴이긴 하나, 그 속에 헤겔은 쉘링을 비판했던 지점을 투명하게 밝히려고 한다. 껌껌한 밤에 모든 소는 검게 보인다는 점을 비판하려고. 정신과 물질 사이의 동일성, 여기에 구체적인 개별자에 대한 설명이 하나도 없다. 그 구체적 개별자가 어떻게 등장하는가, 이걸 헤겔은 보여주려 한다. 그 구체적 개별자가 드러나는 과정 전체에 대한 설명이 운동이라고 본다. 운동, 변화, 유동이란 개념이 어떻게 성립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장 속은 모순이 팽배해있고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 속에 우리가 사는 세계의 생성과 변화가 있으며 그 속에 구체적 개별자가 다 드러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체적 개별자가 정신과 자연이라고 말하는 양자의 결합체로 있다. 정신과 자연 사이의 결합을 절대자라고 말하면 절대자가 구체적 개별자 속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3. 저번에 쉘링 부분을 헤겔 식으로 다시 설명해보면, 헤겔은 '절대자'를 정신이라 표현한다. 쉘링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자연'이라 표현했다면 헤겔은 '정신'이라 표현한다. 이 정신을 활동이 이성이다. 정신의 활동은 이성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적 세계가 나타난다. 정신이 이성을 통해서 자기활동 하는 것이 자연적 세계의 출현이다. 그 속에 쉘링 식으로 본다면 인간도 있는 것이다. 이 절대정신의 자기운동을 통해서 자연적 세계가 나타난다고 말하면 이 정신의 이성은 자기활동하는 과정을 자기인식으로 가져야 한다. 이 자기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절대자라고 말하는 것, 즉 절대정신이, 자기인식을 갖기 위해서는 항상 인간을 매개로 해야한다. 따라서 한편으론 인간이 절대정신이기도 한 것이다. 자연 속에 인간만이 절대정신이 자기인식할 수 있는 통로.

  4. 인간이 우리가 인식론적으로 밖에 있는 자연을 인식한다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되는 거고, 절대자가 인간을 통해 그걸 바라본다는 관점에서는, 이 자연이 절대자의 자기전개인데 자기인식하는 것이, 인간이 자연을 인식하는 구도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을 인식하는 것은 절대자가 자기인식하는 것과 같게 된다.

  5. 그렇게 보면, 절대정신이 자기활동하는 것이 이성이고 이 이성의 자기인식의 과정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생성변화다. 자기인식의 과정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인간을 매개로 한다. 모든 인간이 다 절대정신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어떤 인간은 감성적 인식 밖에 없는 것이다. 수많은 인간들이 절대정신의 자기인식 (활동)의 도구들이다. 인간들은 절대자가 자기인식하는 여러 유형으로 등장할 수 있다. 헤겔이 절대정신을 보는 자라 할 때, 절대자의 자기인식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 속에서 절대자를 보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방식.

  6. 절대자가 자기인식하는 방법은? 변증법. 변증법도 두 가지 구도. (1) 절대자가 이성을 통해서 자기전개하는 변증법. (2) 인간이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절대자가 자기전개하는 방식을 인식하는 변증법. 인간의 마음, 인간의 의식이 절대정신이 활동하는 것을 아는 힘을 이성이라 한다. 절대정신이 자연 세계속에 자신을 현시하는 것이 이성의 활동이라 한다면, 인간은 의식 혹은 마음을 통해 자연 속의 자기활동하는 이성을 포착하면 비로소 인간의 마음은 이성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7. 그러면 우리가 변증법을 어떻게 설명할까? 절대자가 이성으로서 자기전개하는 변증법을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을 빼고, 자연 세계 속에 절대정신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절대정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최초로 자연으로 나타난다고 말하면 평면적으로 '존재'이다. 우리가 보는 자연 세계 속의 모든 개별물들은 절대정신을 통해서 나타난다. 구체적 개별자들 각각의 특수한 성질은 절대자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라는 것은 자기스스로가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절대정신으로부터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다. 절대자=정신=자연=존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자가 정신적 존재와 자연적 존재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절대자 입장에서는 정신이 있고 이성적 활동을 통해 자연을 나타나게 하고, 자연 속에 구체적 개별물들이 있기 이전에 그냥 존재다.

  8. 존재란 말은 실제로는 어떤 술어도 없다. 어떤 규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성의 자기활동이 전혀 없을 때는 구체적인 개별자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성이 자기활동도 할 수 없다. 존재란 개념은 어떤 규정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무와 같다. 우리가 자연적 세계를 바라보면서 어떤 것을 그것이라 규정하는 것은 자연, 존재이다. 존재가 어떤 성질을 부여받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없는 거와 같다. 헤겔은 존재는 무와 같다, 고 표현한다.

  9. 이 존재라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세계로 나오려면 일정한 성질을 가져야 한다. 결국 규정을 가져야 한다. 그것의 특수한 성질을 내가 알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것이 아닌 그것이므로 부정 개념이 들어간다.) 존재에서부터 어떤 있음이, 어떤 개별자가 있게 된다. 무로부터 무언가가 생성되어져 나온다. 우리가 사는 자연이 존재인데, 이 존재자들이 자기자신의 성질을 가지면서 구체적인 개별자들로 하나하나 다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dasein. 이것을 헤겔적으로 표현할 때는 '정재' - 있음을 정한다. 어떤 속성이 구체적으로 규정이 주어지면 자기자신의 존재가 나타난다, 존재확정이 되었다는 말이다. 어떤 존재가 규정을 받으면서 한 존재가 생성되어져 나온다. 이것이 헤겔이 논리학을 쓰면서 처음 한 일이다.

  10. 이런 틀이 근본적으로 변증법적이라고 말한다. 존재가 있는데 아무런 규정도 없기 때문에 무인데 어떤 규정이 주어지는 과정(생성의 과정)을 거치면 자연 속에 개별물들이 나타난다. 이것이 정재다.

  11. 그러면 우리가 사는 자연세계는 끊임없는 규정을 통해 나타난다.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 속의 어떤 것이 규정을 가지면 그 규정은 일차적으로는 완결적이지만 영원히 그렇지는 않다. 이것이 헤겔의 중요한 지점이다.

  12. 경험적으로 생각해보자. 경험은 있는 것을 확정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있는 것이 있을 뿐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있고, 그러면서도 없다, 이렇게 하면 모순이 되어 같이 있을 수 없다. 경험적으로는 변증법이 성립되지 않는다. 경험적으로는 내용으로 주어진 것을 확정하는 데 그친다. 그런데 변증법적 차이 속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형식논리적으로 동일률을 한 번 보자. A=A. A=~(A*~A). A는 A이면서 A아닌 것이면 거짓이다. 그렇다면 동일률 속에 같은 것과 아닌 것이 같이 들어 있다. 이것이 모순되는 것이다. 이것을 형식적으로 표현할 때, A=~(B). A는 B가 아니다, 라고 표현할 수 있다. 형식논리적 측면에서 볼 때, 모순된다는 것이 경험적 사유에서 보면 인정이 안 되지만, 뜯어서보면 근본적으로 모순되는 것이 공통적으로 있을 수 있다.

  13.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는 당연히 그렇다. 우리가 한 사람을 본다고 말할 때 확정적인 것과 확정적이지 않은 것이 같이 있다. 실제로는 모순되는 것인데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는 같이 있을 수 있다. A가 무엇이라고 할 때, A 속에 그 무엇이 아닌 것으로 A 속에 그대로 들어 있다. 단 하나의 규정을 했을 뿐이고 나머지 규정은 아직 안 되었을 뿐이다. 존재가 어떤 속성(규정)을 갖는다, 한 규정을 받으면서 전체가 된다고 말할 때, 그 규정받은 속성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이것 역시 모순되는 것의 갈등 속에서 '이다'로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라고 말하는 질서 속에 규정을 받는다고 말할 때 규정 속에는 모순되는 것이 공존할 수 있다. '이다', '아니다'라고 말할 때 인간의 인식에 의해 포착할 수 있고 없고 일 수 있고, 어떤 존재가 지금 현실화되어 있는 것과 현실화되어 있지 않은 것이 같이 있다. 변증법은 곧, 지금 드러나 있는 부분과 아직 드러나있지 않은 부분이 공존. 모순은 드러나 있지 않은 부분을 드러내게 하면서 합으로 간다. 또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지양'한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쥐고 거기에 무언가를 더해 위로 올라간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다.

  14. 우리가 어떤 속성이나 성질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구체적인 개별자가 나타난다는 것이고 이것은 한계를 가진다는 것. 따라서 이것을 유한자라고 말한다. 유한자는 자기자신 속에 무한자를 갖고 있다. 내가 한 성질로서 유한자로 등장했지만 내 속에는 한 성질로 갖고 있는 것 이외에 남아 있는 무한. 남아 있다는 것은 한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유한일 수 있는데 자연은 절대자가 자기자신을 전개한 것. 내 속에 있는 것은 유한한 것이지만 그걸 통해 무한으로 갈 수 있다. 인간 입장을 되돌아보면, 인간은 바로 절대정신이 자기인식하는 과정인데, 인간은 절대정신은 자기완결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절대정신은 운동이기 때문에, 이미 완성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운동하는 매 순간마다 자기완결성을 가지고 있다.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은 기독교적 신과 달리 바깥에 있지 않다. 절대자가 정신으로서 자기자신이 활동하는 것이 이성이며 이 활동으로 매 순간 나타나는 것이 자연이다. 이 자연은 결국은 절대자, 정신 자기자신이 나타나는 모습에 지나지 않고, 이 이외에 절대자가 따로 있을 순 없다.

  15. 존재. 무. 생성. 이 생성은 결국 규정을 가짐으로써 개별자가 생기고 유한자가 되는 것이고, 이 유한자 속에 (절대자, 존재) 무한자가 숨어 있다. 칸트와 대조해보자. 칸트는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갖는 감각을 촉발하고 어떤 감각적인 대상의 재료들을 내 속에 집어넣어준다. 인간은 선천적 조건을 통해 그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구성한다. 그 인식의 대상으로 구성되는 조건 속에 물자체가 실제로 숨어 있다. 우리가 현상하는 그대로 물자체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나를 촉발시키고 촉발된 것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 어떤 현상들을 가진다. 그 속에 물자체가 숨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바라보는 현상계 속에, 구체적 개별자 속에, 무한자가 들어 있다. 우리는 구체적 개별자를 통해서 무한자를 볼 수 있는 것이다.

 

  1.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 위까지는 쉘링의 자연철학의 구도와 닮은 꼴인데, 절대정신이 인간을 통해 자기인식을 한다고 말할 때 인간이 그 조건으로 무엇을 갖추고 있나? 이 부분에 대한 설명에서 헤겔은 칸트나 피히테를 가지고 온다.

  2. 일단 칸트를 설명해보자. 인식의 가장 근본적 조건을 선천적 조건이라 표현하며, 이것은 곧 논리, 범주, 순수오성, 개념 이란 말로 다시금 표현된다. 술어를 통해 우리가 뭔가를 인식할 수 있는 것 [▽ 개념에 대한 설명]. 존재가 구체적 개별자로 드러날 때는 규정을 갖거나 성질을 갖는다고 말했다. 문장의 양식으로 바꾸면 주어는 술어를 통해 자기자신이 드러난다. 주술관계를 통해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명제. 어떤 주어를 술어를 통해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개념 활동을 하는 것이고 개념의 입장에서 보면 개념의 자기활동 <= 이것은 인간의 인식활동을 통해 작동한다.

  3. 칸트는 인간이 갖고 있는 인식의 조건이 외부적 대상에 주어지면 그 조건을 통해 인식한다고 표현한다. 그 구도를 들여다보라. 무언가가 감각적인 조건에 주어져서 시간, 공간이라는 감성의 형식에 따라 들어왔다 해보자. 내가 그것을 인식한다. 그 인식하는 대상이 순수오성 개념, 범주에 의해 이미 규정되어 있다. 여기 교탁이 있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내가 갖고 있던 선천적 조건이 이 대상을 구성한 것이다. 그럼 결국은 내가 무언갈 인식할 때, 내가 부여한 인식의 조건을, 내가 다시 인식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자기인식 = 반성]. 칸트의 반성은 질료 없는 반성이라는 것이 헤겔의 비판이다. 자연 속에 자기스스로 전개해서 개별적인 규정이 나타난다고 말하면 ok인데(쉘링?), 이 구체적 개별자가 어떻게 개별자로 자기활동을 할 수 있는가? ; 이 자기활동은 자기스스로 어떤 인식의 조건/틀을 바깥에 주고 그 인식의 틀을 자기자신이 다시 인식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는 자에 의해서만, 어떤 자연적인 것에 의해서만 인식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 이런 인식을 '반성'이라 표현한다.

 

  1. 선천적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번 판단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영국경험론자들처럼 어떤 인식대상이 하나의 규정으로 주어지면 그 이외의 다른 규정으로 주어질 수 없다 = 칸트가 선천적 조건으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판단을 내리고 나면 그 판단에 모순되는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자연 세계가 생성 변화한다고 하면, 이것이 논리적인 형식이거나 선천적 조건만 가지고는 온전히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자연 세계의 변증법적 운동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의 규정으로 끝맺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 운동에 따라 개념적 활동을 해야한다. 그런 경우는 형식논리나 선험적 논리가지고는 안 된다. 그래서 사변적 활동을 통해 우리는 그걸(자연적 세계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다.

 

  1. 도덕 – 구체적 자연물을 빌려오지 않고, 인간 관계 속에서만 선/악이란 개념이 등장.

  2. 종교 – 자연적 형상물이 없고 신앙(절대자의 자기인식 – 인간을 통해서 절대자와의 자기관계를 맺는 독특한 관계의 모습)

 

  1. *가상 – 칸트.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자체의 그림자가 현상 속에 드러나 있다. 그 속에 물자체가 들어있다는 것은 그림자(가상). 가상으로 무한자가 들어와 있다. 개별자를 인식할 때 무한자(절대자)의 그림자가 들어와 있다. 인간의 의식은 절대정신의 활동을 보는 순간 이성이 형성 ; 그 이성을 통해 무한자를 볼 수 있고, 무한자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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