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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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플라톤 국가론 읽기 +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 수업 [2015-2] (본페이지)
플라톤 국가론 읽기 +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 [강의록, 2015]
강의 - 심귀연 센세
■ 국가론 (구성 10권)
1, 2권 : 정의란 ? 국가의 개념--> 국가론 자체는 바람직한 정치체제를 다루며 서론부분에 해당하는 이 부분에서는 /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국가가 필요하다.
3권 : 시[몸에 근원된 것은 익히기가 쉬운 반면에, 그 다음 것을 하는 데 엄청난 방해가 된다. 적당하게 하기를 권장. 아이들에 있어서는 특히 그리스신화 교육을 반대(“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 : 아이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질서를 배워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일정부분 차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그리고 나서 우리 사회의 질서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고 난 후에 다른 것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바람직하다. plato ↔ 후에 보여주면 이미 늦다. 이미 우리는 틀 속에 들어와버리고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 신화를 부정적으로 보았던 plato의 생각은 aristo와 큰 차이가 있다. aristo는 “신화를 사랑하는 자는 철학을 사랑하는 자다”라고 말했다. plato는 “신화를 아이들에게 먼저 가르쳐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 위험하다”. 육체라는 틀 속에서 일어나는 건 이데아의 세계에서 떨어진 것에 불과하므로 근원적인 것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aristo와의 차이를 확인해두고 차이(B)로 넘어가라.], 모방(cf. 아리스토), 교육, 생활방식 (Plato는 모방을 부정적으로 생각 → 변증법 ; 선의 이데아로 가기 위한 과정을 논리적 체계로 만듦. 수학과 과학.)
4권 : 국가의 지위와 역할 (국가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각 정치체제[국가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다고 했지? 정치체제가? 국가의 구성. 통치자, 수호자, 장인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런데 수호자가 군인에 해당한다고 봐야 돼. 수호자가 통치자처럼 표현될 때 문맥에 따라 읽어야 한다. 통치자는 철인이 되는 거고, 수호자는 군인이 되는 거야. 또 시민 계급, 혹은 장인 계급이 있다. 이 각 계급은 자기만이 해야할 자리가 있다. / 이 자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아이들이 태어나면 공동양육을 한다. 다 그렇게 키우는 것은 아니고, 수호자, 통치자 계급의 사람만을 그렇게 한다. 장인 계급은 일반적인 가정을 이루고 있다. 생활방식은 수호자 이상의 계급들과 시민의 방식이 매우 달랐다. 공동양육 중 아이의 능력을 테스트해서, 어떤 아이가 손재주가 뛰어나다면 거기에 특화된 교육을 한다. 3권에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들어 있다.]의 역할이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이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치자의 생활방식이다. 각자 자기자리에서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플라톤은 계속 이야기한다.
[따라서 관리자의 생활방식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누가 ~다워진다' 라는 것에 대해서 한 번 주의해서 생각해보자. 유교적 생활방식에서는 '~다워져야 함'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예술가로, 노동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철학에서 본질적 색채의 농후함… 플라톤이 말하는 본질은 이데아이고 이데아를 모방한 개별자는 각각 다른 존재다. 다른 개별적 존재자들이 자기의 개별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그 개별성을 하나의 보편자 속에 묶어 들어간다. (◀ ~다워야 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철인(관리자)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굉장히 세세하게 플라톤이 이야기한다. → 공산주의적 삶의 방식, 개인재산 없음. 결혼 안함, '여자는 모든 사람의 아내다'. 아이는 아빠가 누군지 모르며 그 아이는 공동양육을 한다. 이 아이가 교육과정을 통해서 지위가 결정된다. 왜냐하면 권력 세습을 방지 위해(나의 재산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어하고 나의 권력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어하면 권력이 세습되게 된다. 그러면 폴리스 전체적인 체계가 무너지게 되어 개인의 나라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기네들은 감각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개인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져 있으므로 스스로를 이성적 존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부의 교육방식 → 주입식 교육이 필요하다(plato). 이유가 뭘까 ?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철학자가 되려고 결심했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민주주의의 폐해가 눈에 들어왔다. 이 민주주의 시대의 많은 사람들, 소피스트들은 상대적 진리를 얘기헀다. 니편 내편 가르고 힘겨루기를 한 것이며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면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권력 속에 들어온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볼 때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 교육에 있어서 주입이란 생각열기를 멈추게 하는 것이며 이게 옳지 않은 건 알지만, 폐해가 있으므로, 미래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또, 철인은 이미 참된 세계를 봤기 때문에 민중들에게 멀리 돌아갈 길을 가르칠 이유가 없다. 민중은 거짓말이라도 자꾸 이야기하면 믿기 때문에,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더 옳다라고 스스로 생각한 것이다.]
사람의 몸의 비유, 영혼의 비유를 설명하는 부분)
5권 : 철인에 관하여 (철인이란 정치하는 사람들 → 이론의 영역인 4권과 달리 실천의 영역)
6 ,7권 : 이데아, 국가 설명 (이데아에 비유를 해서 국가를 설명한다.)
8권 : 다른 정치체제의 문제성
9권 : 철인 왕국에 관하여
10권 : 시민 추방, 영혼 불멸 → 3권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
■ 차이(B) ; 플라톤과 아리스토를 모방을 기준으로 비교하기
플라톤. 모방은 이데아에 가까이 가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모방을 통해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것이 아니라, 모방된 것이 실재라고 생각을 한다. 실재 세계에 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힘겹기 때문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확인하고, 믿으려고 한다.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벽에 비친 것만 진짜로 생각하고 그 뒤쪽에 있는 진짜 세계가 있다해도 내가 안 보았기 때문에 믿으려 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변증법을 강조했던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있다는 선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왜 있느냐를 설명해 주어야 하며, 이것을 설명해주는 과정이 변증법이다. 플라톤의 변증법은 바로 선의 이데아로 가기 위한 과정을 논리적인 체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저번 시간에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차이가 수학 또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것이 변증법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서 '아, 내가 모르는구나.' '아, 이것이구나' 깨닫게 만든다. 그런데 플라톤은 지식의 체계를 가지고 이데아를 설명해나간다. 그러므로 변증법은 각각의 개념들을 분류하고 그 개념들을 통해서 가장 근원적인 곳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다. → 따라서 플라톤은 모방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방을 실재라고 알고 이 모방을 모방하려고 한다, 라고 이야기한다. 모방을 모방한다는 것은 실재로부터 한 단계 떨어진다는 것이다. ⓐ~ⓒ를 참조하라.
ⓐ 이데아
ⓑ 모방 : 현실, 실재로 삼음(부정적)
ⓒ 시뮬라크르 : 이 단계에서만 모방과 모방끼리 서로간에 변화할 뿐 진리를 향해 위로 나아가는 과정이 결여됨. 어디에도 진짜가 없는 세계가 됨. 모방이 기준이 된 이 현실 세계를 실재로 삼는 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함.
cf. 아리스토는 시학에서 모방이야말로 진리에 다가가는 길이라 주장.
■ 차이(c) ; 플라톤과 아리스토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비교하기
근대 이후 플라톤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그것이 닫힌 세계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이데아 안에 있고, 이것을 벗어날 수 없다. 현실에서 아무리 경험적 세계가 꿈틀꿈틀거린다고 해도, 이 세계는 언제나 이데아를 벗어날 수가 없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이성이다.
cf. 빗대자면 아리스토의 세계에서 이데아는 안에 있고 이 이데아는, '감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본질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이다.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이 이데아로부터 출발해서 나아가는데, 이 나아가는 세계가 무한으로 나아간다. 무한의 부동자[ → Aristotelian 항목을 참조하라.].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의 형이상학이다. 실체라는 것이 플라톤에 있어서는 고정된 것인데, 아리스토는 고정된 것은 완전하지 못하다고 본다. 변하지 않는 것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