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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2015

 

강의(이성환 교수)

 

 

칸트는 합리론과 영국경험론의 결합, 이라고 일반적으로 이야기된다. 어떤 부분이 그런가, 라는 것이 불투명하게 보이는데, 간단히 이야기해보면, 칸트가 갖고 있던 감성-오성-이성이라고 말하는 그 구조가, 영국경험론이 만들어낸, 발생론적인 심리적인 틀이다. 감각-지각-오성 이렇게 말했던 구분이 칸트에게서 이렇게 틀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합리론적 요소라고 말하는 것은 본유관념, 이런 식으론 있지 않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말했던 본유관념, 라이프니츠가 보완해서 '모나드론'으로 입론해던 그런 틀은 칸트에게 있어서는 '선험적 조건'이라는 개념으로 들어와 있다. 칸트 스스로는 흄의 이론 자체가 독단론(검증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전제를 맹목적으로 믿는 것)의 꿈을 깨게 했다, 고 말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형이상학적인 틀, 구조, 논리적인 형태, 이런 것들이 검증되지 않는 채 사용되었다는 걸 흄이 보여준 것이다. 또, 철학적인 틀도 그렇지만 과학적 지식도 검증되지 않은 채 당연한 것으로 믿어왔던 것이다. 흄의 비판은 그런 것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자각을 일으키게 하고 인식론자들에게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칸트는 흄이 비판했던 과학적 지식을 정당화하는 논리적인 틀을 만드려고 스스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순수이성비판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과학적인 지식, 혹은 과학적 이성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나, 이런 걸 논변해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자연적 세계가 있다, 이렇게 말을 할 때, 자연적 세계를 과학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나, 자연적 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던 그런 틀을 자연적 세계를 넘어서 적용한다면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에서 '선험적 변증론'에 속해있는 부분이다. 여기에 속해있는 부분이, 데카르트가 설정했던 본유관념에 속하는 것이다. 그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공리라고 말하는 부분들은 '선험적 조건'으로 다, 이제, 그 '범주'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했다고 볼 수 있고, 그 반면에 자아라든지 신이라든지 이런 개념들을 논리적인 조건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고 본 것이며, 그것을 선험적 영역 속에 다 남겨두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적인 것과 자아나 세계라고 말하는 것을 변별하지 않고, 하나의 논리적 틀로 다 설명했다고 생각했다. 과학적 세계는 선험적 조건을 갖고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면, 과학적 세계를 설명했던 이 논법이나 틀을 가지고 방금 말했던 것처럼 신이라든지 영혼이라든지 세계 전체라든지 이런 것에 적용시키면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렇게 본 셈이다.

 

세계를 증명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양쪽 다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오류추리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신에 대해 증명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선험적 가상에 빠지고, 이렇게 쭉쭉 붙여 놓았다. 그런 것들이 칸트 이후에 새로운 형이상학적 문제로 남게 된다. 이런 것들이 이제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는] 이런 틀이, 독일관념론 쪽으로 넘어가는 디딤돌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가, 우리가 갖고 있던 인식은 관념이다, 이렇게 말하고, 관념은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있고 그걸 가지고 지식을 형성하는데, 이 관념이 내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하면, 내 마음 바깥에 무언가가 있어야지 객관성을 확보할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신을 요청하여, 내가 갖고 있는 관념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신이 필요하다고 된 것이다.

 

그런데 경험론자는 우리 바깥에 무언가가 있는데,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말을 한 것이며, 바깥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영국경험론자는 어떻게 입증하는가 ? 로크는 제1성질을 통해서 추론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도 입증이 안 되기 때문에 추론이다. 그래서 제1성질 제2성질로 나눈 것에 대해 버클리가 비판을 하고,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추론인 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러니까 버클리는 아예 노골적으로 '신이 지각한다'고 대체한 것이다. 따라서 물자체 개념이 뜬금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고, 앞에 있는 철학사 속에 인식론적 틀 속에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로 이미 등장해 있다. 칸트가 그 부분을 받아들여서 어떻게 정리하는가 ? 정리하는 방식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미 제기되어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합리론의 방법, 경험론의 방법, 칸트의 방법 ; 그것을 정확하게 변별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의 문제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 인간이 세계 속에 있고, 인간이 세계하고 관계를 맺고, 이런 것이다. 인간이 세계 속에 있다고 말할 때 그 세계가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런 세계인가 ? 이런 것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개별적 사물 밖에 없는데 개별적 사물이 세계인가 ?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개별적인 사물은 경험적으로 주어져 있는데 이 경험적 세계를 넘어서 있는 그 세계는 도대체 뭐고 ?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가 ? 또 우리가 감각경험으로 본다고 말할 때 마음이란 것을 세우면 마음은 도대체 뭔가 ? 마음이 있다 라고 말하면, 우리가 바라보는 이런 것은 마음 속에 드러나 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면 드러나 있는 것, 이것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라고 물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내가 있고, 내가 세계 속에 있고, 내가 세계 속에 있다고 말하면 나는 세계와 관계를 맺어야 하고, 인식론적 관계에 있다고 말하면 인식론적 문제일 것이고, 인식론적 관계에 있는 대상의 존재를 문제삼으면 형이상학이 될 것이고, 바깥의 세계와 내 삶으로서 관계맺는다, 이렇게 말하면 생존/본능과 관련이 되는 것이고, 이런 것이 증명이 안 된다 하더라도 사회적 문제가 관계로부터 유발된다. 여러분은 문제라고 할 때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한다.

 

◆ 칸트의 철학적 주 관심사는

ⓐ 과학적 세계

-“흄에 의해 독단의 잠을 깼다.” 흄 이후 과학이 딛고 있던 토대에 대한 회의가 성립하며, 흄이 흔든 과학의 토대를 칸트 자신이 놓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칸트는 “선천적 종합판단이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이것이 과학의 토대에 대한 칸트의 문제 의식이다. 즉, 칸트는 필연적 지식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려 하고,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려 한다.

 

 

 

 

-칸트는 어떻게 과학적 지식을 정당화하는가? 그는 감성과 오성의 결합을 통해 과학적 지식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 전에 역사를 살펴보자.

(표시작)

 

 

 

 

 

 

 

 

 

 

 

 

(표끝)

 

ㄱ. 감성

칸트는 공간과 시간을 아울러 대상세계가 성립하기 위한 선천적 조건인 감성이라 한다. 대상세계는 감성의 능력과 조건으로서만 주어진다. 이때 공간은 우리가 보는 대상의 성립 조건이 되고, 시간은 우리 마음의 흐름 속에 대상이 들어오는 조건이 된다.

우리가 칸트가 가진 공간관을 비판한다 할지라도 대상의 성립조건으로서의 공간, 선천적 조건으로서의 공간 개념은 훼손되지 않는다. 또한 시간 개념은 흄과 대비적으로 cf해볼 수 있는 듯 하다.

 

ㄴ. 오성

“이건 연필이다.” “풀은 초록색이다.”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성을 사용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이 오성을 통해 인식이 성립된다. 오성은 인간이 갖고 있는 '생산적 구상력'으로서, 생각을 구성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흄의 '상상력'과 cf해볼 수 있다.)

 

이 판단의 조건은 대상에서 오는 게 아니다. (cf. 영국경험론자는 언어를 어떻게 보는가?) 칸트의 논리는 인식이 성립하는 언어적 형식의 틀은 어떤 경우에도 대상에서 오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언어를 주어와 술어로 묶어내어서 받아들이는 것이 '범주'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 범주는 양, 질, 관계, 양상으로 나뉜다. 칸트에 의하면 이 범주는 경험 속에 있지 않고 인간이 자신의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조건으로서, 순수하게 오성 속에서 파악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칸트의 순수 오성 개념은 범주가 되는 것이다. 이 범주를 통해 우리는 낱낱의 것을 하나로 묶어서 받아들이는 힘을 가지게 된다.

 

판단은 양, 질, 관계, 양상이라는 조건 속에서 성립된다. 왜 그러한 '범주'가 선천적 조건인가? 칸트는 이를 '선험적 연역'이라는 체계로 설명한다. 인간이 말할 수 있는 모든 판단을 언급한 다음, 모든 판단의 유형을 분류하고, 이것을 일반적으로 환원시켜보면, 판단의 양식은 4가지 범주로서 말해질 수 있다.

 

지식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실체와 속성 양자의 관계맺음을 가지고 성립된다면(*), 칸트에게서도 범주 분석을 통해 지식의 필연성이 성립되는 과정이 밝혀지게 된다.

 

이로써 선천적 종합판단이 가능하게 된다. (『순수』 1/3)

 

ⓑ ↑↓ 통합적 체계 구축 노력

ⓒ 도덕적 세계

 

  • 칸트의 물자체.

자극을 주는 것까지는 인정한다. 또한 칸트는 세계 전체나 신 같은 것도 물자체로 본다. (cf. 로크 ; 감각에 주어지는 것의 기원. 흄은 그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 선험적 변증론

경험적 세계에서 성립하는 틀으로 비경험적 세계를 설명하려고 하면 빠지는 오류에 대해서.

첫째, 인식하는 힘 스스로가 자기를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작동하는 마음 자체는 관찰대상으로 성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만약 이를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선험적 가상에 빠지게 된다. (cf. 영국경험론자는 내적 관찰, 내적 경험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감성의 형식을 가지고 포착해낼 수 없는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칸트는 그러한 이율배반으로 네 가지를 든다. 가령 '시간은 시초가 있다'는 진술과 '시간은 시초가 없다'는 진술은 둘 다 증명이 가능하므로 이율배반에 해당한다.

셋째, 신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래부터는 칸트의 윤리학을 채록하였습니다.]

 

칸트의 인식론과 윤리학을 모두 토론하였는데,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괴리라는 측면이 칸트 이론 속에 본격적으로 부각된 셈이고, 이런 부분들이 뒤에 칸트 철학이 정돈되면서 쟁점이 되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독일관념론이 시작되었다.

 

칸트가 갖고 있는 윤리학적 의도.

형이상학적이거나 이성적 윤리학일 수 있고, 그 반대로는 이제 현대에 와서 공리주의적 혹은 감정적 윤리학 이런 식으로 나뉘어진다. 칸트는 이성적 윤리학의 입장에 서 있으며, 그러면 칸트의 윤리학이 아리스토와 어떻게 다른가 물을 수 있다. 또 칸트도 실질적으로 아리스토나 공리주의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윤리학을 세웠으므로 이들의 입장을 잘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윤리학 할 때, 결과주의(어떤 행위가 이루어지고, 그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가지고 윤리적인가 아닌가를 판가름 / 어떤 행위에 있어서 목적을 지향하거나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 경우 / 대표적 유형 : 법 – 어떤 범죄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작동하지 않는다, 부권적 간섭주의도 결과주의의 관점에서 시행. 철저하게 공리주의적 전통 속에 서 있다.) 혹은 동기주의(칸트) 사이의 구분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리스토와 칸트 둘 다 이성주의 윤리학이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는데, 차이는, 아리스토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최종적으로는 행복을 지향한다고 하므로, 인간의 행위 자체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목적론적 결과주의적 측면이 있는 것이다. 공리주의는 나에게 쾌락을 가져다주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 있으면 그게 윤리적으로 선이라고 하는데 그걸 전체적으로 다 결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동기주의의 근거를 인간의 이성에 토대지운다. 의도와 동기는 구분되는가 ? 의도는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 그때 그 사람이 그런 의도를 갖는 여러가지 동기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두 가지는 구분된다.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구체적 행위를 기획하면 의도가 되는 것이고, 그것 없이 우리는 동기만을 가질 수 있다. 동기는 실천될 수도 있고 실천되지 않을 수도 있다. 동기에 의지가 붙는다 하더라도, 동기 자체가 선할 필요가 있다.

이 동기가 이성으로부터 유래한다. 이성이라는 이 개념이 정확하게 설명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가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존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성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동치처럼 보인다. 다르게 보면 사회적(정치적)일 경우에만 이성적이다, 이렇게 보일 수도 있다. 고대 폴리스에 있어서 이성적이란 말은 폴리스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 정신에 동화되었을 때에만 이성적이라고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가 소위 칸트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 ? 칸트는 아리스토와 확연히 다른 이성 개념을 사용한다. 이성 스스로가 자기 검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성 개념 속에 어떤 경우에도 공동체가 들어있지 않다. 근대에 들어와서 사회가 형성되는 조건, 인간이 자유롭다고 말을 하고, 인간이 자기가 갖고 있던 천부인권을 양도해서, 양도의 결과로 사회계약을 통해서 사회가 성립되든지 한다. 그래서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맞는 말인데, 이 이성을 통해서 사회나 국가가 성립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희랍적인 폴리스를 전제로 해서 폴리스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 이성을 가진 자 라는 전통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칸트가 말한 것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의해서 인간의 사회적(정치적) 삶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 자체 속에 이성의 능력 속에 이미 역사적 조건이 들어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소지가 없다. 에틱스라는 말은 에토스에서 왔다. 에토스는 희랍인들이 갖고 있는 공동체에 감정 이입하는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 에토스를 표현한 공동체는 역사를 갖고 있다. 에틱스의 어의를 보면 근본적으로 공동체가 있고 거기에 역사가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나, 칸트는 이성에 의해서 어떤 윤리적 원칙을 세운다고 말할 때, 전통 속에 들어있는 어떤 부분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이다. 흔히 우리가 계몽주의라 할 때, 계몽은 근본적으로, 과거로부터 온 모든 것들의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출발한다. 어떤 권위도, 어떤 전통(관습)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이성에 의해 검증받지 않은 어떤 것도 옳거나 정의롭거나 타당하다고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성이 독자적으로 어떤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현행의 도덕적 관습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성에 의해서 검증되지 않고는 도덕적 원리로 수용해선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칸트 윤리학에서 우리가 많이 듣는 개념 중 '격률'과 '명법(도덕적 명령)'이 있다. 격률은 개인이 갖고 있는 신념이다. '내일 아침부터 6시에 일어나겠다'라는 식의 개인의 삶에서 세울 수 있는 규칙이다. 개인이 항상 자기 삶을 꿈꾸면서 계획을 세우고,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자기에게 부과하는 명령까지 격률이라 할 수 있다. 이걸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의지의 활동은 내가 세운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격률은 일정부분 사회적 관습이 내화된 것으로서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 살아가면서 형성하게 된 것이다. 칸트는 이 격률이 명법, 도덕적 법칙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명법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 명법은 법칙을 인간 삶에 적용시킬 때, 그걸 명법이라 이야기한다. 자연적 세계가 따르는 것을 자연적 법칙이라고 얘기하는데, 인간의 행위는 자연적 경향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 속에 인간의 삶 속에 활동할 때 내려지는 명령이므로, 도덕적 요청과 도덕적 명령이 있는 것이다. 앞서서 격률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우리가 행동할 때 근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신념 체계라면, 우리가 대다수 어떤 신념을 가질 때, 살아오면서 형성하게 된 관습이나 훈육된 내용들을, 내가 격률(신념)로 가지기가 훨씬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이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도덕적 명령이 된다고 하면 어떤 경우에 그렇게 될까 ?

칸트가 이야기할 때 그냥 격률 명법이 있고 이 격률은 개인적 신념이고, 명법은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신념이고, 이성의 검증에 의해 명법이 되고 ㅡ 이렇게 이야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개인적 신념을 가지고 있고, 내가 이것을 내 이성에 의해 검증해보고, 이렇게 검증된 내 신념만이 도덕적인 명령이 될 수 있고, 내가 그것을 따를 때, 비로소 도덕적 인간이 된다 ㅡ 이렇게 말해야 한다.

격률과 명법의 차이는, 격률은 개인이나 한 집단의 신념일 수 있지만, 명법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따라야 할 인간적 법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에 의하면 이런 인간적 법칙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 명제 – '내 의지의 격률이 항상 보편타당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이 기준이 명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개인적 신념을 가질 수 있고, 누구든지 사회적 관습을 내화해 있는데, 그것을 시행할 때, 항상 보편타당할 수 있도록 (보편타당이란 말은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 내가 가지고 있던 격률이 항상 보편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고 칸트는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개인이 갖고 있는 신념이나 사회가 준 인습적 관습이거나 상관없이, 내가 그것을 시행할 때, 물어보라는 것이다. ㅡ내가 이것을 시행하는 것이 이것이 정말 도덕적인가 ?

 

그런데 한 공동체가 갖고 있는 행위를 훌륭하다고 말하는데, 그건 훈련을 통해서 내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도록 체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성이 항상 명료하게 눈뜰 수 없으므로 훈련을 통해 저절로 반응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데, 칸트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설사 어떤 격률이 내 속에서 자동적으로 시행되기 이전이라도 내가 그걸 이성을 통해 이런 행동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겠다 라는 것을 검증하고 난 뒤에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반응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아리스토 : 사회에 있는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걸로 자기자신은 훈련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가 말하는 덕이다. 이렇게 보면 칸트는 철저하게 인간의 이성에 의해 산출될 수 있는 것들을 도덕적 명령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 셈이다.

그래서 앞서서 말했던 칸트 이성에 의해 검증된 원칙을 빼고는 전부 가언명령이라고 한다. 내가 어떤 신념을 갖고 행동할 때 결과가 잘 나올 것이라는 것은 전부 인간의 행동을 추구하는 가언명법(조건이 붙어 있고 조건에 따라서 인간이 행동하는 명령)은 도덕적 행위가 될 수 없다.

또한 칸트는 다른 사람 눈에 결과적으로 좋게 나왔는데 의도가 나쁘면 도덕적 행동이 안 된다는 것이다.

칸트는 정언명령을 동기에 의해서 결정짓기 위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 그런 행동을 어떤 행동이라고 말하는가 ? 선의지에 의해서 행위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도덕적으로 될 수 없다. 이성의 판단에 의해서 선이라고 결정되는, 그런 것에 의해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어떤 경우에도 도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래서 칸트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칸트의 윤리학은 철저히 이성주의적 토대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칸트는 구체적으로 어떤 도덕률을 가지고 있나 ? 칸트는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도덕률을 말한 적이 없으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 것이다. 너 자신이든 타인이든 목적으로 대하지 한갓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 그것이 무엇인가 ? 인간은 어떤 경우에 있어도 수단으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수단이란 내가 어떤 이득을 취하기 위해 다른 것을 도구처럼 사용한다는 뜻이며, 이걸 가장 많이 쓸 수 있는 영역이 사물의 세계이다. 도구로서 망치는 못을 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세계는 도구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은 항상 유용성에 의해 쓸모 있음이 판단된다. 그러면 내가 도덕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삶의 장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인데, 내가 인간관계를 맺을 때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쓸 수 있나 ? (녹음누락)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삶을 표현해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팔 경우 그 노동이 결국 자신의 삶을 소외시킨다. 칸트는 인간관계를 훼손시키는 어떤 것도 도덕적일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칸트의 도덕 – 선의지 – 보편타당 – 준칙 - 법칙

 

(녹음복구시작)

타의와 자율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논의가 많이 되었다.

근대의 시작은 역사적으로 보면 개인이 처음 등장한 것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진다. 그것은 자유를 가진 개인이 근대에 처음 생겨났다는 뜻이다. 이제 16세기에 데카르트가 처음 등장해서 인간을 규정할 때, '자유'라는 말을 쓴 것으로서, 획기적인 것이다. 그것이 확장되면서 칸트에 와서, 인간의 이성이 자유롭다고 하는 주장이 생겨난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조건에 의해서도 구속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유로운 이성이 가진 능력은 비판적인 능력이다. 인간이 자유롭다고 말을 할 때, 자유로운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외부로부터 자기를 규정할 수 있는 어떤 무엇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외적 규제가 들어왔을 때 오로지 자유로운 내 이성에 의한 동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자유롭다, 고 말할 때 근본적으로 이성이 해방되어야만 한다.

인간 행위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내 스스로 세운 규율로부터 온다 = 자율의 의미이다.

자유와 자율은 완전히 다르다. 자율로 세울 수 있는 명령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 (내가 그 사람을 대할 때 수단으로 대하나 목적으로 대하나 ; 자기 물음 ; 자기의 이성이 스스로 검토해서 나온 법칙) → 다른 도덕적 원칙은 이 정언명령에 맞추어서 검증받는 것이므로, 칸트는 세부적 도덕 덕목을 제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언명령(제) 자체의 상호 충돌은 있을 수 없다.

(위의 선의지 부분으로 보완)

칸트의 의도는 인간이 도덕적이려면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인간이 갖고 있던 신념이나 관습체계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 이성은 순수하기 어렵다. 어떤 경험적이거나 역사적 조건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는 이성이란 있을 수 있을까 ? 만만치 않은 문제이다. 내가 이런 인습체계를 벗어나서 한 인간의 행동이 도덕적인가 평가하거나, 한 인간을 목적으로 대한다는 말이 쉽지는 않다.

우리에게 깊숙히 박힌 인습은 이성에 의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습적인 체계가 강한 사회를 봉건적 사회라 한다. 칸트가 갖고 있던 윤리학의 혁명적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칸트의 선의지란 말, 자율이란 말, 이성에 의해 검증된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 훈육 / 계몽 / 교육 (윤리적 행위조차도 교육을 통해 함양될 수 있다)

데카르트 – 본유관념

로크 – 백치, 어린아이

라이프니츠 – 이성의 씨앗은 뿌려져 있지만 그 자체가 계발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 이성은 올바로 작동하지 않는다(잠세태로 있는 것이다).

→ 인간의 이성은 계몽될 필요가 있다.

칸트 – <'계몽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응답> 인간이성은 미몽의 상태가 있는데 인간의 이성을 계발해서 계몽시켜야 한다 (= 라이프니츠의 전통 속에 있다).

 

  • 경향성 = 자의식 ; 자의식은 선의지 ? 그러므로 경향성을 지양했다고 볼 수 있나 ?

이 자의식이 경향성을 선택하는가, 이성의 명령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도덕적이다, 도덕적이지 않다가 판가름나기 때문에, 자의식을 인정한다고 해서 칸트가 말했던 자율이라는 개념이 손상당하지 않는다.

 

  • 미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정초. 기존의 형이상학 부정. 순수이성비판 앞의 인식론은 지식의 정당성에 관한 응답. 과학적 세계에 적용되었던 규범이나 원리들을 앞서서 말했던 것처럼 영혼이나 세계나 신에 적용할 수 없음(선혐적 변증론). 자기자신이 부정한 형이상학은 자연적 세계를 탐구하는 방식을 인간의 영혼이나 세계 총체상이나 신에 적용시키는 형이상학.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이성에 의해 새로운 형이상학을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실천이성비판 등의 텍스트가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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