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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년 1학기에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기반으로 배운 내용
2. 4학년 학생들의 발표를 참고한 메모
(15년 1학기에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기반으로 배운 내용)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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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칸트는 이성주의 철학에 발을 딛고 있었으며 이성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칸트는 주체 자체가 이성의 자명한 출발점이 아니며, 그것은 진리에 이르기에는 지극히 취약한 기초라는 흄의 비판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칸트는 처음부터 질문을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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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칸트는 인간 이전에 주체라고 한 것을 인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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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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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질문을 다루는 것이 순수이성 비판, 둘째 질문을 다루는 것이 실천이성 비판(행동의 당위/도덕), 인간이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목적)를 다루는 것이 판단력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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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문제설정 : 인간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활동인 인식-행동-목적이 인간이란 주체 자신에 의해 근거지어질 수 있는가. 동요하고 깨져 버린 주체를 어떻게 위기에서 구해낼 것인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참된 지식을 어떻게 새로운 기초 위에 올려 놓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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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들, 지각경험들, 감각경험들의 선험적 기초가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 '선험적 주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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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비판의 기획의 취지 : 주체가 출발점이 될 자격이 있는지, 자격이 있으면 무엇 때문인지, 주체가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지 묻는 것. 이 기획은 데카르트가 자명하게 전제한 것을 어째서 그게 자명한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고 이 기획 속에서 주체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중심 자리로 복귀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근대적인 사고의 기반을 확고하게 했다.
칸트에 의한 진리 개념의 전환과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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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경험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귀납론과 인과법칙 부정) by 흄 influenced K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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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자체와 현상의 구별 : 거울에 비친 사물의 모습이 현상이고 거울에 비추기 전의 사물은 물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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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에 비치지 않은 것을 본다는 말처럼 물자체를 안다고 말하는 것이 형용모순이라면, 진리를 대상(물자체)과 일치하는 지식이라고 봤을 때 진리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피할 길이 없다. 때문에 칸트는 진리의 개념을 다른 식으로 정의하려고 노력한다. 칸트는 우리눈에 비친 것이 물자체와 일치하냐 아니냐를 두고 고민할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걸 '그것'으로 판단하게 하는 방식('판단형식')을 연구하려 한다. (이에 따르면, 진리를 대상에서 찾을 게 아니라 대상을 만드는 우리의 판단형식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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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대상이 인식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인식이 대상을 만든다는 생각, 진리는 대상에서가 아니라 주관의 판단형식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두고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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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험적 종합판단, 아 프리오리[선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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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험적이라는 말은 경험적이란 말과 대 대칭되는데, 경험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ex 모든 미인은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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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판단'은 주어에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위의 ex에 해당한다. 미인에 예쁘다라는 술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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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판단'은 주어에 술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ex 모든 미인은 키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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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판단은 우리에게 아무런 지식도 추가해주지 않으므로 동어반복tautology라고 한다. 반면 종합판단은 대개 경험적이고 후천적이다. 그것은 주어에 없는 지식을 우리에게 추가해주지만 언제나 타당하지도, 확실하지도 않다. 칸트의 문제설정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추가해 주면서도 언제나 확실하고 타당한 판단은 없을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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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맥락에서 나온 것이 선험적 종합판단이며, 그는 “모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다”라는 판단이 그에 부합한다고 한다. 이 명제는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삼각형을 많이 그려보지 않아도 언제나 타당하다. 그러나 삼각형이란 주어를 분석한다고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선험적이며 종합판단인데,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진리에 도달하게 해주는 판단형식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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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 밖에서 찾는 게 아니라, 언제나 올바르면서도 새로운 지식을 추가해 주는 판단형식 = 선험적 종합 판단에서 찾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가 흄이 해체했던 진리 개념을 재건하는 바이다.
근대적 주체의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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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자체는 다양하지만 ~이 없으면 경험이 불가능한 게 있다. 이 ~에 무엇이 들어갈까가 칸트가 낸 문제이다. ~에는 '주체'가 들어가며, 주체가 없으면 어떤 경험도 불가능하다. 칸트는 흄과 달리 그것이 경험보다 먼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경험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선험적 조건'이다. 이것은 경험에 좌우되지 않는 확실성을 가져야 하며, 모든 인간들이 반드시 동일한 형태(형식)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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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sinnlichkeit : 대상을 받아들이는 기관 (어떤 수용성). 어떤 인식도 감성을 통해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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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험적 감성형식 : 우리가 대상을 받아들이는 데 공간이라는 형식이 없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런데 공간은 보고 듣거나 경험되는 게 아니다. 반면 보고 듣거나 경험이 가능하려면 공간이 경험보다 먼저 있어야 한다. 또한 시간 역시 어느 시점에 있다 없다를 지각하게 해 주는데 경험보다 선행하면서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감성형식이다. 따라서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경험에 선행하면서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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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verstand : 그 다음에 우리는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물체가 어떤 건지를 판단하게 된다. 이처럼 받아들인 물체를 분별해내고 그 물체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하는 기관이 오성이다. 오성은 분별력으로, 크다 -작다/ 하나다-다수다/ 필연적 -우연적 등의 범주를 통해 대상의 성질을 구별해내고 그것들을 결합해서 “나무를 비비면 불이 난다”같은 그러한 판단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런 능력이 제대로 활동하려면 범주가 있어야 하고, 범주가 사물의 비교와 연관을 찾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범주가 경험에 선행하며, 경험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경험을 좌우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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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이 범주로 인해 인간이 법칙을 인식하고 사물들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언제나 있는 것이며 변화되지 않는다. 또 이것이 공통되기 때문에 인간은 공통된 판단과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진리에도 이를 수 있다. 이 범주는 칸트의 '선험적인 오성형식'이다. 오성의 수준에서는 범주야말로 ~에 들어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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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만으론 느낄 순 있어도 판단할 순 없고, 오성만으론 인식할 자료가 없기에 느끼지도 판단할 수도 없다. 둘이 결합해서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식은 '이성'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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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 하나의 원리로 통일하는 능력. 칸트만의 고유한 개념으로 인간의 이성이나 이성주의와 상이한 개념이다. 이성은 경험을 넘어서, 하나의 원리로 다양한 경험들을 통일하여 파악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근본적인 원인에 가 닿고 싶어한다. ; 생명의 신비함과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은 세상 모든 것에 생명이 있다는 식으로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확대하고,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을 낳은 궁극적 원인에 가 닿고 싶어할 때, 여기서 궁극적 원인이나 '신'이란 존재를 통해 다양한 모든 걸 낳은 원인을 만들어내는 것 ; 이게 이성이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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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성은 하나의 원리로 모든 걸 통일하려하다보니 당연히 경험치 못한 데까지 나아간다. 경험치 못한 것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 하니 서로 상충 주장이 나타나고,양쪽 다 옳다고 증명되는 경우가 생긴다(이율배반). 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율배반의 예를 여러가지 들며, 이성이 이율배반에 빠지는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본다. 이것이 인간 이성(넓은 의미)의 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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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어떤 경험이나 인식도 피해갈 수 없으며, 확실하고 선험적인 것들을 찾아내었다. 선험적 감성 + 선험적 오성 = 선험적 주체. 이것들은 관념 감각 다발에 불과한 경험적 주체와 달리, 경험과 감각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좌우하며, 확실하고 항구적이란 특징을 갖는다. 그것이 객관적 주체의 측면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며 유아론을 극복했다고 보고 싶을 수도 있다. --> 이가 흄 비판의 '선험적 주체'적 완성이다.
근대적 윤리학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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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성비판, 여기서 던지는 도덕철학의 가장 근본적 질문 - “인간의 의지와 행동은 이성의 힘만으로 규제될 수 있는가?"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규제하는 원리가 인간의 이성 안에 있을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보편적인 원리가 있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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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성이 신에게서 독립해 존재하고 인식하며 행동할 수 있는가 ; 근대 철학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질문 [만약 인간 의지를 규제할 보편적 원리가 이성의 내부에 있다면, 이성의 실천적 자율성이 원리적으로 확보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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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quotation : 너는 언제나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인 입법 원리로서 타당하게 행동하라.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하는 너의 의지가 법으로 제정되어도 좋을 만큼 보편적인 거라면 그것대로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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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개념의 재정의 : 의지의 자유, 행동의 자유란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 하기 때문에."란 원칙에 따르는 것. 즉, 보편적 도덕원칙이란 본질적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규정임. 거기에 따라 사는 것만이 올바른 윤리적 삶이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자율성과 자존을 지키는 길(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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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개념 재정의 : 선에서 도덕이 나오는 게 아니라 도덕 법칙(올바른 행동의 기준)에서 선이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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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재정의를 통해 칸트 윤리학은 계몽주의적 성격. 입법 원리에서 어긋나는 의지, 욕망, 법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인간의 자율성을 포기한 것이 되므로, 훈련되지 못한 대중은 이 도덕적 원리를 따르는 인간으로 계몽되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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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도덕철학에서 두드러진 것은 '법'. 이 두 재정의에서 보듯 보편적인 도덕 원칙도 입법 원리로 정의되었고, 자유나 선 역시 도덕 법칙에 의해 정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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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부르주아지 관점으로 보는 이도 있다. 혈연, 무력,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와 달리 공화주의자로서 프랑스혁명에 고무되었던 칸트는 법을 통해 지배를 확립하려고 했던 부르주아지라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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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와 신 : 칸트는 신을 증명하려 한 기존의 모든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고 진리를 추구하는 순수이성의 영역에서 신은 증명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신을 이론적인 이성의 영역에서 쫓아낸다. 실천이성의 영역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보편적 도덕 원칙이 차지함으로써 신이 개념적으로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보편적 가치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데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시말해 도덕철학적 필요에 의해 실천이성이 신의 존재를 '요청'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의 존재가 실천이성의 요청에 의한 것이란 점이다. 이것이 이성을 신의 피조물이요 그것을 인식하는 수단이었던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환인 것은, 이성의 필요에 의해 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신은 이제 이성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이성에 의해 포섭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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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종교 자체는 근대적 윤리학을 위해 봉사하는 도덕철학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는 근대적 윤리학을 확립하고 완성한 사람이며 근대철학의 승리를 선언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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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진리와 주체를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하기 위한 전략은 (1) 진리의 주관화 : 진리를 외물과 대상에서 찾지 말고 주체 내부에서 찾자 / (2) 주체의 객관화 : 모든 주체가 선험적으로 갖고 있으며, 경험이나 인식의 기초가 되는 필수적인 형식을 주체 내부에서 찾아냄으로써 그것이 모든 주체에 공통된 것=객관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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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과정의 복합으로 진리는 주관화되면서 동시에 주관적인 데 머물지 않을 수 있었다. (주관-객관, 주체-대상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칸트적 길 ; 이를 통해 주체와 진리를 되살려내려는 전략인 것이다.)
칸트철학 자체에 담긴 위기의 요소들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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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리를 주관화하는 전략. 주관 밖에 '물자체'가 알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과 그것은 어떤 관계를 가질까? No one knows. 따라서 진리란 오직 주관의 형식으로만 정의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리라고 간주하는 지식(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것은 경험하기 이전부터 '누구든 오인하는' 선험적 허위일 가능성은 없을까?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선험적 허위'라면 진리로 취급되어도 좋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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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칸트가 선험적 종합판단의 예로 든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180도/는, 지구의에서 그려진 삼각형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주체와 대상간의 일치를 확인할 수 없다는 문제는 물자체와 현상 사이의 문제로 전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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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험적 주체에 관한 문제. 난점은 선험적 형식 자체에 있는데, 칸트의 범주가 모든 판단의 전제가 되는 '선험적 형식'인가? 범주 이전에 범주를 나누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며, 그게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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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선험적 감성형식인 '시간과 공간'은 칸트가 뉴턴의 물리학에 기초를 두고 있는 바, 뉴턴 물리학에서 시공간은 절대시간, 절대공간이며 경험에 의해 달라지거나 변화하는 것이 아니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그것을 해체했다.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시간은 조건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는' 것이며 공간 역시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구부려져 있으므로 중력장에 의해 다르게 만들어지고 '경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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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분리. 여기서 순수이성은 '선험적 형식'이라는 이유로, 진리를 기초짓는 확실한 근거로 정당화되지만, 실천이성은 어떻게(무엇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칸트에게 행동과 의지가 진리와 전혀 별개의 영역이라면, 보편적 윤리학의 근거는 무엇인가? 실천이성이 자기 스스로를 근거짓는 바, 개인들의 의지와 욕망을 오직 보편 입법 원리에 끼워맞추려는 '독단론'이 아닌가?
(끝)
(4학년 학생들의 칸트 발표를 참고하였다.)
1/ 배경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진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사유하는 존재의 확실성을 얻게 된다. 모든 것을 의심하며 그것이 실재하는 것인지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으나 의심하고 있는 자기자신은 의심할 필요 없이 실재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흄은 '주체', 곧 정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과 인상의 다발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사물을 보고 생긴 어떤 것의 기억이나 결합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묶음이 주체, 정신이므로 결국 '나' 혹은 '주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처음에는 주체가 반듯하게 세워진 이성의 출발점이라고 여겼으나, 흄이 주체를 '관념의 다발' 즉 허상이라 이른 것을 보고 자신이 독단적인 의견에 빠져 허우적거렸다고 자책했다.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칸트는 주체와 이성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고, 아예 근원적인 질문부터 바꿀 것을 생각했다.
2/ '주체'의 재정립
1] 칸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주체에 대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간이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시하였다. 이는 '주체'라는 지반에 새로운 기초공사를 의미하며, 근대에 들어 중요하면서도 기반이 흔들려버린 '과학'에 대해서 확신을 두려는 모습이다. 즉, 주체가 허깨비라면 과학이 성립하지 않을 것이므로 주체를 중심적 위치로 돌려놓고자 하는 것이다. 칸트는 기반이 흐트러지던 시점에 문제에 직면하여 기초를 새로이 하였기 때문에 후대의 우리가 이성과 주체에 대해 혼란을 해결할 하나의 돌파구를 얻게 된다. 칸트는 이 돌파구를 '선험적 기초'로 보았다.
경험적 사실에 기초한 것은 얼마든지 뒤집어지기 쉽고, 유약하다. 그는 인과에 대해서도 관찰한 사람이 갖는 습관적인 추론이라고 했다. 불변의, 더없이 확실성을 가진 것이 아니기에 경험적 지식에 대해서는 확실성, 참된 지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즉, 진리는 경험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언제가 되든 뒤집어질 가능성이 무던하기 짝이 없는 불안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2] 물자체 : 물체는 데카르트가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흄을 거쳐 칸트에 이르자 실체는 알 수 없다고 보게 되었다. 신, 천사 등은 이름만 있을 수 있다는 유명론 전통이 물자체로 이어졌다. 칸트는 물자체가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기 위해 그 용어를 사용한다. 이처럼 칸트는 사물 자체를 인식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여긴다. 그로부터 진리는 그 누구도 확실하게 단언해주지 못할 대상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대상을 만드는 우리의 판단 형식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진리를 대상에서 찾아왔던 이제까지의 방식과 다르게 주체의 판단형식에서 찾으려 함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를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3] 분석판단 : 주어에 술어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개념을 미리 알 수 있다. 선험적. 새로운 지식의 습득이 없다.
종합판단 : 주어에 술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경험적/후천적. 새로운 지식의 습득이 가능하다.
칸트는 가장 이상적인 판단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을 합체시킨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새로운 지식이 될 확실하고 타당한 판단을 추구한 것이다.
3/ 근대적 주체의 재확립
1] 칸트가 집중한 문제 : 흄은 “어떻게 인식하느냐”를, 칸트는 “무엇으로 인식하느냐”를 탐구했다. 즉 칸트는 인식의 선험적 조건을 탐구했다.
A가 없으면 경험이 불가능하다. → 이 A가 무엇인가 ?에 대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2] 선험적 조건 : 선험적 감성 + 선험적 오성 (=선험적 주체)
윗줄의 것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경험 이전에 있어야 하는 조건이다. 이 조건은 모든 인간이 반드시 동일한(공통된) 형태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떠한 경험이나 인식도 이것을 피해갈 수 없다. (그는 경험한 것으로부터 데이터를 표백하고 형식만을 추출하는 듯 하다.)
Q1. 같은 사물을 경험할 때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반복해서 볼 때마다 똑같지 않다. 어떤 판단을 참/거짓된 경험이라고 할까 ? 이는 선천적 정신을 없다고 한 흄에게선 일어나지 않는 문제였다.
Q2. 어떻게 똑같은 형식에서 다양한 판단이 나올까 ?
3] 감성(인식) : 물자체(대상)을 받아들이는 기관. 있다/없다, 맞다/아니다와 같은 사실 자체를 감지하는 기관.
오성(판단) : 받아들인 물자체를 분별해내고 그에 대한 종합적 판단을 하는 기관. 12가지 범주가 공통되어 있다. 대상의 성질을 구별해내고 그의 결합을 통해 판단을 만들어내는 분별력을 가진다. 이는 인식의 오류의 근원이다. 나의 인식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때 오류가 생긴다.
→ 이 감성과 오성이 결합한다.
4] 공간과 시간 (감성 수준에서)
이것은 선험적 감성 형식이다. 이것은 경험을 좌우하며 감성을 통해 대상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이다.
5] 범주 (오성 수준에서)
이것은 선험적 오성 형식이다. 모든 판단을 하려면 구분선(범주)이 필요하다. 칸트는 이를 12개로 나눈다.
6] 이성 : 칸트의 이성이란, 경험을 넘어선 것까지 판단이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진리는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이성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이성은 감성으로 물자체를 받아들이고, 오성으로 판단하려 도달된 곳이다. 칸트에 의한 이성의 개념은 하나의 원리로 통일하는 능력이다. 이성은 하나의 원리로 다양한 경험들을 통일해 파악하려는 욕구를 가진다. 따라서 이율배반(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의 발생가능성이 생긴다. 이율배반은 이성이 경험을 넘어 하나의 원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가피한 한계이다.
4/ 윤리학
1] <실천이성 비판>은 “인간의 의지(와 행동)는 이성의 힘만으로 규제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는 자유의지를 가진 도덕적 인간이 어떻게 가능하며, 또 선천적으로 가능한지를 묻는다.
2]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차이
3] 선택적 명령은 '선언 명령'이고 조건적 명령은 '가언 명령'이다. 보편적/필연적 명령은 '정언 명령'이다. 칸트의 '정언 명령'은 “너는 언제나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인 입법 원리로서 타당하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4] 칸트에 의하면 선한 것에서 도덕의 행동이나 기준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가 도덕 법칙에서, 올바른 기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는 '선'이 아니라 도덕 법칙만 의무로 받아들였다.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선의지 뿐이다.(#)
5] <순수이성 비판>에서 신을 이론적인 영역에서 쫓아낸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에서 사람들이 보편적 가치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데 신이 '필요'하다고 신의 존재를 '요청'했다. 신은 이처럼 사후의 의미를 지닌다.
5/ 난점
1] 칸트는 진리를 주체 내부에서 찾는 진리의 주관화와 더불어 주체의 객관화를 수행한다. 즉, 내재된 형식 자체는 보편적이라고 객관화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라고 간주하는 지식인 선험적 지식이 '누구든 오인하는' 선험적 허구일 가능성이 있다. 또 '내게 보이는 거에 대해서만 진리를 추구하겠다'라는 주관화에 동원된 현상과 물자체의 관계는 다른 근대철학의 딜레마처럼 아무도 모른채로 남겨진다.
2] 선험적 형식이 더이상 존립 불가하다. 범주 이전에 범주를 나누는 기준이 필요하며 그게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시간과 공간은 아이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깨진다.
3] 순수이성이 '선험적 형식'으로 정당화의 발판을 가진다면, 실천이성은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 보편적 입법 원리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추려는 독단론, 자신이 설정한 도덕법칙으로 선을 정의하는 독단론의 위험이 있다.
(끝)
강의(discussion) _ 신지영 교수님
Kantian
이 홈페이지에 존재하는 모든 칸트 관련 목록
01. 칸트를 현대철학 관점에서 정리한 수업 [2015-1]
02. 칸트를 독일관념론 관점에서 정리한 수업 [20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