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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에 대한 쓸만한 입문글

 

 

칸트

서양근대철학, 한자경

 

1/ 생애와 저작

 

임마누엘 칸트는 1724년 동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엄격한 루터교의 경건주의적 풍토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다.

그는 1755년 철학박사학위 취득에 이어 교수자격 취득논문으로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원리에 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제목의 글을 라틴어로 발표했으며, 그후 170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정식교수로 임명되기까지 15년간 강사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는 칸트 역시 당시의 철학풍토에 따라 라이프니츠-볼프 철학을 중심으로 한 논리학과 형이상학, 도덕철학 뿐 아니라, 물리학, 수학, 지리학, 인류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가르쳤다.

흔히 칸트 철학을 1770년 정식교수로 임명된 시기를 기점으로 전비판기와 후비판기로 구분하는데, 이는 그 무렵부터 칸트가 더이상 기존의 라이프니츠-볼프적 철학체계의 수용과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비판적 관점에서 독창적으로 자신의 철학체계를 고안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2/ 비판철학의 전체적 구도

 

칸트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단 하나로 정리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이 물음은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구호와 같다. 그렇다면 인간이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살펴보아야 하는가? 칸트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세분한다.

첫째,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존재/인식론적 물음

둘째,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윤리학적 물음

셋째, 인간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 이론적으로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믿고 희망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종교적 물음

 

첫째가 이론적 인식대상이 되는 현상세계의 존재와 그 인식에 관한 논의라면, 둘째와 셋째는 실천적 행위의 성립근거와 그 지향점에 대한 윤리/종교적 차원의 논의이다. 전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이론적 인식대상인 존재라면 후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실천적 행위의 이념인 당위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칸트가 제기하는 철학의 세가지 물음은 존재와 당위, 현실과 이념의 차원에 관한 논의로 요약되는데, 전자는 <순수이성>에서 후자는 <실천이성>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진다.

 

(359) 그런데 존재와 당위, 현실과 이념을 각각 구분하여 설명하고 나면, 그에 이어 제기될 수 밖에 없는 질문이 과연 이 둘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이다. 왜냐하면 이 두 영역은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무관하게 분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둘이 완전히 분리된다면, 그 둘 사이에서 우리의 삶은 분열현상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통일적인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존재와 당위, 현실과 이념 사이를 오가면서, 그 둘이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 삶에 있어서 존재와 당위, 현실과 이념이 각각 이론(인식)과 실천을 뜻한다면, 칸트는 그 둘의 관계에서 성립하며 그 둘을 매개하는 것을 '느낌' 또는 '정서'라고 칭한다. 따라서 존재와 당위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그 관계 속의 인간에게 적용하면, 앞의 세 물음에 이어 다음과 같은 넷째 물음이 성립한다. '인간은 무엇을 느끼는가?' (359)

 

이렇게 해서 이론의 진과 실천의 선에 이어 느낌의 미가 탐구대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존재는 자연세계를 뜻하고 당위는 이념을 실현하는 행위의 자유에 기반한 것이기에, 존재와 당위,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곧 자연과 자유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것은 자연이 객관화된 현상세계이고 자유가 객관화되지 않은 주체의 활동성을 의미하므로, 다시 객관적 현상과 주관적 본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칸트는 자연과 자유, 객관과 주관의 형식적 일치관계를 '합목적성'으로, 그리고 그 합치에서 발생하는 느낌을 '미감적 쾌감'으로 설명한다. (359~360)

 

이와 같이 진과 선과 미, 이론과 실천과 정서, 과학과 도덕과 예술을 서로 연관지어 논의함으로써 칸트의 비판철학은 하나의 통일적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는 결국 그와 같이 인식하고 실천하고 느끼며 사는 인간 자신을 하나의 통일적 인격으로 이해하기 위한 철학적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360) 여기서는 앞서의 세 비판서를 중심으로 현상에 관한 선험적 인식의 문제, 도덕과 종교의 문제, 예술미와 자연목적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 3/ 선험적 인식과 현상의 규정성

 

<선험적 인식>

자연법칙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객관적 자연에 대한 실험과 관찰 등의 경험이 필수적이지만, 그러한 인식의 가능근거 및 필연성과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경험만으로 대답할 수 없는 철학적 물음이 제기된다. 즉, '인간주관이 객관세계에 대해 보편타당한 필연적 인식을 갖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361)

 

물론 중세에도 객관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 논의가 있었고 그에 대한 정당화 역시 존재했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 있어 인간과 세계를 매개하는 인식의 고리는 그 둘을 초월한 제3자로서의 신이다. 신은 인간(인식주관)과 세계(인식객관)를 창조한 공통의 근거로서, 인간 영혼은 신의 세계창조 이념을 앎으로써 세계의 원리를 알게 된다. [#약간 셸링 헤겔과 비슷한데] 이처럼 신은 세계질서에 대한 인간 인식의 확실성을 보장해주는 확고부동한 기반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와 데카르트의 회의를 통해 그 확고한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인간 주관이 어떻게 객관세계에 대해 확실한 인식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앞의 물음이 근대철학의 제1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361)

 

(361) 그러나 그 물음에 대한 데카르트를 포함한 합리론자들의 대답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영혼을 밝혀주는 신의 창조이념은 신이 우리 이성에 부여한 본유관념이 된다. 본유관념은 신에서 기원한 것으로 이성의 빛에 의해 알려지며, 우리는 세계를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않아도 이성의 본유관념을 통해 그 질서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한 본유관념을 통해 파악되는 이성적 진리는 세계 자체에 필연적인 신적 진리이며, 그 인식은 선천적 인식으로 보편타당성을 지닌다. (361) 그러나 우리의 이성 안에 본유관념을 불어넣는 그런 신이 정말 존재하는가? 우리 이성 안에 그런 본유관념이 과연 존재하는가?

 

근대의 경험론자들은 합리론자들이 신으로부터 본유관념을 확보한 것을 전통신학에 대한 근거없는 답습이라고 [#] 비판한다. (361~362) 경험론자에 따르면, 인간 영혼은 본유관념이나 본유적 인식이 없는 백지와도 같은 것으로, 우리의 인식은 오직 객관세계에 대한 감각경험과 그로부터의 귀납적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주의의 문제점은 우리의 세계인식이 우리의 경험 및 귀납논리의 한계로 말미암아 이성이 요구하는 필연성이나 보편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경험으로부터 얻어낸 인식은 우연적이고 개연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험론자에 따르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연과학적 명제는 모두 개연성만 가질 뿐이며, 확실성을 가진 수학적 명제는 세계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지 않는 분석명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362)

 

칸트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와같은 상황에서 출발한다. 세계에 대한 보편타당한 필연적 인식을 신이 부여한 이성의 본유관념으로 설명할 경우에는 독단론에 빠지고, 세계 자체의 경험으로 설명할 경우에는 회의론에 빠진다면, 합리주의적 독단론도 아니고 경험주의적 회의론도 아닌 제3의 길은 없는가?

수학이나 이론물리학적 진리가 세계의 존재질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인식이 신으로부터 본유관념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고, 세계로부터 경험적으로 얻어낸 것도 아니라면, 인식의 기원은 과연 무엇인가? (362)

 

[칸트에 의하면] 경험과 더불어 시작하여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종합적 인식이면서도 그 기원이 경험에 있지 않은 선험적 인식, 한마디로 말해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앞서 언급한 근대철학의 근본문제는 칸트에 있어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된다. (363)

 

종합판단은 분석판단에 대비되고, 선험적 판단은 경험적 판단에 대비되는 말이다. 분석판단이란 그 판단의 술어가 단순히 주어개념을 분석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으로,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주어개념을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판단을 뜻하며, 경험판단이란 경험으로부터 귀납적으로 획득된 것이기에 보편타당성을 얻을 수 없는 판단을 뜻한다. 이와 달리 칸트가 그 가능 근거를 밝히고자 한 선험적 종합판단이란 세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인식이면서도 단지 세계로부터 경험적으로 귀납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독단적으로 설정된 신으로부터 기원하는 것도 아니다. (363)

 

선험적 종합인식의 기원을 신이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인식주체인 인간 자신에서 구하는 데에 칸트 비판철학의 핵심이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합리론자들이 생각하듯 세계의 존재질서에 대한 이성적 진리를 미리 알지는 못한다 [#문제 소지]. 그렇다고 경험론자들이 생각하듯 백지와 같은 상태에서 세계로부터 주어지는 인상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세계를 알아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바로 인식주체로서 그 자신의 고유한 틀(형식)에 따라 세계를 보고 이해하고 해석한다. 그리고 인식대상으로서의 세계는 바로 그 형식에 따라 보여지고 이해되고 해석되기에 그 형식은 인식된 대상세계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지닌다. 즉, 주관의 인식형식이 곧 인식된 대상세계의 존재형식이 되는 것이다. [#서술과 상이 ; 데카르트와 칸트의 유사성 – 본유관념 by 독관 기말] (363)

 

선험적 인식근거나 신이나 세계가 아닌 인간 자신이라면, 다양한 인간만큼 다양한 세계가 존재한단 말인가? 그러나 칸트의 비판철학은 세계를 보고 사유하는 인간의 인식형식에 있어서의 상호주관적 보편성을 강조한다. [#후설의 칸트 연구?] (363~364)

 

각각의 인간에게 보여지고 읽혀진 세계는 서로 다르지만,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공통적 세계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인간 모두에게 세계를 보고 읽는 하나의 공통적 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비판철학은 바로 이러한 인간 인식의 보편적 틀,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세계를 그렇게 보고 그렇게 사유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기본적 틀을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개체적 인간 안에 내재된 보편적 틀로서, 우리는 그 틀에 따라서만 세계를 보고 사유하며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보편적 틀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되, 그 자체는 경험에 앞선 것, 즉 선험적인 것이지 경험으로부터 얻어낸 것이 아니다. 선험적 형식의 인식은 세계에 기원을 둔 경험적 인식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 자체에 기원을 둔 선험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선험적 틀은 과연 어떤 틀인가? 어떤 방식으로 그 틀을 밝혀나갈 것인가? 『순수이성비판』은...우리의 경험적 세계인식을 분석함으로써 그 안에 내재된 선험적 형식(선험적 인식)을 밝혀나간다. (364)

 

우리의 인식이 직관과 사유의 양 측면을 가진다는 것, 즉 직관능력으로서의 감성과 사유능력으로서의 오성에 기반한다는 것은 경험론이나 합리론 둘 다 인정해온 것이다. 직관은 대상을 보고 듣는 등 다섯 개의 감각 기관에 따라 발생하는 감각 또는 지각의 활동이며, 사유는 직관된 표상들을 비교, 종합하여 개념을 형성하거나 개념에 따라 판단하는 사유작용을 뜻한다. 비판철학 역시 직관과 사유, 감성과 오성의 구분을 강조하는데, 이는 그 각각에 전제된 주관적 형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364)

 

직관에는 감각된 내용 외에 감각내용을 정리하는 형식이 요구된다. 그것이 시공간이다. 외적 감각내용을 정리할 때 요구되는 형식이 공간이며, 내적 감각내용을 정리하는 형식이 시간이다. 즉, 공간은 외적 직관형식이고, 시간은 내적 직관형식이다. 우리는 무엇을 직관하든지 항상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의 것으로 직관하게 되는데, 이 시공의 형식은 객관적 사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이 아니라, 사물의 경험 자체가 성립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인식주관의 직관형식이다. ...나아가 우리는 대상이 현재 눈앞에 없다고 해도 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능동적으로 표상(개념)을 떠올려 개념과 개념을 연결하는 것을 사유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사유할 때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인 한 분명 어떤 양과 질을 가진다는 것, 속성을 지닌 실체라는 것, 특정원인의 결과로서 다른 것들과의 상호작용 안에 있다는 것 등등을 미리 전제한다. 대상을 경험하기도 전에 이미 그 대상의 존재방식에 대해 어느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유 안에는 단일성, 다수성, 전체성, 실재성, 부정성, 무한성, 실체성, 인과성, 상호작용성, 가능성, 현실성, 필연성 등의 개념틀이 미리 짜여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경험하든지 그 틀에 따라 사유하는 것이다. 그 사유의 틀이 되는 개념을 범주라고 한다. 매순간 다른 모습으로 지각되는 대상에 대해서도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이미 우리 자신 안에 '하나'라는 단일성의 범주가 있기 때문이며, (365) 서로 구분되는 두 경험내용을 인과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이미 우리 자신 안에 인과성의 범주가 있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범주적 사유형식은 인간이 임의적으로 선택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틀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직관이 시공의 형식에 따라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인간이라면 그 사유형식에 따를 수밖에 없는 그런 형식이다. 역사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어도 인간인 한, 즉 인간이 다른 종으로 바뀌지 않는 한 따를 수밖에 없는 보편적 사유의 틀인 것이다. 그만큼 칸트가 제시하는 기본적 사유틀로서의 범주는 어떠한 경험적 내용도 담고 있지 않으며, 단지 우리에 의해 사유된 세계의 순수형식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직관형식인 시간과 사유형식인 범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인간에게 있어 세계를 보는 직관형식과 세계를 생각하는 사유형식 간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우리는 보는 대로 사유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유하는 대로 보는 것일까? ...직관형식(시간)과 사유형식(범주)의 관계에 있어서 칸트는 후자가 전자를 규정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형식인 시간이 우리의 사유형식인 범주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366)

 

이와같이 범주에 의해 규정된 시간형식을 '선험적 도식'이라고 한다. 양의 범주에 의한 시간계열상의 도식(수), 실재성의 질의 범주에 따른 시간내용상의 도식(시간충족), 실체/원인/상호성의 범주에 따른 시간질서상의 도식(지속성, 결과, 동시존재), 가능성/현실성/필연성의 범주에 따른 시간총괄상의 도식(어떤 한 시간, 특정한 시간, 모든 시간에서의 존재) 등 8개의 도식이 그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든지 그 선험적 도식에 따라 직관하게 된다. 즉, 우리에 의해 직관되는 대상인 세계사물은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선험적 도식에 따라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식은 우리의 모든 직관대상에 대해 적용가능한 술어가 된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직관대상에 대해 도식을 술어화하면 여덟 개의 명제를 얻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현상에 대한 보편타당한 원리로서의 '선험적 원칙'이다. 이는 순수 이론물리학이 전제하는 기본원리로서, 시간과 공간상의 법칙에서 성립하는 수학적 원리와 더불어 우리의 직관대상인 현상에 대해 언제나 타당한 선험적 종합판단이라 할 수 있다. (366~367)

 

대상세계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 인식의 한계는 단적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현상이지 물자체가 아니다'라는 명제로 표현된다. 이것은 선험적 인식이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타당하지만, 우리의 인식 가능영역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까지 타당한 절대적 진리나 신적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 비판철학의 선험적 인식의 합리론이 주장하는 신적 본유관념에 의한 선천적 인식과 구별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곧 수학적 원리나 순수 이론물리학적 원리의 타당범위나 적용 가능범위에 대한 합리론자와 칸트의 생각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합리론자들에게 있어서 그와같은 원리는 신적 원리이므로 존재하는 어떤 것도 그 원리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수학적 진리는 절대진리로서 학문의 이상으로 간주되어, 어떤 앎이든 과학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수학적 방식으로 계량화, 공식화 가능해야 한다고 여겨졌다. 철학적 사유조차 수학적 논증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하며, 심지어 신도 사유할 때는 수학적으로 사유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학원리가 시공간의 법칙성 속에서 성립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수학의 절대화는 곧 시공간의 절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때 시간과 공간은 뉴튼식의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으로 이해되었다. 시간과 공간은 신이 세계를 보는 방식이며, 일체의 존재는 그 시간과 공간 안에 자기 위치를 점하고 과거의 원인에 의해 현재의 결과가 규정되는 자연필연성의 인과법칙에 따르는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368)

 

이에 반해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란 인간이 세계를 보는 방식, 즉 인간의 직관형식이지 신이 세계를 보는 방식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지 우리의 직관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 즉 시공간 속에서 직관 가능하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상세계가 시공간 상에서 위치를 점하는 '시공간적 사물'로서 존재한다고 할 때, 각각의 사물을 그 안에 위칫키는 시공간 좌표 자체가 바로 그 사물을 보는 인간 자신의 직관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의 존재방식은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 자신의 심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식주체와 분리된 객관적 실재로서의 물자체가 아니라 주관형식에 의해 구조지워진 존재라는 의미에서 칸트는 이를 '현상'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직관형식에 따라 시공간 안에 질서지워진 것과 사유형식에 따라 필연적인 것으로 규정된 것만을 직관하고 사유하여 인식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직관과 사유형식에 의해 규정된 현상, 즉 주관형식에 따라 존재하는 현상인 것이다. ...이처럼 각 개인 안에서 그와같은 하나의 공통된 현상세계를 구성해내는 보편적 형식의 인간 심성을 칸트는 개체 안에서 활동하는 '초월적 의식 일반' 또는 '순수 근원적 통각'이라고 칭한다. (368~369)

 

칸트의 비판정신에 따르면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원리로서의 수학원리나 순수 이론물리학적 원리들은 그렇게 구성된 현상세계에 대해서만 타당한 원리들이지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이렇게하여 칸트는 근대학문의 이상인 수학적 원리나 일체의 존재에 대해 타당하다고 여겨지던 자연필연성의 원리들을 오직 인간이 구성하여 직관하는 현상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으로, 그 적용범위에 한계를 긋는다. 그렇다면 그 한계 너머의 것, 즉 수학이나 물리학의 법칙을 적용할 수 없는 현상 너머의 물자체란 과연 무엇인가? (369~370)

 

우리의 직관대상인 시공간적 사물, 즉 현상이 우리 자신의 선험적 원리인 인식형식에 의해 제약되는 것이라면, 여기서 묻는 현상 너머의 물자체란 곧 우리의 인식조건에 의해 제약되지 않은 것, 즉 무제약자를 말한다. 제약된 현상을 지배하는 원리가 자연필연성의 인과법칙이라면, 현상 너머의 무제약자는 자연필연성을 벗어난 것, 즉 자유가 된다. 이렇게 해서 현상과 물자체의 문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변증론 중 제3이율배반에서 자연필연성과 자유의 문제로 다시 등장한다. 즉 '자유가 존재한다'는 정립과 '일체는 자연필연성의 인과법칙에 의해 규정된다'는 반정립은 자유와 자연필연성의 상호배타성 때문에 서로 양립하기 힘든 이율배반적 관계에 있다. ...칸트는 이를[이율배반을] 해결하는 열쇠가 바로 '초월적 관념론'이라고 말한다. 초월적 관념론은 곧 경험적 실재론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대상, 즉 시공간 안에서 직관 가능한 모든 것은 경험적 관점에서 보면 실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험적 실재성을 갖는다. 그러나 초월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현상일 뿐이다. 즉, 그것을 직관하고 사유하는 우리 자신의 선험적 형식에 의해 제약된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현상이 경험적 관점에서는 실재하지만 초월적 관점에서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초월적 관점에서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자유'이다. (170)

 

이렇게 해서 이율배반은 관점의 이원화 또는 영역의 이원화를 통해 해결된다. 즉, 자연필연성이 지배하는 영역과 자유가 존재하는 영역을 차원이 다른 두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자연필연성은 우리 자신의 선험적 형식에 의해 제약된 시공간적 현상세계의 원리이며, 자유는 그런 현상을 넘어선 무제약자의 원리이다. 이와같이 하여 분석론에서의 현상과 물자체의 구분은 자연필연성과 자유의 구분, 제약자와 무제약자의 구분으로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칸트 이전의 전통 형이상학 또는 신학에 있어서의 감성적 물질계와 초감성적 정신계의 구분, 자연의 영역과 은총의 영역의 구분과 맞닿아 있다. (170~171)

 

무제약자를 추구하는 칸트 변증론의 비판철학적 특징은 현상의 자연필연성을 넘어서는 자유를 전통형이상학에서처럼 제1원인 또는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으로 간주하지 않고, 바로 현상 전체를 규정하는 인간 영혼의 본질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는 현상을 인식하는 선험적 원리와 실체성이나 인과성의 원리가 결코 신적 원리가 아니라 인간이 현상을 보는 틀로서의 인간적 원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보여진 현상이 보는 인간 자신의 눈에 의해 그렇게 질서지워지고 규정되는 현상임을 자각함으로써, 보여진 현상원리로부터 보는 주체를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자기자신을 현상세계 속의 일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전체 현상을 넘어서는 초월적 주체로서 자각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기자신을 현상적 규정성 또는 자연필연성을 넘어선 자유로 자각하게 된다. 칸트는 이 자아를 '초월적 자아'라고 부르며, 이 자아의 자유가 바로 '초월적 자유'이다. 그러므로 초월적 자유는 현상적 인과계열의 맨처음이라 할 수 있는 창조 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vs. 중세], 이미 시작된 인간 삶의 과정 중에서 매순간 결단에 의해 새로운 인과계열을 시작할 수 있는 인간행위의 본질을 의미한다. [# 시간상의 시작이 아니라 매순간 계열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인과상의 시작] (371)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현상 너머의 무제약자는 바로 현상을 구성하는 초월적 자아의 자유일 뿐이다. (372) 이와같은 초월적 자아의 자발성, 즉 초월적 자유는 이론적으로 대상화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현상을 구성하는 궁극적 주체로서의 초월적 자기의식 그 자체는 이론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대상화된 현상을 인식하는 이론의 차원이 아니라 현상을 변경하는 실천의 차원에서 그 행위의 주체로서 자신을 의식할 때, 인간은 자기자신을 자유로운 자로서 의식한다. 이처럼 실천적 차원에서 자각되는 자유를 '실천적 자유'라고 한다. 이론적 인식의 최종근거인 초월적 주체와 초월적 자유가 행위주체에게 '실천적 자유'로서 지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자유의 실천적 개념은 자유의 초월적 이념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곧 초월적 자유와 실천적 자유, 달리 말해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이 하나라는 것을 함축한 말이다. 실천적 자유란 자신이 현상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자각이다. 따라서 구체적 행위에 있어 자유롭게 의지를 규정할 수 있다는, 즉 매순간 자유로운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자유의 의식인 것이다. (373)

 

■ 타자의 문제

 

초월적 자아로서 행위한다는 것은 타인을 대함에 있어 그를 자연의 인과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현상적 존재로 간주하지 않고 현상초월적 자아, 즉 자유로운 인격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74) 인간이란 본래 자신의 현상적인 경험적 특수성을 넘어서서 보편적 이성의 관점에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는 현상초월적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375)

 

『판단력비판』은 바로 이처럼 구분되는 자연과 자유, 현상과 물자체(무제약자) 또는 객체와 주체, 인식과 실천의 두 영역을 매개하는 우리의 반성적 판단력을 고찰한 것이다. 여기서 반성적 판단력은 이론적 인식에서의 규정적 판단력과 대(對)를 이루는 것으로, 규정적 판단이 주어진 일반원리에 따라 구체적인 개별사태를 규정하는 판단이라면, 반성적 판단은 주어진 개별사태를 반성함으로써 일반원리를 찾아나가는 판단이다. 따라서 규정적 판단에서는 구체적 자연이 기계적 인과필연성의 원리에 의해 지배받는 현상으로 객관화되는데 반해, 반성적 판단에서 자연은 객관적으로 규정되기보다는 주관적으로 반성될 뿐이다. (378) 한 개체의 현실성의 근거를 그러한 인과필연성의 현상계가 아니라 이념적 차원에서 구하면, 그 이념은 현상적 개체의 기계적 원인이 아니라 목적이 된다. 이때 현상 개체가 그 이념이나 목적에 합치할 경우 이것을 '합목적적'이라고 한다. (378~379)

 

우리는 어떤 대상에서 미적 쾌감을 느낄 때, 그 감각대상을 아름답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쾌감이 주관적인만큼 미적 판단 역시 주관적 타당성을 지니는가? 취미에 관한 상호주관적 의사소통, 취미판단에서의 보편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칸트는 미감적 판단의 근원인 미적 쾌감을 '무관심적인 자유로운 만족'으로 간주하여, 이를 주관의 감성적 경향성에 따른 심리적 관심에 근거한 '쾌적한 만족'과 구분한다. 아름다운 대상으로부터 내가 느끼는 미적 쾌감은 어떤 대상이 나의 욕구 및 경향성을 충족시켜서 느끼게 되는 쾌적함과는 구분된다. ...취미판단은 이처럼 사적인 욕구 및 경향성으로부터 독립된 무관심한 판단이기에, 그것은 개인적인 쾌적함의 판단과는 달리 보편타당성을확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공통의 감정을 '공통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공통감은 어떤 구조를 가지는가? 쾌적함의 판단이 사적 욕구나 경향성에 근거한 사적 판단이라면, 보편적일 수 있는 미감적 쾌감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380)

 

미적 쾌감을 일으키는 자유로운 유동상태의 인식능력은 곧 구상력(상상력)과 오성이다. 구상력은 대상을 현시하는 능력이고, 오성은 다양한 대상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다. 대상현시능력으로서의 구상력의 활동 속에서 객관적 대상형식이 포착되고, 대상을 통일적으로 사유하는 오성의 활동 속에서 주관적 인식형식이 포착되는데, 이 두 형식이 상호강제적이지 않은 자유로운 유동과 조화의 관계에 있을 대, 우리는 쾌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곧 '두 인식능력간의 유동적 합치'이면서 동시에 '대상형식과 인식능력의 합치'이기도 한 주관적 합목적성에서 비롯되는 미적 쾌감이다. (381)

 

미감적 판단에서의 주관적 합목적성이 대상형식과 주관적 인식능력의 합치를 뜻한다면,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판단에 있어서의 객관적 합목적성은 자연 자체의 자기목적성을 의미한다. (382) 칸트가 목적론적 판단력의 분석에서 밝히려고 한 것은 자연 안에는 이와같이 자기형성의 힘을 가진 유기체로서의 자연목적이 존재하며, 이러한 자연에 대해서는 오성의 인과론적 자연필연성의 기계론이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자연목적으로서의 자연은 더이상 오성원칙에 지배받는 자연필연성에 따른 기계론적 자연이 아니다. 이는 곧 현상세계의 자연을 인간 자아에 의해 대상화된 객관으로 이해하지 않고 주체로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객관화되어 나타나는 물리적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를 자아와 마찬가지로 현상초월적 주체 또는 자유로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기계적 인과성을 벗어난 무제약자로서 확인된 인간 주체의 자유가 자연에 대해서도 타당한 것이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연을 인간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오성적 자연법칙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자연의 생명력과 활동성을 자연의 현상초월적 본질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이원론적 도식을 벗어나 현상과 물자체, 자연과 자유, 객관과 주관을 하나로 이해하는 길이다.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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