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2015 강의정리
강의_ 이성환 교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언어가 어떤 지시하는 대상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형이상학적 시기에는 언어가 항상 형이상학적 실재를 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언어라는 것이 형이상학적 실재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형이상학적 실재는 정신적 실재라고 말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증명할 방법이 별로 없다. 그래서 우리는 형이상학적 이라고 말하면 조롱이 된거죠. 근대 이후에 형이상학적 실재가 의심스럽다, 라고 말을 하면 언어가 담고 있는 실재가 날아간다. 그러니까 이제 언어의 의미가 어디로부터 유래하는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된 거고 이런 것들이 인식론적 과정을 거치다가, 현대철학에 오면 언어가 갖고 있는 의미는 언어 자체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게 구조주의이다.
이제 현대쪽으로 오면 더이상 언어가 어떤 실재를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언어가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대상을 지시한다는, 지시라는 것이 이제 구체적인 의미 실재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경험적인 내용을 지시한다는 것에 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가 지시하고 있던 의미가 우리가 어떤 개별적인 경험 대상을 지시할 때 사용하긴 하지만 그 의미 자체가 개별적 실재 속에 반드시 들어있다, 이런 것은 아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언어가 말하는 것이 우리가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변별하게 해준다, 그런 정도의 뜻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정말로 인식할 수 있는가 ? '알 수 없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언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을 깨뜨리고 보면, 실존적 현기증을 느낀다, 이렇게 표현하고 소위 사르트르의 '구토'가 그렇게 해서 이룩된다. 우리가 바라보는 실재를 언어를 배제하고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에게 구토감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두컴컴한 곳에서 손으로 뭘 만졌는데 물컹거리면 뭔지 모르기때문에 섬찟하다. 정신적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봤는데 언어적 실재가 있다고 믿었던 것인데, 그게 사라지고 나면 저쪽에 모든 것이 카오스상태로 뒤엉켜 들어가면서 '알 수 없음' 이런 것을 그렇게 형상화하는 것이다. 언어와 실재 사이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 다음에 흄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해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지식이 성립된다고 할 때, 지식이 어디에서 성립되는가 ? 하고 물을 수 있다. 지식은 항상 언어적 양식을 갖고 있다. 그게 관습적으로 쓰는 언어든, 일정한 그룹들 내의 약정적 언어이든, 기호의 양식, 언어의 양식을 갖지 않고는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지식은 언어다. 그럼 방금 말했던 것처럼 언어로 만들어진 지식이 우리 경험적인 실재를 반드시 지시하는 것인가 ? 언어가 경험적인 것을 반드시 지시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걸 보면. 그럼 언어로 이루어진 지식이, 그 지식에 걸맞는 원리나 보편적 법칙이라고 말하는 것이 실제 존재를 갖고 있는 그것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그러면 우리가 흄이 어느 선상에 와있는가를 알 수 있다.
흄이 뭘 겨냥했는가 ? 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 같은 경우는 갈릴레오가 했던 과학적 방법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했다. 그러면 흄 같은 경우는 뉴턴을 정당화하려 했다. 뉴턴은 관찰에 의한 지식체계를 중시했으며, 관찰을 해서 관찰의 결과를 귀납을 통해서 원리로 확립하려는 자세를 갖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갈릴레오가 말했던 지식의 체계를 데카르트가 정당화하려 했으며, 흄은 뉴턴이 말했던 그런 과학의 정당화를 시도했다고 말해볼 수 있다. 이렇게 정돈해보면, 우리가 경험적 세계가 있고, 일반사람들이 경험적 세계를 경험하고 살고 있고, 또 그것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던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이 (저쪽 세계를) 설명했던 양식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적으로 믿고 있던 지식, 유용하잖아요 ? 경험적으로 믿고 있는 지식의 정당성을 따지면 일반적 반응은 정당성에 무관심하고 유용성만 있으면 된다고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자연적 세계에 관해 말을 하든 일반적 삶에 관해 말을 하든 그것은 정당성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과학적 이론을 한 번 생각해보자.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설명했다. 이론이 갖고 있는 토대를 정당화시킬 수 있나 ? 하고 물으면 예외적 상황이 별로 없으면 되었다고 반문해올 것이다. 근본적 전제를 가지고 정당한가, 라고 물을 이유가 있냐고. 그것이 없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잘 설명된다고. 철학하는 사람은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든 과학자든 상관없이 그들이 옳다고 믿는 것이 정말 정당한가 ?라고 묻는 것이다. 흄이 인과론이 정당화될 수 없다, 고 말한다고 해서 인과론이 과학적 방법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일반 사람들이 인과론을 전혀 안 믿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게 니가 믿고 있는 그 인과성을 니 스스로 정당화시킬 수 있냐 ?고 묻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화 안시켜도 통용이 되고 정당화시켜도 통용이 된다. 그게 핵심 포인트이다. 그러므로 흄은 뉴턴이 귀납에 의한 과학적 이론을 세웠는데, 아무도 그 근거에 대해서 타당성을 묻지 않지만 흄은 묻는다. 흄은 물으면서 과학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토대, 방법론, 이것이 다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정당화시킬 수 없을 때 없는가, 라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다. 과학적 이론은 그대로 통용되고 있고 그 이론에 관한 일반적 통념도 바뀌지 않는다. 정당화 안된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자연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설명하려 할 때 문제가 전혀 없다. 그것이 핵심 포인트이다. 흄은 우리가 과학이라고 말하는 지식의 타당성, 정당화를 문제 삼는 것을 겨냥한다.
근대는 인식론의 시대라고 말하는데, 인식론을 탐구하는 철학자들이 그 문제를 논구해서 어떤 답을 내리든 안 내리든 일상적인 삶이나 과학같은 지식의 체계에는 조금도 균열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하는가 ? 인식론이란 게 도대체 뭘 하는 것이며 흄은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인가 ? 미국 쪽에서 철학교육을 시도하고 70년대에 오면 철학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논쟁이 인다. 그 전의 미국의 철학교육은 대체로 논리적 비판이었는데, 철학교사도 드디어 반성을 하기 시작한다. 방법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철학교육에 대한 논의가 있고, 내용을 채워 넣으려고 한 것이며, 분석철학 스스로도 반성을 통해서 철학이 내용을 가져야 된다고 말하면서 분석철학은 과학을 철학의 내용으로 다 빌려 왔다. 그러면 철학이 지금 어떤 식으로 이룩되어 있는가, 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고, 흄이 겨냥했던 그런 것들이 이후 영미철학에 끼친 파급효과도 금방 알 수 있다. 초기 과학철학의 대다수의 문제들은 흄이 남긴 문제이며, 귀납의 문제를 제기했던 첫 인물이 흄이다. 그 다음에 과학 구획의 문제, 이런 것을 보면 흄이 과학철학의 문제 출발점을 제시했다.
흄은 당대의 인식론을 비판하기 위해서 자기자신의 인식론의 틀을 짠다. 짤 때 로크나 버클리가 갖고 있던 요소를 도입한다. 그런데 흄은 이미 로크나 버클리가 논의했던 그 문제선상에 있지 않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은 흄만이 유일한 경험론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로크나 버클리 같은 경우는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합리론적 전제들을 굉장히 많이 갖고 있다. 그런데 흄의 경우 합리론적 전제들을 말끔하게 다 정리한다. 그 정리하는 방식 때문에 경험론의 시조다, 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실존주의의 원조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흄이 말했던 '인상', '관념' 같은 논의는 그 이전에 있었던 로크와 버클리의 전통을 새롭게 하기 위해 논의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로크와 버클리가 헀던 논의 선상에서 버클리가 했던 논의 가운데서 신을 제거해버린 논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이 객관적 실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경험의 실재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며, 왜냐하면 인상의 생생함 정도에 따라서 우리는 바깥에 있는 실재를 믿을 수 있다. 인상의 생생함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적 실재를 묶어내는, 우리 마음 속에 자연적 경향성이 있다 – 자연철학 – 이라고 설명했다. 자연적 경향성이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사유하는 활동 속에 자연적 경향성이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유사성, 인접성, 선후성을 말하게 되며, 이것이 충족되기만 하면 꿈과 실재, 꿈과 현실 사이의 구분을 확실히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로크와 버클리 사이의 논쟁' 문제를 해소한 것처럼 보인다. 흄은 영국경험론자들이 말했던 그 부분을, 뒤에 뉴턴이 말했던 인과론이나 귀납법을 비판하는 데 그대로 사용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소위 19세기에 와서 형성된 학으로서의 과학에 관한 비판적 입장을 확실히 갖는 것이다. 어떤 과학도 정당성의 토대가 없다, 이런 것이다.
정당성의 토대가 없다고 과학은 무너지나, 하고 물을 때, 어떤 과학도 절대적 필연성을 주장할 수 있는 지식의 확실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며, 모든 지식은 개연성을 갖고 있다, 이렇게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식은 개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과학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속에 뭔지 모르지만 오류가 있다면 과학은 더 진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흄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개연적이다. 절대 확실한 걸 믿을 수 없다고 말하므로 흄을 가리켜 회의주의, 상대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흄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흄이 말하는 '인상', '관념' - 조금 전에 설명했던 것처럼 인상이란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객관적 실재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초이다. 예를 들어서 '황금산', '도깨비' 이렇게 말할 때 이런 것은 우리가 관념을 가질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에 관한 생생한 인상을 가질 수가 없다. 인상이란 말은 우리가 '여기 이 책상을 본다', 라고 할 때, 감각에 주어지는 일차적 효과로서 확 떠오르는, 이걸 인상이라고 말하고 생생함이라 표현한다. 그런데 내가 집에 돌아가서 '내가 그 책상에 앉았는데 그 책상에 홈이 있던가'를 잠시 생각해본다면, 그러면 몇 시간 전에 이 강의실에 있던 기억을 되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갖고 있던 인상의 생생함은 사라지고 경험을 갖고 있는 기억 속에 인상이기 때문에 생생함은 엷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차적인 경험을 갖고 있던 인상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깨비같은 경우는 애초에 인상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엷고 말 것도 없다. 따라서 꿈, 가상, 환상과 우리가 믿고 있는 실재 사이의 구분지가 확실히 성립된다. 그래서 인상과 관념, 그런 식으로 구별해두자.
그리고 '다발' 가지고 논의가 되는데, 그 다발이란 개념을 자아로 가지고 가기 때문에 사물에 관한 논의가 날아가버린다. 인식은 기본적으로 사물로부터 출발하며, 사물을 인식하는 것에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아라는 개념이 요청되는 것이다. 인식론에 있어서 자아 개념은 자아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인식의 일관성을 위해서 자아가 이론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그걸 실재라 말하든 가상이라 말하든 인식론적 주체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항상 이론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그럼 한 번 생각해보자. 여기 있는 하나를 본다. 이건 관념의 다발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흄이 말하는 관념의 다발은, 로크가 말했던 복합관념의 다른 이름이다. 이 관념의 다발이란 말 속에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이 관념의 다발을 보고 바깥에 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다시 이 관념의 다발을 본다. 내가 조금 전에 본 관념의 다발로서의 교탁과 지금 들어와서 본 관념의 다발로서의 교탁은 항상 같은 대상인가 ?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공간적으로 같은 지역에 있는 것의 항상성과 불변성을 가지고 외적 실재를 입증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한다면 신을 빌려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공간적으로 불변하는 게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실재한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믿는다'라는 말을 강조하고자 하는데, 안 믿어야 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 다음에 우리가 그걸 믿는 것이 논리적으로 정합적인가 ? 이런 물음. 내가 지금보고 나갔다 돌아와서 '이것이 같은 교탁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말이 되는 말인가 ?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말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식에 있어서 정합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일까 ? 어떤 대상을 상식적으로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 이 자체가 불변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 앞에서 본 교탁과 뒤에 본 교탁이 똑같다라고 말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정합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여기 바라보는 물질적 실체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전혀 아니란 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 이렇게 말을 해서 불변적이라고 말한다면 인식의 필요성에 의해서 불변적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전제한다고 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교탁의 실재성 ; 인간의 인식, 언어적인 실재하고 맞아떨어지는 그 무엇을 증명하는 것은 전혀 아니란 점이다 (흄에 의하면 어떤 경우에도 이를 증명할 수 없다). 우리가 이걸 불변적이라고 믿는 것이고, 우리가 이걸 표현하면서 언어적으로 정합적이라고 하는 것도, 이 정합성이라는 것이 객관적 실재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믿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표현을 한다.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것을 실재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라보는 외적 대상세계에 관한 어떤 지식도 외적 세계의 실재를 입증해주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변성에 관한 믿음, 정합성에 관한 믿음, 이런 게 어떻게 생기느냐고 물으면 사유가 갖고 있는 세 가지 경향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유사성-인접성-선후성. 유사성이란 말은 내가 여기 있는 테이블을 보고 휴식시간이 끝난 후 들어오자 똑같은 테이블이 여기 있다, 그럼 똑같은 실재라는 것. 인접성은 공간적으로 똑같은 공간에 놓여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동을 하더라도 유사성에 의해서 똑같은 실재가 공간이동 했음을 안다. 그 다음에 시간적 선후성(*)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고 있는 사고의 경향성이 우리가 믿고 있는 지식을 확실하게 만들어준다.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지식은 외적 실재에 관한 지식인데, 외적 실재의 존재가 우리가 어떤 지식을 믿고 있다고 해서 증명되는 게 전혀 아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에 의해 형성된 지식은 어떤 경우에도 그 존재에 도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일차적 전제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지식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불확실하다고 해서 틀렸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여기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100% 맞는 것인지 99% 맞는 것인지 1% 맞는 것인지 우리에겐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불확실하다고 표현한다. 단지 우리가 반복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이곳이 다음 시간에 들어오면 꿈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또다시 다음 시간에 들어와서 이곳을 볼 수 있는 확률, 개연성이 99.9% 다, 이런 정도인 것이다. 논리적으로 0.0001%가 부족해도 불확실한 것이며 절대 확실한 게 전혀 아니다. 불확실하다는 말의 의미를 아, 20%는 불확실하고 90%는 확실하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전혀 안 된다.
이런 걸 전제로 해서 흄은 과학에서 사용하는 두 가지 원리를 비판한다. 하나는 '인과율 비판'이다. 시간적 선후에서 일어나는 것을 어떤 사태의 원인과 결과로 파악하는 것이다. 발표자가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의 습관 중에 있는 걸 유사성-인접성-인과성이라고 표현했는데, 인과성이라고 표현하면 안 되고 선후성이다. 선후라는 말과 인과라는 말은 다른 말이다. 시간적 선후에 있는 것을 원인과 결과로 파악하면 이미 두 이벤트 사이에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말이 되므로 정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과율을 비판하는 것이다. 인과율 비판의 모양을 잘 보자.
(칠판) 사건A와 사건B가 있다. 이것이 시간적으로 선후적으로 일어나면 사건A를 원인이라고 말하고 사건B를 결과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이 관계가 있다고 말을 해야지만 비로소 원인과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두 사건 사이에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우리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말할수가 없는 것이다. 흄이 드는 비유로, 불이 나면 반드시 연기가 난다. 우리는 불난 걸 보고 연기난 걸 본다. 우리는 저것을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간적으로 인접하고 시간적으로 선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 양자 사이에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흄이 전제했던 인상과 관념으로 생각해보자. 불이 났다는 것도 있고, 연기가 났다는 것도 있을 때, 둘 다 우리가 관념으로 갖는다. 그 다음에 불 났다는 것과 연기가 났다는 인상도 갖고 있다. 그 다음에 또 하나가 있어야만 인과관계가 생긴다. 불 난 사건 하나, 연기 난 사건 하나, 또, 관계에 관한 인상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시공간적으로 인접하고 선후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관계를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 관계가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안 맞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하면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상인데 그 인상이 있는가 ? 이걸 묻는 것이다. 인과관계에서 관계에 관한 인상을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간단하게, 인과관계란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왜 우리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를 믿게 되는가 ? 하고 반문해보면, 우리가 처음 불난 것과 연기난 것을 볼 때는 이 둘 사이에 관계가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멀리서 연기를 보아도 거기서 불이 난 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불 난 것을 한 번 보고 연기난 것을 한 번 보았는데 우연히 불 난 데를 또 보았더니 또 연기가 난다. 이것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니까 한 원시인이 '야, 저 연기 있는 데는 불이 있어' 라고 주장한다. 이런 것이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우리 마음 속에 어떤 믿음을 준 것이다. '불이 나면 연기가 난다' 라는 믿음을 우리가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는 일반적인 지식은 반복적인 경험에 의해서 어떤 신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에게조차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신념, '너에 관한 신념을 내가 가지고 있는데 제발 좀 그걸 깨뜨리지 마라 골치아프다', 뭐 이런 것 아니겠나 ? 또한 자기 신념에 의해 한 사람을 재단하길 원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신념 자체가 객관적으로 있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은 인간이 갖고 있는 반복적인 습관, 이것에 관한 신뢰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과학이 사용하고 있던 인과율을 부정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 인과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 라고 말할 때, 모든 사람들은 그걸 엄밀히 검토해보지도 않고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흄은 한 마디로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말을 하고, 경험의 단초가 인상에 있다고 말하면, 관계에 대한 인상은 어디 있나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관계는 대체로 우리가 알 수 없다. 같이 일어나는 빈도수가 높으면 그 두가지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조차도 정당화의 측면에서 보면, … 과학은 일상적 지식과 비교했을 때 확률이 더 높다는 차이밖에 없다.
△ 그러므로 인과율에서 그 관계 자체가 우리가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흄의 문제는 초기 과학철학의 문제를 형성하는데, 흄의 전제 안에서는 해소가 안 되므로, 흄의 전제가 얼마만큼 설득력이 있는가 ? 를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귀납 비판'. 이제 귀납의 문제를 이야기해보자.
귀납이 어떻게 성립되는가 ? 관찰을 통해서 일반적인 가설을 세우고 이 가설을 새로운 관찰 사실에 적용하고, 그것이 맞다고 말을 하면 일반적인 원리로 확립한다, 이런 것이 다이다. 우리가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일반적인 원리를 세운다고 말하고, 세워진 원리를 갖고 새로운 관찰 대상에 적용해서 들어맞으면 일반적 원리를 정립한다는 것인데, 최초로 일반적 원리를 세울 때, 실험과 관찰이란 문제가 중요하다. 얼마만큼 실험의 빈도수를 가져야지, 그걸 일반화시킬 수 있느냐 ? 하는 문제이다. '물이 0도씨에 언다'는 것은 인간이 세운 가설인데, 빈도수를 높여야 한다. 그런데 '불에 데여서 손에 고통이 온다'라는 것에는 빈도수가 필요한가 ? 어떤 지식은 단 한번의 경험을 가지고 일반화시키고, 어떤 경우는 빈도수가 높아도 일반화시키기가 곤란한 경우가 있다. 그럼 결국은 관찰 사례의 빈도수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지금 두 사례처럼 극단적 사례를 들어볼 수 있으므로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물이 0도씨에 언다'라고 할 때,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청정수와 남강물하고 떠서 0도씨에 얼려 보자. 남강물은 얼지 않을 것이다. '물이 0도씨에 언다'라고 말할 때 물의 청정도를 얼마만큼 해야 하는가 ? 또, 영하 10도에 바닷물은 염분 때문에 얼지 않는다. '물이 0도씨에 언다'라고 말할 때 물이 갖고 있는 조건도 참 복잡하다. '물이 0도씨에 언다'를 입증하기 위해서 어떤 정도의 물을 0도씨에 언다라고 말해야 하는가 ? 모든 세부치를 다 고려하여 어떻게 일반화시킬 수 있는가 ?
귀납의 첫 단초, 그것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쉽게 일반화를 시킨다는 것이며, 흄은 '정당성의 토대'에 대하여, 귀납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전제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정당화시킬 수 있는 근거가 빈약하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셈이다.
그래서 흄은 이제 귀납이라는 부분을 정돈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흄은 귀납의 원리를 - 절대적 귀납법은 인정하지 않지만, 그 대신 상대적 귀납법을 도입한다. 이는 통계적 귀납법(*)으로 말하기도 한다 - 귀납법을 정당화시키는 방편으로. 일기예보에서 몇% 라고 붙는 것이 통계적 귀납법이다. 우리가 과학에서 어떤 지식을 성립시킨다고 말할 때 통계적인 확률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례는 몇 %의 확률이 있어야지 지식이 된다, 고 말할 수 있고 어떤 사례는 몇 %의 확률이 있어야 지식이 된다. 믿을 만한 지식이거나 그 정도 확률 가지고는 믿을 수 없지, 이렇게 된다. 통계가 갖고 있는 이런 힘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다 통계를 들이댄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라고 말할 때 연상되는 게 통계이다. 통계가 나오면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과학적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이제 통계가 갖고 있던 결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통계학자가 <통계의 마술>이란 책을 썼다. 거기서 통계가 사람들에게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비판함에 따라서, 과학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확실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발표자는 세 가지라고 말했는데 다른 한 가지는, '객관적 실재성에 관한 믿음'이다. 그건 일차적으로 부정하는 거고, 과학이 성립될 수 있는 두 조건을 비판, 원리로서 두 가지를 비판해서 검토한 셈이다.
자아.
자아를 설명하는 방식은 항상 데카르트적 요소가 조금 있어야 한다. 데카르트 설명할 때,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할 때, 정의하기가 참 어렵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증명하는 방식, 이건 결론적으로 어떤 경우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것 말고, 우리 의식이란 것 조차, 정신 속에서 증명하려고 하면 잘 안된다. 우린 기껏해봐야, 대상이 물들이고 있음을 통해 내 마음이 있다는 걸 증명한다.
여기 있는 것이 '관념의 다발'이다, 라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서, 낱낱이 흩어져 있는 관념들을 묶어서 하나의 교탁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내 마음을 물들인다. 눈 앞의 교탁을 나중에 경험적으로 보거나 말거나 내 마음이 계속 흘러가는데, 그 마음 속에 계속 들어와 있다. 그러면 그 관념의 다발은 한 물체로 내 마음 속에서 계속 지속된다. 관념의 다발이 흐르는 내 마음의 흐름도 외적 관념의 다발을 묶어내는 하나의 관념으로 있는 것이다. 내가 반성한다면. 그러므로 내 마음은 어떤 경우에도 관념이 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 관념의 다발로 나한테 묶일 수가 있다. 그래서 내가 바라보는 어떤 대상이 관념의 다발이라고 말한다면, 그 관념의 다발을 묶어내는 내 마음의 흐름을 내가 묶어서 '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것이다. 내 마음의 흐름의 묶음이 '나'가 되는 것이다. 경험적인 것, 선험적인 것, 본래적인 것이든 상관 없이. 그것을 경험적인 것이라는 것에 그치면 내가 미래를 꿈꿀 수 없고, 불변하는 요소로 전락하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적 자아를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외적 대상에 걸어서 우리 마음을 확인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외적 사물이 관념의 다발이다, 이렇게 말하면, 외적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 마음의 흐름이 t1시점, t47이렇게 말하면 저 전체가 내 의식, 한 시간 동안 형성된 내 마음의 묶음, 그것이 내가 이 시간에 나를 형성했던 (나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내가 형성한 것이기도 하고, 이 한 시간 동안에 내 모습이 여러분 기억 속에 들어가 있는 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내 자아라고 말하는 것은 내 속에 묶어진 나이고, 한 시간 동안 여러분 관념 속에 들어가 있는, 내 모습을 묶어낸 여러분 관념 속에 들어가 있는 나이기도 하다. 거기에 여러분들은 언어로 '이성환 선생'이렇게 이름을 붙이며, 또 나는 한 시간 동안에 있어왔던 그 나를 묶어서 '그때 너에게 강의했던 이성환 선생이다'라고 언어로 대변시킬 수 있다. 그래서 흄은 우리가 자아라고 말하는 것은, 그와 같이 관념으로 묶을 수 있는 그 다발이 인간의 자아다. 그때의 관념이라는 말은 의식의 흐름, 의식의 흐름이 있기 위해서는 그 속에 물질(물체)라고 말하는 관념의 다발을 담고 있는, 그 의식의 흐름의 묶음을 자아라고 말할 수 있다. 그걸 다 빼버리고 의식의 흐름을 묶어주는 어떤 자아가 있다, 라고 말하면 그 자아가 인상이 있어야 하는데, 인상이 없다는 것이다.내가 내속에 들어가서 아무리 살펴봐도, 뜨거운 물체가 와서 뜨겁다는 느낌이 있을 뿐이지, 그것말고 다른 걸 impression 가질 수 없다. 그래서 흄은 데카르트의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 이런 걸 흄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흄의 자아론을 '현상론적 자아', 이렇게 말하고 현대에서 가장 힘이 센 자아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