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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경험론 : 로크 2015 (이 교수님)

   영국경험론자들은 합리론과 대비되기는 하지만 데카르트가 만든 모델 속에서 철학적 작업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스피노자와 라이프가 하는 철학적 작업과는 조금 동떨어진 측면에서 데카르트를 수용합니다. 데카르트는 인식의 확실성을 토대짓기 위해서 방법적 회의를 하고, 그 결과로 코기토를 확립한 사람입니다. 또한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바깥의 존재에 세워야 되기 때문에 관념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신의 실재를 요청하게 되고 그러면서 관념과 외적 실재 사이의 연결고리를 형이상학적 토대 위에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 경험론자들은 (로크를 발단으로 해서) 데카르트가 검토했던 본유관념을 시비걸면서 철학적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영국 경험론이 어떤 의미에서 철저하게 데카르트주의라고 하는 것은, 데카르트가 만든 문제의 틀 속에 들어와서 사유를 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식의 발단이 인간 자체 속에 있다고 말한 것은 데카르트 식이고 합리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반대로 데카르트가 만든 코기토의 모델을 그대로 둔 채로 지식의 출발은 본유관념에 있지 않다고 영국경험론자들이 주장함은 데카르트의 기본적 틀은 인정하되 본유관념이 있다 없다는 문제에서 논의함을 의미합니다. 

 

   오늘 논의의 초점은 다음에 있습니다 : 로크는 데카르트가 가지고 있던 그런 측면을 어떤 얼개로 경험론적 도식 속에, 인식론적 틀 속에 구조화하는가? 그 다음에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경험론 이래로 소위 인식론이 등장하게 되는데, 인식론이 가지고 있던 많은 문제가 '로크가 만든 그 마음의 구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로크가 말한 마음의 구조 속에 어떤 유형이 어디에 대해서 문제가 될까, 를 염두에 두고 논의하셔야 합니다.

 

[2강]

   ■ 영국관념론과 독일관념론 사이의 연결고리 : 의식을 세분화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감성, 지각, 오성, 이런 식으로 인간의 마음을 발생론적 구조로 보여주는 거죠. 그런 점이 실제로는 독일관념론과 연결고리가 생기는 부분입니다.

 

   그 다음에 일반적으로 로크 할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로크의 인간오성론의 중간 부분 쯤에 자아동일성이라는 게 있어요. 그런 부분도 역시 의식의 전체적인 구조를 한 점으로 수렴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칸트에게 중요한 요소로 부각이 되고, 그 부분은 피히테나 헤겔에게 전면적으로 수용이 되어 잘 다듬어진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 로크가 왜 인간마음의 발생론적 구조를 보여주려 했는가, 이게 중요한 관건이죠. 그 까닭은 로크가 데카의 본유관념론을 비판하면서 지식의 놓을 단초를 인간이 갖고 있는 경험 속에 두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본유관념 속에 든 두 요소가 인간지식의 확실성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로크는 인간오성론 서론에서 인간이 이성이 있고 이성을 갖고 출생하고 동시에 본유관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어린아이나 백치, 정신지진아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만약 인간이 갖고 있는 지식이 본유관념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할 때, 본유관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식을 어디에 토대지을 수 있나?라는 것이 로크의 관심사입니다.

 

   로크는 인간의 모든 인식의 출발을 경험에 둡니다. 그래서 로크 버클리 흄을 경험론자라고 말한다. 인간 마음이 있고 인간 마음 속에 어떤 선천적인 조건이 있고, 이런 부분에 관해서 경험론자는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인간이 자연세계 속에 있고 자연과 만날 때 이 자연을 경험할 때 비로소 지식이 출발된다고 본다. 이 경험이라는 것을, 평면적으로 '경험'이라고 말해선 안 될 것이고, 이 '경험'을 단계적으로 분할한 것이다. 이 분할한 과정은 데카르트가 갖고 있던 심신이라는 문제를 그대로 유입해서 받아들인다. 인간은 신체적인 것이 있고, 인간은 모든 경험에 첫 출발은 신체로부터 유래한다, 이렇게 본 것이다. 그래서 신체로부터 출발해서 경험적인 내용이 점진적으로 마음으로 들어오는 이 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인간오성론>이라고 표현한다.

인지심리학이 있는데 이것은, 외적 자연적 조건이 인간 감각에 주어지면 이것이 발생론적으로 인간 마음 속에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인지심리학이다. 그래서 이제 신체로부터, 인간 마음 속으로 끌려들어오는 이 과정을 세분화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두고 나면 인간오성론 속에 인간의 마음의 발생론적인 틀만 설명하나 ? 하고 말할 수 있는데, 그날 발표 내용을 보면, 이 마음에 관한 설명은 하나도 없다. 경험을 말하고 경험 대상을 주로 설명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 관념, 성질, 언어 이런 식으로 쭉쭉 설명을 했다. 이런 부분은 인간오성에 관해서 논한다, 이것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 지금 내가 말하는 방식은 인간의 마음이 어떤 경험으로부터 첫출발할 때 어떻게 발생론적으로 인간이 인식하는 대상을 구성해가는가, 이런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떨어져서 이야기해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 그 자체로 보여주려고 하면 안 보이는 셈이다. 그러니 결국은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음이 인식하는 대상을 보여줌으로서 비로소 마음의 구조를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이걸 적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데카르트할 때 비유를 사용했다. 마음을 맑은 물이라고 해보면 투명한 물이 있으면 우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거기에 붉은 색소를 떨어뜨려보면 붉은 색소가 퍼지는 범위까지가 맑은 물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붉은 색소를 통해서 저기에 물이 있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되물어볼 수 있는 것 ; 붉은 색소와 물이 같은 것인가 ? 어떤 경우에도 같을 수 없고 뒤섞일 수 없다. 붉은 색소를 정화시키면 물은 다시 물이 되니까. 인간 마음 속에 외적 경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항상 담기는 것이다. 우리가 바깥에 있는 나무를 볼 때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물들인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은 항상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의식의 발생론적 구조를 보여준다는 것은 반대로는 인간 마음을 물들이는 대상의 발생론적 구조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이 대상이 어떻게 해서 형성되는가를 보여주면 저절로, 이 마음의 발생론적 구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교탁이나 나무 같은 경험 대상, 이것을 말하지만 경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보았다, 이렇게 말하고 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대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상이 있다는 것이 내 경험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때, 로크의 경우 경험하는 대상을 관념이라고 표현한다.

관념이란 말은 아이디어라는 말인데 대문자로 쓰면 이데아가 되며, 플라톤의 이데아는 '관념적 실재'이다. 관념이 인간 마음 속에 있을 뿐만 아니고 인간 마음 바깥에 정신적 세계 속에 존재한다, 이런 경우는 형이상학적 실재가 되고, 그렇기에 우리는 그걸 이데아, 형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마음 속에 들어있는 것은 알겠는데, 마음바깥에 정신적 실재가 있고 이 정신적 실재 속에 그 존재가 있다, 라고 말할 순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아이디어이다.

이데아가 '이데인 = 내가 본다'는 말의 명사화인데, 아이디어도=관념도 결국은 내 마음 속에 내가 보고 있는 것, 이런 말이다. 우리가 바라보면 (이런) 대상이 관념인데 이 관념도 역시 경험으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교탁을 손으로 만져보면 매끈매끈하다, 눈으로 보면 황토색이다, 형태나 크기로 볼 수 있다… 등속으로 말할 수 있는데, 이러면 내가 바라보는 어떤 대상이 황토색이라는 것도 내가 바라보는 대상에 속해있는 것이고, 이러저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매끈매끈하다는 촉감적 성질도, 내가 바라보는 대상 속에 있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보는 어떤 대상이 있다고 말할 때, 개별적인 대상이 내가 가지고 있던 오관에 다른 것하고 관련이 있다. 손, 눈, 또 내 몸을 가지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이런 느낌들, 이런 것들이 뭉쳐져서 우리가 바라보는 이런 대상을 만든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보는 대상을 낱낱으로 분석할 수 있다. 쪼개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보는 대상은 복합관념이다. 복합관념을 형성하는 가장 단순한 관념을 단순관념이라 표현할 수 있다. 발생론적으로 보면 인간이 단순관념을 인식하면서 복합관념은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조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냥 형태로 보면 인간 마음 속에 교탁이 있는 것이지만 교탁을 이렇게 보면 여러가지 우리가 갖고 있는 감각기관에 의해서 결합되어졌다, 이리 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각각의 감각의 활동을 통해서 각각의 관념을 받아들이고, 이 각각의 관념을 묶어서 내가 바라보는 대상, 이걸 만들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모든 대상은 다 복합관념이라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단 하나의 감각을 가지고 바라보는 대상들은 단순관념이지만, 이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구체적인 대상물이 되면 그것은 전부다 복합관념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런 경험론적 전통은 영미쪽에서 명제의 단순명제, 복합명제... 명제를 점진적으로 가장 단순한 식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며 경험론적 전통 속에서도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을 가장 단순한 요소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다른 측면으로 '환원주의'라 말할 수 있다.

내가 단순관념을 본다고 말하면, 내가 가지고 있던 오관을 통해서 단순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단순관념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어떤 대상이 된다, 고 말하면 이 대상은 내가 가지고 있던 오관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내 마음 속에 다른 영역이 있어야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감각을 내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는 지각능력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경험한다고 할때 감각지각이라 표현한다. 그래서 신체적인 작용을 하면 감각이지만, 이 신체적인 걸 통해서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것도 역시 외적인 자극에 대해서 내 마음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센세이션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 내 감각기관으로서의 센세이션, 이 감각기관이 갖고 있는 지각능력. 이 받아들인 것을 내가 바라보는 대상으로 만들 때 이는 지각능력이라는 것이다. 내가 알고 깨닫는다, 어떤 대상으로 안다, 이런 말이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어떤 대상을 바라보면, 구체적으로 '교탁' 이렇게 보는 것이지, 단순관념을 보고 그 단순관념을 나무로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마음을 발생론적 틀 속에서 보면 낱낱의 단순관념들은 감각으로 환원시킬 수 있고,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라고 말하면 지각력이다,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기본적으로 경험대상은 감각지각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명명하는 셈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런 대상이 경험된다라고 말하면 모든 지식은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라는 경험론의 명제가 성립된다. 인식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 그건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 이렇게 말햇기 때문에 그렇다. 문제는 우리한테 주어지는 감각경험을 가지고 우리는 인식한다, 라고 말하진 않는다. 형이상학적 인식론을 설명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인데, 꼬마가 이게 뭐예요 라고 물었을 때 어떤 대상이 있고 대상 이름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대답한다. 그런데 꼬마는 이거 책상 아닌데요, 왜 우리집에 갖고 있는 책상은 이런 모양이 아니예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감각에 주어지는 것을 가지고 '책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가능성이 백프로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우리가 이름붙일 수 있는 모든 것 속에는 가령 책상을 책상답게 하는 이데아가 있다, 이런 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게 본유적으로, 플라톤처럼 우리 영혼이 출생할 때 우리 영혼 속에 심어진 걸로, 심어졌기 때문에 감각경험에 무언가 주어지면 내가 상기한다, 회상한다, 이런 것으로 이데아를 바라보는 것처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영국경험론자들은 이와 같이 본유관념을 인정하든지 형이상학적 실재를 인정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우리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경험론자들은 우리가 뭔가를 안다라고 할 때 그 앎의 기본적 요소가 있다. 내가 이것을 보고 '책상' _이렇게 말할 때 책상이라는 단어/기호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고, 내가 그 기호를 갖고 있는 의미를 어떤 대상을 향해 붙인다. 이건 어디서부터 유래했나 ? 그래서 인간오성론 뒤에 언어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인식이 언어로부터 출발한다, 이러면 자연스럽다. 모든 언어들은 이데아를 담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영국경험론자들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런 언어는 어디서부터 유래하는가 ? 영국경험론자들은 고민한다. 우리가 구체적인 개별자(들을) 만났을 때 우연적인 것을 다 사상하고 보면 어떤 대상을 만나든지 공통적인 요소가 있고 그 공통적인 요소를 뽑아서 우리는 의미로 삼을 수 있다 – 추상이론. 우연적인 것을 대하면 일반적인 것이 있고 그게 바로 언어의 의미가 된다. 영국경험론자들은 우리 감각에 주어지고 일반적인 대상이 만들어지면 인간이 그 대상으로부터 언어적 의미를 추출하고, 그래서 비로소 그것을 우리는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경험론자들은 모든 인식의 토대는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경험론적 이라고 말했는데, 뭐가 문제가 될까 ?

추상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을 추출한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경험적인 대상 속에서 공통적인 것을 추출할 수 없다. 내가 여러 종류의 책상을 보잖아요. 그 속에 우연적인 것은 뭐고, 우연적인 것을 버려도 남는 게 뭐가 있냐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우연적인 것을 버리면 본질적인 무언가가 남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경험론적 입장에서 보면, 그런 본질적인 것은 경험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에서 뭐가 우연적인가, 뭐를 버려야 되는가, 이가 핵심이다.

이렇게 되니까 이 문제(본질이라는 부분들)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느쪽으로 가야 할까 ? 이게 언어적 의미는 그렇게 말하지만 이 자체가 어떤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을 바깥으로 환원시켜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언어가 공통분모가 없다, 경험될 수 없다는 사실은 증명되지 않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라고 말하는 이런 부분이 이제, 예를 들어서 꿈하고 실재 사이의 구분 부터 시작해서, 여러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제 이 대상이 주어지는 조건을 이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 어떤 무엇인가가 언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경험의 원단계로, 앞쪽으로 밀어내는 거죠. 그러면, 성질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성질은 실제로 인간 마음에 들어올 수 없는 것으로서, 관념만이 인간 마음속에 들어오고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질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어떤 관념이 있다고 말할 때 일차적으로 인간 감각에 무엇인가 자극이 주어진다고 하면 이 자극이 주어지는 것을 성질이라 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질과 단순관념은 같은 선상에 붙어있는 것으로서, 한쪽에 외부적인 조건으로 신체자극적인 쪽으로 가면 성질이 되는 것이고, 이 성질이 인간 신체에 영향을 줘서 인간이 인식하는 단계로 넘어오면 관념이 된다. 관념과 성질은 붙어서 이쪽은 인간 신체와의 접면이고 바깥은 인간 신체와 닿아있지만 인간 마음 속에 들어오지 않는 ,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해야 된다. 그러므로 영국경험론 속에 성질에 관한 논문들이 굉장히 많다. 이론적으로 말해보면, 외부에서 인간 신체에 어떤 무엇인가가 주어지고(자극하고) 이 자극한 것은 인간이 뚜렷하게 인식할 수 없다. 우리가 이렇게 만졌는데 매끈하다, 라고 말하면 매끈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 인식되는 거고 관념이다. 우리가 만졌을 때 어떤 느낌을 주는 것, 그것이 성질이고, 그 느낌을 통해서 책상 위가 매끈하네, 이렇게 말하면 이미 관념이다. 그러므로 성질, 은 단순관념에 붙여서, 모든 단순관념을 촉발하는 성질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질이라고 했던 이유가, 꿈하고 실재 사이의 구분, 그리고 언어에 있어서 우리 경험에 주어지는 것을 우연적인 것을 사상하고 본질적인 것은 뽑아내고, 이런 식으로 언어에 의미를 만든다고 했는데, 우리 신체에어떤 성질이 주어지고 우리가 관념을 만드느 것이지만 우리 신체나 우리 마음 속에서 어떤 변형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 이런 것을 외부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고 성질은 성질이지만 우리자신이 갖고 있던 신체나 마음의 조건에 영향을 받는 성질을 제2성질이라고 말한다. 원래 사물이 갖고 있는 성질을 제1성질이라고 하자.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눈으로 적목색깔을 볼 때 외부의 자극이 성질로 주어진 것인데 어떤 사람은 보고 어떤 사람은 못 본다. 신체적으로 기능적 이상이 있을 경우와 없을 경우. 이런 것처럼 인간이 갖고 있는 신체적 조건에 이상이 생기면 '어, 이게 바깥에 있다고 해야되나'. 그리고 바깥에 어떤 색깔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인간이 바깥의 색깔을 구분하는데, 이 색깔이 인간 신체에 어떤 자극이 주어졌을 때 인간 신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색상인가 아닌가, 이런 것도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감각으로 받아들일 때, 오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이런 것들은 제2성질이라고 한다(*). 원래 우리 외부에 어떤 사물이 있고 이 사물이 원래 갖고 있는 성질이라고 말하기엔 좀 곤란하다. 그런 것들은 전부 제2성질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로크가 본 제1성질은 무엇인가. 사물의 형태, 크기, 등등을 사물자체가 원래 갖고 있던 것이다, 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제1성질이 있기 떄문에 우리 마음 바깥에 우리 마음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 물질, 물체, 순수질료,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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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로 되돌아가서, 로크는 이 모든 경험에 가장 근저에 자아가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내가 단순관념들을 경험하는 것인데, 그러면 내가 바깥을 보면 내가 바깥을 본 단순관념을 모아서 복합관념즉 대상을 보는 것이다. 제1성질이 있거나 없거나 내가 안 보면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보면 있고 안 보면 없는 것, 이런 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기억이라는 것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내가 꽃을 보다가 하늘을 보고 다시 꽃을 보았을 때 놀라지 않는 것은, 조금 전에 내 경험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억의 주체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인간오성론 중간 부분에 자아의 논의가 등장하게 된다. 이 자아에 관한 설명 방식이 뒤에 흄부터 시작해서 여러 사람들이 굉장히 긴 세월동안 그것을 논쟁한다(인간의 동일성, 자아 동일성). 로크의 논변을 간단하게 소개해보자. 이걸 하는 이유는 뒤에 칸트가 경험적 자아와 선험적 자아, 라는 구분지를 설정하며, 헤겔에 가면 정신현상학, 이런 것도 등장하고 피히테의 자아와 비아, 이런 등속으로 말하는 속에 어떤 얼개로 말되어지는가, 라는 선행적 작업이 로크에서 이루어졌다. 여러분 각자가 자아를 갖고 있는 것인데 이 자아의 동일성은 어떻게 확보될까 ? 일차적으로는 신체적 동일성으로 확보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내가 경훈이를 보았을 때, 지난주에도 보고 지지난주에도 봤는데 길가다가도 경훈이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의 신체를 통해서 보는 것이다. 또 유치원, 중딩, 대학생 때의 경훈이. 이 경우 신체를 가지고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일까 ? 그러므로 로크는 한 생명에 동일하게 지속적으로 참여하면 그건 한 생명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일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동일성, 인격의 동일성을 식물이나 동물처럼 그런 생명의 동일성으로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은 의도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조건을 바꿀 수 있다. 의란성 쌍둥이의 경우, 성형수술의 경우, 그것이 동일한 나인가. 신체를 통해서 인간의 자아동일성은 확보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제기될 수 있는 것이, 한 인간이 기억을 통해 다른 인간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영국경험론 속에서 논의되는 많은 자아동일성 논쟁은 기억이라는 것이다. 영미 사전의 메모리, 는 중요한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이로써 자아동일성 공부를 할 수 있다. 기억이 인간의 동일성을 확보해준다고 말하면 바로 다른 가설이 성립된다. 기억을 가지고 영화를 많이 만들듯이, 기억의 조작. 기억을 바꿀 수 있다. … 그때 우리는 물을 수 있다. 한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이 기억을 상실하니, 그때부터 시작하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 인격이 된다. 그럼 이는 두 인간인가 ? 하나의 기억을 가지고 한 인격이 성립되는데 기억이 사라진다면 한 인격도 사라진다. 그때부터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한 기억을 만들고 한 인격이 된다. 그러면 신체적인 것으로보면 한 인간인데 기억을 통해서 보면 두 인격이 된다. 그럼 이는 두 인간인가 ? 결국은 인간이 갖고 있는 기억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문제를 로크는 굉장히 크게 간다. 기억이라는 것도 인간의 자아동일성을 설명해내긴 어렵고, 로크의 최종답안은 ; 기억을 내가 망각했지만 어떤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그 기억을 나의 기억으로 확인해주는 자아만이 온전한 인격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기억이든지 그 기억이 나의 기억으로 확인해주는 자아, 그게 자아라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 관해서 여러 가지 논란이 있을 수가 있다. 그래서 로크가 가지고 있던 자아에 관한 분석도 역시 데카르트 안에 다 들어있다, 고 하는 것이고, 이런 분석이 과학적 옷을 입으면 프로이트식으로 되거나 융식으로 된다. 자아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를 그 속에 함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로크는 이 자아를 통해서 우리가 뭔가를 인식한다고 말할 때 인식의 확실성의 가장 확실한 토대는 자아의 동일성이라 주장한다. 정신병자들은 자기가 자신을 확인 못한다. a시점에 뭘 봐놓고 b시점에 이걸 기억을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거잖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을 갖고 이 경험을 통해 어떤 인식을 갖는다 할 때 이 인식을 성립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자아의식이 중요하다고 표현하는 셈이다. 이런 부분은 칸트의 인식론에서 발표해보면 알지만 Ich danke, 인식의 모든 ___의 가장 근저엔 '내가 생각한다'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의식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설명해보면 로크는 이와 같이 자아를 설명해서 보여준다. 버클리는 로크의 이 부분을 그대로 인정하고 출발하므로 둘의 공통분모이다. 버클리가 비판한 것은 물질적 실체를 비판하는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아를 인정하는 거고 더 큰 정신적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럼 인간의 자아라는 것을 인정하고 더 큰 정신적 실체를 인정한다고 말할 때, 자아를 우리가 뭐로 볼 것인가 ? 실체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볼 것인가 ? 이 부분은 흄에 가면 다시 거론된다. 흄은 앞서 말했듯 기억이 인간의 자아를 형성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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