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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기초 [2015]

 

(도입 시작)

 

데카르트가 유아론에 빠진 것은 실체를 유한 실체와 무한 실체로 가르고 이 유한 실체를 정신과 물질로 나눔으로 인해서 이 실체들 간의 소통을 시키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하며, 그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실체의 정의상, 실체가 여러 개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이 곧 실체이고 세계와 자연이 곧 실체가 될 것이라는 도식을 세운다. 그리고 이 유일한 실체로부터 모든 것을 설명해내려고 한다.

 

(도입 끝)

 

 

(1) 자연과 인간

: 하늘, 땅, 물, 바람 등을 자연이라 하자. 이 자연적 세계와 인간적 세계를 당신은 구별할 수 있는가? 인간은 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근대는 자연을 극복한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그 위에 건설한다는 가치관을 주장하며 '자연'을 혐오스럽게 생각한바 있다.

자연적 세계를 인간적 세계로 설명하려면, 그 설명방식 안에서 자연적 세계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인간적 세계가 되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자연에 대해 '(햇살이) 맑다, 따뜻하다...'로 표현하는 순간 그 햇살은 인간적 세계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맑다. 그것을 쐬자. 시를 쓰자.'라고 생각함으로써 문화적 세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세계를 빼고 인간적/문화적 세계는 이야기될 수 없으므로 두 세계는 엄격히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늘, 땅, 물, 바람 등 외에도 자연 속에 인간이 들어간다. 다만 인간은 하늘 등과 다른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2) 실체와 양태

: 하나의 실체(자연, 전체)가 다양한 양태(양태1, 양태2, 양태3 ...)로 드러난다 할 때, 스피노자에게서 양태가 곧 속성과 연결된다. 스피노자는 실체와 양태를 묶는 것이 아니라 양태와 속성을 묶는다. 그리고 실체로부터 연원하여 밖으로 드러난 무수한 양태와 속성들이 곧 실체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 데카르트의 문제를 실체의 설명 구도로 해결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한 실체를 이야기하면서 (가령 정신적 속성, 물질적 속성과 같은) 각 속성들 간의 관계를 설명하려 한다. 또 이 속성은 양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 양태들은 '자연 = 실체 = 신'이라는 공통된 기반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3) 소산적 자연과 능산적 자연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 능산적 자연은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 속에서 변하지 않는 법칙과 같다. 끊임없이 변하는 개별적인 것들은 소산적 자연이다. 능산적 자연의 예를 '밥을 안 먹으면 배가 고프다'라고 해보면, 소산적 자연의 거기에 상응하는 예를 '(a) 하루 한끼를 먹어도 배가 안고픈 경우, (b) 하루 두끼를 먹어야 배가 안고픈 경우, (c) 하루 세끼를 먹어도 배가 고픈 경우 등...'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법칙은 그 법칙 속에 개별적 사례가 들어가는 '능산적 자연'이고, 법칙 속의 다양한 개별적 사례들이 바로 '소산적 자연'이다. 이는 고대철학자들에게서 엿보였던 존재와 생성의 화제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4) 여기까지의 구도에서 문제점을 찾아보자.

ㄱ. 양태와 양태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ㄴ. 인간은 이 구도에서 어떻게 설명되는가? 자연이 인간없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먼저 ㄱ.의 문제를 스피노자의 구도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해보자. 

"징을 가지고 바위를 쪼면 깨진다"에서, 징, 바위라는 두 개의 양태가 등장함과 동시에 문장 속에서 저 두 개가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연적 질서란 이런 것이다. (문장과 같은) 실체가 있고, 실체 속 다양한 속성들이 모습을 가지고 드러나 양태가 된다. 문장 속에서 징의 양태와 바위의 양태가 드러나 연결되었듯, 각 양태들은 자연적 질서 속에서 연결된다.

 

(5) 신

: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 있는 모든 것들은 어떤 최종을 향해 나아가는 내재적 목적이 있다고 했으나,  스피노자의 자연에는 목적이 없으며, 원인과 결과, 질서만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신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인격신이 아니다. 인격 속에는 의지가 있고 그 목적을 자연에 심어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자연엔 의지가 없고 자체 질서를 가진다. 따라서 스피노자에 오면 창조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 스피노자의 신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는 자연 자체다.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의 신은 범신론이 아니다. 범신론은 물도 신이고 꽃도 신이고 나도 신이란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관은 고대 자연철학자들의 물활론과도 차이가 난다.

 

(6) 자연 속의 인간 ㅡ ㄴ. 의 문제에 대하여

: 자연에 의지가 없으므로 인간에게 또한 의지가 없다. 인간 또한 자연의 한 속성일 뿐이고, 자연적 질서와 대립되는 인간적 질서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도 다른 자연물과 동등하게 자연의 일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물들 각각은 상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중 인간은 '앎을 추구하는 욕구'를 가지고 그것은 자연 속에서 다른 존재와 인간을 차이짓는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앎에 대한 욕구' -그것은 자연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따르는 존재방식이다- 를 발휘하여 '지복'에 이르는 것이다.

 

지복에 이르는 단계는 속견으로부터 감각, 감각으로부터 직관지로 나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직관지는 '매개 없이 바로 아는 것'인데, 데카르트의 논변 중 코기토를 확보한 이후에도 신을 끌어오는 것과 같은 폐단을 스피노자는 이 직관지를 통해서 겨냥한다. 자연 전체를 직관하는 것이 직관지이며, 신을 필요로 하는 데카르트와 같은 구도를 설정하지 않아도 나는 지복에 이를 수 있으며, 알아야 할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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