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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MENU
1. 15년 1학기 배운 것 정리
2. 4학년 학생들의 발표 정리
3. 에티카 읽기 (링크)
(이하는 15년 1학기 프랑스철학 교수님의 수업시간에 배운 것)
1] avec DESCAR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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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은 명시적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이 갖는 중요한 전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를 중심으로 이 두 철학자 사이의 상호관계를 논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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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재론 : 데카르트에게 대상인 자연세계는 조용히 주체의 처분만 기다리는 정적이고 수동적인 것이어서 주체가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자연은 단지 수동적인, 지배되어야 하는 대상만은 아니었다.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실체'와 '양태'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된다. 실체는 변화의 원인이며 그 변화에 의존하지 않는 요인이다. 또 그것은 무한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한한 특징을 갖는다. 이 변화들을 스피노자는 '변용'이라 하고 이 변화된 모습 각각을 '양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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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식론 : 주체와 분리된 대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스피노자는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는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실체는 오직 하나만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념/지식과 실제 대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양자가 일치하는 일은 불가능하나, 양자는 단일한 실체의 속성이어서, 애초부터 일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주장이다. ◀ 근거 - 어떤 판단이 올바른지 아닌지를 알려면 진리를 미리 갖고 있어야 한다. 진리가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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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부닥쳤던 '일치'의 문제를 어떻게 피해가는가? : 스피노자에게는 정신과 육체, 사유와 연장이 일치하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실체가 사유와 연장 등의 속성들을 통해서 '표현'되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즉 이 두가지 속성 모두가 실체가 갖는 본질을 '표현'하기에, 그것을 통해 우리는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차이나는 두 명제가 하나의 동일한 원의 본질을 표현한다. 동일한 실체를 다른 측면, 다른 차원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양자가 동일한 것을 표현하는 한 그 본질에서는 당연히 일치하기 때문에, 데카르트를 당혹케 한 문제가 스피노자에게는 아예 발생하지도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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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경우 : 개라는 동물에 결합되어 있는 질서와 '개'라는 개념에 요약되어 있는 질서는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 즉 양자 모두 동일한 실체를 표현한다. ; 스피노자는 '진리'란 당연히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극히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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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 예컨대 반지름이 5인 원의 면적이 “25파이다” 혹은 “27파이다”라는 상이한 판단이 있을 때, 즉 하나의 속성에 대해 상이한 판단이 있을 때, 어떤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가의 문제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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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관련해 그는 “진리가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라는 정리를 제출한다. (그게 자기 얼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그런 판단을 하려면 이미 자기 얼굴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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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를 대상을 인식해서 얻는 것이라고 한다면, 따라서 '진리'라는 기준이 먼저 있는 게 아니라면 진리를 보증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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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는 데카가 무한소급(보증인의 보증인의 보증인)을 멈추기 위해 신을 끌어들인다고 비판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식에 이르려면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에티카의 각 부가 정의와 공리에서 출발하는 것은, 자기가 참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음을 인정하는 형식이다. 이는 스피노자가 근대적인 문제설정과의 인식론적 거리가 있음을 나타낸다. 그는 인식을 통해 진리에 이르려는 근대적인 주체에게 그건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출발점임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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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윤리학 : 데카르트의 계몽주의적 윤리학에 대해 스피노자는 감정, 욕망, 정념 등을 이성으로 억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옳은 것도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인간은 자연과 다른 어떠한 것이 아닌 자연의 일부임을 분명히 한다. 스피노자에게 자연은 산출하는 자연과 산출되는 자연으로 나뉜다. 자연에 공존하는 이 두 가지 상반되는 힘을 통해 스피노자는 자연을 '생성'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이것을 통해, 스피노자는 자연이 주체가 통제하는 대로 내맡겨진 정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능동적 힘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데카르트적인 것과 달리).
2] Avec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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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신 :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있으며, 그것의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바로 실체이다. 이 실체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기에, 다른 것들을 원인으로 갖지 않는다. 자기가 자기의 원인이다. 신은 우주 밖에서 그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연 안에 있는 모든 변화의 원인이다. (자연 안의 생산적 힘이 바로 실체인데, 따라서 자연은 그 외부에 있는 무엇에 의해 창조된 게 아니라 자연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신이 자연을 창조했다는 견해에 맞서게 된다.) 종교적인 절대자가 아니라 바로 자연 안에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요인을 뜻하는데, 이런 걸 '범신론'이라 한다. 또한 자연은 '양태'이기도 하다. 태어나고 늙어가는 인간에서 흐르는 물과 변화하는 계절에 이르기까지 극히 다양하고 가변적인 것들의 집합이 바로 자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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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는 양태로 표현된다. 실체는 양태로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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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은 이처럼 실체가 변용한 양태로서 존재하므로, “개체의 본질은 양태다”. 그리고 이 양태들, 개체들 전체를 싸안고 있으며, 그것들 전체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바로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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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는 많은 속성을 갖는데, 그 중에 연장과 사유는 인간이 알고 있는 두 가지 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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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라이프니츠와의 상이점. : 라이프니츠는 “개체의 본질은 실체”라고 한다. 모든 개체 각각이 실체이며 그 내부에 고유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개체 각각에 존재하는 실체를 라이프니츠는 monad라 부른다. 라이프에겐 모든 개체가 곧 실체인 데 반해, 스피노자는 개체란 실체의 벼형된 모습이고 양태라, 실체는 이 양태들의 근저에서 모든 양태들을 싸안는 것이다. ; 라이프니츠에게 모든 것이 다 실체이기에 실체는 무한히 많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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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연장이 실체의 속성이라는 점이 anti기독교적으로 함의하는 바는? : 스피노자가 신이라 불렀던 실체는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사유와 연장을 모두 갖고 있는 물질적 존재. 신이란 영원하고 완전한 그래서 오직 말씀으로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공간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연장을 가지고 있는 자연 그 자체다.
3] 스피노자의 윤리학 [+코나투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므로, 에티카를 읽으며 개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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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나투스 : 육체는 정신과 합일적이다. 육체와 정신의 결합체로서 인간에게는 양자를 합일(통일)하려는 '코나투스'가 있다. 이것은 어떤 상태를 '지속하려는 힘'이다. 이 힘은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실체의 양태인 모든 개체들에 다 있다. 이것은 관성처럼 의식과는 직접 관련없는 어떤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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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힘은 육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맞추어 변하며, 반대로 정신적 상태에 따라 육체가 변하기도 한다. 이처럼 육체와 정신을 합일하고 일치시키는 무의식적인 힘이 코나투스다. --> 따라서 데카르트라면 당연히 이성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할 이 욕망이 스피노자에겐 바로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게 된다. 왜인가? 육체와 정신을 합일하려는 힘으로서 코나투스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처럼 그것을 억누르려하지 않는다.(의식으로 파악되지 않는 무의식적 힘을 통해 인간의 삶, 욕망, 윤리학의 문제를 파악. 이건 의식과 동일시되던 '나'를 뜻하던 데카르트적 사고와는 다른 것. 또한 욕망/정념에 대한 통제를 뜻하는 윤리학적 계몽주의와 다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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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스피는 이 욕망이 타자에 의존한다고 말한다('유한양태'므로). 이것은, 인간의 욕망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스피노자적 해결책은 데카르트처럼 이성에 의해 욕망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를 바꿈으로써, 즉 욕망을 만들어내는 조건을 바꿈으로써 욕망 자체를 전환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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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모두는 코나투스가 증가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며 본능에 따라 충실하다[+ 찾아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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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원인->타당->감정->자유로움 . 이것은 관념에 있어서의 변화로 타당한 관념을 갖는 것을 달성하면 코나투스가 up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이것과 '조건 바꾸기'의 관련성이 미약하므로 추가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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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속상태는 인식의 문제에 있다. 제3종인식이 필요한데 그것은 외적 요인으로 제한받지 않고, 내적 요인에 의해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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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만남으로 기분이 우연에 좌우되는 것. --> 극복의 방법 : 이유에 대한 파악(그 사람을 봐서 그렇게 됐다는 건 원인이 아니다.) --> 이성의 계발 (가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타당한 관념을 갖는다는 것이 목표!)
4] 자유의지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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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발상대로 하면, 우리가 자연을 초월해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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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자연의 법칙과 우리는 전혀 다른 지배를 받는다고 했으나, 스피노자에게 자연은 기계론적이지 않고 수학적이지 않다. – “자연은 내것이기만 하다! 인간은 자연과 긴밀한 유기체적 연결 상태에 있으며, 따로따로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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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에서 데카르트를 비판한다 – “정서와 인간의 생활방식에 관하여 기술한 대부분은 공통적인 자연법칙을 따르는 자연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자연 밖에 있는 사물에 관하여 논술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로 그들은 자연 안의 인간을 국가 안의 국가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5] 내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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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 안에서, 인간신체가 DNA 나선형 구조를 발견함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관념을 가졌다고 하면 인간이 발견함과 동시에 신은 DNA를 만들어낸 것인가? 즉, DNA는 인간이 그걸 자각하기 전부터 실재하는 것은 아니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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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관념이 신체 안에 가두어진 것이라 한다면, 신체의 집합은 관념의 집합보다 더 큰가? 혹은 같은가? 실체 이원론의 세계관 안에서, 관념을 넘어선 신체의 집합을 조정하는 것은 타당한가?
(끝)
(아래는 4학년 학생들의 발표를 참조한 요약이다.)
1] 자연주의 (신=자연=실체)
스피노자에 의하면 실체란 데카르트와 유사하게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이해되는 존재”이다. 이 말은 존재하기 위해서나 이해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이 정의를 바탕으로 스피노자는 실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성질들을 이야기한다. 먼저 실체는 무한자(비제한적), 단독자(독립적), 자기원인자(비의존적)이다. 실체가 무한자가 아니고선 독립될 수 없고 단독자가 아니고선 다른 것에 의하여 제한될 수 밖에 없으며, 자기원인자가 아니고선 다른 것에 의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성질을 지닌 실체는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고 이것을 바로 신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스피노자의 '신'은 중세에서 이야기하는 기독교적인 신과는 전혀 다른 신을 의미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인격적이거나 지성적인 신이 아니며, 가치의 기준을 들 수 없고 생각, 계획, 결정도 없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실체란 신이며, 신이 바로 자연임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연은 신이 될 수 있는 것일까 ? 스피노자는 자연이란 무한하고 영원하며, 단독자이며 그 속에 자기원인을 지니고 있는 자인자이며, 무한한 힘과 가능성, 생산력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거꾸로 말해 실체를 정의해놓고 거기에 부합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 끝에, 그것이 자연임을 깨닫고 자연에다 신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스피노자에게 있어 신과 자연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2] 실체substance, 양태mode, 속성attribute
'실체'란 무한하고 완전하며 다른 무엇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순수한 존재이며, 다른 모든 것이 의존하고 있는 본질이다.
'속성'이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많은 속성들 중 인간의 인식능력으로 파악된 이러한 속성의 예로는 '사유'와 '연장'을 들 수 있다. 이때, 실체를 바라보는 '나'의 방식이 두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실체' 자체의 속성이 두 가지이다.
'양태'란 무한한 속성을 가진 신의 각 속성이 나타내는 하나하나의 모양을 말한다. 모든 유한한 사건과 사물을 의미한다.
3] 능산적 자연, 소산적 자연
스피노자에게 자연은 거대한 생산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의 체계를 바탕으로 모든 현상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 각각을 '양태'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자연은 끊임없이 양태를 생산해 낸다는 의미로 일정불변하며, 또 끊임없이 새로운 양태로 표현된다는 의미로 늘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능산적 자연이란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자연을 의미하며, 모든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일정하고 항구 불변하는 자연현상의 원리이자 법칙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소산적 자연이란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수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변동하는 자연현상이다.
4] 심신병행설 _ 사유와 연장
스피노자는 자연은 거대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에는 무수한 속성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무수한 속성들 중에서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속성은 사고와 연장이다. 사고와 연장이 자연이라는 실체의 두 속성이 된다. 자연은 정신적으로 설명될 수도 있고 물리적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정신과 육체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 데카르트에게서 실체란 정신과 육체 두 가지의 상대적 실체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둘을 연결시키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절대적 실체인 '신'을 가져와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육체는 두 개의 실체가 아니다. 그에게서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더구나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와 차이나는 부분은 연장만 있는 사물에도 사고가 있다고 본 점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육체는 서로 영향을 미치거나 원인이 될 수 없다. 정신과 육체는 자연이라는 유일한 하나의 실체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존재이다. 다시 말해 한 실체의 두 측면이기 때문에 언제나 함께 결부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관념의 질서와 사물의 질서는 동일하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관념(사유)의 질서와 사물(물질)의 질서는 서로 영향을 미치진 않지만 평행하다. 질서가 다르기에 마음과 물질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은 접촉하지 않으나 필연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5] 무의식의 윤리학 ~ 6] 코나투스와 본질
모든 종류의 유한양태의 자기존재 보존의 노력, 추구 경향을 코나투스라 한다. 그는 '그것이 주어지면 사물이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사물이 필연적으로 없어지는 것, 그것이 없으면 사물이, 반대로 사물이 없으면 그것이 있을 수도 생각될 수도 없는 그러한 것'을 어떤 사물의 본질이라고 한다. 자기를 보존하려는 노력은 사물의 본질 자체이며 이것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에 공통되는 본질이다. 즉, 코나투스는 모든 종류의 유한양태를 이루는 본질이다.
그리고 코나투스는 그 유한양태가 지속되는 한 계속된다. 이러한 코나투스 이외에 사물의 본질을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들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올바른 방식이 될 수 없다.
코나투스는 다른 여러 종류의 유한 양태 속에서 각각 다른 형태, 내용을 갖는다. 예를 들어 소나무가 가진 코나투스와 인간이 가진 코나투스는 자기존재를 보존하고자 노력한다는 코나투스의 일반적 의미에서는 같지만 구체적 내용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양태는 다른 양태보다 코나투스를 더 많이 가지거나 더 적게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양태가 더 많은 코나투스의 내용을 가질수록 그 양태는 그만큼 더 자립적이며 그만큼 더 '그 자체'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코나투스는 어떤 존재의 특성을 나타내면서 또한 그 존재의 구체적인 능력도 드러낸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모든 사물의 존재와 그 존재의 본성 그리고 그 존재의 특성들은 코나투스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각 사물의 특성과 개별성이 코나투스와 필연적으로 관계맺음을 의미한다. 이는 코나투스가 우리의 의지에 의해 의식적으로 욕구되거나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코나투스는 모든 사물에 공통하는 선천적인 경향이다.
7] 소극적 의미의 코나투스와 적극적 의미의 코나투스
앞서 코나투스는 자기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이라고 말하였다. 코나투스를 소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이러한 지속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면, 그 사물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코나투스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적극적 의미는 외부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사물들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다른 사물과의 상호 작용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작용 과정에서 각각의 사물은 다른 사물의 코나투스와 접촉하고 되고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영향받게 된다. 사물이 외부의 다른 사물과 접촉할 때 자신의 존재 유지에 도움이 되는 사물과의 접촉은 유지하려 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사물과의 접촉은 유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물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힘이 필요하게 되고, 그 힘은 곧 코나투스를 증대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노력은 그 자신의 활동 능력을 증가시키고 스스로 완전성을 높이려는 코나투스의 능력이다. 자신의 존재 유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것을 확장하려는 것이 코나투스의 능동적 의미이다.
8] 인간 존재의 코나투스
의지, 욕구, 욕망이라는 개념들로 인간 존재의 코나투스를 설명할 수 있다. 의지는 정신에서, 욕구는 신체+정신에서, 욕망은 인식에서 나타나는 코나투스이다.
(끝)
강의(discussion) _ 신지영 교수님
Spinozian
이 홈페이지에 존재하는 모든 스피노자 관련 목록
01. 스피노자를 현대철학 관점에서 정리한 수업 [2015-1]
02. 스피노자를 독일관념론 관점에서 정리한 수업 [2015-2]
03. 스피노자를 기초적으로 정리한 수업 [20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