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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 2015 (이 교수님)
[합리론 경험론 독일관념론, 이것들은 독자적으로 논의할 수 없고 항상 연결고리 속에서 봐야 합니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이 세사람을 묶어서 합리론자라고 한 것은 동일한 문제선상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합리론자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틀은 실체에 대한 설명방식입니다.]
데카르트는 실체란 개념을 유한실체 무한실체로 정의했고, 유한실체를 두 유형 –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 - 으로 나누었다. 자기원인적이고 제한이 없기 때문에 실체라고 한 것인데 유한실체를 두 가지 설정하고 난 뒤에 서로간에 상대적이다, 라고 말하면 그것에 어떻게 실체라는 개념을 붙일 수 있나? 하고 반론하는 것이 스피노자의 입장이다. 스피노자의 경우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는 한 실체의 두 속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실체의 무한한 속성 중 인간이 인식할 때 두 가지를 파악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양태도, 무한양태가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두 가지 속성의 양태이기 때문에 유한양태가 된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를 겨냥한 것이라고 하면,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를 겨냥한다. 스피노자 중에 뭘 겨냥한 것인가? 실체가 갖고 있는 속성이 물질적이다, 이렇게 말하는 데 라이프니츠는 동의할 수 없다. 라이프는 실체를 정의할 때 '실체는 오직 정신적인 실체만이 존재한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이제, 합리론자들은 전부 다 실체라는 개념을 정의하면서 논쟁점을 발전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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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가 정신적인 실체라고 말한 뒤에, 정신적인 실체를 규정하는 개념으로 모나드(단자)를 내세운다. 가장 단순한 실체인 모나드와 유사한 개념이 고대철학부터 있어왔던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원자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잘 알다시피 유물론이라고 말하는 철학의 패러다임의 원조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의 경우 가장 단순한 존재, 라고만 말하면 옛날에 있었던 가장 단순한 존재라는 개념으로 사람들이 모두 원자를 떠올릴 수 있으므로, 모나드라고 정의한다. 원자와 모나드는 중요한 점에서 극명하게 다르다. 원자는 물질적인 것에서 가장 단순한 것을 뜻하지만, 모나드는 정신적인 개념에서 가장 단순한 실재를 뜻한다. 원자라는 말에서의 단순성은 양적이다. 그런데 라이프는 자기가 규정한 것이 정신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양적이라는 말로 표현하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양적이 아니라고 말하면 모나드는 질적일 수밖에 없다.
라이프는 외형적으로, 양적으로, 모양으로 볼 때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다 똑같을 수 있지만, 기본적인 모나드가 그 질에 있어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게의 다양성이 생겨난다, 이렇게 설명한다.
이 모나드가 어떤 의미에서 차이를 가지는가, 그것의 질적 차이가 무엇일까? 이 질적 차이가 바로 발표자가 말했던 것처럼 '지각'과 '욕구'다. 욕구라고 말하면 일반적으로 자기자신 속에 없는 것을 원하는 것을 뜻하지만 라이프에게 욕구란 것은 한 지각에서 다음 지각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 다음에 지각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영국경험론이 만든 인식론 ㅡ소위 과학적인 설명방식ㅡ에서 지각 등의 개념들을 차용해서 보기 쉽다. 그들에게 지각이란 말은, 감각이란 말과 연결된다. 그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신체가 어떤 무엇을 인식하는 힘을 감각지각sensory perception이라고 표현하기에, 지각, 이렇게 말을 하면 우리는 금방 우리의 신체를 떠올리게 되고 발생론적으로 인식이 시작될 때 최초의 단계,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라이프에게 지각은 지각이 가지고 있던 정신적인 활동역이다. 그러므로 지각이라는 말이 라이프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지각에 관해 물었다 : '라이프니츠가 말한 지각이 무엇인가?'(문X균). 그 다음에 지각의 다양성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거고. 이때 어떤 모나드의 활동이 지각이라고 말한다면, 이 지각에 다양한 측면이 있는 것은 왜일까? 모나드 스스로가 지각한다, 이렇게 말할 때 이것은 정신적 활동이다. 이 정신적 활동이 굉장히 활발할 수도 있고 활발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측면이 지각의 다양성을 부여한다.
여기서 조금 멈춰서서 이렇게 반문해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가장 단순한 실체를 모나드라고 한다면, 여기서 이런 걸 전제해보자. 우리는 어떤 걸 설명할 때 인간적인 관점으로 접근한다. 그런데 스피노자와 라이프는 데카와 달리 인간적인 관점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전체적인 자연을 먼저 설명하고, 그속에 인간의 위치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이프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모나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고, 이루어져 있는 모나드 속에 인간의 위치가 어디쯤 있는가를 반문해볼 수 있다.
데카는 이와 달리 인간이 갖고 있는 지식의 확실성을 토대지었기 때문에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을 이렇게 저렇게 나누어서 지식을 검토하는 와중에 바깥에 있는 존재의 세계로 나간 것이다. 그런데 스피와 라이프는 그와 달리, 지식이라는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을 먼저 설정하고, 인간의 인식이나 정서가 그 속에 어떻게 위치지어지고 있나, 이런 걸 이야기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라이프니츠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단자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이렇게 말할 때, 여기서 단자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보는 관점에 있어서, 한 사물을 말하는 것인가? 한 단자가 한 나무를 이루고 한 단자가 여기 있는 강의테이블을 만들고 볼펜을 만드는 것인가? 그럼 이제 발표문으로 돌아가서 대답해볼 수 있는 말은, 여기서 복합체라는 말을 쓰고 있다. OO군이 발표할 때 물질은 복합체라고 말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물질' 이런 것도 복합체다, 이렇게 말을 해야 될 것이다. 근데 이게 애매하게 보인다. 물질은 다른 복합체가 아니고, 단자들의 복합체이다.
이 단자들의 복합체 중에서 가장 활동력이 높고 지각력이 높은 단자를 중심단자라고 말하고 엔텔레키 단자라고 표현한다. 이 중심단자를 매개로해서 주변에 결합되어 있는 단자를 물질단자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보면 라이프니츠가 설명한 의도가 분명해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전부 다 단자로 이루어져 있고 단자는 정신적인 실체인데, 지각력이 활발한 걸 엔텔레키 단자라고 말하고 지각력이 제일 활발하지 않은 걸 물질이라고 표현한다. 상식적 정의로 보면 물질은 정신이 아니다. 근데 라이프니츠 설명 방식으로 보면 그것도 단자이다. 그런데 인간이 인식하는 관점에서 나누어보면 그것은 지적인 활동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걸 물질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정신적인 모나드라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전체적으로 모나드의 세계이고, 이 모나드의 세계 속에 엔텔레키 단자의 결속 정도에 따라서 모나드에 계층이 생기는 것이다. 즉, 엔텔레키 단자를 중심으로 해서 단자의 계층이 생긴다(발표문의 표).
여기서 멈추어서 본유관념에 관해 생각해보자. '우리보다 모자란 사람도 인간인가?' 하고 묻자 발표자가 라이프 관점에서는 인간이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설명했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이런 걸 생각해보자. 본유관념론은 처음으로 데카르트가 말을 했다. 이 본유관념이라는 것은 인간 마음 속에 저절로 생겨나는 관념이다. 이 관념 중에 인식과 관련되는 본유관념을 우리가 논리적 공리나 수학적 공리라고 표현했다. 무엇인가 주어지고 우리가 개념을 갖게 되면 그 개념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것을 논리적 공리라고 한다. 그것에는 동일률, 모순률, 배중률이 해당한다.
동일률은 A=A로서, 서울은 한국의 수도이다(상대적 동일성). 주어와 술어가 똑같은 것.주어와 술어가 똑같으면 분석명제가 되고, 주어와 술어가 다르면 종합명제가 된다. 어찌되었든 주어와 술어를 연결시켜주는 계사(연결고리를 만드는 것)를 동일률이라고 말한다. 동일률의 이면은 부정판단을 만드는 방식이다. 여기 있는 책상은 여기 있는 교탁과 다르다. 교탁은 책상이 아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교탁을 교탁으로 말하면서 교탁 아닌 것으로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문자상으로는 'a를 a라고 말하면서 a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 뒷부분을 묶어서 b로 표현하면 모순율에 걸리는 식이 된다. 그러므로 A는 ~B로 표현해야만 모순없는 답이 된다. 그러므로 동일률과 모순율은 근본적으로 부정판단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논리적 공리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이성적 사유를 한다 할 때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토대가 되는 것이 뭐냐면 논리적 공리거나 수학적 공리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본유관념으로서 자아나 심리라는 개념을 (데카르트)가 도출했던 것이다. 이제, '생각을 제대로 못한다' 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우리 속에 있는 어떤 사물을 보면서 개념을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또 한 측면은 개념을 떠올린다 하더라도 개념과 개념 사이에 연결고리를 못 만들 경우다. 우리가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의 활동이 이성적 활동이라고 할 때, 이성적 활동을 한다라고 말하면 늘 이와 같은 논리적인 틀이 작동해야 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러한 논리적인 틀이 작동하는가? 그래서 로크는 데카르트의 본유관념론을 이야기할 때 아래와 같이 묻는다 (참고 : 로크의 책제목이 <인간오성론>이었고, 라이프의 책제목은 <신 인간오성론>이었다. 그 속에 라이프가 로크에 대한 대답을 한다. 이 속에 라이프의 입장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 인간의 이성 속에 본유관념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누구나 다 본유관념을 지니고 있어야 하지만 그러면 어린아이는 왜 이성적 사유를 못하는가? 어린아이도 마음이 있고 그도 근본적으로 이성적 사유를 해야 되는 것 아닌가? 또 자라서도 이성적 사유를 못하는 인간이 있는데, 인간의 이성적 능력이 인간의 마음 속에 본래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례는 안 드러나야 되지 않느냐? 따라서 로크는 인간에게 지식이 성립된고 말한다면 인간의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증명하면서 <인간오성론>을 시작한다. 본유관념으로부터 지식의 확실성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설명해야 된다는 것이다.
라이프는 거기에 대해 절묘하게 반론한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을 갖고 있고 그 마음 속에 이성적인 능력이 있다고 말하면 이 능력은 잠재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그 이성적 능력이, 논리적인 사유든지 수학적인 사유든지 씨앗으로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마음 속에 씨앗이 뿌려져 있고, 인간의 마음이 자라면서 이성적 능력이 작동을 해야 되는데, 이 이성적 능력이 빠르게 작동되는 사람이 있고, 느리게 작동되는 사람이 있고, 느리게조차 작동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릴 때부터 천재소리를 듣는 사람은 이 본유관념이 너무 빨리 열린 것이다.
여하튼 라이프에 의하면 인간이 갖고 있던 능력이 본유관념이라고 한다면 그 능력은 계발된다는 것이다. 저절로 계발될 수도 있고, 많은 훈련을 통해 계발될 수도 있고, 그 싹을 못틔울 수도 있다. 그렇게 설명해보면 '인간이 갖고 있는 능력 속에 왜 천차만별이 있을까?'부터 시작해서, '왜 어릴 때는 제대로 이성적 사유를 못하다가 나이가 드니까 그것이 가능하나?', '왜 어른이 되었는데도 지적인 능력이 저만큼 밖에 안 되나?'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이 주장의 핵심은 잠재력에 있으며,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따르면, 모나드의 이성적 능력은 근본적으로 잠세태로 있는 것이다.
이런 설명방식은 인간 지성에 대한 설명방식으로도 가능하지만 모나드를 층위짓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물질적인 모나드, 물질 모나드란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정신적인 능력의 잠세태를 갖고 있지만, 이게 전혀 계발이 안 되는 경우다. 그런데 이제 한 물체 속에 이렇게 모나드가 결합되고, 경원이를 향해서 이렇게 결합이 되었다 해보자. 경원이는 어떤 사유의 능력을 가지고, 교탁은 그것을 가지지 못했다. 이 교탁을 형성하는 모나드들은 지각의 능력이 활성화된 그런 엔텔레키 모나드가 없고, 전부 다 활성화 안 된 모나드로만 있다. 그런 모나드를 가지고 '물질 모나드'라고 말한다. 개가 한 마리 지나간다 해보자. 그런 개는 엔텔레키 모나드가 온전히 계발안 된 상태의 모나드들의 결합이다. 그럼 경원이는 어떤가? 엔텔레키 모나드가 지각능력이 활성화되고 계발된 모나드이다. 그래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나드가 갖고 있는 다양성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다양성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럼 이렇게 설명하면 '라이프=형이상학적 유심론'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것처럼, 형이상학적으로 다 설명할 수 있다. 그런 모나드를 실증적으로, 경험적으로 증명해봐라, 하면 증명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던 세계를 설명하는 어떤 모델로서 이걸 세울 수 있다. 근데 이 모델의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기에 이를 형이상학적이라 표현한다. 사실 과학이라는 것 조차도 대전제는 참 증명하기가 어렵다. 과학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형이상학적 가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적 가설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뭔가? 그게 확실하다, 절대확실한 존재론적인 토대를 갖고 있다, 이렇게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적 가설에 지나지 않는 것. 그런데 철학에서는, 그 존재에 토대가 있다고 말한다.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가설이 아니고. 그렇게 말하면 이는 증명 안된 존재이고 논거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전제라고 표현합니다. 존재에 관한 확고한 신념을 표현하면 증명될 수 없는 경우 형이상학이라고 표현한다.)
(이때 인식과 존재의 가름이 굉장히 중요하다. 인식은 형이상학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모르지만 인간이 있고, 이 인간이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는 나로부터 유래가 되지 않는다. 데카르트도 그렇기에 신을 통해 증명하고, 현재의 내 존재는 증명할 수 있지만 과거로부터 미래의 내 존재는 증명이 안 되기 때문에 내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도 역시 신을 통해 증명한다. 그러므로 인식은 내 몫이고, 그 인식하는 대상의 존재나 나의 존재의 몫은 다른 존재에 귀탁시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변별해보면 인식과 존재의 가름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존재를 형이상학적인 실체로 증명한다, 그게 모나드라고 주장한다면,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유심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천차만별, 그것은 모나드가 갖고 있는 여러가지 층위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그다음에 조금 진전을 시켜보면, 여기 있는 교탁이나 경원이가 이렇게 있다 해보자. 그러면 '왜 모나드는 어떤 경우는 물질로 결합이 되어 있고, 어떤 경우는 경원이로 결합되는가?' 이렇게 물었을 때, 우리가 손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먼저 이제 라이프의 비유를 들어보면 모나드의 모든 활동은 오케스트라와 같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쫙 있고 지휘자가 쫙 올라서는 광경을 생각해보자. 지휘자가 지휘를 시작하면 연주가 시작되고, 단원들은 각자 제각기 맡은 대목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도 생각해보면 지휘자가 지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고 악보가 주어져 있다. 그러니까 이제 각 연주자들은 자기가 악보를 보고 있어요. 그런데 그 악보는 모든 사람들이 연주할 곡이 다 기록이 되어 있는 것으로서, 이것을 보면서 자기차례가 딱 주어지면 자기가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라이프가 왜 이 비유를 갖고 왔는가를 금방 알 수 있다. 모나드가 자기활동을 할 때 이 모나드의 역할이 다 주어져 있다는 것을 라이프는 의도하고자 한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이 자기 악보를 갖고 있는 것처럼, 각 모나드들은 각 모나드 속에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동을 할 때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이 딱 주어지면 작동을 하다가, 주어진 게 끝나면 딱 멈추는 것이다. X균이가 질문할 때 프로그램이 딱 되어 있다가, 발표를 딱 듣고 조건이 주어지면 딱 작동하는 것이다. 내가 자유롭게 질문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 악보를 보면서 내 엔텔레키 모나드가 딱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엔텔레키 모나드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다.) 엔텔레키 모나드가 딱 작동하면 거기에 맞추어서 바이올린이 켜지듯, 옆의 다른 모나드를 딱 움직여서 (내입을 움직여서) 말을 딱 하는, 이런 구도로 짜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각 모나드가 조화롭게, 어떤 운동 속에 하나의 실재를 드러낸다, 라고 말하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예정되어 있는 조화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 예정을 누가 주었나? 신이라는 개념을 갖고 와서 신의 예정조화다, 이렇게 표현하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부분을 어떻게 동의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라이프 입장에서 보면 동의하고 말고가 없다. 당대의 시대를 본다면, 중세로부터 벗어난지가 얼마되지 않고, 과학적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사유가 그렇게 익숙해지지 않고, 또 과학적 사유를 받았다 하더라도, 실재하는 존재로서의 신을 부정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여러분들이 아는지 모르지만, 라이프니츠는 아주 혁명적인 방법론을 개발한다 ㅡ 미적분, 기호논리학. 앞의 형식논리학과는 다른 기호논리학의 체계를 만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기호로 온전히 다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라이프는 그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이 수학의 토대를 형이상학적, 철학적 원리로 설명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럼 우리가 조금 더 나아가서, 여기까지는 형이상학적 체계로서 정리하고, 그 다음에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체계, 또 인간의 입장에 서서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를 라이프가 어떻게 형이상학적 원리로 설명하는지를 살펴보자.
라이프니츠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사실을 두 가지로 나눈다 ㅡ 경험적 사실, 분석적 사실. 이걸 언어로 바꾸면 하나는 종합명제, 분석명제가 된다. 분석명제라는 것은, 주어를 분석하면 항상 그 속에 술어가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공을 둥글다(tautology). 백조는 흰 새다. 이런 것처럼. 어떤 주어 속에 들어 있는 술어를 바깥으로 빼내는 것을 토톨로지라고 한다. 이 토톨로지를 형성하는 대표적인 지식이 수학이며, 수학은 동어반복적인 자기증명으로서, 수학이 분석명제의 대표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학적 개념을 논리적 개념으로 바꾸면 '동일률'이다. (참고 : 버트란트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수학의 원리>라는 책을 쓰는 까닭은 모든 수학은 근본적으로 논리학으로부터 유래했다 라는 걸 증명해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한 지식의 유형 (tautology=동일률) 은 설명하기가 간단하다. 바깥에 보는 세계를 설명했던, 그 세계조차도, 논리적으로 보면 항상 tautology를 형성하는 그런 명제가 있을 수 있고, 이건 틀릴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이 경험하는 지식의 체계 속에는 주어 술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언어적 양식으로, 지식으로 말할 수가 있는데, 바로 주어 속에 새로운 술어를 덧씌우는 것이다 : 물체는 무게를 갖고 있다. 이렇게 말할 때 물체라는 개념 속에 무게라는 개념은 없지만,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물체를 들면서 무게를 느끼게 되고, 아 물체는 근본적으로 속성으로서 무게를 갖고 있구나, 이렇게 말하면서 '물체'라는 주어 속에 '무게를 가지고 있다'라는 술어를 덧붙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합명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경험적 세계를 인식하면서 비로소 그 속에 붙일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경험적 세계를 보면서 명제의 형식을 만들어내는데, 이 명제의 형식으로 만들어낸 그것이 존재의 세계에도 실제로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겠는가? 내가 경험을 통해서 이 존재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 이렇게 표현하면 그런 것이지만, 내가 인식한다는 것은 엔텔레키 모나드가 바깥으로 안 거죠. 그런데 엔텔레키 모나드가 바깥으로 알았다고 말할 때, 실제로 바깥에 나간 것인가? 우리가 조금 전에 모나드를 설명할 때 '각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자기 악보를 보고' 라는 말을 했다. 그러므로 엔텔레키 모나드든 물질 모나드든 그 자체 속에 자기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엔텔레키 모나드가 외적인 존재를 경험하고 어떤 종합명제를 하나 만든다 해보자. 이렇게 보면 인간의 지성이 마치 바깥에 나가서 어떤 것을 경험하고 지식을 산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형이상학적 원리에 따라 들어가보면, 엔텔레키 모나드가 바깥 경험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 속에 이루어져 있는 프로그램을 보고'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질서, 라고 말할 때 엔텔레키 모나드는 (프로그램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엔텔레키 모나드는 완전하게 자기 현시를 안했기 때문에, 바깥에 이루어지는 일을 몽땅 다 알 수가 없다. 오케스트라에서 지휘를 하는데, 악보를 다 안다 해도 연주 끝까지 가보지 않은 다음에야 전체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따라서 계속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엔텔레키 모나드는 바깥을 인식한다고 말할 때, 종합명제를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신과 같은 필연적인 그런 지식체계는 만들 수가 없다. 엔텔레키 모나드가 완전히 계발되어서, 가능성이 더이상 없는 현실 속으로 갈 때까지는 완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바깥을 보는 거고 그것이 경험 명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바깥을 볼 때, 자기 자신 속에 있는 프로그램을 따라가보면 끝까지 다 있다. 그 속에, 전체가 다 들어 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엔텔레키가 저쪽을 보는 거니까 전체를 다 못보는 것이다. 그런데 저 바깥에 있는 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초창기 출발부터 시작해서 끝까지가 다 이루어져 있다. 이게 '지속'이다. 지속이란 말은 그런 의미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갖고 있던 지속이란 개념과 다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불완전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이 잠재적으로 있는 것이 자기 프로그램을 통해서 완전한 것에 도달할 수가 있다. 현실태에 완전하게 도달하면 이것은 완전성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속'이라는 것은 지금 여기로부터 완전성에 도달할 때 까지 계속 가는 것이다. 그럼 지속의 원리와 완전성의 원리는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지속하는 관점에서, 인간 경험 속에 주어지는 관점에서 보면, 아직 어떤 인식도 완성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엔텔레키 모나드는 자기완전성을 기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기완전성을 기할 수 없는 인식의 측면에서 바깥을 볼 때 이 바깥은 전부다 우연적이다. 필연적인 세계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필연적인 세계를 볼려면 자기속에 있는 프로그램을 다 뒤집어놓아야 한다. 거기에는 도달 못하기 때문에 내 인식이 갖고 있는 외적 존재는 완전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존재는 전부 우연적이다. 그러니까 이 우연성의 세계가 (어떤 의미에서, 우연적인 존재가 운동하는 거니까) 완전성의 원리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왜 라이프가 분석명제를 지배하는 원리를 모순율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종합명제를 지배하는 원리를 충족이유율(충분이유율)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종합명제는 항상 명제의 참 거짓이 명제 자체의 자기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깥의 존재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깥의 존재가 그렇게 있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몰라도. 내가 모르는 것은 무엇일까? 바깥에 있는 존재의 완전성의 원리가 내가 가지고 있던 프로그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깥의 다른 존재에 걸려 있기 때문에, 그 바깥의 다른 존재가 의도한 것이, 내가 경험하는 그 존재 속에 온전히 실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던 종합명제에는 충분이유가 있다. 내 엔텔레키가 온전히 현실태가 안 되었기 때문에, 저 바깥에 걸어서 말할 때에는, 내가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지만 저 바깥에 있는 것들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란 소리다.
그러면 이제 요쪽편에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세계와 뒤쪽에 인간의 관점 속에서 인식이라든지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토대가 있고, 이 두 차원에서 결합시켜볼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라이프 체계 속에서는 종교적 의미의 선 악에서 악이 없다. 왜? 인식에 있어서의 불완전함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거고, 도덕적 세계의 불완전함은 악이다. 그러므로 어떤 차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오류다, 악이다, 이런 개념을 쓸 수 없다는 것인데, 그런 판단을 배제하는 원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온전히 신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다'이다. 신의 섭리라는 것은 굉장히 종교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라이프는 섭리라는 말 대신에 '예정되어 있는 조화로움이다' 라는 표현을 쓴다. '부조화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 속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예정되어 있는 조화로움이 있다' 이런 말이다. 예정은 아직 온전히 실현 안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이 실현되면 조화로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제 인간이 불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불완전함이 있고, 세계의 불완전함이란 뭡니까. 홍수가 있고 모든 생명체를 손상시키는 병이 있고 이런 겁니다. 존재의 세계의 불완전. 인간이 행위하는 데 있어서도 불완전. 왜 인간은 이기적이고 인간은 악을 행할 수 있고 이런 걸 설명하는 거잖아요. 그런 것도, 아직 완전한 데 까지 못갔다는 겁니다. 완전한 데 까지 가보면 조화로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라이프가 갖고 있던 예정조화설은 데카, 스피 속의 관점인 실체론에서 출발했지만 전혀 다른 철학체계가 된 것이다.
▼ 라이프니츠가 독일관념론에 끼친 것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의 철학적인 다른 이름이 '잠세태'이다. 본유관념이 있지만 인간의 의식 속에 잠재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계발되면 인간이 이성적인 능력을 갖게 되고, 또 이성적 능력 속에 본유관념이 자기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게 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이 이야기는 인간 의식 속에 정신이 자기자신을 전개해서 자기자신의 완성으로 간다는 구도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가 말했던 (계발의) 체계를 데카르트가 말했던 의식 속에 싹 옮겨서 보여준 것이 헤겔이다.
Leibnizian
이 홈페이지에 존재하는 모든 라이프니츠 관련 목록
01. 라이프니츠를 독일관념론 관점에서 정리한 수업 [2015-2]
02. 라이프니츠를 기초적으로 정리한 수업 [20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