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2015 강의정리
강의 _ 이성환 교수
이 강의록은 데카르트가 제기했던 문제를 스피노자가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고 해결하려 했던 스피노자의 패러다임이 어떤 형태로 구성이 되어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한 스피노자가 말했던 이런 부분들이 독일관념론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변형이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독일관념론 수업의) 최종 목적이다.
그날 박군이 "'윤리학'에서 말하는 기하학적 방법의 의미는 무엇인가? '윤리학'이 갖는 의도는 그리스도교적 신의 거부인가?" 라고 물었다. 일단 기하학적 방법이라고 말을 하는 셈인데, 실제로 스피노자가 썼던 책 이름은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서 논증한 윤리학' 이다. 엄밀하게 보면 기하학적 방법이 아니다. 기하학적 질서라는 것은 공리가 있고, 원리가 있고, 증명,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는 뜻으로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하학에서 생각하는 기하학적 방법, 이런 의미가 아니다. 굳이 수학에서 말하는 기하학적 방법이 갖고 있는 의미와 유비해서 본다면 연역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 스피노자도 똑같이 공리 – 원리 - 증명 - 개요설정 하는 방식으로 '윤리학'의 전체적 체계를 설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하학적 질서에 따른 윤리학이라는 표제를 쓴 것이기도 하다.
스피노자는 기본전제로부터 뒤이어 새로운 원리들을 창출해 보여줄려고 한다. 근본적 전제, 그것은 개념에 관한 정의이다. (1번 정의) 자기 원인이란 무엇인가 , (2) 한 종이 다른 성질을 갖는다 라는 게 도대체 뭔가 , (3) 실체, 속성, 양태, 신, 마지막에는 자유. 이런 개념들을 정의한다.
① 스피노자는 자기원인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정의한다. 자기원인이란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존재를 빌려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실체라는 것을 정의하기 위한 첫째 정의이다(스피노자가 <윤리학>을 기하학적 질서라고 말한 이유는 이러한 개념 정의의 순서에 의한 것이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대부분의 윤리학은 개인이 자유롭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기본적인 개념을 정의하다가 제일 마지막에 자유를 말한다. 그러니까 자기원인이 있고 자기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실체가 있고 그걸 설명하고 난 뒤에 자유를 설명하겠다, 라는 방식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기하학적 질서의 의미이다.)
스피노자 왜 (자기원인 → 실체로) 출발했는가 하는 의도를 데카르트와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데카르트는 실체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하나는 무한실체이고 하나는 유한실체이다. 그것을 제약하는, 혹은 그것을 한계지우는 다른 것이 없는 것을 '무한'이라고 말한다. 반면 '유한'이라는 말은, 나를 한계지울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데카르트의 경우, 정신이 물질이 될 수도 없고, 물질이 정신이 될 수도 없고, 이 둘은 서로간에 영향을 끼칠 수 없으므로 이것들을 독자적으로 각자 실체라고 보고 유한실체로 둔다. 데카르트의 경우 이 두 존재 자체는 자기 스스로 존재를 낳을 수가 없다. 따라서 정신(물질)적인 실체는 자기자신의 존재를 갖기 위해서 토대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무한실체(무한존재)이며 이것을 신이라고 말한다(데카르트의 경우).
그런데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실체라는 개념을 오용했기 때문에 무한실체와 유한실체라는 말이 분별되었다고 주장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실체라는 말을 온전히 쓸 수 있는 것은 무한실체 밖에 없다. 무한실체만이 실체라고 말한다면 데카르트가 설정했던 이원론의 구도가 깨진다. 스피노자는 이 실체라는 것을 분명히 정의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자기원인이라는 것을 정의한다(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자기원인이라고 말한다). 더이상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어떤 존재의 원인은 자기가 자기를 낳는다는 것으로부터 설명된다.
② 만약에 자기원인이라는 종이 있다고 말하면 이건 다른 속성을 가질 수 없으므로, 하나의 존재만이 있게 되고, 자연속에 들어있는 모든 속성을 달리 가질 수 있는 다른 존재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종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논리학에서 종차라는 말을 쓰는데, 종차라는 말은 종을 구분시키는 근본적인 속성이 더해진다는 것이다. 종차는 종을 변별해내는 차이다. 자기원인이라는 것은, 다른 성질을 안 갖고 있으므로 종차도 가지지 않는다. 다른 성질이 없기 때문에 다른 존재가 없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③ 이 두 개념을 정의하고 난 뒤에, 이 두 개념에 가장 적절하게 들어맞는 것이 '실체'라고 한다. 실체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고 인식되는 것이다 ㅡ 존재와 인식을 같은 선상에 두는 것이다(순전히 논리적인 개념으로서).그러니까 결국은 실체라는 개념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할 때 어떤 상대도 세우지 않는다는 것 + 다른 것에 의존해서 자기자신을 인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의 경우 정신을 물질이 아닌 것으로 정의했던 것처럼, 다른 것에 의존해서 자기를 규제하여 정의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물질과 정신을 나누려면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상대에 없는 속성을 그것에 부과해야 한다. 그렇기에 유한실체의 개념은 위의 실체 개념에 위반한다.
④ 실체라는 개념을 정의하면 속성도 정의해야 한다. 실체는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다. 속성을 왜 성질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속성은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것이고, 성질은 인간이 인식할 때 어떤 것 속에 들어 있는 요소를 말한다. 이때 속성은 유한실체의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속성 자체도 무한해야 한다. 한 요소라도 다른 요소로서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 상대를 세우는 것이다. 실체가 무한하게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을 볼 때 우리의 상식대로 양적인 무한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자기자신이 가질 수 없는 어떤 속성이 하나도 있지 않다는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실체의 속성이 무한한데 우리는 왜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을 분별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인식할 때 인간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실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무한한 것이지만, 이 속성을 인간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실체를 인식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인간에게 파악(포착)되는 속성은 그 두 가지 밖에 없게 된다. 무한인데 속성을 왜 두 가지 밖에 말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와 관련되는 것이다. 실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알 수 없는 수많은 속성이 있을 수 있고,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수많은 속성 중에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속성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이성으로 실체를 파악하는 것을 가지고 속성, 이렇게 표현을 한다. 그다음에 양태라는 것이 있는데 양태는 이 실체가 드러나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게 인간이 정신을 가지고 파악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고 인간이 감각을 가지고 파악할 수 있는 모습을 양태라 한다. 그러므로 속성은 인간이 정신으로 파악하는 것이고 양태는 인간이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사유라는 속성이, 인간이 지각(내적 경험 by 영국경험론 ; 반성)을 통해서 보면, 지각 판단 추리 데카르트가 말했던 의식의 활동은 전부 말할 수 있다. 내가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반성을 통해서, 이 정신이라고 말하는 것의 속성을 파악하는 감각적인 것이다. 내적 감각. 그다음에 우리눈에 보이는 바깥의 사물들은 다 연장이 자기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걸 감각하게 되면(외적 감각) 양태란 말을 쓸 수 있다.)
무한속성이 있고 이 무한속성이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될 때 사유하고 연장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말을 하면, 파악되지 않은 수많은 속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양태들도 있을 수 있다. 양태도 근본적으로는 무한양태이다. 수많은 양태들이 자기활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자기자신을 전개하는 가운데, 무한양태 속에서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양태라고 말하면 무한양태가 유한양태가 된다. 첫째로, 우리가 속성을 두 가지 밖에 파악 못한다라고 말하면 이 두 속성이 가지고 있는 양태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둘째로, 하나의 속성이 갖고 있는 양태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한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유한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미래에 경험할 수 있는 양태를 우리는 경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정적인 가능태로 보면 항상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도 역시 무한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유한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할 때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양태인데, 그 양태들은 전부다 유한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④ 그 다음에 뭐를 말하게 되나? 신을 말하게 된다. 실체를 말했는데 이 실체의 구체적인 존재가 무엇인가? 신이다.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고 신이라는 개념을 종교적(기독교적 혹은 유대교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 핵심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선상에서 신을 규정하는 모든 속성들은, 스피노자가 실체라는 개념을 가지고 정의했던 속성하고 일치하기 때문에 스피노자 자신이 말하는 실체의 존재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신의 존재를 가지고 대변시키는 것이다.
⑤ 마지막으로 자유. 만약 실체, 속성, 양태라고 말을 한다면 그 자체로 본다면 어떤 경우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인간에겐 자유가 있지 않은가? 이 자유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인간은 감정 역시 가진 존재인데,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니까 자연적 질서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감정이 자연적 질서와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인간의 감정의 본성과 기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때 코나투스란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코나투스란 말의 기본적 뜻은 '존재욕구'이다. 코나투스란 개념은 근본적으로 감정과 연결되어 있고, 이 감정이 어떻게 컨트롤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윤리적이거나 비윤리적인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⑥ 그다음에 인간이 갖고 있는 지성의 능력. 정신의 기원과 본성을 말하고 난 뒤에 마지막에 지성의 기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이 정신을 갖고 있지만 인간 이외의 것도 정신을 가질 수 있는데, (*)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인지의 능력을, 지성이라고 표현을 한다. 이 지성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감정을 말하고 인간의 지성 자유를 말했다고 한다면 '감정'이라는 부분이 <윤리학>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이 감정을 어떻게 컨트롤할 것인가 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감정이 컨트롤 되는 것은 감정이 그 자체로 컨트롤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있어서 지성에 의해 컨트롤 된다는 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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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뒤에 여러분들이 질문했던 걸 가지고 세부적으로 풀어보기로 하자.
ⓐ '신이 유한양태를 산출한다면, 신이 결여를 가진 유한자인 것 아닌가?' 그 전에 이것을 먼저 설명해야 한다 - 내재적 원인. 스피노자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라고 말할 때, 이것은 실체 개념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신의 개념을 빌려 와서 자기가 말했던 실체 개념의 존재라고 규정했지만). 그런데 왜 기독교적 신이, 자기자신이 정의했던 실체 개념과 어긋날까?
기독교적으로 보면,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 이때 신이 창조했다고 말을 하면, 신은 그 세계 바깥에 있다. 그러면, 신은 상대적이다(→ 절대라는 개념에 어긋난다). 신이 창조한 세계는 신 바깥에서 신을 제약한다. 신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모든 존재를 다 포함해야하는데, 창조해서 자기 바깥으로 밀어내었기 때문에 세계는 신의 바깥에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실체라는 개념의 정의에 맞지 않게 된다. 스피노자는 그것을 배제하려 한다.
그다음에 (신에 의해 세계는) 목적론적이다, 라는 것도 문제가 된다. 이것은 스피노자와 약간 어긋난 식으로 설명을 해보자. … 만약 일주일만에 세계가 창조되었다면 신은 절대적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다. 창조라는 개념을 설명하려는 까닭에,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은 시간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고심하게 된다. 이는 라이프니츠 속에 그대로 등장한다. 스피노자가 실체 개념을 정리하고 신이란 개념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기독교적 신의 개념을 실체의 현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를 살펴볼 때, 중요한 디딤돌이 된다. 신과 세계가 서로 마주하고 있으므로 상대적, 창조된 세계는 시간 속에 있다고 말하면 신은 시간 바깥에 있다고 말을 해야되므로 또한 상대적이다. 그리고 목적이 바깥에 있다고 말을 하면 시간 속에 있는 것이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자기원인'이라는 개념에 맞지 않는다. 실체가 '자기원인'이기 때문에 존재의 근거를 자기바깥에 가질 수 없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창조된 사람이 창조된 세계가 있을 때는 창조된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세계가 나아가야 한다(목적론적). 자기원인은 이런 목적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 개념은 상당히 목적론적, 상대적인 의도 속에서 맞지 않게 된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윤리학'을 발표한 뒤에 유대 사회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그 다음에, 신이 유한 양태를 창출하고 그것을 욕구한다는 것은 지극히 기독교적인 발상이다. 스피노자의 경우 실체의 자기활동이 결국은 무한양태로 등장하는 셈인데, 이 무한양태는 외부의 자극이나 외부의 운동 조건이 주어져서 운동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실체가 자기운동을 하고 있고, 인간이 지각을 할 때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 속에는 인과, 즉 '원인'과 '결과'와 같은 개념이 없고 오로지 '운동'과 '정지'라는 말만이 있다. 운동은 인과원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원인인 자가 자기활동을 하는 것을 운동이라 표현했을 뿐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때,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어떤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그것들이 인과적 관계를 가졌다, 라고 말하는 것은 스피노자가 말했던 실체 개념의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고, 인간이 무한양태를 보면서 유한양태밖에 지각을 못하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과원리를 도입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스피노자의) 신은 유한자가 아니다. 실체는 그 자체로 완결된 체계이며, 그 존재의 크기는 우리에게 가늠되지 않는다. 그러한 실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자기운동으로서이다. 실체의 운동은 끊임없이 수많은 실체의 모습을 밖으로 드러낸다, 무한양태로. 그런데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유한양태밖에 없다. 무한양태의 전체적인 규모는 알 수가 없다.
김지X군이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면 신도 2개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는데, 평행우주가 실제로 있거나 없거나, 이런 것까지 전부 다 신의 무한 양태 속에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우리가 보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진 시간, 공간의 관념 속에 나타나는 유한 양태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딱 잘라서, 신이 갖고 있는 무한양태 속에 그와 같은 평행우주는 없어, 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물론 인간의 지식이란 관점 속에서 평행우주는 증명될 수 있거나 없는 거야, 라고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그게 있거나 없거나를 논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논리에는 맞지 않는다.
ⓑ '신이 내재적 목적이라면 신은 인과사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 무한 양태라고 말하는 총체적 규모 자체가 신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깥으로부터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내재적 목적이라는 말은, 이 자기원인은 자기 목적 속에 움직인다는 것이다. 목적이 바깥에 있으면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이 전체로서의 실체로서의 무한양태는 자기가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어떤 것도 이 자기운동을 하는 실체를 제약하는 것이 없다. 다른 어떤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내재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떤 제약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다. '~로부터의' 자유, 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적인 자유이며, 우리는 실체의 자유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자유로부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간은 항상 구속받고 억압받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논한다. 그런데, 내재적으로, 자기스스로 존재하는 자의 자유는, 목적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자유롭다는 말이지, 어떤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유롭다는 말은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내재적 목적이니까 인과사슬에 안 걸리냐고 물으면, 개념 이해가 잘 안된 것이다. 신 자체를 무한양태의 운동의 한 요소로 보면 그렇게 물을 수 있지만, 스피노자의 경우 운동 자체가 신이 나타난 모습이다. 신이 왜 인과적으로 나타나는가? - 신의 모습은 뒤죽박죽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의 능력으로 그것을 파악할 때 원인과 결과의 방식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자기원인이,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아, 인과의 사슬에 묶여 있는 거 아닌가, 라고 할 때 신의 입장,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것이 아니다.
ⓒ '스피노자의 입장은 플로티누스하고 같은 것인가 ? ; 무한양태라고 말하는 것은 유출인가 ?' 라고 질문했다. 그렇게 연상할 수 있는 이유는, 고중세철학사를 들으면서 '내재적 목적' 이란 개념을 들었을 것이고, 연상적으로 플로티누스와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플로티누스에 대해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은 '유출설'이다. 일자로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존재의 세계가 유출되었다고 플로티누스는말한다.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세계는 일자로부터 유출되었으므로 일자에 가까울 수록 일자가 가지고 있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고중세철학이 갖고 있는 근본적 특징으로서 '존재에 계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자에 가까울 수록 정신적 요소가 강하며 멀어질수록 물질적 요소가 강한 존재의 계층이 생긴다. 플로티누스와 스피노자의 결정적 차이는 스피노자의 관점 속에는 존재계층이 없다는 것이다. 속성으로 계층을 나누는 경우가 없다. 정신적인 요소가 더 있거나 없다는 사고는 찾아볼 수 없다. 내재적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얼핏 생각을 해보면, 스피노자와 비견될 수 있는 것처럼 보여도, 스피노자가 보고 있는 무한 양태는 유출이 전혀 아니다. 일자가 있고 일자로부터 나왔다, 이런 것이 아니고, 무한 양태 자체가 신(플로티누스에게 있어선 일자)이다. 따라서 일자의 자기운동이 무한양태다, 라고 되는 것이지, '일자와 더 가까운' 이런 개념은 없다. 따라서 플로티누스와는 완전히 다른 구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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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데카르트가 유한실체로 정신과 물질을 갈라내었는데 스피노자가 이러한 데카르트 이원론을 자기의 철학적 체계 속에서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밝혀보도록 하자.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에는 두 가지 양태가 있을 수 있다.
(1) 정신, 이념, 인간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소로 구성된 것
(2) 자연, 자연을 지배하는 이법,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정신
인간의 관점에서는 두 가지 틀로 바라볼 수 있지만, 신이라는 개념을 도입해보면, 이것은 동전의 앞뒤면이다. 왜냐하면, 실체는 근본적으로 자기가 갖고 있는 속성으로밖에 존재하지 않고, 무한속성으로서 그냥 그렇게 있기 때문이다. 무한속성 속에, 정신하고 물질이라고 말하는 것을 인간의 지성을 가지고 파악하는 것이다. 실체가 자기 속에 무한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이 속성은 개별적으로 다 신의 속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한 모습 속에 다른 얼굴로 보여주는 건데 인간의 관점 속에서는 마치 성질이 다른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것을 인간의 관점 속에서 '다르다'라고 말을 해선 안 된다.
스피노자가 '능산적 자연', '소산적 자연'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려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왜냐하면 무한양태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자연이다. 이 자연 속에 한 자연물로 인간이 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속에 정신이라는 속성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자각된 정신이란 속성을 가지고 자연을 들여다보면서 보편개념이나 자연이 갖고 있던 원리를 발견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자연적 세계도 감각에 주어지는 물질적 성격 말고, 그 물질적 성질을 지배하는, 움직이는 동력으로 어떤 보편개념이나 원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실체가 자기운동속에 여러가지 무한양태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인간의 양태로 등장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가 무한양태로 운동하는 실체처럼 자각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며, 이 능력을 보니까 내가 육체가 있고 정신이 있듯이, 자연물 속에도 역시 감각으로 주어지는 질료 물질이란 것이 있고 근본적으로 다를바 없이 그것을 움직이는 정신이란 힘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이 두 가지가 다른 게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인간을 설명할 때도, 무한양태의 한 양식이다. 이 양태라는 개념에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던 경험의 영역 속에, 사물로 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양태란 이름을 붙인다고 했다. 인간이 갖고 있던 인식의 관점의 유한함, 개념의 한계 때문에 실체를 표현하건 신을 표현하건 인간적 개념을 쓸 수밖에 없고, ____ 인간이 사용하는 개념을 갈라낼 수 없기 때문에, 혼용해서 쓰기 때문에 우리가 읽을 때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엄밀하게 그런 관점 속에 봤을 때 무한양태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은 전부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인지의 능력이나 감각적 능력이다. 그렇게 말하면 구분지가 생긴다.
그래서 그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고, 그래서 정신적 능력을 능산적 자연이라고 하고, 물질____이라고 말을 하면 소산적 자연이라고 말을 한다. 무한양태가 자연이라는 경험적 요소로 등장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그 다음에 인간에게도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이 있다.
자연물은 자연이 갖고 있던 어떤 운동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며, 인간이 파악한 운동의 원리는 인과율이다. 이걸 인간 자신에 적용했을 때, 인간 이성이 자연적인 원리를 넘어서서 작동하려고 하는 욕구가 있으며, 이 욕구를 자유라고 표현했다. 인간이 자유를 가지고, 실체가 갖고 있는 전체적인 무한양태의 운동을 거스르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게 바로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
감정을 한 번 생각해보자. 코나투스는 인간(*모든 존재들)이 갖고 있는 근본 욕구. 그래서 이 코나투스가 자연적 질서에 어긋나지 않으면 평안을 주고 거스르면 고통-불쾌감을 준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고 말할 때 인간은 이 욕구가 좌절될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좌절될 때 느끼는 고통은 자연적 질서에 어긋나는 욕구를 가지면 고통을 겪는다. 그러면 인간이 갖고 있는 괴로움, 고통이 뭔가 라고 들여다보면 인간 스스로가 자기자신의 존재 욕구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성장하면서 가지는 욕망, 이것에 따라서 존재 질서를 훼손시킬 수 있는 욕구를 가질 수 있다. 그럴 때 인간은 그것에서 오는 좌절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스피노자가 보는 행복은, 실체에 무한양태로서 움직이는 운동을 잘 보고, 인간이 자기자신이 갖고 있는 코나투스를 조율하는 것. 이 코나투스 때문에 인간이 갖고 있는 감정이 생긴다. 좋고 나쁨, 괴로움, 기쁨. 좌절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자연적 질서에 맞는 욕망만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조율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인간의 지성과 인간의 자유, 이렇게 말했던 이유가 인간의 지성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무한양태의 질서를 파악할 수 있는 힘이다. 그 질서를 파악할 수 있을때에야만 인간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자기 주저 이름을 '윤리학'으로 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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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노자와 독일관념론 사이의 연결고리를 간략하게만 언급.
스피노자의 체계가 독일관념론 속에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셸링하고의 연결 속에서이다. 특히 셸링의 자연철학. 셸링에게서 이것하고 대비되는 한 요소를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주 철학은 자연철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때 스피노자의 자연 개념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은 셸링의 자연의 전상(펼칠 전, 상 상). 펼쳐진다는 말은 '포텐스'라고 말하는데, 가능성, 잠세태로서 써볼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스피노자에서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관계, 자연의 자기활동 같은 개념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갖고있던 구도를 알고 있으면 셸링을 이해할 때 많은 도움이 된다.
속성과 성질
속성과 양태
Spinoz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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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스피노자를 현대철학 관점에서 정리한 수업 [2015-1]
02. 스피노자를 독일관념론 관점에서 정리한 수업 [2015-2]
03. 스피노자를 기초적으로 정리한 수업 [20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