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서는 셸링의 자연철학에 대해서 다룬 학부3학년 독일 관념론 강의의 딕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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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있어서 자연이라는 개념은 근대 과학의 발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학적 발견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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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천문학, 물리학 / 물리학적 자연, 수학적 자연이 철학에 영향을 준다. 자연 전체가 데카르트 이래로 연장이란 속성을 가진 '물질'로 규정된다. )와 19세기(지질학, 생물학 / 찰스 다윈의 결정적 영향. 생물학적 진화 개념의 발견. 우리가 사는 세계는 온전히 물질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확신이 낭만주의에도 녹아남. 쉘링도 역시 그와 같은 유기체적, 생물학적 자연 개념을 철학적 배경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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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계는 전체적으로 다 진화의 산물에 의해 단계지워진 것. 또한 생물계 전체는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다. 19세기 자연은 유기적 총체적 세계로 받아들여진다. 16세기 과학의 기계론적 자연은 오로지 물질밖에 없다. ↔ 19세기 과학은 모든 것은 상호연결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 19세기의 영향을 받은 쉘링의 자연이란 개념은 생명을 갖고 있는 자연. 그는 아리스토의 자연 개념을 복권시킨다. → 데카르트의 경우 인식론이 인간이 갖고 있는 인식의 능력을 검토하는 체계로서 대두된 배경과 같이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 또한 칸트의 경우 바깥 대상을 성립시키는 선천적 조건으로서의 인간의 특권성과 같은 구도가 쉘링에 오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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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누스 – 자연적 세계는 일정하게 위계적인 존재층을 가지고 있다. 일자의 유출. 아리스토와의 차이는 창조주의 분리 여부. 아리스토의 경우 데미우르고스라는 창조주가 따로 있고 창조된 세계를 말함. 플로의 경우 일자와 세계 사이에 분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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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우르고스라든지 일자라든지 이런 개념을 가지고 오지 않는 채 아리스토가 말했던 형이상학적 존재 표를 자연적 세계의 질서라고 표현하며, 유기적인 세계, 이 유기적인 세계의 존재계층을 쉘링은 전상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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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적인 세계의 존재적 계층은 소위 자연적인 체계가 자기자신의 모습을 펼쳐내놓은 것이라고 표현. 자연자체가 자연 바깥에 있지 않다. 자연이 스스로 자기자신을 펼쳐냈다고 할 때 이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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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연적 세계라고 이야기해보면,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고 이 신체를 가진 인간이 자연적 세계에 산다. 구체적 개별자들은 우리에게 경험이 된다. 나무를 지각할 때 감각의 능력은 그때그때밖에 어떤 것을 포착할 수 없으나, 어제 본 나무와 오늘 본 나무가 같은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지각하는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자연이 변하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가진 신체도 끊임없이 변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고 할 때 우리 몸 자체가 끊임없이 변한다. 경험적 세계의 내 모습도 자연적 세계의 개별물들도 불변적인 상태로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유기체의 전체적 체계이며 개별물들이다른 개별물과의 관계 속에 자기성장. 자연 세계의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는 개별물의 세계.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변화를 지속성을 가지고 이야기할 것 같으면 개별자와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된다는 게 쉘링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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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의 세상을 보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끊임없이 바뀐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지배하는 원리가 있다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적인 세계는 근본적으로 경험적인 것이고 이 경험적인 것을 불변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불변하지 않는 어떤 요소가 있다. 쉘링은 스피노자가 말했던 것을 가지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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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요소들을 소산적 자연, 경험되지 않으면서 경험한 세계의 변화를 끊임없이 근거지우는 요소를 능산적 자연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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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 세계를 설명하는 쉘링의 도식은 근본적으로 스피노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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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은 '무한 양태'. 무한 양태를 인간이 다 경험할 수 없다. 자연적 세계의 전체적 국면에서 보면 무한하지만 인간의 경험이 제한적이므로 유한양태라고 스피노자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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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전상'의 '상(eidos)'는 능산적 자연을 가리킨다. 왜 이것은 '상'이면서 플라톤적 요소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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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이래로 존재표를 그려보면 항상 이원적인 가지를 치고 있다. 쉘링에 이원적인 틀이 있다고 말할 때... '대립자의 상호 투쟁에 의해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끊임없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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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이전에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던 부분과 연결시킬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탈레스 이래로 불변하는 요소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인데 불변하는 요소로서의 실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중요한 것은 밀레토스 학파는 근본적으로 물활론적. 경험으로부터 유추해서 가지고 오는 것. 헤라클레이토스는 경험으로부터 갖고 온 것을 실체적으로 확정짓는 것을 부정한다. 그에 의하면 만물은 유전 – 우리가 사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지수화풍이라고 말하는 요소들을 움직이는 근본적 힘이 있다고 말하며 그것이 로고스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는 가운데 불변하는데 그 근본적 원리의 형상은 불이고 그것을 이념적으로 말하면 로고스. 로고스는 인간의 경험적인 요소 속에 어떤 경우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변하는 과정 속에 불변하는 세계는 근본적으로 있어야 한다. 운동 전체를 묶어서 이게 세계를 근본적으로 움직이는 힘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다는 의미에서 로고스를 주창할 수 있는 것이고, 로고스가 자기자신을 펼친 모습이 우리 사는 세계의 여러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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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적 자연이 소산적 자연으로 어떻게 펼쳐지는가? 쉘링은 이 부분은 스피노자 체계 속에 없다고 본다. 대립적인 힘이 결국 우리가 사는 세계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있는 것. 힘들의 충돌만이 자연적 세계의 변화를 움직이는 요소가 된다. 다른 요소가 있을 수 없고 그것이 로고스로서의 능산적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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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강도'는 힘들의 관계, 힘 자체가 구체적 모습으로 잠시 찰나적으로 등장한 모습.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강도로 구체적으로 표현될 때 그것을 '기계'란 말로 구체화. 헤라클레이토스/쉘링의 운동 개념의 현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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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쉘링의 자연 개념이 갖고 있는 근본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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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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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를 빌려오고 존재의 계층이 있다. 아리스토가 요청했던 4가지 형이상학적 원리(형상, 질료, 운동, 목적). 구체적 세계의 개별자들 = 실체들 = 실재. 한 개별자가 어떻게 그 개별자가 되는가? 질료가 있고 이 질료를 통해서 형상이 자기자신을 구체화시키면, 우리가 바라보는 물체가 된다. 질료 속의 형상이 실현되어서 교탁이 된다. 인간적인 삶 속에 들어오는 질료들은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의 필요에 의해서 형상이 구체성을 띠는 것이고, 자연적인 세계는 하나의 질료 속에 형상이 구체화되고, 이 형상 자체가 하나의 질료 속에 자기 생을 다하는 것. '그러한 운동 자체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근본적으로는 참나무의 형상이 질료 속에 자기생을 다 살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책상을 만드는 데 쓸 때, 그것은 책상을 만들 수 있는 질료로서의 목재가 된다. 목수에 의해 나무가 몇 차례 형상적 변화를 겪고 최종적 형상을 책상으로서 그 자신의 모습이 이룩된다. → 자연적 세계의 여러 변화의 모습은 형상과 질료의 끊임없는 자기운동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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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어떤 목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적 세계 바깥에 있고, 이 자연적 세계는 바깥에 있는 무엇인가가 의도하는 바에 맞추어서,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은 그쪽을 향해서 운동해 가야 한다. 수많은 자연의 변화들은 목적을 향한 끊임없는 활동이다. 신이란 개념을 설정해볼 수 있고, 기독교 같으면 신이 우리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하고, 창조된 세계에는 신의 섭리가 있다고 하며, 섭리가 자기 스스로 운동해서 우리 세계를 끊임없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고, 인간은 창조된 세계 속의 비밀(섭리)을 찾으며 생을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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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링이 아리스토를 가지고 왔다고 말할 때, 아리스토의 세계 개념 속에는 바깥에 있는 섭리가 없다. 순수형상이나 순수질료는 논리적 요청에 불과하다. 모든 질료는 근본적으로 형상을 다 가지고 있으며 형상은 그 자체적으로 질료를 통해서 자기자신을 밖으로 구체화한다. 어떤 형상이 질료 속에 들어있다고 말할 때 형상 자체가 갖고 있는 지향점이 존재한다. 질료가 내재적인 원인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 형상이 자기를 구체화시킬 때, 질료의 자기변화는 형상이 자기자신이 갖고 있던 모습은 질료를 통해 온전하게 하고자하는 운동이다. 자연세계의 생성변화는 바깥의 섭리를 향해 우리 세계가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세계 속에 이미 형상이 들어와 있고 이 형상 자체가 질료를 통해 자기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이 목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료 속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이므로, '내재적 목적', '내재적 원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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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자기원인'(causa sui) - 어떤 운동이 시작할 때 그 원인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있다. '내재적 목적(원인)'은 자기원인으로 움직이는 것. 세계의 변화는 각 개체가 갖고 있는 자기원인에 의한 것이다. 자연세계의 여러 운동은 상충되는 힘의 충돌이기도 하고 상충되는 힘 자체가 스스로 내재적인 목적을 향해 운동하는 과정 속에 충돌이 생기는 것. 내재적 원인에 의해 충돌이 생기면 그것은 제2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쉘링은 자연 개념을 설명할 때, 중층적으로 복잡하게 설명한다. 직접적 변화는 자기자신의 목적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지만 이것이 상호충돌되었을 때는, 자기원인에 의해 충돌이 일어나는 부차적인, 자연적 질서의 원인과 결과라는 것으로도 자연적 질서를 부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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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 형상과 질료. 형상은 질료 속에 자기자신을 전개한다. → 라이프니츠. 형상 자체가 질료 속에 자기 완결적으로 들어와야 할 것이고 그것이 들어오면 저절로 질료는 자기완결적으로 완성이 되어야 한다. 형상의 자기전개는 항상 질료를 통해 드러난다. 어떻게 형상이 질료 속에 들어가면 그 질료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형상의 모습을 구체화하는가? (→ 단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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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의 단자 – 설계도면이 들어 있는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자기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단자의 활동력은 근본적으로 없는 것이지만 이 속에 들어 있는 설계도가 작동하면서 단자 자체의 내부적 운동이 시작되며, 내부적 운동들의 상호관계 속에서의 단자의 이합집산이 우리가 사는 세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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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은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온전히 가능태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아리스토 자체도 형상과 질료를 말하게 되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설명할 때, 목적을 말하고 이 목적을 성취하려는 노력이 운동으로 드러난다고 표현했지만, 이것이 잠세태로 형상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바는 없다. 이는 라이프니츠를 통해서 쉘링이 더 정교하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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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쉘링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자연 개념을 만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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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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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유기체적이다. 유기체는 개별자가 상호연결고리를 갖고 있다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한 개체와 같은 시스템으로 얽어져 있다. 생명이 갖고 있는 전체적인 체계의 형상적 힘. 그것을 쉘링은 '세계혼'이란 개념을 빌려와서 설명한다. 이것도 헤라클레이토스적이다. 변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로고스의 활동이라고 표현했을 때, 세계혼이란 개념도 유기체적인 자연적 질서를 총체적으로 유기적으로 만들어주는 어떤 힘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유기체 전체를 질서지우는 힘의 논리를 세계혼이란 개념으로 묶어내었다. 쉘링의 자연철학은 이런 요소 역시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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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X가 '주체로서의 자연이 어떻게 생산적인가?'하고 물었다. 여기서 '주체'를 '인간적 주체'로 받아들이면 안 되고 '세계혼'이란 개념에 가깝다. 주체로서의 자연 = 능산적 자연. 이것을 총체적으로 돌리는 힘을 로고스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를 '세계혼'이란 개념으로 쓴 것. 어떻게 생산적인가? 이때 '무의식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식'이나 '반성'은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니까. '무의식적 정신'은 인간의 정신이 아니므로, 세계혼이거나, 로고스가 되는 것이다. 세계혼이 무의식적으로 활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 인간에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라, 능산적 자연으로서의 정신적 활동, 로고스로서의 활동을 '무의식적 정신'에 연결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