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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이데아론 기초 수업 [2015] 

 

강의 - 심귀연 센세

 

저번 시간에 우리는 아카데미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야기하고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 !'라는 말을 통해서 플라톤이 최초의 그리스철학자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뭘까 ? 우리는 그것을 '기하학'이라는 말에서 이미 알 수가 있다.

 

(표 시작)

 

 

 

 

(표 끝)

 

어떤 차이를 우리는 알 수 있을까 ? 이 질서(기하학 부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이성이다. 이 이성이라는 것이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플라톤은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도 이성을 향해 나아가야하는데 소크라테스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고 그냥 이야기를 통해서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다. 내가 얼마만큼 무지한가를 깨닫고, 또 그것을 대화로서. 자기가 무지한지를 깨닫지 못하면, 질문도 던지지 않고 상대방의 질문에 스스로 그럴 수도 있나, 이런 생각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가는 방법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반드시 생각해보자.

 

플라톤에게 중요한 것은 이성의 빛이다. 여기서 이성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 모든 시대에서 말해지는 이 이성이 무엇인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처음에 우리가 이 이성을 로고스라는 말로 썼고, 그 이전에 영혼이라는 말로 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중에 이 영혼을 이성이 있는 영혼과 이성이 없는 영혼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근대에 들어와서 이 이성은 의식으로 얘기되며 이 의식은 또 무한정 나뉘게 된다. '이성' 개념은 이런 분화과정을 거치게 된다. 최초 시대에는 단순하게 신체와 영혼이 결국은 하나였는데 이 하나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이 두 가지를 분리하는데, 그것은 변하는 것으로서는 아무것도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 즉 육체는 눈에 보니까 변하는 것이다, 그러면 변하지 않는 무언가, 그것이 영혼일 것이다, 이렇게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이성이라는 것은 어떤 생각을 거쳐 나온 것일까 ? 자연철학자들의 생각에서와 같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관계 (cf. 생성과 존재)를 탐구하려 하다보니 '이성'이 나왔다는 것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관계에 대한 생각은 살아가면서 어디서부터 나왔을까 ? … 우리는 정말로 같은 걸 원하는 것일까, 살면서는 항상 새로운 것만 찾는데, 달라지는 게 싫다는 마음도 있는 등 모순이 있다.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 … 문제를 제기하게 된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기로 하자. … 고대인들은 '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어떤 말로 포장을 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려는 것일까 ? 아까 실존철학자들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인간인가요 ?' 라고 말을 해버리면 고대인들은 뭐라고 항변할까 ? 그들은 변하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리가 된다. 그러면 진리에 대한 개념이 고대인들과 현대인들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진리란 있는 것인가 ?'라고 이야기를 할 때, 진리라는 것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리란 없다라고 단순하게 얘기를 한다. 그럼 한쪽에서 진리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항변할 것이다. 그럼 한쪽에서 진리란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상대주의자인 것처럼 보이고, 왠지 말을 해도 찜찜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정리를 한다. 그러면 진리라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것인데, 이 본질이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보자, 라고 현대철학자들은 얘기한다. 어쨌든 변하지 않는 것, 이것을 찾으려고 플라톤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세계 속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세계가 하나의 세계인가, 두 개의 세계인가 ? - 플라톤을 해석하기에 따라 전자가 될 수도 있고 후자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세계를 두 개의 세계로 설명하기로 하자.

 

ㄱ. 현상계

감각에 지배되는 세계 ; 감각에 의한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다.

 

ㄴ. 이데아계

불변하는 세계 ; (▽아래를 참조하세요)

 

플라톤이 이미 언어의 정합설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변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동일하게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게 그게 바로 이데아이다. 여기서 내가 아까 설명했던 언어의 세계를 이데아계라고 표현. 이 언어가 뭐지? 결국 말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관념'이며, 이 관념이 바로 이데아이다.

 

사과에 대한 맛, 이미지, 표현 방법이 굉장히 사람마다 다를 거지만, 우리가 그것을 '사과'라고 부른다. 이것이 '언어'이다. 이것이 '이데아'이다. 이 이데아가 플라톤은 이데아계라는 다른 세상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에 대한 비판은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고, 이 이데아계를 고대인들은 금방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플라톤은 그들에게 사례를 가지고 설명하는데, 그 사례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좋다. 그것은 '동굴의 비유'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데아계를 설명하고, 인식론을 설명하고, 교육론을 설명한다. …

이데아계가 없으면 현상계도 없지만, 현상계를 보지 않으면 이데아계로 갈 수도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감각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것에 접근한다. 아무리 변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가치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감각을 통해서 우리가 저 세계에 가게될 것인데, 플라톤은 이 과정을 어떻게 설명하냐면, 처음에 동굴벽을 보고 묶여 있던 사람이 갑자기 불현듯 회의가 드는 것이다 :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진짜인가? 이것을 '상기'라고 한다. 이때의 상기는 이게 진짜가 아닐 거라는 상기다.

 

… 선구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연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철인이라고 이야기한다. 바깥에 나가 진짜 세계를 본 사람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동굴로 돌아가서, 여전히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바깥에 진짜 세계가 있다는 걸 알려줄 책무가 있다. 이것이 바로 정치론이자 교육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플라톤은 현상계와 이데아계를 설명을 하고 있다.

 

플라톤은 또다른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인간의 영혼이 원래는 이데아계에 살았으며, 이 세계에 살았던 영혼들은 자유로웠기 때문에, 우주를 누비며 여행을 하였다. 두 마리의 말을 각각 거친 영혼과 유순한 영혼에 비유하고 마부(이 두 말을 움직이는 역할로서 이성)가 마차에 있는 비유를 통해 합리적 영혼, 거친 영혼, 유순한 영혼을 표현하고 있다. 이때 인간은 이데아계를 경험했는데, 어느날 이 두 말을 잘못 조정한 마부가 현상계로 떨어지는 비유를 든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현상계로 오면서 레테의 강(망각의 강)을 건너게 된다. 이것도 물이 가진 의미 (고대 신화에서도 여러 번 얘기했던) 는 세계의 기원이다. 탈레스도 만물의 기원이라고 이야기했다. 따라서 플라톤의 이야기 속에 자연 철학자, 그리고 신화적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우리는 육체란 감옥 속에 영혼이 갇히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이데아세계를 잊어버린다고 이야기하며, 여기에서 상기설이 유래하게 된 것이다.

 

■ 정리해보자. 이데아론은, 우리가 (1) 피타고라스 삼각형을 이야기하면서 피타고라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했고, 그리고 이것이 (2) 완전한 실재라는 것. '실재'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하다. '실재'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우리는 나중에까지 계속 던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3)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 이것은 환상인가, 아니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 변하지 않는 절대적이라는 게 있는 것인가 ? 결국 완전한 실재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 (4) 보편자, 참된 존재. 보편자라는 것은 나중에 아리스토로 가게 되면 '제1형상'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보편자라는 말의 의미는 어디에나 있는 것. 어디에나 있는 존재. 이런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데아라는 말이 이런 식으로 쓰여지면서, 나중에 철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여러분들은 알게 될 것이다. (5) 이데아는 감각이 아닌 이성적 사유로만 인식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성적 사유로만 알려져 있다는 말을 플라톤은 앞서 '영혼이 어디에 살았는가'라는 비유를 통한 상기설로 설명을 했다. 가장 중요한 말은 '형상'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본질이라는 말인데, 이 본질이 무엇인가가 실재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남은 시간 동안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관계를 설명할 때 플라톤이 가진 문제점을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관계를 설명할 때 플라톤은 산파술이 아니라 변증법이라는 방법을 썼다. 변증법이 산파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을 개념으로 체계화시켰다는 것이며,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차이는 플라톤은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학문을 체계화했다는 게 제일 큰 차이고, 이데아론도 피타고라스 이론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수적 질서에 굉장히 민감했다는 소리다. 그러면 이 변증법을 플라톤은 어떤 방식으로 설명을 하느냐면, 제일 먼저 생물과 무생물로 나뉘고 생물은 다시 동물과 식물, 동물은 다시 인간과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으로 나뉘는데, 이런 식으로 가는 과정 – 여기에서 가장 구체적인 것이 인간과 인간 아닌 것, 또 인간에서는 개별적 인간들이 될 것인데, 촘촘한 부분부터 포괄적인 부분의 방향으로 오게 되면,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모두 존재에 속한다. 이 존재들이 구체성을 가지면서 각자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 존재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생물들이 태어나기 이전의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이전의 것에 참된 세계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다루는 플라톤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진 않지만 이때 '자연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현재에서 다뤄지므로 기억해두고 있다가 현대 철학할 때 다시 이야기해보자.

 

그럼 아까 했던 질문, 동물과 식물을 묶어 생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 ;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관계는 결국 이 문제이다. 각각의 사과는 다 다른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사과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변하는 것들 속에서도 그것들을 묶어서 사과라고 할 때,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묶어주는가, 플라톤은 과연 이걸 설명을 해 냈는가 ?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 … '니가 인간이야 ?' 라는 데 들어 있는 의미가 있다. 이걸 설명하지 않으면 이데아론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인간인지, 저것이 사과인지, 저것을 하늘이라 그러는 것일까 ? 우리는 그것을 인간이나 사과나 하늘이 가진 속성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없다. 속성은 변하는 것이다. 물통을 단순히 그것이 가진 물을 담는다는 속성을 가지고 이야기한다고 가정해보면 밥그릇도 물을 담으면 물통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밥그릇은 엄연한 밥그릇이다. 그러면 물통은 물을 담는 것이지만 물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현상계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가 ? 아까 동굴의 비유에서, 바깥의 풍경이 동굴벽에 비친 것이므로, 둘 사이의 연결관계가 분명히 있다. 있으면 (이것)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한 물통의 원형-본질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것을 담고 있는 그만의 물통이다. 컵은 컵이고 물통은 물통이다. 그런 측면에서 물을 담는 것이라고만 설명하면 물통을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애매했을 것이므로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책상을 누군가에게 알려줘보자. 다리가 있고 이 다리가 판을 지탱하고 판 위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 흄은 이것가지고 이해안 될 수 있다 : 외계인이라고 생각해보면 이 다리가 판에 어떻게 지탱하고 있다는 말인지, 공부를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공유하고 있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고정관념일 수도 있기 때문에, 책상이 그런 모양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책상이라고 부르고 있는, 책상의 역할을 가진 여러가지 모양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책상이라고 한다. 이데아론에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유사점을 찾을 것이다. 공부라고 하는 것의 특성을 생각, 모든 상황들을 종합해서 가장 유사한 것들을 찾을 것이다. 단어로만 가지고 온 것도, 용도로만 가지고 온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사물의 실재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게 책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기에 책상인가. … 완전 새로운 디자인의 의자.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저건 의자다, 저건 책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사를 통해서 보편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럼 이 둘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현대철학에서도 주제가 되는 것), 플라톤은 감각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다,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전에 이데아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걸 봤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칸트에 오면 직관이 반복된 경험에 의해서 뭔가를 파악하는 것, 한 사람을 몸으로 계속 익히게 되면 나중에는 그 사람이 아 해도 어 하는 것을 알지. 이것은 경험적 직관이다. 그러나 플라톤에 있어서는 직관은 경험이 아니다. 선천적 직관 – 경험하기 이전에 우리가 봤던 것을 아는 것. 경험을 매개하지 않고 알게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고, 이데아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말 ; 직관. 직관이라는 말의 차이를 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유의 방식에 따라서 개념도 다르게 쓰이므로.

 

그러면 플라톤은 각각의 개별적인 것 – 강의실 책상, 컴퓨터 책상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책상이라 하는 것은 플라톤은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3의 것, 이것이 바로 이데아다. 이 이데아가 없다면, 각각의 개별적인 것이, 유사한 것으로 모아진다 ? 유사란 것도 말이 안 된다. 비슷하다고 할 때 뭐를 기준으로 유사하다 하는 거야 ?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이미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거야. 비슷하다는 기준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 ? 기준이 이미 없으면 비슷하다는 말도 할 수가 없어. 각각 다른 거야.

 

우리는 흰색이라는 관념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고, 플라톤은 이게 바로 이데아계에 그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기준점(같다, 비슷하다)이 생긴 거야. 현대철학자는 이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동일성 철학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하며 '차이' ; 원형을 인정하지 않는다 ; 기준을 정하지 않고 그냥 있는 것 ; 본질은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 자기 자신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고대철학자들은 원형이 있고, 원형에 가까워져가는 것이 본질에 가까워져가는 거고, 본질에 유사한 것이다).

 

■ 플라톤에게서 존재론과 인식론의 차이. 플라톤 이야기에서 존재론과 인식론을 찾아보자.

ⓐ 존재론적으로 가장 먼저 아는 것은, 이데아 (태어나기 전부터 감각 이전에 이미 알고 있는 것) 존재론은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

ⓑ 인식론적으로 가장 먼저 아는 것은 감각에 의한 것. 인식론은 앎의 과정을 묻는 것. 내가 이것이 이데아라는 것을 어떤 과정을 통해 알아가는가 ? 이데아론을 벗어나지 않지만, 무엇인가를 묻는 것과 과정을 묻는 것에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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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o

 

이 홈페이지에 존재하는 모든 플라톤 관련 목록

 

01. 플라톤 이데아론 기초 수업 [2015-2] (본페이지)

 

02. 플라톤 국가론 읽기 +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 수업 [2015-2]

 

 

이제 플라톤으로 넘어가보자. 플라톤의 존재론을 말하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는 것의 이원론을 염두에 두여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가시적인 세계, 현실이고, 존재하는 것은 가지적인 세계, 이데아계이다. 이데아를 인식한다는 것은 참된 인식(episteme ; 참된 인식)을 한다는 것으로서, 지성에 의해 불변하는 것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때의 지성은 아낙사고라스가 처음 강조했다고 하는 nous인가?) ㅡ따라서 플라톤의 철학은 이상주의적이며 이념주의적인 색채를 갖는다고 말해진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이데아는 다른 것들보다 약간 더 복잡하다. 이는 psyche(영혼)와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psyche는 idea가 있는 세계인 천상계에서 살다가 지상으로 내려 오면서 몸을 입게 된다. (*국가론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부족함을 많이 느끼는 부분)  종이컵1과 종이컵2가 있다. 개별자에게서 인식되는 본질이 종이컵의 이데아로서 종이컵의 보편자이다. 보편자는 여러 개별자에게 두루 적용된다. 이데아는 수많은 종이컵들에 분유되어 있다. 이때 수많은 종이컵의 개별자를 본다고 하더라도, 가장 좋은 종이컵은 이데아이기 떄문에 실제로 존재할 순 없다. 즉, 이데아는 감각만으로는 알 수 없다. 본질은 nous(이성)으로 생각하여 관통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수학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 플라톤은 doxa(속견)와 episteme를 매개하는 것이 수학이라고 하며, 수학에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 같다. (*)

플라톤사상이 기독교사상을 지배하는 이유는 그가 주장한 일자 개념 때문이다. 일자는 이데아의 이데아로서 선의 이데아이다. 이것은 초월적 성격을 가지므로 기독교와 어느 정도 통할 수 있다. cf. 반면 현대 프랑스철학은 내재적 철학을 주장하며 발전해 왔다.

 

또한 플라톤사상은 칸트의 숭고미와도 연결될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만이 숭고를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숭고를 느낄 수 있는 인간은 그 자신이 숭고한 ____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대단하다. 플라톤에 있어서도 인간이 episteme를 알 때 그 자신이 nous라고 하는 지혜의 영혼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대단하다. 이는 인간이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서 그가 누구인지가 달라진다는 관점으로 인식대상과 인식주체의 상관관계를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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