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2015 (로크 페이지로 되돌아가기)
그 다음에 버클리를 한번 생각해보자. 로크가 제1,2성질을 구분하여 그것을 통해 물질적 실체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제1성질이 있기에 물질적 실체가 바깥에 있다고 로크는 주장한다. 버클리는 제1성질도 제2성질과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기에 이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예를 들어 보자. 이 크기가 로크가 말하듯 제1성질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어떤 물체든지 가까이 볼 수록 크고, 이역시 사람이 신체를 가지고 어떤 위치에 따라서 크기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교탁의 모양도 내가, 시명이가, 철우가 보는 모양이 다 다르다. 제1성질은 원래 물질적 실체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 하지만 이것도 제2성질이 그렇듯 인간이 갖고 있는 신체적인 조건 – 시공간적 위상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버클리는 로크가 제1성질을 통해 물질적 실체를 증명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며 버클리에 오면 물질적 실체란 없다. 로크는 두 가지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인데 한 가지는 금방 깨진다. 즉 물질적 실체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 날라가버린다. 물질적 실체를 증명하지 못하면 꿈과 실재가 구분되지 않고 실재와 환상도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잘못 봤다 라고 말할 게 하나도 없고 보는 족족이 다 옳아야 한다. 어느게 정상이란 말인가 ? 따라서 이 객관적 실체라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게 된다.
버클리는 형이상학적 논변을 가져다 댄다. 어떤 대상이 인식하는 대상이 될 때, “존재함은 지각됨이다” 란 말을 썼는데, 존재를 지각하는 자의 정신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인간정신과 신적 정신. 경험론자인 로크가 문 바깥에 나갈 때 교탁이란 대상이 어떻게 되냐고 말할 때, 제1성질이 있고 제1성질을 담지하고 있는 물질적 실체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내일 들어와서 여기 교탁이 있음이 그대로 입증된다. 그런데 제1성질이 없다고 말하면, 내가 없다면 이 교탁은 사라지는가 ? 그러면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세계의 실재성, 확실성을 담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버클리가 “존재함은 지각됨이다”에서 지각하는 다른 존재로서 신적 존재를 설정하는 것이다. 버클리는 이 부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내가 보고 있는 대상의 실재성은 내가 보고 있는 순간 신이 보고 있는 거다, 이렇게 증명하는 방식이며 굉장히 형이상학적이다. 이 부분에서 버클리와 로크가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버클리는 로크가 갖고 있던 문제 선상 위에 서 있으므로 공통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찬군이 물은 것은, 데카르트와 버클리가 설명하는 방식이 달랐다. 결국은 의식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라는 주장이기 때문에 데카르트와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외적 실체를 증명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본유관념 속에 들어있는 신의 관념을 통해 신의 존재를 추론하는 거잖아요. 그러나 버클리에겐 그런 과정이 없다. 그냥 전제하는 것이다.
성균군이 물은 것. 장애인 … 자아가 똑같은 자아일 수 있나 ? …이렇게 물은 이유는 인간이 갖고 있는 경험적 내용이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로크 같은 경우는 인간의 경험적 내용이 자아를 형성한다고 보지 않는다. 모든 경험을 틀지우고 자기자신의 것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자아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자아는 경험적 내용 바깥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로크나 버클리 입장은 질문한 것과 다른 측면이 있는 것이다. 흄에서 발표될 때 내 질문이 흄과 닮았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