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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의 대상에 우리가 온전히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 예를 들어서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하늘, 돌 같은 것들이 있다. 이걸 통해서 우리가 뭘 안다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그것을 경험적 지식이라고 말을 한다. 근데 물에 막대를 집어넣어보니까 곧은 막대가 굽어보인다. 그러면 우리의 감각은 우리를 속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를 속일 가능성이 단 하나만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획득하는 지식은 의심할 수 있다. 평면적으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인식의 능력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온전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감각을 통해서 우리 바깥에 있는 실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주장이 된다. (우리 바깥에 어떤 실재가 있는데 그 실재가 우리 감각을 통해서 들어온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있던 어떤 현상들은 우리 마음 바깥에 있는 실재를 온전히 투영해서 보여준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던 관념을 가지고 지식을 삼는다고 말을 하면, 이 지식 자체가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와의 일치가능성이 불투명하다. 그러므로 감각적 지식을 의심하게 된다.)
그다음에, 수학적 지식, 논리적 지식도 악마의 가설을 가지고 의심할 수 있다. 어떤 추상적인 것이 있는데 이 추상적인 것도 존재를 가지고 있다. 이 추상적인 것의 존재는 내 이성속에 확실히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감각경험과 상관이 없다. 내 이성적인 능력이 있다고 말하면 내 이성 속에 저절로 수학적인 계산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악마의 가설을 세워서 우리 마음속을 악마가 조작한다고 한다면 확실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방법적인 가설을 하나만 세워도, 우리가 절대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이성적인 것 자체의 속성인 논리적인 것과 수학적인 것 역시 기만당할 수 있다.
내 신체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인식하는 내 신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 꿈의 가설을 세우면, 내 의식이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내 신체의 존재는 의심할 수 있게 된다. 꿈이란 가설 하나만 세우면 신체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따라서 사유하는 능력만이 존재한다고 말하게 된다. 이것 때문에, 앞에서 질문한 것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의심한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지식을 의심하기 위해서 지식의 대상이 되는, 어떤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의심할 수 있냐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서 들어오는 내용, 그 바깥에 있는 실재를 우리가 어떻게 하면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 감각이 오류를 범한다 하더라도 그 존재는 확실히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데카르트가 이런 논의를 하기 위해서 관념의 유형을 나누고, 관념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관념을 본유관념으로 둔다. 영국경험론과 영미철학은 현격히 배격하기도 하는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논변(논리적이고 경험을 통해 입증할 수 없는 전제를 담고 있는)이 시작된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우리 외부에 있는 존재를 어떻게 증명하는지 따라가보자.
데카르트가 관념idea라는 말을 쓸 때, i를 대문자로 쓰면 이데아Idea가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데카르트가 말한 관념idea이 어떻게 다른가?
플라톤의 이데아 :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관념이라는 것이 이미지가 아닌 의미실재. 이 의미실재는 내 마음 속에 (온전히) 있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 있는 어떤 정신적인 세계 속에 이데아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바깥에 있으며 정신적인 세계에 있는 이데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의 마음, nous, logos가 가지고 있다.
데카르트의 idea : 우리가 바라보는 이미지이기도 하고,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분별해서 논의하는 사람이 로크이다.) '이데인 = 내가 본다'는 말이 명사로 바뀐 게 이데아인데, 정신적인 세계에 있는 어떤 실재를 본다는 말이다. 이 실재를 명사형으로 말하면 이데아가 된다. 데카르트의 아이디어 역시 내가바라보고 있는 어떤 대상을 가리킨다. 나는 그 대상을 감각경험을 통해서 바라보고 그 대상은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 쳐다보는 사람들마다 전부다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이 모든 것들을 아이디어, 관념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관념의 유형을 데카르트가 나눈 것이다. 감각으로부터 들어왔다고 생각되는 관념(외래관념). '천마', '도깨비' 같이 경험적인 내용을 여기서 떼고 저기서 떼서 조작해서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관념(인위관념). 바깥으로부터 오지도 않았고 바깥으로부터 만들어진 것도 아닌 ㅡ인간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마음 속에 저절로 생긴ㅡ 논리적 관념,수학적 관념 (본유관념). 또 바깥으로부터 오지 않은 관념이 있는데 '신'이라는 관념이고, '내 자아'라는 관념이다. 나라는 관념은 바깥으로부터 오지도 않고 내가 만들지도 않고 내 이성이 존재함과 동시에 나라는 관념도 저절로 생겨 있더라는 것이다.
본유관념의 유형을 나누어보면 수학적/논리적 관념, 나, 신. 그리고 더 나가면 칸트가 말하게 되는것처럼 세계. 세계란 것은 경험적인 것도 묶고 비경험적인 것도 묶고, 내가 현재 경험하는 부분만이 아니라 과거에 경험했던 것, 미래에 경험할 것 다 묶어서 '세계'라고 말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개념도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데카르트는 세계 개념을 안쓴다).
데카르트는 저절로 생기는 관념에도 층위가 있다고 했다. 이성의 규모와 똑같은 게 있고, 인간의 이성, 인간의 마음의 범위를 넘어가는 관념이 따로 더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 이성적 사유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과 일치한다. 나라는 관념도 인간이 갖고 있던 이성의 능력과 똑같다. 내가 나를 확인하는 방식이라고 말할때. 그런데 신이라는 관념이 갖고 있는 속성을 검토해보니까 내가 아는 이성의 능력을 넘어서있다. 그러니까 신이라는 관념이 바깥에서 들어온 것도 아니고, 경험으로 만들어낸 관념도 아니고, 내 이성 속에도 이성의 크기를 넘어서 있는 관념으로, 이성이 창출해낼 수 없는 관념으로서 있다. 그러면 이 관념이 어디서부터 생겨났는가.
데카르트는 신이란 관념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내 바깥에서 내안에 심어진 관념이라고 말한다. 내가 경험할 수도 없고, 내가 조작할 수도 없고, 내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도 없지만 그런 신이란 관념 하나가 내 머릿속에 심어져 있는데, 이 관념의 유래를 더듬어가보면 바깥에 실재해야 한다고 데카르트는 말하게 된다. 이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의 원형인 안셀렘이 변형된 것이다.
그 다음에 데카르트는 신의 속성을 더듬는다. 신이 갖고 있는 속성을 간단하게 말하면 전지전능하다 ; 모르는 게 없고 못할 것이 없다 ; 완전하다 ; 선하다 ; 진선미의 일체다. 어찌됐든 신이 완전하다는 것을 말한다면 참, 아름다움, 선함을 신이 갖고 있는 근본적 속성으로 둘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바깥에 신이 있다고 하면 이 세계 전체가 신의 창조물일 수 있고, 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악마처럼 우리를 기만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관념임과 동시에 관념 바깥에 무언가 실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착각하는가? 되짚어보면 그 착각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신 자체에는 착각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류를 범하고 잘못을 범하고 악을 저지르는 것은 인과적 사슬을 넘기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바라보는 현상은 현상으로 있고, 이 현상이 바깥에 실재한다,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꿈꾼다고 할때, 꿈꾸면서 잘못 보는 대상은 내가 꿈꾸고 내가 잘못보는 것이라 말하면 되고, 내가 잠이 깨어있거나 잘못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신의 창조된 세계, 신의 관념적 세계 속에 있는 것이라 말하면 된다. 인간이 잘못 보거나 꿈을 꾸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신이 창조한 세계를 바라보며 신의 뜻과 일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관념의 세계를 넘어서 있는 존재를 입증하고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 절대 확실함에 도달함에 있어서 신에 의지하지않고선 불가능함을 증명해서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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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가 이렇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증명이 안되는 것이 하나있다. 우리가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것은 신이 있다는걸로 간단히 증명할 수있다. 그런데 우리가 00이를 볼때, 00이는 육체라고 말하면 신의 창조물일 수있는데, 신의창조물의 다른 한 유형, 입김을 불어넣어 영혼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그 영혼을 볼 수가 없다. 내 의식은 내가 알기 때문에 투명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볼때 다른사람의 영혼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신체가 보인다. 그러면 그 신체 이면 속에 영혼이있다는 걸 내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
그러면 데카르트가 신을 통해서 뭔갈 입증하였다고 말하더라도 타인의 마음을 입증할 수 있는 통로는 없다. 그래서 유아론의 문제가 데카르트의 철학적 체계 이래로 계속 문제가 되었다.
타자 존재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전제로부터 그 문제가 생긴다. 데카르트의 의식이론에 발딛고 있는 한에서는 타자존재의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 철학체계 위에 서서 타자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면 그 존재증명방식이 우리가 동의할수도 있고 동의할 수 없을 수도 있는 증명방식을 사용하며 그건 후설의 상호주관성이다. 이 부분을 현상학시간에 물어보라.
데카르트의 코기토, 이러면 타자의 문제가 항상 따라다닐 가능성이 높구나, 이렇게 봐야 한다. 후대철학을 보는 데. 의식을 전제하는 한에 있어서 그걸 뛰어넘기가 어렵다.
▲ 이 페이지의 윗부분은 경험적 대상의 존재에 관해 데카르트가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에 관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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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이원론의 문제를 조금 정리해보자. 데카르트가 성찰 속에, 서로간에 영향을 줄수없는 두가지 실체를 구분한다. 사유실체, 연장실체. 다른식으로 말하면 정신과 물체가 있다. 정신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을 사유라 하고, 물체의 가장 근본적 속성을 연장이라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가지고 있던 속성은 서로 뒤섞일 수 없다. 그러면 사유하는 능력과 물질과 뒤섞일 수 없다는 건 동의할 수 있지만, 이게 인간에게 오면 또 골치아픈 문제를 낳는다. 인간은 정신을 가질 뿐만 아니라 신체(데카르트 식으로는 육체) 역시 가진다. 인간이 이 두 가지로 결합되어 있다고 말하면, 그러면 인간 속에서는 그 두 실체가 뒤섞여 있다는 말인가? 데카르트는 뒤섞일 수 없는 두 실체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당대로서는 증명할 수 없는 송과선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정신과 육체가 서로 교통할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연결고리가 있으며 그게 송과선이라고 말한다. 어찌됐든 간에 인간이 신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졌다고 말을 할 때, 이 두 가지 다른 부분이 어떻게 상호활동을 하게 되는가, 라 말할때 소위 신체 정신 이원론이 성립이 된다. 이것도 역시 타자존재의 문제처럼 철학사에서 긴 시간동안 논쟁거리가 된다. 신심이원론-물질과정신의이원론을 통일하기 위해서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의 철학체계까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문제의 출발은 데카르트가 제기한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 라이 모델이 전혀 다른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거기서 출발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피, 라이가 그런 모델을 세웠는가가 우리한테 중요한 점이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틀은 후대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인데, 이는 당대의 시대정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6세기의 과학은 천문학과 물리학, 19세기에 들어오면 과학이 한 걸음 더 진보를 한다(생물학, 지질학). 과학이 어떻게 새롭게 변하는가에 따라서 인간에 대한 관점도 달라진다. 16세기의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기계론적으로 설명했다(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이 물질적 세계를 인과의 원리에 따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따). 19세기에 오면 생명현상은 물질현상과 다르다, 라고 하는 게 하나 더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데카르트 시대에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물질이고 물질로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 주류였다 - 라플라스 같은 과학자도.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제 모든 물질 세계는 인간의 이성이 온전히 계발되면 모두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인식에 있어서는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물질적 세계가 지배하고 있는 인과 필연성의 세계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코기토를 발견하고 난 뒤에 성립한 세계가 있는데, 물질의 세계와 다른 사유의 세계이다. 물질은 인과가 지배하는 세계이지만, 정신과 마음은 인과 사슬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유'이다. 바깥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로부터 자기 존재 이유를 끌어올리는 것, 그게 자유라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근대가 형성될 때 자유를 필연성으로부터 갈라내고, 그 당대에 처음으로 태동하는 인간에 관한 자유라는 개념을 창출해낸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의미에서 내면적 자유로, 상업혁명을 통해 경제적 자유로, 정치적혁명을 통해 정치적 자유로 확대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근대에 철학적 이념으로, 인간이 자유롭다, 라는 개념을 창출해낸 것은 대단한 발견이다. 후에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윤리학적으로 뿌리내린 것은 칸트로부터이지만 그 원형은 데카르트이며 후에 19세기에 정치적 혁명이 일어날 때 이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체계가 갖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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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가 코기토를 만들고 외적 실재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신을 매개삼았다. 그러므로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다. 데카르트 이래로 헤겔까지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맺음 방식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지속된다. 예를 들어 <정신현상학>에서 정신현상을 말할 때 인간의 의식 속에 정신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의식 현상은 정신 현상이다. 인간이 데카르트식으로 코기토를 갖고 있다. 코기토가 바깥의 관념을 받아들인다. 이 관념의 존재의 확실성은 신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원형적으로는 데카르트의 틀과 닮은 것이다. 절차적 과정은 헤겔이 만든 것이지만 원형적으로 신과 인간 코기토 사이의 관계라고 하는 개념은 그렇게해서 형성되었다.
그 다음에 신과 코기토 사이의 연결고리 속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도 헤겔 속에 '대타 존재', '대자 존재'로 등장한다.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스스로 인식하기에 대자존재이지만 근본적으로 타자존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대자이면서 대타이다. 헤겔을 통해 개념만 달라졌을 뿐 데카르트 속에 잔존한다.
데카르트는 현대 철학 속에서도 후설과 사르트르를 통해 이어진다. 또한 데카르트가 만든 모델을 이해하는 것이 독일관념론을 이해할 때 굉장히 중요하다. 피히테 같은 경우도 스스로 자아의 철학을 주장한다. 자아와 비아의 대립이라는 말을 쓴다. 이것도 역시 인간의 코기토와 물질적 세계의 이원론 – 인간이 어떻게 코기토를 넘어 나아가서 물질적 세계의 존재를 확보해서 지식을 세우는가, 이런 문제이다. 자아와 비아의 대립이란 개념 역시 데카르트 코기토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다. 이걸 세울 때 피히테 스스로도 선험적 자아, 이런 개념을 쓰면서 자아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갖고 온다. 따라서 우리는 피히테가 데카르트와는 다른 체계를 어떻게 확보하는가, 이런 부분을 이해하면 된다.
Descartesian
이 홈페이지에 존재하는 모든 데카르트 관련 목록
01. 데카르트를 현대철학 관점에서 정리한 수업 [2015-1]
02. 데카르트를 독일관념론 관점에서 정리한 수업 [2015-2]
03. 데카르트를 기초적으로 정리한 수업 [2015-2]
04.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