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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카르트2015 강의정리

 

강의_ 이성환 교수님

 

[발표자의 발표 뒤]

 

   데카르트는 인식론의 문제에 초점이 있었다. '과학적 지식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가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이었던 것이다. 즉, 인식을 감각경험에서 들어온 것을 이론적 체계로 아는 것이라 할 때, 이런 '이론적 체계'에 해당하는 지식의 정당화가 관건이다. 이 지식의 확실한 토대를 만들기 위해 데카르트는 어떻게 하는가 ?

 

   데카르트는 절대적 지식을 찾기 위해, 지식을 크게 유형별로 나누어보고, 그 유형별로 가능한 의심(방법적 회의)을 하게 된다.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의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I.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지식 – 경험의 시발지를 의심해본다. 그것은 신체적 조건이다. 감각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는 경험적으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II. 경험할 수 없는 지식 중, 본유관념(수학적 지식 등) – 악마의 가설을 도입하면 불확실하다. 신은 우리를 기만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신에 준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나 우리를 속일 수 있는 자가 있을 수 있다.

 

   III. 신체에 관한 지식 – 꿈의 가설을 통해 의심할 수 있다. (현대철학의 세련된 변형은 '통속의 뇌'이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생각한다 : (감각이, 악마가, 꿈이) 그것들이 나를 속이더라도 속일 수 있는 '나'가 있어야 된다 → 모든 지식의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토대로서 "코기토"를 확보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통해, 절대 확실한 인식의 체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서, 이것에 의존해서 과학지식을 다 정당화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2강 : 질의에 대한 답변]

 

   ⓐ 데카르트는 어떻게 회의주의를 극복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데카르트는 스스로가 했던 방법적 회의를 어떻게 극복했나. 둘째, 데카르트는 "필연주의"에 대한 대응에서 자기자신의 절대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당대의 회의론과 회의주의"에 대항해서 지식의 확실한 토대를 얻겠다는 말인데, 어떻게 그 대항적 입장들을 극복했나.

 

   데카르트는 회의론자처럼 회의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의심의 방법을 '방법적'이라고 했다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의심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회의론자처럼 지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데카르트가 당대의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방법적 의심을 하기 전에 스스로 설정했던 네 가지 준칙이 있다. 그걸 간단하게 소개하면서 그 준칙 속에 데카르트의 '방법적 의심'이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고, 데카르트가 당대의 회의주의 뿐 아니고 자기자신의 방법적 회의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네 가지 준칙 : (1) 명석판명한 것만 받아들이자. (2) 복잡한 것은 단순한 것으로 만든다(분석의 방법). (3) 단순한 것으로부터 점진적으로 복잡한 것으로 거슬러올라가면 된다(종합의 방법). (4) 종합하거나 분석할 때 빠짐없이 온전히 다 매거(예를 들기)해야 한다.

 

   {데카르트가 준칙으로 삼았던 분석과 종합이라는 말이 근대철학 이후 큰 영향을 끼쳤음 : ① 칸트 : 보통 칸트에게 있어서 분석명제와 종합명제가 이야기된다고 말을 하는데, 그 말들은 이미 데카르트가 위와 같이 분석의 방법, 종합의 방법을 이야기할 때 언급한 것이다. ② 영국경험론자 : 어떤 대상으로부터 우리의 완전한 경험으로 나아간다고 할 때, 그들은 경험을 분석해서 나아간다. 즉, 우리한테 주어지는 대상이 있다고 할 때, 이 대상을 분석해보면 전부 단순관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복합관념이며, 그렇기에 이 복합관념을 잘라 나가보면 최종적으로 단순관념으로 갈 수가 있다. 그래서 단순관념이 우리가 인식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의 요소다. (분석의 방법) ③ 분석철학자 : 복합명제를 단순명제protocol sentence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4준칙 중 '방법적 의심'이 어디에 걸리는 것일까? '방법적 의심'은 분석의 방법에 속한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토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모든 지식의 체계들을 하나하나 물어서 다 의심할 수 있다고 설정했다. 그러면서 의심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코기토 에르고 줌'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분석철학에서 말하는 원-명제 {이것으로부터 더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명제} 비슷한 것이다. 물론 데카르트가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원-명제를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재계가 있고, 실재계에 관한 인식이 있다고 했을 때 인식에 있어서도 실재계에 있어서도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서 '코기토 에르고 줌'을 내세운 셈이다.

 

   준칙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우리에게 명석 판명하지 않으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 : 데카르트 이래로 서양철학에서 등장했던 개념이 하나 있다. 철학을 무전제의 학이라고 한 개념이다. 그리고 데카르트가 말했던 무전제의 학이라는 말을 후설이 사용한다. 데카르트가 스콜라철학을 염두에 두고 이말을 하던 그때, 그는 자기보다 앞선 철학들은 전제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를 의도했다. 스콜라 철학은 신 존재 증명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원용할 때, 근본적인 전제가 있고 그 전제로부터 자기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외부에 전제가 있고 그것을 끌어들여 와서 자기의 철학에 전제로 삼았던 것이다. 데카르트가 전제가 없다고 말할 때, 그는 외부로부터 아무것도 끌어들이지 않고 순수하게 내 이성의 힘, 내 사유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의 지식을 검토해보고 우리 바깥 세계에 관해서 인식한다는 것을 의도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근본적으로 갖고 있어야 될 것은?' 이라고 물을 때 데카르트는 '명석판명'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개념은 내포와 외연으로 이루어져있다. 내포는 어떤 기호에 주어지는 의미이다. 그리고 의미를 지닌 기호를 적용할 수 있는 범위를 외연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명석판명하게 사유한다는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유하는 말에 관해서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명석이란 말은 분명하게 쪼갠다는 뜻이고, 판명이라는 말은 개념을 정확하게 나누어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언어다. 그러므로 언어가 없다고 말하면 인식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철학쪽으로 올수록 '말 없는 삶은 없다'는 것이다. 감정이 갖고 있는 격렬함은 내 정서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이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린 그걸 다 말로 표현한다. 우리가 인식한다라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언어다.

   그러면 우리가 언어를 명석판명하게 사용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우리가 언어를 통해서 뭔가를 안다고 말할 때 아는 것이 어느 정도로 투명해야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명석판명하게 안다는 말이 어느 정도 안다는 말인가? 데카르트는 어떤 지식이 갖고 있는 깊이나 폭을 온전히 아는 것을 명석판명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가령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의미가 변하는 '사랑'이란 말을 온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언어를 명석판명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그 개념을 내가 사용하는 데 있어서 나에게 있어서 분명하다는 것이다.

   애매모호함이 없는 것은 나 바깥에서 애매모호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내가 남한테 '그 말은 이런이런 의미로 쓰일 수 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확실성을 마련하기 위한 제일 첫 원칙으로 명석판명한 사고를 이야기한다. 명석판명이란 어떤 객관적 사유가 아니고 내가 나에게 있어서 어떤 개념과 사실이 투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내가 알았던 것이 잘못 알았던 것이라고 말할 지언정, 지금 내가 아는 한에서는 그것을 누가 물었을 때 온전히 다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리해보면 데카르트는 누구든지 의심의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으려면, 근본적으로 자기가 명증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단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내가 사유한다라고 말할 때, 바깥으로는 너무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일지라도 내가 공감할 수 없으면 아니라는 것이다. 명석판명한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 ('네가 옳고 그르다고 하는데 옳은 것은 도대체 너한테 무엇인가'를 물을 때, 상식적인 틀 속에 묶여 있는 사유를 자유롭게 하니까), 여기서 또한 계몽을 이야기해볼 수 있다. {이 명석판명함을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우리가 계몽되는 것이다. 애매모호한 상태를 미몽이라 말하는데, 미몽의 상태, 어두움의 상태로부터 우리를 빛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전제의 학, 명석판명이라는 말 속에는 계몽의 의미가 들어있다.}

   ▶ 이렇게 길게 말한 것은, 근대철학의 근본은 인식론인데, 또 칸트 이후로 인식비판이라 말하는데, 이는 데카르트 이래로 우리가 안다라고 말할 때 그걸 비판적으로 알아야 된다는 생각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 데카르트가 위와 같은 준칙에 따라서 발견하는 것이 '코기토 에르고 줌'이다. 이제부터는 '코기토 에르고 줌'에 대한 설명을 조금 해보도록 하자.

 

    그날 문X균군이 '생각한다, 상상한다' 이런 몇 가지 개념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이런 것들을 별개의 개념으로 이야기했다. 사유한다라든지, 상상한다든지 하는 개념을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사유한다'라는 말이 가장 원형적인 말이고, 이 '사유한다'라는 말이 여러가지 양태(mode  → 사유가 드러나는 방식)로 등장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사유는 관계맺는 대상과 관련맺으면서 그 사유방식이 드러난다. 내가 책상을 본다고 해보자. 내가 그것을 보면서 "저기 책상이 있네" 라고 할 때, 그 순간에 내가 하는 사유활동을 '지각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 내가 여기 앉아 있지만 어제 일을 생각한다 해보자. 이를 '회상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유라는 것은 우리가 관계맺는 대상에 따라서 활동하고, 자기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유활동 자체는 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따라서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사유는 하나이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마음의 활동에 해당하는 여러가지 개념들은 사유의 양태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유활동이 스스로 '지각한다, 판단한다, 상상한다, 추리한다' 라는 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항상 대상과 관계맺을 때, 즉 대상을 지향할 때마다 각기 다르게 자기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라틴어에는 아레동사 에레동사가 있는데, 코기토 같은 경우는 코기타레에서 유래한다. 코기토 하면 나는 생각한다, 코기타스 하면 너는 생각한다 등이 된다. 그러니까 아레 동사에 붙는 변화에 따라서 나, 너 등 인칭을 함축하기 때문에 라틴어에는 주어가 없다. 줌이라는 말도 동사 원형 변화이다. 그러니까 코기토라는 말 속에, 사유의 활동도 있고, 사유의 주체도 있다. 문장을 풀어쓰면 마치 나라는 실체가 있고, 그 실체가 사유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다음에 줌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고 말을 하면, 라틴어로 보면 "코기토가 줌이다. 사유활동 자체가 있음이다. 있음은 사유활동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고 말을 하게 되면 나, 나 두 개는 똑같은데, 나는 존재한다고 말을 할 때, 나와 사유활동을 분할해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인지, 안 그러면, 나만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나는 언어적인 지시체이고, 사유한다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인지, 복잡해진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할때, 나의 존재는 사유활동을 통해서 표현한다, 라는 것이 한 해석이고, 반대로, 나는 없고, 사유활동만 있다. {나는 있다, 라고 말을 하면 사유활동의 주체가 불변적인 것으로서, 사유활동을 하는 것이다. 사유활동은 사유하는 주체의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주체란 것이 없다 고 말하면 사유활동 밖에 없다는 것이 한 해석이다. 흄이 대표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우리가 사유활동 속에 들어와서 반성을 통해서, 사유활동 속에서 나를 찾아보려고 해보는데, 없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유활동의 다발, 기억의 다발에 지나지 않는다. 기억의 다발을 언어적 양식으로 '자아'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가지고 후대에 논쟁을 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존재한다' 고 할 때, '나와 사유한다'는 것과 그것 사이에는, 구분지가 없다는 것을 의도한다. 나 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반성을 통해 주체로서 포착된다고 말하기 어렵다. 즉, 사유활동이 있고 사유활동이 있을 때, 반성하는 주체는 동시에 있다. 내가 대상을 본다고 할 때, 거기서 '나'라는 건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어떤 애가 '선생님 뭐하십니까' 하고 말할 때, '나는 책상 보고 있지' 라고 대답했다고 해보자. 내가 책상 보고 있다고 대답하는 순간 나는 책상을 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뭘 보고 있는데, 누가 아까처럼 물을 때, 보고 있는 나가 빠져나와서 보고 있는 나를 되돌아서 본다. 결국 사유활동이 있고, 반성하지 않는 채로 그걸 작동시키는 뭔가가 있고, 누가 물을 때는, 이 작동시키는 뭔가가 빠져나와서, 앞에 했던 사유활동을 되돌려서, '아, 내가 책상을 보고 있지' 라는 말을 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한다는 것과 그것을 통해 내가 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굉장히 복잡할 수 있다. 

 

   따라서 '코기토 에르고 줌' 속에, 이런 식의 복잡한 논변이 숨겨져 있다.

 

   일단 에르고는 연결사로 붙어 있을 뿐이지, 양자가 분리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코기토 에르고 줌'은 인간은 사유한다는 방식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나무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나무의 존재는 사유의 방식이 아니다. 질료가 나무의 존재방식이다. 그런데 인간은 신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질료를 갖고 있지만 인간의 존재방식은 질료라고 할 수 없다 {죽고 나면 내가 없으니까}.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사유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코기토 에르고 줌은 그걸 뜻하는 것이다. 그래야지만이 비로소 감각이 나를 기만해도 기만당하는 나가 있어야 된다, 이렇게 말할 때, 사유활동으로서의 나가 성립되고, 꿈의 사유활동을 통해 존재하는 나. 기만당하는 의식으로서의 나(악마의 가설)가 성립되는 것이다.  

 

   나무가 있다라는 걸 나무 스스로 증명할 수는 없다. 누군가가 나무가 있음을 증명해줘야 된다(인식). 그러나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을, 타인을 통해 지칭하지 않더라도, '아, 여기 인식하는 나가 있지',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이다. 이렇게 정돈을 해보면 "생각한다"는 것과 "있다"는 방식은 굉장히 독특한 방식이다. 데카르트적 인간에게서 "있다"의 방식은 사유활동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존재방식은 나무와 달리 매우 독특한 것이다. 

 

 

   ⓒ 최X주양의 질문. 타자의 문제가 어떻게 되는가.

 

   데카르트가 명석판명하게 사유해야 한다고 말할 때 외적인 데 걸지 않는다. 그러니까, 모든 지식의 체계를 나로부터 출발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속에 있는 지식의 체계를 다 의심한 다음에,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지 아닌지가 애매 {수학적 지식, 신체 등} 하여, 그러면 내 속에 있는 무엇이든 다 배제하고 난 뒤에 의심할 수 없는 코기토를 도출해낸다. 그것을 통해 그는 내가 사유하는 내 활동, 내 마음의 활동을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 이때, 타인은 어떻게 되는가? 나는 내가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안다. 그런데 외형적으로는 타자가 나와 닮은 꼴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나와 같이 마음의 활동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검증할 수 없다. 내 마음으로부터의 사유활동으로는 타인의 마음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확보한 코기토에는 근본적으로 타인의 마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없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유아론이라 부른다.

 

 

[3강]

 

   데카르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이유

   1. 이 수업은 독일관념론 수업인데, 데카르트가 만든 틀 속에 독일 관념론자들의 체계가 기본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2.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로부터 근대 이후에 생성된 철학적 정신은 근대 이후에 지속되는 계몽의 의미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글을 쓰기도 하고, 푸코와 하버마스의 계몽의 의미에 관해 논쟁하기도 하는 이러한 계몽에 관한 논쟁사가 있다. 저번시간에 설명했듯 명석판명성이 갖고 있는 의미가 계몽에 초점이 맞처져 있다고 생각하면 현대까지 연결고리가 많이 생긴다.

   3. '코기토 에르고 줌'이 가지고 있던 근본적 의미. '사유한다'와 '존재한다'가 일치한다, 라는 것에 대해. '코기토 에르고 줌'에서 '코기토'와 '줌'이 같은 의미에 속한다고 말을 했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마음 혹은 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인간의 마음의 존재가, 인간 이외의 존재방식과는 뚜렷이 다르다는 것을 꾸준히 설명하려고 한다(칸트가 그것을 뚜렷하게 변별한 이후에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이런 부분들을 여러분들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도 인간하고 인간 이외의 것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인간 이외의 존재와 다른 특별한 요소가 뭐냐고 물을 때 인간은 사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든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 속성으로서 인간이 사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라는 말처럼 들린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이렇게 말을 했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는 생물학적으로는 동물에 속하고 이 동물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 속성 중에,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속성 중에 사유한다는 속성이 있다, 는 것처럼 들린다. ▶ a. 일반적으로 인간의 사유하는 능력을 속성으로보고,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관을 '실체론적 인간관'이라고 한다.

 

   데카르트가 '사유하는 존재가 있음의 실체인가' 라고 물었을 때,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된다. 데카르트가 말했던 부분은 코기토 그 자체가 실체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라는 한 부류가 있고, 반대로 데카르트가 말해던 것은 오로지 사유하는 활동 밖에 없고, 그것을 속성으로 가지고 있는 실체가 없다 라는 유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흄 같은 경우가 사유하는 실체가 없다, 사유는 어떤 속성으로서만 존재한다, 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흄은 데카르트가 실체를 전제한 것처럼 데카르트를 공격한다. 어찌되었건, 데카르트가 말했던 부분에 있어서 이 사유하는 능력이 실체인가 속성인가 라는 논쟁이 있을 수가 있다.

 

   후대에, 후설 이후로 오면, 데카르트의 인간의 존재방식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고, 인간이 갖고 있는 신체 자체가, 인간의 존재방식의 큰 특징이 아니다라는 것이 주장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존재한다' 라고 말할 때 인간의 존재를 신체로 증명하면 안 된다는 것이 주장된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가 사유로 대변된다면, '사유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의 존재다' 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a.에서 말했듯, '이성적 존재, 동물이란 개념에서 동물의 한 속성으로 사유의 능력이 있다' 는 것과는 의미와 존재의 층위가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에게서 사유하는 능력 그 자체가 바로 사유의 존재를 뜻하는 말이 된다. 사유하는 존재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 존재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유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 지금부터는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몇 가지 질문했던 걸 환기시켜보자. 문X균군과 최X주양이 물질적인 실재의 존재가 있는가하고 물었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대상들이 내 마음 속에 있는 관념이라고 한다면, 그중 외래관념에 상응하는 물질적 실재성이 우리 마음 바깥에 존재를 갖고 있는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내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관념과 내 존재가 확실하다고 말한다면, 내 관념의 외부에 존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

 

   최X주는 내 몸뚱아리 이건 정말 존재하는가? 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을 했다. 이때의 질문은 '타자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하는가 라고 묻고, 그 다음에 내 신체 존재는 물질적 존재와 똑같은 존재인데 이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런 것이었는데, 이를 설명하려면, 신이란 것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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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의 상호주관성

 

노에마는 공의미적이지만 남의 사유대상이 아니라 남의 사유작용은 유비통각을 통해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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