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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철학 기초 [2015]

 

강의 - 심귀연 센세

 

(도입 시작)

 

  헬레니즘부터 비로소 개인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헬레니즘 하면 알렉산더 대왕이 떠오른다. 그의 스승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알렉산더는 10년간 전쟁을 하며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였다. 이 왕이 활동하는 때 왜 오늘 배우려고 하는 새로운 철학적 조류가 생긴 것일까? 전쟁을 치르는 당시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어떠했을까? 죽음, 불안, 공포..... 이런 것도 있겠지만 사랑도 더 많이 맺어지고, 이러한 시기에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가 엄청나게 발생할 수도 있다. 바로 생존욕구라는 것이 전쟁 때 엄청나게 증가함으로써, 이 끔찍한 상황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에 대한 생각들이 생겨날 수 있다.

 

  헬레니즘이란 말은 어떤 함의를 가질까? 그리스를 다른 말로 '헬라스'라고 한다. 고로 '헬레니즘'은 '그리스화된 철학'이다. 헬레니즘은 그리스철학을 전승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전쟁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영향을 미쳤을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그리스 철학과 헬레니즘 철학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내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전에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소피스트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정치에 있어서, 유연한 생각의 촉진. 또? 소피스트들은 '선생'이었기 때문에 전문분야가 있고, 수사학이 전문분야이다. 나는 헬레니즘 시대 사람들의 경향을 이야기하기 위해 방금의 물음을 던진 것이다. 헬레니즘기에 사람들이 굉장한 불안감을 느끼고 소피스트들처럼 어떤 지배적 진리를 담아내기 힘들다고 보는 상황이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태된 철학, 그것은 무엇일까?

 

  헬리니즘기에 나를 결속시켜주는 무언가가 사라져버렸다. 그 무언가가 있고 나를 보호해준다면 나는 그속에 안착하게 될 것이다. 편안한 삶을 살면서 그렇게 문화를 꽃피울 수도 있다. 그런데 나를 보호해주던 울타리가 사라져버렸다고 해보자. 행복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이 얻은 것은 다양성이다. 헬레니즘기의 철학은 따라서 '감각적 경험'의 중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떠올려볼 때,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관조의 철학자임과 동시에 경험의 철학자이다. 그는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본질은 있지만 그것을 찾을 때는 지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최초로는) 감각으로부터 시작해야 한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여행을 하면서 '경험'에 영향받게 된다.

 

  또, 개인과 사회간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종래의 폴리스에 개인이 안착해 있음으로서, 이 개인은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의미로서의 개인이라기보다는 단지 '인간'에 불과했다. 이 인간은 사회를 통해서 자신을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쟁 탓에 공동체가 무너지고 '나'가 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을 때, 일견 모든 관심이 '나'에 집중될 것처럼 보이지만, '나' 개인으로부터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공동체 속에 있던 나. 그때 나는 '나'에 천착해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나는 없고 공동체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공동체 밖으로 나갔을 때, 홀로서기한 존재가 다른 홀로서기한 존재와 관계맺을 수밖에 없음을 체감하게 됨으로써,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자기 혼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으로써 지식이 전문화되는 경향이 있다. 헬레니즘기에는 바로 전문화된 지식인이 탄생한다. 이런 정도가 헬레니즘 철학의 의미이다.

 

(도입 끝)

 

1. 라오콘 조각 vs. 그리스의 비너스 조각

 

- 라오콘 조각은 헬레니즘기 작품으로서 그리스철학의 특징을 담고 있는 비너스 조각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작품의 라오콘은 고통에 견디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형태가 뒤틀려 있고 얼굴에 인간의 개인적인 감정이 표현되어 있다. 반면 비너스 조각은 황금비율이 정해져 있다. 고귀함, 위대함, 탁월함을 보여주려고 한다. 여기서 탁월함은 '선'이며, 지적으로 완전함은 도덕적으로도 완전함이다(진=선=미). 그래서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감각적 아름다움을 느낄 뿐만이 아니라 지적, 도덕적 고귀함인 신성을 느끼는 것이다.

- 이렇게 '인간(개인으로서의)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 점에서 헬레니즘 철학의 특징도 드러난다.

 

    

2. 키니코스학파

 

- 키니코스란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개처럼 지속적으로 물고 늘어지며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존재라는 어의를 가진다.

- 이 학파는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고 스토아 학파에 영향을 준다.

- 디오게네스 vs. 알렉산더 대왕 [유명한 일화] : 여기서 디오게네스는 물체적인 것, 신체적인 것에 관련된 욕구가 없다. 대신 지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 그는 내가 욕심을 가지는 것이 나를 불행에 빠뜨린다고 생각한다. 한편 "무엇이 필요한가?" 라고 물은 알렉산더에게 비켜달라고 말하며 자신은 햇빛이 필요하다고 지시한 일화에서 햇빛이 의미하는 것은 자연이다. 이때의 자연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자연과 차이가 있다. 이 자연은 인간적 질서를 넘어선 초월적 질서. 로고스=이성으로서의 자연이며, 자연적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이성적 삶을 산다는 것이다.

- 디오게네스의 이러한 태도를 현재 우리는 '시니컬'이라고 표현한다. 다시금 키니코스의 어의가 상기된다.

- 세상에 대한 키니코스 학파의 냉소적 태도. 세상 가치를 비판하는 것. 이것은 우월의 태도일까? 그들의 생각을 묘사해보면 다음과 같다 :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신네들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조차 또한 평범한 삶이므로, 내가 당신네들보다 잘난 건 없지만 당신네들의 삶이 나보다 훨씬 좋다고 할 순 없어요'.

 

 

3. 스토아학파

 

- 스토아학파의 경향을 우리가 기존에 배워온 철학자를 섞어서 정리해보자. 소크라테스가 키니코스 학파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플라톤적 요소이다. 그 외에 다른 측면을 보완한 것 즉, 기존 고대철학이 가지고 있던 것에서 조금 더 인간(개인)적인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 것이 스토아 학파이다. 따라서 스토아 학파를 플라톤적 요소와 소피스트적 요소의 만남으로 위치지을 수 있다.

- 스토아학파는 제논이 창시했다. 제논은 처음에는 플라톤주의자였는데, 앞서 아리스토가 플라톤을 비판한 것과 유사한 맥락 -인간의 영혼만 생각했지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개체의 변화를 설명하지 못했다는- 에서 제논 또한 점차 인간은 이성만을 가진 존재는 아니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즉 제논은 플라톤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되, 그 일부만 반대했는데, 바로 이성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반대한 것이다.  

- 따라서 스토아학파의 논리학(지식에 대해 다루는, 인식의 과정을 고찰하는 인식론)은 소피스트들이 주장하는 상대주의와 함께, 플라톤-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절대주의의 색채도 볼 수 있다. 즉, 이성만이 아니라 감각을 중요시하고, 감각적 지각을 통해 어떤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한 것. 여기서 감각을 중요시한 경향은 에피쿠로스 학파에게서도 보인다.

  ㄴ 객관성과 주관성의 영역을 대체로 철학자들은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 것인가? 현실 삶과 관련된 다양한 내용들이 객관성을 띤 법칙 속에 들어가서 새로운 것(인간 삶의 영역)이 도출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 스토아학파도 에피쿠로스학파와 마찬가지로 금욕주의를 이야기한다.  

 

a. 스토아 학파의 자연철학(자연의 근원은 무엇인가).

: 플라톤은 그 근원을 이데아라고 보았지만 스토아 학파는 만물의 근원을 '소마타'라는 물질로 본다. '소마타'라는 말 자체가 물질/물체라는 뜻이다. 자연철학자들이 물/불/공기로 만물의 근원을 이야기한 것과 달리 소마타는 눈에 보이는 물질이 드러나기 이전의 것, 물질적인 그 근원의 것이다. 아리스토를 빌자면 제1질료/순수질료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관념이나 이성은 아니다. 자연이 있고 그 자연을 내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다고 할 때, 내 감각에 들어온 것은 감각기관을 거쳐서 들어온 것이기에 자연 자체는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개념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자연이란 것이 인간 신체를 통해서 들어온다 할 때 그 이전에 원래부터 있는 모습이 물질/물체 곧 소마타이다.

 

b. 스토아 학파의 윤리학(행복, 삶의 방법에 대해 다루는 학문).

: 헬레니즘은 그리스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점차 개인적 측면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 시기이다. 스토아 학파도 행복을 방해하는 많은 요소들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온 공포, 분노, 열정, 불안..... 그러한 상태들은 돌이 물에 떨어졌을 때의 파장과 같이 평온하지 않고, 물결치고 흔들리고 정신이 없는 상태이다. 이 상태에 빠지면 우리는 안정을 취하지 못한다. 이런 상태가 우리의 이성을 올바르게 작용하지 못하게 막는다. 철학자는 어떻게 할까?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잠잠한 마음 즉 부동심[=아파테이아]을 가지며, 내 마음에 흔들림 없이 가장 평화로운 마음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해야 한다.

 

c. 그러면, 알려는 욕구에서 호기심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리고 그러면 마음 속에서 열정이 일어나는데, 왜 논리학과 자연철학이 필요할까? 왜 지식을 추구하려고 노력해야 할까?

-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연이라는 것이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플라톤의 경우 자연적인 것을 인간의 육체에 대응시키고 이데아를 인간의 정신에 대응시킴으로써 후자를 더 중요시한다. 이전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정신의 세계를 로고스(세계질서, 세계영혼)으로 생각한 바 있다. 그는 자연은 변화하되 변화한다는 법칙을 지닌다. 스토아 이전 철학이 자연이 변화 속에 있기에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스토아는 자연을 세계로, 법칙을 로고스로 이해함으로써 자연이 곧 로고스가 된다. 

- 따라서 철학자의 삶은 이 변하지 않는 자연의 이치(로고스)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다. 

- 자연 -> 로고스 -> 이성을 따르면 덕스런 삶이며, 이 덕은 바로 자연의 이치이기에 곧 부동심의 자세와 연결된다.

- 스토아가 자연의 법칙 = 이성의 법칙을 주장하는 학파라면 정해진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론적인 삶을 살라고 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내 행동에 책임이 없다면 도덕을 이야기할 수 없다. 도덕이란 말이 왜 생겨나야 하냐면 그것이 자연법칙과 달라서이다. 우리는 이 도덕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깨닫는 거 아닐까? 한편 자유를 이야기할 수 없다면 현실에서 의지가 일지 않는다. 철학에서 중대한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문제"가 여기서 발생한다. 

 

 

4. 에피쿠로스 학파

 

- 에피쿠로스라는 말은 에피큐어(식도락, 미식가)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 학파는 우리에게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것은 감각적 지각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서 학생들이 하게 되는 오해와 달리, 이 학파는 감각적 지각에서 모든 게 시작한다는 것 뿐 이것을 절제하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영속적인 쾌락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주장한다. '절제' 그리고 '금욕'. 이 학파는 즐거움과 쾌락을 누리되 도를 넘지 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아예 누리지 말라는 키니코스 학파와는 차이가 있다.

- 이전 철학에서는 감각에서 오는 것들이 이성을 훼손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에 와서는 감각이 최고라고 이야기하되, 이 최고인 것조차도 과해지면 안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므로 차이가 있다.

 

a. 에피쿠로스는 왜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일까?

ㄴ 지나친 쾌락이 안 좋은 이유를 생각해보자. 쾌락의 도가 넘쳐났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쾌감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를 나의 쾌락만으로 받아들여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훼손시키게 된다. 음식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것이 나 속에 들어오게 되어서, 그것과 나 자신만의 관계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테고, 음식을 먹고 즐기는 가운데 나를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과의 관계로 이루어진 장을 고려하지 않고, 음식이 내 몸에 들어오면 내 몸만 거기 관계된다고 여길 때부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마찰이 생긴다.

ㄴ 감각적 쾌락이 도를 지나쳤을 때 올 수 있는 부작용 때문에 평정심[=아타락시아]을 유지하라고 주장한다.

 

b.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을 해치는 주범이 '공포'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종교가 이를 조장한다고 한다.

ㄴ 우리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궁리들을 한다. 고대철학자들은 어떤 해결방법을 썼을까? 영혼 불멸을 꿈꾸며, 종교를 가지게 된다. 역설적인 것은, 종교가 종교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죽음을 오히려 권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신이나 영혼불멸설에 반대했다. 에피쿠로스 눈에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을 종교가 구원해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자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을 불행하게 만드려고 조작하며, 그 두려움을 싹틔우게 해서 자기 종교 쪽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c. 에피쿠로스가 유물론으로 연결되는 지점도 이 지점이다.

ㄴ 유물론자라면 영혼도 물질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물론 신체도 물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혼도 신체도 소멸한다. ----- 에피쿠로스는 신체가 소멸하면 내 영혼도 소멸한다는 일원론을 주장하게 된다.  

 

d.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계승해서, 에피쿠로스는 '세계', '공간'을 어떻게 이해할까? 

ㄴ 세계는 무한하면서 그 질량에 절대 변화가 없다. 그렇지만 질량은 무수한 여러개 (알 수 없는 정도의 미세한 무엇으)로 나뉠 수가 있다. 따라서 세계는 무한하다. 세계는 단일하지 않고 여러 개이다.

ㄴ "무에서 아무것도 생기지 않고 또 아무것도 무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할 때 에피쿠로스의 전제가 있다. '무에서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태초에 무언가가 있었다고 말하는 셈이 되며, 이는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형이상학적 전제가 된다. 에피쿠로스는 실체를 인정한다. 플라톤의 실체가 이데아이고 아리스토의 실체가 형상/제1형상/부동의 원동자로서 신학으로 귀결된다 할때, 에피쿠로스의 실체는 이 두 실체를 극복할 수 있다. 영혼이 아닌 하나의 물질로서의, 무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닌 실체를 상정함으로써 말이다.

 

e. 그런데 우리가 아까 인간의 영혼이나 육체는 죽어서 소멸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위에서 논의한 전제를 성립시키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즉, 에피쿠로스는 어떻게 하여 종교를 부정하고 영혼소멸을 부정하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영원함을 이야기했던 것일까?

ㄴ 인간이 죽으면 나는 소멸하지만 나는 변화된 것이 된다. 흙이 된 나는 다른 식물의 영양분이 된다.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순환한다. 인간은 그래서 다른 존재와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에겐 영혼이라는 것이 있지만, 다만 이 영혼이라는 것은 고대철학자들이 얘기했던 영원불멸하는 것이 아니고, 자유의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신체는 자연의 섭리와 인과법칙 속에서 태어나고 소멸하는 것이 필연적인 연결고리 속에 있으나, 인간은 그 와중에 자유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자유가 바로 인간에게 '우연'이라는, 운명에 얽매이지 않고 쾌락을 누리려고 욕구하는 동물과 다른 욕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물질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자연과 다르지 않다. 

 

 

5. 신플라톤주의 (플로티누스의 틀을 바탕으로)

 

: 플로티누스는 일자로 다 설명되는 완벽한 일원론을 만들게 된다.

 

a. 플로티누스는 아래와 같은 단계를 통하여 이데아계가 현상계로 내려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ㄱ~ㅁ)

 

ㄱ) 일자

- 일자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 플라톤의 이데아 대신에 일자를 말한 이유가 뭘까? 플라톤의 이데아는 여러 개이다. 이렇게 이데아가 여러 개 있으면 문제가 된다. 이데아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란 속성이 있다. 플로티누스가 생각할 때,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 밖에 없어야 한다. 이데아가 여러 개라고 해 버리면 이데아가 가지고 있는 원래적인 의미가 설명되지 않으므로, 플로티누스는 일자로 설명한다.

-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플라톤은 변화라기보다는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각각의 이데아를 이야기했다. 하나의 일자를 가지고 다양성을 설명해내기 위해서. 그러나 플로티누스는 다음을 고려하고 있었다 : '완전한 신(일자)이 다른 어떤 것들을 만들어낼 때, 자기의 속성을 나누어줄 때, 자기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정신을 다른 것들에 나누어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 플라톤의 경우 여러 개의 이데아가 있고 이 이데아들을 연결해주는 제 3의 형상을 가정해서 이데아의 이데아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과정의 논리적 설명에 많은 이들이 불만을 가진다. 아리스토는 여기에 운동과 목적인을 넣어 설명했던 것이었고, 플로티누스는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여 이를 설명한다. 그래서 유출설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빛을 나누어준다고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 태양과 같이 일자는 자기의 빛을 나누어줌에도 불구하고 늘 같은 모습으로 있을 수 밖에 없다.

 

ㄴ) 누스-지성

 

ㄷ) 영혼

- 세계영혼 : 세상의 모든 것들에는 영혼이 있다고 하는 자연철학자들의 물활론도 여기 내포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 인간의 영혼 : 이는 이데아계와 현상계의 경계 ;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경계에 있다. 인간의 영혼은 세계 영혼 속에 있는 또다른 영혼이다.

 

ㄹ) 물질

- 영혼이 없다. 결핍된 것. 악. 

 

ㅁ) 무

 

b. 플라톤과 관련하여 [ㄱ)항목을 참고하여 이 항목을 보라.]

: 플라톤에게 이데아계와 현상계가 있을 때, 참된 실재는 이데아계에 속하며 현상계는 가상계로서 거짓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일원론적 해석을 하는 것이고, 플라톤이 이데아계도 있고 현상계도 있다는 분류를 행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이원론적 해석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플라톤은 일원론적 주장을 하면서도 그 속에 이원론이 내포되어 있게 되어 보는 시각에 따라 이원론으로 해석할 여지가 남게 된다. 이를 완벽히 보완하여(혹은 확연히 차이나게), 플로티누스는 참된 세계는 하나밖에 없고, 빛이 유출되어 흘러나오듯이 나머지 세계는 그 참된 세계로부터 분유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c. 플로티누스의 유출설 cf.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설

일자(신) cf. 성부

지성 cf. 성자

영혼 cf. 성령

- 그렇게 보면, 플로티누스는 그리스도교와 그리스철학(플라톤)의 가교 역할을 한다.

- 저 세 가지는 각각의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빛이 분유된 것이므로 모두 일자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d. 창조 개념과 관련하여

: 그리스철학에서는 가이아가 혼돈 속에서 질서 지워져서 코스모스가 형성된다. 이 혼돈을 질서짓는 힘이, 로고스, 이성, 빛, 세계질서이다. 그것들을 주는 존재가 누구인가 ? 데미우르고스인데 그는 제작자로서의 신이다. 자기 머릿속에 형상을 가지고 있다. (행위자체가 창조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철학에서 데미우르고스가 무언가를 만들고, 이데아계에서 현상이 나온다. 항상 문제가 되었던 것은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것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이다. 완벽한 이데아에서 어떻게 완벽하지 못한 그림자들이 나올 수 있는가 ? 플로티누스는 이것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다. 플로티누스는 완벽하고 불변하는 일자로서 이데아의 속성을 다 갖춘 것을 설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부족한 것이 나온 것은, 위의 ㄱ)항목과 b항목에서 언급한 바이다. 플로티누스는 유출설을 선택한다. 빛이 유출되듯이 그것이 분유된다면, 일자는 훼손되지 않으면서, 불완전한 것들이 나올 수 있다.

 

 

6. 회의학파 (피론)

 

회의한다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일까? 회의하지 않으면 무엇이 문제인지 찾아낼 수 없을 거고 어떤 진리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중요하다.  피론이 얘기했던 에포케. 판단중지라는 뜻이다. 기존에 있던 것이 편견에 의한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판단을 일단 보류하자는 것이다. 회의학파의 '판단중지'는 다른 관점으로도 그것을 바라볼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물어라, 회의하라, 그러한 행동 자체로 평정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피론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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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헬레니즘으로 넘어가는 혼란스런 과도기에,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가 등장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데모크리토스로부터 유래한 유물론적 원자론을 가지고 있었다1. 데모크리토스는 심지어 정신까지 원자들로 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4가지 종류의 원자가 해체되면 영혼이 소멸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우연히 결합해서 영혼이 생겨나고 우연히 해체되어 영혼이 소멸한다는 논리를 전승받은 에피쿠로스는, 만물은 우연의 소산이며 맹목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기계론적 유물론의 사고방식과 어느 정도 일치하기 때문에, 중세의 신앙 위주 철학이 깨지고 근대가 형성되는데 모종의 영향을 미친 학파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에피쿠로스 (학파)는 '내꺼야 !'라는 사고방식 때문에 만악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 학파는 문명외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어차피 해체되어 죽을 것인 우리의 인생을 문명이 더욱 더 못살게 군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스토아 학파의 기본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 감정 자체에 좋음이란 없다. 이들은 감정을 우선 나쁜 걸로 보는데, 이 감정은 거짓된 판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이성적인 판단만이 참된 것이고, 감정이 개입한 비이성적인 판단은 거짓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감정이 없는 인간이다.

 

스토아 학파의 자연관은 스피노자와 비견해볼 수 있다. 먼저 스토아 학파에게 자연(이 모든 것)은 이성적 법칙이 거기에서 관찰되는 것이며2, 이 자연 세계의 자의식이 신이다. 이는 앞의 맹목적-기계론적 자연관과 약간 다르다. (*그런데 에피쿠로스 자연관과 스피노자는 어떻게 되는가?) 스피노자의 자연은 능산적 자연이 생산한 바가 소산적 자연으로서, 스토아 학파와 '신=실체=자연'을 기본 구도로 공유한다. (* really ?)

 

플로티누스를 살펴보자. 그는 신플라톤주의로, 비정치적이고 관조적인 삶을 추구했다. 그는 완전성에 대한 추구로부터 말미암은 idea(eidos)에 대한 관점을 플라톤과 공유한다. 그는 그 idea를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순수질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형상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어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순수질료는 논리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 뿐 실제로는 '무'다. 그는 완전한 존재와 무인 순수질료 사이에 경험세계가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칠판과 같은 것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며, 육체성이라는 질료를 가진 인간 또한 그러하다.

 

그에게는 발생과 소멸을 거듭하는 개별 사물들이 있고, 발생과 소멸을 거듭하지 않는 것이 있다. 후자는 우주, 세계 전체로서 코스모스이다. 우주의 형상은 생명의 원리로서 영혼을 지닌다. '세계영혼'이 그것이다. 세계영혼은 세계를 살아있게 한다. (물활론) 세계영혼이 형상을 집어넣은 것이 세계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데미온로고스(창조주)와 비교해볼 수 있다. 플라톤의 데미온로고스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지성이 생성에 대해 설득을 한다는 것으로서, 카오스 상태에서 무질서하게 운동하는 생성들을 이데아들이 “내가 시키는 대로(지성적으로) 운동해보라”는 설득을 하여 질서 있는 코스모스가 생겨난다는 골자이다.

 

플라톤과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 플로티누스에게 이데아를 정신이 사유한다는 것은 이데아는 정신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광대한 정신인 세계영혼이며, 이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데아들과 이데아들에 대한 사유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고, 합일과 달리 분리는 불완전을 뜻하기 때문이다. 정신은 일자의 간접적인 빛에 불과하다. 일자 자체의 빛은 인간 사유로는 볼 수 없다(플로티누스는 이를 '눈이 먼다'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정신에 나타나는 이데아들을 보면서 일자를 가늠하게 된다.

1데모크리토스 원자론에서 허공의 의미.

2따라서 이성적 삶을 살라는 말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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