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istotel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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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기초 수업 [2015-2]
02.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기초 수업 [2015-2] (본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기초수업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것과 사유하는 것 사이를 분리하지 않는데, 논리학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형이상학을 얘기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지난번에 형이상학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 특히 가능태와 현실태와의 관계, 이 관계가 논리학에서 어떤 구조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잘 살펴보는 게 오늘의 목표이다.
보통 논리학이라고 얘기하면 우리가 항상 떠올려야 하는 제일 첫번째 사람이 아리스토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는 논리학을 가지고 학문이 무엇인가를 규명한 사람이기 때문이고, 논리학을 통해서 학문의 원래적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논리학은 학문적 체계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갖춘다. 논리학에 관해서 거론하고 있는 책이 <분석론>이다. <분석론> 중에서도 '범주론'에 해당되는데, 무엇을 분석한다는 말일까? <분석론> 자체가 논리학을 이야기하는 거잖아. 무엇을 분석할까?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가서,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가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분석한다는 것은 결국 정신을 분석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정신이 바로 이데아라고 말하였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 정신은 개념에 대해서 알기만 하면 된다. 책상이 무엇인지, 하늘이 무엇인지. 그것이 바로 이데아이고 본질이니까 그걸 알면 되는 건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념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개념과 개념 사이의 관계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플라톤에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관계라고 얘기했다. 변화와 관계를 설명하지 못했다. 개념과 개념을 설명하고 개념과 개념 사이에 보편을 끌어 내어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 진리에 이르는 길을 도식화하긴 했지만, 그 속에 운동 개념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통해서, 그러니까 형이상학에서는 운동인, 작용인 같은 4원인설을 통해서 변화를 설명하고, 그러한 것을 논리학을 통해서 체계화시킨 것이다.
이 정신이란 것이 그러면 플라톤과 구분하려면, 이 정신이란 것과 존재라는 것이 플라톤은 같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파르메니데스가 이 존재를 뭐라고 했나? '변하지 않고 있는 것'. 그런데 이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 어떻게 있는 것인가? 이게 개념으로 있는 것인가, 현실적으로 있는 것인가? 의 두 문제 중에서 아리스토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 속에 플라톤적인 요소가 얼마나 내재되어 있는가?
정신을 분석하는 이유가 뭘까? 존재를 분석하는 게 훨씬 나은데, 존재를 두고 정신을 분석하는 이유가 뭘까? 정신을 분석하는 이유는? '정신이 존재의 본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플라톤적인 요소이기도 하고, 그러면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일까? 이는 논리학의 핵심이다.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번째, 논리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언어학이다. 언어의 구조가 바로 정신의 구조가 되는 것이다. 언어의 구조가 또한 사고의 구조가 된다. 정신과 생각은 또 다르다. 정신은 하나의 빛이고 로고스다. 사고는 인간이 추론해내는 그런 과정을 이야기한다. 그 과정이 언어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리하여 언어와 사고를 분석하는 것이 논리학이 해야 할 역할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정신을 분석하는데, 그것을 언어를 통해서 분석한다 그랬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이 어떻게 있다는 것인가? 우리의 정신 자체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정신이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구조를 말로 표현해내는 것이 논리학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에게 있어서 학문이란 것은 미리 유추해보자면, 아리스토는 현실과 개별자를 우선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가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관조이다. 한 발자국 물러나서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학문의 역할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플라톤의 체계를 좀 더 역동성 있게 보완한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래서 논리학에 있어서 궁극적인 세 가지 요소가 있다 - 개념, 판단, 추리.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개념도 이미지와 이데아로서 참 거짓을 가릴 수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개념은 본질적인 무엇으로 그냥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판단의 영역은 개념과 개념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판단이 모여서 뭔가를 뽑아내는 것, 그것을 추리라 한다. 이것이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임과 동시에 논리학의 세 가지 기본 요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현대에 와서 '인식론'이 된다. 인식론은, '사물을 보고 표상을 하고(개념) 판단을 하고 그것에 대해서 뭔가를 말을 한다'는 것이며, 내가 그것에 관해 아는 것, 즉 지식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현대까지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해온 것은 내가 아는 것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었으며 이를 인식론이라 얘기를 한다.
이 인식론과 존재론의 차이는 무엇일까? 존재론은, 내 머릿속에 인식되어지는 것, 인식되어지지 않는 것의 전제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존재론이다. 어떻게를 물으면 인식론이 되며 방법론에 관한 것이 된다. 존재론은 있음에 관한 것이며, 만약 현상론자 같은 경우에는 내 눈앞에 분필닦이가 있어, 그런데 이것이 진짜로 있는지 없는지는 난 몰라, 그런데 내 속에 현상되고 표상된 거잖아, 표상된 것만 이야기하자는 거야. 표상된 것이 내게 어떻게 객관적으로 들어오는가가 인식론이고, 형이상학은 내게 표상된 것 이면에 무언가가 있다, 라고 말하고, 그게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이게 존재론이다. 존재론을 이야기할 때는 내게 보여지는 그 근거, 그 이면의 것, 전제로 하는 것, 본질적인 것, 이걸 물을 때 존재론이라 한다.
아리스토에게 있어서 논리학은 바로 형식을 다루는 것이면서 여기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다루기 때문에 실질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제 논리학의 기본 요소인 개념, 판단, 추리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자. 이건 정리를 좀 해두자.
개념 ; 진술도 아니고 판단도 아니고 참,거짓도 아니다(Q). 개념은 플라톤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것, 본질, 필연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개념에 대해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 무엇일까?
정의는 본질을 드러내는 말이며 올바르게 형성된 개념이다. 독자적일 것으로서 다른 것과 분명히 구별이 되어야 하며, 유와 종을 구별해야 한다. 아까 올바르게 형성된 개념이라 이야기하고 이 개념의 특징이 본질적인 것, 필연적인 것, 보편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우리 인간이 보편이고 여기 있는 식물이 보편이다, 결국 이건 종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이야기했어. 유와 종 중에서 왜 종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요하네스 철학사에 보면 숫자3을 유라고 하면 숫자는 많지, 그 중에서도 3이란 숫자를 말을 하려면 이 3이 무엇인가를 수많은 종류의 것들로부터 구별되는 것, 이게 바로 종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럴 때, 3은 4와 다른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3은 어떻게 정의할까? 첫번째 홀수라고 되어 있다. 그것말고도 책 속에 나와 있지 않은 여러 사례들을 스스로 정의내려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념을 알고 개념이 무엇인지를 말하려면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개념을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부터 모든 것들을 제대로 정의내릴 수 있도록 해야하며, 그래야지만 개념을 말할 수가 있고, 개념을 알아야만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이제 유와 종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유와 종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유와 종을 이야기한다. 본질이 보편적인 것일까, 보편적인 것이 본질일까? 본질이 우선인가, 보편이 우선인가? 본질이다. 누구나 본질이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는데, 본질이기 때문에 보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본질을 못 보기 때문에 그것이 보편이 아닌 줄로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우리는 지금 개념을 가지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이 개념은 범주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며, 아리스토는 10개의 범주를 이야기한다. 그 중에 하나가 실체이다. 그리고 이 범주 속에 모든 게 다 들어간다고 이야기한다.
ⓐ 실체
ⓑ 속성(9가지) ; 분량, 성질,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상태, 능동, 수동
실체는 지난시간에 무엇이라고 했나?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아까 개념도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한 개념 속에 이게 다 들어갈 수가 있다. 속성은 무엇일까? 속성은 항상 실체와 붙어 다니며 실체가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실체는 필연적인 것이지만 속성은 필연적인 것도 있고 우연적인 것도 있다. 사례를 들어보자. 어떤 존재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 개연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필연적인 것은 고유한 성질인데, 어떤 걸 고유한 성질이라 할까? 예를 들면, 바위가 바위일 수밖에 없는 성질. 나무가 나무일 수밖에 없는 성질, 나무가 파초와는 다른 것, 이런 것들이 필연적인 것으로서, 실체가 실체이게끔 드러내보여주는 가장 간단한 무엇이다. 우연적인 것은 파초 속에 있는 꽃의 색깔, 연약함, 거침, 푸른 색, 이런 경우이다. 똑같은 장미라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미는 장미고 해바라기는 해바라기이며, 장미가 장미일 수밖에 없는 특징이 있으며 이게 고유한 성질이다. 그러면, 본질이 실체와 다른 것은, 장미를 장미이게끔 해주는 고유한 성질을 드러내어주는 그 이면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틀어서 아리스토는 실체라 한다. 플라톤은 (이것)과 (이것)을 따로 떼어서 이야기하는데 아리스토는 (그것)과 더불어서 (이것) 전체가, (그것)이 (그것)이게끔 해준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이것)과 (이것)을 따로 떼어서 이야기할 수 없으며, 저번에 질료와 형상과의 관계를 이야기했는데, 형상이 있는 것은 질료가 있어야만이 형상이 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의 개념은 나중에 유명론으로 전개가 된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실재하는 것인데 아리스토는 실재가 아니라 이것 자체이므로, 본질은 이름으로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실체만이 학문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인 반면에 아리스토는 개연적인 이 모든 것들도 학문적인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연학, 물리학, 생물학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
이제 판단으로 넘어가보자. 판단은 개념과 개념 사이의 관계이다. 아래는 개념과 판단 사이에 들어가는 요소들이다.
(표시작)
(표끝)
판단은 아리스토에게 굉장히 중요하고, 중요한 이유가 뭘까?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판단이 없어도 상관이 없어. 그냥 개념. (있으면 돼). 근데 아리스토에게 판단은 개념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 이유가 뭘까? 아리스토에게 논리학이 왜 필요한가? 데카르트가 코기토를 도출한 이유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토대를 기반으로 한 학문의 확실성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학문에 대한 관심이 아리스토에게도 그대로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자연철학자들은 '무엇이지?'하고 물었다. 이것이 여기로부터 나왔네, 라고 하다가, 이것이 여기로부터 나온 또 이것을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다, 이렇게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고, 소크라테스의 방법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인식한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서 존재론적 체계를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여전히 존재론에 국한되어 있었고, 따라서 '개념이 무엇인가'를 계속 물었다. 인식론을 말한다 하더라도, 플라톤이 말하는 인식론은 '내가 어떻게 해서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으로서, 아리스토의 인식론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취한다. 존재론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은 교육을 통해서 도달하는 것이다. 그건 국가론에서 우리가 설명했던 바이다.
이것가지고 학문적 체계라고 할 수 없다고 본다. 아리스토에게는 우리는 현실적인 것이 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 현실적인 것을 위해서 본질적인 것이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플라톤의 이론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에 있어서 크게 도움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인가를 찾는 것이 더 우선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이것일 수밖에 없는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가 반드시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플라톤적 전제를 깐 상태에서 현실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며, 이 현실을 통해서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려 하고 이것이 바로 학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바로, 아리스토가 학문적 체계를 세우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으며, 판단의 중요성은 바로 진실된 '학문'에 있다고 보면 된다.
아리스토가 말했듯,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정신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고 이 정신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현실적인 것을 부정하고 정신적인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존재라는 것에 대해 전혀 부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존재라는 것이 워낙 변하는 것이니까 … 변하지 않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이야기하면 변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뭐가 뭔지 모르겠어. 이런 아이디어들이 있었다는 걸 우린 쭉 봐왔다. 그러므로 이 존재라는 것은 변화인데 이 변화가 있는 거야. 변하는 것이 있는 것, 이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럼 변하는 것이 어떻게 변하는 것인지를 설명해내어야만이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경험적인 것들이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오히려 현실적인 것이다. 이 현실적인 것을 위해 추상적인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추상적 사유가 무엇을 위해서 필요한가를 아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정신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존재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요하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17페이지 ; “근대에 와서 생각되고 있는 것처럼 독자적인 활동규칙에 바탕을 둔 정신의 고백이 아니라, 정신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맞서 있는 존재의 세계와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이제 학문이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왜 학문이 정신의 구조를 밝혀내는 것인가? 정신의 구조를 밝혀내는 것은 보편적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존재는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정신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신이라는 것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진리, 참이라고 하는 것이다. 존재는 변하기 때문에 거짓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감각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긴 하지만 잘못 경험하는 게 많다. 절대로 잘못 경험하지 않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것을 - 보편적인 것을 통해서 현실적인 것으로 가야 하는데, 이게 진리에 다가가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학문의 역할은 진리탐구이다. 그리고 아리스토에게 학문은 논리학이고 이 논리학은 바로 정신을 분석하는 것이다.
아까 내가 혁기한테 물었을 때 혁기가 '믿는 것'(습관적 믿음)이란 얘기를 했는데, 믿음이란 것은 학문에 영역에서 어느 정도의 (범위)에 있을까. 내가 본다, 뭘 봤어. 우리가 앎에 이르는 단계. 처음에 눈으로 봐. 이게 내 눈에 핸드폰이 들어왔어. 그런데 도무지 나는 나를 믿을 수가 없어서, 핸드폰이 헛것이 보이며 이건 틀림없이 핸드폰이 아닐 거야, 라고 할 거야. 내 눈에 봤다고 해서 있는 게 아니며, 중요한 건 믿어야 한다는 거야. '있네, 이것이 핸드폰이네' 라는 단계가 믿음이야. 지각이 있고, 그다음에 믿음의 단계가 있고, 그 다음에 확인이야. 이게 참에 이르는 단계야.
그런데 우리는 확인을 하지 않고 믿음에 그치는 경우가 되게 많아.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확신, 검증되지 않은 확신을 진리라고 착각하는 순간 엄청난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에서) 주의를 기울였다. 들어오는 지각되는 것(감각)은 수동적이다. 난 그것을 그냥 받아들인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하는데 그 전에 믿음의 단계가 들어간다. 확인을 거쳐 지식이 된다. 이런 단계를 가지게 되는 건데, 그래서 형이상학에서는 진리에 관해서 (I) 말과 사실 사이의 일치 (대응설) 를 주장할 수 있다. 이 사실이 존재이며 말은 이 존재가 있다라는 뜻이다. 휴대폰이 존재고, 말은 '휴대폰이 여기에 있네'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이게 진리라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이게 전통적 진리개념인데,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게 문제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이 뭔가?' 그러면 결국은 형식적인 논리적 구조 속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라는 게 된다. 학문은 '니가 도통했는지 내가 어떻게 아나?' 증명을 해 보여야 된다. 학문의 영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성이다. 객관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학문의 영역 안에 들어올 수 없다.
문제는 ; 어떻게 우리는 그 진리가 진리임을 확인할 수 있을까? 존재한다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고 … 거기까진 동의해. 근데 어떻게 그것을 확신하는가? 아리스토는 진리는 개념에 있지 않고 현실에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말고 내 앞에 있는 사물을 들여다보라고 이야기한다. 로고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세계질서, 우주, 이성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게 플라톤에 와서 이데아가 되며 이것이 개념이며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이게 바로 현실이다. 아리스토에게 있어서는, 플라톤에게 있어서의 로고스는 현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플라톤의 현실로서의 로고스, 개념으로서의 로고스가 아리스토에게 와서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있다. 하나의 방법. 아까 논리학에서, 정신이라는 것은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은 존재의 모습으로 드러났을 때 실체가 되는 것이다. 정신은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꿈틀거리는 질료가 될 수 있다. 형상과 질료가 아리스토에겐 섞여 있으므로 이데아가 질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칭하는 것]은 방법, 사고과정.
따라서,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의 로고스는 존재,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의 로고스는 질서=역동성=움직임=불=그래서 잠재적인 어떤 것. 그런 개념으로 받아들인 플라톤의 로고스. 이렇게 플라톤에서 아리스토로 넘어오게 되며, 사고과정이 되기 때문에, 사고 과정 속에 형식이 있고, 이 형식 “ A는 B이다 “ 가 로고스다. A와 B 속에 내용이 들어간다. 그게 구체적인 현실이며 내용이 들어갈 때 이것이 참과 거짓으로 판단이 내려진다. 따라서 아리스토에게 로고스는 현실이 드러나게끔 해주는 방법이자 과정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에게는 개념 또는 판단을 구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표시작)
(표끝)
우리는 보통 사과는 빨갛다. 사과는 새콤하다. 사과는 달콤하다. … 여기서 볼 때, 어떤 게 보편인 것 같나? 얼핏 뒤의 것이 속성인 것 같이 보이지 않는가? 실제로 빨갛다는 것 속에 사과가 들어와 있다. 소크라테스는 개별자이고, 인간은 보편자이다. 사과는 빨갛다고 했을 때, 그때의 사과는 '이' 사과로서, 모든 사과가 아니다. 내 앞에 있는 '이' 사과이므로, 이것은 개별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할 때,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에 있어서 개별자는 보편자보다 덜 본질적인 것이다. 그래서 실체를 이야기할 때 다음과 같이 한다.
ⓐ 제1실체 = 개별자(주어)
항상 드러나는 것은 감각적인 것, 내 눈앞에 있는 것부터 드러난다. 그래서 제1이다.
현실적인 것이 논리적으로 더 앞선다. 여기서 '논리적'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한 것, 기억나지?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다. 인간이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이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편자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 제2실체 = 보편자(술어)
우리는 이제 삼단논법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여기서 개념은 '소크라테스', '인간', '죽는다'.
여기서 '인간'은 소크라테스(소명사/소개념)와 죽는다(대명사/대개념)를 연결해주는 매개개념(중명사/중개념)이 된다. 아리스토는 여기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한 것일까?
ⓐ 플라톤과의 차이점 : 아리스토에게는 중개념인 인간이 가장 중요하며 이것이 없으면 삼단논법은 성립되지 않는다. 아리스토가 이걸 중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플라톤의 문제점은 매개개념, 이것과 이것과의 연결고리를 설명하지 못한다.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는 질료와 형상, 작용인과 목적인을 통해서 변화를 이야기했잖아. 논리학도 이걸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야. 여기서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죽는다'라는 거야. 모든 인간은 죽는데, 소크라테스도 죽고, 그러면 모든 인간이 다 설명이 가능한 거야. 이런 개념. 따라서 플라톤과 대비되는 것은 중개념이다.
ⓑ 플라톤과의 공통점 :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것은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니까 전제를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대전제, 소전제, 결론일 때, 전제가 옳으면 결론이 옳다는 논리학의 기본공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거짓된 모습이 실제로 거짓이라 하더라도 참된 내가 있다면 이 거짓된 내가 하나의 변화고, 각각의 나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존재가 인정을 받는 것이다. 만일에 본질이 엉터리라면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거짓이며,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영혼이라는 게 있어서 그게 나를 딱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이걸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다. 전제가 있다라는 확신, 이것이 바로 플라톤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방금 우리가 중명사를 이야기하고 (소명사) 대명사를 연결해준다고 했는데, 이를 아리스토 이론에 따르면 관여사상이라고 한다.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개념 사이에 연결해주는 것, 이것이 바로 관여이며, 이 관여를 통해서 우리는 '현실적인 것이 가능적인 것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는 것이 성립하게 되는 논리학의 완성단계로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가능태와 현실태에서 나왔다. 원래는 논리학이 먼저 나온다. 그 후 형이상학을 말하게 된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학문의 본질에 대해 정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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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로부터 나오는 인식 ; 이 근거가 바로 본질이다. 그리고 근거로부터 나오는 인식은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으로서 '본질직관'이며, 본질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철학적 입장이 완전히 달라진다. 정신의 구조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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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들과 관련된 명제 ; 존재의 구조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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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구조와 존재의 구조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것이 학문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사태들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학문이며 철학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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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아리스토는 철학에 대한 정의를 굉장히 섬세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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