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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본 목차

1/ 과학에서 경험주의와 실증주의

2/ 경험주의와 실증주의의 몇 가지 문제

3/ 경험주의에 대한 몇 가지 대안들 (과학사회학)

4/ 규칙준수로서 합리성 ㅡ 문화, 전통, 해석학 (윈치) 

5/ 비판적 실재론과 사회과학 (바스카) [링크 바로가기]

6/ 근래의 발전에 대한 논평 [링크 바로가기]

 

(이하 『사회과학의 철학』의 피터 윈치 부분에 대한 내 요약이며 옆 컬럼에 내 의견이 게시될 것이다.)

idea 독서

철학자는 개별의 언어적 혼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의 성질 그리고 언어와 실재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언어 없이 외부세계에 접근할 수 없으며,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이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갖는 경험의 형태를 정해준다. 그러므로 상이한 언어들은 상이한 실재들을 정의한다. 우리는 '상이한 문화들은 상이한 실재들<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각각의 언어, 즉 세계를 보는 각각의 방식은 세계를 납득할(intelligible) 수 있게 만들고자 하는 상이한 방식들이며, 철학자의 업무는 상이한 언어들이 이것을 수행하고자 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과학의 임무는 사람들이 그들의 사회세계에 부여하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

 

언어, 게임, 그리고 규칙

 

사회과학의 대상에 관해 생각할 때, 윈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언어의 사용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결정하는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중요한 것은, 규칙, 규칙 준수, 언어게임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개념이다. 이해는 우리가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단어를 '올바른(correct)'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의 사안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늘 해석적 과정에 연루되지만, 어떤 최종적이고 확정적인 해석에 도달할 수는 없다. 단어에 대한 단일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윈치는 우리가 'course'라는 단어의 사용을 지배하는 규칙을, 적어도 암묵적으로라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단어를 올바르게 또는 그릇되게 사용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윈치는 규칙의 개념과 규칙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이유와 인과적 설명의 문제(#)로 되돌아간다. 

 

i) 첫번째 요점은 우리가 규칙을 따르는 올바른 방식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릇된 방식도 찾아낼 수 있다는, 즉 우리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규칙을 준수한다는 생각은 '실수를 저지른다'는 생각과 논리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에 대해 그가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수행하는 것을 올바르게 수행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 삶 전체를 언어 사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수행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러므로 우리의 삶, 우리의 언어, 우리의 사회세계를 규칙 준수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적어도 두 가지 방식(올바른 방식과 그릇된 방식)으로 규칙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회과학에서 인과적 설명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유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늘 '평가적'(evaluative)이라는 것을, 즉 규칙을 올바른 방식으로 적용하는가 아니면 그릇된 방식으로 적용하는가를 우리가 묻는다는것을 의미한다. 인과적 설명은 평가가 아니라 (잠정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므로, 인과적 설명이 부적절한 사회과학은, 사람들이 규칙을 늘 동일한 방식으로 지킬 것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에, 예측을 할 수 없다.

 

ii) 두번째 요점은 모든 행위가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가 의미 있는 것이거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라면, 그 규칙을 어떻게 준수하는가를 누군가가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베버비판으로 이어진다.

 

실증주의가 중립적인 관찰언어, 즉 '과학적' 언어를 암시하는 반면, 의미 있는 행위에 함축된 사회적 규칙을 해명하는 데 관심을 갖는 사회과학은 상대주의를 함축한다. 상이한 사회들, 상이한 문화들은 그것들 자체의 삶의 형식들을 가지고 있으며, 중립적이거나 다른 언어들을 번역해 넣을 수 있는 우선적인 삶의 형식이나 언어는 없다. 

 

여기서 내가 칸트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이다. (어떻게 다른가?) 사회세계에 존재하는 것과 사회 세계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같은 것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 통로는 없다. 윈치는 우리가 연구하는 대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는 대상이 있다는 감각을 우리가 창출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한다. 규칙에 대한 상이한 관계들이 있는지의 여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관계의 인식에 어떤 규칙을 적용하는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윈치는 원칙적으로 우리는 과학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언어들을 그것으로번역해 넣고 비교할 수 있는 언어, 즉 실재에 대한 특권적 접근 통로를 가진 언어, 오늘날 '메타-서사'라고 부를 수 있는 언어에 의지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윈치는 다시 비트겐슈타인에 의지한다.

 

: (비트겐슈타인은) 일반적 형식의 명제들이 있어야 한다는 전체적인 생각을 거부하게 되었다. 그는 언어가 가질 수 있는 무한하게 많은 서로 다른 사용법을 강조하고, 이러한 상이한 사용법들이 모두 어떤 공통적인 것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공통적인 것을 갖는 것도 아님을 보여주고자 시도했다. (...) 또한 그는 수많은 상이한 언어 사용법이 있는 만큼 '실재와의 일치 또는 불일치'에 해당하는 것도 수많은 형태를 갖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것을 문제가 되는 언어 사용법에 대한 자세한 탐구에 선행하여 주어진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시도했다.

 

각각의 언어는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에 관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그 자체의 기준, 규칙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접근 통로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은 삶의 형식, 즉 상이한 문화들이 말하는 언어, 세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하는 규칙이라고 윈치는 말한다. 모든 실재들은 그 실재들을 그 자체로 정의하는 언어의 맥락 속에 실재할 뿐, 진짜 실재에 대한 접근 통로를 가지고 있는 super-language는 없다.

 

이런 입장은 두 가지 결과로 이어진다.

 

1) 삶의 형식들을 번역해 넣고 외부세계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에 입각하여 비교할 수 있는 메타언어가 없다면(인식론적 문제), 또는 삶의 형식들을 그것들의 합리성에 입각하여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메타논리가 없다면, 서로 다른 삶의 형식들에 관해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메타윤리도 없다.

 

이런 유형의 논쟁은 자연과학철학에서 쿤의 패러다임 개념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질문과 유사하다.(우리는 패러다임들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인지 판단할 수 있는가?) 이것은 윈치의 논의에 있어서, 우리가 다른 문화를 과연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는가, 우리는 한 삶의 형식에서 다른 삶의 형식으로 의미 있는 방식으로 번역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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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와 인과적 설명의 문제 : 독서시 유심히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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