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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실질적인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을 명백히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형용사로서 '의식적인' 은 인간들(그리고 유기체와 아마도 다른 시스템들)과 그들의 상태들(또는 사건이나 과정과 같은 것들)에 적용된다. 그래서 당신과 나는 의식적인 생명체들이지만, 아메바나 나무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순간에 의식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깨어 있거나 방심하지 않을 때 의식적이지만, 깊이 잠들거나 혼수 상태에 빠질 경우 의식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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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한 사물들, 사태들, 사실들에 대해서도 의식하거나 자각하낟. 이런 종류의 경우들에는, "의식하는”과 “자각하는”이 거의 동일한 뜻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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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의식적인”을 또한 사건들, 상태들, 과정들에도 적용한다. 고통, 간지러움, 심상들과 같은 친숙한 감각 상태들이나 사건들은 의식적 상태와 사건들이다. 분노, 즐거움, 슬픔과 같은 감정들은 또한 의식적일 수 있으며, 우리의 믿음들, 욕구들, 희망들, 그리고 기억들의 많은 경우들도 또한 의식적이다.
그러면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의식적인” (이것을 “주체의식”이라고 부르겠다)의 용도와 그들의 상태에 적용되는 “의식적인” (이것을 “상태의식”이라고 부르겠다) 의 용도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한 인간의 한 상태는, 그 사람의 그것에 대해 자각하거나 의식할 경우에만, 의식적 상태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의 주어진 상태가 의식적 상태라면 그 상태에 있는 그 사람은 그것에 대해 자각해야만 한다는 것은 참인 것 같다. 그러나 당신이 한 상태를 자각한다면 그 상태는 의식적 상태라는 것은 분명히 참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의 나이와 몸무게를 자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나이와 몸무게가 의식 상태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다. [당신은 자각한다, 감응적proprioceptive 자각들을. 그런데 이러한 신체적 상태들은 의식 상태들이 아니다.]
상태의식과 주체의식 사이의 관계는 심적 상태들에 한정할 때 보다 나은 의미를 제공할 수 있다. 즉 하나의 심적 상태는 그 상태에 있는 주체가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그것에 대해 자각할 때에만 의식적인 심적 상태이다. [* 의식적인 상태는 자각되어야 한다=O. 자각되는 모든 것은 의식적 상태이다=X. *]
1/ 의식의 국면들
ㄱ. 현상적 속성들 혹은 “감각질”
당신이 하나의 잘 익은 토마토를 바라볼 때, 당신은 한 다발의 시금치를 지각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 그것의 색깔을 지각한다. 만일 당신이 토마토를 으깨고 그것에 코를 가까이 갖다댄다면, 거기서 즙을 낸 레몬의 냄새와는 다른 어떤 냄새가 날 것이다. 잘 익은 빨간 토마토를 보거나, 가솔린 냄새를 맡거나, 팔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감각적인 심적 사건이나 상태들은 독특한 “현상적” (혹은 “현상학적”) 특징들을 갖는다. 그것들은 느끼거나 감각된 특질들로서, 보통 그것들에 의해 어떤 유형의 감각들인지 확인된다. 심적 상태들의 이러한 감각적 특질들을 “맨 느낌” 혹은 “감각질”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때로는 감각질의 개념은, "당신이 어떤 질적 특성을 가진 한 심적 상태에 있을 때, '그 상태에 있음으로써 그것이 무엇인지 느끼게 되는 어떤 것'이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설명된다.
그러한 질적 감각의 특성들은 통상적으로는 감각으로 분류되지 않는 심적 상태들에도 나타나는 것 같다. 분노, 즐거움, 후회, 시기, 자만 등은 비록 그것들이 그것의 질적 특성만으로는 유형적으로 분류되진 않을지라도, 어떤 독특한 질적 느낌들을 갖는 것 같다. 예를 들면, 하나의 감정을, 그것이 느껴진 질적 특성들에만 기초해서는 그것이 분노인지 부러움인지 질투인지 혹은 그 세가지 복합된 것인지 분류하는 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감정의 모든 예들이 하나의 독특한 감각 특성을 동반할 필요는 없다. [감정 중에는 독특한 감각질을 지닌 경험을 갖는 상태가 아니라 어떤 믿음이나 태도들을 갖는 상태가 존재한다. 가령, '연방 정부의 계속되는 예산 적자 때문에 불행하다.' -> 그 나라의 경제에 나쁘다는 믿음,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태도.] [그리고 모든 믿음들이 특별한 현상적 느낌을 공유할 필요도 없다.]
심적 상태들의 현상적 특성에 대한 문제는 의식적인 심적 상태들, 즉 주체가 자각하는 심적 상태들에 한해서만 관련된다. 하나의 출발점으로서 어떤 믿음들을 고려해 보자.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믿음의 모든 의식적인 사례들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나 혹은 한 사람의 경우 다른 시간들 사이에서도, 이 내용을 가진 믿음들의 유일하고 특수한 질적 특성에 의해 규정되는가? 이 물음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야 한다. 그런 믿음을 가진 어떤 사람은 조지 워싱턴에 대한 하나의 심상을 갖는 한편, 다른 사람은 단지 그의 마음 안에 배회하는 “조지 워싱턴”이라는 다어만을 가질른지 모른다. 또 다른 사람은 그 믿음을 가질 때 어떤 특별한 심상이나 어떤 종류의 현상적 발생도 갖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다음과 같은 더욱 일반적인 물음이 있다. 모든 발생적인 믿음들, 우리가 능동적으로 마음에 품은 믿음들은 모두 어떤 특수한 '믿음-같음'이라는 현상적 특성을 공유하는가? [A를 믿고 B를 믿고 C를 믿는다는 사실에 있어서, 이 모든 믿음에 공통되는 감각질 Qb도 있다고 할 때, Qb를 발견하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것을 믿게 되고,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것을 믿지도 못하게 된다는 그러한 Qb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 같다.]
어떤 특수한 현상적 특성도 갖지 않는 의식적인 심적 상태들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들”이라고 부르는 심적 발생/사건들은 현상적 속성들을 소유하는 것들로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현상적 특성의 개념과 무엇 같은 것이 있음의 개념은 별개의 것이다. 즉 어떤 것을 믿거나, 어떤 것에 대해 판단하거나, 어떤 것을 의심하거나, 어떤 것을 원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의 많은 예들은 어떤 현상적인 감각적 특질도 갖지 않는다(# 믿음, 욕구, 의도 등의 지향적 심적 상태의 유형들).
ㄴ. 주관성 : 사밀성과 특수한 인식적 접근
“매개되지 않은” 혹은 “직접적” 접근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논란을 일으키는 문제이다. 여기서는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다음 세 가지의 특징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첫째, 우리의 지식은 다른 사물들에 대한 증거 ㅡ 우리의 말이나 행동에 대한 관찰,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한 것, 물리적 혹은 신경 생리적 정보와 같은 것들 ㅡ 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의식 상태들에 대한 우리 지식의 첫번째 특징은, 당신들이 알거나 믿고 있는 어떤 다른 것에 대한 증거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당신 자신의 현재 심적 상태들에 대한 당신의 지식은, 그러한 지식의 소유에 관한 당신의 주장이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제삼자의 증언에 의해 압도당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특별한 권한을 갖는다.
셋째, 의식 상태에 대한 일인칭 지식과 삼인칭 지식 간에는 비대칭성이 있다. (# 그리고 이러한 일인칭 특권의 인정은, 의식적 마음의 완전한 투명성 /* 그 주체의 마음은 자신에게는 완전히 투명한 반면에, 다른 사람에게는 전체적으로 불투명하고 접근할 수 없다는 더욱 강한 주장 */ 을 주장하는 데카르트주의Cartesian의 극단적 논제를 반드시 전제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논제가 주체가 자신의 현재 의식 상태들에 관해 틀릴 수 없다거나 전지전능하다는 주장을 함축하진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식과 관련하여 언급한 “접근할 수 있는 권한access"은 또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간단하게나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논의해 왔던 접근의 권한은, 그 주체가 어떤 것은 '자각하거나 알게 됨'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인식적 권한이다. 그리고 권한의 두번째 의미는, 그것을 감각의 의식(block이 “현상적 의식”이라고 부른 것)과 대조시키기를 원했던 block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서, 그 주체의 언어적 보고들과 그녀의 행위를 지도할 “수행적 모듈”을 위하여 의식 내용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당신의 감각 체계가 P(당신 앞에 녹색 침대가 있다는 것)라는 내용을 가진 한 편의 정보를 나타낸다고 가정해보자. 그 정보 P가 언어적 보고들(당신은 “나는 내 앞에 있는 녹색 침대를 본다”라고 대답한다)을 위해 사용되거나 또한 당신의 행위(예를 들어, 당신은 문 쪽으로 가면서 그 침대와 부딪치지 않게 돌아서 걸어간다)를 지도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면, 이 정보를 가진 상태는 “정보 접근-의식적”이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설명적-이론적 작업을 하기 위해 의도된 개념에 대한 매우 대략적인 특징 규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논의가 나타내는 일상적인 심리학적 개념틀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정보 접근 권한의 이러한 개념이 우리의 인식적 권한의 개념과 관련되는 어떤 방식들을 알 수 있다. 즉, 만일 한 심적 상태가 갖는 내용이나 정보가 우리에게 인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우리가 그러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고할 수 있고 또한 이 지식은 우리의 행위들을 지도할 수 있다. 이것의 역도 참인가? ㅡ 한 상태가 정보 접근-의식이라면, 그 주체는 우리가 논의했던 종류의 특별한 인식적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 도출되는가? (# 내가 읽은 페이퍼와 관련시켜 보자.) 어떻게 감각질의 의식은 블록이 의미하는 바의 정보 접근 의식과 관련되는가?
[# 나는 수업 중간 시간에 다음과 같은 pointless하지만 절실했던 메모를 해두었다. : 일인칭적 특권이 존중받을 수 있는 상황은 어쩌면 매우 이상적인 상황이 아닐까. 우리는 타자와 관계하면서 타자가 어떻게 느끼든지 자기의 타자에 대한 주장권을 관철한다.]
ㄷ. 주관성 : “관점”
어떤 철학자들은 특별한 일인칭 '관점'이나 '전망'의 개념을 의식의 본질적 특성으로 도입하여 왔다.
“만일 물리주의가 옹호된다면, 현상적 성질들은 물리적 설명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의 주관적 특성을 고려할 때, 그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모든 주관적 현상은 본질적으로 단일한 관점과 연관되는데', 하나의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이론은 불가피하게 그 관점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성/정신의 주관적 측면들은 그 생명체 자신의 관점으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다......, 반면에 물리적인 것은 단순히 하나 이상의 관점들로부터 외부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by nagel
Nagel은 심적 현상의 주관성은, 그로부터 이 현상들이 이해되는, "단일한 관점”의 존재와 본질적으로 연관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논의했던 “의식 상태는 바로 그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이 무엇과 같은지 경험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의미에서 현상적(혹은 현상학적) 특징들을 갖는다”는 주장과도 들어맞는다. 어떤 주체와도 무관한 “무엇과 같은 느낌/경험(What it's like)"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어떤 주체에게' 그것이 무엇과 같은 것일까의 문제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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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에 대한 이야기 1 : 임의의 의식 상태에 대하여 그 상태를 갖는 하나의 주체가 있으며, 의식의 내용은 사물이 그 주체에게 나타나는 방식을 구성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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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에 대한 이야기 2 : 각각의 의식 상태에 대하여 그 의식 상태를 갖는 하나의 '단일한 '주체, 단일한 인격이 있다는 생각이다.
(끝)
[일반적으로 지향적 심적 상태들과 연관된 어떤 깊이있고 흥미있는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긴 하지만, 특별히 의식적인 심적 상태들에 관련된 것은 아닌, 심성의 주관성의 측면을 저자는 다루었다.]
2/ 내적 자각으로서의 의식
어떤 설명에 의하면, 주체가 그 상태에 있다는 “상위-질서”의 사고나 지각이 있는 경우에만, 한 심적 상태는 의식적 상태이다. 그렇다면 의식은 일종의 “메타 심리적” 상태, 즉 다른 심리 상태에 대한 심리적 상태이다. 이에 따르면, 한 생명체는 이런 의미의 상위 질서 심리 상태들을 가질 수 있는 경우에만 의식적 생명체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감각 상태들에 있어서조차, 전형적으로 의식적이지 않은(상위-질서 사고를 동반하지 않는) 심적 상태의 존재를 허용한다. (# ★) 그렇지 않다면 심적 상태의 상위-질서들의 무한한 진행이 끝없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능주의자 견해에 의하면, 일차-질서 지각들은 그것들의 인과적 역할이나 기능들에 의해 설명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옳다면, 의식을 일차 질서 지각과 다른 심적 상태들에 대한 내부적 감지 장치로 간주함으로서, 의식에 대한 유사한 기능주의적 설명을 적절히 시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러한 설명은 다른 감각 통로들로부터 나오는 이질적인 지각들을 조직하고 상호 조정함으로써 의식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고, 의식의 통일성에 관한 기능주의적 설명을 산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깨어 있는 삶의 모든 순간에서 모든 종류의 감각 자극들을 끊임없이 받는다. 한 유기체의 수많은 감각과 지각들을 적절히 조정하고 통합하는 한편 특별한 관심 하에서 그것들 중 일부를 선택하는 의식의 역할은 아마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의 힘들에 대처하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암스트롱적인 접근이 고도의 유기체들에 있어서 의식의 창발에 관한 진화론적 설명과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기능주의와 창발)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주관적 측면(ㄴ. ㄷ.)에서 검토할 때 부적절하다. 하나의 고통은 당신이 그것을 자각할 때에만 의식적인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이 충분히 적합하다. 그러나 당신이 어떤 고통을 자각할 때, 당신이 자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능주의에 따르면, 고통의 인과적-기능적 역할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잘못이다.(아래C)
의식을 다른 심적 상태들에 관한 상위-질서 사고들을 갖는 것으로 간주하는 의식의 일반적 모델에 따르면, 상위-질서 사고들을 가질 수 있는 생명체들만이 의식적일 수 있다는 것과, 이것은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동물들을 의식의 영역으로부터 배제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나는 M상태를 가진다”를 사고하려면, 최소한 자신을 지칭할 수 있는 능력, 자아의 개념이 필요하다. 이 개념을 만들 능력이 어떤 종류의 능력들을 포함하는지 분명치 않다. 더욱이, "나는 M상태를 가진다”를 사고하려면, M에 대한 개념이 필요하다.] 의식을 설명하는 상위-질서 사고는, 세련된 종류의 지향적 상태들을 갖기 위한 능력을 의식적 상태들을 갖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상위-질서 사고 모델은 의식 그 자체보다는 '자기-의식'에 관한 설명을 위해 더 적합하다. 상위-질서 사고 모델이 아니라, 의식에 의한 입장은, 위에서 설명한 ㄴ. ㄷ. 에 더 적합하다. 더욱이 위에서 설명했듯, '의식적인 상태는 자각되어야 한다=O. 자각되는 모든 것은 의식적 상태이다=X.'이다. 즉, 자각(=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이차-질서 사고를 갖는 것)과 의식적 상태는 동급이 아니다. ]
(아래C) 암스트롱이 말한 것처럼, 그 체계에 유용한 총체적인 정보를 더욱 효과적으로 조정하고 통합하기 위해 그 체계를 통한 정보의 흐름과 진행을 지켜보며 이 정보를 사용하는 내적인 탐지 중심부가 있을 것이다. 그런 모델이 인간들 안에서 실현될 수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 실현될 수 있는지는 많은 부분 철학자들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다루는 경험적 문제들이다. 그러나 한 체계가 일차-질서 정보 처리의 지위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고 사용한다는 생각은, 어떤 특별한 신비로 우리에게 나타나진 않는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철학적으로 당혹스러운 개념은 아니다.
더욱이 인간들 안에 '단일한' 탐지 메커니즘, 즉 우리 안에 진행하고 있는 모든 일차-질서 인지 과정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하나의 중심 행위자가 있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모든 하위 체계들을 감독하는 단일한 초월적 탐지자나 중심 권위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활동을 상호 조정하고 정보를 변경하는 등 다소 느슨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 서로가 협동하는 많은 탐지 중심부들이 있다.하나의 단일한 중심 탐지 체계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각기 우리들 안에는 하나의 “에고”나 자아, 즉 우리의 모든 의식 상태들을 갖는 단일한 주체가 있다는 생각과 상응한다. (주석 – 마음이란 단일한 통일적 행위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위원회와 실지로 더 유사하다는 생각이나, 의식이나 정신의 단일한 중심부란 없다는 생각은 M. Minsky, The Society of Minds ; Dennett, Consciousness Explained 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자기-의식에 대한 기능주의적 접근에 관해서는 A Functionalist Plea for Self-Consciousness )
그러나 우리는 단일한 의식 주체를 믿지 않는가? 만일 우리의 모든 인지 상태나 정보 처리 상태와 과정들을 탐지하는 단일한 관찰자/감시자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view [* 잡다한 것의 통일 + elusive *] 을 물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방식에서든 우리의 두뇌 안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할 것을 강요하는가?
만일 신경생리학이 우리의 두뇌 안에서 중앙 탐지 기능을 수행하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물리주의가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의식의 통일적 주체(=ego)와 같은 것은 실제로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해야 하는가? [* 그것을 과학적-물리주의적 한계로 해석할 것이냐, 의식의 통일적 주체 개념을 폐기할 것이냐. *]
3/ 의식은 물리적 속성들에 수반하는가?
[의식의 주관성에 대한 한 설명을 갖는 것은, 특수한 일인칭 인식적 권한을 갖는 의식은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사실들에 수반할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가능해진다.] 그러면 의식의 현상적 국면은 무엇인가 ? 감각질은 유기체들의 물리적-생물학적 요소들에 수반하는가 ? 당신은 당신의 c-신경 섬유가 발화할 때 고통을 느끼는가 ? 당신의 물리적 복제물의 c-신경 섬유가 발화할 때 그녀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필연적인가? (우리의 세계에 고통들과 그외의 다른 질적 상태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은 물리적-생물학적 영역에서 진행되는 것에 규칙적이고 법칙적인 방식으로 의존한다고 상상해 보자.) 모든 면에서 이 세계를 물리적으로 복제했으면서도 아무런 현상적 심적 상태들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가능 세계가 있을까? 많은 철학자들은 감각질이 물리적-생물학적 사실에 수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크립키는 [신이 분자운동을 창조한 후에 열을 창조하기 위해 어떤 부가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 분자 운동이 존재하게 될 때, 열 또한 존재하게 된다는 것과는 달리, 고통이나 고통의 느낌에 대응하는 C-신경 발화를 만들기 위해, 신이 단지 C-신경 발화의 창조만이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어떤 것을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ㅡ Naming and Necessity.]
만일 크립키가 옳다면, 모든 물리적 측면들에 있어서 우리의 세계와 완전히 동일하면서도 심적 측면들에서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가능 세계들이 존재한다. 첫째, 다른 물리적-현상적 상관 관계들을 가진 세계들이 있다(C-신경 발화는 고통이 아니라 가려움과 연결된다). 둘째, 아무런 현상적 심적 사건들도 존재하지 않는 “마음없는 세계”들이 있다. 후자의 세계에서는, 당신이나 나와 정확하게 유사하고 우리처럼 행위하면서도 고통, 가려움 등의 아무런 경험도 하지 않는 좀비들이 있다.
그러나 크립키가 옳은가? 신이 C-신경 발화를 창조하지만 고통을 창조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감각질 수반에 반대하는 다양한 생각들을 살펴보자.
ㄱ) 고통의 개념과 C-신경 발화의 개념 사이에는 아무런 개념적 연관도 없다(둘 사이엔 아무런 의미 연관도 없다). 그러므로, 한 유기체가 고통이나 어떤 다른 감각을 경험하지 않고도 그의 c-신경이 발화되었다는 주장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그러나 이 논의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열과 분자운동 사이에도, 물과 H2O사이에도 아무런 개념적 연관이 없다. 그러나 분자 운동이 존재하지만 열은 존재하지 않거나 H2O는 있으나 물은 없는 가능세계는 없다. 이 대답을 고려함에 있어서 우리는 고통과 C-신경 발화의 경우가 후자의 경우들과 적절한 유사성을 갖는지 물어야 한다.
ㄴ) "전도된 스펙트럼”이 가능하다. (이것은 아래 레포트 관련된 부분에서 다룰 것이다.)
ㄷ) 우리는 정상적으로는 그러한 가능성들을 상상하지 않는다. 즉, 당신과 내가 관련된 유사한 신경새일적 상태들에 있을 때, 우리는 동일한 감각을 경험한다고 생각한다.그러나 그런 가정은 정확히 말하면 “감각 상태들은 물리적 조건들에 수반한다”는 가정이다. 또한 신경 상태들과 감각질 사이에 법칙과 같은 규칙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감각질의 수반을 가정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그런 법칙들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런 법칙들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들을 알 수 있는가?
ㄹ) 이러한 주장들이 함축하는 바는, 감각질은 유기체의 기능적 속성들에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능적 속성들은, 대략적으로 말하면, 한 유기체가 특정한 행동적 결과를 산출함으로써 주어진 감각적 입력에 반응하는 속성이다. 당신과 당신의 물리적 복제물은 동일한 기능적 속성들을 공유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기능적 속성들은 물리적 속성들에 수반한다. 그 경우 만일 감각질이 기능적 속성들에 수반한다면, 그것들은 물리적 속성들에 수반할 것이다 (# 기능적으로 다르면서 물리적으로 같을 수 없다). 이것은 감각질이 물리적 속성들에 수반한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사실상 그것이 기능적 속성들에 수반한다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 감각질을 비물리적인 것으로 본다면, 수반이 위배되면 물리주의가 아니다.)
[* 감각질의 물리적 수반에 반대하는 논의들은 상상 가능성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감각질 수반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우리 세계에서 감각질의 전도에 관한 인식적 가능성을 쉽게 제거할 수 없고, 따라서 감각질과 신경 상태들 사이의 법칙적 관계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게된다. 또한 주장된 상관관계들은, 신경 상태들을 '감각질 자체'가 아닌 감각질의 언어적 보고와 연관시킬 뿐이고, 이것은 이 상관관계들로부터는 '감각질 자체'의 전도 문제가 해결될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he case against qualia supervenience는 결정적인 논증을 구성하는 것들은 아니다.*]
(나는 이것과 비슷한 문제를 레포트에서 다루었다. 여기서 감각질과 토대적 신경 상태들 간 상관관계들의 법칙적 필연성ㅡ물리법칙이 우리와 유사한 세계에서의 필연성ㅡ과 형이상학적 필연성ㅡ물리법칙이 우리와 유사하지 않은 가능세계에서의 필연성ㅡ의 구별이 중요하다. )
우리의 세계와 정확히 유사하지만 우리가 보는 사물들을 그 세계 사람들이 바라볼 때 우리가 경험하는 색깔과 정반대의 색깔을 경험하는 그런 세계를 상상해보자. 거기서 양배추는 실제로 녹색이고 토마토는 실제로 빨간색이지만, 그곳 사람들은 양배추를 보며 빨간색을 경험하고 토마토를 보며 녹색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은 양배추를 “녹색”이라고 말하고 토마토를 “빨갛다”고 말한다. 이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기능적으로는 똑같이 돌아갈 것이지만, 감각질은 우리와 다르다. 그러므로 감각질은 심적 속성이면서 기능적 정의에 의해 포착되지 않으며, 기능적 속성에 수반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입증된다.
위와 같은 세계가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직감'은 실제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세계와 유사한 기초 물리 법칙들이 통용되는 실제로 가능한 세계들만 고려한다면, 위와 같은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따라서 위의 가상적 상황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황이 물리학적으로 가능한가 어떤가를 정밀히 조사하는 게 중요하다.
(끝)
그러면 감각질 수반을 옹호하는(in favor of) 논의들이 있는가? It would seem that the only positive considerations are broad metaphysical ones that might very well be accused of begging the question. Say, you are already committed to physicalism(말하자면, 당신은 이미 물리주의에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You then have two choices about qualia--either deny their existence or try to accommodate them somehow within a physicalist framework. Given this choice between accommodation and rejection, you opt for accommodation, since a flat denial of the existence of qualia, you may feel, makes your physicalism fly in the face of common sense(감각질의 존재를 단호하게 부정한다면 당신의 물리주의가 상식을 벗어난다고 생각하므로). You may then find supervenience(수반론이) an appealing way for bringing qualia into the physical domain(물리적 영역 안에서 감각질을 설명하는 호소력있는 방식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감각질 수반론은 적어도, 한 유기체와 세계의 모든 물리적 세부 사항들이 일단 확정되면 그 유기체나 세계에 관한 모든 사실들(감각질에 관한 사실들을 포함하여)이 결정된다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감각질 수반은 감각질의 인과적 관련성을 설명하는 방식을 열어준다. 만일 감각질이 진정한 존재자들이라면, 그들의 존재는 인과적 차이를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수긍할 만한 어떤 물리주의 입장도, 물리적 세계가 인과적으로 폐쇄적이라고 보아야 하며 (6장), 따라서 만일 감각질이 그 세계의 인과적 구조에 영향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적어도 그 세계의 물리적 사실들에 수반해야만 할 것이다. 수반은 그 자체로 감각질들에다 '인과적 효력'을 부여하기에 충분치 않지만, 넓은 의미에서 그것들을 '인과적으로 관련'시키기에 충분하다. [+]
4/ 감각질의 문제 (수반 위한 논의)
물리주의자는 감각질이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가지고 물리적/생물학적 과정들에 수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 ; 모든 가능한 세계에서 심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수반하진 않지만], 약한 형태의 필연성, 즉 법칙적 필연성을 가지고 수반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 (그는 “정신이 없는 세계들”이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당신의 물리적 복제물이 당신의 것과 전도된 시각 스펙트럼을 갖는다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일들이, 우리와 동일한 기초 물리 법칙들을 따르며 동일한 종류의 기초 물리적 소립자들로 구성된 우리의 세계와 충분히 유사한 세계들 안에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감각질의 수반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이 세계와 대단히 유사한 세계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물론 이는 약한 물리주의이다. 이 입장은 우리와 같거나 비슷한 법칙을 공유하는 세계에 심물 수반을 한정한다. 즉, 이에 따르면, 우리와 유사한 세계에서 어떤 두 사물들도 물리적 차이가 없으면서 심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이 입장을 “법칙적 물리주의”라고 한다.]
사람들은 다음 노선을 따라 그것을 옹호할 수 있다. 열을 분자 운동으로 환원하는 것, 그리고 과학에서 성취된 유사한 환원들은, 특히 기초적인 물질적 요소와 기본적인 물리 법칙들에 관해서, 우리의 세계와 충분히 유사한 세계들 안에서만 성립한다. 인과력은 지배 법칙들에 의존한다. 그리고 유전자의 개념이 인과적 역할들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 주어지면, 유전자를 현재 과학의 방식으로 그러하게 환원하는 것은 우리의 세계와 법칙적으로 유사한 세계들 안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과학적 방식이 우리의 세계와 그리고 충분히 근접한 세계들 안에서만 그 역할을 하는 한, 유전자를 그러하게 환원하는 것으로서 설명이 충분히 이루어진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물리주의, 수반, 환원 등과 같은 문제는 법칙적으로 가능한 세계들, 기초 물리 법칙들과 물리적 구성 성분에서 우리와 유사한 세계들만을 고려할 필요하 있으며, 우리는 기이하고 이색적인 세계들을 제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 반면 형이상학적 수반 논의에서는 좀비 등의 문제가 나타난다. *)
[감각질의 법칙적 수반 논제] 각 현상적 속성 P에 있어서, 어떤 유기체 x가 P를 예화할 때마다, 그 시간에 x가 B를 예화하는 그런 물리적-생물학적 속성 B가 존재한다. 그리고 임의의 유기체 y가 B를 예화할 때마다, 그 시간에 y가 P를 예화한다는 것은 자연법칙이다(즉 법칙적 필연성의 문제로서 주장된다.)
(S) 인간들 안에서 N이 예화될 때마다, 그들은 가려움을 경험한다 (N -> I). : 우리는 N이 가려움의 유일한 수반기초라는 것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아마도 다른 종들 안에서는, 다른 신경 상태들이 가려움의 감각을 일으킬 수 있다. (S)가 말하는 것은, "인간들 안에서 N이 실현될 때마다 가려움을 경험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법칙적 수반은 어떤 물리 세계에서 감각질을 다루기에 충분한가? 더 설명이 필요한 이유들이 있다. 이것을 보기 위해서, 간지러움은 어떤 신경 상태 M에 수반한다고 가정하자.
(S*) M -> T
(S)와 (S*) 같은 규칙들은 법칙적 세계들 안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왜 그러한가?" 이것은 이 세계들의 물질적 구성 성분과 기초적인 물리 법칙들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는가? 만일, (S)와 (S*) 같은 상관 관계들이 기초 법칙들과 물질적 성분에 있어서 우리의 세계와 유사한 세계들 안에서만 성립한다면, 우리는 이 법칙들과 이 법칙들이 지배하는 물리적 대상의 속성들에 의해 그러한 상관관계들을 설명할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의 전망은 요원한 것 같다. "가려움” “간지러움” 같은 어휘들이 물리/생물학적 과학들 안의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고, 그 학문들이 가려움이나 간지러움의 경험, 녹색을 봄과 같은 속성들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물리/생물학적 전제들로부터 감각질에 대한 사실을 추론할 수 있는 방법을 알기란 어려운 것이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물리적 사실과 법칙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는 이 세계에 대한 어떤 사실들, 현상적 경험의 발생에 관한 사실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 세계의 그 현상들에 있어서는 물리주의적 설명이 통하지 않게 된다.
만일 우리가 (S)와 (S*) 같은 수반 법칙들을 설명의 전제들로서 갖는다면, 물론 우리는 가려움 감각이나 간지러움 감각의 한 개별적인 사례까 한 인간 안에서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즉, 그녀는 신경 상태 N에 있었기 떄문에 가려웠고, M에 있었기 때문에 간지러웠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왜, 어떻게 해서 (S)와 (S*) 같은 수반 관계들이 애초에 성립하는가 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신경 상태 N에 있을 때마다 간지러움 대신 가려움을 경험하는가? N과 M 상태에 대하여, 가려움은 N으로부터 창발하고 간지러움은 M으로부터 창발하며 이와 달리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엇이 설명해줄 수 있는가? 왜 임의의 현상적 의식들은 창발하는가? 물리 법칙들을 따라 행동하는 물리적 소립자들로만 구성된 세계 안에, 왜 감각질과 같은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가?
이것들은, 물리주의자에게 제기되는 문제들의 일부이다.
5/ 감각질은 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수반 위한 논의 2)
온도와 평균 운동 에너지의 경우를 고려해 보자. 우리는 기체의 온도가 왜 그 분자들의 평균 운동 에너지에 수반하는지를(사실상 가스의 온도가 그것의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이유를) 다음과 같이 완전하게 잘 설명할 수 있는 것 같다. 우선, 온도의 개념은 온도를 다른 속성들과 관련시키는 일련의 법칙들에 의해서 정의되는 기능적 개념이다. 한 대상의 온도는, 충분히 낮을 때 강철이 부스러지도록, 충분히 높을 때 가까이 있는 밀랍을 녹이도록 작용하는 인과적 역할들을 점유하는 그 대상의 속성으로서, 법칙적 세계들에서는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가 이런 역할들을 담당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더욱이, 이 세계의 기초 물리적 구성과 물리학의 법칙들이 주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가 이러한 인과력을 갖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이 인과력을 만족시키는 것이 곧 온도이다. 이것은 또한 왜 온도가 더욱 기초적인 미시 물리적 사실들에 수반하는지를 설명한다. [+ 인과적 역할과 인과력의 관계에서 막혀서 읽히지 않아 책 302p에서 누락.]
이런 방식으로 기초적인 물리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상위-차원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에서 미시-환원적 설명 모델의 본보기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감각질에 대한 물리적 설명을 위한 과학을 이와 동일한 모델로 바라볼 수 없는가?
우리가 고려했던 종류의 환원적 설명은 환원되는 현상을 그것들의 인과적 기능들에 의해 구성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보았듯이, 온도는 그러한 현상과 그러한 인과/법칙적 관계들에 놓여 있는 한 대상의 속성으로서 구성된다. 유사하게, 유전자는 유전적 특성들의 전달을 포함하는 그러한 현상에 대해 인과적 역할을 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으로서 이해된다. 이것은 환원되는 현상들이 다른 현상들과의 인과/법칙적 관계들에 의해 '관계적으로' 혹은 '비본성적으로' 개념화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들의 내부적인 질적 특성이나 구성적 구조에 의해 '본성적으로' 개념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환원적 설명을 위한 속성들은 우선 관계화시켜야 한다 ㅡ 즉 비본래적인 관계적 속성들로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많은 거시 물리적 속성들을 의미있게 만들어준다. 즉, 어떤 것이 물에 녹을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물에 넣었을 때 그것을 녹도록 야기하는 어떤 속성을 갖는다는 것과 같다. 또한 어떤 것이 투명하다는 것은, 그것이 빛을 통과시키도록 하는 그런 종류의 구조를 갖는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상적 특성들의 경우, 우리는 궁극적으로 본성적인 혹은 본래적인 속성들의 전형적인 예들에 직면하는 것 같다. 고통의 통증, 유황의 독한 냄새, 파인애플의 좋은 맛 등, 이런 것들은, 만일 무엇인가 있다면, 본성적인 특질들이다. 우리들은 종종, 우리가 방금 한 것처럼, 이런 감각질들을 선별해 내기 위하여, 외부적인 비본성적 기술들을 사용한다("그 냄새는 전형적으로 유황에 의해 인간에게 야기된다”). 그러나 이 기술들이 식별해 내는 것은 비본성적 속성들이 아니라 본성적 속성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관련된 그 속성들은 본성적(그리고 아마도 주관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다른 사람과 의사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외부적이고 관계적인 기술들에 호소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절차는 감각질에 유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물리적 양들을 측정하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한 막대기가 1미터 길이라는 것은, 둘을 맞추어 보았을 때, 그것이 표준 미터와 서로 일치하는 것이다. 질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1킬로그램은, 이러한 양(정도)의 힘이 한 대상에 가해질 때 이러한 비율의 속도로 추진되는, 그 대상의 질량이다. 그러나 우리는 표준적으로 질량, 길이, 전자 방출 등과 같은 것은 물질적 대상들의 기초적인 본성적 물리 속성들이라고 생각한다. ( 영어본 : Thus, properties that are up for reductive explanation must first be "primed" by being relationalized--that is, reconstrued, as extrinsic relational properties. This makes sense for many macrophysical properties for which we seek, and have found in many instances, microphysical explanations. For something to be water soluble is for it to have a property that causes it to dissolve when immersed in water, for something to be transparent is for it to have the kind of structure that lets light beams through, and so on. But with phenomenal characters, we seem finally to have come face to face with paradigmatic instances of intrinsic properties. The hurtfulness of pain, the acrid smell of sulphur, the taste and flavor of pineapple--these things are intrinsic qualities if anything is. We often use, as we have just done, extrinsic descriptions to pick out these qualia (e.g., "the smell typically caused in humans by sulphur"), but what these descriptions pick out are not extrinsic properties but intrinsic ones. It may be precisely because the properties involved are intrinsic (and perhaps also subjective) that we need to resort to extrinsic, relational descriptions to make them communicable to other people. This procedure is not unique to qualia; it is used for fundamental physical magnitudes. For a stick to be 1 meter long is for it to coincide with the Standard Meter when the two are laid end to end (or it is so many times the wavelength of light emitted by cadmium or whatever). We do the same with mass: 1 kilogram is the mass of an object that accelerates at such and such rate when a net force of such and such magnitude is applied to it. But we standardly consider mass, length, electric charge, and the like to be basic intrinsic physical properties of material things. ; # 수업 당시의 메모를 살펴보면, c-fiber를 고통으로 환원하려면 고통의 느낌에 관한 얘기를 다른 걸로 바꿔서 얘기해야 한다. 즉, A를 설명할 때, A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 다른 개념들이 갖는 관계로 A를 바꿔서 얘기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A를 비본래적, 관계적 속성으로 재구성할 때, B로 환원할 수 있다. )
만일 감각질이 본성적/본래적 속성들이라면, 우리가 막 기술했던 표준적 모델에 따라 그것들을 환원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거의 가망이 없는 듯 하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N-가려움, M-간지러움, 그리고 그와 같은 다른 상관 관계들은 더이상 설명을 할 수 없는 “맹목적” 사실들로서 수용되어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창발론자들의 “자연적 경건함”)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 신경 생물학적 탐구들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현상적 의식에 대한 물리적 설명이 성공하리라는 순조로운 조짐을 보이는 만큼, 신경 생물학에 대한 최근의 발전에 주목할 것을 역설한다. 예를 들면 두뇌 과학자들은 ~~~ 분리된 정보들이 일관적인 의식적 자각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함께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고 한다. 아마도 이 가설은,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의식의 '과학적'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결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의식 상태와 과정들을 받쳐 주는 신경 메커니즘을 확인하는 문제이다.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 우리가 모든 종류의 감각질을 제각기 신경 상태들과 연관시키는 상세한 지도를 갖는다고 상상해 보자. 이것은 바로 의식에 대한 실질적인 과학적 이해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식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거나, 어떤 진전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의식에 대한 신경적 메커니즘의 발견이, 그런 메커니즘에 대한 우리의 상세한 지식이 얼마나 인상적이든간에, 의식의 현상적 특성의 신비를 쫓아내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우리가 주목했듯이, 깊이 자리잡은 신비는 왜 개별적인 현상적 특성들이, 사실상 그것들이 창발하는 신경적 토대와 연결되거나, 그로부터 생겨나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에게 철학적 수수께끼를 일으키는 것은 정확히 감각질과 두뇌 상태들의 그러한 상관 관계들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왜 이 개별적인 상관 관계들의 체계가, 무수히 많은 다른 가능성 중에서, 우리의 세계 안에서 성립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깊이있는 다음 물음이 제기된다. ㅡ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한 세계 안에 왜 현상적 의식과 같은 그런 것이 존재하는가?
(# c-fiber의 설명이 고통의 비본래적 관계화라고 할 수 있는가? c-fiber와 고통의 상관관계는, 온도는 왜 분자들의 운동으로부터 그것이 설명되는지 해명가능한 것처럼, 해명될 수 있는가? 저자는 왜 힘의 크기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냐거나 왜 어떤 것이 하필 그런 특별한 질량을 갖고 있느냐는 건 brute한 사실로 인정하더라도, 감각질은 brute한 사실로 인정해선 안 되며, 감각질은 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어떤 것일 것 같고, '감각질<=신경 상태로부터 야기'라는 brute한 설명은 제대로 된 답이 아니며, '왜 감각질은 그 신경상태에 토대하는가' 라는 질문은 물을 수 있는 문제이며, 설명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