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뇌로서의 마음
ㄱ. 심신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인과적 접근법들
-
양면이론 : 스피노자 – 몸과 마음은 하나의 궁극적인 실재가 지닌 두 개의 구별되는 측면들이기 때문에 그것들간의 상관 관계가 관찰된다.
-
부수 현상론 : 실제 원인은 특정 두뇌 사건이지 마음이 아니다. 심적 인과의 문제(6장)
-
심신 동일론 : 심적 상태 및 사건과 두뇌에서의 물리적 과정이 '동일하다'. {아마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번개에 관해서는 뭔가 알았어도 전기 방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개란 곧 전기 방전이고, “번개”와 “대기상의 전기 방전”이라는 표현들은 동일한 현상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들은 고통에 관해서는 잘 알았지만 c-신경 섬유의 발화에 관해서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c-신경 섬유의 발화”이 동일한 현상을 가리킨다면, 고통이란 다름아닌 c-신경 섬유의 발화이라는 것이 판명된다고 동일론은 주장한다.}
-
창발론 : “심적 사건 및 상태와 물리적 상태가 왜 상호 관련 되어 있는가 ? "라는 물음에 대해, 그 상관 관계는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맹목적인 사실”이며 더 이상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답변이 가능하다. “창발한” 현상들은 그것들의 창발 근원이 되는 물리적 및 생물학적인 현상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다고 창발론자들은 주장한다. 이를테면, 왜 c-신경 섬유의 발화으로부터 가려움이 아니라 고통이 창발하는지, 또는 왜 고통이 a-신경 섬유의 발화이 아니라 c-신경 섬유의 발화으로부터 창발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심적 현상들은 맹몽적으로 창발한 현상들이므로, 이것들이 왜 창발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ㄴ. 심신동일성 논변
-
단순성과 간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논변 [무한퇴행 방지]
-
암스트롱의 논변 : 우리가 유전자를 찾을 수 있기 전에 먼저 우리는 유전자의 개념을 가졌어야만 한다. 즉 “유전자”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유전자는 그것의 인과적인 기능이나 역할에 의해서 정의되었다. 그리고 분자 생물학자들이 경험적인 연구를 통해서 그 개념에 상응하는 인과적인 수행자*를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유전자와 분자 생물학자들이 발견해낸 그 인과적인 수행자*의 동일성이 귀결된다. / 암스트롱은 이와 동일한 패턴의 추리를 통해서 고통과 c-신경 섬유 발화 간의 동일성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본다. 고통은 생체조직의 손상으로 인해서 보통은 생겨나고, 움츠림과 신음 같은 행동을 일으키는 내적 상태라는 개념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당신이 고통이라는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을 경우 당신은 고통과 다른 것 사이의 개념적인 동일성이 성립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개념들에 관해 가지고 있는 실험 이전의 사실이다. 이제 c-신경 섬유의 발화가 그러한 고통 개념에 상응하는 내적 상태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고통과 c-신경 섬유의 발화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암스트롱은 주장한다.
*지적 – (1) 고통에 대한 개념은 그러한 방식으로 정의 가능한가 ? (2) 신경 생리학의 경험적 연구가 과연 이 논변에서 상정된 것처럼 간단하고 선명할까 ? (2.5) 다수 실현 논변 [4장-기능주의] ; [+추가적 생각과 기술 필요]
-
심적 인과로부터의 논변 : [인과적 중층 결정] 불에 손가락을 넣었을 때 손가락을 황급히 뺀다는 것의 원인을 생각할 때, c-신경 섬유의 발화이 손의 움직임의 « 실제 원인 »이라고 보게 되지 통증을 그것의 원인으로 보게 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우리가 통증에 원인으로서의 역할을 부여하려면, 통증과 c-신경 섬유의 발화을 동일시해야 한다. 이것들이 단 하나의 사건이라면, 손이 움직인 것의 원인은 하나만 있게 된다. / 이때, c-신경 섬유 발화이 그 자체로 '충분'한 원인이라면 통증이 어떻게 분리된 원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 통증을 분리된 원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c-신경 섬유 발화과 통증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ㄷ. '동일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동일론은 심적 사건과 두뇌 과정이 동일하다고 말한다. 때때로 상태, 현상, 발생 (이) 사건, 과정 (과) 혼용되곤 한다. “통증은 c-신경 섬유의 발화과 동일하다”는 진술은 “어떤 사람이 통증을 느끼는 것은 그가 c-신경 섬유의 발화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는 표현으로 바꿀 수 있다. 동일론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진술들의 논리와 존재론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동일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우리는 엄격한 동일성이나 엄밀한 동일성보다는 동일한 종류나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사례와 개별자들이라는 것을 의미하거나 어떤 크기에서의 대등성을 의미한다. 이등변 삼각형의 두 밑각이 동일하다거나 같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각들의 크기가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 그 각들이 단 하나의 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네가 어제 산 책과 똑같은 책을 샀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동일한 제목의 두 낱권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지 단 한권만을 염두에 두고 말하지는 않는다. ; x가 y와 엄격한 의미에서 동일할 때에 우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만 가지고 있다.
어떤 동일성은 선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물은 H2O다'라는 사실은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 발견해낸 것으로서, 물과 H2O의 동일성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동일론자들은 심신 동일성이 이와 마찬가지로 경험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심신 동일성은 “통증”과 “c-신경 섬유의 발화”의 의미들을 개념적으로 분석해서 확인되어질 수는 없다.
'열은 분자 운동이다' 를 보면, 하나의 현상과 대상이 과학의 이론적 어휘로 서술된 것과 동일시되어 있다. 심신 동일론자들은 '고통은 c-신경 섬유의 발화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이러한 종류의 동일시를 행하고 싶어한다.
엄격한 동일성은 다음과 같은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1동일자의 식별 불가능성] x와 y가 동일하다면, x와 y는 모든 속성들을 공유한다. (즉, 임의의 속성 p에 대해서 x와 y가 모두 그것을 가지든지 그것을 결여하든지 둘 중 하나다.)
[2식별 불가능자의 동일성(반례 : 전자배열까지 동일한 인간의 복제 – 동일한가 ? 단지 식별 불가능한가 ?)] x와 y가 모든 속성을 공유한다면, x와 y는 동일하다.
여하튼 이 법칙(라이프니츠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1과 2]을 통해서 우리는 x가 가지지만 y가 가지고 있지 않거나 y가 가지지만 x가 가지고 있지 않는 단 하나의 속성만이라도 있으면 “x=y”라는 동일성 진술이 반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일론의 적대자들은 바로 이 속성을 찾아내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고 있다 (# x와 y를 무엇으로 놓고 동일시하고 있는가, x와 y를 무엇으로 설정할 것인가 ?).
ㄹ. 개별자 물리주의와 유형 물리주의
(이 부분을 참조한 나-강경원-의 요약 _ 최소물리주의의 여건에 이 두 입장을 비추어본 생각)
물리주의는 모든 심적 사건은 곧 물리적 사건이라는 입장이다. 여기서 '사건'이라는 것을 두 가지 상이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선 첫번째 관점은, 사건을 물체들처럼 속성을 가지며 유 아래 포섭되는 개별자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별적인 고통 사건은, 고통의 유 아래에 포섭되면서 '하나의 고통 사건임'이라는 속성을 가진다. 이 사건 개별자가 다른 사건 유인 두뇌 사건류 아래에 포섭될 때, 해당 사건 개별자는 '하나의 고통 사건임'이라는 속성 이외에, 두뇌 사건들이 가지는 그러한 속성 역시 가질 수 있다. '개별자 물리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건을 바라보면서, 심적 속성을 갖는 모든 사건들은 물리적 속성도 갖는다고 주장한다. 한편 두번째 관점은, 사건을 속성과 대상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구조화된 개체로 보는 것인데, 이 관점에서 두 사건이 동일하기 위해서는, 두 사건을 구성하는 속성들, 대상들, 시간들이 동일하여야 한다. '유형 물리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건을 바라보면서, 두 사건이 동일하다면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고통은 c-신경 섬유의 발화와 동일하다'라는 주장이 유형 물리주의에서 성립된다. 이와 달리, 개별자 물리주의에서는 심적 속성과 함께 물리적 속성이 한 대상에게 예화되기만 하면 되고, 두 속성이 동일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고통'이라는 심적 상태의 유형과 'c-신경 섬유의 발화'라는 신경 사건의 유형 사이에 의존 또는 상관 관계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개별자 물리주의는 참일 수 있다.
나는 다음으로 최소 물리주의가 갖추어야 할 요건을 설명한 뒤 그것을 개별자 물리주의가 완전히 충족시키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려 한다. 최소 물리주의는 우선, 물리적 차이 없이는 심적 차이도 없다는 심신 수반 논제를 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 논제는, 심적 속성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물리적 속성을 가진 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논제에 따르면 데카르트적 영혼이 오직 하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참이므로, 데카르트적 영혼 개념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순전히 심적인 존재란 있을 수 없다는 논제, 즉 오로지 물리적 사물과 대상들만 심적 속성을 가질 수 있다는 논제를 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으로, 심적인 것을 물리적인 것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임의의 대상이 어떠한 심적 속성들을 갖는지는 그것이 어떠한 물리적 속성들을 갖느냐에 의존하고 결정된다는 심신 의존 논제가 필요하고, 그것을 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개별자 물리주의는, 한 사건 개별자가 '고통'이라는 유일한 심적 유형에 속할 때, 그것이 물리적인 뇌 상태의 온갖 다양한 유형에 속해 있더라도 상관 없이 성립하는 입장이다. 물리적 유형이 차이가 나더라도 심적 유형은 같을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개별자 물리주의는 심신 수반 논제를 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어떤 유일한 심적 유형의 성격을, 그것이 기반한 뇌 안의 물리적 유형의 성격에 결정적으로 의존하여 설명해낼 수 없다는 점으로부터, 개별자 물리주의는 심신 의존 논제 역시 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물리주의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약하다.
한편 유형 물리주의의 경우, 최소 물리주의의 여건들을 충족시키긴 하지만 지나치게 강한 입장이다. 왜냐하면 고통을 가지는 온갖 존재자에게 고통을 실현하는 공통적인 뇌 상태가 단 하나만 존재한다고 하는 이러한 입장은, 로봇이나 화성인과 같이 우리와 전혀 다른 물리적 구성을 가진 존재자의 고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에게서도 성숙이나 학습의 정도에 따라 그 신경적 토대가 시간별로 달라질 수 있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2014년과 2015년에 각각 동일한 고통 유형에 해당하는 속성을 예화할 가능성조차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
동일론은 심적 사건이 두뇌의 물리적 사건과 동일하다고 하는데, "사건”에 대한 두개의 관점 중 어느 관점을 택하느냐에 따라 동일론(=모든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이다)을 이해하는 방식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I. 사건을 물리적 대상들과 함께 이 세계를 이루는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개별자들으로 본다. 그리고 사건들도 물체들처럼 속성을 가지며 유 아래 포섭된다. 가령 개별적인 고통의 발생은 고통의 유 아래에 포섭되는 하나의 사건이다. 달리 말해서, 그 사건은 '하나의 고통 사건임'이라는 속성을 가진다. 그 사건은 다른 사건 유 아래에 포섭될 수도 있고, 다른 속성들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동일론이 옳다면, 그 개별적인 고통 사건은 하나의 두뇌 사건이기도 하다. 즉 c-신경 섬유 자극의 두뇌 사건류 아래에 포섭되는 사건인 것이다.)
[개별자 물리주의] 어떤 심적 사건류 아래에 포섭되는 모든 사건은 또한 물리적 사건류 아래에 포섭된다. (즉 심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건은 또한 어떤 물리적 속성을 가진다. → 사건이 개별자로 이해될 경우, 각각의 심적 사건이 곧 각각의 물리적 사건이라는 것을 논제화한 것으로 보인다).
사건 개별자는, '고통들'이나 '가려움들'과 같은 사건 유형이나 사건류와 대비된다. 개별자 무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논제인 위의 것이 심적 유형과 물리적 유형간의 동일성을 필함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심적 유형과 물리적 유형과의 동일성은 다음 논제로 정리된다.
[유형 물리주의] 심적 사건 유형과 물리적 사건 유형은 동일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심적 속성들과 물리적 속성들은 동일하다.
<개별자 물리주의>에 따라, 심적 속성을 가진 모든 사건이 물리적 속성을 가지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심적 속성들이 체계적으로 물리적 속성들과 상관 관계를 맺는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으며, 더더구나 심적 속성들이 물리적 속성들과 동일하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그동안 사용해왔던 '고통들은 c-신경 섬유의 발화들과 동일하다'라는 진술은 한 유로서의 고통을 한 유로서의 c-신경 섬유의 발화과 동일시하고 있으므로, <유형 동일론의 진술이고 그로 인해서 유형 물리주의>에 속하게 된다. 이 예가 보여주듯이, <심신 동일론은 일반적으로 유형 물리주의>로 해석되지 개별자 물리주의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II. 하나의 사건은 한 시점에서 대상이 어떤 속성을 예화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론이 있다. 그래서 이것에 의하면 내가 지금 고통스러워하고 있음(고통스러워함이라는 속성을 내가 예화하고 있음)은 하나의 사건이다. 또 당신이 지금 고통스러워하고 있음과 내가 어제 고통스러워하였음도 각기 사건들이지만, 서로 별개의 사건들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사건 e와 e'이 동일한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은 동일한 시점에서 단 하나의 대상이 동일한 속성을 예화한 것이어야 한다.
사건을 기본적이고 더이상 분석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I과 달리, 이 II은 사건을 속성과 대상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구조화된 개체로 본다. (그래서 심적 사건은 한 시점에서 하나의 대상에 의한 심적 속성의 예화가 되며, 마찬가지로 물리적 사건은 물리적 속성의 예화가 된다. ; 심적 실체가 허용되지 않는 한, 물리적 사건이나 심적 사건에서 속성을 예화하는 대상은 모두 물리적 대상들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건 이론을 [속성 예화 이론]이라고 부른다).
[속성 예화 이론] t시점에서 x가 속성 P를 예화하는 사건이 t'시점에서 y가 속성 Q를 예화하는 사건과 동일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x와 y가 동일하고, P와 Q가 동일하며, t와 t'가 동일하여야 한다는 것.
사건을 속성 예화 이론으로 이해할 경우에, 개별적인 심적 사건과 개별적인 물리적 사건의 동일성으로부터[사건이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가 계속 논해오고 있는 동일론적 입장에서 가정된다],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간의 동일성이 필연적으로 귀결되고, 개별자 물리주의와 유형 물리주의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된다[# 유형이 개별자를 필함한다로 이해해도 괜찮은가].
개별자 물리주의가 말해주는 것이라고는, 심적 속성들과 물리적 속성들이 동일한 개체들에 의해서 예화된다는 정도밖에 없다. 심적 속성을 가진 사건은 어떠한 것도 물리적 속성을 가진다고 말하지만,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간의 관계는 어떠한지, (고통들이나 가려움들, 생각들, 의식 등)과 (신경 사건들의 유형)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에 성립하는 체계적인 상관 관계가 없더라도 개별적인 물리주의는 참일 수 있다. ; 개별자 물리주의가 참인 세계에서는, 온갖 종류의 심적 속성과 성질들이 있을 수 있지만, 심적인 속성들과 물리적인 속성들 사이에 의존 관계 또는 상관 관계가 있을 필요는 없다.
개별자 물리주의가 성립하는 한, 물리적인 면에서는 이 세계와 똑같지만, 심성과 의식은 전혀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개별자 물리주의는 심신 수반 관계가 성립하지 않더라도 참이 될 수 있다.
개별자 물리주의가 성립하는 한, 임의의 사건이 가지는 심적인 특징이 어떠한 것이 되느냐는 것이 그 사건이 가지는 생물학적 및 물리적인 속성들이 어떠한 것이 되느냐는 것에 의해서 결정되지는 않게 된다.
그리고 당신과 분자 구조는 모두 같지만 의식은 전혀 없는 물리적인 복제물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곧 한 사건의 심적 속성들이 어떻게 물리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물리적으로 설명되는지에 관해서 개별자 물리주의가 전혀 아무말도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개별자 물리주의는 물리주의의 영역 밖으로 나가게 된다.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 사이에서 성립하는 관계는 심적인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개별자 물리주의는 이에 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므로, 일종의 비환원주의로 볼 수 있다.[9장 – 환원]
이와 대조적으로 유형 물리주의는 환원적 물리주의이다. 그들은 심적 속성들이 물리적 속성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논제화하므로, 물리적 속성 없이는 정신적 속성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은 거의 틀림없이 데카르트적 심적 실체라는 것은 없다는 결론을 필연적으로 함축한다.
또한 그것은 물리적 사실들 이외의 심적 사실이란 없다는 결론을 필연적으로 함축한다. 이것은 곧 심적인 표현들이 유용하고 실제로는 필요 불가결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러한 표현들을 배제한다고 해서 우리의 언어가 지니는 서술력이 상실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리 언어가 원리상 모든 사실들을 서술하기에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이론은 어쩌면 너무나 강력해서 참되지 못한 이론이 될지도 모른다. 이 점은 앞으로 밝혀질 것이다.
ㅁ. 이책의 전반에 걸쳐 언급될 물리주의 일반에 대한 주요 반론들 중 일부는 동일론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
심적 사건의 현상적 속성들 : 'c-신경 섬유 발화'은 '고통'이 가지는 짜릿짜릿함이라는 속성을 갖지 못하므로, 앞서 라이프니츠 법칙 부분에서 말한 동일성 진술의 반증이 가능할 것 같다.
이 반론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는 것은 우리가 개별자 물리주의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유형 물리주의자가 될 것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개별자 물리주의자에게는 이 반론이 적용되지 않는데, 그는 현상적 속성들을 포함해서 심적 속성들에 관해서는 아무 주장도 하지 않고, 단지 이러한 심적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사건들에 관해서만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는 심적 속성들이 물리적 속성들과 완전히 구별되되 사건들은 이 두 종류의 속성들을 함께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짜릿짜릿한 고통이면서 c-신경 섬유의 발화인 사건이 있을 수 있다. 즉 이 사건은, 짜릿짜릿함이라는 현상적 속성과 c-신경 섬유의 발화이라는 생리적 속성을 함께 갖는 것이다. (실제로 개별자 물리주의는 그러한 발언이 완벽하게 이해 가능하고 참된 진술에 대한 발언이 되게끔 해주는 이론이다).
이 반론에 대한 유형물리주의자의 대처는, 짜릿짜릿함을 심적 속성이나 심적 사건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고서, 이러한 속성을 그것과 상관관계를 가지는 두뇌 상태류와 동일화시키는 것이다. 이 점은 속성 예화 이론 안에서 좀더 명료하게 서술될 수 있다. 즉, 우리가 당신의 짜릿짜릿한 고통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당신이 t시점에서 고통스러워함'이라는 사건을 '짜릿짜릿하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짜릿짜릿한 고통'을 느끼고 있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렌지색의 노란 잔상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루어질 수 있다. 당신이 잔상을 가짐이라는 사건이 '오랜지색의 노란 색임'이라는 속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은 오렌지색의 노란 잔상을 당신이 갖는 사건이다. 그래서 예화되는 심적 속성은 '오랜지색의 노란 잔상을 가짐'이라는 속성이고, 이 속성은 하나의 물리적이고 신경적인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
현상적 속성에 대한 재고찰
동일론에 따르면, 세부적인 심물 동일성들(고통은 c-신경 섬유의 발화와 동일하다)은 과학적인 관찰과 이론적인 연구에 의해서 발견되는 경험적인 진리라고 한다. 그런데, D1=D2가 경험적인 진리라고 하면, D1과 D2라는 두 이름(기술구)들은 서로 '독립적인 적용 기준들'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동일성은 진위 여부가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가려움이나 따끔거림이 아니라 굳이 고통이라고 골라내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이하게 느껴진 성질, 즉 현상적 성질을 우리가 인지하기 때문이다. → 만일 신경 생리학적인 기준에 의해서 고통이 골라진다면(이를테면 우리가 c-신경 섬유 발화를 고통의 기준으로서 사용한다면), 고통과 신경 상태의 동일성은 경험적인 것이 될 수 없다.
→ 심물 동일성의 '경험적인' 성격이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가 현상적 속성들(이 그러함)을 인지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통을 느낄 때 우리는 고통이 갖는 현상적 속성들의 환원 불가능한 정신적 측면을 알아채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고통으로서 인지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가 고통을 확인할 때 사용하는 기준인 아픈 느낌은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직관에 부합된다.
개별자 물리주의자는 이 반론에도 두려울 것이 없다. 그는 이러한 현상적 속성들을 환원 불가능한 심적 속성들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반론에 대해서, 유형물리주의자의 경우 앞서 사용한 조처가 별로 소용이 없다. 비록 우리가 심상에 대한 오랜지색의 노란 경험으로부터 오랜지색의 노란 심상에 대한 경험으로 옮겨 간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우리가 자신이 이 특정한 현상적 성질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느냐는 물음은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험이 지닌 어떤 환원 불가능한 심적인 특징을 인지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일까 ?
유형물리주의자 : « 우리가 어떤 경험이 지닌 질적인 현상적 특징을 인지함으로써 그 경험을 확인하되, 심적인 속성으로서의 현상적 속성들은 물리적 및 생물학적인 속성들과 동일하므로 그것들이 환원 불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다. »
반론 : « 우리가 자신의 고통을 고통으로서 인지할 때 우리의 두뇌 상태의 생물학적이거나 신경상의 특징을 인지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 (우리는 고통을 가려움이나 간지러움과 금방 구별해 내는데, 만일 우리가 경험의 신경 생리학적인 특징에 의해서 경험들을 확인한다면 우리는 어느 신경 생리학적인 특징이 고통을 나타내고, 어느 특징이 가려움을 나타내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만 하는데, 과연 그럴까?)
(대응 – 현상적 속성들을 가리키는 진술들을 그렇지 않은 진술들에 의해서 분석할 수 있는 방안 제시 시도)
[암스트롱] 심적 상태에 대한 인과적 개념(앞서 설명)
[스마트-화제 중립적 번역]
그러나, 당신이 자기가 엄지손가락에서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고 올바르게 보고할 때, 엄지손가락에 박힌 바늘에 관해서 무언가를, 또는 고통들의 정상적인 원인 및 결과들을 당신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스마트와 암스트롱이 번역한 바와 같은 것(3인칭)을 당신이 자신의 경험을 보고할 때(1인칭) 말하지는 않는다.
-
다수실현논변 (<-유형 동일론에 대한 치명적 비판)
유형 물리주의는 고통과 c-신경 섬유의 발화는 동일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 생물체가 c-신경 섬유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적절한 생물학적인 구조로 된 두뇌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 생물체는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만 인간의 두뇌와 매우 다른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생물체들이 있지 않을까 ? 이러한 종에서는 고통에 반응하는 뉴런들이 인간의 c-신경 섬유와는 다른 것들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 유형물리주의자는 고통 상태에 있는 모든 종의 모든 생물체들에 공통적인 두뇌 상태를 좀더 추상화시키고 일반화시켜서 생리학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고 답변할 수 있을까 ? 하지만 그러한 서술이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적다. 더욱이 무기물에 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 우리 인간처럼 복잡하고 풍요로운 정신 생활을 영위하고 지능을 갖추었지만 생체는 탄소로 되어 있지 않은 외계인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
더욱이 어떤 정신 기능들의 신경적 토대들은 사람마다 다르고, 한 사람에게서도 성숙이나 학습의 정도에 따라 또는 두뇌의 손상에 따라 시간별로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고통이 물리적 상태 c와 동일하다면, 고통은 실제의 생물체와 조직 체계 내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가능한 생물체와 조직 체계 내에서 c상태와 동일하여야 한다.
우리는 매우 다양한 물리적 및 생물학적인 구조들 안에서 임의의 심적 상태가 “다수 실현 가능”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하나의 심적 상태와 하나의 물리적 상태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반론은 유형 무리주의를 퇴장시키고(특히 마음-두뇌 동일론의 몰락), "환원주의”라는 용어가 누렸던 평판을 끌어내리고서 “비환원적 물리주의”시대의 도래를 예고하였다. 나아가 심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인 “기능주의”를 발흥시켰는데 이는 앞으로 컴퓨터로서의 마음(기계 기능주의), 인과적 구조로서의 마음(인과론적 기능주의)에서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