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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로서의 마음(기계 기능주의)
1/ 다수 실현 가능성과 심적인 것의 기능적 개념
[물리적 실현 원리] 만일 어떤 것 x가 시점t에 어떤 심적 속성M을 갖는다면(혹은 심적 상태M에 있다면), 그 경우 x는 물질적인 것이고, x는 t에 x안의 M을 실현하는 물리적 속성P를 동시에 갖는다는 사실에 의하여, x는 t에 M을 갖는다. (#P는 M을 실현한다.)
→ 심적 특성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하나의 물리적 체계여야만 한다. (비록 심성 관념 자체에는 그것이 비물질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더라도,아마도 물리적 체계들만이 시공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들이기 때문에, 선험적인 개념적 사실의 문제로서, 세계는 오직 물리적 체계들만이 심적 속성들을 실현하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모든 심적 속성들이 물리적 기초를 가질 것이 요구된다.
마음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물리적으로 구현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물리주의를 특징짓는 하나의 방식이며, 앞장 '최소물리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 원리는 심적 속성들의 다수 실현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에 주목하라. 심적 속성 M 예를 들어, 아픔은, 인간의 경우 C-신경의 발화가 그것을 실현하지만, 다른 종들(즉, 문어나 파충류)의 경우 아픔을 실현하는 생리적 메커니즘이 전혀 다를 수 있다. 심적 개념들은, 주어진 한 체계 안에서 그것들을 실현하는 실제의 물리적/생물학적 메커니즘이나 구조들에 대한 어떤 제약 조건도 포함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심적 개념들은 “엔진” 같은 인공물의 개념들과 비슷하다. “엔진” 개념은 그것을 실현하는 실제의 물리적 메커니즘에 관해서는 ㅡ그것이 가솔린을 사용하는지 혹은 전기를 사용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많은 실린더를 갖는지, 그것이 기화기를 사용하는지 연료분사기를 사용하는지 등등에 관해서는ㅡ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하나의 물리적 장치가 어떤 명시된 역할, 즉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를 기계적 힘이나 운동으로 변환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한 그것은 엔진으로 간주된다. “엔진” 개념은 한 (기능적) 역할을 기술함으로써 규정되는 것이지,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기술함으로써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고통의 역할은 무엇으로 기술되는가 ? 한 유기체가 생존과 적응의 기회를 갖기 위하여 “적절한(조직에 상처를 받는 등)” 상황에서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은 아마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선천적으로 고통의 감각 능력을 결여한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거의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기 어렵다. 그들의 환경으로부터 주어진 위험들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동물종들은 “조직-손상 감지기” 라 할 수 있는 고통 메커니즘을 발전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다른 환경 조건에 직면해서 서로 독립적으로 진화해 온 다른 종들은 이 목적을 위해 다른 메커니즘을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 설득력있다. “조직-손상 감지기” 를 발전시키는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진화론적 답변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때 우리는 고통을 “조직-손상 감지기” 의 역할 기술에 의해 명시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진화 ---(매개가 기능적 역할 ?)--- 마음-내적상태)
마음의 작용을 계산기의 기능과 유추하여 생각하는 것은 대중적인 잡지에서나 철학과 인지과학 같은 전문분야에서나 모두 평범한 일이 되었다. 우리는 곧 마음과 컴퓨터의 유추를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심성에 대한 계산주의적 견해 역시, 심적 상태들이 다양하게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보여준다. 우리는 어떠한 계산적 과정도 물리적으로 매우 다양한 계산 기계들 안에서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수많은 종류의 전자 디지털 컴퓨터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바퀴와 기어로 된 컴퓨터를 만들 수도 있고,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심지어는 수압으로 작동되는 파이프와 밸브의 체계들로 구성된 컴퓨터를 만들 수도 있다. 물리적으로 다양한 이 모든 컴퓨터들이 “동일한 계산”을 수행할 수 있다. 만일 마음이 컴퓨터와 같고, 심적 과정들이 기본적으로 계산 과정들이라면, 우리는 마음과 심적 과정들이 물리적으로 실행되는 방법에 관하여 어떤 중요한 제약도 기대해선 안 된다. ( ; 마치 다양한 물리적 장치들이 동일한 계산적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듯이, 다양한 생물학적/물리적 구조들이 동일한 심리적 과정들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이것이 마음에 대한 기능주의적 이해의 출발점이 되는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어떤 철학자들에 의하면, 물리적/생물학적 속성들과의 관계에서 심리적 속성들이 갖는 추상성 내지 형식성을 지시한다. 즉 심리적 종류는 유기체들의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세부사항으로부터 추상되며, 그리하여 물리 화학적 관점에서 전혀 다른 상태들이 동일한 심리적 (속성의)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또한, 생물학적/물리적으로는 전혀 다른 유기체와 체계들이 동일한 심리적 규칙들을 예화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심리적 (속성의) 종류들은 그것들의 질료적 구성이나 메커니즘에 관련된다기보다는, 사건적 과정의 '형식적' 패턴이나 구조들에 관련되는 듯 하다. 역으로, 동일한 물리적 구조가, 보다 넓은 체계 안에서 그것이 인과적으로 구현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심리적 능력과 기능들을 실현할 수도 있다(마치 동일한 컴퓨터 칩이 한 컴퓨터의 여러 하위 체계들 안에서 다른 계산적 기능을 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처럼). 결국, 대부분의 뉴런들은 상당히 유사한 동시에 광범위하게 상호 교환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equipotentilaity).
그러면, 하나의 심적 유형에 관한 물리적으로 다양한 모든 사례들을 함께 묶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 모든 고통들 – 인간의, 개의, 문어의, 화성인의 – 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들을 고통이라는 단일한 심리적 종류로 분류하도록 해주는 것, 심성 종류들의 '개별화 원리'는 무엇인가 ?
우선 유형물리주의자, 행동주의자의 답변을 살펴보자. 두뇌-상태 유형 물리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모든 고통들을 고통의 사례로 만들어주는 공통적 성질은, 어떤 신경 생리적 속성, 즉 c-신경 섬유 발화의 예화이다. 즉 그에게는, 하나의 심적 종류는 하나의 물리적 종류이다 (특히 마음-두뇌 동일론자에 있어서는, 하나의 신경 생물학적 종류이다.)
행동주의자는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까. 모든 고통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것은 어떤 행동적 속성이다. 혹은 어떤 시간에 두 유기체가 고통의 전형적인 행동 패턴(신체를 피하거나 움츠러드는 등)을 나타내거나 나타내려는 성향이 있을 경우에만 그 둘은 그 시간에 고통 상태에 있다. 그렇다면, 행동주의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심적 유형/종류는 하나의 행동적 유형/종류이다.
만일 당신이 심적 상태의 다수 실현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이 두가지 답변들을 거부하고 “기능주의자”임을 선택할 것이다. 기능주의에 의하면, 심적 종류는 '기능적 종류' 혹은 '인과적-기능적 종류'이다. 왜냐면 여기서 말하는 “기능” 이라는 것은 어떤 인과적 역할을 실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한 심적 유형/종류의 모든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속성은, 그것들이 그 심적 유형에 고유한 어떤 인과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기능적 개념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것을 하나의 책상으로 만드는 것, 온도계로 만드는 것은 어떤 세부적인 물리 화학적 구조나 메커니즘이 아니라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그것들의 능력이다. 이 개념들은 수행될 기능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규정된다. 일상적 담화나 과학들에서 사용되는 많은 개념들도 이런 의미에서 기능적 개념들이다. 많은 생물학적 개념들(예를 들어 유전자, 심장)조차도 본질적으로 기능적 요소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고통의 예에서, 한 유기체가 자신의 조직 손상을 감지하는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는 경우에만 ㅡ정확히 그 메커니즘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와 무관하게ㅡ 그 유기체는 고통 상태에 있을 능력을 갖는다. 조직-손상 감지기가 작동하기 위해서, 그 메커니즘은 조직-손상에 대해 인과적으로 반응해야만 한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조직-손상의 모든 사례들은 이 메커니즘을 작동시켜야 하며 그 이외의 어떤 사례도 그것을 작동시켜선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조직을 손상시키는 외부적 원인으로부터 손상받은 유기체의 일부나 전부를 공간적으로 분리시키는 행동을 일으키도록 연관되어 있는 다른 메커니즘들도 작동시켜야 한다(즉 그것은 상처를 피하는 행동도 일으켜야 한다). 그리하여 고통의 개념은 그것의 기능에 의하여 정의된다. 여기서 관련된 기능은, 전형적인 고통의 입력(조직 손상, 외상 등)과 전형적인 고통의 출력(움츠리고, 신음하고, 피하는 행동 등) 사이의 '인과적 매개자'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 ; 한 심적 유형/종류의 모든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속성은, 그것들이 그 심적 유형에 고유한 어떤 인과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2/ 기능주의와 행동주의
기능주의와 행동주의 둘 다 감각 입력과 행동 출력 (자극 → 반응) 이 심성 개념의 중심적 요소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기능주의는 대략적으로 심성에 대한 행동주의적 접근에 속하며, 좀더 일반적이고 세련된 형태의 행동주의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 차이들이 중요하다.
첫째, 기능주의는 심적 상태를 인과력을 갖는 한 유기체의 실제적인 '내적' 상태로 간주한다. 즉 한 유기체가 고통 상태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전형적으로 조직 손상에 의해 야기되며 또한 전형적으로 움츠리고 신음하고 피하는 행동들을 야기하는 내적 상태(예를 들어, 인간의 신경 생물학적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 행동주의는 현실적/가능적인 행동들을 가지고 심적 상태들을 확인함에 있어서 심적 상태들과 관계하는 내적 상태들에 대한 언급을 삼가한다. 그리하여 행동주의자에게 고통상태에 있다는 것은 움츠리고 신음하거나 그러려는 성향을 갖는 것이지만, 움츠림과 신음소리를 '야기하는 내적 상태'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행동주의와 기능주의가 모두 심적 상태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행동적 성향들”을 지칭할지라도, ”성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그들은 매우 다를 수 있다. 기능주의자는 성향에 대하여 “실재론자”의 접근을 취하고 행동주의자는 “도구주의자” 노선을 따른다. 물에 녹는 성향이 이 두입장에서 어떻게 분석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도구주의자의 분석] <x는 물에서 녹을 수 있다(물에 녹는 성향을 갖는다)>는 <만일 x를 물에 담그면, x는 녹는다>로 정의된다.
[실재론자의 분석] <x는 물에서 녹을 수 있다>는, <x는, 그것을 물에 담갔을 때 x를 녹도록 야기하는, 어떤 내적 상태 S에 있다>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도구주의에 따르면, 각설탕의 수용성이란 바로 어떤 조건적 (만일 ~이면, ~일 것이다) 문장이 주장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견해에 의하면, 수용성은 각설탕의 “조건적/가정적” 속성으로 판명된다 ( ; 물에 담근다 → 녹는다 ; 그러한 속성). 이와 대조적으로 실재론은 수용성을 각설탕의 정언적/범주적인 내적 상태로 간주하며, 여기서 그 내적 상태는 각설탕을 물에 넣었을 때 그것을 녹도록 만드는 '인과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한다(또다른 탐구들은 그 상태가 어떤 분자 구조를 갖는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두 분석 중 어느것도, 수용성을 갖기 위해 각설탕을 물에 담그거나 혹은 실제로 녹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차이에 주목할 수 있다. 만일 x는 물에서 녹고 y는 물에서 녹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하여 실재론자는, 그것들이 미시구조에서 다르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인과적 설명을 제공할 것이다. 도구주의자의 경우,그 차이가 단지 주어진 사실(brute fact)일 뿐이다. 즉, 단지 “그것을 물에 담근다 → 그것은 녹는다 ; 그것을 물에 담그면, 그것은 녹을 것이다”라는 조건문이 x에 대해서는 참이지만, y에 대해서는 참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 차이는 x와 y사이의 어떤 그 이상의 차이에도 근거하지 않는다.
심적 상태들을 행동적 성향이라고 말함에 있어서, 기능주의자는 심적 상태를 (정상적인 상황에서 어떤 명시적인 입력 조건들 하에서 어떤 특정한 유형의 행동을 야기하는) 인간이나 다른 유기체들의 실제적인 내적 상태로 간주한다. 반면에 행동주의자는, 심적 상태를 단지 입력-출력 / 자극-반응의 상관 관계로 간주한다. 많은 행동주의자들(특히, 방법론적 행동주의자들)은, 심적 상태들을 행동의 “내적 원인들”로 간주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동기부여될 수 없으며 또한 철학적으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기능주의와 행동주의 사이의 두번째 중요한 차이는, 전자에게 실질적으로 중대한 힘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심적 상태를 규정하는 “입력”과 “출력”이라는 말이 해석되는 방식에 있다. 행동주의자에게, 입력과 출력은 모두 관찰 가능한 물리적 자극 조건들과 관찰 가능한 행동적 반응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기능주의자는 주어진 심적 상태를 규정함에 있어서 '그 이외의 다른 심적 상태들'을 지칭하는 것을 포함한다. 한 심적 상태의 전형적인 원인과 결과들이 다른 심적 상태들을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은 심적 상태에 대한 기능주의적 개념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하여 가벼운 핀에 찔림이 고통을 야기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정상적으로 방심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일에 깊이 주의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가벼운 찔림과 더불어, 이런 심적 상태들이 고통을 야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한다. 더욱이 고통은 보통 당신에게 불안감을 일으키고 따라서 그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라는 출력 역시 야기하는데, 이것들은 그 자체로 심적 상태들이다.
방금 살펴본 두 가지 지적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만일 당신이 심적 상태들을 심리적 주체들의 실제적인 내적 상태들로 간주한다면, 당신은 그것들을 실제의 인과적 힘(즉 다른 심적 상태나 사건들을 야기하고 또한 그것들에 의해 야기되는 힘)을 갖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심적 상태들을 다른 심적 상태들의 원인이나 결과들로 보는 것을 배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런 방식으로 심적 특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기능주의자들은 '심적 실재론'을 지지한다. 그것은, 심적 상태들이 세계의 현상들의 인과적 구조 안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심적 상태들이 진정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행동주의자에게도 심적 상태들은 실재하는 것이지만 오직 행동이나 그러려는 성향으로서만 실재한다. 왜냐면 그에게는 행동을 넘어서는 심적인 것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능주의자에게 있어서, 심적 상태들은 행동의 내적 원인들이며 그것들은 행동 이상의 것이다.
여러 지점들에서 외부 세계에 닻을 내린 복잡한 인과적 그물을 형성하면서, 주어진 한 심적 상태의 원인과 결과들 중에 다른 심적 사건들을 포함시키는 것은 심적 상태에 대한 기능주의의 일반적 개념에 속하는 것이다. 심리적 주체와 외부세계가 상호관계하는 접촉 지점들에서, 입력을 받아들이고 출력을 내보낸다. 그리고 주어진 심적 유형의 정체성은, 그것이 고통과 같은 감각이건 혹은 비가 올것이라는 믿음이건 혹은 햄 샌드위치에 대한 욕구이건간에, 오직 그것이 인과적 그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만 의존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심적 사건을 어떤 심적 사건의 종류로 만드는 것은, 그 사건이 다른 심적-사건 유형들 및 입력/출력 조건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각 심적 유형의 정체성은 궁극적으로 전체 체계에 의존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능주의는 우리에게 심성에 대한 총체적(holistic) 개념 이해를 제공한다. (#심성이 모조리 인과적으로 정의된다는 것은 기계에 대한 기능의 유비와 어떻게 차이나는가?)
이것은 기능주의로 하여금 행동주의의 중요한 반박들 중 하나를 피하도록 해준다. 그것은, 욕구란 적절한 믿음과 결합할 때에만 관찰 가능한 행동을 산출하며, 마찬가지로 하나의 믿음은 그것에 대응하는 욕구가 나타날 때에만 적절한 행동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가 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가 비에 젖지 않으려는 욕구를 가질 때에만 우산을 가지고 나갈 것이다. 이것은, 믿음을 지칭함 없이 욕구를 정의하거나, 욕구를 지칭함 없이 믿음을 정의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 기능주의자는 이것이 심적 상태들의 총체적(holistic) 특성을 지적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욕구란 적절한 믿음과 함께 어떤 행동-출력을 야기하는 내적 상태의 종류라는 것이야말로 바로 욕구의 본질적 특징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정의들을 순환적으로 만들지 않는가 ? 만일 욕구의 개념이 믿음을 지칭함 없이 정의될 수 없고, 믿음의 개념이 욕구를 지칭함 없이 설명될 수 없다면, 어떻게 두 개념들이 이해될 수 있는가 ? 우리는 기능주의의 총체적 접근이 이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아래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3/ 튜링 기계들
튜링기계란 영국의 수학자이며 논리학자인 튜링이 추상적으로 고안한 계산 기계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비록 인과적-기능적 역할에 의해 기능주의를 설명하는 것이 이제는 관례가 되었지만, 튜링 기계 형태의 기능주의를 검토함으로써 기능주의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마음의 작용들이 컴퓨터의 작동들에 의해 가장 잘 이해된다는, 처음에 언급된 계산주의적 관점을 탐구하기 위해 필요한 배경을 우리에게 제공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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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방향으로 계속 이어지는 “네모 칸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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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의 주어진 시점에 그 테이프의 네모 칸들 중의 어느 한 곳에 위치해 있는 스캐너-프린트(=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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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집합의 내적 상태들(혹은 '배열들'), q0, …, q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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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들을 구성하는 유한한 수의 알파벳, b1, …, bm
각 네모칸에는 오직 하나의 기호만이 나타난다. (빈 칸도 기호들 중 하나로 간주한다). 그 기계의 일반적인 작동은 다음과 같다.
A] 각 시점에 기계는 하나의 내적 상태, qㅁ에 있으며, 그것의 헤드는 그 테이프의 한 칸을 읽고 있다.
B] 주어진 시점 t에 기계가 하는 일은, 시점 t에 그것의 내적 상태와 그것의 헤드가 읽고 있는 기호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
C] 기계의 내적 상태와 읽혀진 기호에 의존하여, 기계는 다음 세가지 일들을 수행한다.
ㅡ 기계의 헤드는 그 기호를 알파벳의 다른 기호로 대치한다(동일한 기호도 가능 ; 헤드는 읽혀진 기호를 지우고 새로운 기호를 쓴다.).
ㅡ 기계의 헤드는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한 칸씩 움직인다(계산이 완료되면 멈춘다).
ㅡ 그 기계는 새로운 내적 상태로 들어간다.
단일 기호 표기법으로 양의 정수를 더하는 튜링 기계를 생각해보자 (이 표기법에서 숫자 n은, 연속적으로 [동일한 기호의] 타자를 n번 치는 것으로 나타나며 매번 칠때마다 한 칸을 차지한다 ; 즉 2는 1 1 로 나타난다). 그 기계에서 2와 3을 더하는 문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자.
# # 1 1 1 + 1 1 # #
우리는 이것을 5를 표현하기 위해 동일한 기호의 타자를 5번 치는 것으로
# # 1 1 1 1 1 # #
를 만들어 계산을 완료하려 한다.
그 기계가 이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한 가지 단순한 방법은, 그 기계(혹은 헤드)가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 기호를 찾아서 그것을 1의 타자로 대치하고, 다시 계속 이동하다가 마지막 타자 1을 발견하면 그것을 지우고(즉 그것을 기호 #로 대치하고) 나서 멈추는 것이다. 다음의 단순한 “기계표(machine table)”는 우리의 덧셈과정을 정의해주는 지침들의 완전한 집합이다(그것은 TM1이라고 부르자).
이 표를 읽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맨 왼쪽의 세로줄에는 수직으로 기재된 기계 알파벳 기호들이 있다. 맨 윗줄에는 기계의 내적 상태들이 기재되어 있다. 내부의 항목들은 각기 하나의 지침이다. 그것은 맨 왼쪽 열에 있는 기호를 읽는 동시에 그것의 맨 윗줄에 기재된 내적 상태에 있을 때, 무엇을 할 것인지를 기계에게 지시한다. 예를 들어 q0과 1이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 1Rq0는, 그 기계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만일 네가 내적 상태 q0에서 기호1을 읽고 있다면, 1을 1로 대치하고(즉, 그것을 그대로 두고) 오른쪽으로 한 칸 움직여서(R) 내적 상태 q0로 가라(즉, 동일한 상태에 머무르라).” 곧바로 다음 항목, 1Rq0은 기계에게, 만일 네가 q0상태에서 기호+를 읽고 있다면, +를 1로 대치하고 오른쪽으로 한 칸 움직여서 상태 q0로 가라 라고 지시한다. 맨 아래에 #Lq1에 나타난 L은 “왼쪽으로 한 칸 이동하라”를 의미한다. 또 #Halt는 만일 네가 q1상태에서 1을 읽고 있다면, 1을 #로 대치하고 정지하라 를 의미한다.
튜링기계의 기계표는 기계의 작용 과정들을 완전하게 남김없이 명세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튜링기계를 그것의 기계표와 동일시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기계표란 지침들의 집합일 뿐이므로, 이것은 하나의 튜링기계가 그러한 지침들의 집합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동일한 작업을 더욱 빠르고 보다 단순하게 수행할 수 있는 또다른 튜링기계를 고안할 수 있다.
+ (뺄셈 기계) (복사기계 -> 곱셈기계)
자연수에 대한 어떤 산술 작용도 덧셈과 곱셈에 의해 정의될 수 있으므로, 어떤 산술적 계산이든지 가능한 튜링기계가 있다는 것이 귀결된다. 사실상 임의의 컴퓨터에 의해 수행될 수 있는 어떤 계산이든지, 튜링기계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 즉 계산될 수 있음과 튜링기계에 의해 계산될 수 있음은 동일한 개념들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수리논리학의 튜링 논제)
우리는 두 개의 분리된 테이프 ㅡ 하나는 입력을 위한 것(계산될 문제가 나타나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 계산과 마지막 출력을 위한 것 ㅡ 와 두 개의 분리된 헤드 ㅡ 하나는 읽기 위한 것, 다른 하나는 쓰기 위한 것 ㅡ 를 가진 튜링기계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것의 스캐너(« 감각기관 »)을 통하여 “감각적 자극들” (입력테이프에서 그것이 읽는 기호들)을 수용하고, 반응으로 구체적인 행동들 (프린터 헤드에 의해 출력 테이프 위에 씌어진 기호들) 을 방출하는 튜링 기계를 생각하도록 도와준다. 두 개의 분리된 테이프를 가진 기계, 혹은 유한한 수의 테이프들을 가진 기계에 의해 수행될 수 있는 어떤 계산이든지 하나의 테이프를 가진 기계에 의해서도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므로, 더 많은 수의 테이프들을 늘이는 것은 튜링 기계의 계산 능력을 강화시키거나 튜링 기계의 개념을 실질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지 않는다.
튜링은 또한 “보편적 기계”를 만드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 기계는 어떤 특정한 기능/함수의 계산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계산하고자 하는 기능/함수에 대한 기계표와 (그것의 함수값을 구하기 위한) 특정한 초기 값들( 논증들 ) 을 실을 수 있는 일반-목적 컴퓨터와 같은 것이다. 이 기계의 입력 테이프 위에, 당신은 다음 두 가지를 명시할 수 있다. 하나는 보편적 기계가 읽을 수 있는 어떤 표준적 표기법으로 기재된, 구하고자 하는 함수에 대한 기계표이다. 다른 하나는 그 함수가 계산되어야 할 값들이다. 보편적 기계는 이러한 함수에 대한 기계표를 읽고, 계산이 끝날 때까지 필요한 지침들을 실현하도록 프로그램된 것이다.
튜링 기계의 개념은 확률적 자동기계의 개념을 낳는 것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 ; 확률상으로 이렇게 행동할 수도, 저렇게 행동할 수도 있다. 확률로서는 그것이 결정되어 있다). 상기하다시피, 튜링기계의 각 지침은(주어진 내적 상태에서 기호에 의해 단 하나로 행동이 결정) 결정론적인 것이다. (#생략) 그러나 확률적 자동기계의 작용들은 비결정적이다. 즉 그 기계의 현재 내적 상태와 그것이 읽고 있는 기호는 그 기계가 해야 할 일을 유일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기계는 제멋대로 혹은 자의적으로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 기계의 출력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기술하는 고정적이고 안정된 확률들이 존재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실제의 심리적 주체의 행동을 기술할 어떤 기계를 생각한다면, 비록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확률적 기계의 행동을 모방하는 결정론적 기계를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확률적 기계가 결정론적 기계보다 더욱 현실적인 것이다.
4/ 튜링기계의 물리적 실현
TM1의 물리적 실현들 ,즉 TM1의 기계표에 따라 작동하는 실제의 계산 기계들은 수없이 이질적이며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튜링 기계의 물리적 실현이라는 개념은 정확히 무엇인가 ? 한 물리적 장치를 주어진 튜링 기계의 '실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 첫째, 그 기계의 알파벳의 기호들은 구체적인 물리적 구현체들로 주어져야 한다. 그것들은 종이 위에 있는 잉크자국이나, 플라스틱 테이프 위의 자력을 띤 철 입자의 패턴들 혹은 다른 그 무엇으로든지 구현될 수 있다. 그것이 “읽을 수” 있으면 된다. 이것은 그 기호들의 물리적 속성들이 그 스캐너의 물리적 장치에 대하여 제약을 가한다는 것을 의미하되, 이 제약들은 보통 유일하게 하나의 장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대단히 많은 물리적 장치들이, 물리적으로 구현된 기호들을 읽기 위한 스캐너로서 작용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이와 동일한 생각들은 기계의 프린터와 출력에도 적용된다. 기계가 그것의 출력 테이프 위에 인쇄하는 기호들은 (우리는 두 개의 분리된 테이프를 가진 기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물리적 형태를 취해야 하며, 프린터는 그 기호들을 요구하는 대로 출력하도록 고안되어야 한다. 물론 프린터(인쇄기)는 문자 그대로 어떤 것을 “인쇄”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인쇄기의 작용은 전적으로 전기적인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인쇄기는 음성으로 출력을 산출할 수도 있고, 또는 출력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음극선 모니터일 수도 있다.
그러면, 기계의 “내적 상태들”은 어떠한가 ? 그것들은 어떻게 물리적으로 실현되는가 ? TM1이라는 기계표에 있는 다음의 구체적인 지침을 고려해 보자. 만일 그 기계가 상태 q0에 있으면서 +를 읽고 있다면, +를 1로 대치하고 오른쪽으로 한칸 이동하고 q1 상태로 들어가라. p0과 p1을 각기 q0과 q1을 실현하는 물리적 상태들이라고 가정하자. 그때 p0과 p1은 다음 조건을 만족해야만 한다. <+의 물리적 스캐닝과 함께 물리 상태 p0의 발생>은, 다음 세 가지 물리적 사건들을 물리적으로 야기해야만 한다.
1] +의 물리적 구현체를 1의 물리적 구현체로 대치하는 것
2] 물리적 테이프 (혹은 헤드) 의 적절한 물리적 이동
3] 그 기계 안에 상태 p1의 발생
일반적으로 그 경우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기계표에서 언급된 다양한 추상적 매개 변수들 사이의 기능적 혹은 계산적 관계들을 이들 변수들의 물리적 구현체들 사이의 적절한 인과적 관계들로 대치하는 것이다.
그때 논리적 관점에서 보면, 내적 상태들은 다른 변수들과의 관계에 의해 오직 “암묵적으로만 정의”된다. q들을 실현하는 p들의 본래적인 물리적 성질들은, 그것들이 올바른 인과적/관계적 속성들을 갖는 한,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Qj = 알파벳 기호들을 <Bk, R (or L), qh>의 3항 관계로 배치하는 기능
기능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하나의 주어진 심적 상태를 그 종류의 심적 상태로 만드는 것은 바로 감각적 입력과 행동적 출력 및 다른 심적 상태들에 대한 그것의 인과적 역할이듯이, 마찬가지로 어떤 물리적 상태를 주어진 기계 상태의 실현으로 만드는 것은 입력과 출력 및 다른 기계 상태들을 실현하는 물리적 상태들에 대한 그것의 인과적 역할이다. 이런 이유로, 기능주의자가 마음의 모델을 위해 튜링기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S를 물리적 체계라고 하자. 그리고 우리는 그것의 입력과 출력들을 기술하기 위한 어떤 어휘를 채택했다고 하자. 즉, 우리는 무엇을 주위 상황으로부터 받아들인 입력으로 간주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그것의 행동적 출력들로 간주할 것인지에 관한 명세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체계 S가 주어진 입/출력 명세서에 관한 튜링 기계 M을 실현할 경우에만, 튜링기계 M은 그 입/출력 명세서와 관련된 체계 S의 기계 기술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기계 기술임'이라는 관계는 '실현함'이라는 관계의 역(실현됨)이 된다. 우리는 또한 기계 기술보다 약한 하나의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튜링 기계 M이 S의 입-출력 상관 관계들에 대한 올바른 기술을 제공할 그 경우에만, M은 (주어진 입/출력 명세서에 관한) S의 '행동적 기술'이다. 그래서 S에 관한 모든 기계 기술은 또한 행동적 기술이지만,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M은 S를 규정하는 입/출력 상관관계들의 참 기술을 제공할 수 있으나, 그것의 기계 상태들은 S안에서 실현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S의 내적 작용들은 M의 기계표가 제시한 기능적/계산적 관련성을 올바로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상 S의 올바른 기계 기술을 제공하는, M이 아닌, 또다른 튜링기계 M*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입/출력을 가진 두 개의 물리적 체계들은 동일한 튜링 기계의 실현자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 귀결된다(계산기 TM1과 TM2가 그 예이다.) ; (이렇게 하여, 다수실현가능성을 고지한다).
5/ 기계 기능주의 : 그 동기와 주요 주창자들
(이 절에 대한 나의 발표 요약 : 그러나 중요한 내용이 잘 잡혀 있는지는 의문이다.)
S의 행동적 기술에 해당하는 튜링기계들은 S에 대한 올바른 행동적 예측을 가능하게 하며 동일한 입력에 대하여 동일한 출력을 예측할 것이다. 그러나 S의 행동적 기술들이 각기 다른 계산 과정들을 통하여 동일한 출력에 도달할 때, 그것들 사이엔 기계표에 기반한 동형적인 인과적 과정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때 주체 S의 심리학을 어떤 튜링 기계가 표현할 수 있는가 ?
도구주의와 [심성의] 반실재론의 입장에서는 예를 들면 행동적으로 동일한 튜링 기계들인 M1과 M2 중 어느 것이 S에 대해 실제로 참인 심리학 이론이 될 수 있는가 묻지 않는다. 그러나 “심성 실재성”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S에 대한 기계 기술인 M1만을 S의 '참인 심리학'으로 간주한다. 이때 입출력에 대한 올바른 인과적 매개체로서의 내적 상태 p는 M1안에서만 실재성이 부여되는데, 그것은 M1가 실현한 물리적 상태들 간 인과 관계들의 집합이 M2와 다르기 때문이다.
[심성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논제] 기계 기능주의는 기계 기술을 갖는다는 것이 그것의 심성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두뇌의 계산적 속성 때문에 심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끝)
'한 유기체의 심리학'은 하나의 튜링 기계에 의해 표현된다는 생각, 즉 기계 기능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이 관점에 대하여 고려해 보자. 심리적 주체 S의 가능한 모든 입력과 출력들의 완전한 명세서를 V라고 하고, S에게 실제로 그리고 가능한 모든 입/출력의 상관 관계들을 C라고 하자 (즉, C는 V 안에 기재된 모든 입력과 출력들에 있어서, S에게 어떤 입력들이 적용되고 어떤 출력이 산출되는지에 관한 완전한 명세서이다). S를 위한 심리학을 구성함에 있어서, 우리는 S 안에 내적 상태들의 집합을 상정함으로써 C에 관한 명료한 체계화를 제공하는 하나의 '이론'을 구성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이론은 S에게 적용되는 어떠한 입력에 대해서도 S가 어떤 출력을 산출할 것인지를 예측할 것이며, 또한 특정한 어떤 입력이 특정한 출력을 산출하는 이유를 '설명'해줄 것이다. 우리가 그 체계의 내적 상태들을 언급하지 않는 한, 어떤 최소한의 복잡한 행동 체계에서도 이런 종류의 체계화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S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입력이 항상 S로 하여금 동일한 출력을 낳도록 자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나의 이해에 관한 지적을 받았으나, 행동주의를 조금 더 공부하지 않은 이상 행동주의가 동일한 입력에서 동일한 출력으로 가는 조건문을 탐구하는 것과 이 문장이 대조적인지 아닌지의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주어진 입력에 의해 산출되는 실제의 출력은, 그때의 S의 내적 상태에 의존할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어떤 튜링 기계가 (혹은 기계들이) S의 심리에 관한 기술로서 적합할 것인가 ? 분명히 어떤 적합한 (#무엇에 적합한?) 튜링 기계도, 위에서 정의한 바에 따라, S의 행동적 기술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즉, 그것은 S의 입/출력 간의 상관관계들에 관한 올바른 기술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S의 입/출력 상관관계들에 관한 올바른 표상을 제공하는 튜링기계는 하나 이상 있음에 틀림없고, 사실상 그러한 튜링 기계는 무한히 많을 것이다.
이 기계들은 각기 우리의 심리적 주체 S에 대한 올바른 행동적 기술을 갖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예측적 도구'로서 동등하게 좋은 것들이다. 비록 그것들 중 일부는 다루기가 더 용이하고 계산적 측면에서 더 효율적일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입력 조건들에 대하여 동일한 행동 출력을 예측할 것이다. 이것은 “행동적 기술”의 개념으로부터 나오는 단순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다른 튜링 기계들이며, 그 차이들은 왜 중요한가 ?
행동적으로 동일한 튜링 기계들, 즉 M1과 M2가 어떻게 서로 다를 수 있는지는 명백하다. 그것들이 다른 튜링 기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들의 기계표가 다르다고 ㅡ 즉 튜링 기계들이 개별화되는 방식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일한 입력에 대하여, M1과 M2가 아마도 '다른 계산 과정들을' 통하여 동일한 출력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각의 기계는 내적 상태들의 집합을 갖는다. M1의 내적 상태들의 집합을 <q0, q1, …, qn>이라고 하고, M2의 그것을 <r0, r1, …, rm>이라고 하자. 또한 M1은 우리의 심리적 주체 S의 기계 기술이지만, M2는 S의 기계 기술이 아니라고 가정하자. 다시 말하면, S는 M1의 물리적 실현이지만, M2의 물리적 실현은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M1에서 표현된 계산적 관계들은 S의 물리적 상태들간의 인과관계들의 집합에 반영되는 반면에, M2에서 표현된 계산적 관계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M1의 내적 상태들 <q0, q1, …, qn>에 대응하여 S 안에 실제의 물리적/신경생물학적 상태들 <Q0, Q1, …, Qn>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Q들은 서로간에 그리고 물리적 스캐너(감각-기관들)와 물리적 프린터(전동 기계)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들은 M1에서 발생하는 모든 계산 과정들에 대응하여 그와 동형적인 인과적 과정들이 S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증하는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즉 S는 M1의 “인과적 동형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분명히, 비록 M1과 M2는 둘 다 S의 관찰 가능한 입력과 출력 행동들에 관한 정확한 예측 이론들일지라도, M1은 S에게 “심리학적으로 실재”하는 것이지만 M2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S는 그것의 상태들이 ㅡ M1의 기계표에 의해 표상되는 계산 구조를 반영하는 ㅡ 인과적 체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물리적 구조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S의 물리적/인과적 작용들은 M1의 계산적 작용들의 동형적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M1은 S에 대한 “참인 심리학”을 제공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설명적' 이론, 즉 '왜 S는 주어진 입력 조건들 하에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일 경우, 이것은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입력 i가 S에게 주어졌을 때, S는 내적 상태 p에 있었기 '때문에' 행동적 출력 o를 산출했다고 하자. 이것은, 그 호소된 상태 (즉 p)가 어떤 의미에서 그 체계의 real 상태일 경우에만, 하나의 설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상태 p가 i와 연접하여 o를 야기하고, 그리고 p가 실제로 S의 상태가 아닌 한 이것이 야기될 수 없을 경우에만, 그것은 하나의 인과적 설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제 분명한 것은, p가 S에 의해 실현된 튜링 기계, 즉 M1의 내적 상태일 경우에만 우리는 p에게 실재성을 부여할 수 있으며, 만일 p가 S에 의해 실현되지 않은 튜링 기계, 즉 M2의 내적 상태라면 그것에 실재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에는 S의 실제적인 물리 상태가 존재하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 동일한 입력 – 다른 계산과정 – 동일한 출력? 실제로 해봐야 겠는데...)
(아래부터는 요약 두번째 문단과 관련된 책 내용에서 요약에 덧붙여 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도구주의 입장을 넘어서서 심리학적 실재성을 주장하고자 하는가 ? 첫째, 이미 본 대로 만일 우리가 심리학 이론이 행동에 관한 설명들(특히 인과적 설명들)을 낳기를 기대한다면, 심리 상태들, 즉 심리학이 상정하는 심리적 주체의 내적 상태들은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올바른 심리학 이론이 상정하는 심리상태, 능력, 기능들의 기초가 되는 실제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 한 유기체에 대한 올바른 심리학은, 단지 그것에 대한 행동적으로 적합한 기술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기계기술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심리적 이론에 대한 실재론의 표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아래부터는 심성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논제와 관련한다.)
기능주의는 어떤 구조적 복잡성을 지닌 두뇌를 갖는 것이 심성을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두뇌의 중요성은 정확히 그것이 하나의 튜링 기계라는 점에 놓여 있다. 우리의 심성을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두뇌의 계산적 속성들이지, 그것의 생물학적 속성들이 아니다. 요약하면, 우리의 두뇌가 우리의 마음인 이유는, 그것이 컴퓨터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유기적인 생물학적 구조이기 때문이 아니다.
(끝)
+ 임의의 심리적 주체에 대하여, (입출력의 명세서와 관련된) 기계기술인 튜링기계가 '오직 하나' 있는가 ? 혹은 중요한 점에서 차이있는 다수의 기계 기술들이 있을 수 있는가 ? 심리학의 실재론은 유일한 고유의 기계 기술이 있을 것을 요구하는가 ?
6/ 기계 기능주의 : 더 고려할 점들
(이 절에 대한 나의 발표 요약)
S1과 S2가 동일한 내적 기계 상태인 q를 가질 때, 이 q는 그것들의 기계표 내에서 동일한 계산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S1과 S2의 기계표에서 각 q가 q1로 갔을 때 q1이 명령하는 내적 상태는 다를 수 있으므로, 다른 기계표 사이에서 q가 동일함을 말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내적 상태들은 시스템 내에서 상호의존적으로만 정의된다). [# 제대로 읽은 것인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런데 만약 동일한 내적 기계 상태인 q가 동일한 튜링기계를 실현하는 두 물리체계에서 같다면, 컴퓨터와 인간은 동일한 심리적 지위를 가지는가 ? 동일하다고 해볼 때 이상함이 느껴지는 것은, 컴퓨터는 인간이 가진 “목적론적 경향성”을 결여하므로, 컴퓨터가 자체적으로 행위를 구성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입출력을 단순히 일련의 물질적 기호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거나, 입출력 명세서의 기호가 같다는 점만으로 두 체계를 동형적인 것으로 파악할 때, 모방을 실재로부터 구분하는 일은 성사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입출력 명세서의 본성 구분에서 “적절성”을 찾지 못했기에 발생하는 문제1이다 [# 애매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 순화하자면, 입출력 명세서를 본성적으로 구분 시켜주는 그 무언가가 없기에...가 되겠다].
또한 만약 동일한 내적 기계 상태인 q가 동일한 튜링 기계를 실현하는 두 물리체계에서 같다면, 인간과 문어가 동일한 고통 상태에 있기 위해 그들이 동형적 심리 체계를 공유해야 하는가 ? 이에 대해 나올 수 있는 판단은 <총체적> 심리체계들끼리는 달라도 되지만 <어떤> 튜링 기계가 인간과 문어에 대한 올바른 기계 기술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고통을 포함하는 축소적 심리 영역이 <총체적> 영역에서 분리되어 나오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인간과 문어의 고통에 대한 입출력 조건의 특징이 비슷해야 하는데, 입출력 명세서를 본성적으로 비슷하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이 없다면, 역시나 인간과 문어는 동일한 고통 상태에 있다고 보기 힘들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이 입출력 명세서의 본성 구분에서 “적절성”을 찾지 못했기에 발생하는 문제2이다.
[#실제 이 발표를 듣고 전세리는 입출력 명세서의 본성 구분에서 적절성을 찾느냐 못 찾느냐의 문제로 이 절에 나온 모든 반론이 다루어지느냐 지적하였다. 일단 나는 '입출력 명세서의 본성 구분에서의 적절성'이라는 말을 수정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제기인 '두 주체들이 단 하나의 심리 상태를 공유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총체적 심리 체계는 동일해야 함'을 앞의 것과 연결시켜야 한다.]
(끝)
두 체계들, S1과 S2가 (동일한 시간이나 다른 시간들에) 동일한 심적 상태에 있다고 가정하자. 심적 유형/종류에 대한 기능주의의 개념에 의하면, S1과 S2가 동일한 상태에 있기 위하여, S1이 q상태에 있고 S2도 q 상태에 있는 어떤 튜링 기계상태 q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S1과 S2는 둘다 물리적 체계들이며, 그것들은 매우 다른 종류의 체계들일 수 있다(다수 실현 가능성). 그것들은 어떤 물리적 속성들을 또한 예화한다 – 물리적 체계들로서 그것들은 물리적 상태들을 갖는다. 그것이 둘 다 시간 t에 기계 상태 q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 시간 t에 S1(물리적 체계)이 Q1상태(물리적 상태)에 있고 S2가 Q2상태에 있으면서, Q1이 S1 안의 q를 실현하고, Q2가 S2 안의 q를 실현하는 그런 물리적 상태들 Q1과 Q2가 존재한다. 그리고 Q1과 Q2를 공통으로 묶어주는 것은, 오직 각각의 체계 안에서 그것들이 동일한 내적 기계 상태를 실행한다는 사실, 즉 각 체계 안에서 동일한 계산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일한 내적 기계 상태 q”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오직 주어진 기계표와의 관계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튜링 기계의 내적 상태들은 오직 주어진 기계표와 관련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사용했던 기계표의 배열 안에서, 내적 상태 q는 전적으로 그 아래에 세로로 나열된 지침들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러나 이 지침들은 다른 내적 상태들, 말하자면 qi, qj, qk 등을 지칭하며, 그리고 이것들 아래 나오는 지침들은 상태 q를 다시금 지칭하게 된다. 따라서 이 상태들은 상호 의존적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여러 개의 기계표들을 가로질러 한 내적 상태의 동일성이나 차이성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 튜링 기계의 내적 상태 qi와 다른 튜링 기계의 내적 상태 qk를 놓고, qi가 qk와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두 개의 물리적 기계들이 동일한 튜링기계의 실현자들이 아닌 한, 물리적으로 실현된 한 튜링 기계의 물리적 상태 Q1에 대하여, 그것이 다른 물리적 기계의 물리적 상태 Qk가 실현한 것과 동일한 내적 기계 상태 q를 실현한다거나 실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
그렇다면, 심적 유형에 대한, 기계-기능주의적 관점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 임의의 두 주체들이 동일한 심적 상태에 있기 위하여, 그들은 동일한 튜링 기계를 실현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동일한 튜링 기계를 실현한다면, 그들의 전체 심리 체계는 동일해야 한다. 즉, 기계 기능주의에 따르면, 두 주체들이 단 하나의 심리 상태를 공유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총체적 심리 체계는 동일해야 한다. 이것은 터무니 없는 소리로 들린다. 두 사람이 하나의 심적 상태(가령, 눈은 하얗다라는 믿음)를 공유하기 위해서 그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심리학적 규칙들의 총체적 집합이 정확히 동일해야 할 것을 요구하기란 수긍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더 논의하기 전에, 우리는 한 체계의 입력과 출력들이 어떻게 명시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 다른 문제를 첫번째 문제와 연결시켜 다루려고 한다.]
두 체계 S1과 S2가 동일한 튜링 기계를 실현한다고 가정하자. 즉 동일한 튜링 기계가 각 체계의 올바른 기계 기술을 제공한다고 하자. 실현이란 특정한 입/출력 명세서에 관계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즉 한 체계가 주어진 튜링기계를 실현하는지 여부를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이전에 우리는 무엇을 입력 조건들로 간주하고 무엇을 그 체계의 행동 출력으로 간주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V1과 V2를 각기 동일한 기계 기술을 공유하고 있는 S1과 S2의 입/출력 명세서라고 하자. V1과 V2는, 동일한 기계표와 관계하고 있으므로, 동형적이어야 한다. 즉 V1의 요소들은 V2의 요소들과 기계표 안에서 그것들의 역할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일대일 상호 관련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론 우리의 튜링 기계가 심리적 체계로서 자격을 갖출 만큼 적절한 복잡성을 갖는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S1은 인간(래리), S2는 하나의 전자장치 컴퓨터(맥스)라고 가정하자. 따라서 V2에 의해 명시된 입력과 출력들은 인쇄기에 출력되며 자판에 입력되는 일련의 기호들이다. 그때 우리가 래리에게 인정하는 정도의 심리적 지위를 맥스에게 인정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심리적 주체와 그것을 모방하는 컴퓨터를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적어도 실재하는 것과 그 실재하는 것에 대한 컴퓨터의 모방 사이에 어떤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V1과 V2를 차이난다고 이야기하기 위해, 입출력이 아주 상이한 전자장치 컴퓨터를 꼭 가정할 필요가 있을까? 일단 인간의 기계표를 완전히 해명한 뒤에 컴퓨터로 virtual 하게 구현한다는 것인가 ? 인간의 복제적 유사품의 V3는 어떨까 ?]
맥스와 래리를 비교할 시, 하나의 심리 체계로서 맥스에 대해 분명히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것의 입/출력들이다. 즉 맥스의 입/출력 명세서는 래리의 것과 동형적인 한편, 그것은 심리학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부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일련의 기호들로 이루어진 입력과 출력을 참인 심성을 가진 어떤 존재에게 적합한 것으로 간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일련의 기호들을 돌려서 밖으로 내보는 것은 우리가 래리에게서 보는 완전한 행동들과 같지 않다. 맥스의 출력은 명백히 그것의 생존이나 지속적인 기능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또한 그것의 입력은 그 주변 상황들에 대한 정보를 맥스에게 제공하는 기능을 갖지 않는다. 그러한 결과로서, 그것의 출력들은 그것의 입력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소위 “목적론적 경향성”을 결여한다. 이 모든 것들이 맥스의 출력을 실제 행동이나 행위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간주하기 어렵게 만든다. [# 동형적인 입출력 명세서 V1, V2의 차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그것이 구현되는 물리적 상태의 차이가 아니라, V1과 V2는 똑같더라도 S1이 가진 감각을 S2는 가질 수 없다, 이런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
튜링 기계의 실현들로서 맥스와 래리는 대칭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우리가 심성의 측면에서 반대칭성을 보게 된다면, 이 점에서 입력과 출력의 본성이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우리의 고려들은, 튜링 기계를 실현하는 하나의 체계를 심리적 체계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입출력 명세서가 '심리학적으로 적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입출력의 적합성을 기능주의와 일관적인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
우리가 행동주의에 관하여 논의했던 유사한 지적을 상기하라. 즉,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심적 상태들을 행동주의적으로 정의함에 있어서 행동주의자들에게 언급이 허용되는 행동이란 “물리적 행동”이어야 하며,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나 심적 요소를 가진 의도적 행위여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의 계획이 행동을 통하여 심성을 얻는 것이라면, 당신의 행동 개념은 심성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
위와 동일한 제약이 기계 기능주의자에게도 적용된다. 그녀의 계획은 튜링 기계들과 입/출력 관계들에 의해 심성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녀의 입/출력은 행동주의자의 입/출력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입/출력이어야 한다. 맥스는 가지지 않지만 래리는 가진 목적론의 개념(목적성 혹은 목표 지향성)이, 선결문제의 요구 없이, 심리학적으로 중립적인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 아마도 어떤 생물/진화론적인 접근이 시도될 수 있겠지만, 과연 그러한 생물-목적론bioteleological적 시도가 성공할 것인지 여부는 여전히 열려 있는 물음으로 남아 있다. 아무튼 이것은 기계 기능주의가 부딪쳐야 할 하나의 도전이다. [# V1과 V2를 차이짓는, '목적론적 개념'이 기능주의-물리주의에 대한 반론인 감각질과 일종의 유사한 작동인 것인가 ?]
이제 두 개의 심리적 주체들이 총체적으로 동일한 심리 체계를 가질 경우에만 그들은 동일한 심리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결론에 기계 기능주의가 개입하는지 하는 물음으로 돌아가보자. 앞에서 보았듯이 그러한 함축은, <기계 기능주의에 따르면 동일한 심리 상태에 있다는 것은 동일한 내적 기계 상태에 있다는 것이고, 기계 상태의 동일성에 대한 언급은 동일한 튜링 기계와의 관계에서만 유의미하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되었다. 아마도 더 심각한 문제는, 두 개의 심리적 주체들이 하나의 동일한 총체적 심리 체계를 갖지 않는 한, 그들은 동일한 심리 상태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일한 튜링 기계를 실현하는 두 주체들의 입/출력 명세서들이 다를 수 있다는 것과 심성들의 개별화는 입/출력 명세서들에 민감하게 의존한다, 는 사실을 고려할 때 위 결론은 얼마간 약화될 수 있다.) [#]
두 심리적 주체들이 단 하나의 심리 상태라도 공유하려면, 그들의 총체적 심리 체계들이 서로 동형적이어야만 하므로, 다수 실현 가능성으로부터의 동일한 고통 상태 정의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두 인간들이 단일한 심리 상태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정확히 하나의 동일한 총체적 심리 체계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상황이 기계 기능주의에게 그리 어두운 것은 아니다. 인간과 문어가 둘 다 고통 상태에 있기 위하여 문어의 '총체적' 심리 체계가 인간의 '총체적' 심리 체계와 동연적이거나 동형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필요한 것은 둘에 대한 올바른 기계 기술인, 그리고 그 안에서 고통이 하나의 내적 기계 상태로 나타나는, '어떤' 튜링 기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인간과 문어가 고통을 포함하는 부분적 혹은 축소적 심리 영역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고통의 심리 영역이 총체적 심리 영역으로부터 그렇게 분리되거나 추상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심적 상태에 관한 기능주의적 관점의 맥락에서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살펴볼 또하나의 난점이 잠재되어 있다. 순수하게 물리적 관점에서 보아 문어의 피하는 동작은 미국의 중산층 중년 남성들의 피하는 행동과 얼마나 유사한가 ? 인간과 문어 및 고통을 가질 수 있는 다른 모든 유기체나 체계들에게 적합한, 고통 행동에 대한 추상적이고 충분한 비심리적 기술이 존재하는가 ? → 이것에 의해서도 문어와 인간은 동일한 고통 상태에 있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다수 실현 가능성으로부터의 동일한 고통 상태 정의도 기계 기능주의에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 동일한 고통 상태는 아니더라도 심리학적으로 서로 동형적인 상태에는 있을 수 있다고 번역되어 있다.]
7/ 튜링 테스트 * 계산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테스트
(나의 발표 요약이다.)
튜링이 우리가 그것을 기계라고 구분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를 일관적으로 속일 수 있는 컴퓨터가 있을 때 그것에도 인간이 갖는 종류의 심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간주하면서 고안함. 이 테스트는 인간을 특징짓는 종류의 지능만 테스트되거나 혹은 감각과 지각 상태들의 존재가 테스트되기 어려운 한계를 가졌으나, 심성의 충분 조건을 제공하려 한다.
튜링의 추론에는 다음의 튜링 논제가 전제되어 있다 : 만일 두 체계들이 입/출력에서 동일하다면, 그것들은 동일한 심리적 지위를 가진다. 특히 그 중 하나가 심적 존재일 경우에만 다른 하나도 심적이다.
이는 두 개의 튜링기계들이 어떤 체계의 올바른 행동적 기술들이라면, 그것들은 동일한 정도의 심성의 “적합성” 조건을 만족한다고 본 점에서, 입력과 출력만을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행동주의에 더 가깝다. 기계 기능주의라면 입출력 동치나 행동적 동치가 동일한 심성을 인정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볼 것이다. 후자의 관점에서 비판해본다면, 내적 과정의 역할이 심성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 즉, 어떤 체계가 심성을 가짐을 결정하기 위해 입출력 상관관계만이 아니라 내적 과정의 구조도 고려해야 한다.
(끝)
8/ 중국어방 논증
(# 교수님은 이것에 대해, 물리주의가 가진 전반적인 것들에 대한 반박은 될 수 있더라도, 기계 기능주의에 대해서는 문제제기가 되지 않는 논증이라고 언급하였다. 이 논증은 기계가 우리와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논증은 아니다.)
심적 과정들은 표상적 내용이나 의미들 [# 이것들도 감각질과 비슷한 지보인가? 이하를 조금 참고하길 바란다. 감각질은 아직껏 신경 생리학적에 의해 포착될 가능성이 없는가 ? 또한 감각질에 관한 마지막 페이지를 참고하길 바란다. 생각해보자.] 에 의해 진행된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통사적으로 움직이는 계산과정들일 수 없으며, 마음은 단지 컴퓨터일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의미와 심적 인과성에 관한 정당하지만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심성에 관한 계산주의적 설명의 특정 문제와 독립하여, 심성에 관한 어떠한 유물론적 관점에 대해서도 제기되는 일반적 문제이다. 서얼 자신이 좋아하는 입장을 고려해보면 그 이유가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심성은 인간의 두뇌와 같은 복잡한 생물학적 체계들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관련되어 있는 신경 상태들이 세계에 대하여 무엇을 표상하든지 혹은 과연 어떤 것이라도 표상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동일한 신경 생리적 인과 과정들이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설득력있다. 신경 과정들은, 계산 과정들이 그렇듯이, 의미와 표상 내용들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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