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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요약 필요
(아래는 내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현재 프랑스 사상가들에게는 한편에는 철학이 다른편에는 과학이 나란히 놓여 있다. 철학은 모든 자연물을 의식에 의해 구성된 객관적 단위체로 보지만, 과학은 유기체와 의식을 실재의 두 질서로 놓고서 그것들 간의 상호관계 중에서 그것들을 ‘원인’과 ‘결과’로 다룬다.” ; 의도는, 인간을 자연으로 환원시키거나 자연을 이성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의식과 자연의 유기적이고, 심리적인 관계들을, 심지어 사회적인 관계들까지도” 이해하는 것이었다. ; 그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그것들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모두 드러나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과학 내에서의, 철학 내에서의, 과학과 철학의 관계 내에서의 인간과 자연 간의 단절을 극복하기를 원했다.
그의 처음의 접근방식은 한 무리의 독일 심리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들은 1930년대 초에 프랑스로 와서 경험심리학과 철학에서의 현상학적 방법을 결합시키고자 시도하고 있었다.(The phnomenological movement II) 그러므로 <행동의 구조>가 경험심리학, 특히 왓슨에 의해 대표되는 행동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관찰> 자료들을 좀더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로 대안을 서술하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게슈탈트 심리학 응용)
심리학 비판과 재정향.
실험심리학의 창시자들 중 한 사람인 파블로프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즉 인간신체 내부에서 진행되는 것과 외부에서 진행되는 것 사이에 근본적인 연속성이 있다고 보았다. 파블로프의 생리학을 경험심리학의 근거로 사용했던 왓슨은 파블로프의 환원을 극단 몰고가, 의식은 설명적 가설로서 필수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무시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파블로프는 여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왓슨의 행동주의 심리학의 생리학적 근거는 반사궁 이론the theory of reflex arc이다. 반사궁은 외부로부터 신체에 도달한 자극이 신체를 통해 전달되어 반응을 일으키는 데 사용되는 통로들을 가리킨다. 자극은 감각기관(즉 수용기)에서 받아들여진다. 감각신경 즉 구심심경이 수용된 자극을 중앙신경체계로 전달한다. 그 다음엔 운동신경 즉 원심신경이 중앙신경체계로부터 자극을 실행기(근육이나 분비선)에 전달하여 반응을 일으킨다. 대부분의 신체운동들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즉 연결되어 작동되는 많은 반사궁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연결부들은 반사궁들 사이에 위치하여, 반응들을 상호 “조정”하여 조절된 행동이 일어나도록 한다.
이러한 이론은 두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것들에 메를로퐁티는 도전하고 있다.
신체는 매 순간마다 조절되는 “부분들의 총합”이며, 감각장치들의 모든 부분은 ‘오직’ 한 형태의 자극에만 감수성을 가진다.
자극과 반응의 일대일 상관관계에 맞지 않는 실험심리학의 많은 연구결과 지적. 행동주의 이론을 실험하기 위하여 고안된 쾰러의 원숭이(원숭이를 어두운 방에 가두고 한 줄기 빛을 비추면, 원숭이는 그 빛 쪽을 향해 돌아섬. 행동주의에 따르면, 이런 일은 의식의 어떤의식에 의해 설명돼선 안되고 어떤 운동근육에 작용하여 반응을 일으키는 빛 그 자체에 의해서 오히려 설명되어야 함. 그러므로 빛은 다양한 운동메커니즘에 작동하는 일련의 자극점들로 분석됨.)
서로에 대하여 외적인 이러한 부분적 과정들 모두는, 수용장치인 감각기관들과 실행근육들간에 이미 성립되어 있는 상호관계에 따라, 일정한 방식의 반응들을 낳게 됨. 그러므로 신경활동이란 수많은 자율적 회로들이 작동하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임. 그러나 쾰러가 한대로, 원숭이의 내적인 눈근육들과 외적 근육들에 명령하는 신경조직들과 또 연결시킨 후 끝으로 동물을 어두운 (…..) 일대일 상관관계는 없으며 다양한 가능한 조합들이 있고, 이런 것들에 대한 설명은 자극-반응이라는 가정적 모형을 토대로 하는 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서 천체를 서술할 때 필요했던 것 같은 복잡이론 필요로 하게 될 것. 행동주의는 실패한 이론; 하나는 자극은 유기체들과 독립해서 정의될 수 없기 때문, 다른 하나는 자극과 반응이 행동주의적으로 정의될 때 이들 사이의 관계 모형에 항구성이 없기 때문.
일반적인 삶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신체적 지향body intention을 통한 유기체의 적응. 인과율은 직선적으로보다는 순환적으로 서술되어야 함.
* 게슈탈트주의자들이 “형태” 즉 구조라고 부르는 것
i. 신경체계는 외적요소들과 유기체 내적 요소들을 동시에 포함하는 힘들의 장
ii. 이런 힘들은 어떤 분포양식에 따르는 균형을 지향, 이런 균형과 일치하는 운동을 신체로부터 획득
iii. 수행된 운동은 원심적 체계의 상태를 변경시키고, 이런 변경이 또다시 새로운 운동들을 일으킴.
순환적 서술을 위해….
“비록 국부적인 것이라 해도 하나의 손상은 전체 행동과 관련된 구조적인 장애를 일으킬 수 있으며, 다른 피질 영역들에 손상들이 있을 때에도 유사한 구조적 장애들이 일어날 수 있다.” 하나의 장애는 엄격하게 국부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장애는 상황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전체 유기체의 반응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증상들은 제기된 문제들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손상들은 직접적 경험을 방해하지는 않지만, 이런 경험에 대한 반성을 방해한다. (reader의 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기능은, 어떤 특정한 부분에서의 간섭이 다른 특정한 부분에서의 간섭과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그런 전체적인 과정으로 생각될 수는 없다. 신경기능은 그것이 이루어지는 기층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신경기층에서 장소는 애매한 의미를 갖는다. 혼합된 국부화라는 개념과 기능적 병행성이라는 개념만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국부적인 자극들이 전체 유기체에 배분되고 유기체의 행동을 재규정한다. 그러므로 국부화는 국부적이며 또 기능적이기도, 즉 전체 유기체에 관련되기도 한다. 게다가, 신경활동과 의식작동 간에는 병행성이 있다. 그러나 상응은 이전의 심리학이나 생리학에서처럼 일대일이 아니다. 병행성은 구조적으로 그리고 기능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이 경험의 통합과 관련된 요소들이다. 메를로 퐁티는 세가지 경험 ; 공간지각 ; 색채지각; 언어에 대하여 앞에서 제시된 원칙들을 적용함으로써 이런 현상들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 심리학은 국부적인 상황 내에서 작용하는 힘들(“모습”)만을 고려하여, 이러한 힘들이 작용하는 일반적인 맥락(“마당”)을 무시하고 있다.
신체가 외적인 자극이라는 ‘원인들’에 반응하고 적응하는 수동적인 수행자이다.
새로운 형이상학적 인간학의 개요.
만약 우리가 이제 막 끝낸 비판의 ‘철학적’ 의미를 고려한다면, 문제는 서로 다른 위계를 가진 실재들을 서로에 참견하는 ‘실체’로 다루는 데에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자연(물리적인 것), 신체(생리적인 것), 마음(심리적인 것)은 서로 통합적으로 관련될 수 없는 세 가지 위계의 실재들이다. 행동주의는, 그리고 심지어 게슈탈트 심리학조차, 이들 위계들 모두를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시킴으로써 행동에 대한 설명에서 의식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반면에 내관주의 심리학은 의식을 물리적 세계에 관련시키지 않은 채 서술하였다. ; 행동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나 유심론적 설명 모두 환원적이다.
; 살아지는 세계를 정신이나 물질로 환원시키지 않고, 다시말해 이분화시키지 않고, 또 살아지는 세계까 이해불가능한 것이라고 단언하지 않으면서도 살아지는 세계를 다룰 수 있는 ‘확장된 이성’이다.
그러나 환원적이지 않고서 어떻게 유기체들과 환경 사이의 관계를 서술할 수 있을까? 행동을 우리의 반성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하나의 ‘구조’로 다룸으로써 유기체들과 환경 사이의 관계를 서술할 것을 제안한다.
행동을 몇 가지 수준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융합적 형태
; 이 수준에서 행동은 어떤 유형의 상황이나 어떤 특별한 자극복합에 연결되어 있다. 전체 복합체가 반응을 위해 요청된다. 불가사리는 자신의 자연 서식장소에서 자극을 흉내내는 자극에 대해서만 반응하려고 한다. 상황에 대한 불가사리의 전체 반응은 “본능”적이다. 이런 수준의 실존에서 유기체는 자신의 자연적 조건들에 구속되어 있다. 어떤 유기체들은 이런 수준에서만 살고 <행동하고> 있으나, 모든 유기체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 아래서는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부동적인 형태
; 본능에 의해 결정되어 있지 않은 ‘신호들’이 출현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신호들이, 신호를 이루고 있는 재료들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구조에 근거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질료적인 토대를 뛰어넘는 배치가 나타난다. 가령 흰 커튼이 쳐 있는 미로를 뛰어가면 그 끝에서 보상을 받는 그런 훈련을 어떤 동물에게 시킬 수 있다. 미로의 끝에 다다랐을 때, 그 동물에게 쇼크가 주어지면, 그 동물은 “상황”을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면 쇼크가 주어지는 경험을 한 후에는 더 이상 흰 커튼이 쳐 있는 그 미로를 달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동물은 흰 커튼과 그 끝에서의 쇼크 간의 관계를 지각한 것이다. 그 동물의 행동을 설명해주는 것은 보상이 아니라 이러한 배치이다.
상징적 형태
; 동물행동에서 신호들은 언제나 신호로 남지 결코 상징이 되지 못한다. 한 등받이의자에서 다른 등받이의자로 건너뛰도록 훈련받은 동물은 맨의자와 팔걸이의자가 주어지거나 두 개의 맨의자가 주어지면 건너뛰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 마찬가지 방식으로 알려지지 앟았거나 잊혀진 언어로 쓰여진 문장들을 해독할 수 있다. 상징적 행위의 이런 예들은 내적 구조의 분석을 통해서 외적 의미가 판단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상징적 힘은 이런 내적인 구조를 분석하는 힘이며, 이것이 동물이 결여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제 중요한 전환점에 다다랐다. 왜냐면 환원적 설명들은, 정신을 전제로 하든 물질을 전제로 하든,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수준에서의 유기체와 환경 간의 상호작용은 세계에-속하는 다양한 방식들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 또한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세계가 지각되는 방식의 물리적 위계
한편으로, 물리적 법칙들이 자연 내의 개별적 사물들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 법칙들은 안정된 집단들에 속하며, 이런 집단들의 구성물들이 관계되어 있는 “장”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법칙들은 실제로는 구조들이다. 그러나 이 구조들은 게슈탈트 심리학이 믿고 있듯이 자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들은 사물들이 상호작용하는 장에 속한다. 물리적 형태들은 물리적 실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조화된 법칙들이라는 형태로 지각의 대상이 되며, 자연에 대한 지식을 가능하게 만든다. 물리적 질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지각세계 내에서 관찰자가 구조를 파악하기 때문이며, 이렇게 파악되는 구조는 관찰자에게도 관찰되는 사물들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구조는 오히려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이 서로 연결된 세계에 속한다.
생명적 위계
이제 우리는 유기체의 ‘행동’을 다루고 있다. 유기체와 그 환경과의 “순환적” 관계는 물리적 자연에서 성립하는 관계와는 다른 유형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법칙들 대신에 “규범들”을 말해야 한다. 앞의 색채지각의 예에서 보았듯이, 유기체의 반응을 결정하는 것은 자극들의 질료적인 속성들이 아니라 자극들의 생명적인 의미들이다. 그러므로 물리적 체계와 관련해서 통일적인 상호 관계를 말할 수 있다면, 유기체들과 관련해서는 통일적인 의미를 말할 수 있다.
인간적 위계
의미의 지각은 그밖의 모든 것에 우선한다. 왜냐면 지각은 대상들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향들을 언제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지향들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사실들로서 파악된다. 인간의 지향들이 최초의 사실들이라는 것은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어머니를 안다는 사실이나 어린이가 미리 어떤 지식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예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적 위계의 성격이라면, 행동-활동과 구분되는 또는 행동에 앞서는 의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물음도 물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행동과 분리되어, 또는 행동에 앞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의식은 전적으로 인식(이해, 판단)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도 없다. 왜냐면 대상을 지향하는 많은 방식(의욕, 공포, 욕구)이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의 특징은 그가 창조한 합리적인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립되어 있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인간의 특징은 자신의 지향들을 세계에로 투사하는 일에 있다. 그러나 만약 인간 행동의 정신적 요소가 활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면, 어떤 다른 요소도, 생명적 요소도 마찬가지로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의 수준에서 이들 요소들은 그 자체의 모습을 잃고 통일적인 유기체로 통합된다.
이런 결론들에 따라 메를로퐁티의 행동에 관한 연구는 참된 지각에 관한 연구로 쉽게 옮겨갔다. ; 신체 ; 신체는 그것이 지각하는 대상들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통일적인 지각이 있지만, 신체와 지각되는 대상들 간에는 구별이 있다. 왜냐면 내가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 거리를 두듯이 그렇게 나의 신체에 대해 거리를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의 지각의 장내의 어떤 대상도 장에 대한 나의 지각을 보전한 채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나의 신체에 대해 있다.
여기서 몇가지 물음들이 제시된다. 만약 지각이 언제나 “애매한” 것이라면, 어떻게 우리는 세계에 대한 지각의 “종합”을 설명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런 종합이 가능하다면, 어떤 근거로 그것이 가능한가? 신체가 상호주체적인 세계의 마당이 될 수 있는가, 다시말해 한 신체에 의해서 지각된 것이 다른 신체에 의해서 동일한 방식으로 지각될 수 있다고 생각할 이유를 우리가 가지는가? 아니면 관념론이 비난받는 근거가 되는 독아론에로 우리는 다시 다른 길을 통해 되돌아가게 되는가? 다른 여러가지 물음들이 있지만 특히 이런 물음들이 ‘지각의 현상학’이 다루고자 하는 물음들이다.
중요고려사항들
많은 최근의 심리학 문헌들은, 많은 다른 사회과학 문헌도 그렇고 심지어 자연과학문헌들도 그러한데, 인간의 자유가 “원인적” 요소로서 중요하다는 것을 과학 자체가 인정해가고 있는 중임을 시사하고 있다. (the broken image)
지각의현상학
철학의 참된 영역 : 살아지는 세계
물리학이나 인간정신을 모델로 해서 인간에 의해 구성된 세계로부터 살아지는 세계 또는 경험되는 세계로의 회귀를 시도한다. 이런 살아지는 세계와의 접촉은 신체-주체의 지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이는 ‘행동의 구조’에서의 메를로퐁티의 분석 끝부분에 드러난 것이다. ‘지각의 현상학’은 신체와 세계 간의 이러한 원본적 접촉에 대한 서술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실재관의 제시이기도 한데, 이런 실재관에 근거할 때 신체와 세계의 접촉은 반성적 의식에 의해서도 파악가능하게 된다.
“주지주의”라는 말은 메를로퐁티에게 철학에서의 관념론과 심리학에서의 내관주의를 의미한다. 철학적 관념론에서 의식은 보편적 구성의 수행자이다.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식에 대해서만 존재하며, 나아가 의식에 의해서 완전히 이해된다. 불투명한 구석이나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경험주의가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알 필요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면, 주지주의는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또한 무지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왜냐면 세계가 우리에게 완전히 현전한다면, 그래서 지각과 지각되는 것이 일치한다면 새로운 것은 전혀 나타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우리의 지각의 장의 변화를 요청하는 “주목”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주지주의가 경험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범주들 또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주지주의에서 감각에 결여되어 있는 것을 보충하는 “판단”은 환상, 즉 “보는 것”과 “자신이 본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지각은 이해와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왜냐면 이해에 대해서는 언제나 동일한 것(예, 넓이)이 지각에 대해서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적 철학과 심리학에 따르면, 사유하는 사람이 세계에 대한 관찰자가 되거나, 세계가 의식의 객체가 된다. 그러므로 전통적 철학이나 심리학은 절대적인 것, 즉 사유하는 사람에게 외적인 절대적인 진리나 절대적 의식에 의거한다. 둘 다 유한성을 고려하지 않으며, 유한성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유한한 세계를 어떻게 벗겨 보이는가? 경험주의와 주지주의가 (과학적이거나 정신적인) 인지적인 범주들에 근거해 있다면, 실존의 보다 근본적 수준을 벗겨보이기위해 우리는 규정되고 있는 경험의 ‘선인지적인’ 소여들에 주의를 돌려야만 하며, 그것도 소여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여들과의 관련된 우리의 ‘행동’에 의거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지각과 관련된 것은 바로 이런 행동이다. 이런 세계를 다룰 때 지각의 문제는?
한편으로 경험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세계가 감각들의 연합이 아니라면 지각은 이미 유형화된 세계에로 열려질 것임에 틀림없다. 지각은 과거로부터의 퇴적과 더불어 시작한다. 지각의 일은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있는 세계를 세계 그자체의 소여에 의해 서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세계가 주지주의자들이 가정하듯이 판단이나 이해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각은 또 구조를 취하는 ‘작용 중에 있는’ 세계에로 열려질 것임에 틀림없다. 지각의 문제는, 현상적 장과 그것의 우리에 대한 현전에로 지각이 이처럼 동시적으로 열려 있음을 설명하는 문제이다.
신체와 살아지는 세계
기존의 심리학이나 생리학과 같은 전통적 사유에 의해서는 신체가 주체나 객체로 이해가능하게 제시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신체는 주체와 객체 모두에 동시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상당한 이유가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체를 주체나 객체로 간주했을 때의 결과를 지적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신체가 ‘환경을 가지지 않는 주체’로서 간주된다면, 많은 경우에 신체의 행동은 이해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인지불능증 즉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증세를 보자. 그러한 사람은 다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심리학적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뇌에 이르는 신경들이 절단되면, 환상의 다리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생리학적 요소 또한 이런 상황에 개입된다. 심리학이든 생리학이든 혼자서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없는데, 왜냐면 주체에게 다리가 있는 경우와, 주체에게 다리가 없는 다른 경우 사이에는 이를 매개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신체를 ‘실존적으로’ 보게 되면, 즉 신체가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게 되면 달라진다. 이러할 때, 인지불능증은 상상의 상태 때문에 실제적 상태를 거부하는 것, 존재하는 상황을 억압함으로써 자신의 것이 아닌 세계를 수용하는 것이 된다. ‘주체 내의’ 물적 요소들과 심적 요소들의 경계들을 확실하게 결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 요소들이 가리키는 세계와 주체의 실존적 관계를 서술할 수는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신체를 ‘환경 그 자체’로 간주하여도 마찬가지로 바람직하지 못한결과가 생긴다. 이런 결과는 신체를 마음으로 다룸으로써 신체의 경험보다도 의식의 내용을 밝히는 내관주의 심리학에서나, 신체를 다른 객체들과 마찬가지로 객체로 간주함으로써 마음의 현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행동주의에서나 모두 일어난다.
주관성과 객관성을 분리하는 이런 다양한 시도들 뒤에는 신체로부터 ‘지식’을 산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나 신체의 일차적 기능은 아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는 것이다. 신체는 투사, 즉 주어진 환경 가운데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다. 신체는 자신의 활동과 자신을 에워싼 퇴적된 혹은 주어진 세계를 종합함으로써 이런 환경을 조직한다. 이렇게 하여 신체의 활동은 이미 주어진 세계와 태어나려는 세계와의 접촉점이 된다. 이와 같은 것으로서의 신체는 어떤 순간에라도 우리가 세계 내에 존재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사정이 이렇다는 것은 세계와 신체가 갖는 관계를 분석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신체 주변세계의 공간과 관계하여 신체의 공간을 검토해보자. 나의 신체는 자신의 공간에 “거주한다.” 나의 신체는 내가 사용하는 다른 객체들처럼 공간 “내의” 한 객체가 아니다. 우리는 앞장에서 여기까지는 보았다. 신체가 활동의 주체로서뿐만 아니라 객체로서 또한 기능해야 한다면, 신체의 활동능력은 크게 축소된다. 심맹이라는 병이 이런 점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이런 환자는 추상적인 운동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익숙해있는 특정한 상황에서는 신속하게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 구체적인 운동에서신체는 하나의 객체에로 ‘투사’되기 때문이다. 신체가 활동하는 한, 신체의 위치가 지정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신체가 직접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자에게 자신의 신체를 활동의 환경으로 만들라는 요구가 주어지면, 환자는 더 이상 쉽게 자신의 사지의 위치를 지정하지 못한다. 이때 신체가 투사적이기를 중단하는 만큼, 신체는 “세계”를 가지기를 중단한다. 환자는 “객체”로 변형되지 않는다. 그는 주체로 남으나 자신의 세계가 극도로 축소된 주체로 남는다. 그의 세계는 더 이상 쉽사리 그에게 의미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의 세계는 공간적 지형과 시간적 두께를 상실했다.
자연적 세계로부터라기보다는 정서적 세계로부터 취해지는 성애의 예가 우리가 세계내에 존재하는 방식을 또한예씨한다. 세번째 예는 말speech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생각이 활동에 앞선다고 생각할 것이나, 사물의 본질을 그 이름으로 보는 어린이의 경험을 연구해보면, 사물들을 먼저 인정하고 그 다음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붙이는 것이 그것을 인정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확실히, 이런 원본적인 언어파악에는 생각이 현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생각이 파악 그 자체에 앞서는 것은 아니다. 연설자의 예. 참된 말은 세계와 관련된 신체의 활동으로서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결론 ; “우리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경험은…우리에게 애매한 존재양식을 보여준다.” 주체와 세계와의 관계는 인과적 관련에 의해서 완전히 해명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체는 객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신체에 대한 앎은 생각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신체의 천성은 전적으로 명백하거나 투명하지 않다. 궁극적으로 분석해보면, 신체는 삶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계 내에 포함된 신체 속에서 우리가 살아내는 삶을 통하지 않고서는 전혀 “알려질” 수 없다. -------#비약이 아닐까.
현대사상에서의 신체의 의미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은, 신체의 역할에 대한 서술로 시작된다. 세계는 이미지들(사물들)로 가득 차 잇으며 이들은 일정한 법칙에 근거하여 서로에게 작용하고 있고, 이런 법칙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아마도 이런 이미지들 각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추정하고 예측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러한 세계에는 새로운 어떤 것도 들어올 수 없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다른 한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체이다. 신체는 언제나 외부로부터 수용되는 자극들과 내부로부터 수행되려고 하는 운동 사이에 끼여 있다. 그렇다면 <새로> 일어나는 일은 과연 어떤 것인가? 신체가 세계를 정신적인 산물이라고 “그려내는가”? 그럴 수는 없다. 왜냐면 뇌나 신경체계 그들 자체가 물질적인 이미지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이미지들의 총체를 제거하지 않고서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체는 세계를 정신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신체에 의하여 물질적인 이미지들에 도입되는 “정말로 새로운” 것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운동’이다. 신체는 다른 점들에서 비록 신체를 에워싸고 있는 이미지들과 같지만, 신체가 다른 이미지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글타면 신체는 ‘활동을 중심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퐁티와의 차이점 ; 이러한 제3차원의 ‘이론적 필연성’을 수립하는 데 우선적 관심을 가진 베르그송에 비해, 퐁티는 제3의차원의 ‘의미’를 서술적으로 밝히는 데에 또한 관심을 갖는다.
마르셀
마르셀의 신체에 대한 분석이 가지는 “실존주의적=의미적”방향은 퐁티의 입장이 갖는 눈에 띄는 특징이다. 마르셀에게서 신체의 본질은 그가 관념론을 넘어서 “구체적인” 실존철학에로 넘어갈 수 있게 하는 열쇠가 된다. 마르셀의 초기 작업은 물리적으로 주어지는 객체로서의 신체와, 반성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알려지는 심적 객체로서의 신체를 구분하려는 시도들이다.
쇼펜하워에 따르면 신체는 완전히 다른 두 방식으로 주어진다. 신체는 처음에는 “지적인 지각 내의 한 표상”으로, “즉 다른 객체들 중의 한 객체로 그리하여 객체들의 법칙들에 복종하는 것”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신체는 또 “누구에게나 직접적으로 알려지는 것으로, 그리고 ‘의지’라는 단어에 의해 의미되는 것”으로 주어진다. ; 쇼펜하워가 신체를 “의지”라고 이야기 할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체는 “어떤 다른 객체도 실제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실제적”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쇼펜하워에게 의지는 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두번째 의미로, 신체는 특권적인 형이상학적 위상을 갖는다. 의지가 작동하기 때문에 “의지의 객체화”로서의 신체는 의지 그 자체의 표현이며, 신체의 개별적인 부분들은 의지의 다양한 측면들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 신체를 통해 개인은 세계를 알고, 또 자신과 유사한 다른 신체들을 가정한다. 신체는 의지가 universalize되는 수단이 된다. 그렇지만, 신체는 의지의 초보적인 객체화에 불과하다. 이는 초월된다.
마르셀이 신체를 하나의 “객체”라고 말할 때, 신체가 현상적 객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체는 “객체화된” 세계에 속하는 하나의 실재적 객체이다. 그러한 것으로서의 신체는, 다른 객체들과 다르게 반성 속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신체와 대비될 수 있다. 쇼펜하워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마르셀의 초기사유에서도,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신체는 비록 다른 객체들과 그 방식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마음’에 현전하는 객체였다. 그러나 마르셀은 곧 이것조차 추상에 불과하며, 신체는 어떤 의미에서 반성에 ‘앞서’ 현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체를 하나의 객체로 다루기 위해 반성이 시작될 때는 언제나,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즉 무에 대한 객체가 된다(‘나는 나의 신체다’). 그러므로 신체는 인격성과 개체성의 뿌리며, concrete philosophy의 궁극적 지시대상이다. 그러한 것으로서의 신체는 다른 객체들처럼 사유되거나 파악될 수 없다. 신체를 객체화하는 것은 그것에서 개별성을 뺏어가는 일이며, 그렇게 되면 세계는 구체성을 상실한다.
사르트르
존재와 무 제3부. ; 헤겔, 후설, 하이데거 모두가 주체로서의 내가 주체로서의 타자들과 어떻게 관계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 ; 타자가 주체로서 구성되려면 다음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I 타자는 나의 경험 바깥에 있으므로 입증될 수 없다.나는 타자의 주체성을 경험할 수 없다. Ii. 데카르트적 코기토. 타자는 나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구성된다. Iii. 세계가 있으려면 타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에게 하나의 객체일 수 없다. Iv. 그러므로 타자는 코기토 내에서 내 자신에 대한 내적인 부정 즉 ‘나-아님’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이런 조건들은 look에서 충족. 내가 열쇠구멍으로 무엇을 보고 있을 때, 나를 다른 사람이 보면, 나는 수치를 느낀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느끼는 것은 내 자신의 부정으로서의 타자이다. 그는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나에게 나의 주체성을 드러내어 준다. 그래서 내 자신과 타자 간의 기본적인 관계는 소외이다. 소외는 하나의 세계가 있음을 설명해준다.
신체가 다른 객체에 접근하는 나의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exist my body.그러므로 나의 신체는 비록 세계 내에 잠겨있기는 하지만, 신체는 또한 세계를 객체로 만드는 투사들에 의해서 세계를 초월한다.
신체는 있다, For-others. 이런 관계의 의미는 두가지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내가 타자를 하나의 객체로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객체로서의 타자는 객체로서의 사물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왜냐면 타자의 신체를 객체화하면서 나는 내 자신의 주체성을 더욱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신체가 타자를 만날 때 자기자신으로부터 소외됨. Look.
공통점 ; 신체는 우리가 세계에 작용하는 수단이며, 우리가 세계에 접근하는 특권적 지점이다. 사르트르에서 신체의 드러내는 힘은 소외라는 일차적 경험에 대해서 이차적인 반면, 퐁티에서는 어떤 경험이든지 일차적 경험이 될 수 있다. (공간성, 성애, speech) / 방점이 다르다. 또 질병관도 다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지각
“신체에 대한 이론은 이미 지각에 대한 이론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외적 지각은 직접적으로 나의 신체의 어떤 하나의 지각과 동일한 것이며, 마찬가지로 나의 신체의 모든 지각은 외적 지각의 언어로 명료화된다”는 것이다. 신체가 그 자체를 중심으로 할 뿐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바깥 객체에게로 또한 투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각된 세계도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이자 동시에 그것을 지각하는 자에 대해 있는 것이다.
우선 다음 물음 ; 감각지각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와 신체 간의 “교섭의 형태”이다.
전두피질에 문제가 있어 감각자극들이 상황에 통합되지 않을 떄, 그런 자극들이 근육의 긴장도에 미치는 영향을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런 환자들이> 팔을 들어올리는 동작은, 보고 있는 색깔이 빨강이냐, 노랑이냐 파랑이냐 푸름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빨강과 노랑은 부드러운 운동을, 파랑과 푸름은 갑작스런 운동을 일으킨다. 감각들은 ‘세계의 생김새’를 지정해주며, 세계의 살아있는 의미를 우리에게 지정해준다. 이런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감각들이 구조화된 세계를 가리키며, 지각이 일어나는 일반적 배경의 부분이며, 그래서 그것들이 깃들어있는 객체들과의 관계 내에서만 지각된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감각들은 객체에 ‘속한다’. 우리가 감각들이 지각할 때 그러하다 왜냐면 감각들은, 특성을 방사하고 있는 객체들로부터 부각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다양한 감각들 간에는 구별이 있다. 물론 그들간에 엄격한 구분은 성립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세잔이 보았듯 우리가 “색깔을 듣고 딱딱함을 보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각된 객체의 이런 이중적 성격은 객체가 자신에 대한 어떤 지각에 대해서도 언제나 초월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지각된 객체에 대한 어떠한 “최종적인” 종합은 있을 수 없다. 객체는 언제나 다양한 방식으로 지각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지각이 가능하기 위해서, 신체-주체는 통일적인 신체 이미지를 제공해야 하나, 이런 이미지 또한 동시에 지각되는 객체처럼 개방되고 제한 없는 것이다. (…) 신체-주체가 객체와 관련하여 만들어내는 이런 종합은 신체가 세계와 관련하여 하는 ‘지향적 활동(구조화)’로만 서술될 수 있다. (…) 궁극적으로 이러한 종합은 우리에게 시간을, 즉 역사를 보여준다.
공간에 대한 지각의 의미는 무엇인가? 공간지각은 물리적 공간이나 기하학적 공간을 가리키지 않는다. 왜냐면 지각되는 공간은 객체에만 속하거나 주체에만 속하는 게 아니라, 양자에 동시에 속하기 때문이다. 지각되는 공간은 실존적 공간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환경’ 즉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직접적인 세계에 대한 지각을 살펴보자. 만약 역전거울이 주체 앞에 놓여지면, 처음에 세계는 뒤집혀 보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익숙해짐에 따라 역전되었다는 생각 없이 살아가게 되어> 세계는 바로 서게 된다. 그러므로 공간은 지각하는 신체-주체에 관련하여 ‘정향’된다. 그리고 이 활동이 요구되는 곳에는, 우리가 그러한 정향활동을 의식하지 앟든, 신체는 언제나 현전한다. ; 나아가 ‘깊이’에 대한 지각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하나의 객체를 멀리서 볼 때, 우리는 그것의 외견상의 크기를 본다. 그러나 외견상의 크기에 대한 지각은 왜곡되지 앟은 세계에 대한 예전의 경험에 의존한다. (…) ‘운동’에 대한 지각도 같은 실존적 성질을 가진다. 우리가 한 객체가 움직이는 것을 볼 때, 운동은 객체 그 자체에 들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뜰에 서서 돌멩이가 공기를 가르면서 움직이는 것을 볼 때 “돌멩이가 움직인다”라고 말함과 “뜰이 움직인다”라고 말함에 차이가 없을 것이다. 운동과 정지는 지각장을 조직하는 계기들이며 양자는 지각장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지라는 배경에 대비해서만 운동이 부각될 수 있다. 장을 조직하고, 객체를 지각함으로써 객체가 운동하고 있다고 결정하는 것은 신체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본 세 현상 모두에서, 우리는 공간 지각이 “구조적 현상이며, 주체에게 하나의 가능한 고정점을 제시함으로써 공간지각을 발생시키는데 전적으로 기여하는 지각장 내에서만 이해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공간이 실존적인 방식으로 보아지면, 정신분열증 환자나 신화적인 (원시적) 의식이나 꿈에서 살아지는 공간을 따로 설명하거나 부정할 필요가 없다. 세계를 경험하는 이러한 방식들 각각은, 이러한 방식들이 고정되어 있는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는 부정될 수 없는 살아지는공간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신체가 살아지는 세계와 그곳의 다양한 관점들에 닻을 내리고 있다고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지각되는 세계의 ‘통일성’을 설명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가능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지각의 항구성을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가 살아지는 세계에서의 빛과 색깔의 현상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빛이 지각장의 통일성을 표현하는 수단임을 관찰할 수 있다. 지각장은 빛이 바뀌면 다르게 나타난다. ; 색깔은 시각장에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빛과 관련하여 자리잡는다. 그리고 우리가 지각하는 다른 성질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우리의 지각은 장내의 모든 다른 객체들과 관련하여 각각의 사물에 그 일정한 성격을 부여해주며, 반면에 모든 엇나가는 자료를 제거하는 하나의 논리에 의해서 조종되어진다. 그리고 이런 전체 작동이 세계의 확실성에 의해 유지되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마침내 지각의 항구성의 진정한 의미를 보게 된다. 색깔의 항구성은 사물들의 항구성의 한 추상적 요소일 뿐이며, 사물들의 항구성은 또 우리의 모든 경험들의 지평으로서의 세계의 일차적 항구성에 근거해 있다.” ; 그렇지만 이 말이 신체가 세계에 부여하는 구조가 지각되는 사물들의 구조를 완전히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것을 지각하는 것은 그것과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지각되는 객체는 언제나 그것에 대한 지각에서 벗어난다. 그러므로 신체는 사물들 그 자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신체는 이미 내적으로 구성된 사물들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지각의 종합이 부분적임을 의미한다. (…) 그러나 신체의 종합이 이런 방식으로 부분적이라면, 즉 지각의 전망적인 견해들이 지각되는 객체를 완전히 규명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종합이 발생한느가? 이런 종합은 단지 ‘시간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시간적 종합들이 우연적이라는 것을 여기 지적해두고 나중에 시간성 의미를 검토해보자. ; 이런 종합들은 과정 중에 변형들을 겪으며 전개되는데, 따라서 시간적 종합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동시에 어떤 지각적 종합에 관하여 절대적 확실성에 도달하는 것이 – 모든 확실성 (즉 세계)를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끝으로 자연세계에서의 이러한 존재방식은 또한 ‘인간’ 세계에 우리가 거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신체와 인간세계 그리고 자연세계에 대한 분석이 우리를 살아지는 세계로 돌아가게 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살아지는 세계가 주체와 객체 간의 종합이 언제나 있으면서 없고, 명확하면서 명확하지 못한 그러한 주객 간의 동기부여관계로 정의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서술이 합리적 사유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유 바깥에 있는 것을 서술하고자 하고 있을 뿐이며 그래서 비합리성에 빠진 것이 아닌가? 우리가 우리가 말한 것이 우리 자신의 독단 외에 어떤 근거도 가지지 않음을 확정할 수 <있을> 때에만 위와 같은 경우가 될 것이다. 어디서 우리는 그런 근거를 찾을까? 먼저 의식 내에서 이를 찾아보기로 하자. 의식이 세계의 근거로서 기능하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의식은 자신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계는 의식이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의식이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가 자신에 앞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함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또 우리는 의식을 근거로 해서는 지각되는 사물들에 절대적 확실성을 부여할 수 없음도 보았다. 진실과 거짓은 의식의 부분들이며, 둘다 세계를 토대로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세계는 의식에 앞선다. 아니 오히려 의식은 세계의 현전 내에서만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의식이 무엇보다도 먼저 세계의 투사(즉 한 활동)라면, 세계에 관한 의식은 도대체 어떻게 시작되는가? 세계에 관한 의식은 의식에 앞서 전개되는 ‘시간 속에서’ 장 속에서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지각의 근거를 찾아야만 하는 곳은 바로 시간이다.
; 내가 나의 투사를 통하여 세계에 손을 뻗칠 때, 내가 투사하는 미래가 나의 뻗침 내에 현전하듯, 나의 과거도 나의 뻗침 내에 현전한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여기 그리고 지금에 있다. 과거와 미래는 둘 다 내가 그것들에로 손을 뻗칠 때 뛰어나온다. 그렇지만 과거와 미래는 ‘전적으로’ 현전하진 않는다. 과거는 현재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기를 멈출 수 있고, 미래는 의미를 투사하기를 멈출 수 있다. ; 시간은 foundation이자 opening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 속에서, 앞의 분석서 제시된 세계에 대한 견해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시간은 내가 타자와 상호적으로 현전할 수 있는 모태이다. ; 우리가 보았던 대로, 두 의식은 결코 서로에게 상호적으로 현전할 수 없다. 그러나 두 시간성은, 비록 다른 인격이 내가 내 자신에 대해 존재하는 방식으로 나에 대해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서로에 상호적으로 현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각각은 둘이 함께 묶여질 수 있는 현재에로 자신을 투사함으로써만 self knowledge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 자유는 시간의 전개를 배경으로 하는 창조이다.
메를로퐁티와 하이데거 – 세계-내-존재에 대한 두 견해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의> 현존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즉, 첫째로 세계 내의 다른 존재자들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서, 둘째로 선인지적인 경험을 통하여 우선 세계와 관계하는 존재로서 세계-내에 있다. 이런 출발점에 근거해서 하이데거는, 메를로퐁티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로부터 유래하는 신체-정신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와 퐁티의 분석방향은 완전히 다른데, 그들 각각이 데카르트에 대해 제시하고 있는 비판을 비교해보면 이런 차이를 알 수 있다.
하이데거. 데카르트는 실체를 완전히 자족적인 것으로 정의했소. 사유하는 존재인 신만이, 존재론적으로 말해서 실제적인 실체이다. 세계나 세계 내에 주어진 어떤 객체(즉 연장된 존재)도 단지 존재적 실체 내지는 존재적-존재론적 실체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being의 의미 내지 세계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실패했다.
퐁티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실체를 세계와의 모든 접촉에 앞서 자신을 확신한다는 의미로 timeless라고 보았고 따라서 접근가능한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보편적인 힘이라고 설정한 것이 잘못이다.
하이데거의 일차적 관심은 존재의 본질과 구조들을 밝히는 것인 반면, 퐁티의 의도는 그 대신 세계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특권적인 “존재에로의 개방”을 통하여 존재의 구조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에 대한 서술은 바로 퐁티의 세계-내-존재에 대한 서술과 비교될 수 있다. 유사성이 있다. 신체-주체(하이데거에서는 현존재)와 세계 사이의 관곙 peogks 그들 각각의 서술에. ;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유용한 사물들에 대해 지식을 가지기에 앞서 그런 사물들과 함께 <세계 내에> 포함되어 있다고 서술한다. 이해란 이렇게 선인지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반성으로서 이러한 선인지적 소여에 의미를 부여한다. 반성에 따르면, 사물들은 배경으로부터 부각되는 한에서는 명백하나, 우리로부터 숨어 있는 한에서는 모호하다. (…) 하이데거는, 현존재와 사물들간의 살아지는 거리는 현존재의 반성이나 구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에 앞선다”라고 강조한다.
시간에 관한 견해에도 유사성이 있다. 퐁티가 하이의 견해를 미래에 대한 정향이라고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자신의 견해는 현재에 대한 정향이다. 실제로 두 견해의 결론은 별반 차가 없다.
차이는 인간 세계 내에서 다른 인간들과 관계하는 방식에 대한 각각의 분석에서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다. ; 하이데거는 메를로퐁티와 마찬가지로 현존재가 일차적으로 “타자와 함께” 세계-내에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다른 현존재만이 현존재의 존재를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석이 진행됨에 따라, “공존재being-with”가 필연적으로 비인격적 관계이며, 이를 통하여 현존재가 “세상사람the they”이라는 익명성에 빠져든다는 것이 드러난다. ; 하이데거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익명성을 거부함으로써 참되게 된다. 이런 일을 달성하는 일차적 수단은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존재와 죽음의 불안을 자신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을이렇게 확인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에 의해 혼자서 행해져야만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하이의 분석은, 현존재가 참됨을 획득하는 것은 “공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자에 ‘대비’됨에 의해서라는 기이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최종적인 분석에서 보면, 하이의 세계는 결코 사회적 세계가 아니다. ; 퐁티는 하이가 인간의 서로에 대한 대립이 극복되는 실제적인 경험을 서술하는 데 실패, 현존재가 자신의 본질을 끊임없이 변경되도록 하는 경험의 중개적 요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본질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몇가지 결정적인 문제들
사르트르의 세계가 모순적인 사춘기의 세계라면, 메를로퐁티의 세계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어린이의 세계이다! 애매성이 분석을 대체해버릴 뿐이다. (알퀴에)
뵐렌은 메를로퐁티를 옹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상학은 설명하기보다는 서술하고자 한다. 퐁티는 이성의 기능을 서술하는 중에, 아마도 이성의 본성에 집중했던 다른 철학자들보다, “설명하는” 이성에 보다 접근한 것 같다.
알퀴에가 비판되어야 하는 것은, 퐁티에게 셋재 차원은 문제의 이론적 해결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차원이 그의 서술의 주제이며, 그가 그의 서술을 통해 “애매한” 세계를 실제로 열어보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점이다.
(…) 수학의 법칙조차도 인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메를로퐁티의 신념은 어떤 현상의 보편적 의미를 손상시키게 될 진리상대주의를 내포하고 있다(stephan strasser) 그 밖에 kwant, Alphonse de waelhens. ; 인용된 비판들 대부분에 그의 후기 저술들이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잘 인용되진 않지만.
철학적 전통의 재평가
정치철학에서 현상학으로
우리는 제1부에서 행동의 구조와 지각의 현상학 어느 책에서나 메를로퐁티는 자신이 거의 구분하지 않는 다양한 자원들로부터 자신의 방법을 끌어내었음을 보았다. 1939년에 그가 처음으로 발견했던 후기 후설과 그와의 친화성도 지각의 현상학이 출현하고 난 한참 후에야 비로소 명백히 밝혀지게 되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전후 프랑스의 정치적인 분위기에 기인하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의 사회철학은 현상학이 아니라 맑스주의와 그에 의해 대충 ‘실존주의’라고 서술된 요소들에 닻을 내렸다. 2부에서 우리는 맑스주의와 사르트르 실존주의 둘과의 결별을 추적했는데, 우리는 앞장에서 이런 결별의 결과로 그가 사회철학에서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을 후설사상의 정신을 쫓는 현상학자로 명백히 인식하게 되었음을 보았다. 이런 평가가 그 상황에 적합한 것이라면, 우리는 현상학과 사회적 세계의 관계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해석에 이런 점이 반영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 맑스주의와 실존주의의 실패가 1950년 이후에 메를로퐁티로 하여금 철학과 현상학을 전적으로 동일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변화가 일어났던 해들에 메를로퐁티의 철학에 대한 개념은 깊어져서 사회적 세계에 대한 서술뿐만 아니라 그 존재론적인 뿌리를 드러내는 것까지도 포함하게 되었다.
1951년에 세 가지가 나타난다. (1) 심리학과 후설의 관계를 고려하고 있는 일련의 강연들. (언어와 역사의 문제도 또한 다룬다). (2) 사회학과 과학 일반과 후설의 관계에 대한 분석. (3) 언어현상학에 대한 강의. (…) 1955년 이후 후설은 메를로퐁티의 사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주제들 중 하나이다. (…) 후설을 다루고 있는 1950년부터 52년 사이의 세 글들 모두에서 변화는 명백하다. 이제는 그리고 특히 소르본느 강의에서,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생각의 진화와 그의 사유의 두 방향 간의 관계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이 세 글들에서 후설이 본질들과 사실들이 서로 분리되는 철학에서 그들이 상관되는 철학에로 옮겨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후설이 철학의 정당한 주제인 “상호세계”에로의 문을 열었다고 결론지었다. ; “철학을 세계에 대한 우리의 확정의 정지로 정의하는” 그는 “세계 내의 존재에 관한 연구에 몰두해 온 하이데거보다 더 명백하게 세계 내에서의 철학자의 실제적 존재를 알아보았다.” 그렇지만 메를로퐁티는 이 세 글들 중 앞의 두 글에서 후설이 나아가기를 원했던 것보다 더 멀리 밀고 나갔으며 후설은 동의하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1951년에 강연으로 제시되었지만 1952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던 세번째 글에는 두번째 변화가 함축되어 있다. ; 생활세계가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면, 후설의 후기 사유는 정신적 본질들로 환원될 수 없는 사실들을 포함하기 위하여 “구성”에 대한 이해의 변경을 요청하게 된다. 여기서 그 일은 멈ㅊ어지고, 1955년이후 다시 후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퐁티는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후설의 사유가 자신의 사유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만 아니라, ‘후설 스스로도 이러한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1959 후설 탄생 100주년 에세이 보라.)
; 그는 후설이 “이념들II”로부터 계속, “우리를 폐쇄된 투명한 환경에 자리하게 하지 않았으며” 또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아니라 해도) ‘객관적인’ 환경에서 ‘주관적인’ 환경으로 데려가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는 이런 구분들이 문제가 되는 제3의 차원의 베일을 벗겼다고 본다. 이 제3의 차원이 메를로퐁티가 “상호세계”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속에서는 자연과 마음이 동시적으로 그리고 결코 어느 쪽으로부터도 해체될 수 없는 관계로 주어진다. 이런 상호세계의 본성은 무엇인가? (…) 메를로퐁티의 분석은 후설이 이념들II에서 주체이자 객체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과 세계내 사물들 간 접촉점이라고 제시했던 신체로부터 시작된다. 왜냐면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나의 신체에서 희미해진다면 나의 신체의 작동의 반대극인 사물에서도 희미해진다.” 일단 이런 점이 인정되면, 존재론적 의미가 감각가능한 세계에 회복된다. ; 왜냐면 두 의식의 공현전copresence이 결코 입증될 수 없는 반면, 감각가능한 세계 내의 공현전은 직접적으로 확실하기 때문이다(지각의 현상학). ; 다른 사람이 볼 때 “나는 그의 봄 속에 현전하며, 장면에 대한 그의 눈의 파악 내에서 나의 현전이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나의 “일차적 봄”이 같은 풍경에 대한 그의 “종속적인 봄”에 현전한다. 우리에게 현전할 수 있는 객체들의 전체성이 근본적인 의미에서 자연nature이다. 물론 이런 전체성은 어떤 사람에게나 현전될 수 있다는 것 이상을 뜻한다. 그렇지만 “여기”와 “자아”는 “저기”와 “타자”를 변형으로서 내포한다. “절대적 현전 속에 살아지는 각각의 ‘여기’, 각각의 근처의 사물, 각각의 자아는 그들 자체를 넘어서 나에게는 그것들과 함께 가능할 수 없는 그러나 ‘다른 어떤 곳에서는’ 동시에 절대적인 현전 속에 살아지고 있는 모든 다른 그러한 것들을 입증해준다.” 그러므로 모든 대상과 사람들은 그것들이 관련된 다른 대상이나 사람들을 함축하며, 인간들 사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순환적 관계가 있다. 후설은 심지어 자연과학에서도 이런 의미를 놓치지 않고 보았다.
자연적 태도가 현상학에 의해서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철학을 ‘모든’ 경험과 관련시키기 위하여 현상학에 의해 재긍정된다고 후설이 인정했기 때문에, 현상학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저항하는 사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현상학의 방향에 관한 근본적인 믿음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나 “철학은 자신의 그림자를 가져야만 한다. 그렇게 그림자를 가진다는 것이 미래에는 빛이 실제로 없을 것이라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후설은 자신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면 그의 생각이 성숙해짐에 따라, 구성이 그에게는 “우리가 구성하지 않는 사물의 뒤쪽의 베일을 벗기는 수단”이 되었는데, 우리는 그러한 사물의 뒤쪽에, 아마 이론적으로는 모순적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지는 어떤 것이 (어느 정도까지) 또한 이해되는 만큼 유의미한 방식들로, 현전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사물들을 볼 때, 우리가 보는 사물들은 우리에게 현전한다. 그러나 우리 또한 그들 속에 현전한다. <이럴 경우> 동시적인 동일시(혹은 동일화)와 거리가 있다. 내 자신과 내가 보고 있는 사물들 간에 하나의 관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내부로부터 느껴지는 시간과 같은 시간에 외부로부터 나의 손이 또한 접근가능하다”는 것이 필요하다. 시각을 통하여 우리는 시선으로 사물들과 접촉하기 때문에 “시선이 우리 앞에 열어보이는 존재의 질서 내에 시선이 새겨지는 것이 필요하다. … 쳐다보는 사람 자신이 그가 보는 세계에 대해서 국외자가 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보는 자는 볼 수 있는 것에 의해 소유당함으로써만, 보는 자가 ‘볼 수 있는 것인’ 한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물들이 있는 곳에서 떨어져 사물을 본다(사물들은 지각되는 것 이상이다)는 것과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통하여 사물들에까지 뻗쳐진다라는 것, 이 둘이 모두 참이다.
내 자신과 사물들 사이에는 동시적인 근친성과 거리감이 있다. 접촉점은 신체를 통해 있다. 신체는 두 차원에 속하는 한 존재이다. “한편으로 신체는 사물들 중의 한 사물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사물들을 보고 만지는 것이다.” 나아가 “신체가 명백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체가 그 자체로 이들 두 특성들을 재통일하며, ‘객체’의 질서에도 속하고, ‘주체’의 질서에도 속한다는 이중적인 귀속성이 이들 두 질서 간의 대단히 기대치 않던 관계의 베일을 우리에게 벗겨 보여준다. 신체가 이런 이중적인 관련을 갖는다면, 이런 관련은 이해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존재할 수 없다. 신체는 우리에게 각각이 상대방을 요청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실재의 주체적 차원들과 객체적 차원들 둘 다가 신체와 지각되는 사물 둘 다에 속한다는 이런 상호작용을 통하여, 신체나 세계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가시성, 가촉성이 형성된다. 신체가 세계를 본다. 그러나 신체는 자신이 사물들에 의해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는 많은 화가들이 입증한 경험이다)도 또한 느낀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누가 보고 누가 보이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런 가시성은 flesh(살)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살은, ‘일반적인 사물’이며 그 자체로서 존재의 한 “원소”이다. 보는 나와 보이는 사물이 같은 “원소”로부터 취해진다. 우리가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은 “살”이 궁극적 관념이라는 것, 그것이 독립적인 실체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사에 대한 재평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메를로퐁티는 계속되어온 철학적 전통에 자신을 연결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데카르트 이후 철학이 취했던 대부분의 방향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 1945년부터 50년 사이에 그의 관심은 대부분 정치적 문제에 기울어져 있었고 그래서 철학적 전통에서는 거의 중요하지 않은 레닌, 트로츠키, 루카치와 같은 사람들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그가 후설 사상에 동조하여 맑스와 사르트르를 거부한 50년 이후, 다른 철학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도 바뀌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초기 저술들에 침묵을 지키거나 비판하였던 철학 전통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재평가하였다.
현상학자들에 대한 보다 비판적인 접근의 예들로, 퐁티가 최초로 발간한 소논문은 쉘러의 원한의 불어번역판에 대한 서평이었다(1935). ; 1950년 이후 언급된 쉘러. ; 그리고 하이데거의 예. ; 다른 현상학자들에 대한 이런 비판과 더불어 메를로퐁티는 철학적 전통을 재평가하였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취임강연)
그곳에서 그는 소크라테스를 논의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언제나 <자신을> 지성인으로 이해한 방식을 정치학적인 차원에서 철학적인 차원으로 옮겨 놓았다. 메를로퐁티는 세 가지 사실이 소크라테스를 특징짓고 있다고 믿었다. 첫째로 그는 그 도시의 법률에 대하여 반란적이지도 묵종적이지도 않았다. 한편으로 그는 처벌을 피하기 위하여 그 도시로부터 도망가기를 거부했다. (반란X) 한편으로 그에게 주어진 혐의를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존중하기를 거부했다. (묵종X) 그가 아테네에 남은 것은, 그가 익살스럽게 말한 대로, 그가 늙었기 때문도, 언제나 그곳에서 살아왔기 때문도, 다른 곳에서 더 잘 용인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도 아니었다. 그가 아테네에 남았던 것은 법률에 복종함으로써 법률에 도전하기 위해서였으며, 자신과 판사들을 부분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판사들에게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였다. 소크라테스가 드러낸 것은 거리를 둔 열중이고 외부에 대한 내적 관계 였다. “궁극적으로 그 도시는 그의 내부에 있었으며 그들(판사들)은 법률들의 적이었다. 판결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그들이었으며 그들을 판결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였다. 이것은 그 철학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역전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내부로부터 나오는 가치로 외부에 있는 것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 두번째로, 소크라테스는 아이러니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 도시에 대한 그의 비판은 동시에 그도 그 도시 내에 속해 있음의 표현이다. 그의 “판단”은 우월한 지식을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절대적인 지식은 없으며 이런 없음을 통하여 진리가 우리에게 열린다는 것”의 인정이다. ; 셋째로, 소크라테스는 공동체에 의해 그에게 내려진 판결에서 자신을 예외로 할 수 없었다. 그는 절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법정에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했다. 왜냐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한,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하는 어떠한 판단도 우리를 제쳐놓거나 그들을 멀찍이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그 철학자는 공동체 내에서의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인 사람이었으며 자신을 포함하여 공동체를 문제삼음으로써 공동체가 참된 기능을 하도록 끊임없이 체근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세계의 외부였으며, 세계는 그의 내부였다.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와 다른 사람들을 묶는 절대적 관계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자신이 묻고 있는 모든 것의 상대성을 인정하였던 그는, 최선의 인간이었다.
우리가 전통을 쫓아 살아가는 철학자들을 하나의 “공동체”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면, 메를로퐁티가 철학자의 역할을 정치적 공동체와 관련하여 특징지었다는 사실에서 그가 철학적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시작하였음을 또한 알 수 있다. 1/ 철학자들은 다른 철학자가, 가령 데카르트가 도달한 해결책을 당장에 거부하지 않는다. 동시에 철학자들은 다른 사람이 도달한 해결책에 완전히 묵종하지도 않는다. 2/ 철학사는 중심적 주제의 점진적 세밀화로 나타나지 않고, 거꾸로, 고립되어 따로 작업하는 사람들의 결코 공통적일 수 없는 산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현재의 사상가들이 하고 있는 일은 과거에 행해진 것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과거가 현재의 관점에 전적으로 통합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재의 관점은 근접성과 거리감을 더불어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사는 다양한 관점들의 규정되지 않은 통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끝으로 모든 철학자가 “도상에” 있음을 의미한다. 각각의 철학자들은 자기 관점에서 선배들을 고무시켰던 그 문제들을 가지고 작업한다. 그는 그 문제들이 여전히 유효하다거나 논박되었다거나 자신의 대답만이 적합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선배들과 자신 둘 다에게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선배들과 자신이 함께 현전하는 세계에 대하여 열려 있고자 한다.
이런 정신으로 메를로는 1956년에 les philosophes celebres의 편집장을 맡았다. 그가 1951년에 명료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던 태도는 그 채의 여러 면에서 명백히 드러나있다. 데카르트 이후의 자연철학에 대한 그의 분석은, 어떻게 철학자들이 동일한 문제들을 명료하게 표현하려고 시도하였으며 그들이 전통적인 틀이 제기된 문제에 부적합하다고 간주할 때조차도 그 틀 내에 어떻게 머물려고 시도하였던가를 말하는 한 방식이다. 나아가 그가 점차 후설과 더 일치하게 된 것은, 우리가 강조해왔듯, 자신의 마음 내에서 자신의 철학적 방법을 명료화한 것에 주로 기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어느 정도까지는 역사적 전통 내에서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해명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일한 것이 인간에 관한 과학들에 대한 그의 후기 반성들(뒤르켕, 레비스트로스 방법의 역사적 발생)에도 해당된다. 그리고 언어, 예술, 종교에 대한 견해에도 다시 나타난다.
…라벨은 존재철학자였지만, 그는 우리가 “순수한 존재”를 서술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확고한 입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세계 내의 우리 자신의 실존을 통하여 존재에 접근해야만 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고 재평가한다. 메를로퐁티는 라벨이 우리에게 말하는 그 의미를 자신의 용어로 바꾸어 긍정하고 있다.
메를로퐁티와 베르그송
사르트르는 그 첫번째 연구의 4절에서부터 베르그송에 비판적이었으나 메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메를로는 베르그송 속에서 자신을 보았으나, 베르그송 자체에 의해 바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앞에 언급된 비판들에 대한 후기 메를로퐁티를 매개시켜서의 검토
후기 철학적 연구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우리의 “존재에 대한 개방”을 강조한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확실히 “지각의 현상학”에 가해진 비판들이나 <자신이> 자신의 마지막 책에서 가했던 그 책에 대한 비판들과 같은 그러한 종류들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알퀴에 주장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이성의 근거라는 대답을 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런 대답은, 이성의 범주들이 경험을 해석할 틀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알퀴에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에 반해 메를로퐁티는 “살아지는 세계”가 이성에게 구조를 제공하며, 반성이 해야 할 일은 그 자신의 범주들로부터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되는 세계 내에 묻혀 있는 범주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그 자신이 가리키고 있는 “자연세계의 범주들”이 경험과 관련하여 선천적이지 않다는 의미로 “인지적인” 범주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비슷한 방식으로 발라르드에게도 대답했다.
이러한 범주들은 오히려 세계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추출>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험 내에서의 반성이 진행됨에 따라 존재가 점진적으로 드러나서 드디어는 어느날 세계가 완전하게 사유에 의해 정복됨을 의미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의 지평 내에는 결코 다할 수 없는 의미들과 상호관계들의 심연이 있기 때문이다. 반성의 과제는 자신을 경험 내에 주어진 존재에게 계속적으로 관계시킴으로써 세계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것은 무한한 작업이다. 왜냐면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점진적으로 명료화되어진다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변화하는 역사적 배경에서 언제나 새로이 해명되어진다는 편이 참이다.
발라르드와 캐린 둘 다에게 메를로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사물들과 접촉하는 것이 동시에 존재와의 접촉이라는 말이 맞다면, 모든 참된 경험은 <존재에 대한 경험인> 원본적인 경험이다. 물론 모든 경험이 참된 경험인 것은 아니라는 말은 맞다. 환상 기만 또한 경험 속에는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러나 그들 또한 존재와의 선접촉을 전제하며 우리가 접촉하는 존재를 통하여 거짓된 것으로 밝혀진다. 이것이 실제로 적합한 대답일까? 사물들과의 우리의 접촉이 그러한 사물들의 존재와의 (부분적인) 부합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원본적 경험과 접촉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지각의 현상학, 마지막 저술인 가시와 불가시. 메를로는 이런 물음에 대하여 다만 사물들의 존재와의 접촉을 서술하는 것만으로 대답하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대답은 기준의 문제를 남겨놓게 되고, 이에 따라 우리는 원본적 경험<의 기준이> 결정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게 된다. … 이 점이 뵐렌과 슈트라서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메를로가 “보편적”진리가 있을 수 있음을 배제했다고 믿는 것과 관련된다. 그들은 그가 진리는 역사적으로 상대적이며, 언제나 인간에 대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본다. 사실 메를로는 지각의 현상학에서조차도 진리는 객체들과 사건들에서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있는 것 이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왜냐면 어떠한 지각도 지각되는 것을 다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지각되는 것은 그가 서술하고 있는 <실존적> 세계이며 그 세계는 정의상 의미의 세계이다. 따라서 진리를 인간 외적인 것으로 보거나 인간을 존재하는 모든 진리의 척도로 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후기에 메를로는 이런 진리이론을 존재철학으로써 뒷받침했다. 그의 진리관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존재에 대한 그의 이해는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상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절대적 상대성”이라는 이념이나 “상대적 절대”라는 이념이 합리적이거나 유의미한 어떤 것을 전달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의문이 하나의 “절대”가 그의 철학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roman 카톨릭 비판가들의 주장을 살펴보게 한다. 메를로의 후기 철학이 카톨릭 비판가들이 제시한 그 방향으로 옮겨갔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쨌든 그러한 비판들이 정당화되겠는가?
그를 세계중심적인 인간주의를 넘어서도록 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 절대적인 존재는 신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내의 사물들과 다른 사람들과의 (존재들과의) 절대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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