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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leau-Po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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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년 1학기 수업정리

(아래는 내가 15년 1학기에 행한 요약본이다. 『20세기 프랑스철학』, 에릭 매슈스, 김종갑 역, 서울;동문선, 1999)

 

 

A. 현상학자들

 

(1) 현상학자들의 관심

 

  1. 메를로에게 현상학적으로 철학한다는 것은, 과학이나 철학에서 유래한 모든 이론들을 물리치고서 그러한 이론의 뿌리가 되는 일상적 경험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이다. 그는 경험에 대한 이론적 설명과 경험 자체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기 위해 ..... 경험은 그것에 대한 우리 의식의 바깥에 있는 세계로부터 온다.

 

  1.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메를로는 의식이 언제나 '세계 속에' 던져져 있다는 의미로 <의식의 지향성> 원칙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의식의 대상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식 자체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근대철학과 완전히 다른 방식의 이야기 전개 ; (2) 항목 참조]

 

  1. “세계는 내가 그것의 구성원칙을 알고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고 지각하는 배경이면서 또한 그 조건이 된다. 진리가 '내적인 인간'에만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내적인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세계 내에 있으며, 세계 내에서만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1. 후설의 후기 철학은 현상학이 잠시 잘못 들어섰던 이상주의적 샛길에서 빠져 나와 현상학이 원래 의도했던 길인 구체성을 향해 나아간다. 원래 현상학은 순수한 의미에서 '서술적인' 철학이었다. 우리가 경험한 그대로의 세계를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 목적이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치밀한 이론을 세우는 것이 현상학의 목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현상학의 해석자들이 이해하듯이, '우리가 경험한 그대로의 세계'가 내적인 의식의 세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선-과학적이며 선-철학적이면서 우리의 행동과 존재를 받쳐주는 완전한 외계의 세계 = 삶의 세계를 의미한다.

 

(2) 이것과 근대철학의 다른 점

 

  1. 칸트처럼 생각하면 내 주관이 세계를 정리하는 것 같다. But, 내가 세계라는 것에 내던져져 있음으로 인해, 세계라는 것은 주체적 분류와 관리가 불가능하다.

 

 

B. 지각의 우위성

 

(1) 의식의 지향성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왜 이 테제가 나오게 될까?

 

  1. 현상학이 과학의 이론적인 체계를 물리치고서 실제로 경험하는 그대로의 세계를 파악하려는 입장으로 규정된다면, 퐁티같은 현상학적 철학자가 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지각을 중시하는지 이해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1. 지각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이론의 관여 없이 직접적으로 세계와 접촉하기 때문이다. 지각의 현상학이란, 지각하는 방법을 인과관계적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적 이론을 물리치고, 실제 우리의 지각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둔다.

 

  1. [경험론자] 지각이란 일정한 성질을 갖춘 대상이 우리의 육체에 가하는 인과론적인 작용의 결과로서 이해된다. 결과적으로 지각이 대상의 특정 성질과 상응하는 개별적인 감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 이러한 과학적인 지각의 관념을 채택함으로써 경험론적인 입장의 철학자들은 다양한 지각 이론을 세울 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지각이 '원자론적인 감각(주관과 상관없는 대응관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감각의 원인을 제공하는 대상들이 그러하듯이 이러한 감각 하나하나가 일정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1. [지성론자] '지성론자들'이라 칭해지는 또다른 비현상적 철학자들은, 감각적 경험이 원자론적 감각으로 이루어진다는 경험론적 가설을 수용하기는 하지만 경험론적인 지각 이론에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 경험의 통일성을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불만족스럽다는 것이다. 지성이 전제되어야 감각을 통해서 의식에 들어오는 혼란스러운 것들에다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다.

 

  1. 이하부터는 [현상학자]의 반론이다.

 

  • 지각의 실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경험론자나 지성론자의 바탕에 공통적으로 깔린 기본적 전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실제로 지각하는 세계가 개별적이며 원자론적이고 또 내용도 분명한 감각 자료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지성론자에 대한 반론] 우리는 세계를 이미 조직적이고 통일성 있는 것으로서 지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방적으로 질서를 부여하는 것만은 아니고, 세계는 이미 거기에서 어느정도 질서잡혀 있었다.

 

  •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를 세계로 만들어주는 통일성이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의해 부여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러한 통일성이 이 세계가 다름 아닌 '우리의' 세계라는 사실, 우리가 살며 지각하는 세계라는 사실과 전적으로 무관한 것도 아니다.

 

  • 우리는 세계를 국외자적인 시선으로서가 아니라 내부적인 시선으로, 그것도 우리가 살아가는 특정한 공간과 시간의 관점에 입각해서 바라본다.

 

  • 따라서 우리는 무관심하게 세계를 바라볼 수가 없다.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의미 있는 세계, 그럼에도 무한히 우리를 넘어서며 우리가 발견하는 의미를 무한히 초월하는 세계, 우리는 세계를 그렇게 이해한다.

 

  • 이러한 메를로의 지각 이론은 인간 주체로서 우리가 본질적인 의미에서 '세계 안의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설명해준다. 비생명체 대상은 시간과 공간 속에 던져진 채로 인과관계의 법칙에 따라서 다른 대상들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식으로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2) 진리 문제

 

  1.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는 완전히 객관적이지도 않으며 완전히 주관적이지도 않다. 우리의 지각과 전혀 상관없이 세계의 질서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마음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1. 그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계획이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지식욕에도 제동을 걸고자 한다.

 

(3) 데카르트 비판

 

  1. 세계를 지각하는 우리 인간도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육체가 없는 순수자아가 아니며, 필연적으로 외부 세계에 관여하는, 따라서 본질적으로 육체를 갖춘 의식이다.

 

  1. 의미는 우리의 목적과 외부 세계사이에 오가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생성된다. 마찬가지로 세계의 합리성이나 질서라는 개념도 철학자가 지적인 직관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영원한 원칙으로 볼 수 없거니와, 그렇다고 다만 인간적인 필요성에 따라 사물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결과로도 볼 수 없다.

 

  1. 이중적인 존재, 본질적으로 육체를 갖춘 존재, 그래서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분명하고 뚜렷한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로서 인간을 파악.

 

 

C. 육체-주관

 

  1. 우리의 행동, 혹은 행동할 수 있는 육체의 능력과 대상 사이에는 어떤 특정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대상은 우리에게 의미를 지닌다.

 

  1. 육체-주관 : 육체가 경험의 객관적 측면이 아니라 주관적 측면으로 기울어 있다. 자아가 본질적으로 육체를 갖추고 있다.

 

  1. 이 개념은 인간 존재가 '세계 안의 존재'라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관점이 반영된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메를로와 사르트르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개념에서 사르트르는 의식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결론, 의식은 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결국 그는 의식과 육체, 주관과 객관 사이를 떼어 놓은 셈이다. 반면 세계 안의 존재라는 개념을 보다 일관성있게 발전시킨 메를로 퐁티는, 의식이나 주관성은 대상과는 별개이면서도 대상과 본질적으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의식적인 존재로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상황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본질적으로 그 상황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1. <육체-주관이라는 개념 덕분에 해결가능했던 데카르트적 이원론이나 전통적 행동주의 심리학이 직면했던 난점들> : 데카르트적 이원론이나 유물론적인 이론은 이런 환지나 질병자각증 결여 같은 정신생리학적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두 가지 이론은 어떤 현상은 의식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말할 수 있다는 가설을 은연중에 채택하고 있다. 

 

ㄴ 데카르트 – 의미란 물질을 대하거나 보는 정신의 현상 :  모든 사유와 감정이 반드시 의식적이라고 보는 데카르트주의자의 경우, 그러한 현상에 나타나는 감정적 의미의 무의식적 측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과제.

 

ㄴ 유물론자 – 의미 개념 배제. 의식은 물질에 부수하는 현상임. 그러한 현상이 환자에게 미치는 감정적인 의미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유물론자'에게 과제,

 

ㄴ 메를로 – 무의식적이면서도 감정적인 의미를 갖는 현상의 영역 인정.

 

  1. 육체주관과 프로이트무의식

 

1. 육체가 우리 주관성의 일부로 취급된다면, 주관성의 모든 요소들이 명확한 의식의 대상처럼 완전하게 '의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가령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육체는 목적을 가질 수 있다.

 

2. 무의식적인 마음이라는 프로이트의 개념이 사르트르의 눈에는 자기 모순으로 비쳤다. 만약 마음이 의식으로 정의된다면 무의식적인 마음이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고 사르트르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관성과 의식을 동일시하지 않았던 메를로 퐁티는 그런 문제에 직면하지 않아도 되었다(현상학자들은 서술이 목적이지 무의식 얘기는 안함. 마음은 의식이라는 주장이 그들에겐 가능).

 

3. 퐁티는 프로이트적 의미의 '억압'을.... :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우리는 과거의 생각이나 욕망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의식적인 마음이 개입하지 않는 가운데 이러한 생각이나 욕망은 육체가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목적적인 활동 속으로 흘러 들어가 계속해서 자신을 주장할 수 있다.

 

 

D. 언어

 

  1. 이것은 어휘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1대 1로 대응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지시해주는 일련의 대상에 지나지 않게 되고 우리 자신은 여기에 아무런 역할도 담당하지 못한다. 언어 및 그것과 세계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철학적 사유는 전통적으로 이와 같은 언어의 모델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에,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사람들의 문화적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언어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1.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언어는 그렇지 않다. 실재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인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개별적인 표현은 독립적인 대상과 맺어짐으로써가 아니라 언어 내의 다른 표현들과 갖는 연관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어휘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작가들은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전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낼 수 있으며, 언어를 통해서 세계와 인간 서로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중간적인 것이 존재한다. ---- 철학자들은 언어를 창조하지도 필요한 어휘들을 끌어오지도 못한다. 오히려 어휘들이 철학자를 통해, 또 은유의 신비로운 힘을 통해 그 의미를 자연스럽게 섞으며 직조해 나간다.  ; 적절한 어휘는 늘 부족하다.]

 

  1. 작가 고유의 생각이란 건 없다. 생각은 언어(타자)를 경유해서 표현되므로, 나와 타자가 더해진 것이 언어이며, 주관과 객관이 더해진 것이 언어이다.

 

 

E. 살(flesh)

 

  1.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두 면을 갖춘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수많은 사물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이 사물들을 바라보며 만지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이중적인 위상 때문에 육체는 그것이 지각하는 대상들과 같은 의미에서의 '사물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주체로서 육체는 '보이는' 측면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측면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궁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육체적 존재'는 존재 전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분리 불가능성을 언급하기 위해 메를로 퐁티는 '살'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요컨대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인 우리의 이중적 위상이 “사실을 '사실'로서 만들어준다. 다시 말해 바로 그러한 이중적 위상이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실성을 가능케 하며, 단편적인 사실에 어떤 질서를 부여한다.”

 

  1. 우리의 존재가 존재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가 없다면, 철학의 임무는 독립적인 실재를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말할 기회를 주는 데에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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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

강의(discussion) _ 신지영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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