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라캉 - 수업 내용 정리 (2)
■ 현대 프랑스 철학사, 한국프랑스철학회 엮음, 2015, 창비
□ 11장/ '프로이트로의 복귀'는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
프랑스에서 정신분석은 보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학문으로 간주되었으나 라깡, 그리고 라깡과 프로이트 이론을 진보적 관점에서 수용한 알뛰세르, 그리고 68학생운동의 영향으로 정신분석학은 진보적 사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과 심리적 문제를 무시하는 교조적인 급진운동에 대한 강한 반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268)
우선 라깡은 프로이트 텍스트를 꼼꼼히 재독해하여 주체sujet와 자아moi를 구분했다. 라깡에 따르면 자아는 나르시시즘의 장소다. 자아는 본질적으로 분열된 존재인 주체의 분열을 은폐하고 봉합하는 상상적 역할을 행한다. 라깡에 따르면 자아심리학자들은 자아와 주체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아의 강화라는 잘못된 치료 목표를 설정했던 것이다. (272)
라깡에 따르면 거울이미지의 수용은 인간에게 항구적으로 지속될 심원한 영향을 남긴다. 아직 주체는 미숙하지만 자아는 자신을 이상화하고 통합된 존재가 되었다고 미리 확신/착각한다.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통일성, 혹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부분적으로만 존재하게 될 통일성에 대한 '선취'anticipation가 발생한다.
자아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의 후기 텍스트인 「자아와 이드」를 중시하며, 이 텍스트에서 자아의 통일성을 읽어낸다. 이들은 자아의 통일화하는 기능을 자아의 본원적 속성으로 간주하고 자아의 강화와 이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응을 치료 목표로 간주한다. 반대로 라깡은 자아는 주체의 근원적인 분열을 은폐하는 상상적 기관에 불과하며, 주체의 분열은 영원히 치유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문자의 심급」에서 라깡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까르뜨의 코기토를 뒤집으며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으며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라는 '무의식의 주체'에 관한 파격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273)
자아는 인식(connaissance)이 아니라 오인[méconnaissance]에 근거한 상상적 심급에 지나지 않는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어린아이는 거울이미지와 거울에 비친 아이를 미소 지으며 바라보는 어머니의 따뜻한 시선 덕택에 자신의 본래 모습을 망각할 수 있다. 아이는 여전히 철저하게 분열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꿈속에서 '조각난 육체'(라깡, 클라인)라는 자신의 본래 모습, 즉 '실재'(le réel)에 직면하지만 거울은 그러한 본래 모습을 봉합하고 은폐해준다. 라깡에 따르면 자아가 바로 이러한 오인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라깡은 자아의 강화는 치료의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고 자아심리학자들을 비판한다. ...이것의 극단적 형태가 정신병(망상증)이다. 라깡에 따르면 치료는 자아를 강화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은폐한 무의식, 즉 주체의 분열을 드러내고 이를 수용함으로써 억압을 완화시킬 때 오히려 가능해진다. (273~274)
라깡은 프로이트를 따라 정신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충동은 본능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본능이 순수한 생물학적 개념이라면 프로이트에 따르면 충동은 순수하게 생물학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본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충동은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것도, 순수하게 심리적인 것도 아니므로 예외와 일탈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본능과 충동은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 예컨대 basic instinct와 그걸 충족시켜주는 대상과의 관계는 고정적이다. 하지만] 충동은 다른 대상을 통해서도 만족에 도달할 수 있으며, 심지어 대상이 없어도 만족에 도달할 수 있다[# 배부름이라는 basic instinct의 충족이 없어도 만족하는 경우]. ...반드시 특정한 대상이 아니더라도 충동은 만족에 도달할 수 있으며, 심지어 충동은 경우에 따라서는 승화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 승화라고 하는 것은, 상징계에서 허용하는 방식으로 자기욕망을 표출하는 것]. (275)
무의식을 언어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이 프로이트가 도입한 핵심적인 이론적 공헌이라는 라깡의 지적은 적확하다. (276) 프로이트의 초기 저작 중 대표적인 것으로 『히스테리 연구』, 『꿈의 해석』,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등이 있다. 이들 저작에는 무의식을 본능의 소재지가 아니라 '언어', 즉 '의미'의 장소로 간주하려는 의도가 함축돼 있다. ...예를 들면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는 '꿈 이미지'의 내용을 하나의 '언어적 현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언어는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듯이 꿈 이미지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277)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는 꿈은 궁극적으로 해독될 수 없는 '배꼽'을 갖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의미를 말하지만, 그 의미가 모두 손쉽게 해독될 수 있다거나 어떤 신비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식으로 관념적 혹은 미신적인 접근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은 미래에 대한 예언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현재와 과거의 욕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욕망과 희망, 기대, 불안 등에 대한 언어적 표출인 것이다. (278)
라깡은 '증상'이란 궁극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결여를 나르시시즘적으로, 상상적으로 메우고자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의 배꼽처럼 쏘쉬르 혹은 라깡에게서 단어나 상징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의미화를 거부하는 무의미를 마주하고 있다. 바로 이를 라깡은 상징계의 본질적 속성으로 간주한다. 언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빈곳을 중심으로 구조지어져 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무의식 혹은 무의식의 주체 역시 궁극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결여를 중심으로 구조지어져 있다. (279) 이러한 히스테리적인 육체적 증상은 육체에서 나타난 증상이지만 프로이트는 이를 언어에 의해 매개된 언어적 현상으로 파악했다. … 라깡은 그리하여 증상은 곧 '은유'라는, 증상에 대한 언어적 해석을 또한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279~280)
[# 여기까지 드러난 정신분석은, 언어의 신비와 마주하고 있다. Word instinct라는 인지심리학쪽 책과 함께 탐구해보고 싶다.]
'말하는 존재'인 우리 인간이 인간과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최소한의 범주가 다름 아닌 상징계, 상상계, 실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말(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 세가지가 필요하다. 말, 대상, 의미가 그것이다. 무언가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파악하고자 하는 대상, 말의 대상이 있어야 하고, 표현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표현 혹은 파악하고자 하는 대상이 다름 아닌 실재이고, 말이 상징계, 그리고 파악된 의미가 다름 아닌 상상계다. 이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깡에게 실재는 존재하는 것, 대상, 사물 등을 의미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대상이 일의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라깡이 강조한다는 점이다. (281)
좀더 이론적으로 말하면 특히 후기 라깡에 따르면 상징계가 실재를 산출한다. 보통 상식적인 사고에 따르면 대상(실재)이 우선하고 상징계는 그것을 반영 혹은 표현한다. 실재가 상징계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인데, 반대로 (많은 언어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라깡에 따르면 오히려 상징계가 실재에 우선하며 심지어 그것은 실재를 생산한다.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실재는 파악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징계는 이렇듯 실재를 산출하지만 동시에 그 산출된 실재를 파편화되고 조각난 실재로 만든다. 말을 통해 실재가 파악되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다른 실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리하여 말을 하는 순간 인간 주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말을 하는 순간 실재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실재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재로 분열된다. 언어를 통해 실재는 조각나고 '파편화'된다는 것이다. (282)
라깡에 따르면 말, 즉 '상징계'가 실재에 결여 혹은 틈을 도입한다.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거리두기, 즉 '분리'가 일어났다는 것을 함축한다. 말을 할 때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대상 사이에 분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상이 우리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면 왜 말을 통해 그것을 계속 표현하고자 노력하겠는가. 분리는 말과 대상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표현하는 의미(쏘쉬르는 그것을 기의라고 불렀다)와 그 말(기표) 사이에도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말과 말 사이에도 분리가 존재한다. 쏘쉬르 언어학에 따르면 한 단어의 의미는 다른 단어와의 관계 속에서 주어진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모든 단어는 쏘쉬르적 의미의 기표다. 궁극적으로 단어, 즉 기표는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으며, 무 즉 결여를 지칭한다. (282~283)
인간이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할 때 적어도 최소한의 의미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의사소통도 이해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고정된 의미'가 상상계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결코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의미를 일시적으로 고정시킨 것에 불과하며, 표현될 수 없는 틈, 결여를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는 상상계에 속한다. (283)
많은 철학자들이 라깡의 결여 개념을 잘못 이해하면서 비판하고 있지만, 사실 라깡에게 결여란 '무언가 만족을 포기하고 궁핍 속에서 살아간다'라는 부정적 의미만을 갖고 있는 개념이 결코 아니다. '결여'는 주체가 대상에 상상적으로 흡수되는 것, 혹은 '충만한 실재' 속에 흡수되어 자신을 상실하고 정신병적 불안에 빠지거나 타자에게 완전히 종속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최후의' 심급이다. 그것은 주체의 '자유의 공간'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그러한 결여의 공간, 즉 자유의 공간을 확보함으로써만 주체는 타자에게 종속되는 병리적 상태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283~284)
라깡은 타자와의 상상적인 합일에 빠져 나르시시즘적 만족을 누리거나 타자나 실재에 완전히 흡수되어 자신을 상실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주체로 탄생해야 함을 역설한다. 바로 이것이 욕망이다. 욕구가 생물학적 차원에서의 갈망이라면, 욕망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결여를 포함하고 있으며, 욕망은 이 결여를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방황한다. 요구는 이자관계에서 발생하는 상상적인 소망, 즉 완전한, 나르시시즘적인 사랑의 요구다. 라깡에 따르면 욕망은 '생물학적' 아이가 언어적 질서로 들어갈 때, 즉 나르시시즘적인 완벽한 사랑의 요구로부터 벗어나 결여와 금지를 받아들일 때 생겨난다. (284)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교수님 – 나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내가 딸인지 아들인지를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2살 이전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있어서 똑같은 과정을 겪는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그래서 여자는 처음에는 동성애로 시작하였다가 나중에 사랑하는 이를 아빠로 갈아탄다. 이 부분을 여성주의 퀴어이론은 원용한다. 남자애는 아빠의 권위를 갖게 되면 엄마를 다시 쟁취할 수 있다는 데서 작동하는 구조인데 반해, 여자애는 다르다. 그래서 여성스스로가 위계체계를 내면화하지 않는다면 남자가 그토록 갈망하는 사회적 지위에의 고투는 착각이라고 여성주의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무엇보다 남성의 position이 가짜라는 것을 확인시켜줄 수 있는 이론적 장치이다. 라깡주의적 여성주의는, 여성적 position이 실재에 가깝고 남성적 position은 상징계에 들어가 있으므로 여성적 position이 우리에게 더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떤 성적 실천이 허용되고 금지되는지를 배우게 되는 구조적인 장소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라깡이 상징계로의 진입, 즉 언어적 질서로의 진입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의 진입을 같은 것으로 간주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라깡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언어적 질서로의 진입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이다. 언어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어머니 혹은 아버지와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 즉 결여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285)
이때 근친상간 금지와 결여를 도입하는 심급이 아버지다. 따라서 라깡에게 아버지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언어적 현상, 즉 기표, 상징적 아버지를 의미한다. (286)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상황은 주체를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이행시킴으로써 그에게 '해방'의 차원을 열어주지만 그럼에도 주체는 여전히 아버지가 발하는 금지명령에 종속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너머라는 개념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개념이 다름 아닌 실재, 즉 충동 개념이다. ...[후기 라깡은] 결여의 수용이 아니라 충동의 만족, 즉 주이상스, 달리 말하면 실재에 도달해야 함을 역설한다. (287~288)
결여를 받아들임으로써 주체는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이행해야 하는데, 이때 주체가 이자관계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결여는 긍정적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완벽한 만족을 일정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주체를 또한 '불만족' 속으로 소외시키는 역할을 한다. ...상징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실재를 받아들여야 한다(라깡에 따르면 실재는 상징적 질서가 궁극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잉여이며 상징적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288~289)
■ 욕망의 전복 - 자크 라깡 또는 제2의 정신분석학 혁명
페터 비트머 (지은이) | 홍준기 | 이승미 (옮긴이)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9-08-30
□ 2장/ 욕망의 발견 : 거울단계
어린아이의 지각을 구조짓는 것은 언어뿐만이 아니다. 어린아이를 반갑게 대하는 제3자나 혹은 어머니의 목소리, 제스처 또한 어린아이의 지각을 구조짓는다. 이들 제3자나 어머니는 이렇게 자신의 욕망을 표현한다. (42~43)
거울단계는 생후 18개월까지 인생의 일정기간 동안에만 나타나지만 그 이후에도 그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거울단계의 시작과 더불어 심리구조가 형성되며, 이것은 계속 다양한 변화를 거치면서 유지된다. 사랑이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서로를 이상화하는 것과 '공통성'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는 마치 자신을 거울에서 보듯 타인에게서 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45)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이러한 망각은 모든 주체가 대부분 자신의 육체를 보지 않고 상대방에게로 눈을 돌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45~46)
상상계가 초기에는 가시적인 것과 지각된 것들의 실재적인 현존에 묶여 있었다면, 어린아이의 언어화 과정을 통해서 그것은 점차로 기억의 보고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과 연결된다. 언어는 표상과 상상, 내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프로이트는 여기에 심지어 환각을 포함시킨다]. 이것들의 내용은 '지금과 여기'를 벗어난다. (47~48) 거울단계를 뒤돌아보면서 그제서야 겨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된다. [# 교수님 메모 – 사후성 ↔ 직선적 원인-결과론] (48)
□ 3장/ 욕망의 담지자 : 상징계
언어의 기능이 단지 분리하는 심급뿐인 것만은 아니다. 언어는 상상계에 봉사하기 위해 통합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어머니의 언어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전체성과 같은 나르시시즘적 권력을 낳는다. (51)
□ 4장 / 욕망의 핵심 : 주체
'주체의 육체성'은 라캉의 개념틀에 따르면 '실재'에 속한다. ...라캉은 이 용어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는 한편으로 실재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며, 다른 한편으로 '항상 같은 곳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그것은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동시에 무시간적인 것, 파악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끝으로 그것은 인간이 끊임없이 머리를 아파해야 하는 '저항하는 그 무엇'일 수도 있다. 내가 아는 한 라캉은 이 표현을 쓴 적은 없지만 그의 사고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넓은 의미로 정의를 내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부정적인 것'일 것이다. (79)
실재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표현해보려는 다양한 시도들은 '육체적 실재'뿐만 아니라 '부재자라는 의미에서의 실재'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재는 개념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인간은 논리라는 도구를 통하여 실재를 파악하려고 부질없이 노력하지만, 그것은 어떤 것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는 세번째 정의조차 또한 비유적 의미에서 '비육체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라캉이 실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실재를 논리에 의해 배제되는 어떤 것으로서 경험되도록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실재의 비규정성, 비포착성을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논리를 벗어나는 이러한 장소를 지칭하기 위해 라캉은 존재와 구별되는 탈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80) [# 교수님 – 실재는 신처럼 적극적으로 정의하기 어렵다(부정신학). 가령 스피노자의 신은 힘이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어떤 것으로도 변형 가능한 힘은 적극적 규정이 불가능하다.]
언어와 논리가 사고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누가 무시할 수 있는가 ? 따라서 기표의 논리학은 원래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야지 라캉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직접 육체로부터, 육체의 관점으로부터 생각하려는 시도가 반복적으로 있어 왔다. 이에 대한 예는 많이 있다. 심지어 프로이트의 몇몇 문장들도 그렇다. “생물학(Biologie)”이라는 용어가 로고스(Logos)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생물학적 명제는 담론에 의지하고 있으며 결코 육체의 언어를 직접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사람들은 망각한다. (80) [# 교수님 – 생물학은 생물에 대한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logos로서 담론에 관한 것이다. (나의 의문 : 그럼 실험은 어떻게 위치지어지는 건가?)]
탈존자는 주체에게 낯설다. 그래서 주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상징계와 그것의 도구인 논리를 실재, 타자에 동화시킴으로써 주체에게 낯선 것을 재획득하려고 노력하는 일뿐이다. 이것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설명'의 이면에 놓여 있는 탈존의 잔여는 항상 남아 있다. (81)
주체가 상징계의 시민이 되면, 처음에 낯설게 느껴졌던 기표가 더이상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주체는 언어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주체는 마치 그가 (대)타자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언어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기표의 낯설음은 주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만으로 한정된다. 음악을 듣는 것, 추상적인 그림들조차도 의미연관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체가 어휘나 단어의 의미, 의미 연관, 언어의 사용규칙 등을 포함하고 있는 자신의 기억력을 통하여 자신의 세계를 구조짓는 것을 볼 수 있다. (83~84)
상징적 질서 속으로 편입됨으로써 주체의 역사가 형성된다. 더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듯 보이는 실재, 즉 “성격”이라는 외양이 긴 시간 동안 지속되는 특징들을 통하여 주체에게 부여된다. 이것은 주체나 타자에게 믿을 만한 상 또는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고정'과 '낙인 찍음'이라는 현상을 낳기도 한다.
상상계가 상징계와 얽힘으로써 기표가 다른 장소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쉽게 잊혀진다. 낯설고 접근할 수 없는 타자가 상상계 속으로 들어오고 의인화됨으로써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낯선 타자의 위치에, 이제 서로 이해하는 언어공동체로서의 타자가 들어선다. 이와 관련해서 라캉은 (비스듬하게 금 그어진 주체(빗금S)와 유사하게) “비스듬하게 금 그어진 타자”에 관해 이야기하며 이를 표기하기 위해 (빗금A)라는 약어를 사용한다. 언어공동체가 형성되고 주체가 이 언어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비의미', 즉 '낯설고, 놀라게 하는 ,무시무시한 것'이 하나의 위협으로 잠복해 있다. 라캉은 이 위협 속에서 주체에 의해서 환상(Phantasma)으로 변형된 대상a의 영향력을 본다. (85) [# 교수님 – 대상 a란, 공허, 실재를 맞닥뜨릴 때, 그 느낌을 반성하지 않고, 그 순간에 나를 안정, 위로시키는 어떤 대상을 만듦으로써 구성된다. S ◇ a 라는 도식에서, S는 결핍되어 있는데, a는 대상이고, 그 둘을 매듭짓는다(◇는 매듭이다). 이 도식에 의해 주체는 완결된 존재 같은 느낌을 갖는다. 따라서 대상a는 자기의 결핍을 위장(호도)할 수 있는 마개이다. 그러나, 사물에 내 존재의 결핍을 다 건다고 한다면 그것도 문제가 된다.]
결핍의 망각은 결국 기호의 영역이 전면에 등장하도록 한다. ...기호의 차원은 '말하는 행위' 속에서 화자와 청자가 말하는 내용의 의미에 대해 전혀 거리감을 갖지 못하도록 끊임업이 노력한다. 즉 '말한다'는 행위자체보다는 '진술된 내용'에 주목하게 한다. '말한다'는 행위의 신비로운 원천인 주체의 빈 공간이 주체를 대리하는 개념들[# 언표된 주체] 속에서 얼마나 물화되는가를 우리는 '말하는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다. ...주체는 이 대상이라는 장소에 자신을 정박시키고자 한다. 주체가 대상의 장소에 더 확고하게 자신을 고정시키면 시킬수록 그의 욕망은 더욱 사라진다. (85~86)
● L도식 (그림을 그냥 검색해봐)
S-----------a'
ㅡㅡㅡ
------ㅡㅡㅡㅡ
ㅡㅡㅡㅡ
aㅡㅡㅡㅡㅡㅡㅡA
① A : 대타자, 상징적 질서, law, rule
② ㅡㅡㅡ실선. 의식적 관계
③ -----점선. 무의식적 관계
④ a : 소타자인 나.
⑤ A에서 a는 상징적 질서에서 나로의 관계로 의식적 관계.
⑥ a'는 상상적 자아.
⑦ a에서 a'는 거울단계로부터 유래하는 상상적 축. 이것을 통해 '그게 나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상상적 자아로부터 소타자인 나가 의식적 관계로 형성.
⑧ S는 es(그것). 이드. 규정된 지향점이 아니라, 힘을 주는 건 있고 그걸 자기가 자꾸 찾아야 하는 점이다. 가장 해명이 덜 된 점. 이건 어떤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짜여진 도식 속에서 최소한의 능동성을 말할 수 있다. 리비도, 에너지, 의지 등은 힘의 방향성이 있는 반면 고전적 실체는 고정적인 것이다. 전자는 그걸 입체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⑨ A(rule)에서 S(es)는 의식적 관계에서 무의식적 관계로. S(es)에서 a'(상상적 자아)는 무의식적 관계. 처음에 A(rule)로부터 출발한 관계들은 이 무의식적 관계를 통해 a'가 a(소타자인 나)로 의식적으로 연결됨으로써 상상적 축을 경유하게 되어 대화가 가능한 듯 하다.
⑩ L도식 자체가 주체이기 때문에, 나라는 형성물 속에 타자가 들어와 있음을 보여준다. 본인의 L도식 설명은 제대로 된 것인가 ?
■ 추가 설명
ⓐ 욕구 – 실재 – 본능적 필요
ⓑ 요구 – 상상 – 타자와의 완전한 합일
ⓒ 욕망 – 상징 –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차원
요구에서 욕망으로의 전환은, 아기가 엄마의 없음을 상징화하여 그 결핍을 인정하고 상징으로 대체하는 것과 유사하게 인간이 성숙하는 과정을 표현할 수도...
[# 개인적 생각(2016-1) : ... 그... 뭐라 그래야 되나. 라캉 얘기는 학과 밖에서 잘 안하는 게 좋다. 하더라도 그게 라캉 생각이라는 건 감추고 네 생각인 마냥 얘기해보라. 모욕을 억압하는 뚜껑이 없는 채로 어디까지 얘기할 수 있을지. 그 선 안쪽이 라캉의 가치다.]
lacanian
이 홈페이지에 존재하는 모든 라캉 관련 목록
01. 라캉 : 나에 의한 발표와 그 해설 [2015-1]
02.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라캉 - 수업 내용 정리 (1) [20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