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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년 1학기 발표 내용 정리 (이하)

 

 

 

(아래는 내가 15년 1학기에 발표한 내용을 더듬은 기록이다. 발표당시 참고 텍스트는 조금 더 큰 글씨(14px)로 표현하였다. 나의 1학기 이후 코멘트는 빨강.)

라캉, 아버지은유

여기서 남근과 A가 의미하는 바는 아래에서 이야기할 영어 공식과 다른 것 같다. 사진의 출저는 김석의 『에크리 읽기』이다.

 

나는 발표 당시 남근과 A를 설명하는 것을 지나쳐서, 부성은유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관련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교수님의 의도와는 약간 다른 것이었다. 교수님은 아래의 영어 공식을 에크리에 실린 '문자의 지속' 논문의 '시니피에에 대한 시니피앙의 미끄러짐'과 관련하여 의도하였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각각이 무엇인지는 중반부에 다루려고 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라캉에게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아버지의 이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상징화 과정. '아버지의 이름'은 어머니/아이 + 아버지에게도 적용되는 구조적인 것.) 의 세 단계.

 

라캉은 주체 형성이 두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한다. 첫번째는 상상적 동일시로 거울 속에 비친 타자적인 이

미지를 아이가 자신의 것으로 수용함으로써 자아가 형성되는 단계이다. 상상계는 자아를 중심으로 자아의식에

수용되는 이미지들의 세계를 말한다. 다음 단계는 상징계 질서를 대표하는 아버지의 기표에 동일시함으로써

주체가 형성되는 단계이다. 주체는 이것으로 비로소 상징계에 자리잡는다. 이때 동일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시니피앙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해소되는 마지막 과정은 부성 은유를 통해 상징적 동일시가 완수되면서 주체가 탄

생하는 과정이다. 이때부터 욕망과 무의식은 주체의 본질이 된다. 라캉은 아이가 욕망하는 것은 무조건 어머니

이며 아버지는 그것을 금지하는 자로 등장한다는 구조적 설명방식을 고수하는데 이때 어머니, 아버지는 생물

학적이라기보다 역할/기능 같은 것이다.

첫 번째 시기는 아이와 어머니의 결합이 상상적 남근 ( 팔루스 ) 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시기로 이 시기 아이

는 어머니의 욕망에 철저하게 종속된다. 거울단계가 바로 이 시기에 발생한다.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은 어머

니와 아이의 상상적 결합과 일체감이다. 아이는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어머니의 욕망에 철저하게 의

존하면서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상상적 남근이 되려고 한다.

(언뜻 생각하면 아이와 어머니가 일체를 이루기에 모든 것이 충족된 것 같지만 사실은 아이와 어머니의 결

합은 결여를 감추는 상상화된 방식으로 위태롭게 봉합되어 있다. 아이가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은 어머니에게 결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 자신도 결여된 존재일 수밖에 없는데 자신이 온전하게 어

머니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남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상상적 동일시의 속박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데 이는 아버지의 개입에 의해 가능해진다.

두 번째 시기는 상상적 아버지의 개입에 의해 시작된다. 아이가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남근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버지란 존재 때문이다. 이때 아버지가 남근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아버지는 아이를 어머니에게

분리시킴으로써 상상적 남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아이와 어머니의 결속을 깨뜨린다. 아이는 어머니가 아버지

의 욕망에 종속된 존재임을 보면서 자신이 어머니의 '남근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데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

하는 ' ' 거세' ' 의 원래적 의미다. .

아버지에 의한 어머니의 박탈 혹은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박탈은 욕망을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구원이 된다. 아이로 하여금 절대적이고 변덕스러운 어머니의 욕망에 종속된 상상적 동일시의 질곡을 벗어나

서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세 번째 시기는 상징적 동일시를 통해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종결되는 순간이다. 이 과정은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란 시니피앙에 동일시를 함으로써 주체가 상징계에 안착하는 과정이다. 이

때 상상적인 남근을 둘러싸고 아버지와 벌이는 아이의 경쟁의식이 끝을 맺고 상징계의 법이 주체에게 수용되

면서 욕망하는 주체가 발생한다. 아버지는 이때부터 상징계의 대리자, 즉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법의 대리자

로 기능한다.

이 단계의 아이는 이제 상징계에서 남근을 찾으려고 한다. 이제 남근은 주체가 욕망하는 것을 지시하는 기

표이자, 시니피앙의 구조 속에서 특권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

주체에게 이질적이던 시니피앙의 연쇄는 이제 주체의 세계를 이루는 물적 토대가 되면서 욕망을 언어 속에

서 구조화시킨다.

 

이 공식을 보면 주체에게 최초에 중요성을 띄는 어머니의 욕망이라는 기표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

에 의해 대체되고 억압된다. 이제 '아버지의 이름'은 대타자의 법으로 주체에게 각인되는데, 이것이 두 번째 항

에 표시된 대타자의 기호 A의 의미이다. 그리고 주체는 A의 의미를 남근으로 인식한다. 남근이란 모든 욕망의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 시니피앙인데 그것이 어머니의 욕망을 대체하면서 주체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시

니피앙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아버지의 이름'을 수용하는 것은 상상계가 아니라 이제는 상징계에서 자신의 남

근을 갖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주체에게 대타자는 무의식적 담론의 주권자이며, 이 무의식의 근저에는 남근

에 대한 욕망이 깔려 있다.

S : 기표

x : 알려지지 않은 기의(의미)

s : 은유를 통해 생겨난 기의(의미)

S' : 어머니의 욕망의 기표

 

S' 가 아버지 이름 기표 S로 대체되어서 은유적 의미 s가 생겨남. 은유화가 성공적으로 일어나려면 S'가 삭제되고 생략되어야 함.

 

(설명)

 

알려지지 않은 기의(의미) 와 어머니의 욕망의 기표와의 관계항을 살펴보자. [빗금쳐진 S' / x] ; 이것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 어머니가 내게 원하는 것이란 무엇일까?

 

그 다음 항인 [S / 빗금쳐진 S'] 는 어머니가 내게 원하는 것을 S로 대체(그것이 S일 것이라고 추정)함을 의미한다.

 

이때, [S / s] 가 발생한다. 즉, 그것이 S일 것이라고 추정할 때, 은유를 통해 생겨난 어떤 의미가 형성되지만,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알려지지 않는 채로 남는다. 

 

예를 들어, 옆의 식을 알기 쉽게 바꾸어 본 [ 호수/내마음 * 내마음/x → 호수/s ]에서, 나는 내마음이 무엇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다가, 그것을 호수라고 놓아보았다. 그때 아무것도 아니던 호수가 내마음의 의미로서 발생하였다('내마음은 호수이다'라고). 그러나 호수는 무엇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우리가 맑음을 호수의 의미로서 놓을 때, 다음 식 [맑음/호수 * 호수/x → 맑음/s]가 발생한다. 구조는 옆의 저 식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계속하여 시니피앙들이 발생한다. 다만, 기의 자체는 x의 형태로 남겨진다.

 

S / s는 라캉에게서 시니피앙이 시니피에와 불일치하면서 계속 굴러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x(알수 없는 것 가령 내마음) -> 호수같다 -> 맑은 것 같다 -> 호수같다 -> 요동치는 것 같다 -> 폭풍우같다 -> ...... 이렇게 기의 x에 고정되지 않고 무한히 갈 수 있다. 

  1. 이제 아이는 은유/ 무의식 쪽에서만 어머니의 욕망이 될 수 있다.

  2. 육체적 직접성을 억압함으로써 은유를 가능케 하는 것이 아버지의 이름이다.

  3. 팔루스가 영원히 상실한 대상, 결여 자체의 상징이 된다(상상적 팔루스 → 상징적 팔루스).

고로 영원히 상실된 도달불가능한 대상을 말하기 위한 계속성 이 생겨나고, 팔루스는 의미작용의 원천이

된다.

  1. 이제 상상적 팔루스였던 것은 은유적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으며  ( 상징적 팔루스), 인간은 (채울 수 있다는

믿음이 아버지 때문에 억압되었으므로) 결여된 존재가 되고, 욕망은 결코 완전히 충족될 수 없게 된다.

 

  1. 이 공식에서 보듯 무의식은 부성 은유에서 비롯되는 원초적 억압으로부터 발생한다. 일단 부성 은유가 성

공하면 최초 욕망은 환상의 형태로 상징계에 나타난다. 부성 은유에서 억압되면서 사라진 최초 기표 , 즉  ' 어머

니의 욕망 ' 은 주체가 되찾고 싶은 상실된 기표가 되면서 시니피앙 연쇄에 의해 절대로 메워지지 않는 영원한

구멍으로 남는다 . 의미화 연쇄가 계속되는 것은 바로 이 빈자리를 채우려는 시도 때문이다 . 부성 은유가 욕망

하는 주체를 낳는 것은 시니피앙의 대체로 주체는 존재성을 얻었으나 그것은 영원한 상실을 대가로 하기 때문

이다 . 상실은 사실 언어적 속성에서 비롯되는데 주체는 그것을 대상을 통해 채우려 하기에 욕망은 영원히 빗나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부성 은유는 주체에 존재성을 부여하면서도 동시에 결여를 가져옴으로써 욕망

하는 주체, 즉 무의식의 주체를 낳는다.

문자의지속

라캉은 [S(개념) / s(청각영상)] 식을 통해, 소쉬르의 '기호'를 나타낸 도식의 폐쇄성을 open하고, 소쉬르 도식에서의 개념과 청각영상 사이의 조화로움을 파괴하여, 둘에 영원히 소통불가능한 장벽을 세운다.

 

 

 

 

 

 

 

 

 

 

 

 

 

 

 

 

 

 

 

 

 

 

 

 

 

소쉬르는 A나무, B나무, C나무 들에 대한 반복되는 이미지들을 통해 나무의 개념을 추출하고, 그것이 청각영상 tree으로 됨을 설명한다. (왼쪽 그림)

 

그러나 라캉은 청각영상 tree (시니피앙)가 나무라는 개념의 기의(시니피에)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문자의 지속, 시니피앙

우리는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이것이 화장실인 줄 안다. 그러나 선로를 미끄러져 들어오는 열차 안에 탑승한 남매가 이 문들 중 어느 한 쪽이 기둥에 의해 가로막힌 시야를 가지고 "이곳은 ladies 역이야" "이곳은 gentlemen 역이야" 하고 싸운다. 

 

남매가 그것이 남녀 화장실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남매는 ladies, gentlement 표식 중 어느 하나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그 두 표식을 모두 보았기 때문에, gentlemen 시니피앙이 남자화장실이라는 시니피에를 갖는다는 것과 ladies 라는 시니피앙이 여자화장실이라는 시니피에를 갖는다는 것을 안다. 즉, 기표(시니피앙)은, 기의(시니피에)로부터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표들 사이의 차이와 대립에 의해 그 본연의 의미가 확정된다. 즉, 기표들이 의미를 확립하기 위한 최소조건은 변별적 체계 뿐이다.

 

라캉은 이 이야기를 '문자의 지속' 논문에 실으면서, 대략 위와 같은 것을 말하고자 한 듯하다.

발표에선 암시만 하고 넘기긴 했는데, 여기서 환상은 '대상a'라는 개념과 관련된다. 나의 발표문에 의하면, 학생이라는 기표는 선생이라는 다른 위치의 기표가 보증해준다. 그런 한에서 주체는 자신에 대한 지식을 자신의 자리가 아닌 다른곳에서 찾는다. 기표 각각은 '존재 결여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한 기표가 의미를 갖는 것은 다른 시니피앙과의 관련 속에서이고, 그러한 의미는 실재를 몰인식하게 해주는 환상과 대상a의 작동 때문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시니피앙은 언제나 연쇄적인 사슬 형태로만 존재한다. 개별적인 시니피앙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서로 간의 변별적 체계 속에서 대립을 통해서만 가치를 부여받는다. 조합을 이루는 시니피앙이

새롭게 첨가될 때마다 의미는 바뀔 수 있는데, 이때문에 언어에서 시니피앙들의 대체와 연결 과정인 은유와 환

유가 중요해진다. 라캉은 시니피에가 의미화와 연관되지만 시니피앙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의미는 가변적이라고 말한다. 시니피앙 밑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들어가기 때문에 고정된 시니피에(기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니피앙 연쇄는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 다의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 있

다.

 

주체는 상징계의 주인이자 언어의 주관자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로 시니피앙이 주도권을 갖는다 .

시니피앙은 또다른 시니피앙을 위해 주체를 대리해서 표상하는데, 우리가 통상 사유의 출발점에 놓는 주체가

사실은 시니피앙의 호명 효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주체에 대한 시니피앙의 절대적 지배는 [<도둑맞은 편

지>에 대한 세미나]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는 발표 내용에서 다루지 않았다.)

 

참고 : [도둑맞은 편지] 상징계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주체는 상징계의 주인이 아니라 상징계를 이루는 한 항에 불과하며 그때그때 시니피앙의 순환에 의해 주어진 역할을 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우 화가 바로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이다.

 

1장 : 궁정에서 왕비가 자기에게 온 편지를 읽고 있었는데 대신을 동행한 왕이 갑자기 왕비의 방에 들어온 다.왕비는 당황했지만 태연한 척하며 읽던 편지를 아무렇지 않게 탁자 위에 올려둔다. 왕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대신은 왕비의 당황해하는 태도를 보고 그 편지가 중요하고 비밀스럽다는 것을 직감한다.음흉한 대신은 주머 니에서 비슷한 편지를 꺼내 왕이 한눈 파는 틈을 타 편지를 슬쩍 바꿔친다.왕비는 대신이 편지를 바꿔치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왕이 눈치 챌까 두려워 아무 런 제지도 하지 못한다.

 

2장 : 사설탐정 뒤팽이 경찰청감의 부탁을 받는다.왕비의 은밀한 명령을 받은 경찰들은 대신의 집을 여러 차례 뒤졌지만 편지를 찾지 못했기에 뒤팽이란 탐정에게 의뢰한 것이다. 대신의 집을 방문한 뒤팽은 거실 벽난 로에 구겨지고 훼손되어 아무렇지 않게 놓인 편지를 보고 이것이 문제의 편지임을 직감한다. 다음 날 대신의 집을 다시 찾은 뒤팽은 바깥의 소란을 이용해 편지를 바꿔친 후 가짜 편지를 원래의 편지가 있던 자리에 놓아 둔다.

 

라캉은 편지의 내용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극이 진행된다는 점과 1장, 2장에서 편지를 둘러싸고 세 인 물의 시선과 역할이 달라지면서 플롯이 구성된다는 점을 토대로 상징계의 논리를 설명한다. 1장, 2장은 사실 동일한 사건이 인물만 바뀌면서 되풀이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반복은 상징계의 전형적 기능이며, 편지라는 뜻의 불어단어 lettre는 문자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시니피앙의 동의어로 해석될 수 있다.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뒤팽이나 왕비가 아니라 편지이고, '도둑맞은 편지'가 의미하듯 편지(문자)는 특정인에게 속 하지 않고 돌고 도는 것이다. 모든 사건과 갈등의 중심에 문자가 있고, 그것이 순환할 때마다 편지를 둘러싼 상 이한 의미들을 발생시키며 주체의 위치를 새롭게 규정한다.

 

1) 상징계는 순수형식이자 질료인 문자에 의해 구성된다. 편지는 내용이 배제된 시니피앙의 은유적 기호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왕비가 받은 편지가 왕이 알아서는 안 될 사적인 비밀이나 사랑에 관계되지 않을까 추측하지만 내용은 끝까지 드러나지 않으며 편지 내용 자체는 극의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도 않 는다. 의미는 끝까지 보류되며 편지의 순환만이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이것이 순수차이로서 시니피앙의 모 습이다.

 

2) 편지는 상호 주체성의 구조 속에서 주체의 역할과 위상을 결정한다. 이 우화에는 편지를 보는 세 시선이 나타나 있다. (1) 왕에게는 편지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인다. 왕은 역사의 진행에서 흔히 제삼자로 머물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맹인의 시선을 대표한다. 마찬가지로 2장의 경찰은 편지를 보면서도 그 가치 를 알아보지 못한다. (2) 왕비는 자기 편지가 도둑맞는 것을 보면서도 무력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왕비가 편지를 강탈당하는 것은 편지가 특정인의 것이 아니라 순환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1장에 서, 편지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를 강탈하는 대신은 2장에서는 뒤팽에 의해 왕비처럼 속임을 당한다. 그는 자 신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편지에 대해 속수무책인 무력한 사람이 된다.

 

3) 이처럼 등장인물들의 역할과 위치는 편지를 대하는 시선과 위치에 따라 정반대로 달라진다. 편지 의 순환이 각자의 운명을 바꾸어놓듯이 문자란 주체에 대해 결정적이다. --상징계의 우월성 4) 이 구조에서 주체의 절대적 자리란 없으며 편지는 부재와 현존을 반복하며 이 시선에서 저 시선으 로 옮겨 간다. 

 

(아래는 다른 발표문이다. 시니피앙,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에 대한 기본적이라고 생각했던 내용을 다루었다. 2학년인 친구에 의하면 비문이 있다고 한다. 그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녹색으로 표시한다.)

 

1. 시니피앙

소쉬르는 언어의 최소단위를 기호로 본다. 기호는 기표인 시니피앙과 기의 = 시니피에로 나뉘는데, 기표가 청각적 이미지라면 기의는 개념을 말한다. 라캉은 소쉬르의 이 틀을 다소 전복적으로 차용하면서 시니피앙을 중심으로 상징계를 설명하려 한다.

 

라캉은 언어의 최소단위를 기호가 아니라 시니피앙으로 본다. 기호와 달리 시니피앙은 의미가 없 는 순수 차이의 단위이며, 변별적 체계를 통해 시니피앙들끼리 상호작용한다. 순수 차이인 시니피앙의 작용을 통해 의미의 세계인 상징계가 만들어지고 주체의 운명은 규정된다. 시니피앙은 주체를 초월해 있는 언어의 물 질적 실재이다. 라캉은 외부적 원인이자 순수형식인 시니피앙을 중심으로 무의식의 구조를 해명한다.

 

2. 상징계

상징계는 시니피앙의 연쇄적 결합과 상호 작용에 의해 구성된다. 상징계는 언어적인 영역에 속하지만 언어 자체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상상적 공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교환과 차이를 발생시키는 추상적 구조와 형 식을 말한다. 그것은 순수 시니피앙들의 결합에 의해 물질적 기초를 얻으며 주체를 상호 관계 속에서 배치하고 이동시킴으로써 역사를 진행시키는 초월적 영역이 된다. 상징계는 또한 끊임없는 반복의 구조로서 주체에 선 행하며 주체의 바깥에 놓여 있는 선험적 질서로 이러한 것들이 무의식의 규정에 중요하다.

 

라캉은 인간에 대한 상징계의 외재성으로부터 프로이트적인 무의식이 설명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무의식 은 주체의 내밀한 욕망이나 억압된 표상과 기억의 공간이 아니라 주체에 작용하는 말의 효과이다.

 

3. 거울 단계와 상상계

거울 속 이미지를 마주하고 있는 아이는 아직 신체적으로 미숙하여 자기 몸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데 거울 속 이미지는 완벽함과 통일된 상으로 다가오고 아이는 그것이 자신의 이미지라는 것을 지각한다. 아이는 환호하지만 아이가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거울단계는 실제 몸의 감각과 그것에 대해 투영하는 이미지의 괴리가 은폐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시기 아이는 아직 몸의 운동 조절 능력이 미숙하여 실제 몸의 느낌은 통일되지 못함에 반하여 이미지는 완벽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자적인 이 이미지에 자신을 일 치시키는 것은 주체 구성 과정에서 불가피하며, 주체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은 이미지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 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주체를 소외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아 형성을 도와준다. 이러한 이미지에는 아 이가 마주하는 어머니의 얼굴이나 자신의 능력과 모습을 거울처럼 확인시켜주는 모든 대상이 해당될 수 있다.

 

거울단계는 주체의 기원 뿐 아니라 세계의 본성도 설명해주는데 상상계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상상적이 라는 말은 가상이나 거짓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들을 매개로 구성되는 주체의 현실 세계를 말하 며 의미의 세계이기도 하다. 상상계는 동일시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소외와 기만을 가져오지만 그렇다고 해 서 폐기되거나 극복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상상계는 주체가 자신의 이미지와 맺는 이자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주체에게 완전성과 통합의 환상을 주며 세계에 대해 생각할 때 모든 것을 대상화하는 표상적 태도를 갖게 만든다. 상상계는 또한 언어에 서 의미의 작용을 일컫기도 한다. 의미 형성과 전달에서 상상계에 속하는 이미지의 작용과 대상화가 작용하기 때문에, 언어의 의미는 상상계의 작용에 의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차원은 동시에 언어의 장벽으로 작용하여 인간 상호 간 진정한 의사소통을 방해하기도 한다.

 

4.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추출해낸 교재의 정확한 명칭을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추정컨대, 욕망 이론, 문예출판사, 1994의 초반 해설부분이 아닐까 한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관해 우리는 얼마든지 더 많은 기표를 사용해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에선가 기표의 흐름을 중단해야만 한다.

  • 상징계 : 무한한 수의 기표들 [앞서 설명한 부성은유로부터 상징계의 기표들의 무한성이 예고된다.]

  • 상상계 : 유한한 고정된 정의, 의미의 정합성

  • 실재 : 사람 무언가가 존재한다 – , 그러나 그 존재하는 것을 완전하게 파악하려고 했다가 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는 무언가가... (상징계에 있어서 고정될 수 없는 의미 / 상상계를 통해 모순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다른 발표문 끝)

 

 

나의 의문은 기표가 그렇게 일직선적으로 흐르겠냐는 것이다. 언어-뇌 탐구들에 의하면, 기표는 다층적 그리고 parallel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다. 이것이 라캉 이론의 어떤 부분과 일관적일 수 있는가?

부성은유에서도 그 특성을 보았듯이, 시니피앙의 언어는 항상 x라는 잔여를 남긴다. 또한 상징계 안 기표(시니피앙)들 사이의 순수차이 /* 상징계에서 각 항목은 상대방이 겪고 있는 존재 결여를 체현하고 있을 뿐이며 따라서 그것은 상대방으로부터 자기자신의 결여를 돌려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단어나 상징들의 의미는 서로의 차이를 통하여 주어진다는 것이다. 기호들 간의 차이가 개별적 기호나 완결된 의미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한다. 그러므로 차이 자체를 표현하는 상징(기호)은 존재하지 않는다. */ 를 메꿀 수 없다.

 

이런 해석이 타당하다면, 욕망은 언어 속에서 결여로 남는 것과 관련되며 따라서 무의식과 관련된다. 

 

'주체의 존재 자체'를 겨냥하는 이유는 나에게는 설명 불가능하다.

 

 

이하 4컷은 대상a에 대한 설명을 동반한다. 대상a는 순수차이를 a라는 대상 속에 체현함으로써 상징계에 내재하는 순수차이를 은폐하게 할 수 있다. 이 말로는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부성은유에서 나타난 미끄러짐 현상을 잘 생각해보자.

 

x -> A -> B -> C -> ...

x(엄마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 젖을 주니까 나를 키우려고 ->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 자기와 같은 것으로 하려고 -> 그것은 나를 소중히 대하는 것...

 

x라는 의미가 파악되지 않은 기표는 A로 대변되었다가 그 A는 B로 대변될 수 있고 그 B는 C로 대변 (나는 이 대변이라는 용어가 라캉이 표현하려는 메커니즘과 일치하는지 궁금하다) 될 수 있다. 이렇게 고정되지 않고 무수히 나아가는 기표들을 어느 순간 고정해야 한다 (엄마가 원하는 것은 나를 소중히 대하는 것이다). 가령 x=C와 같이. 이 C에 해당하는 것이 언제나 대상a (autre a) 이다.  그리고 그것을 믿어버리는 게 환상이다. 따라서 대상a는 결여임과 동시에 결여를 메우는 존재이다.

 

(발표에서 참조한 텍스트 - 라캉과 정치, 은행나무)

욕망은 정확히 말하자면 어떠한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욕망은 항상 사라진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므로 상실한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탐색을 수반한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파열을 통해 아이의 욕망과 어머니의 욕망 사이에 간극이 벌어진다. 이 간극에 의해 욕망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대상a가 도래한다. 환상을 통하여 주체는 타자와 하나가 되는 착각을 지속시키고 자신의 균열을 외면하려고 노력한다. 타자의 욕망은 항상 주체를 넘어 서거나 벗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되찾아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남겨진다. 그것이 대상 a다. 

(발표에서 참조한 텍스트 끝)

나는 이컷과 위의 컷에서 잉여향유, 충동대상, 부분대상에 대한 설명을 행할 수 없다. 발표에서는 대상a는 하나로 찝기 힘든 다양한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다는 정도로만 넘어갔다.

 

 

 

 

 

 

 

 

 

 

 

 

 

 

 

 

 

 

 

 

 

 

환상이 대상a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대상 a는 'autre a'로서, '타자 a'로도 번역할 수 있다. 즉, "그것이 어떤 것이다" 라고 내가 생각했던 것은, "그것"과 "어떤 것" 사이의 필연성 혹은 내가 부여한 자명성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이질적인 타자적 요소의 작용 때문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라캉에서 대상 a를 밝히는 것은 정신분석에서 내가 굳게 믿고 있던 것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거나 혹은 내가 당장 바꿀 수는 없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이질적인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큼이라도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과 관련된다.

 

나는 라캉의 후기개념인 실재, 향유, 충동을 증상과 엮어서 설명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실제 교수님의 수업시간에서는 그리 강조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하긴, 부성은유를 통한 상징계 [시니피앙의 체계] 로부터, 시니피앙이 고정되지 않는 풍부함을 가지고 있고, 시니피앙은 알 수 없는 시니피에를 장벽(무의식) 아래에 억압시키고 성립한 것이므로, 우리가 쓰는 언어에는 우리의 무의식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는 것의 설명과 대상a의 차이-은폐적 작용이라는 핵심적인 개념 구조는 라캉 정신분석학 전체에서 살짝만 응용하면 (내가 보기에) 반복되는 것 같기 때문에, 라캉의 가장 핵심적이고 전형적인 패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설명을 치중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발표에서 참조한 텍스트)

증상 : 욕망은 상징계 속에서 언어의 한계를 죽음 충동으로 체험하면서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주이상스로 발전해간다. [주이상스의 금지 /* 상징적 법의 설립 */ 가 욕망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다. 욕망은 상실된/불가능한 주이상스의 끊임없는 추구를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우리는 구성적인 소외를 초월하려는 것에 있어서 반복적으로 실패해도 끊임없이 충동적으로 재시도한다.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끔 하는 욕망은 결핍된(불가능한) 충만함의 추구에 의해 활성화되며, 주이상스와 조우할 수 있다는 약속을 중심으로 활성화된다. 욕망의 완전한 만족이 불가능하다면, 실현의 약속은 필수적인 것이 된다. (실패의 반복은 실현의 약속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약속에 대한 이름은 '환상'이다.]

(발표에서 참조한 텍스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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