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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 히로키의 해석 (존재론적, 우편적) >>  3장ⓐ >> 3장ⓑ 

 

Attention

주석과 인용서는 번역이에게 흥미로운 예외를 제외하곤 기재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번역이므로 몇 개의 오역이 예상된다. 그러나 가독성 문제 해결을 포함하여 성의를 가하려 노력했다. 

책 제목은 <>로 표현되며,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경우 간혹 " "나 ' '로도 표현된다.

 

(시작)

   이쯤 와서 퍼스펙티브를 넓혀보자. 제2장의 논의로부터 이미 선명해졌 듯, 데리다의 텍스트의 상당수는 '사고불가능한 것을 사고한다'라는 공통된 과제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 가령 "법의 힘"은 '정의'의, 또한 "SHIBBOLETH. FOR PAUL CELAN"은 '날짜'의 역설적 성질에 대해 분석한 텍스트인데, 거기에서 다뤄지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동형이다. '정의'나 '날짜'에 대해 이론적으로, 즉 통상의 사고규칙 하에서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존재는, 몽테뉴나 파울 첼란의 텍스트에 영향을 미친다. 데리다의 관심은, 이 '사고불가능한 것', 가라타니가 말하는 '외부'가 텍스트에로 불가피하게 침입하는 순간을 폭로하는 것에 있다. 이 문제설정은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전기, 후기에서 일관적으로 흐르는 것이다. 실제 67년에 이미 그는, 탈구축이란 '철학에 의해서는 형용되지 않고, 이름붙일 수 없는 어떤 외부dehors로부터 출발해서' 생각 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탈구축은, 데리다에게 남겨진 '외부'의 흔적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 작업은 구체적으로는, 한 편으로 앞장에서도 얘기했던 양의적 관념인 '파르마콘(pharmakon)'이나 '혼인=처녀막'이라는 말의 분석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 말라르메나 필리프 소렐르스나 Francis Ponge라는 시적 텍스트의 독해에 의해 이끌어진다. 즉 탈구축은, 역설과 시를 통해서 외부에 이른다.

 

   이 전략은 데리다 혼자만의의 것은 아니다. 주지하듯이 포스트 사르트르 세대의 프랑스사상가들은 대체로 후기 하이데거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하이데거는, 50년대에 이미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하이데거 : '회상'이란, 사고가능한 무언가에 대한 임의의 사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회상은 사고의 집중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온갖 곳에서 이미 벌써 숙고되고자 하는 곳으로 모인다. 회상은 상기의 집중화이다. […] 사고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리학이 해명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어떤 점에서 모든 시가 '상기'에 기초지어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숙고할 수 없을 것이다. [...] 시적으로 말해진 것과 사고적으로 말해진 것은, 결코 같지 않다. 그런데 그것들은 때때로 같다. 즉 그것들은, 시와 사고의 사이의 균열이 순수하게 또한 결정적으로 찢어져 열리는 경우에 같은 것이다. *

 

   '사고될 수 없는 것'에로 향하는 역설적, 탈논리학적 사고를, 시적 언설에 접근시키면서 조직해가는 일. 데리다는 이 하이데거적 전략을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계승은, 들뢰즈나 리오타르, 또한 다소 세대가 다른 라캉, 레비나스 등에도 공통된다. '사고될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 '잠재적인 것' '현실계' '외부' ㅡ 어떻게 이름붙이든 간에, 거기서 문제는 결국, 비세계적인 무언가의 존재를 잡아내기 위한 은유적=이론적 전략이다. 그리고 하이데거로부터 출발한 그들의 전략은, 필연적으로 세부까지 유사하다. 가령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를 변주해서 제출된 데리다의 '차연'은, 들뢰즈의 '차이화'나 리오타르의 '쟁이'에, 그 목표점 뿐만 아니라 명명법까지 유사하다. (그것들은 모두, 프랑스어의 difference를 미묘 하게 바꾼 것이다). 이 점에서 데리다의 철학은, 명확히 동세대의 프랑스 사상가들과 지평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독해하려는 데리다는 거기로부터 일탈해 있다.

 

   우리는 앞 장에서 <진리의 배달인>에서의 라캉 비판을 주목하여, 두개의 탈구축을 구별했다. 그것을 가지고 이 장에서 다시금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논문이 또한 간접적인 하이데거 비판으로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명시적 언급은 적다. 그러나 거기서 비판된 라캉의 '시니피앙 이론'은 이미 당시에, 낭시와 필립 라쿠-라바르트에 의해 '사고될 수 없는 것'을 둘러싼 하이데거적 언설과 동형이라고 지적되었다. <진리의 배달인>은 그들의 저서를 전제로 해서 쓰여졌고 사실 데리다에 의해 주석처리되고 있다. 또 앞장에서도 언급한 90년대 강연에서 그는 하이데거와 라캉을, 모든 경험적 언설을 '팔루스 중심화된 특정한 시니피앙', 즉 초월론적 시니피앙에 결합시키는 사고양식으로서 명확히 같이 취급되고 있다. 또한, 라캉의 이론적 퍼스펙티브는 일반적으로, Alain juranville이 시사했듯이 많은 점에서 하이데거를 계승하고 있다. 따라서 <진리의 배달인>을 비판한 것은 실제로는 라캉에 깃든 하이데거적 전제에 향해 있었다.

 

   다른 텍스트로부터 보강하자. 68년 강연 <인간의 목적=종말>에서 이미 데리다는, 탈구축의 이중성이 하이데거와의 거리에 관계함을 명언하고 있 다. 한 편 그의 탈구축은, 하이데거의 '해체(Abbau)' '파괴(Destruktion)'에 직접적 기원을 갖는다. 그런데 '열림에 향한 끊임없는 해명은, 폐역의 내폐성 안에로 빨려들어갈 위험이 있다'. 즉 하이데거적 해체의 철저화는, 해체하는 당 시스템을 더 고차적으로 강화할 위험이 있다. 이 비틀림은, 우리가 앞장에서 '부정신학'적 논리라고 불렀던 것과 같다. 까닭에 다른 한편 데리다에게는 , 또 하나의 탈구축, '난폭하게 외부에 몸을 놓고, 절대적 단절과 차이를 긍정하는 것에 의한 [...] 장소 바꿈'이 요청된다. 여기서 '장소 바꿈'이란, 철학소를 난폭하게 다른 문맥 안에로 투입하는 전략, 더 정확하게는, 온갖 철학소에 깃든 무수한 연상의 실을 더듬어가면서 구태여 그것을 '오해'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그 작업은 구체적으로는, 이 강연이 실린 논문집 <여백>의 서문, 제1장에서도 참조한 <고막>이란 텍스트에서 시도되고 있다.

 

   'tympan'이라는 말의 산종적 다의성(고막, 압반과 인쇄지 사이에 끼우는 종이, 물올리는 수차, 빗형의 pediment)을 지레로 니체나 Marcus Vitruvius Pollio나 아리아드네 신화를 연결하는 그 독해작업에서는, tympan 자체의 기원, 소위 '원어'에의 하이데거적 (계보학적) 소행은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말을 연상 일련의 다발에로 해체하고, 단수의 tympan의 속에서 복수의 유령을 발견하는 그 은유 전략을, 우리는 지금껏 '데리다적 탈구축'이라 불러 왔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그 철학적 시도를 다시 한 번, 하이데거적 해체에의 대리보충, 혹은 하이데거적 해체로부터의 일탈로 위치지을 수 있다. 그 자신이 말했듯, <엽서>이래의 데리다는, '죽음'을 둘러싼 문제에 있어서, 즉 그의 중심적인 문제에 있어서 '하이데거적 혹은 라캉적 언설을 [...] 더욱 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60년 이래의 프랑스에 있어, 하이데거적 사고는 극히 강력한 범례로 기능했다. 따라서 그속에서 정신분석의 철학화를 시도한 라캉 역시도, 필연적으로 '프로이트의 하이데거화'라는 성격을 가졌다. 데리다적 탈구축은, 더 넓은 문맥에서는 그 하이데거적 범례성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된다. 탈구축의 이중성은 어떤 의미로는, 데리다가 하이데거에 대해 느꼈던 '더블-바운드'의 현현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책의 출발점이었던 문제, '어째서 데리다는 그런 기묘한 텍스트를 썼는가?'라는 의문을 다음과 같이 반복할 수 있다.

 

   1] 데리다는 어째서 하이데거적 사고에 저항했는가, 혹은 데리다적 탈구축과 하이데거적 해체 사이에 있는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은 순수히 이론적인, 바꾸어말해 constative한 물음으로, 꽤 명확히 대답해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그 대답을 제4장에서 제시하겠으나, 이 장에서는 일단 그 준비작업을 행해보자. 앞장에서 괴델적 탈구축과 데리다적 탈구축의 차이는, 지금껏 여러 점에서 이미지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는 그 불충분함을 보강하기 위해, 후기 데리다가 제시했던 주목할만한 은유=개념의 기능을, 더 상세히 정리해 놓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형이상학 시스템도 부정신학 시스템도 아닌, 데리다가 사고한 '우편 =오배달 시스템'의 특질이 부상할 것이다.

 

   2] 데리다는 어째서 그 저항을, '그러한'(기묘한) 텍스트 형태로 전개했던 것인가? 이것은 이론과 실천의 접합, constative 주장이 performative 텍스트 형태를 요청하는 비틀림에 관한 물음으로서, 대답하기 더 곤란하다. 그러나 여기에 관해서도 우리는 역시 제4장에서 잠정적 해답을 제시하겠다. 하이데거-라캉적 사고와 데리다적 사고, 즉 부정신학 시스템과 우편=오배달 시스템에 관한 인식의 차이는, 우리 생각으론, 커뮤니케이션에 관련한 프로이트적 견해를 매개하여, 후기 데리다의 텍스트 형태를 요청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그 요청은, 부정신학 시스템을 그리기 위해 부정신학적 텍스트(하이데거 를, 혹은 우편 시스템을 그리기 위해 우편적 텍스트(데리다)를 도입한다는 자기언급적 및 거울상적인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내용과 스타일 사이의 그 거울상적 관계는, <엽서> 제2부에 따르면, 모든 초월론적인 사변(spéculation)의 조건이었다.

 

   3] 그리고 데리다의 그 텍스트 실천, 70년대로부터 80년대에 걸쳐 가장 활발했던 '데리다적 탈구축'은 최종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졌고, 어떤 인식을 우리에게 열어줬는가? 우리는 이책 초반에서 데리다의 '좌절(躓き)'에 대해 술했으므로, 이 물음을 피할 순 없다. 데리다의 총체적 평가를 의미하 는 그 대답까지 우리는 과연 도달할 수 있을까?

 

   <송부Envois>라고 이름붙여진 <엽서> 제 1부는, 제1장에서도 언급했듯이, 데리다가 아내 혹은 연인이라 할 만한 인물에 to 해서 적은 의사-서간의 집적, 즉 일종의 자전적 서간 소설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여기서 '데리다'는, 아래와 같은 편지를 쓰기 직전에, 공중전화로부터 상대에 걸은 국제전화의 내용을 회상하고 있다.

 

   * 데리다 : 좀전의 너의 목소리, 그것은 지금껏 (길 따라서, 나무 그늘이 있는, 작고 빨간 유리가 끼워진 박스, 한 사람의 취객이 전화중 계속 내 쪽을 보면서, 말 걸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유리 박스 주위를 걸어 돌면서, 때때로 멈추어 섰다, 얼마쯤 무섭게, 엄숙한 분위기를 띄우며, 마치 판결을 내리려고 하는 듯이), 너의 목소리, 그것은 전에 없이 가까운 것이었다. 전화라는 요행 ㅡ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는 일 ㅡ, 전화는 우리에게 목소리 를 갚아 보내 준다, 가끔씩 늦은 때, 특히 밤에, 그리고 특히 목소리 밖에 없을 때, 전화기가 우리 두 사람을 맹인으로 해 버릴 때에는 더 곧잘 (거기다, 때때로 나는 너에게 전화걸면서 눈을 감는다, 이것을 전에 너에게 말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즉, 전화가 잘 되어, 목소리의 울림=우표(timbre) 가 '필터를 통과한' 어떤 종류의 순수성을 가질 때 ('필터를 통과하다', 내가 유령들의 회귀를 상상하는 것은 얼마쯤 그 위치에서다, 세세하고 숭고한 어떤 선별의 효과, 혹은 은총에 의한 재-도래, 본질적 선별 ㅡ기생물=노이즈(parasite) 가운데서의 선별, [.....]

 

   그러니까, 네가 나에게 전화거는=송부하는(adresser) 것은 그 울림=우표인 것이다, 어떤 메시지도 없이,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한 것은 없이, 그리고 나는 마시고, 내가 마시고 있는 것에 익몰한다. 그런데 나는 매번 거기에 되돌아온다, 한 번 또 한 번. 나는 전적으로 그 울림=우표다, 그 순열(일련), 몇 번이고 반복되는 그 결과...... 그런데, 환혹된 (그러나 분할된, 분할은 좋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근접성의 그 감각을 가지고 너와 전화하고 있는 사이, 나는 영국인인 그 취객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무언가 제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나와 그는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어떤 주의를 쏟으며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무한한 방심은 그러한 것을 조금도 흐뜨리지 않았다. 나는 그가 누군가에 닮아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언제나 생각하고 있는듯이다, 그렇지 않니?) 누구에 닮아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다시한번 미안하다. (나는 너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인생을 계속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시차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내일 나는 너에게 (편지) 쓴다, 나는 그것을 언제건 현재형으로 얘기한다. *

 

   3장에서는 이 인용을 끊임없이 참조해가면서, 후기 데리다 텍스트 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몇 개의 개념=은유의 이론적 함의를 검토해가고 싶다.

 

1-a

   <송부>의 의사-서간에서, 데리다는 빈번히 전화를 건다. 그렇다면, '전화' 즉 '먼(tele)' '목소리(phone)'의 은유는, 그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가?

 

   데리다의 정리에 의하면, 유럽철학에 있어서 '목소리(voix)'의 은유는 일반적으로, 의식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작용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간단히 확인해두자. 가령 사람은, '나는 생각한다'고 하는 언표를 발화하면서, 또한 동시에 그 언표를 듣는 것이 가능하다. 이 동시성 자체는 말할 것도 없이, 목소리와 귀가 가지는 당연한 감각적 특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 유럽에 있어서는 이 특성이 확장되어, 의식 일반의 범례로서 채용 되었다. 그 모델은 철학사적으로는 '내가 생각한다(cogito)'의 청취가 '직결적으로' '나는 존재한다(sum)', 즉 '"나는 생각한다"라고 발화한 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메타-레벨의 명제를 직결적으로 보증하는 데카르트의 착상에 의해 열리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경험적 자아(언표를 발화하는 나)와 초월론적 자아(그 언표를 듣는 나), 오브젝트-레벨 자아와 메타-레벨의 자아와의 단일한 '주체'가 끊임없이 이중화되어, 더구나 그 이중화의 운동에 의해서만 동일성을 유지 가능하다는 모델을 근대철학은 가졌는데, 그 이중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목소리'의 구조였다. 데리다는 그 정밀화를 훗설 현상학에서 찾아내어 67년의 <목소리와 현상>에서 그것을 '자신이 발화하는 것을 듣는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근대에는 의식 혹은 주체를, 목소리의 은유로 이해했다. 이하, 그 은유적 연결을 '목소리-의식'이라 부르기로 하자.

 

   <목소리와 현상>의 데리다가 '목소리'의 모델을 의심하는 것은, 경험적 자아와 초월론적 자아의 그 동시성, 바꾸어 말하면 '가까움'은 엄밀히는 보증되지 않는다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비판은 극히 단순한 착상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일단, '나는 생각한다'가 하나의 '표현'인 것에 주목한다. 표현은 반드시 어떤 지지재, 즉 소리나 문자 등에 각인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소리나 문자라고하는 물질은 '나'에 대해 외재적(ex-, aus-) 인 것이므로, 표현 '나는 생각한다' 자체는 정의상, 발화자인 '나'의 생사와는 무관계하게 존재할 수 있다. 즉 표현 '나는 생각한다'는 반드시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는 항상, 그것을 순식간에 '나는 존재한다'로 회수하여 연결시킬 수 있는, '내가 얘기하는 것을 듣는' 장치로부터 일탈해 버린다. 데리다는 이 물질성을 '에크리튀르'라고 불렀다. 의식 혹은 주체를 '지금 여기'에로 중심화하는 목소리의 작용과, 거기로부터 일탈하는 에크리튀르의 흐름 ㅡ “목소리/에크리튀르, 혹은 파롤/에크리튀르”라는 은유대립으로부터, 전기 데리다의 상당수 작업이 이끌어진다.

 

   그런데 <엽서>에 등장하는 목소리의 은유를 읽기 위해서는, 그 포맷으로는 조금 불충분하다. 무슨 말일까? 실은 70년대 이래 데리다는 '목소리' 및 그것과 친근적인 '파롤' '얘기한다parler' 'appelappel' '외침cri' 등의 말을, 때때로 <목소리와 현상>적 은유대립으로부터 일탈시켜 사용하고 있다.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 가령 제1장에서 인용한 91년의 인터뷰에서 데리다는, 자신의 동일성(아이덴티티)을 빠져나가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 (유령) 는 '외치는crier' 것이라고 한다. 또한 <엽서>에서는 몇 번이고, 소크라테스나 프로이트를 고뇌시키는 데몬의 목소리가 다루어지고 있다. 그 목소리는 그들의 경험적인 앎을 퉁기어내고, 그 피안, 초월론적 사고에의 걸음을 강요하는 것이다. 더구나 <목소리ii>(85) 공개서간에서는, 신체로부터 '이탈(detachement)'하는 '흔적, 에크리튀르 [...]로서의 목소리', 즉 전기의 은유대립을 횡단하는 새로운 목소리에 대해서 다룬다. 더구나 <이름은 별도로 하고>(93)"에서는 명백히, 시스템을 강화하는 권위적인 목소리와 반대로 시스템을 끊임없이 '탈-고유화하는' 별도의 목소리라는 '두 목소리의 이중의 힘'이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즉 후기 데리다에 있어서, 의식의 동일성 혹은 시스템의 중심성을 강화하는 훗설적 '목소리'와 그것을 빠져나가는 별도의 '목소리'라는 적어도 '두 개의' 목소리 은유가 있다고 여겨진다.

 

   더 정확히 검토해보자. <그라마톨로지> 1절에서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존재의 부름'을 짧게 언급하고 있다. 이 '부름Ruf'은 훗설의 목소리와는 다르다. <존재와 시간>에 따르면 그것은 오히려, 일상적 및 내-세계 적인 주체, 즉 '사람(das man)'의 동일성을 내부로부터 잠식하는 것이 다. '부름'은 사람을 '무의미함으로 밀어떨어뜨린다.' 그런데 데리다는, 한편 '부름'이 형이상학적인 목소리-의식에의 비판적 함의를 가지는 은유임을 인정하면서도 결국은 그 하이데거적 전략을 지지할 수 없다. 어째서일까? 거기에는 여전히 목소리의 은유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목소리'로서는 너무 애매한 은유이다. 데리다가 지적하듯 하이데거 자신이, 그 '부름'이 '침묵하는 양태로 얘기하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것, 즉 더는 목소리라고는 말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데리다 : 근본적인 은유를 확증함과 동시에, 또한 은유적 낙차를 고발하면서 그것을 의심하기도 하는 이러한 단절은, 현전의 형이상학과 로고스중심주의로부터 본 하이데거적 상황의 애매함을 잘 전하고 있다.' 여기서 데리다의 주장은 명확해보인다. 하이데거의 '부름'은 목소리-의식의 중심성을 탈구축하는 개념장치이고, 그런 한에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목소리의 은유로 이루어졌던 것에는 문제가 있다. 얼마나 그 '부름'과 내-세계적인 '일상적 얘기(gerede)' 사이에 단절을 도입하든지 간에, 정확히 그 은유를 채용함으로 해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적 사고에 다시 한 번 잡혀 버렸다. 사고의 단절은 은유의 절단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까닭에 데리다에 의하면 그는 일단 단적으로 은유를 바꾸어야만 했다.

 

   거의 20년 뒤, 87년의 <율리시스 그라모폰>에 있어, 데리다는 다시 하이데거의 '부름'을 다룬다. 그런데 거기서의 접근은, 이번에는 <그라마톨로지> 와 크게 다르다. 그는 먼저, <율리시스> 주인공 브룸이 빈번히 전화를 거는 것에 주목하여, '그의 현존재는 대-전화존재(être-au-telephone)다'고 술한다. 즉 하이데거적인 '현da' 개념을, 전화를 대하는 일, 네트워크 공간에 접속되는 일로 다시 읽는다. 그리고 그 착상을 가지고 다음에 그는, ruf의 불어역인 appel의 뉘앙스를 이용해서, 하이데거적 부름ruf을 '전화의 호출(appel)'로 재번역할 것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애초에 '하이데거적 현존재는 항상 [...] 멀리서부터 도래하는 호출에 의해서만 자기자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서, 브룸도 역시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후자는 항상 '목소리의 다수성' '네트워크' '다전화구조'에 접속되어, 복수의 전화에 대한 응답가능성(=책임) 에 노출되면서 <율리시스>의 작품세계를 지탱하고 있으므로 그렇다. 여기서는 위에서처럼, 은유가 '목소리'에 대한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신에 데리다가 주목하는 것은, 그 목소리가 '어디서부터' 도래하는 것인가라는 내역(來歷)의 문제이다.

   <존재와 시간>에 있어 부름의 관념은 윤리적 문제계를 여는 '양심의 목소리'로서 도입되고 있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일상적-내세계적인 의식을 벗어나가는 부름이야말로 '죄' 혹은 '책임'의 관념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착상하는 '양심'이 칸트의 정연명법과는 다르게,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구체적 판단을 일체 주지 않는 점에 있다. 양심의 목소리는, 내가 어떤 것의, 혹은 세계 전체가 어떤 것의 토대적인 '무'를 폭로하여, 그 '기분 나쁨'에 의해서만 나의 윤리를 강요하게 된다. 즉 그 목소리는 세계 내의 '타인으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한가운데 빈 구멍 ㅡ <존재와 시간>의 술어로 말하자면 '개시성(Erschlossenheit)'으로부터 울린다. 그리고 그 구멍은, 세계 전체를 인식하는 현존재 자체의 '존재 근거의 결여' 혹은 '순환구조'에 대응하고 있다. 현존재의 자기언급적인 순환구조가 '구멍'을 요청하여, 거기서부터 '부름'이 울린다는 개념계는, 우리가 앞장에서 '부정신학'이라 명명했던 논리 자체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윤리적 사고도 역시 지젝의 고유명론이나 이데올로기론과 같이, 내세계적 존재자에 어떠한 관련성도 갖지 않는다. 목소리-의식은 부름ruf에 의해, “내부로부터” 빠져나간다.

 

   데리다는 그 순환구조를 '다전화구조'로 환치한다. 전화선=네트워크의 저 편에는 복수의 타자들이 있고, '브룸은 사람이 대답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존재와 시간>의 논리적 퍼스펙티브에서는, 부르는 것은 단수(es)로 파악되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부르다(es ruftmich)'. 부름의 기원인 '순환구조'는 세계 전체에 대응하는 것이므로, 그 단수화는 불가피하다. 그런데 목소리의 내력을 비켜 놓는 것으로 인해서, 데리다는 거기에 '복수의' 타자=부르는이를 도입한다. 단, 그 '타자'의 의미에 주의해 두어야 한다. 이런저런 타인은, 목소리-의식의 독재를 원리적으로 위협하지 않는다. 경험적 타자는 항상 '내'가 구성하는 타자로서, 따라서 거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내 거울상에 지나지 않는다. 목소리-의식이란 애초에 세계의 지평 자체로서, 모든 내세계적 대상은 거기에 속한다. 하이데거와 데리다는 동시에 현상학의(혹은 초월론적 철학 일반의) 이 전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목소리-의식의 중심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은 필연적으로, 어떠한 '비'세계적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이데거의 '부름'이 이런 저런 존재자와 무관계한 것은, 따라서 이론적으로 요청되었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appel'도 역시 마찬가지로, 경험적 타자(타인)의 수준에서 생각되어선 안 된다. 그 점에서 데리다는, 하이데거보다도 어려운 길을 간다. '부름'의 비현실성은 결국 내세계적 사물(세계) 와 그것들 총체의 존재근거(비세계), <존재와 시간>의 술어를 사용하면 '객체적 존재자'와 '현존재'의 레벨 구분으로 담보되고 있다. 앞장서 라캉과 함께 살펴본 대로, 일단 그 레벨 나누기를 도입한다면, 최종적으로 그 분할선이 괴델적 결정불가능성에 있어서 유지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번에는 그 결정불가능성 자체에 의해 새로운 '초월론성'이 담보되어 버린다. 그런데 그 전략이 '부름'를 단수화하는 한에 의해서, 데리다는 그 생각법을 채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해서, appel의 비세계성과 복수성을 이론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목소리-의식(=세계)의 중심성과 전체성은, 불가피하게 어떤 것에 잠식된다. 그 비현실적 존재를 어떻게 파악할까? 거기에 대한 전략을 여기서는 질문하고 있다. <그라마톨로지>와 <율리시스> 사이에는 전술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의 논의에선 아직 <목소리와 현상>의 틀 내, 파롤/에크리튀르의 은유대립 안에 있었다. 따라서 거기서 비세계적 존재는, 목소리-의식이 닫히는 때에 불가피하게 생기는 회수불가능한 '비틀림', 의식의 현전으로부터 '일탈하는 것' 즉, '에크리튀르'로서 제시되고 있다. '데리다 : 이 순수한 차이, 그것은 살아있는 현재의 자기에의 현전을 구성하는 것이면서, 거기로부터 배제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 일체의 불순성을 근원적으로 다시 한번 거기에 도입한다.' 탈구축은 그 흔적을 쫓는다. 그에 반해 후자에서, 비세계성은 오히려, 목소리-의식에 침입하여 그것을 벗어나고, 응답을 '요구하는 것' 즉 능동적인 것으로서 파악되고 있다. 하이데거에 의한 목소리의 은유를 일부 승인하면서도, 데리다는 거기서 비세계적 존재에 '호출된다appeler'는 문제설정을 새롭게 세운다. '온갖 퍼포머티브한 차원의 초월론적 조건' '탈구축의 조건'으로서 어떤 응답의 관념이 필요하다는 그 주장은, 앞장에서 들었던 <법의 힘> <맑스의 망령들>같은 90년대 텍스트에 정치적-윤리적 문제계를 직접적으로 준비해준다. 그리고 거기서 '전화'라는 은유는, 적어도 다음 두 점에서 요청되고 있다.

 

   1] 하이데거를 '다른 형태로' 탈구축하기 위해서. <그라마톨로지>에 있는 하이데거 비판은, 기본적으로 <목소리와 현상>의 현상학 비판의 연장선이다. 즉 거기에 하이데거와 형이상학, '부름'와 훗설적 목소리는 연속적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 그러나 목소리의 은유를 재독하면서, 데리다는 하이데거 비판의 다른 국면을 연다. 이책에서 상세히 다룰 순 없지만 87년의 <정신에 대해서>나 89년의 <하이데거의 귀>등, 후기 데리다의 하이데거 독해에서 목소리의 은유는 항상 결정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는 반복해서 '부름'의, 혹은 현존재의 중심성=단수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 생각으론, 데리다의 하이데거 독해가, 형이상학 비판으로부터 부정신학 비판에로 중점을 옮겨간 것을 의미하고 있다.

 

   2] 현상학비판을 텔레미디어 문제계와 접합시키기 위해서. '목소리phone'에 에크리튀르의 특징인 접두사tele를 부가하는 것으로 구성된 '전화telephone'의 은유는, 주체가 스스로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신이 얘기하는 것을 듣는' 회로 (목소리-의식)에 항상 이미 매개성이나 타자가 침입하고 있는 형상을, 극히 경제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은유는 한 편으로, 일부러 문자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앞장에서 강조했듯, 후기 데리다는 비세계적 존재(불가능한 것)을 파악하기 위해 '우편'의 은유를 중시했다. 불가능한 것은 네트워크 속에 깃든다. 까닭에 목소리-의식의 회로가 순수한 채로 있을 수 없는 것은, 거기에 항상 이미 네트워크가 침입해있기 때문이고, 살아있는 신체에 항상 이미 온갖 미디어가 접합되어 있기 때문에이다. '송부'에 실딘 의사-서간에서 데리다가 (블룸처럼) 항상 전화를 걸고 있는 것은 그 형상을 그리기 위해서다.

 

   이상의 작업에 의해 우리는 여기서 '세 개의' '목소리'를 구별한 것이 된 다. 정리하면, 1. 초월론적 시니피에-형이상학 시스템을 지탱하는 훗설적인 목소리. 거기서는 목소리의 지평(세계)에 수거되지 않는 것, 즉 비세계적 존재는 인정되지 않는다. 2. 초월론적 시니피앙-부정신학 시스템을 여는 하이데거적 부름ruf. 거기서는 목소리의 지평에 수거되지 않는 비세계적 존재가 딱 하나만 , '세계' 전체의 순환구조의 대응물로서 인정된다. 3. 형이상학 시스템과 부정신학 시스템을 동시에 벗어나는 계기로서의 데리다적 호출appel. 이것은 앞장에서 소묘한 우편-오배달 시스템에 대응하여, 거기서 비세계적 존재는 복수성으로 파악된다. 형이상학과 부정신학은 데리다 생각으론 '하나의' (데리다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현전적인') 세계를 상정하는 점에서 공범이다. 사실 그의 텍스트에는 때때로 훗설이 부정신학,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으로 불리는 교차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양자에 저항하는 데리다는 묻는다. '만약(가령) 하이데거의 사고되지 않는 것이 하나가 아니라, 복수라고 한다면?' 후기 데리다가 이용하는 은유는, 이 수사의 문장을 연마하기 위한 이론적 장치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1-b

   다시 '송부'로 돌아가자. '송부' 전체는 전술한 듯이, 일종의 서간소설로 서 읽을 수 있다. 그 전체설정은 간단하게는 다음 같은 것이다. 쓰는이 '데리다'가 과거에 어떤 배신 행위(아래A)를 해, 상대의 신용을 결정적으로 잃고 있다('나는, 네게 사과하는 것으로 일생을 보내버릴지도 모른다'). 상대 는, '결의'를 비친다. 데리다는 거기에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강연이나 세미나 등 국외에서 일이 많은 데리다는 결국, 프랑스에 사는 상대와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 그는 그 '결의'를 질질 끌기 위해서, 대량의 편지를 다음다음으로 붙일 수 밖에 없다. 까닭에 편지는 하루 몇 통씩 투함 되고, 전화도 역시 빈번히 걸리어진다. 그리고 또한 그는 동시에 정신분석에 대한 저작ㅡ결국 중단되어 그 일부가 <엽서> 제2부에 실리는데ㅡ을 준비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 러브레터 안에는 , 이젠 거의 망상에 가까운, 단편화된 이론적 아이디어도 많이 쓰여지게 된다. '송부'는 그 반은 러브레터, 반은 이론적 단편으로 이루어진 의사-서간의 집적이고, (상대의 답장은 실리지 않는다) 77년 6월에 시작되어 79년 8월에 끝난다.

 

   * (아래A : 주석에 있음) 바람. '그녀는 너보다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것이 catastrophe이다'. 더 말하면, 아마 그 때 '데리다'는 그 여성을 임신시켰거나 혹은 이미 아이가 이미 낳아져있다고 추측된다. 그 설정은 복수의 서간에서 애매하게 암시되고 있는 이외에, 이론적 문맥에서도 일부러 '임신' '중절'이라는 말을 사용하거나, 정액을 우편으로 붙이는 망상이 기록되어져 있거나. 유감이지만 이 독해는 정확한 근거는 없으므로 결국 억측을 벗어날 수 없지만, 그건 또한 <엽서>의 이론적 배치와 극히 정합적이기도 하다. 의도하지 않은 임신, 및 그 결과 태어난 자식은, '정확히' 오배달된, 즉 잘못되어 '발송=사정(emission)'된 편지와 그 재도래의 은유가 된다. 아버지에게 있어 자식(유령)의 기원은 더는 확실하진 않지만, 그것은 용서없이 '책임'을 요구한다. 애초에 70년대 데리다의 이론적 중심을 이루는 '산종' 자체가, 그 자신이 술하듯 극히 '생식적 함의'를 강조하는 은유였다. 따라서 그가 생각하는 '성'은 일관적으로, 푸코의 성적 욕망sexuality(주체 구성)문제보다는, 오히려 생식이나 임신(커뮤니케이션) 문제계에로 연결되는 것이다. *

 

   일단 인용한 데서 보여지는 세 개 은유에 주목하자. 1. "울림=우표(timbre)". 우편망이 우표를 붙여진 편지를 배달하는 것처럼, 전화망은 울림을 붙인 목소리를 전달한다. 2."필터를 통과한'. 전화의 목소리는 그 결과 '어떤 종류의 순수성'을 가진다. 3. '유령들의 회귀'. 이것은 노이즈의 혼입에 의해 가능해진다.

 

   후기 데리다의 텍스트에 있어서, 복수의 비세계적 존재는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은유로 나타내어진다. 그런데 이 장에선 이하, '유령'을 그것들의 총칭으로서 채용하기로 한다. 데리다는 <맑스망령>에 있어 유령의 비세계성(비현전성)과 복수성을 명기하고 있다. '환각, 즉 현전하지 않는 타자들' '하나의 관점으로부터는 더는 찍어 가리킬 수 없는 망령들의 군집 […] 망령은 수다'. <율리시스 그라모폰>도 역시, 몇 번 전화의 목소리를 유령에 빗대고 있었다.

 

   그리고 <맑스망령>은 유령에 대하여, 복수성에 더해서 세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1. 유령이 능동적이라는 점. 그것은 hanter나 appeler라는 동사의 주어가 되어, 사람들에게 '응답'을 요청한다. 전술했듯 <맑스망령>은 탈구축적 윤리ㅡ'래디컬한 비판'ㅡ이 일종의 응답을 전제로 하는 것을 몇 번이고 강조하고, '호출하는 유령'의 범례로서 <햄릿>에서의 아버지 망령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2. 유령은, '현재' 및 그 변용으로서의 '과거' '미래'라는 통속적 시간개념에 쫓기지 않는 기묘한 시간성, '살아있는 현재의 자기에의 비동시성'에 의해 나타난다고 하는 점. 이 시간성은 <목소리와 현상>에선 에크리튀르나 차연의 시간성으로서 분석되었다. 까닭에 그런 한에서는 유령을 전기 데리다의 은유대립 안에서, 즉 에크리튀르와 같은 것으로서 이해할 수도 있다. (목소리-의식이 통솔하는 현전적 세계와, 거기에서 일탈하는 유령들) 그러나 그건 역시, 유령의 능동성을 놓칠 우려가 있다.

 

   3. 유령에의 응답, '메시아적인 것' 혹은 '약속'이라 불리는 희망의 지평 (1장에서 다룬 조건법적 미래) 이, '만약peut-être'이라 불리는 양상성=확률의 위상으로 열리는 점. <맑스망령>에서의 언급은 적지만, '만약'은 다른 텍스트에서는 '모든 약속의 가능성의 조건'으로도 얘기되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고 그 위상은 유물론적으로는, 앞장에서 검토한 것처럼, 네트워크의 불확실성, '전달되지 않는 일도 있다는 것'의 효과로서 생긴다. 데리다는 '(역을 만드는 기준이 되는 천체의 운행)geschick'이라는 하이데거적 관념을 '보내는 것schicken' 으로 재해석하여, 거기에 오배달 가능성을 읽어내는 시도를 몇 번 전개시키고 있고 (독일어ges는 문법적으로는 '보내진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참조하면 peut-être는 또한 '확률존재'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프랑스어 peut는 '있을 수 있다(pouvoir)'의 변화형). 현존재의 '현'을 '확률'에 환치하는 그 작업은, Da를 네트워크로 재독하는 <율리시스 그라모폰>의 제안과 이론적으로 같다.

 

   유령은 복수로서, 능동적으로, 및 특수한 시간성과 양상성에 기초해 나타난다. 후자의 두 성질은 유령의 비세계성(비현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령의 정의이다. 문제는 전자 두 성질. 복수성과 능동성이다. 비세계적 존재를 복수적 및 능동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사고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비세계적 존재를 파악하기 위한, 부정신학적이지 않은 '다른' 이론,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는 다른 다른 분석장치를 필요로 한다.

 

   우편=오배달 시스템에 있어서의 '불가능한 것', 즉 유령의 관념은 두 개의 계기 (전기적과 후기적) 로 지탱되고 있다. 1. 편지=시니피앙의 오배달가능성. 전기 데리다의 은유대립->목소리/에크리튀르. 가령 <서명, 사건, 콘텍스트>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의 실패 가능성은, (1장에서 요약한데서도 선명하듯이,) 그제껏 목소리-의식의 통솔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인용가능성)으로서 파악되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논문은 일부 <엽서>의 문제계를 예고하면서도 그제껏 전기 퍼스펙티브에 속한다. 2. 유령, 즉 '죽은=행방불명인(dead)' 존재가 '잠재적으로' 존재하기를 계속하는 공간. 우리는 이하 그것을 '데스스톡 공간'으로 부르기로 하자. 그 공간은 <율리시스 그라모폰>에서는 전 화망에 접속한 무수한 받지않는 전화를, 또한 '송부'에선 행방불명의 우편 물이 축적되는 dead letter office를 은유로서 얘기되어지고 있다. 이 상정은 전기 은유대립으로부터 이끌어진 것은 아니나, 유령=재래하는 것(revenant)에 대해 사고하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계기다. 일탈하는 것이 보류되는 공간의 도입이야말로 그 '회귀'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엽서> 2부서 데리다는, 비세계적 존재의 특징을 반복re-에 집적시키고 있었다. 유령은 반복하여 재도래하고, 그 반복에 의해 목소리-의식을 벗어나간다. 여기서 유령의 복수성(반복하는 것) / 능동성(재래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데스스톡 공간은, <맑스망령>에선 '잠재적 공간'이라고, <알시브ㅡarchivesㅡ의 악>에선 '잠재적인 것의 알시브"라고 불릴 것이다. '잠재적'이란 여기서는 들뢰즈와 같이, 현전의 논리에 설명될수없음을 의미한다.

 

   우편공간, 더 정확히는 '데드스톡 공간'이 유령을 가능하게 한다. <맑스 망령>은 그 효과를 '망령화'라고 부르고 있었다. '정보, 출판, 텔레커뮤니케이션은, […] 공공 공간을 망령화한다'. 이 모티브자체는 전기에도 흩어져있다. 가령 <'기하학의 기원' 서설>은 1장에서 검토한 듯이, 훗설 비판을 이념의 '전승'에 주목하는 것으로써 행해진다. 거기서 데리다는 이미 목적론으로부터 일탈하는 비세계적 존재가 '전승', 미디어의 효과로서 생기는 것을, 명확히 지적했었다. 그런데 그 계기가 본격적으로 사고되는 것은 70 년대 이후 텍스트, 특히 80년의 <엽서>에서다.

 

   <송부>에서, 데리다와 아내(연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은 끊임없이 망령화되고 있다. 우편은 상대의 현전을 빼앗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배달의 효과는, 수신지 '너(tu)'를 불가피하게 '너들=당신들(vous)'에로 복수화하고 사이사이 떨어뜨려 놓는다. 혹은 서문에서 시사했듯, 그것은 쓰는이=데리다 자신도 복수화해 버린다. 까닭에 '너'와의 문통은, 차례로 유령에의 응답의 색채를 짙혀 간다. 그리고 이 망령화 효과는, <송부>의 이야기 진행에 이중의 기능을 한다. 한 편으로, 데리다와 '너'와의 직접의 화해는 언제까지고 연체된다. 가령 문제의 배신 행위에 대해 그가 해석한 (듯한) 가장 중요한 편지는, 같은 이름의 촌이 우연히 두 개 있었기 떄문에, 오배달되어 결국 상대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한 편, 현적적 및 직접적인 이해의 그 회피는 역시, 상대의 '결의', 관계의 파국을 연체하는 것이기도 하다. 행방불명이 되어 데리다 쪽에로 회귀되어 온 문제의 편지를, 데리다는 재발송하지않고 그 채로 태워버린다. 그 결과 상대는 그 망령화한 편지(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편지)에 매달려, 이후 '결의'의 순간을 끊임없이 탈구축하게 된다. 따라서 이 의사-서간군에 있어, '너'에의 호출(appel)의 망령화는, 데리다의 사랑을 방해하면서, 동시에 그 존재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는 이 이율배반, 더블-바인드를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지탱하는 그 더블-바인드를, 이미 <그라마톨로지> 2부는 주제로 하고 있었다. 루소 독해의 문맥에서 '대리보충 이론'이라 불린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2장에서 보았듯이, '대리보충 이론'은 형식적으로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같다. 따라서 거기서 데리다는, 어떤 언설의 이해의 심급이 constative인가 퍼포머티브인가가 결정될 수 없는, 그 결정 불가능성으로부터 불가피하게 생기는 '발화자의 측에 있어서의' 조건, 드 만에 대해 술한 가라타니의 말을 빌리자면, '말이 쓰는 이의 의도를 배신하여 다른 것을 의미해 버리는' 윤리적 조건에 대해 얘기한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 생각으론 <엽서>에 있어서의 우편공간의 도입은, 그 조건을 또 다른 논리로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거기서 '말이 쓰는 이의 의도를 배신하여 다른 것을 의미해버리는' 상황은, 더는 발화자 측의 결정 불가능성(발화자의 현전에의 회수불가능성)으로부터가 아니라, 발화자와 수화자 사이에 퍼지는 네트워크로부터 분석되기 때문에 그렇다.

 

   좀전에 주목한 3가지 점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이상의 분석을 통해, 이제 '울림=우표'의 함의를 명확히 분석할 수 있다. 가령 70년대 초의 어떤 논문에서, 데리다는 '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한다. '나의 목소리의 울림, 나의 에크리튀르의 스타일, 그것은 나(자아)에 있어 결코 현전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될 것이다. 내가 자신의 목소리 울림을 이해하거나 재인식하는 일은, 결코 없다.' '울림'은 결코 현전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 =자아(moi)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목소리에 항상 수반하면서도, 동시에 그 동일성으로부터 끊임없이 일탈하고 있다. 이 주장은 말할 것도 없이 지금껏 술해온 전기 은유대립에 속한다. 그러나 <엽서>에 있어서의 '울림'과 '우표'는, 그 일탈성을 또다른 관점으로 파악하게 해준다. 그리고    '울림'의 비현전성은 거기서는, 이번에는 전화=우편망의 효과로서 생각되어지게 된다. 인용 부분을 들여다 보자. 전화망은 목소리를, 우편망은 편지를 망령화한다. 까닭에 현전적인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는다('어떤 메세지도 없이'). 바꿔 말하면, 거기서 전달되는 것은 망령화된 것, 즉 목소리 울림, 편지의 우표 뿐이다.('네가 보내는 것은 그 울림=우표다') 그리고 그 망령들을 수취하는 것으로, 데리다도 역시 망령화하고('나는 전적으로 그 울림=우표다') 이번에는 상대를 향해서 집요하게 재래한다('몇 번이고 반복되어온 그 결과'). 즉 '울림=우표'란, 전화-우편망을 통해 나타나는 유령을 의미한다. '울림'을 '우표'로서 재파악하는 은유 전략은, <그라마톨로지>, <율리시스 그라모폰> 사이의 목소리 은유의 이동과 궤를 같이한다.

 

   그렇다면 남은 두 가지 사항, '필터를 걸러진'과 '유령들의 회귀'에 대해서 말해보자. 이것들은 우편공간의 성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한편으로 '필터' '선별tri'이란 네트워크의 개입을 의미한다. '노이즈' 즉 오배달가능성의 존재가 망령화를 일으키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어떤 종류의 순수성'을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한 편, '유령들의 회귀'는 전술했던 데드스톡 공간의 효과로서 생긴다. 다음 절에서 이 두 사항에 대해 시점을 바꿔 검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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