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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nch theory >> Derrida >>
아즈마 히로키의 해석 (존재론적, 우편적) >> 3장ⓐ >> 3장ⓑ
Attention
주석과 인용서는 번역이에게 흥미로운 예외를 제외하곤 기재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번역이므로 몇 개의 오역이 예상된다. 그러나 가독성 문제 해결을 포함하여 성의를 가하려 노력했다.
책 제목은 <>로 표현되며,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경우 간혹 " "나 ' '로도 표현된다.
(시작)
2
유령이 깃드는 데드스톡 공간. 그런데 거기서 받지않는 전화나 dead letter office같은 은유에 이끌려서, 그 공간을 실체적으로 이미지해선 안 된다. 비세계적 존재가 깃드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다'고 한다면, 그건 신비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생각하는 게 좋을까? 망령화의 메커니즘을 더 명확히 해나 가자.
인용된 의사-서간에는 실은, 망령화를 일으키는 두 개의 '비틀림'이 전개되고 있었다.
1] 그것은 목소리의 복수화, 분할(séparation)에 관계되어 있다. 데리다는 국제전화를 걸고 있는데, '시차'가 있다. 까닭에 그와 상대는 같은 시각을 공유할 수 없다. 확실히 이것은 내-세계적 (경험적)인 현상으로서, 목소리-의식의 단일성을 위협하진 못한다. 그러나 애초에 그 '시차'가 인식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그 국제전화에 있어서, 데리다와 상대가 “한 편으로” 전화망 상에서 같은 시각을 공유하고, “다른 한 편으로” 각각 토지에서 다른 시각을 살고 있었기 떄문이다. 또한 이 “한 편 ~ 다른 한편”을 가능하게 만든 조건은, 더 검토할 가치가 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듯이, 전화는 눈의 장소와 목소리의 장소, 눈 앞(pré)과 귀 앞을 절단한다. 이것은 현전성(présence)의 분할을 의미한다. 까닭에 인용한 장소에서 데리다는, 눈으로 옥스포드를, 귀로 프랑스(혹은 전화망 위의 어딘가)를 '지금 여기'로서 지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전화 경험은 더구나, <목소리와 현상>이 지적한 현전성과 근접성의 현상학적 공범관계를 해체하기 위해, 가까움의 감각(근접성)에 분할을 일으켜 간다. 데리다는 상대와 회화를 나누면서, 동시에 취객과 '서로 바라본'다. 그는 그 남자의 행동에 꽤 신경쓰는데 (인용에서는 넣지않았지만 데리다는 실은 폭력을 두 려워하고 있다), 그 '나의 무한의 방심'은 회화의 집중을 '조금도' 흐뜨러놓지 않는다. 왜인가? '분할되고' '환혹된 근접성의 그 감각'에 있어서는, 눈과 귀는 근접성을 각각 다르게 지각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는 너에게 얘기 하면서 눈을 감는' 것은, 그 환각을 일으키기 위해서이다.
2] 편지의 비현전화, 즉 망령화에 관련되어 있다. 데리다는 위에서 설명한 행위를 편지로 쓰고 그것을 발송한다. 그러나 그는 같은 1977. 6. 4 일에, 실은 또 하나의 편지를 쓴다. 문제의 전화는 첫통을 쓰는 중에 걸려 온 것이나, 인용한 편지는 그 첫통의 투함 뒤에 쓰여진 2통째이다. 이 두 통의 편지는 동시에 투함되지 않았으므로, 다른 날짜에 도착한다. 더욱 데리다는 인용에서 약속되어 있듯이 다음날에도 편지를 쓴다. 그리고 그 편지에서 이번에는, 그 편지 자체의 도착 전에 재회가 예고된다. (덧붙여 인용 말미의 한 문장은, 4일의 2번째 편지와 5일의 편지가 동시에 투함되는 것을 시사하는지 모른다). 위와 같은 것을 해두고, 그는 10일에 귀국한다. 이러한 모두는, 커뮤니케이션의 갖가지 모드, 목소리(전화), 문자 (편지), 현전성 (재회) 사이의 시간적 순서를 전도시키고 착종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비슷한 류의 것들이 <송부>의 갖가지 장면에서 중층적으로 전개되어 있고, 따라서 거기서는 '나'의 발화의 순서와, 너의 이해 = 청취 순서는 항상 미묘하게 비틀려있다. 정의상 하나의 목소리-의식에 의한 현전적 파악을 벗어나는 이 '비틀림'이야말로, <송부>의 커뮤니케이션을 망령화시킨다.
먼저 2의 비틀림에 대해 생각해보자. <목소리 현상>은 '에크리튀르'의 비현전성, 즉 유령적인 비세계성을, 철저히 초월론적인 절차 (데리다에 의하면 '초-초월론적') 를 통해 이끌어내었다. 따라서 그 비세계성은 경험적인 조건에 의해 쉽게 이끌어내어져서는 안 된다. 까닭에 갖가지 미디어 장치, 가령 텔레스콥, 비디오, 비쥬얼 리얼리티의 등장에 의해 주체의 현전성이나 동일성이 해체된다고하는 의견에는, 원칙적으로는 신중해야 한다. 이건 데리다를 읽기 위한 전제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상말한 전적으로 경험적인 착종 상태는, <목소리와 현상>이 분석한 초월론적 비현전성과 이론적으로 직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무슨 말일까?
1장에서 참조했듯이 72년 텍스트 <책의 바깥>에서, 데리다는 '서문'은 '현전성의 사고를 벗어난다'고 술하고 있다. 이번에 새로 주목할 것은, 거기서 일탈의 이유로서, '시제의 전도'가 지적되었던 점이다. '데리다 : 이미 씌여져 있던 것으로 될 것의 의미나 개념적 내용을, 서문은 미래형으로 언표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간단히 말하면, 저자의 시간적 순서와 독자의 시간적 순서인, '본문->서문'과 '서문->본문'의 충돌이다. 헤겔을 참조하면서 데리다는, 그건 역시 '철학적 순서'와 '교육적 순서', '과학적 순서'와 '형식적 순서'의 충돌이다. 서문은 한편으로 독자 (교육되는 자)의 시간적 질서로 씌여져있는 듯한 척 하면서, 실제로는 필자(이미 이해한 철학자)의 위치로부터 씌여져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한편으로 미래의 것이면서 한편으로 이미 끝나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데리다가 '이미 씌여져있는 "것으로 될 것"' 이라고 조건법을 사용 한 것은, 한쪽의 시간적 순서로부터는 다른 한쪽의 시간적 순서가 가능세계로밖에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린 여기서 얼마쯤 대담하게, '현전성을 벗어나간다는 것은 복수의 시간적 질서의 충돌에 의해 생긴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서문을 후기와 동일시한 헤겔의 목적론(텔레올로지)은, 정확히 그 충돌의 말소를 시도하고 있었다. 또한 프로이트는 주지하듯 무의식적 기억의 '무시간성'에 때때로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송부>의 착종은, 여기서 분석된 서문의 착종과 같은 구조로 생겨나온다. 단 <책의 바깥>에 있어서의 데리다는 그제껏 충돌을 책의 '바깥'과 '안', 즉 메타레벨과 오브젝트레벨의 상호오염으로서 정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논의는 결국 괴델적 불완전성(대리보충 이론)에로 귀결해 버렸다. 그런데 <송부>서 데리다가 설정한 상황은, 충돌=망령화가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다른 각도에서 비춰낸다. 데리다의 사고순서와 '너'의 이해순서, 즉 복수의 다른 시간적 질서가 생기는 것은 단순히, 전화와 편지 사이에 '속도'의 차가 있기 때문이다. 속도가 다른 미디어를 동시에 여러 개 사용하는 것은, 현전적인 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억압한 시간적 착종을 폭로한다. 일반화한다면, 눈 앞에 있는 정보의 집합, 가령 지금 전화로부터 울려퍼지는 상대의 목소리와 오늘 도착한 상대로부터의 편지와는, 실제론 각각 다른 속도의 내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목소리-의식이 하나의 세계를 한꺼번에 장악하기 위해서는, 그 전체를 '지금 여기'에 중심화된 것(현전성)으로서, 그 속도의 차이들을 억압시켜야만 한다. 즉 현전화란 내력의 말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말소가 충분히 이뤄져있지 않을 때야말로, 정보의 서로 다른 내력 사이에서 속도의 차이가, 시간적 순서의 복수화와 그 충돌을 일으킨다('데리다'와 '너', 헤겔과 독자). 그 결과 '유령'이 태어나고, 미디어 환경은 그것을 또한 현현히 존재하게 한다.
속도의 시점을 도입함의 최대 이점은, 데드스톡 공간을 실체적으로 상정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가령 전술했듯, 데리의 가장 중요한 편 지는 상대에 도달치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투함되고 데리다에게 돌아오기까지 9일간, 현전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유령)으로서, 두 사람의 전화에서의 회화에 큰 영향을 계속 부여해간다. 그럼 그 동안, 행방불명dead 의 편지는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우편망 안에서 천천히 순환하고 있었을 뿐이다. 라고 한다면 우린 여기서 '유령들의 회귀'를 일으키는 매커니즘, 즉 dead stock공간을, '어떤 회로이자 속도의 선택의 효과' 로 재해석할 수 있다. '죽음'을 둘러싼 하이데거/라캉적 언설에 데리다가 강한 위화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미 말했지만, 그에게 있어 행방불명=죽음이란 결국, 통상보다 극단적으로 늦은 회로를 통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편지는 항상 현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데리다와 편지의 이동속도가 너무도 비틀려있기 때문에, 후자는 전자의 현전적 세계를 일탈해버린다.
'불가능한 것'은 여러 개 있다. 더 정확히는, '불가능한 것', 비세계적 존재 자체는 어디에도 없다고 말해져야 한다. 다만 비세계적인 '효과'는 존재하고, 그것은 낱낱의 정보가 가지는 속도의 비틀림으로부터, 항상 복수적으로 일으켜지고 있다. 하이데거적 사고가 '불가능한 것'을 단수로서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애초에 그가 '세계'라는 단일성 자체를 미세히 흔드는 효과, 우리가 여기서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속도의 충돌'을 말소하여 논의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소는 역시, 2장에서 검토한 라캉-지젝의 행동인, 상징계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개개의 시니피앙의 오배달 가능성을 말소한 것과 동일하다. 오배달이란 회로의 선택 미스인 한, 오배달 가능성의 말소는 내력의 말소이며, 속도의 말소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유령 혹은 에크리튀르의 비세계성을 설명하기 위해 <목소리와 현상> <그라마톨로지>에서 사용된 논리와는 다른 '또 다른' 논리를 손에 얻었다. 그리고 이 논리에서는, 비세계적 존재가 단순히 '일탈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성 (회귀) 역시 가진다.
여기서 우리가 '속도'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은, 데리다의 텍스트에서는 때때로 '리듬'이라 불리고 있었다. 가령 <엽서>는, 반복강박, 즉 유령의 재래의 '리듬'을 말한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한편으로 그 리듬의 문제계를 (니체를 참조하면서) 열면서, 다른 한 편 정확히 거기서 중단되고 있다. 우리가 확인하는 한에서 다른 텍스트에서도 대부분 '리듬'에의 참조는 단편적, 시사적인 것에 멈춰져 있고, 그것이 전면적으로 전개된 논문은 없다. 아마 이 불발생은 그것 자체, 데리다가 제시한 모든 은유가 가지는 어떤 논리적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검토는 독립된 작업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데리다의' 리듬에 대해 술하는 것은 다른 기회로 돌리고 여기서는 '속도' '리듬'이 여는 퍼스펙티브를 더 추궁해보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세계' 안에 있는 사물, 즉 목소리-의식의 통솔하에 있는 존재자를, zuhandensein와 vorhandensein라는 두개의 카테고리로 나눌 것을 제한했다. 그 말들은 '용구적 존재자' '객체적 존재자'인데, 직역은 '손 안에 있는 존재' '손 앞에 있는 존재'가 된다. 즉 그는, '손'에 대한 가까움과 멂의 조합으로 내적세계 존재자의 총체를 파악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으로는 모든 존재자는 최종적으로는 zuhandensein의 카테고리(용구성)에 귀착한다. '용구성은,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존재자의 존재론적 = 카테고리적 규정'이기 떄문이다. 대조적으로 vorhandensein란, 그 타락태, 더 정확히 설명하면, 세계와의 원초적 관계성(Sorge)이 결여함에 의해 zuhandensein가 '더는 다만 객체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앞vor-]이, [안zu-]이 지키고 유지하는 가까움이 망각되어, 유리해버린 양태를 나타내는 접두사로서 쓰이고 있다.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이 주장은 하이데거가 세계 전체를 어떤 종류의 [손]에 대한 현전, 현존재에의 절대적 근접성(그것은 그렇다면 [앞]보다도 가까운 것이므로)에로 환원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거기서는, [세계]는 다음과 같이 이미지되어 있다. 현존재의 손에는, 세계의 모든 존재자로부터 무수한 순열이 집중한다. 먼 곳에 있었고 지금껏 손에 없는 vorhandensein는, 각각의 순열을 통과한 뒤 현존재에 인접한 zuhandensein으로 바뀐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이데거는 또한,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이 그 인접성을 강화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점이다. 가령 그는, 라디오를 [원격성의 소거]의 예로서 들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검토해온 듯이, 우리의 퍼스펙티브에 있어서는, 현존재가 면하는 내세계적 존재자의 총체, 하이데거의 술어로 [현da]라 불리우는 [세계] 자체는, 복수의 회로와 리듬을 통과한 하이브리드한 정보의 다발로 구성되어 있다고 파악된다. 현존재에 인접하는 zuhandensein는, 각각에 해당하는 차이나는 순열을 통과하여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먼 곳(fort)과 가까운 곳(da), 저기도 여기, 즉 vorhandensein과 zuhandensein와의 [사이]에 퍼져 있는 우편공간을 고려해야할 것이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은 확실히 원격성을 제거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제거하는 리듬, 즉 먼 곳의 vorhandensein가 (라디오 등을 통해) 현존재의 가까운 곳까지 엄습해오는 속도인 것이고, 또한 거기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차이나는 속도 간의 충돌, 비틀림인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하이데거는 일단 하나의 목소리-의식과 하나의 세계=da를 상정하고, 그 위에서, 그것들이 서로 지탱해 마주하는 순환구조로부터 괴델적 결정불가능성을 이끌어내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으로는, vorhandensein의 총체를 한 번에 파악하는 것은 이미 전도되어 있다. 그 상정은, vorhandensein이 zuhandensein로 바뀌기 위해 필요한 우편공간을 말소해버리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zu가 항상 vor로 전도할 수 있는, 망령화의 효과가 무시되고 있다. 하이데거의 부름(ruf)은, 현존재에 뚫린(열린, 텅 빈) 구멍으로부터 도래했다. 반면 데리다의 호출(appe)은, 우편공간으로 포화된 리듬의 차이로부터 태어난다.
우리들의 이 해석은 이미 데리다의 명시적 주장을 일탈하여, <쾌락원리의 피안>에 있어서의 프로이트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사변]에 돌입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가령 그는 92년에 행해진 중요강연에서, '만약, dasein, zuhandensein, vorhandensein이라는 세 개 타입의 존재자 사이의 경계가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적 언설은 모두 다, 그 근본에 관련된 무언가를 잃을 위험이 있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죽음에 관련한 하이데거적 언설을 탈구축하여, 행방불명=죽음(dead)에 대한 언설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그 존재자들의 사이의 차이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데리다는 <엽서> 제2부에서, [현존재dasein]의 da를, 프로이트적인 [fort:da]로, 즉 da 내부를 관통하는 원근 사이의 [리듬]이라는 관점으로 재해석할 것을 시사한다. 이것을 우리 나름대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zuhandensein과 vorhandensein 사이에는 우편공간이 있고, 리듬으로 포화되어 있다. Da는 그 말소 (zu로부터 vor를 향한 투명한 확장) 에 의해 단일한 [세계]가 된다. 따라서 우편공간의 효과를 고려하는 데리다는, 그것들 존재자 3종의 구별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zuhandensein과, 그 안을 무수히 달리는 리듬 간의 차이 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순환구조는 리듬의 말소의 산물이다. '데리다 : 비-리듬적인 구획절단 속에 리듬의 숨결을 재인식하는 것.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다음으로 앞서 언급한 첫 번째 비틀림에 관해서 생각하자. 베니스톤이 주의를 촉구했듯이, 데리다는 [생]에 다시금 침입하는 죽음(불가능한 것)의 계기를 때때로 기계의 은유로 지시하고 있다. 60년대의 그에 의하면 '기계란 죽음이다'. 그리고 그 '작동은, 그것이 자신 속에 순수한 상실을 기입한다는 점에 있어서, 사고불가능한 것이다'. 전화의 은유도 또한 그 한 예이고, 그런 한에서 전기의 은유대립에 속해 있다. 사실 <율리시스 그라모폰>에서 데리다는, '전화적인 테크네는 목소리의 내부에서 기능하고', '목소리 내부에 멂, 거리, 차연, 공간화를 새겨 넣는 심적인 전화성(telephonie)은, 또한 동시에, 자기자신에게 말하는 독화(獨話)를 설립하고, 금지하며, 혼란시킨다'고 말한다. 여기서 전화란 에크리튀르의 별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용한 편지에 있어서의 [분할된 근접성]라는 표현은, 기계의 은유를 거기로부터 일탈시킨다.
데리다의 술어계에 있어서는, [근접성] [가까운]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커다란 이론적 역할을 짊어지고 있다. 본상1-a절에서 확인했 듯, <목소리와 현상>의 비판은 목소리가 보증하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구조를 향해 있었으나, 자신의 목소리를 금방 막 자신의 귀로 파악하는 그 구조는 또한, 절대적인 [자기에의 가까움]을 보증한다고 술하고 있다. 한 편 논문 <인간의 목적=종말>에 있어서는 같은 [가까움]으로부터 하이데거적 da의 기능을 파악하고 있다. '근접성의 가치, 즉 현전성 일반의 가치가, 이 dasein 분석의 본질적 방향을 결정한다'. 여기서, 목소리와 da, 즉 초월론적 통각과 현존재와가 같은 관점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은, 훗설과 하이데거의 이론적 연속성을 의미하고 있다. 양자는 동일하게 정보의 내력(tele)를 말소하고, 세계를 '근접성' 하에서 전체화=단일화한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제출한 '분할된 근접성'은 역으로, 하나의 의식과 하나의 세계의 거울상적 지평 자체가 탈구되어, 복수화하는 양태를 지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무슨 말일까?
<존재와 시간>에서는, 우편공간으로부터 뻗어나간 정보의 순열은 [손]에 집중하게 되어 있었다. 즉 하이데거는 [지금 여기]를 결정하는 근접성의 장소를 [손] 에 국재화(국한)시키는 것으로, vor의 집적을 'da=전체'로 봉합할 것을 가능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그 근접성의 장소는, 훗설이라면 ‘귀’에 국재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송부>의 편지들은, 그 국재화 작용 자체의 실효(효과 잃음)를 그리고 있다. 눈에 접속되는 순열 (취객의 모습) , 귀에 접속되는 순열 (전화를 통해서의 [너]의 목소리) 은 각각 다른 리듬을 새기고, 때문에 근접성의 장소는 눈으로도 귀로도 정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그 리듬들은 충돌하는가?
기계의 은유는, 그 리듬 충돌의 장소를 생각하려면 극히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기계가 [생] 안쪽에 침입시키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fort:da의 리듬, 반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처음에 전화가 있었다'라고 데리다는 말했다. 전화에는 반드시 전화선이 붙어 있다. 그리고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전화 외에도 갖가지 정보기계에 항상 접속되어 있다. 그 정보기계들을 매개로 해서, 갖가지 순열에 깃드는 리듬이 목소리-의식 속에로 불가피하게 침입한다. 전기의 <고막>을 참조하자. 거기서 데리다는 [근접성, 절대적 고유성의 효과]를 생산하는 기관으로서의 귀, 즉 훗설적인 목소리 장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다음으로 그 속에 퍼지는 '내이'를 말한다. '<내이의 현상>으로서의 음성 환상, <목소리와 현상>은 새김글(銘文)에서부터 거짓의 끝에 가까워지기까지, 그 현상에서야말로 에크리튀르의 문제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항상 <내이성 어지러움>을 진부하고 대단치 않은 병 이름으로서, 즉 어떤 특수한 기관의 국소적 문제로서 생각하여, 자신을 안심시키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여기서 [내이] labyrinthe는 또한 [미궁] 즉 우편공간 역시 의미한다. 목소리-의식의 중심화 장치 (귀) 가 기동하기 이전에, ‘그거보다도 내부에’ 항상 이미 우편공간(내이)는 침입하고 있다. 복수의 순열과 리듬은 거기서 충돌한다. 그리고 그 결과 [내이성=미궁적인 어지러움]이 생긴다. <목소리현상>에서 [에크리튀르]로서 도입하였던 것은 실은 [미궁의 현상]이었다, 라고 이 텍스트는 명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거꾸로, 에크리튀르 관념을, 목소리-의식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으로서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바깥에 포화된 갖가지 리듬을 서로의 차이를 유지하면서 목소리-의식의 속으로 도입시키는, 어떤 종류의 [문]gate의 은유로서 생각할 수 있다. 정보의 순열이 목소리-의식 안과 바깥을 관통한다는 이 조건에 있어서는, 양자의 경계는 더 이상 효력을 잃는다.
이미 술했듯 80년대 중반 이후, 데리다는 많은 텍스트에서 [불가능한 것의 경험]을 언급하고, 가끔은 그것을 [탈구축]의 정의로서 채용하고 있다. 앞장에서 우리는 이 신비성(부정신학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상의 정리에 의해 우리는 여기서, 비세계적 존재에 대해서의 그 [경험]의 함의를 더 [비]신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일화된 목소리-의식의 평면(세계=da)의 하에서는, 각각의 차이나는 리듬을 새기는 모든 기계의 평형상태가 있다. 대면 커뮤니케이션에서 공유된 현전성은, 눈이나 귀, 손, 입의 사이의 리듬의 차이를, 거기서는 모든 기관이 모두 동시에 상대의 앞에 있다고하는 경험적인 사실성에 의해 억지로 말소하고, 처음으로 성립하는 것이지밖에 않다. 인용한 서간에서 데리다는, 전화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가깝]게, 또한 [어떤 종의 순수성을 가진]다고 기록된다. 필터=네트워크에의 접속은 하나의 목소리에 의한 전제적 지배를 부분적으로 해제하고, 각각의 기계의 리듬(과 그것들의 사이의 평형과 공명)을 [귀]보다도 가까운 지점, 내이에서 울리게 한다. 그로부터 생하는 [내이성 어지러움], <맑스 망령>에서 [탈구(disjointment)] 라고 불리었던 리듬의 충돌이야말로, [불가능한 것의 경험]인 것이다. 즉 탈구축은 무엇보다도, 내(이)적인 우편공간의 지배의 [실패]로부터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탈구축이 호출(appel)에의 응답이라는 명제의 하나의 의미이다.
우리는 더구나 이 사변을, 프로이트의 인식에 접속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가령 주지하듯 그는 <정신분석입문>에서, [각각의 기관쾌감을 구하는 제 부분욕동에 의한 자율적인 활동]으로부터 구성되는 [무정부상태(anarchie)]을 언급한다. 단일의 [주체]는, 그것들 무수의 기관쾌감을 성기(팔루스)의 우위 하에서 종속시키는 것으로 처음으로 구성된다. 지금 여기서 상기의 정리를 형용하여, 리듬을 욕동으로서 환언해 읽어, 각각의 정보기계가 고유의 부분욕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
덧붙여 프로이트는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에서 송부의 데리다를 생각케하는 흥미 깊은 분석을 기록하고도 있다. 그는 어떤 때, 특정의 벗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마침 그때, 그 벗으로부터 말걸렸다고 하는, [기분 나쁜] 경험을 했다. 그리고 프로이트에 의하면, 그 기분 나쁨의 감정의 기원은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일단 벗이 멀리 떨어져있는 시점에서, 그의 눈은 이미 벗의 모습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각은 감정적인 동기(상대는 불유쾌한 벗이었다)에 의해 억압되어, 의식에 올라오지 않는다(그는 그것을 [부정적 환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억압의 다른 족에서, 같은 정보를 받아들인 무의식은 독자적으로 연상을 펼쳐, 벗을 마음에 떠오르게 한다. 즉 하나의 정보가 분할되어, 각기 다른 회로에서 처리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프로이트 자신과 벗과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결과적으로 그는 의식적으로는, 마침 벗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을 때, 그 당사자로부터 말걸리게 된다. 여기서는, [기분 나쁨]의 경험, 즉 비세계적 존재에 대해서의 경험이, 정보를 처리하는 복수의 회로(눈-의식과 눈-무의식, 또한 귀-의식)의 평형, 혹은 [속도의 차이]의 효과로서 멋지게 설명되어 있다. 이상의 프로이트의 분석은 그 채로, <맑스망령>에서 데리다가 [모자 차양 효과]ㅡ상대편으로부터는 보이지만 여기로부터는 보이지 않는ㅡ라고 부르고 있던 망령 특유의 성질, 즉 목소리-의식에 [일방적으로] 침입하는 유령의 능동성에 대해서의 뛰어난 해설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귀결은 크다. 아마도 우리는 여기부터 프로이트와 데리다를 연결시키는 선을 연장시키는 위에서 더 넓은 정신분석적 사변을 전개해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감이지만 데리다론으로서 시작된 이 책의 목적을 넘어서 있다. 다만 우리는 다음 장에서 데리다와 프로이트의 관계를 별다른 방법으로 검토할 것이다. 또한 이 장의 최후에는, 동형의 문제를 [안티오이디푸스] 직전의 들뢰즈에 서 보는 간단한 이론적 라인을 부록으로서 첨해둔다.
조금만 더 기계의 은유에 대해 생각하자. 78년의 어떤 인터뷰에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데리다 : 나는 언제나, 자신이 어떤 매우 떨어진 장소로부터 쓰고 있다고, 그런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그 장소는, 즉 내가 말하는 것이나 내가 쓰는 것이 거기로부터 나에게 구술되는 그 장소는, 나로부터도 역시 무한히 멀리 떨어진 장소인 듯 합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무의식]이 –나는 편의상 그것을 그렇게 부릅니다만 – 어떤 모든 다른 시간에 연결되어 있고, 나는 매우 많은 중계를 거쳐서 어떤 에크리튀르의 첨단이라고 할까 어떤 타이프라이터의 첨단에 도달한다, 라는 그런 이미지를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나는 대부분 타이프라이터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만…. 지금 나의 염두에 떠오르고 있는 것은, 어떤 종의 기록기계입니다. 한 개의 바늘 끝이든, 만년필이든, 펜이든가가, 꽤나 먼 곳으로부터 거기에 엄습해왔던 다양한 명령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람의 손 없이 쓴다는 그런 종류의 기계인 것입니다…. *
여기서 데리다는, 우편공간이 [기계]를 통과하여 목소리-의식에로 침입하는 꼴을, 개인적 경험으로서 꽤나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의 손, 만년필, 타이프라이터는 [매우 먼 곳]으로부터 갖가지 [명령]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람 손 없이] 기록해나가는 [기록기계]로서 기능한다. 이 기술은 지금까지의 우리의 독해를 보강하고 있고, 더구나 [무의식]이라는 표현도, 기계의 은유와 프로이트의 문제계의 관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더구나 두 개의 점을 보완해서, 데리다에 관한 이 일련의 사변을 닫기로 하자. 두 개의 tomber을 둘러싸고.
첫번째, 여기서 [명령]이라 불리고 있는 것, 즉 호출(appel)은, 구체적인 메시지의 전달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명, 사건, 컨텍스트>에서 이론적으로 주장되어, 또한 우리가 읽어왔던 서간에서도 [필터]라는 말로 나타내어져있었듯이, 오배달가능성에 포화된 우편공간은, 메시지의 순수한 통과를 정의상 방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 공간을 횡단하고, 목소리-의식의 속으로 침입할 수 있는 것은, 울림=우표, 환언하면 리듬 뿐인 것이다. 네트워크에 접속된 정보기계는, 각각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리듬에로 필연적으로 공명한다, 혹은 공명시켜진다. 가령 우리가 전화에 귀를 기울인 수난, 귀의 근접성은 [지금 여기]로부터 탈구되어 전화망의 리듬에 공명해 버린다. 인용개소의 [명령]이란, 이 공명, 즉 [튜닝]의 과정을 지시한다.
데리다는 [쓰는 것]에 관해 말했다. 현실적으로 텍스트를 쓰고, 메시지를 선택하는 것은 데리다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는 그에 있어서 항상 [멀리 떨어진 것]것으로서 느껴진다. 어째서일까. [쓴다]는 것이 목소리-의식으로부터 손에로의, 더구나 거기로부터 기계의 네트워크에(타입라이터로부터 도서관에)로의 접속인 이상, 거기서는 가령 튜닝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무언가(누군가)에 대해, 혹은 무언가(누군가)를 향해 쓸 때, 데리다는 항상 자신의 내부의 상대의, 즉 자신으로부터 [떨어진] 리듬을 도입해버리고 만다. 그 상대는 송부의 서간군에서는 하이데거, 프로이트, 플라톤=소크라테스, 그리고 [너]이다. 거기서는 메시지는 데리다의 것이면서도, 이제 더는 그 에크리튀르의 스타일, 목소리의 울림은 그 고유의 것이 아니다. 데리다는 84년의 어떤 텍스트에서, 정확히 송부 서간군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술했다 :[사실은, 나는 언제나 self-centered한 텍스트를 쓸 것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거기에 닿지 않(못)한다, 나는 언제나 타자 위에서 넘어지는 것이다(tomber)]. 넘어짐은 내이로부터 용의된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주체에 타자의 리듬을 침입시키는 이 튜닝효과에 대해 프로이트의 전이로부터 재검토하게 될 것이다.
둘째, 데리다는 이 인터뷰에서 [기록기계]에 닿고 있다. 그러나 전술했듯 우리의 생각으로는 기억=기록을 가능히 하는 데드 스톡의 효과는, 우편공간에 있어서 속도와 회로의 차이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거기서는 등기(enregistrement)란, 어떤 특정 장소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보를 우편공간의 어떤 종의 회로에 발송하고, 그 재래를 기다림을 감수하는 타임랙의 문제로서 재정식화된다. 즉 [기억하는 것]과 [송부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같다. 이 등치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단 그것은 정신분석과 데리다를 잇는 계승선에 관련되고, <엽서>의 퍼스펙티브로부터 프로이트의 재독해를 예고한다. 방향만 간단히 알려두자. 프로이트는 1900년에 꿈 판단을 출판하고 언설분석을 중심으로하는 방법을 확립했다. 그런데 그 이전의 그는 [마음]의 메커니즘을 해명하기 위해, 더 생리학적으로 기계론적인 모델을 채용하고 있었던 것이 알려져있다. 그리고 그 시기의 몇 개의 착상은 뒤의 정신분석에도 암묵의 형태로 계승되어진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이, 1895년의 <과학적 심리학 초고>에서 제출된 [두 개의 뉴런의 구별], 정보(자극)을 통과시켜도 전혀 상태가 변화하지 않는 [(공집합) 뉴런]과, 정보를 통과시키면 상태가 변하는 [(창살) 뉴런]의 구별이다. 실제 그 구별은, 의식(정보처리)와 기억(정보축적)의 상호배타성의 태제로서 꿈 판단 이후도 완전히 유지되어([의식은 기억흔적을 대체하여 발생한다]), 프로이트의 [마음]에 대한 생각을 말기까지 계속 규정해간다. 정보를 통과시키는 네크워크와 정보를 기록하는 장소의 그 구별은, 우리의 말로 번역한다면 [우편]과 [기억]의 구별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약 그 이분법이 유지되지 않는다, 혹은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그가 제안한 마음의 모델화(제1국소론이나 제2국소론) 은 어떻게 변형될 것인가? 여기에 관해서의 상세한 검토도 역시 이책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
만약 우편과 기억과 사이에 엄밀한 이론적 차이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데리다의 [기록기계]를 [배달기계]라고 다시 부를 수 있다. 그 기계는 멀리서부터의 정보를 받아들여, 또한 역시 다른 울림=우표를 더하여, 다른 회로에로 재발송하는 것을 말한다. 제1장에서 참조한 <엽서>의 말, [위대한 철학자, 그것은 언제나 조금은 큰 우편국인 것이다]를 여기서 떠올려 줬으면 한다. 우편국은 스탬프를 누르고, 그것은 우표를 다시 붙이는 것과 같다. 철학자는 배달기계이다. 데리다 자신이 [송부]의 최초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듯 [나는 고대의 사자, 메신저 보이에 닮아있다…. 나는 어떤 공지를 그들로에게 전하기 위해 달린다, 그것은 비밀인 채로이지 않으면 안 되는 공지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넘어진다(tomber)]. 우편배달인이 넘어진다면 말할것도 없이, 행방불명의 우편물이 발생한다.
*
우리는 80년대 출판한 <엽서>를 가장 중시하고 있다. 어째서인가. 이유는 세개 있다. (1) 이 저작의 테마에서 어떤 우편계의 은유가, 데리다의 작업 속에서 가지는 특권적 중요성. (2) 그것이 쓰인 스타일. 날짜가 붙여진 반쯤 허구적인 단장으로부터 되는 제1부, 세미나용 원고의 초벌인 제2부(프로이트론), 논문형식의 제3부(라캉론), 강연과 인터뷰가 석인 제3부라는 구성인 이 책은, 데리다가 좋아하는 논술스타일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반허구, 구두발표, 논문, 대화). 그리고 (3) 프로이트와 하이데거의 관계에 대해 빈번한 언급. 데리다 자신 이 작업이 [모두]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대화시키려는 시도]라고 얘기한 것에서도 선명하듯, 이 두 사상가는 그에 있어 특권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엽서>는 역시, [그들을 대화시키려는] 책이다. 가령 송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힌다. [프로이트와 하이데거, 나는 그들을, <위대한 시대>의 두 사람의 위대한 환영으로서 자신의 가운데 결합시키고 있다. 그들은 서로 읽지 않고 서로 응답하지 않고, 서로 결합되어 있다. 이 상황에 대해 나는 가끔씩 너에게 얘기했고, 또한 나는 <유증>에서, 정확히 그 메시지를 그려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유증>이라고 불렸던 준비중이었던 저작이, 뒤에 <엽서> 자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엽서가, 정신분석의 사고와 우편의 사고와를 극히 빈번히 보치시키는 점이다. 가령 제1부와 제2부에서 데리다는, 쾌감원칙와 우편원칙의 두 말을 일부러 같은 'PP'로 약어시키고 있고, 그 혼동으로부터 적지않은 이론적 착상을 얻고 있다. 또한 더 직접적으로는 포스트 정신분석의 시대는 포스트 우편의 시대라고도 적고 있다. 이는 의미가 깊다. 우리는 지금껏 형이상학, 부정신학 시스템을 동시에 저항하는 이론적 가능성을, 그 [우편]의 사고, 즉 [우편계 제 은유에 의하여 가능히 된 사고] 가운데서 구하여 왔다. 우편은 부정신학에 저항한다. 그리고 정신분석은 우편에 동등하다. 라고 한다면 결국, 60년대의 [인간의 목적=종말]에서 이미 시사하고 있던 [또 하나의] 탈구축, 하이데거적 [파괴] [해체]의 내폐성으로부터 일탈하는 탈구축의 [더 하나의 전략]의 이론적 지주는, 프로이트 혹은 정신분석에서 구해질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점을 거의 긍정적으로 대답하고 싶다. 데리다 본인의 적잖은 말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다. 가령 그는 <알시브의 악>에서 [잠재적인 것에 관한 사고]즉 우편공간에 대한 사고는 [“무의식의 이론”과 교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술하고 있었고, 또한 91년의 정신분석 주제로하는 텍스트에서는 [탈구축 그것은 또한 분석의 끝 없는 드라마이기도 하다]라고도 선언하였다. 라고 한다면 이책가 문제로하고 있는 탈구축의 이중화란 결국, 데리다에 있어서 하이데거와 프로이트의 충돌, 혹은 만남의 문제로서 재정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검토는, 또한 우리에게 방법론상의 태도변경을 요구하는 것이다. 데리다 자신이 기말한 텍스트는 어느 것도 너무 신중하고, 거기에 직접 기초하여 [탈구축]을 하이데거와 프로이트에로 계보적으로 분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혹은 [불성실]이라고 여겨지니까…. 그의 텍스트를 상세히 읽으면 읽을수록, 사태는 더욱 뒤엉킨다. 가령 지금 든 한 글, 탈구축과 정신분석(끝없는 분석)의 친근성을 단적으로 인정한 듯 보이는 오른쪽의 인용에서 조차, 실제로는 [분석]이라는 말 자체의 이중화라는 보류 하에서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논술은 거기로부터, [분석] [비판] [탈구축] 그 외 개념들의 계보학적인 검토에로 나아가 버린다. 우리는 그 작업서부터, 잔넨이지만 데리다적 탈구축에 대한 어떤 새로운 인식을 얻을 수 없다. 더 정확히는, 우리가 그런 작업에 침체하는 것 자체가 전도하고 있다. 이책의 시도는 애초에, 데리다의 기묘한 텍스트 실천을 강제한 무언가를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원인을 텍스트 내부로부터, 데리다가 명시적으로 얘기한 것 범위안에서 끌어내기엔 무리가 있다. 우리는 이 장에서 지금까지 2장의 말미에서 제시된 과제에 대답해야 하고, [후기 데리다의 은유적 지도]의 제1부(우편=유령계)를 가능한 한 정밀히 그려내는 것을 시도해왔다. 까닭에 우리가 이 장의 정리에 의해, 독자가 데리다의 텍스트를 더 정밀히, 및 더 간단히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한 편, 그 지도 제작을 이 이상 정밀히한다손 치더라도, 더는 이책의 과제에 접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말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탈구축] 자체의 기초적인 위치잡기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데리다적 탈구축, 더 하나의 탈구축, 정신분석적 탈구축, <엽서>에서 집요한 등치를 참조하여 금후는 그것을 [우편적 탈구축]이라 부르기로 하고, 그것은 결국 프로이트의 무언가를 계승하고, 또한 하이데거의 무언가에 저항하려 했는지 알아보자. 제4장은 이 물음을 전개시킨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데리다를 통해서, 또한 데리다를 역으로 비추고 쏘는 한에서, 하이데거와 프로이트 자체의 텍스트를 역시 재독할 필요가 생긴다. 문제는 이제는, 데리다의 내재적 정리를 넘어서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