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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LYTIC PHILOSOPHY >> 심리철학 참고자료 >> 기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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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능주의와 물리주의에 대한 비판
3. 반기능주의자인 블록에 대하여
4. 퍼트넘에 대하여
5. 루이스에 대하여
(이하 내용 시작)
1/ 기능주의와 물리주의에 대한 비판
1. 감각질의 존재 (데이비드 차머스 1966~, 그외 다수)
마음에는 두 측면이 있고 하나는 기능적이나 다른 하나는 기능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기능주의에서는 마음의 모든 것을 논할 수 없고 기능주의는 마음 이론으로서 불충분하다.
차머스 '의식하는 마음' : '두 개의 선명히 구별되는 심적 개념이 있다. 1은 현상적인 심적 개념. 이것은 의식 체험으로서의 마음이나 마음의 상태에 관한 개념이다. 2는 심리학적인 심적 개념. 이것은 행동에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기반으로서의 심적 개념이다.' '의식이 설명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나오는 가장 난문은 우리가 자신의 의식체험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의식체험이 있다고 판단할 뿐만은 아니다. 분명하게 의식체험이 있다고 알고 있다.'
썰 '마인드' : '의식 체험의 질적인 측면이 있다. 맥주를 마실 때의 질적인 감각이 있다. 이것은 베토벤을 들일 때의 질적인 감각과는 다른 것이다. 의식에 갖추어진 이 질적인 측면은 '감각질'로 명명한다. 반기능주의 입장으로부터 하자면, 기능주의는 감각질을 무시하고 있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기능주의는 우리의 의식체험에 질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감각질은 기능주의의 설명으로부터 빠진다. 그러나 감각질은 현실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능주의의 이론은 거짓이다.'
기능주의가 문제로 하는 마음의 측면은 기능적 측면일 뿐이다. 그러나 기능적이지 않은 의식체험으로서의 마음의 측면이 실제로 있다. 그 의식체험의 현상적인 질을 감각질이라 부른다. 모든 '느낌'에 관한 기능까지 포함한 관련기능을 탐구하고 전부 작성완료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작성이 불가능한, 기능적이지 않은 '마음' 자체가 남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진짜로 열심히 인과적 기능적으로 파악했다 하더라도, 열심히 언어를 연마했다 하더라도, 파악과 작성이 불가능한 '느낌의 질' 자체가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갖가지 기능주의 비판은, 어느것도 기본적으로는 이 감각질이 있다는 것에 관한 의문의 변용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역전 스펙트럼 (차머스 외 다수)
나와 당신은 같이 색을 식별한다. 갖가지 색의 판이 있는 가운데 빨강을 가리키라고 지시되면 우리는 둘 다 같은 판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같은 판을 가리키고 있는 나와 당신은, 전혀 다른 내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다. 즉, 당신에게 '녹색이 보인다'라는 체험이 나에게의 '빨강이 보인다'라는 체험일 수 있다. 당신과 나는 색을 체험할 때 감각질이 반전되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실제로 테스트해서 검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나와 당신의 내적 체험으로서는 다르다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빨간 것'으로 보면 나도 당신도 '빨갛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외적 기능에 의한 변별 밖에는 없다. 그러나, 테스트 검출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내적으로 감각질이 반전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은 '상상 가능' 하며,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차머스는 말한다.
3. 철학 좀비 (차머스 외 다수)
차머스 '의식하는 마음' : '내 쌍둥이 동생의 좀비를 생각한다. 이 생물은 가장 작은 입자 하나까지 나와 동일하며, 물리적 사실에 관해서 동일하면서 그에게는 의식체험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지금,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무들의 멋진 초록색 감각을 체험하고, 초코바를 깨물며 맛있는 체험을 하고, 왼쪽 어깨의 아픔을 느끼고 있다. 그때, 좀비의 쌍둥이에게는 무엇이 일어나는가. 그는 물리적으로 나와 동일하므로 같이 동일한 환경에 설치(?) 되어 있다. 그는 틀림없이 기능적으로는 나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정보를 처리하고, input에 같은 output을 하고, 내부구성은 그에 따라 변경되고, 결과로서, 동생은 나와 구별되지 않는 행동을 할 것이다. 그는 기능적인 의미에서 밖의 나무들을 지각하고, 심리학적인 의미에서 초콜렛을 맛본다. 그가 나와 물리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로부터, 기능적인 의미에서 그에게 '의식이 있다'고 할 수조차 있다. 그는 눈을 뜨고, 자신의 내적 상태가 어떤가를 보고하고, 그런 이런저런 일들이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의 어떤 것을 보아도 진짜 의식체험은 하나도 수반하지 않을 것이며, 정확히 거기가 포인트이다.' (# 상상 자체가 불가능)
4. 현상판단의 패러덕스 (차머스)
직접적으로 기능주의를 부정하진 않지만, 감각질 고찰에 관한 곤란한 예로서 이것을 들 수 있다.
현상판단이라는 건, 자신이 자신의 현상적인 체험에 대해 약간의 판단을 하는 것. 가령 '따뜻한 느낌이 난다' '아픈 체험은 실제로 있다' '나의 체험은 미묘해서 말하기 어렵다' 등처럼 현상체험에 관한 판단의 총칭이다. 이 현상판단에 패러덕스가 있다.
(1) 물리영역은 인과 관계에 관해 닫혀 있다.
(2) 의식에 관한 판단은 물리적인 것에 논리적으로 부수한다.
(3) 의식은 물리적인 것에 논리적으로 부수하지 않는다.
(4) 우리는 우리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1) 기능면에서 벗어난 마음의 측면 가령 현상적 의식, 감각질은 기능적 인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물리영역과 인과적으로 얽힐 수 없다. 마시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 결과', 마셨다고 한다면 그때 물리적 인과성은 마음의 물리적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시고 싶다'라는 뇌 상태의 물리적 사건이 물리적 원인이 되어서, 물리적으로 '마신다' 라는 물리적 변화로 나타난다. 그때 동시에 물리적 측면 이외의 현상적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나, 현상적 측면은 물리적 측면의 설명에 포함시키지 않고, 물리적 측면은 물리적 측면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양자가 서로 얽혀 들어가는 일 없이 '인과관계에 관해 닫혀' 있다.
(2) 의식에 관한 판단은 물리적인 것에 논리적으로 수반한다. 자신의 의식에 관한 판단을 하여 보자. '태양이 붉다' 이것은 태양에 관한 판단으로 의식에 관한 판단은 아니다. '태양이 붉게 보인다'나 '붉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다'라는 판단. 이것이라면 의식에 관한 판단이다. 이 판단들은 위에서 말한 좀비라도 말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나와 동일한 좀비가 있다면 원리적으로 그 좀비는 나와 마찬가지로 '붉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다'라고 말하여 느낌에 관한 판단을 행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판단은 '물리적인 것에 논리적으로 수반한다.' (#)
(3) 의식은 물리적인 것에 논리적으로 수반하지 않는다. 좀비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판단할 수 있을 뿐 실은 감각질이 없다는 점이 '상상 가능' 하며 '논리적으로 가능' 하다. 그렇다면 좀비인지 아닌지 의미에서의 본래적인 의식이 있는가의 문제는 기능면의 문제나 물리면의 문제는 아니다. 현상적이고 비물리적인 측면의 문제인 것이다. (#)
(4) 우리는 우리의 의식이 있음을 안다. 여기서 그 4개의 명제가 서로 반발하며 패러덕스를 낳는다.
5. 마리의 방 (잭슨)
6. 박쥐임이라는 건 어떤 것인가 (네이글)
객관적인 설명은 의식의 주관적 특징을 설명해낼 수 없다. 객관적인 물리적 설명만으로는 설명을 다 할수 없는 '주관성'이라는 사안이 존재한다.
7. 중국어 방 (썰)
컴퓨터는 기능으로서는 적절한 답을 낼 수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지향성의 없음이 이해의 없음으로 연결된다. ㅡ그런데, 컴퓨터는 지향성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가? 컴퓨터가 지향성을 가진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인가?
8. 중국인민 (블록)
만약 중국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뉴런을 하나씩 시뮬레이트시키고, 그들에게 무선에 의한 링크를 장비화시켜 시냅스 결합을 재현시키면, 그것으로 뇌의 기능구성이 완성된다. 그런데 틀림없이 이 기괴한 시스템에 의식은 없을 것이다.
뇌 기능이 활동하는 것 뿐으로는 의식은 설명할 수 없다고 블록은 주장한다.
3/ 반기능주의자인 블록에 대하여
1] 기능주의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가 ㅡ 감각질 결여
유형 물리주의에 의하면, 심적 상태는 물리적 상태와 유형 동일시된다. 가령 고통은 그 기반이 되는 뇌 상태의 유형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고통을 가진 온갖 생물의 고통을 실현하는 공통의 뇌상태가 단 하나만 있다는 것은 꽤 강한 주장인데다, 우리와 전혀 다른 물리적 구성의 존재자의 고통(화성인이나 로봇의 고통)이 가능하다면, 유형 물리주의는 단적으로 부정된다. 이처럼, 어떤 심적 상태의 유형이 다양한 물리적 구성에서 실현가능하다고 한다면, 물리적 구성을 사상하여 정의된 기능적 상태를 심적상태와 유형동일시해야 한다.
한편 행동주의에 의하면, 심적성질은 행동경향과 동일시된다. 고통이란 고통을 가질 때 하는 행동의 경향 다발에 지나지 않는다. 행동주의는 어떤 행동의 원인이 되는 심적 상태의 존재를 부정한다. 마음은 행동경향 그 자체이다. 행동주의의 이러한 반실재론적 태도에 대해 기능주의는 심적상태에 대해 실재론적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이 둘을 기능주의가 극복한다. 블록은 이러한 입장에 전면적으로 반기를 든다. 그 반론이 체계적으로 전개된 것이 1978년의 'Troubles with Functionalism'이다. 여기서 중국국가 논증( → )이 행해진다. 그는 기능주의가 마음을 기능에 귀속시키는 liberal성에서 행동주의보다 더 낫지 못하고, 신경 유형이라는 물리적 성질로 기능적 성질을 개별화하고, 그것을 감각질과 동일시하는 배제주의적인 면에서 유형 물리주의보다 더 낫지 못하다고 반론한다.
이러한 블록의 중국국가 논증에 대한 반론. 이 논증에는 '직관 펌프'가 사용된다(Dennett 1991). 우리는 중국국가 전체가 인간과 같은 기능적 상태를 실현한다고 들었을 때,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의 중국국가밖에 상상하지 않기에, 의식귀속의 소박 심리학을 철저히 적용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타자에게 소박심리학을 적용시키듯이 (지금은 별로 익숙해져 있지 않지만) 국가에 소박심리학을 적용시키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우리가 동화에서 짚으로 된 인형들이 의식을 가지고 감정이 가득 들어간 행동을 하듯 생각하듯이 말이다. 따라서 이 사고실험은 기능주의를 부정하여 유형물리주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유형물리주의-블록-에서 감각질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 것인가?)
2] 의식의 개념을 열거한다 ㅡ 현상적 의식과 액서스 의식
Phenomenal 의식(이하 P의식)은 감각질을 의도한 비기능적 개념이다. 블록은 이것에 대비되는, 의식을 둘러싼 기능적 특성을 Access 의식 아래 묶는다(이하 A의식). 사고와 행위의 직접적 제어로서 준비되어 있을 때, 추론에 있어서의 임의적 사용과 행위와 발화의 '직접적' 제어를 위해 준비될 때, A 의식에 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이룰 것인가 → 행위 제어'라는 관점에서 정의돼 있으므로 기능적 개념이다.
블록은 'P없는 A의식'과 'A없는 P의식'을 찾으며 P의식과 A의식의 분리를 꾀하려 한다. 현실 상의 맹시는 일차 시각피질의 손상부위에 대응하는 시야 부위가 안보일 뿐으로 거기에 대한 찬스레벨 이상의 추측을 할 수 있다. 상상 상의 수퍼 맹시는 훈련을 거쳐 자발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수평선이 안보이는 시야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실제로는 안 보이지만 말이지요”. 이것은 'P없는 A의식'의 예이다.
다음으로 'A없는 P의식'은 두 개의 일상적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논증된다. 첫번째 경우, 회화 심취(I) → 창밖 공사드릴 봄(II) → 노이즈 눈치채는 상황(III)이다. 두번째 경우, 회화 심취(I) + 창밖 공사드릴 봄(II) + 당신이 노이즈를 계속 듣고 있었음을 눈치채는 상황(III)이다. 첫번째 경우의 (II) 시점에서는 노이즈에 P의식이면서 A의식은 아니었다. 그런데 (III) 시점에 와서 P의식이면서 A의식이기도 하게 되었다. 두번째 경우, (III) 시점에서는 P의식이면서 A의식이면서 A의식 너머의 고층사고이기도 하게 된다. 블록의 의도는 A의식에는 자기의식도 고층사고도 없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블록은 이 개념적이고 경험적인 P/A의식의 구별을 기초로, 의식에 관한 과학자들의 주장이나 철학자들의 논의가 P의식에 대하여 이론화해야 할 것을 A의식이나 자기의식에 대하여 이론화하는 혼동을 범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블록에 의하면 그들은 의식의 기능에 대해 추측하지만, 그것은 겨우 A의식이나 자기의식을 정의할 뿐, 근거없이 P의식에 그 기능을 귀속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또한 때로 그들은 P의식을 설명하려고 이론을 세우지만, 실제로는 A의식이나 자기의식을 특징잡고 있을 뿐이다. 이런 혼동이 생기는 이유는, 통상의 상황에서는 P의식과 A의식이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현실에 수퍼맹시환자가 없는 것처럼). 그러나, 한 번 그것들을 개념적으로 구별한다면 그것들의 경험적 일치를 전제로 한 이론화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블록은 논한다.
그는 P의식적 성질은, 인지적 성질(본질적으로 사고를 동반하는 성질), 지향적 성질(그 덕분에 표상/상태가 어떤 것에 대한 것이 되는 성질), 기능적 성질(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정의 가능한 성질)과도 다르다고 주장한다.
3] 두개의 의식의 신경기반
'Paradox and Cross-Purposes in Recent Work on Consciousness'에서 블록은, 의식의 인지과학적 연구에 있어서 복수의 의식 개념이 혼동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현상성, 액서스가능성, 반성성의 세 의식이다.
액서스가능성accessability는 대역적 액서스가능성global accessability로 다시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임의의 소비 시스템에 의한 이용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비유적으로 '방송'이라고도 불린다. 이 액서스가능성은 전술한 것과는 차이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반성성reflexivity은 현상성에 대한 고층 표상이며 보고 가능성의 기초이다.
의식을 목표로 하는 인지신경과학자들은 이 의식개념들을 구별하지 않은 채로, 의식의 신경기반에 대해 제안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액서스 가능성의 신경기반을 현상성의 신경기반으로 간주한다. 물론, 현상성의 신경기반과 액서스가능성의 신경기반이 일치할지 어떨지는 경험적 문제이다. 블록에게 문제인 것은, 그것들이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일부의 과학자들에 의하면, 시각경로의 복측 스트림의 활동이 의식내용을 부여하고 더욱이 어떤 추가의 구성 X가 이 내용을 의식적으로 하고, 그 X는 두정엽에 위치한 어떤 메커니즘이라고 한다(그것들은 주의나 binding에 관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근데 이 X를 추가하는 제안은, 액서스가능성의 신경기반에 대해서는 지당할지라도, 현상성의 신경기반으로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또한 글로벌 워크스페이스 논자는, 보고가능한 자극정보는 액서스의식과 상관한다는 점으로부터, 의식의 인지신경기반으로서 대역적 액서스가능성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것은 보고가능성과 액서스가능성의 상관만을 표시한 것으로서, 까닭에 겨우 반성성과 액서스가능성의 상관을 밝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둘이 일치한다는 점을 보이지 않으면 이들의 이론은 논점선취이다. 블록은, 아마도 반론자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 현상성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피험자의 보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 때 피험자는 반성성의 유무도 동반한다. 그러면, 현상성과 반성성에 경험적 분리를 있게 할 수 있는가?
블록의 여기에 대한 재반론은, Sperling(1960)의 실험을 이용한다. 피험자에게 9문자가 순간적으로 동시에 고지되어, 그것을 모두 문자로서 보았다는 인상은 가지되, 그 문자가 무엇이었는지는 보고할 수 없다. 까닭에, 반성성 없는 현상성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고 한다.
블록은 그 뒤로, 현상성과 액서스 가능성의 신경기반의 구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된다. 'Two Neur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에서는, 현상성과 액서스가능성 각각에 신경상관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 현상적 NCC(신경상관항)은 현상적 성격의 하찮은 신경기반으로서, 그것은 빨강의 경험과 녹색의 경험 사이의 차이를 반영하는 신경기반이다. 가령, 운동시(각)의 현상적 NCC는, MT/V5의 특정 유형의 활성화이고, 얼굴지각의 현상적 NCC는 FFA(방추형 회안영역)의 활성화이며, 이것들에는 일단 V1 (#) 과의 재귀적 피드백 루프가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블록은, 차이나는 현상적 성격에는 차이나는 현상적 NCC가 있다고 말하며, 여기서 그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기능특화된 신경 표상 모듈이 현상적 성격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반면, 액서스 NCC는, 대역적 액서스가능성 내지 global workspace의 신경기반이다. 그것은, 시각이라면 후두피질을 중심으로 한 시각경로와, 전두피질이나 두정피질과의 상호작용이다. 여기서 블록의 문제는 물론, 액서스NCC 없는 현상적 NCC의 예화에 대한 것이다. 위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블록은 액서스 가능성과 현상성이 분리된다고 생각되는 몇 개의 경험적 성과를 언급한다.
블록의 논증에 대한 반론을 취해보자. 애초에 '비기능적인' 현상성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으로서의 자격을 잃는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면, 우리가 철학적/과학적/일상적인 대화에서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의식에 전형적인 온갖 종류의 기능적 특성(즉 일련의 액서스가능성)을 찾아보길 바란다. 나는 의식적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고할 수 없고, 주의를 기울일 수 없고, 언어화할 수 없고, 내적 관찰을 할 수도 없고, 행동에 반영시킬 수도 없고, 그러한 것들이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그러한 상태는, 우리는 '무의식적' 현상성으로 부를 수도 있다.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상성을 의식의 본질적 특성으로서 특권화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4] 표상주의를 비판한다 ㅡ 역전지구, spectral shift, 신체감각
표상주의는, 경험의 현상적 측면이 경험의 표상적 측면에 의해 완전히 규정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표상주의를 채용하는 철학자들의 동기 중 하나를 설명하겠다. 심적경험의 현상적 측면은, 주지하듯, 감각질로 불린다. 어떤 방식으로 물리주의는 비물리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감각질을 설명하는가. 표상주의는, 감각질을 심적경험의 표상적 측면에로 돌림으로써 물리주의를 지킨다. 만약 표상을 물리주의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 존재한다면, 거기 더해 감각질이 표상에 의해 완전히 규정된다면, 그 물리주의적 이론은 감각질도 함께 설명할 수 있다.
약한 표상주의(Tw) : 심적경험의 현상적 성격은, 그 표상내용에 수반한다(그것들은 구별되는 개념일 수 있다).
강한 표상주의(Ts) : 심적경험의 현상적 성격은, 그 표상내용과 동일하다(그것들은 동일하다).
(Tw) 임의의 심적경험 e1과 e2에 대하여, e1과 e2의 표상내용이 같다면, e1과 e2의 표상적 성격도 같다. (# 표상내용 차이 없이 현상적 성격 차이 없다.)
(Ts) e1과 e2의 현상적 성격이 같다면, e1과 e2의 표상내용도 같다. (# 현상적 성격 차이 없이 표상내용 차이 없다. ㅡ 이렇게 받아들여도 되는지, 개인적으로 생각해보자.)
<역전지구> (Ts 비판) : 그녀가 역전 컨택트 렌즈를 착용했을 때, 역전지구와 지구에서, 현상적 성격은 동일하나, 표상내용은 역전된 것으로서 차이가 난다.
<'Sexism, Racism, Ageism, and the Nature of Consciousness'에서의 spectral shift> (Tw 비판) : 표상내용이 같으면 현상적 성질도 같아야 한다는 건 성차별, 인종차별.
<'Mental Paint'에서의 신체감각> (Ts비판) : 신체감각의 '선렬함'은 표상내용의 그물망에 들어가지 않는다. 가령 오르가즘은 표상내용의 밖으로 빠져나간다. 토마토는 표상내용을 가지나, 신체감각인 '고통'은 표상내용을 가질지 의심스럽다. 만약 '고통'이 표상내용을 가진다면, 내가 의자의 모서리에 부딪힌 '고통'의 표상내용이 의자의 모서리인가? 아니면 바디 이미지에서 아픈 부위가 표상내용인가?
5] 의식의 하더 프로그램 (#이해 부족)
블록이 지지하는 타입B 물리주의는, 타입A 물리주의와 이원론의 '중도'적인 입장이다. 한편 타입A는 의식이나 감각질을 소거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입장인데, 이는 타입B로부터 보면 너무 래디컬하다. 또한 타입B는 과학의 현상을 고려하지 않는 이원론을 편향적이며 숙고가 없다고 판단한다. 이리하여 타입B의 두 테제가 성립한다.
첫째, 의식(감각질)은 실재적이다(= 현상실재론). 즉, 의식은 물리적 술어에 의해 정의되거나 분석에 의해 소거될 수 없다.
둘째, 의식은 물리적 본성을 가진다(= 자연주의). 즉, 의식은 비물리적인 무언가가 아니며, 까닭에 자연과학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
많은 타입B 물리주의자가 이 두 테제를 양립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차머스는, 타입B는 '이미 내적인 곤란에 잠식되어 있다'고 말한다(1996). 그리고 놀랍게도 블록은 여기에 동승한 논문 'The Harder Problem of Consciousness'를 제출한다. 하더 프로그램은 오로지 타입B만이 직면한 문제들이다. 여기서 주의가 필요한데, 하더 프로그램의 전제 가운데는 블록이외의 논자가 반드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까닭에 이것은 특히 블록의 타입B가 직면한 난문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1 : 현상실재론은 참이다.
2 : 자연주의는 참이다.
1에서 의도된 것은, 의식이란 현상적 의식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1이 맞다면, 로봇이 의식을 가질 경우, 로봇은 '우리와 같은 실재적인 의식 = 현상적 의식'을 가진다. 그럼 로봇은 이같은 의식을 가질까? 이 물음은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명확히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현상실재론이 참일 경우 이 물음은 유의미한 경험적 물음이 될 것이다.
3 : 현상실재론이 참일 경우, 로봇이 의식을 가질지 안 가질지는 유의미한 경험적 물음이며, 아직껏 열려 있는 물음이다.
한편 2가 참일 경우, 의식은 기능적 상태와 동일시할 수 없다. 의식이 어떤 물리학적 설명을 얻었다 할지라도, 어떤 존재자가 의식적이라는 것에 있어 결정적 성질은, 기능처럼 '옅은/얕은' 성질이 아니라, 그 존재자의 물질적 구성에 관계하는 '깊은' 성질이다.
4 : 자연주의가 참인 경우, 의식을 설명하는 물리적 성질은, 구성에 관계하는 '깊은' 성질이다.
이런 설명을 담당하는 성질은 선언적disjunctive으로서, 선언적 성질을 들여넣은 설명은 적절한 설명이 아니다.
5 : 설명을 담당하는 성질은, 선언적이어선 안되고, 단일해야만 한다.
여기까지를 인정했을 때, 어떤 안티노미가 생긴다. 일단, 우리 인간은 의식을 가진 존재인데 4는 이런 의식이 일종의 '깊은' 물리적 성질, 즉 일정한 신경상태 혹은 신경기반에 의해 설명될 것을 요청한다. 그렇게 한다면, 5에 의해, <로봇의 의식도 같은 신경상태 혹은 신경기반에 의해 설명되어야만 한다>라는 점이 귀결된다. 그러나 로봇은 그러한 신경기반을 가지지 않는다. 이로부터 다음이 귀결된다.
6 : 자연주의가 참인 경우, 로봇이 의식을 가지지 않음이 아프리오리하게 판명된다.
그러나 1, 2, 3과 6은 서로 들어맞지 않는다. 정리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즉, 현상실재론에 의하면 <로봇이 의식을 가질지 안 가질지>는 경험적으로 열린 물음이나, 자연주의에 따르면 이 물음은 아프리오리하게 부정적으로 대답된다. 이리하여 현상실재론과 자연주의를 동시에 채용할 수는 없다. 이 안티노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가 의식의 하더 프로그램이다.
블록은 여기에 대한 해소법을 지적한다. 이는 <로봇이 의식을 가질지 안 가질지>라는 물음이 경험적으로 열려 있고, 그러나 아프리오리하게는 부정적으로 대답됨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인식론적 부조화'를 견뎌내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블록은 4와 5를 부정하는 방법에 더하여, 1을 약하게 하는 전략을 지적한다. 이 전략은 예를 들면, 현상실재론은 인정하면서, '의식의 현상적 성질을 개체간에서 비교하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 전략에 따르면, <로봇이 의식을 가지는지 안 가지는지>는 의사-문제로 간주되므로, 안티노미는 생기지 않는다.
4/ 퍼트넘에 대하여
<퍼트넘의 기능주의와 그것에 대한 비판>
생물학적 기관과 인공물은 모두 그 목적론적인 기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그것의 의말하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점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지 모른다. 가령 데넷Dennett은 진화생물학은 공학의 일종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비약스런 주장은 아니다. 실제로, 진화생물학은 단순한 생물종이건 고등한 지능을 갖춘 인간이건, 모든 생물종은 공통의 기원을 가지고 있고 종의 개체가 가지는 갖가지 형질은 자연선택에 의해 설명가능하다는, 이른바 적응주의의 생각을 중핵으로 하고 있다. 그때문에, 현대의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을, '어머니 자연'에 의해 형성된 어떤 종류의 공학적 장치로 파악하려 한다.
이러한 주장은 적어도 비전으로서는 강하게 호소하는 측면이 있지만, 인간의 심적 기구의 복잡함은, 그 기능을 용이하게 특정할 수 있는 심장(생물학적 기관)이나 엔진(인공물)과 동급으로 취급할 수 없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을 기계에 비유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튜링머신과의 유비를 사용한 퍼트넘의 이론을 살펴보자(이하 퍼트넘의 기능주의를 PF라고 약칭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잘된 이론이 아닌지를 살펴보자.
튜링기계를 마음의 모델로서 선택한 동기
일단, 테입이나 유한상태기계라는 개념은 온갖 물리적 기반에 의해서도 실현 가능하니까, 다중실현성 테제의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
또한, 계산기와 지향적 시스템과의 사이에는, 유비관계가 성립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외계와 상호작용하는 지향적 시스템은, 환경으로부터의 자극을 변환기에 의해 기호표상의 형태로 입력으로서 받아들이고, 어떠한 적절한 과정을 거쳐, 그 출력을 운동기관으로 전달한다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PF의 아이디어는 인간 외 생물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애초에 단순한 생물이라면, 행동을 시뮬레이트하는 것에 튜링기계를 사용할 필요까지도 없다. 가령 데넷이 사용한 예인 조개는, 외적이 가까이 다가가면 껍질 안에 다리를 움츠러들인다. 그러나, 실은 이 촉발적인 반응은, 외적을 인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진동이나 충돌에 반응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생물의 행동은 '유한상태기계'를 사용함으로써 간단히 시뮬레이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퍼트넘이 행했듯이, 이런 시뮬레이트에 현실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상태변이가 비결정적인 오토머신을 유기체의 모델으로 삼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조개의 내적 구성은, 유한상태기계를 물리적으로 실현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진전시켜가다보면, 인간은 자판기나 세탁기같은 기계에 비해서, 취할 수 있는 상태의 수가 복잡하다는 것에 있어서만 차이나는 그러한 존재자로 시사될 것이다.
그런데, 튜링기계의 상태는 어떤 시점에서는 딱 1개만을 취할 수 있다. 그때, 인간이 튜링기계라면 기계상태는 인간 전체의 순간적 상태 total instantaneous state 의 실현이 될 것이나, 인간의 심적상태는 일반적으로 중첩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퍼트넘에 따랐을 때 기억이나 학습은 튜링 머신에서 새로운 상태의 획득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만약 인간이 튜링기계라면, 심적 상태는 학습과는 무관하게 될 것이다. (# 업그레이드된 기계는 학습이 가능하지 않을까?)
5/ 루이스에 대하여
<인과역할 기능주의causal role functionalism(이하 CRF)와 그 가능성>
'기능'을 보는 두 관점이 있다. PF를 논하면서는 목적론적인 해석을 제시(심장이나 엔진을 예로 들어)했으나, 기능을 인과역할로 해석하는 방법도 있다.
인과역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과연쇄의 패턴에서 점해지는 위치이다. (김재권 정리노트 참조) 그때 발생하는 무한 퇴행에 대응하여, 루이스 같은 CRF 논자는, 과학에서의 '이론어'는 이론 전체에 의해 보이지 않고 숨겨진 채로 정의되어 있다, 는 논리실증주의 이래의 아이디어를 응용한다(#). (생략) 이러한 방법으로 과학이론으로부터 이론어를 소거해서 얻어진 것을 '램지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CRF에 의한 램지문의 사용은, 그닥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강한 전제를 깔고 있다. 가령, 온갖 심적 상태 유형의 의미를 정하는 이론이, 단일한 문장으로서 쓰여질 수 있다는 보증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의문은 지당한 것이지만, 일단은 다음같이 대답해보자. 일단, 램지문을 사용해서 개개의 심적 어조를 정의한다는 이론은, 정의가 순환에 빠지는 곤란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또한, 기능주의는 애초에, '심적 상태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대답하기를 의도한 학설이다. 이 물음은 개개의 '심적 어조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만약 이 구별이 성립한다면, 문장s가 '무한 연언'이 될 것인지 어쩔 것인지는, 형이상학적 문제와는 관련되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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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인의 고통
고통 개념에 상당하는 것이 Mi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경우 Fi의 값이 되는 것이 가령 c-섬유의 발화라는 사건 유형이다. 이것에 대하여, 화성인의 경우에는 Fi의 값이 되는 것은 별개의 신경생리학적 상태 유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은 이 논의에서, 고통 개념과 고통 상태를 구별해야 한다. 루이스에 의하면, 고통 개념은, 특정한 인과역할을 말하는 것이고, 그 인과역할을 충족하는 물리상태는 어떤 것이든 고통 상태이다. 이것은 '승자는 승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문장을 '사상양상'으로 해석할 때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편하다. '승자'는 비고정적non-rigid인 기술이므로, 가능세계에 응하여 지시대상이 차이가 난다. 따라서, 현실세계에서 승자였던 사람이, 다른 가능세계에서도 승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만은 어렵다. 이처럼, '고통'의 개념은 비고정어로서, 집단에 응해서, 외연이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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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의 고통
고통에 관계하는 광인의 행동은 상식적 인간과는 완전히 차이나지만, 광인의 신체구성은 우리와 거의 같다고 가정한다. 문제는, 광인의 행동은 다른 건전한 인간의 행동과 크게 차이나므로, Fi 값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통'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인과역할을 달성하지 않은 이상, 광인에게 고통을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인지 어떤지는 의심스러운 직관이다. 그러나, 한편, c-섬유의 발화라는 물적 사건은 고통의 인과역할을 더는 달성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기계가 고장났다는 것과 같은 경우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고장난 전탁을 그래도 '전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처럼, 광인도 한때는 동류였던 인간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더라면, 통상의 인간의 경우 고통 상태인 c-섬유 발화라는 사건 유형을, 광인의 경우에도 '고통'이라고 불러선 안 되는 것일까.
이런 직관과 씨름하기 위해 루이스가 호소하는 것은 '유사성의 관념'이다. 뭔가 하나라도 우리와 닮아 있는 화성인과 광인 모두에게 고통 상태를 귀속시키는 일은 망설여지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유사성 관계'가 '추이성(#)'을 충족시키지 않는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가령 또다른 카테고리로서, 미친 화성인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는 행동도, 신체구성도, 통상적인 인간과는 별로 닮아있지 않으므로, 그런 개체에 대해서는 고통 상태를 귀속시키는 것이 망설여질 것이다.
동물에 대해서밖에 '본다', '의식이 있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인간을 상상한다면, 말콤에 의하면, 그런 인간은 단순히 '감각'이라든가 '의식'이라는 말의 용법을 단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심적어조의 적용에는 비대칭성이 있다는 점이다.
유사성관계가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독립해서, 객관적으로 성립하는 관계인지 아닌지는 큰 의논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심적 어조의 귀속이 결국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독립해지 않다면, 지향적 상태도 포함하여 온갖 심적 상태에 관하여 사실문제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인가? 아니면, 루이스나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으로서, 오히려 인간을 패러다임으로 하는 선입견을 버리고, 지향적 시스템에 대한 이론은 오직 하나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6)
<인과역할 기능주의의 한계와 수정안>
1] 심리학적 이론은 어떻게 특정될 것이며, 그것으로서 무엇을 채용해야 하는가?
CRF의 지지자의 다수는 심적 어조의 의미를 정의할 이론으로서, 상식 심리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 루이스는 1999년에, 심적 상태와 감각 자극과 운동 반응의 사이에 인과적 관계에 관한 집단 안의 공유지식인 platitude 을 수집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상식심리학에 의해 심적 상태의 인과역할이 특정된다고 보는 기능주의를, '상식적 기능주의 common sense functionalism'라고 부른다.
(Canberra Plan) 실은 개념분석을 위해서 상식으로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platitude를 수집한다는 발상은, 오늘날에는 'Canberra Plan'이라 불리는 철학적 방법론으로 전개되고 있다. Canberra Plan은, 분석되는 개념에 대해서의 platitude를 수집하는 1단계와, 그것을 충실히 실현하는 것을 찾는 2단계에 의해 수행된다. 1단계는 '자유의지', '인과성', '도덕적 가치' 등의 어조에 대하여, 그것들의 의미를 구성하는 platitude를 우리의 일상적 신념으로부터 추려내는 작업으로서, 이 작업은 순수하게 개념적인 탐구이다. 1단계 작업에 의해, 어떠한 것이 일상적으로 자유의지나 도덕적 가치로 생각되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된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2단계에서는, 어떻게하여 모든 철학적 개념에 부과된 역할이 실제로 지워져 있는지를 명확히 한다. 이 작업에서는, 후천적(아포스테리오리)인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오는 것이 허용된다. 가령, 고통 개념의 인과역할을 실제로 달성하고 있는 인간의 신체조직이 무엇인가를 추궁하는 작업을 다루는 것은 과학자의 일이라는 식이다.
Canberra 파 철학자들은, 철학이란 아프리오리한 개념분석을 다루는 것이라는 메타철학적 직관을 옹호한다. 이 점에서 그들의 생각은, 철학은 자연과학과 본질적으로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같은 수법으로 연구를 진행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대립한다(8).
분석과 종합의 구별에 commit한다는 의미에서, Canberra 계획에는 보수적인 측면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이하는 그 이유들이다.
1단계에서는, 모든 철학적 개념을 나타내는 어조의 의미를 정의하기 위해, platitude를 수집하여 이론을 손에 넣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런데, 어떤 이론이라도, 거기로부터 램지문을 경유하여 이론어의 의미를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급한 생각이다. 가령, 바나나에 대한 참인 문장을 모은다고 상정해보자. 거기에는 '바나나는 아열대에서 잘 자란다'라든가 '바나나는 10kg보다 가볍다'라는 문장이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문장으로부터 이루어진 '상식 바나나 이론'에 의해, 단어 '바나나'의 의미가 정해진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이것에 대하여, 상식심리학은 상식 바나나 이론과는 전혀 성격이 차이나는 이론이며, 심적 어조의 의미는, 상식심리학의 이론에 의해 부여될 수 있다는 주장을 관철한다면, 심적 상태의 인과역할에 대해 말하는 상식심리학의 platitude는, 분석적이라고 하게 된다(9). 즉, 고통이나 신념이라는 것이 이러저러한 인과역할을 가지는 것은 분석적으로 참이라고 하게 된다.
캔버라 계획의 1단계가, 분석적인 문장을 수집하는 작업을 다루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이 아프리오리한 개념분석이라는 주장도 정당화된다. 왜냐하면, 분석성은 아프리오리성과 필연성을 함의한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9.5).
그러나, 분석과 종합의 구별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옹호할 수 없다고 하거나, 혹은 적어도 이 주장에는 신중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논자는, 콰인의 논문이 등장하고부터 반세기가 지난 현재도 많다(10). 분석적 문장과 종합적 문장의 구별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캔버라 파의 철학자는, platitude를 수집할 때, 도대체 어떤 문장이 철학적 개념을 나타내는 말의 의미를 결정하는 문장인가를 판정하는 원칙이 없이 수집해야 하게 된다.
그렇다 해서, 모든 기능주의자가 분석과 종합의 구별을 옹호해야 하느냐고 하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분석과 종합의 구별에 회의적인 기능주의자는, 상식심리학의 이론이 거짓일 가능성을 인정하며, 심적상태의 인과역할을 특정할 이론으로서, 인지과학의 이론을 채용할 선택지도 있게 된다. 심리학적 이론으로부터 분석성의 신분을 벗겨내는 것만으로, 상식적 기능주의의 이점은 모두 계승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분석과 종합의 구별에 commit하는 것은 기능주의자에게 필수 사항은 아니라는 점을 논했다.
2] 명제적 태도를 개별화할 수 있는가?
심적 상태 유형의 인과 역할을 특정할 이론 Th가 단일한 문장으로 써 내려가질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의 문제를 다루겠다. 이 상정은 고통 상태처럼, 내용content을 가지지 않는 심적 상태를 고찰하는 몫으로는 지당하다. 그러나 신념이나 욕구 등 명제적 태도에 대해 생각한다면, 심적 어조의 수가 유한하다고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명제적 태도의 내용content의 수는 원리적으로 상한선이 없다. 신념상태나 욕구상태는 내용이 차이난다면 별개의 상태 유형으로 보아야만 하게 될 것이다. 차이나는 내용을 가지는 두 개의 신념 상태는, 차이나는 인과역할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무수한 신념술어를, 'believe-that-the-sky-is-blue' 나 'believe-that-grass-is-green'이라는, 그 이상 분절될 수 없는 원시어로서 도입하게 된다. 그리하여, 심적어조의 리스트는 당연히 무한하게 된다.
이런 문제는, 애초에 신념을 그 이상 분절될 수 없는 주체의 성질으로 간주하는 '부사설'적인 입장으로부터 귀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오히려, 신념을 'P라고 믿는다'와 'Q라고 믿는다'의 공통항으로 간주하고, 신념을 주체”와” 명제 사이에 성립하는 이항관계로서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거기서, 가령 루이스는, 신념을 포함하는 platitude에는 명제변수에 대한 '전칭양화'가 숨겨져 있다고 간주할 것을 제안한다(Lewis, 1999, 258n13). 이론 Th의 역할은 신념이나 욕구라는 태도attitude를 특징짓는 것으로서, 한번 그것이 정의되면, 개별 명제와의 페어에 의해 더욱 섬세한 심적 상태의 분류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기대된다(#). 지당하게, 명제라는 존재자의 신분에 대해 의심이 남을지도 모르나, 그것은 형이상학의 문제이지 심리철학의 문제는 아니다(Lewis 1983, 110).
나 자신은, 이론 Th는 태도attitude를 특징짓는 것에 머무른다는 루이스의 아이디어는 기능주의를 옹호한다는 목적에서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러한 입장은 과학적 심리학과 직접적으로 접속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가령, 심어mentalese의 가설(#)을 생각해보자. 일단은 심어를 언어표현이 가지는 합법성을 사고의 합법성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이라고 이해해두자. 즉, 심어의 가설은, 극히 단순히 말해보면, 우리가 어떠한 사고를 움직이게 할 때, 우리의 뇌내에서는 명제를 표현하는 어떠한 언어적 대상에 대해서의 기호조작이 행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가령 p라고 믿고 있다는 것은 이론Th가 특징지은 신념태도를 실현하는 뇌내의 이른바 신념 박스에 p를 표현하는 심어의 문장이 포함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될 것이다.
물론, 심어의 가설에는 다양한 비판이 있음을 적어둘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를 주의해두자. 첫째로, 심어는 중요한 의미에서 경험적인 가설으로서, 형이상학적 기능주의의 이론과는 독립적이다. 둘째로, 우리가 아는 바 없는 언어가 우리의 뇌내에서 작동한다는 생각은 직감에 반할지도 모르나 이 가설을 제대로 비판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13).
이상의 논의가 정당하다면 우리는 루이스의 기능주의와 심어의 가설은 정합적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미 말했듯, 나 자신은 이것이 기능주의를 옹호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기능주의자가 이 결론에 동의하는 것은 아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잭슨 등은, 기능주의와 심어가설을 명확히 분리하여 어디까지나 기능적역할에 의해 심적상태의 명제내용이 정해진다고 주장하지 않고서는 기능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braddon-mitchell&jackson 2006).
주석6 : The Representational Theory of Mind
주석8 : Naturalism , Papineau , in Stand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주석9 : Nolan, Daniel. 2005. David Lewis,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주석9.5 : Williamson, Timothy. 2008. The Philosophy of Philosophy, Wiley-Blackwell.
주석10 : The evolving fortunes of eliminative materialism , in Contemporary Debates in Philosophy of Mind
주석11 : The Philosophy of Psychology, Botterill & Carruthers
주석13 : 종종 하기 쉬운 오해나 의문에 대하여 여기서 대답해보겠다. 일단 '언어적 대상'이라 해도, 뇌 안에 가령 일본어 문장이 써 넣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 표현은 매개에 관하여 중립적이므로, 일본어 문장 토큰이 신경 세포의 배치된 방식에 의해 실현될 가능성은 아프리오피하게는 물리칠 수 없다. 다음으로, 평소에 내가 사고할 때에는, 가령 표시나는 목소리로 내지 않더라도 내적인 언어라는 방법으로, 일상언어의 모든 표현을 사용하여 사고하고 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어째서 쓸데없이 언어의 수를 늘릴 필요가 있는 것인가. 이 의문에는, '여기서는 사고 일반의 본성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고 있다' 고 대답할 수 있다. 일상언어의 표현을 사용하여 잠자코 생각한다는 일인칭적인 경험에 대해서의 현상학은, 사고가 어떻게 실현될까를 설명하는 심리학적 이론과는 수준이 다르다.
Lewis, David. 1983. Philosophical Papers Vol. 1, Oxford University Press. —. 1999. Papers in Metaphysics and Epistem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