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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이디푸스』 저서에 관련하여 2차 텍스트를 사용한 수업 (2015-2)
(이 글은 들뢰즈-가타리 『앙티오이디푸스』와 관련하여 아래 텍스트를 읽으며 진행된 수업의 강의록이다.)
사토 요시유키, 『권력과 저항』, 2장/ 경제론
■ 왜 경제론 ?
: 현대 철학에 있어서 초자아/자아/이드의 덩어리로 주체를 본 프로이트에 뒤이어 라캉은 L도식으로 주체를 본다[L도식은 lacanian 03 항목으로 가라]. 푸코는 초월론적 경험적 이중체로 주체를 본다. 그것은 이들이 topos(위치, 장소) 개념틀 안에서 주체를 사유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이를 사토는 topology(위상학)로 정리한다. 여기에는 공간, 수학이 관련된다. 한편 프로이트-라캉 이론은 리비도라는 경제량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에겐 위치들을 흐르는 에너지의 흐름과 같은 것이 주체이다. 그리고 이 페이지에서 다룰 들뢰즈-가타리의 주체를 묶어 사토는 economy(경제학)로 정리한다. 여기에는 시간이 관련된다. 여기서 말하는 경제학은 주체를 힘, 에너지로 파악한다. 교수님은 이에 대해 예를 들어 설명했다. 내가 가진 5 중에 타자에게 3을 투자하여 그 타자가 나에게 2를 준다는 이론, 여기에는 곧 분배, 소비, 생산이라는 경제학적 개념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한편 본 글에서는 들뢰즈-가타리가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논점이 부각된다 : 프로이트-라캉은 오이디푸스 삼각형 (즉 topos) 안에 에너지를 가두어버린다.
들뢰즈가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을 또한 '죽음의 본능'이라 부를 때, 이는 프로이트가 아직 오이디푸스적 개념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을 적의 논문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제시한 '죽음충동' 개념을 조사하는 작업을 요청한다. (66) [프로이트의] 신경학적 이론은 「과학적 심리학 초고」(1895[#_『정신분석의 탄생』, 임진수 역])에서 이미 존재하며, 『꿈의 해석』(1900)을 거쳐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다시 나타난다. 따라서 이런 텍스트는 에너지론 모델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다른 텍스트와 구별될 수 있다. (66)
이런 전제에서 출발해 사토는 반복강박이라는 개념을 고찰하고 있다. 반복강박에서 환자는 “억압된 것을 [과거에 속한 것으로] 기억하는[# 교수님 - 의식화하는] 대신에 현재 속에서 체험된 경험으로서 반복하지[# 교수님 - 언어화하지 않고 무의식적 상태로 내버려둠. 그러면 몸이 계속 반복하게 된다] 않을 수 없게 된다” [쾌락원칙을 넘어서, p. 284]. 이는 명확히 쾌락 원칙에 위배되는 사태이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쾌락 원칙을 따르는 성적 충동(에로스) 및 생산적인 삶의 충동과는 다른 원칙과 충동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죽음충동이란 개념의 형성 배경이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유기체인 모든 생물의 기원이 무기적인 것이라면, 모든 충동은 “옛 상태를 회복코자 하는 경향(p. 310)”을 지닐 것이라고 한다. 죽음의 목표는 “무기적인 것으로의 회귀”이다. [# 교수님 – 이는 형이상학적 함의에 아울러 생물학적 함의를 지니는 목적이다.]
(69) 한편, 들뢰즈-가타리는 '기관 없는 신체'를 프로이트가 죽음충동에 부여한 형이상학적-생물학적인 함의와 더불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관 없는 신체'를 완전히 구조론적*인 의미에서 사용한다. (69) “기관 없는 신체는 기원적 무의 증인이 아니며, 더욱이 상실된 전체성의 잔여도 아니다. 특히 그것은 투사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고유한 신체나 신체의 이미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앙티오이디푸스 불어본, p. 14)
*주석13. “죽음은 무기적인 것으로의 회귀이다” 라는 프로이트의 정의에 주목하면서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죽음의 본능을 '순수형식'으로 해석한다. (불어본 p. 148)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상 불가능하고, 표상에 대항하는 신체이며, 그런 의미에서 기관 없는 신체란 '현동적'actuel이 아니라 '잠재적'virtuel이다. 그것은 바로 구조론적 기능으로서만 존재한다.(70) 사토는 들뢰즈가 프로이트의 개념과 자신의 개념을 구별시키고 있는 『자흐-마조흐 소개』(p.22~28)를 인용한다. “죽음충동과 파괴충동은 무의식 속에 잘 주어지거나 잘 제시될 수 있지만 언제나 생명충동과 혼합된 가운데서 그렇기 때문이다. 에로스와의 결합은 타나토스의 '현전'의 조건으로서이다. … 정반대로, 우리가 죽음의 본능을 말할 때, 우리가 지시하는 것은 순수 상태에서의 타나토스이다. 그런데 이때의 타나토스는 정신적 삶뿐만 아니라 무의식에서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존경할 만한 텍스트들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본질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관해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것에 관해 말해야만 한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것이 정신적 삶을 기저fondement로서, 그리고 기저 이상의 것으로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 욕망이 계속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죽음이다. transcendantal이라는 수식어는 우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뜻한다. 들뢰즈는 죽음의 본능이라는 단어가 초월론적 원리를 지시할 수 있다고 기술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생명충동과 죽음충동이 본질적으로 경험적인 것임과 대비적이며, ''모든 형식에 저항하고 재현을 허락하지 않는 근거 저편''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죽음'은 어디까지나 구조론적, 초월론적 원리로서의 '죽음'이며, 라캉이 말한 '제2의 죽음'과 근친성을 가진다. 세미나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라캉은 생물학적 함의의 죽음과는 다른 '제2의 죽음'을 언급한다. '제2의 죽음'은, 사드의 텍스트에서는 끊임없이 무한정 이어지는 고문 속에서 생기는 “죽음을 넘어선 고통”으로 출현한다. 이는 '죽음의 본능'과 근친적이다. 이 종류의 죽음은 생명을 실어나르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초래하는 죽음이며 따라서 transcendantal하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죽음의 본능은 그들 자신이 부동의 동자[# '아리스토텔레스 기초' 항목을 참조하라.]에 빗댄 것과 같이 구조론적 개념으로만 존재하며, 라캉적 의미에서 욕망을 역동적이게 한다. [# 교수님 참고 말씀 – 죽음은 항상 있는 그러한 리듬을 끊어버린다. 그럼으로써 죽음은 새로운 욕망의 발생이 가능한 토대가 된다.]
따라서,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을 작동시키는 '제2의 죽음'이며 동시에 유기체화를 거부하는 '반-생산'이다. 반대로 '욕망하는 기계들'이라는 반발 개념은 '생산의 생산'을 경유하여 하나의 유기체로 형성된다. (사토의 해석. 73) [# 교수님 – 유기체는 본부에 저항할 수 없는 system이다. 모든 욕망의 흐름이 본부 명령에 따라 이탈없이 연결된다. 그것은 하나의 봉합적 단위, 가령 person같은 것을 형성할 것이다. 유기체는 기관들의 유기적 체계로서, 그 안의 관계망은 사회적으로 허용된 connection과 허용되지 않은 connection으로 나뉠 것이다. 여기서 아는 자는 유기적 이성, 초자아 같은 것이고, 모르는 자는 본능이다. 유기체는 본능을 가두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들뢰즈는 바로 이 구도를 '기관 없는 신체' 개념으로써 비판한다.]
들뢰즈가 말하고자 하는 흐름은 거시적 권력 관계가 코드화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들뢰즈에게 해방과 자유의 조건을 이룬다. 들뢰즈-가타리는 그것을 장소론topology적 문제구성과는 다르게 찾아낸다.
■ avec 라캉
프로이트는 심적 장치를 1차 과정(무의식 체계)과 2차 과정(전의식-의식 체계)으로 나누고, 각 에너지의 흐름에 관해 생각했다. 2차 과정에서 에너지 이동은 구속되지만, 1차 과정에서 에너지 이동은 완전히 자유롭다. 따라서 무의식에 있어서 심적 에너지의 흐름은 동적이고 가변적이며 완전히 자유로운 것, 말하자면 '다양체'로서 존재한다. 다른 한편, 라캉은 1차 과정에서의 에너지의 흐름을 시니피앙 연쇄로 파악했다. (75) (76) 라캉은 1차 과정의 에너지 투여를 “시니피앙의 결합과 대체라는 효과들” 속에서 발견한다. 예를 들면 그 각각은 꿈에서의 시니피앙의 압축과 전위에 대응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1차 과정에서의 투여는 “쉽게, 완벽하게 전이, 전위, 압축될 수 있다”. 그러나 라캉은 시니피앙 연쇄를 하나의 시니피앙('팔루스')으로 향하게 하며, 유일한 초월적 시니피앙에 의한 절대적 지배의 체계를 확립하고자 한다. (76)
'타자'에게 있어서의 결여의 시니피앙 = 하나의 시니피앙 = 팔루스. (77) '다른 모든 시니피앙들'은 '하나의 시니피앙'인 팔루스로 향하며, 그것에 의해 순서가 매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라캉은 팔루스를 '특권적 시니피앙'이라고 부를 것이다. 들뢰즈-가타리가 거부하는 것은 바로 팔루스의 이런 초월성이다. ...'팔루스'란 다른 모든 시니피앙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통제하는 초월적 시니피앙인 동시에 '결여'의 시니피앙이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는 거세의 효과에 의해 욕망 충족의 단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달리 말하면, 거세에 의해 주체는 결여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욕망의 징표인 팔루스를 억압한다(원-억압). (77) (78) 주체의 '결여'를 의미하는 이 시니피앙의 억압은 다른 모든 시니피앙, 즉 모든 욕망의 흐름을 통제한다. 라캉은 '팔루스'를 '제로 기호라는 결여의 시니피앙'으로 규정한다. (78) (78~79) 팔루스는 제로 기호로서 시니피앙 연쇄를 확립하고, '결여의 시니피앙'(억압된 시니피앙)으로서 욕망의 흐름을 통제, 지배한다. 이 결여의 체계에 의해 팔루스는 '전능한 징표'가 될 수 있다. ...시니피앙 연쇄와 팔루스라는 라캉적 개념은 자유로운 욕망의 흐름에 결여를 도입하고 욕망의 생산을 억압한다. 들뢰즈-가타리가 거부하는 것은 '결여'에 의해 만들어진 욕망의 이 억압이다. ...그들의 전략은 욕망을 철저한 생산성, 능동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78~79)
프로이트는 에너지의 흐름을 심적 장치, 즉 주체의 틀 안에서 규정했다. 반대로 들뢰즈-가타리는 에너지의 흐름을 주체 외부로 확장한다. 흐름이란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리비도의 흐름이며, 동시에 맑스적 의미에서 자본의 흐름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흐름'이란 [경험적 장에서] '추상적인 양'으로서의 에너지 일반을 의미한다. (79)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의 생산과정 전부를 등록하기 위한 표면”이 된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기관 없는 신체의 표면에 접속되며, 상호간에 접속하면서 생산하기를 생산한다. 그것들은 결코 초월적 시니피앙 같은 특권적 요소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다. ''기계들은 같은 수의 이접[# disjunctive ; 선언 ; 양립 불가능한 것이 양립 가능]의 점들로서 기관 없는 신체 위에 꼭 달라붙어 있으며, 그런 이접의 점들 사이에는 새로운 종합의 그물이 전체적으로 짜여지며, 그런 이접의 점들은 표면을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한다.'' 다양한 욕망하는 기계들이 그들의 차이를 지키면서 공존하는 이런 종합을 들뢰즈-가타리는 '이접적 종합'이라 부른다. 이런 이접적 종합은 어떤 종류의 '주체'를 생산한다. '주체'는 통합된 신체를 지닌 '유기체'이며, 기관 없는 신체는 이런 유기체에 반발한다. 이접적 종합은 기관 없는 신체 위에서, ''욕망하는 생산의 곁''에 '잔여' 또는 '잔해'로서 산출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과정을 '소비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80-81)
욕망하는 기계는 다른 욕망하는 기계가 생산한 생산물을 소비한다. 그리고 그 소비의 과정에서 '잔여', '잔해'처럼 '주체'가 산출된다. 소비해야 할 생산물이 매 순간마다 달라지는 까닭에 그 소비에 의해 산출된 '주체'도 매 순간마다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꾼다. 달리 말하면, 그 '주체'는 끊임없이 생성변화를 반복하며, '고정적인 동일성'을 갖지 않는, 문자 그대로 다양체로서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82)
라캉에게 주체를 규정하는 것은 '시니피앙'인데, 그것은 '결여의 시니피앙'으로서의 팔루스를 의미한다. 따라서 주체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결여'이며, 중심이란 공허('구멍'trou)일 수밖에 없다. 결여의 시니피앙에 의해 규정된 라캉적 주체는 절대적 수동성에 의해 탈중심화되어 있다. 반대로 들뢰즈-가타리에게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생산적 욕망들이다. 그 때문에 주체는 항상 욕망하는 생산에 의해 관통되어 있다. 그들에게 '탈중심화된 주체'는 결코 비생산적 수동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주체는 [다양한] 욕망들, 그 욕망들의 소비에 의해 생산된다. (84) [# 라캉과 들뢰즈의 주체 - 중요한 지적]
다양한 생산의 귀결로서 '주체'(초월론적 장)는 다양체로 되는 것이다. 그때 '주체'는 끊임없이 생성변화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에게 초월론적 장의 다양체란 '타자로의 생성변화'[타자-되기]를 의미한다. (84)
■ 비인칭적 역량
무의식적 욕망은 언제나 생산적이며 생산의 작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가 진정한 욕망의 정립을 허용한다면 그 사회의 착취, 예속, 위계구조가 위태로워지기 마련이다. 그때 욕망의 억압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것을 생각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억압과 억제라는 개념을 구별한다. 억압은 사회적 개념으로 순종적인 주체를 확보하고 사회질서를 재생산한다. 한편 억제는 정신분석적 개념으로 심적 장치에서 욕망의 흐름을 막고 욕망을 일정한 표상에 종속시킨다. 들뢰즈-가타리는 심적 억제가 사회적 억압과 분리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독자적이다. “가족적 억제는 사회질서를 재생산하는 사회적 억압의 대행자/동인agent으로서 기능한다. 가족적 억제는 바로 가족적 오이디푸스화이며, 오이디푸스적 가족이야말로 사회질서의 재생산을 대행한다.” (86)
어떻게 ? 고대 사회, 전제군주 사회에서 경제적-사회적 재생산은 가족에서의 인간의 재생산과 독립되어 있지 않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 자본, 추상적 노동 등의 '추상적인 양'이 사회체에 등록됨에 따라 가족은 오히려 사회체로부터 분리되어 바깥에 놓이게 되었다('가족의 사적 영역화'). 이렇게 가족을 사회적 장의 바깥에 놓는 것은 모든 사회적 장이 가족에 끼워 맞춰지기 위한 조건이다[앙-오 : 314]. 이렇게 사회적 장 전체는 가족이라는 오이디푸스 극장에 맞게 포개지며, 각자의 무의식적 욕망을 억압한다. 여기서 욕망하는 생산은 어떻게 될까 ?
라캉에게 언표의 주체는 의식의 심급에 상응, 언표행위의 주체는 무의식의 심급에 상응한다. 이때 후자는 전자보다 상위에 있으며 그것을 규정한다. 이는 장소론적 문제구성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전자를 '사회적 인물'(기호-점, 절단-흐름에 의해 생산된 이마주, 자본주의의 순수한 '형상')이라 부르고 후자를 '사적 인물'(이미지들의 이미지들, 시뮬라크르들은 사회적 인물이라는 첫 번째 순서의 이미지를 대리[표상]하는 능력을 부여받는다)이라 부른다. 가족적 오이디푸스화는 사회적 인물을 사적 인물에 포개는 것이다. 욕망하는 생산은 그때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고정적인 표상(이미지들 중의 이미지들, 시뮬라크르들)으로 바뀐다. “이미지들의 지배,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분열증을 이용하고 흐름을 횡령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즉 이미지들을 합성하고 이미지들을 이미지들에 포개는 그런 조작이 이뤄지며, 그런 조작이 끝난 뒤 아빠-엄마에 관련된 각자의 작은 자아가 참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316~7]. (90) 욕망하는 생산에 의해 탈중심화된 다양체로서의 '주체'는 “아빠-엄마에 관련된 …작은 자아”를 중심으로 한 단수적[통합적]unitaire 주체로 변화한다. 이리하여 오이디푸스화는 '주체'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그것을 경험적 자아와 초월론적 자아라는 고정된 쌍, 즉 오이디푸스화된 장소론적 주체로 환원해버린다. 달리 말하면 그런 주체는 '타자'의 쪽에서 철저한 수동성에 의해 규정된다. (90)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언표의 주체'(경험적 자아)는 '언표행위의 주체'(초월론적 자아, 오이디푸스적 표상)에 복종화되는데, 자본주의 체제는 이 오이디푸스화를 도입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탈코드화하고 해방시킨 욕망의 흐름을 자신의 힘으로 재영토화하며, 분열증적인 '절대적 극한'을 내면화된 '상대적 극한'으로 치환한다. [# 욕망의 흐름의 자유로운 운동을 억압 ; 재-영토화(이는 자본에 의해 탈영토화된 것이 오이디푸스화를 통해 재-영토화된다는 의미]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게 오이디푸스적 권력에 대한 저항 수단은 항상 자본주의 자체 속에서 주어진다. (91) (92)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분열증적 계기로서의 '탈코드화'의 운동을 가속화하고 그것을 절대적 극한으로까지 몰아붙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권력에 대한 저항 전략을 구성한다. (92) 정리해보면 : (92) 자본주의 체제에서 '욕망하는 생산'은 가족적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억압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운동이란 그 자체로 '흐름의 탈코드화'이며,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란 이 탈코드화를 극한으로까지 몰아붙이는 운동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권력에 대한 저항 수단은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한다. (92) [# 공리계 ↔ 역량의 전도]
욕망의 능동성은 주체의 능동성과 같은 뜻이 아니다. 그들에게 주체는 생산적 무의식에 의해 탈중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하는 생산의 능동성은 주체(전의식-의식의 체계)의 능동성이 아니라 무의식적 욕망의 능동성이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은 무의식에 관한 그들의 정의가 라캉의 정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라캉에게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며 그것은 '타자'라는 인칭적 장의 한가운데서 발견된다. 라캉은 자아를 탈중심화했지만, '타자'라는 인칭적 장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다른 한편, 들뢰즈-가타리에게 무의식이란 나나 '타자' 등의 인칭에 의해서는 결코 규정되지 않는 '특이성들'의 장이며, 그것은 '비인칭적인 초월론적 장'을 의미한다. (94)
우리는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초월론적 장을 규정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이것에 대응하는 경험론적인 장과 닮지 않았으며 미분화된 심층과 혼동되지도 않는다. 이 장은 의식의 장으로 규정할 수 없다. 사르트르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칭의 형식과 개체화의 관점을 기피하면서 의식을 환경으로서 보존할 수는 없다. 의식은 통일화의 종합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며, 하지만 '나'의 형식도 '자아'의 관점도 없다면 의식의 통일화의 종합도 없다. 반대로, 개체적이지도 않고 비인칭적이지도 않은 것, 그것은 특이성들의 방출이다. 그런 방출은 무의식의 표면에서 일어나며, 노마드적 배분에 의한 자기통일화에 내재하는 동적 원리를 향유한다. [의미의 논리 : 193~194 / LS : 124]
경제론적 주체의 이 [욕망의 절대적] 생산성이야말로 권력에 대한 저항을 이론화할 길을 연다. 그때 저항을 가능케 하는 것은 주체의 능동성이 아니라 탈중심화된 주체에서의 비인칭적 역량의 능동성이며, 그 귀결로서의 초월론적 장의 다양성, 달리 말하면 '다른 것으로의 생성변화'[타자-되기]이다. (96)
■ 참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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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들뢰즈, 라캉, 푸코, 알튀세르에서는 person과 계급과 같은 인칭적 단위를 문제로 삼는다. 한편 들뢰즈는 사람이 가진 욕망이 아니라, 비인칭적인, 욕망 그 자체를 문제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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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양립 불가능한(선언적disjucntive) 욕망의 흐름과 비슷하며, 흐름이란 것은 즉 해체적인 것이다. 그러나 양자가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고 그렇게 생각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계급 등을 해체하다가 돈으로 다 환원시키므로 문제적인 것이다. 다른 건 다 해체가 되어도 돈만큼은 해체되지 않는 상황으로 가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완전한 해방을 의미할 수 없다.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의 분열증적 계기를 극대화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Deleuz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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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베르그송의 시간 개념과 긴밀히 연관된 들뢰즈 수업 (2015-1)
02. 전통 철학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에 관련한 수업 (2015-2)
03. 『안티오이디푸스』 저서에 관련하여 2차 텍스트를 사용한 수업 (20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