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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푸코와 관련하여 아래 텍스트를 읽으며 진행된 2015년 2학기 수업의 강의록이다.)
사토 요시유키, 『권력과 저항』, 1장/ 장소론I, 3장/장소론II, 또는 이질성의 사유
“구조주의 이전의 권력 이론은 대체로 '억압가설'에 기초했다. 여기서 권력은 국가의 억압장치와 동일시되는데, 이것은 주체가 '본래 지닌 본성/자연'을 소외시키고 억압한다. 다른 한편으로, 구조주의적 권력 이론은 권력의 생산작용에 착목했다. 권력은 사회체에 편재하는 미시적인 '장치'에 의해 담지되며, 그것이 권력에 유순한 주체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33) [# 거시권력과 미시권력의 구분. 억압가설에 기초한 이론은 '나는 아무런 권력이 없어'라고 말할 때와 같이 권력을 누군가 소유하고 있다는 개념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권력의 소유 여부 때문에 생기는 현상들을 다룬다. 그래서 권력이 삶의 다양성을 생산하는 측면을 보지 못했다.] [# 나는 이 두 가지가 그 구도상 권력 이론이 가지는 결함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주체 ! 2016년 벽두가 되어서 깨달은바, 나는 주체에 대해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싶다는 것이다.]
■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성(칸트)
푸코는 칸트적 주체를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라고 부르며, 그것을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인식을 그 자신 속에서 취하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이런 주체는 “앎의 대상이자 인식하는 주체라는 양의적 입장을 가지고 나타난다”. 이것은 인간이 인식의 주체인 동시에 인식해야 할 객체/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36) (37) 칸트는 '자아는 이중적 존재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그 이중성이란 자아가 '반성'과 '파악', '자발성'과 '수용성'이라는 성질을 동시에 취한다는 구조를 가리킨다. 이 성질은 각각 '사유주체로서의 자아'와 '내적 감각의 대상으로서의 자아'에 상당한다. 『순수이성비판』에 따르면 자아는 외적 사물을 우선 직관으로서 받아들이며(수용성), 자신의 지성[오성]을 사용해 직관으로부터 개념을 만들어낸다(자발성). (37) (38) 자아의 '자발성'은 자아의 '수용성'과 대립되는 '순수 통각'으로서 정의된다. … “나는 생각한다”라는 표상은 자기의식이며 자발성의 작용으로서, 직관에서의 다양한 표상은 이와 같은 자기의식에 의해서야 비로소 통일성을 획득한다.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표상을 '순수통각'이라 부르며, 다양한 직관을 결합하는 이 '순수통각'의 작용을 '자기의식의 초월론적 통일'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므로 직관에서의 다양한 표상(경험적)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표상(초월론적)에 의해 기초지어진다. …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초월론적 인식이란 “우리의 인식방식”에 관한 인식이며, 자아 자체를 반성적으로 재인하는 것이다. (38)
이런 이중조작에 의해 … 자아는 자신 내부에 머무른 채 물자체를 재인할 수 있다. … 칸트적 주체는 초월론적 시선에 의해 자신의 외부를 내부화하는 주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그렇다면 푸코는 이런 칸트적 이중체의 이론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인간의 유한성'과 이것이 초래한 '한계'라는 칸트적 문제에 관해 언급한다. (39) (40) 주의해야 할 것은 푸코가 하이데거적 테제에 의거하면서도 결국 하이데거-칸트적 전략을 전면적으로 파탄시킨다는 점이다. (40) (42)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유한하며 결여의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품고 있는 '결여/필요'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로부터 자신의 행위의 '가능', '당위', '허용'에 관한 물음이 정당화된다. 전능한 존재자는 그런 물음을 제기할 필요도, 그럴 가능성도 없다. (42) [# 교수님 – 후설/하이데거는 칸트적 유한성 안에서만 생각하겠다는 이론이다.] (43) 하이데거는 인간 이성의 관심사를 “유한성을 확인하고 유한성 안에서 스스로를 견지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 하이데거는 '인간의 유한성'을 '현존재의 유한성'으로 바꿔 말하며, 이것을 (철학사에서 항상 이미 망각됐던) '존재이해'의 가능성으로서 긍정한다. [#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들, 하이데거 著] … 푸코는 하이데거의 칸트 독해에 의거하면서도 하이데거에 맞서 칸트적 '유한성'을 비판한다. (43)
푸코의 박사 부논문 : (45) “그것[세계]은 모든 것의 개시 속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전체의 굴곡 속에서 현전한다.” 이리하여 세계는 인간의 사유 속에 주름진, 경험적 심급과 초월론적 심급 사이의 주름에 현전한다. 이 '굴곡' 또는 주름의 구조가 칸트의 '인간학적' 물음을 정초하는 것이라면, 칸트적 '인간학'의 구조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세계의 외부성을 '인간의 사유'라는 내부성으로 재현전화하고 그 내부에 유폐하는 것. (45) [# 교수님 – 먼저 주름이라는 것은, 경험적 자아를 초월론적 자아가 접으면서 생기는 것으로, 이 주름 속에 세계가 들어간다. 칸트 식대로 가면 세계는 인간의 주체 안에 폐쇄되어 있다. 이 주체는 경험적-초월론적 구조 안에서 판단 가능한 것만 받아들인다. 따라서 외부를 모른다. 외부에 위치하는 모든 권력 관계를 부인하면 배제/소외의 원리가 작동한다. 주체에게 있어서 다른 것(타자)는 억압되고, 나는 동일자만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근대철학을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푸코가 '인간학'이라고 부른 것은 주체의 이런 폐색 구조이다. … 그런 [폐색 구조의] 사유야말로 주체에 있어서의 외부성을 억압하는 것이다. (46) “사실상 문제가 되는 것은 … 자연, 교환, 담론을 지닌 인간을 자기 자신의 유한성의 기초로서 평가하려고 노력하는 경험적-비판적 이중성이다. 이 '주름'Pli에 있어서 초월론적 기능은 그 강압적인 그물로 경험성의 내적 공간과 회색의 공간을 완전히 뒤덮어버린다.[말과 사물, 467 ; 원본, 352] (47) 경험적인 것에 대한 초월론적 시선의 효과에 의해서 주체는 자신에게 있어서의 '다른 것'('경험성의 비활성 및 회색의 공간')을 억압한다. 그것은 사유에 있어서의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운동이다. (47) [여기에 대해] (48) 푸코가 취하는 전략은 외부에 의한 내부의 탈구축, 즉 칸트의 니체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48)
■ avec 니체
푸코는 「La vérité et les formes juridiques」에서 니체적 '바깥의 사유'에 대해 자세히 말한다. (49) 단적으로, 그 가능성은 인식의 문제를 실천과 역사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것에 있다. … '바깥의 사유'란 역사성이라는 외부에 의해 '인식'의 근거를 묻고자 하는 사유에 다름아니다. (49) [# 교수님 – 칸트는 우리 인식의 근거를 주체의 내부적 형식에서 찾는 반면 푸코는 역사에서 찾는다. 이는 니체의 '인식은 인식해야 할 사물의 위반이다'라고 하는, 인식대상과 인식 사이의 대응에서 기반한 인식이 아니라, 인식은 대상에 가하는 폭력이라는 사유에 영향받은 것이다.] (49~50) 푸코는 우선 니체가 사용하는 '발명'이라는 말의 의미에 주목하고, 이것이 '기원'이라는 말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종교의 '기원'에 관해 말하는데, 종교란 '기원'을 갖지 않으며 오히려 종교가들의 '발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또한 『도덕의 계보』에서는 '이상'이란 여러 가지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지적한다. 이로부터 푸코는 인식이란 발명된 것이며 형이상학적 기원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49~50) 인식과 인식 대상 사이에 어떤 유사성도 없기 때문에, 인식이란 “인식해야 할 사물의 위반”이다. (50) 인식은 항상 인식해야 할 사물에 대한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50)
니체 – [즐거운 학문, 301] :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조롱하는 것도, 탄식하는 것도, 또한 저주하는 것도 아니며, 이해하는 것 !”이라고 스피노자는 그답게 단순하고 숭고한 방식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이 '이해하다'라는 것은, 사실상 앞의 세 가지가 단숨에 우리에게 느껴지게 되는 형식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 조롱하다, 탄식하다, 저주하다라는 의지인 상이하고 모순적인 충동들의 결과가 아닐까 ? 하나의 인식 행위가 가능해지기 전에, 이런 충동들 각각이 대상이나 사건에 관해 일면적인 견해를 선행적으로 제시해야만 한다. 그런 뒤에 그 부분성들 사이에 갈등이 산출되며, 이로부터 이따금 중간상태, 진정상태, 세 충동 사이의 상호 용인, 세 충동 사이의 일종의 공평성과 계약이 산출된다. 왜냐하면 공평성과 계약 덕분에 이 세 충동들은 자신의 실존을 주장할 수 있고, 서로 권리를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긴 과정의 최후의 화해의 광경과 최후의 결산만을 의식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해하다'라는 사실이 충동들에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어떤 것을 구성한다고 생각해버린다. 그것이 충동들 상호간의 어떤 억제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교수님 – 이전에는 인식이란 몸이 가진 것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이었다. 그래서 정신은 순수했다. 그러나 니체로부터 인식은 신체의 영향을 받는 것, 충동들간의 상호 억제의 결과물, 불순한 것이 된다.] 니체에게 있어서 인식이란 대상과의 동일화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을 지배하고 파괴하는 것이며, 칸트가 꿈꿨듯이 “즉자적 현실의 인식 가능성”이 아니라 충동들 사이의 투쟁이다.
푸코는 인식에 대한 후자의 입장을 사회적 장들에서의 힘들 사이의 투쟁의 효과로 재독해한다. (53) 푸코에게 인식이란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생겨나는 '역사적 결과'이며, '하나의 사건'이다. (53) (54) 주체의 경험적 심급 속에 “본능의 메커니즘, 욕망의 놀이, 신체의 작동과 의지의 작동 사이의 대립”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때 경험적 심급은 여럿이다. 경험적 심급의 다양성과 초월론적 심급의 단수성 사이의 간극에 기초해 푸코는 주체의 통일성의 해체를 선포한다. (54) (54~55) 푸코는 자아의 경험적 심급에서의 힘들 사이의 투쟁을 사회관계에서의 권력들 사이의 투쟁으로 해석한다. 그때 사회적 장에서의 이 투쟁은 주체의 초월론적 심급을 형성하며, '주체'는 권력 관계의 외부성에 의해 폭록된 “공허한 형식”으로서 모습을 나타낸다. 푸코는 인식을 힘들 사이의 투쟁으로 파악하는 니체적 '앎에의 의지'라는 이론을 가지고 칸트적 주체를 파괴한다. (54~55)
니체는 '끊임없는 투쟁과 대립'을 '제압'과 '저항'의 길항 관계로 묘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푸코의 권력 개념은 분명히 니체적이다. 권력은 결코 어떤 실체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항상 힘관계가 뒤집힐 위험을 품고 있는 전략적 관계의 총체로 정의될 수 있다. (56) 푸코는 『앎의 의지』에서 권력의 니체적 정의로부터 저항의 문제를 제기한다. (58)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 거기에는 저항이 있다”며, 저항은 권력 관계의 “축소[배제]할 수 없는” “또 다른 항”으로 권력관계 속에 기입되어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것은 우리가 권력 '속에' 있고 이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덧붙인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푸코가 제시한 권력 이론의 아포리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58) 칸트적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를 탈구축하였지만 푸코는 주체 내부의 초월론적 심급을 다양체로 정의하지 않는다. (61) 푸코는 주체가 “자기 속에 권력관계를 각인”함으로써, 주체 속에서 자기감시 체계를 기능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즉, 초월론적 자아는 권력의 대행자로서 경험적 자아를 감시하고 규율화한다. (61) 전기 푸코의 아포리아. (62) 『앎의 의지』의 푸코에 따르면 권력관계는 지배와 저항의 다이어그램적 뒤얽힘을 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항 가능성은 경험적 장에 내재적인 방식으로 기입되어 있다. 그러나 『감시와 처벌』에 따르면 규율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초월론적 심급은 주체 안에 자기감시 체계를 기능시키는 권력의 대행자일 수밖에 없다. … 경험적 장의 다양성과 초월론적 심급의 단수성 사이의 이런 간극이야말로, 전기 푸코의 권력 이론(『앎의 의지』까지)에서 저항의 개입을 곤란하게 만든다. (62)
■ 전회
『앎의 의지』 : 고백의 실천은 주체를 '타자'에 복종화시킨다. 그리고 이 메커니즘이야말로 권력에의 복종화를 보증한다. 푸코는 이렇게 정신분석이라는 실천에 있어서의 고백의 실천과 복종화의 구조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성찰에도 불구하고 푸코는 아직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주체 개념을 제시할 수 없었다. (103) (103~104) 권력관계에 의해 관통된 '성의 역사'를 고찰하기 위해 푸코는 '섹슈얼리티의 장치'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섹슈얼리티의 장치는 “앎의 대상으로서의, 또한 권력관계에서 요소로서의 신체의 평가”와 “인구”의 통제를 목적으로 한다. 이런 권력관계의 배치congifuration는 각각 '인간 신체의 해부정치', '인구의 생명정치'에 대응한다. 이런 권력장치들은 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성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고 성에 관한 담론을 막대하게 생산한다. 따라서 성은 억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성은 막대하게 “생산되고” 말해지고 있다. 이 이론은 권력에 의한 성의 억압이라는 프로이트-맑스주의적 이론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앙티-오이디푸스』를 상기시킨다. (103~104) (105) 푸코에게 윤리란 “삶의 양식, 사유와 삶의 양태”를 의미한다. (105)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욕망과 쾌락Désir et plaisir」, 푸코에 대한 들뢰즈의 코멘트 : (106~107) 들뢰즈는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로, 주체의 '진리'를 생산하는 권력장치들에 저항할 수 있는 '진리의 새로운 개념'이란 무엇인가 ? 둘째로, “신체와 그 쾌락들”을 사용함으로써 어떻게 그런 권력장치들에 저항할 수 있는가 ? (106~107)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집요하게 말했던 것은, 규율권력이 신체에 “권력을 투여”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107) (108) 따라서 규율권력이 목표로 하는 것은 '신체'이며,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신체”이다. 규율권력은 개개인의 신체와 그 힘에 대해 작동되며, 그 이용, 순종, 배분, 복종을 확보하는 것이며, 이 총체가 '순종적인 신체'를 구성한다. … 신체에 대한 이런 힘의 투여의 그물망을 푸코는 '권력의 미시 물리학[신체학]'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만일 규율권력이 신체를 목표로 하고 신체에 일종의 힘을 투여를 통해 행사된다고 한다면, 왜 “혼은 신체의 감옥”일까 ? 이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혼,” 즉 정신이 신체를 유폐하고 신체를 관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체에 대한 규율권력의 행사에 정신이 어떻게 개입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만 한다. (108) (111) 상위의 자아(초월론적 자아, 혼)는 하위의 자아(경험적 자아, 신체)를 감시하고 통제한다. 우리는 신체를 통제하는 이 반성적, 규제적 시선을 '초월론적 시선'이라고 부른다. 이미 살펴봤듯이, 이런 이론장치 속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111)
전회의 예고 - 『앎의 의지』 : “바로 성이라는 결정심급에서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섹슈얼리티의 장치에 맞서는 반격의 거점은 욕망으로서의 성이 아니라 신체와 쾌락이어야만 한다”.[167 ; VS 208] 왜 신체와 쾌락인가 ? 들뢰즈의 의식에 대한 정의 : (113) “프로이트처럼 니체도 의식을 외부 세계에 의해 촉발된 자아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니체와 철학, 85 ; Np 44]” 이 정의는 앞서 참조한 프로이트적 문제, 즉 외부 세계의 자극과 그 자극에 대한 신체의 반작용에 의한 자아의 형성이라는 문제와 겹쳐진다. (113) (114) [니체에 의하면] 의식이란 “외부 세계의 작용”, 즉 외적 힘들의 관계와 “우리 쪽에서의 필요한 반작용”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이 힘관계란 바로 우월한 힘들과 열등한 힘들, 달리 말하면 '능동적 힘들'과 '반동적 힘들' 사이의 관계에 다름 아니다. (114)
들뢰즈-니체 <의식> : “의식은 외재성과의 관계에 의해, 현실의 용어로 정의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월성과의 관계에 의해, 가치의 용어로 정의된다. 이 차이는 의식과 무의식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니체에게 의식은 언제나 우월한 자에 대한 열등한 자의 의식인데, 열등한 것은 우월한 것에 종속되거나 '병합된다'. 의식은 결코 자기soi의 의식이 아니라, 자기(이것은 의식적이지 않다)에 대한 자아moi의 의식이다. 그것은 주인의 의식이 아니라 주인에 대한 노예의 의식으로, 주인은 의식적일 필요가 없다”.[Np 44~45 ; 니체와 철학 86~87] “신체의 능동적인 힘들은 바로 신체를 하나의 자기로 만들며, 자기를 우월하고 놀라운 것으로 정의한다. “더 강력한 역량을 가진 존재, 알려지지 않은 현자. 그것이 자기라는 이름을 갖는다. 그는 너의 신체 속에 살며, 너의 신체이다”.[Np 47 ; 니체와 철학 90~91] (117~118) '자아의 의식'은 의식을 벗어난 능동적 힘들을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자기의 의식'으로 생성변화한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내부로 향하고 자기에 대해 폭력을 휘두르는 '나쁜[병든] 양심'을 “자기 자신과만 닮은 것”, “자신의 고유하고 독립적이며 지속적인 의지를 지닌 인간”, 즉 “약속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변용하는 것이다. (117~118) 그리고 푸코는 전회 이후 바로 '자아'와는 구별되는 '자기'의 문제계와 신체, 쾌락의 활용에 관해 논하게 됐을 것이다.
『쾌락의 활용』, 『자기에의 배려』 : 주체 자신에 의한 자기의 생성. 주체화. (120) [여기서 다뤄지는] 윤리에서는 공동체적 도덕의 규범성이 아니라 특이성이라는 위상이 문제가 된다. (120) (121) 개인이 스스로를 윤리적 주체로 구성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 규칙을 보편화함으로써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자신의 행동을 개별화하고 변조하며, 그것이 부여하는 합리적이고 성찰적인 구조에 의해서 그 행위에 단독적인 광채를 부여할 수 있는 태도와 탐구에 의해서인 것이다. (121) (122) 규율권력이 일반성으로서의 규범을 개체에 부과하는 장치라고 한다면, 푸코가 윤리적 주체화에 의해 발견하려고 했던 것은 일반성으로서의 규범으로 환원될 수 없는 주체의 특이성이다. 그런 '특이성'으로서의 주체, 즉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에 있어서 저항의 문제가 개입한다. (122)
■ 참고 말씀
□ 에피스테메 : 권력관계에 의해서 어떤 지식을 참이라고 할 때 갖게 되는 '조건'. 변하고 있는 사회와 역사. 따라서 에피스테메에 따라 참-지식이 달라진다는 것은 사회와 역사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피스테메의 기간은 체감할 수 있습니까 ?” 경제적 관계가 바뀔 때, 우리는 사회와 역사가 변함을 체감한다. 따라서 그럴 수 있다. “두 에피스테메끼리 싸울 수 있습니까 ?” 없다. 단지 조건을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다.
□ 에피스테메 vs. 패러다임
□ 권력의 개념을 명확히 할 것. 푸코가 지속적으로 문제시하는 권력은 미시권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