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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in Badiou 2015 수업

 

『현대 프랑스 철학사』, 한국프랑스철학회 엮음, 파주 : 창비, 2015

5부/ 후기구조주의 이후의 프랑스 철학 (서용순)

 

  • (425) 바디우와 랑시에르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전통에서] 누군가에 의해서는 폐기되고, 누군가에 의해서는 사유될 수 없었던 주체 개념을 재정립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철학적 과제로 제시한다. (425)

  • (425) 바디우에게 진리가 생산되는 영역은 넷, 즉 과학, 예술, 정치, 사랑이다. 철학은 진리를 생산하지 않는다. 바디우에 따르면 철학은 이렇게 네 영역에서 생산된 진리들의 의미효과를 밝히면서 그것들을 긍정하고 옹호하는 작업이다. 생산된 진리들에 그 원리와 토대를 제공해 그것들을 설명하는 작업은 아니다. 이 점에서 철학은 '과학의 과학'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개입'이라고 할 수 있다.

  • ...랑시에르는 자신의 철학을 '이론'이 아니라 '개입'으로 이해한다. 요컨대 그의 철학은 우리가 어떤 것을 사유하기 위해 출발해야 할 어떤 원리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철학은 문제적 상황, 특히 특정한 담론적 상황에 대한 개입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이 개입은 두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특정한 담론이 은폐하고 있으나 함축하고 있는 정치적인 성격을 가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쟁적'이고, 둘째, 그 가시화의 방식이 논리적 담론의 구성이 아니라 역사적 무대의 재구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다.

  • 이러한 논쟁적이고 역사적인 작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으로 등장하는 것이 '평등'이다. ...평등은 정치의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 ...그가 현대 철학의 지배적인 경향으로 파악하고 있는 '윤리적 전회'와 분리의 선을 그을 수 있게 해주었다. [#무지한 스승] (426)

 

17장/ 알랭 바디우

  • (430) [『존재와 사건』]에서 그는 현대 집합론에 근거하여 독창적인 수학적 존재론을 정립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유로 나아간다. (430)

  • (430) 바디우의 진리철학은 철저하게 시대의 결과물이다. 그가 자신의 주저인 『존재와 사건』을 집필하던 1980년대 당시 프랑스의 지적 분위기는 회의주의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다. 합리적 이성에 대한 회의와 진리 범주의 포기, 전통적인 주체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철학의 불가능성을 논하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였다. 진리는 폭압적이었다. 보편적 진리는 자신을 보편으로 삼음으로써 모든 비-진리를 억압했고 진리의 타자를 배제했다. 철학은 진리를 절대화하여 텍스트의 의미를 고정시킴으로써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닫아버렸고, 결국 진리의 전제로 나아갔다. 이러한 비판은 상당히 설득력을 갖는 것이었다. 결국 하이데거에서 출발한 현대성에 대한 비판, 그리고 철학사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마침내 완전히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바디우의 철학은 이런 맥락에 대한 개입으로 등장한다. 종말을 맞이한 것처럼 보였던 철학을 다시 일으키는 일을 기꺼이 떠맡은 철학자가 바로 바디우인 것이다. (430)

  • (431) 그러나 바디우는 그러한 비판을 통해 철학을 포기하거나, 진리를 부인하고 주체를 지워버리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431)

  • (432) [바디우]는 존재의 문제를 사유하면서 존재를 일자가 아닌 다수로 파악하는 한편, 철학이 더이상 진리를 욕망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에 마주하여 진리를 복권시키면서, 철학의 존재근거를 방어한다. 주체에 대해서는 실체로서의 주체라는 전통적 개념을 부정하는 동시에 주체를 진리의 효과로서 사유한다. (432)

  • (433) 하나로-셈하기(compte-pour-un)라는 구조의 작용은 다수를 일자로 셈할 뿐, 다수로서의 존재를 일자로 환원시킬 수 없다. 좀더 정확히 말해 존재 자체는 일자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로서의 존재를 셈함으로써 사후적으로 일자로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존재는 다수이지만, 이 다수는 구조화된 상황 속에서 항상 규정된 일자로 현시된다. ...결국 상황을 구성하는 다수는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다수가 아니라 이미 상황의 통일성 속에 포섭된 다수, 특정한 셈을 통해 규정된 다수이다. ...바디우의 존재론은 일자화된(일관적인) 존재보다 있는 그대로의 (비일관적인) 존재, 순수 다수로서의 존재를 향한다. (433)

  • (434) 모든 질적 규정성을 벗어난 존재를 설명하고 규정하는 문제는 분명히 언어라는 한계 속에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디우가 철학의 무대에 다시 등장시키는 것이 바로 수학이다. ...언어의 형식으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의 비일관성은 집합론에 의해 정확하게 표현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집합이다. '공집합이 존재한다'는 공리적 단언은 존재의 출발점을 단언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 알다시피 이 집합은 모든 집합의 부분으로서 모든 상황에 포함된 것이지만, 결코 하나로 셈해지지 않는 집합이다. 그것은 모든 집합의 부분집합으로 존재하지만, 원소를 하나로 셈하는 구조화 작용에서 누락된다. 공집합은 하나로-셈하기라는 현시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비일관적 다수성의 이름인 것이다. (434)

  • (435) 상황은 통일성의 유지를 위해 '일자'의 구조화를 받아들이고 그 구조화를 통하여 일자로 간주된다. 이것이 바로 작용으로서의 하나로-셈하기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화는 상황을 충분히 일관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모든 집합은 공집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의 구조화 작용인 하나로-셈하기는 단지 집합의 원소들을 셈하기 때문에 원소가 아닌 공집합은 구조화에서 누락된다. 이러한 공백(공집합)의 위협은 상황의 부분집합을 셈하는 재구조화를 요구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공백을 고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집합의 셈으로 이루어진 집합(멱집합)은 '상황 상태'(l'état de la situation)를 만든다. 이때 비로소 공집합은 불안정하게나마 셈의 작용 속에 포섭된다. ...모든 존재는 상황 속에 현시되는 동시에 상황상태에 의해 재현된다. 이는 존재의 법칙이다. 이러한 이중의 구조화가 존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435)

  • (436) 이러한 현시와 재현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바디우는 현시(présentation)와 재현 (représentation)이라는 이중의 관계망을 통해 존재를 세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정상성, 특이성, 돌출이 그 유형들이다. 상황에 현시되지만 상황상태에 의해 상황에 재현되지 않는 항목은 '독특성'(singularité)의 항목이다. 이것은 사건에 관계하는 존재의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상황에 현시되면서 동시에 상황상태에 의해 상황에 재현되는 항목은 '정상성'(normalité)의 항목이다. 이러한 다수는 일반적인 다수로, 특히 자연적인 다수는 모두 정상성에 속한다. 상황에 현시되지는 않지만 상황상태에 의해 상황에 재현되는 항목을 '돌출'(excroissance)의 항목이라고 부른다. 돌출에 해당하는 것은 국가이다. 실제로 국가는 현시하지 않는다. 국가는 특정한 다수의 현시로 환원되지 않고 단지 재현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는 돌출에 해당한다. [#교수님 - 상황만이 존재는 아니다. 사건, 명명불가능한 것이 항상 존재 안에 있다.]

  • '사건'은 독특한 항목들로만 이루어진 다수인 '사건의 자리'에서만 일어난다. 이 사건의 자리를 이루고 있는 원소들은 현시하지만 재현되지는 않기 때문에 상황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즉 그 원소들은 공집합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건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돌발'한다. 어떤 다수의 모든 항목들이 상황에는 현시하지만 상황상태에 의해 재현되지 못하고 없는 것으로 간주될 때, 우리는 이러한 다수를 사건의 자리라고 칭한다. 다시 말해 이 다수의 모든 항목들은 공백의 구조를 갖는 것이다. 사건은 그런 점에서 비일관적 다수인 '공백의 출현'이다. 이러한 사태는 상황을 혼란 속으로 빠뜨린다. 공백의 출현이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그래서 그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사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436)

  • (437) 사건은 사건의 자리의 원소들과 사건 자신으로 이루어지는 다수이다. 집합론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사건은 ex = {x / x ∈ X, ex}라고 표기될 수 있다. ...바디우가 '사건의 수학소'라고 지칭하는 이 형식은 사건이 존재의 질서 바깥에 있음을 말해준다. 존재의 질서를 표시하는 집합론의 기본 원칙인 자기귀속의 금지를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이 사건 자신을 포함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사건은 사건의 자리에 속하는 여러 원소들(마르세유 의용군, 쌍 뀔로뜨, 자꼬뱅, 삼부회 등등)과 더불어 '대혁명'이라는 항목, 즉 사건 자신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사건의 자기귀속은 사건을 결정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437)

  • (437~438) 사건이 일어난 그 상황에 사건 자신이 속해 있는가는 결정불가능한 문제이다. 사건의 수학소가 그 사실을 잘 말해준다. ex = {x / x ∈ X, ex} 라고 했을 때 사건의 자리 X는 공백의 가장자리에 있다. 그것은 상황 안에 현시한다. 그러나 그 원소들인 x는 상황 속에서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있는 것은 오로지 사건의 자리 X뿐이다. 일단 사건을 구성하는 한 축인 x는 상황 속에 없다. 그렇게 x를 제외했을 때 남는 것은 ex밖에 없다. 다시 말해, 남는 것은 사건 자신뿐이다. 결국 우리는 사건의 존재를 검증하기 위해 다시 사건 자신을 만나는 난관에 부딪힌다. 사건의 존재 확인은 순환적으로 다시 사건을 부르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사건이 상황에 속한다고도, 속하지 않는다고도 단언할 수 없다. 검증은 순환 속에 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과 상황의 관계는 결정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437~438)

  • (438) 이러한 사건의 결정불가능성은 사건의 존재를 결단하는 '개입'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킨다. ...결정 불가능한 사건은 상황이 행하는 모든 셈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사건을 판단하고 사유하기 위해서는 상황의 법칙에 의존하지 않는 외적인 작용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사건의 결정불가능성이라는 난점은 이러한 '개입'으로만 해결 가능하다. 개입이란 … 사건이 상황에 속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결정, 즉 상황의 법칙에 부합하지 않는 사건의 존재를 상황에 속하는 것으로 결정하는 것은 불법적인 선택이다. 모든 합법성은 상황의 구조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도박으로서의 개입은 합법적인 선택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러나 사건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이 선택은 필수적이다. (438)

  • (439) 사건의 자리의 항목들이 공백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면, 그 원소들에 관계하는 그 이름 역시 상황의 셈에서 벗어나는 공백으로부터 나온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사건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1871년 프랑스 빠리 꼬뮌의 예를 들어보자. 빠리의 노동자들은 보불전쟁의 패배라는 상황 속에서 봉기하였다. 그들의 봉기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 봉기였고, 그것은 일찍이 알려진 적이 없는 것이었다. 당시 노동자 대중은 그저 하나의 불명확한 집단으로만 존재했을 뿐 그 개개인들은 정치적으로 전혀 가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봉기를 '빠리 꼬뮌'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이 이름은 알려질 수 없는 것의 이름이었다. '빠리 꼬뮌'이란 상황의 법칙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439)

  • (439) 개입 이후에 오는 것이 바로 '충실성'(fidélité)이다. 이 충실성은 최초의 개입에 이어지는 연속적인 개입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개입을 통하여 한 상황 속에서 사건의 이름이 통용된 이후, 이 사건의 이름과 상황 속의 다수들이 접속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식별하는 절차가 바로 충실성인 것이다. 결국 충실성이란 전체 다수 속에서 사건에 의존하는 다수를 분리하는 기제로서, 개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439)

  • (440) 충실성은 최초 사건의 명명에서 출발하는 실천이다. 그래서 충실성은 최초의 사건에 충실한 실천으로밖에는 드러날 수 없다. 사건과 그에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충실성은 최초 사건에 대한 충실성이고, 사라지는 사건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방식이다. 진리는 바로 이러한 충실성의 과정 속에서 구성될 것이다. (440)

  • (440) 탐색(enquête)은 기본적으로 유한하다. 그것은 특정한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탐색이고, 상황의 구체적인 다수들을 하나하나 검토함으로써 충실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유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탐색은 충실성 과정의 주어진 상태인 것이다. 반면에 충실성은 탐색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요구한다. 유한한 탐색의 연속은 충실성이 끝없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함축한다. 충실성이란 결국 탐색을 계속하는 무한한 과정이다. (440)

  • (440~441) 탐색을 통해 사건에 의존하는 것으로 파악된 상황의 원소들은 새로운 부분집합, 다시 말해 사건을 통해 성립한 새로운 부분집합을 구성하고, 이 새로운 부분집합이 바로 진리의 존재를 이루어낸다. 다시 말해, 진리는 상황에 새롭게 등장한 무한한 부분집합들이며, 그 부분집합은 사건에 의존하는 다수의 항목들로 이루어진 것과 다름없다. (440~441)

  • (441) 바디우는 이러한 [탐색을 통해 분리된 사건에 의존하는 다수가 셈해진 새로운] 부분집합이 상황에서 식별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상황의 부분집합을 하나로 셈하는 상태/국가의 셈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유적인(générique)' 부분, 비일관적인 부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 부분집합을 기다리는 상황의 언어는 부정의 언어, 즉 불법, 폭도, 사태, 추문, 일탈 등이다. 그것은 상황을 관리하는 상황상태 또는 국가가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상황의 입장에서 진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로-셈하기의 작용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441)

  • (441~442) 중요한 것은 이 유적인 부분집합이 영원히 확장 가능한 무한한 부분집합이라는 점이다. 진리(참, le vrai)는 무한하다는 점에서 지식(옳음, le véridique)과 구분된다. 진리는 지속적으로 분류의 가능성을 피해간다. 지식의 규정과 제한을 무너뜨리는 진리, 무한히 열려 있는 것으로서의 진리는 탐색을 통해 새로운 항목의 추가를 항상 허용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리는 유한한 것이 되고, 유한한 것은 지식의 분류와 식별 체계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441~442)

  • (442) 이 [유적인 부분]집합은 그 자체로 완결적이지 않기 때문에, 상황의 모든 부분집합을 규정하는 식별체계에서 벗어나 있고, 결과적으로 기존 상황의 모든 부분집합의 원소들을 자신의 원소로 받아들일 수 있다. 결국 어떠한 동일성(identité)도 이 집합을 정의할 수 없고, 오히려 이 집합 속에서는 모든 동일성이 무효화된다. (442)

  • (442) 진리가 지식을 완전히 대체하거나, 진리가 관철되지 않고 그대로 소진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진리에 충실한 실천들이 존재하는 한, 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진리가 그대로 남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거의 법칙성의 체계인 지식을 완전히 대체하는 일은 사실상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지식의 완전한 대체를 혁명적인 변화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은 과연 모든 것을 바꾸는가 ? 과거의 지식체계 전체가 진리에 의해 틀린 것으로 간주되어 옳음의 체계 밖으로 추방되는 일은 사실상 없다. (442)

  • (442~443) 유적인 부분집합을 통해 확장된 상황, 즉 변화된 새로운 상황은 항상 이전의 다수가 유지되는 가운데 진리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변화는 부분적이다. 그렇게, 진리는 상황의 일부를 바꾸어놓을 뿐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 자체로 커다란 변화이다. (442~443)

  • (443) 진리의 존재는 지식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실천이다. 우리가 앞서 언급한 개입과 탐색은 그러한 주체적 실천의 영역들이다. (443)

  • (444) 강제[(foçage)]란 탐색의 실천을 통해 이어지는 충실성의 절차를 통해 진리가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항목'으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귀속과 포함의 일치는 진리가 마침내 온전히 상황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강제의 실천을 통해 진리를 위한 장소가 상황 속에 구축되는 것이다. (444)

  • (444~445) 바디우는 이것을 전미래 시제로 설명한다. 지식이 진리를 옳은 것으로 인정하는 도래할 상황에서 보면, 상황의 진리는 (그 이전에 이미) 원소로 현시되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진리가 언제 상황에 관철될지 미리 알 수 없다. 그것은 항상 소급적으로만, 미래에서 바라본 과거의 어느 불특정한 시점(불확정의 미래)에서 관철되었다고 확인될 뿐이다. 결국 강제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주체적 실천이다. (444~445)

  • (445) 바디우의 주체는 사건을 통해 성립하는 충실성의 주체이다. 주체는 사건에 충실하고, 진리를 이루는 유적인 집합들을 탐색하며, 진리를 상황에 강제하는 모든 주체적 실천을 이어간다. ...바디우에 따르면 진리는 무한하지만, 주체는 유한하다. 주체는 상황 안에 있기 때문에 그가 진리에 관계한다고 해도, 그는 지식으로 한정된 상황 속에서만 움직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상황을 확장된 상황으로 강제할 수단을 갖지 않는다. 그가 만나는 것은 상황 속에서 현시된 항목들 또는 다수이지, 상황에 현시되지 않는 부분으로서의 진리가 아니다. 주체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주체는 다만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뿐이다. (445)

  • (445~446) 이러한 확신은 증명되지 않는 확신, 객관적인 어떤 대상에도 근거하지 않는 확신이다. ...그렇게 주체는 객관적인 대상에 기대지 않는 '순-주체적 주체'이다. [#교수님 – 철학에서 주체가 주장되던 시기 → 주체해체 시기 → 바디우에 이르러 주체는 대상이 없는 주체가 된다. 이는 전통적 주체가 타자를 대상으로 정립하여 의식이 생겨난 이후의 주체라는 점과 대비된다.] (445~446)

  • (446) 주체는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다. 진리에 충실한 주체가 없다면 진리란 없다. 만약 바디우의 진리가 갖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주체의 충실성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힘일 것이다. 충실성 없이 진리란 있을 수 없으며, 주체의 충실한 실천 없이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한한 부분으로서의 진리의 구성은 그것을 근사적으로 상황에 부과하는 충실성의 무한한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진리는 실천을 통해 자신을 지탱할 주체를 반드시 요구한다. 사건을 통해서만 성립한다는 점에서 이 주체는 미리 가정되지 않은 주체, 존재와 등치되는 주체가 아닌 출현하는 주체, 후-사건적인 주체[# ↔ 칸트]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는 어쩌면 충실성 그 자체일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해 주체는 충실성의 작용이며, 사건이 일어난 상황 속에서 충실성을 전개시키는 일련의 활동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바디우는 '주체'를 “사건과 충실성의 절차 사이의 연결 과정 자체”라고 부른다. 따라서 개념적인 수준에서 파악된 주체는 '충실성의 자기전개'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바디우의 주체는 주체적 실천의 작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446)

  • (450) 철저히 사건에 의존하는 주체는 존재와 등치되지 않고, 대상과 연결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주체 개념과 확연히 다르다. (450)

 

[# 이하 교수님 설명]

■ '다수로서의 존재'나 '사건'이라는 개념은 니체, 하이데거로부터 시작해서 들뢰즈와 바디우의 『들뢰즈-존재의 함성』 저(著)로까지 이어진다. 들뢰즈와 바디우를 비교해볼 수 있다. 들뢰즈는 미분적이고 바디우는 집합론적이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적이자 안티플라톤적이고 바디우는 플라톤적이다. 이는 바디우가 집합을 존재론을 체계잡는 방편으로 내세울 때, 그 집합의 원소란 것이 원소 하나 하나마다 규정되고 완결되는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반면 라이프니츠 계통의 들뢰즈 쪽에서는 무한분할을 존재론의 원리로 삼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들뢰즈로부터는 '전체와 집합은 다르다'는 명제를 이끌어낼 수 있으며, 이는 '잠재성'으로서의 다수 개념과 이어지는 바이다. 반면 바디우는 '현실성'으로서의 다수 개념을 성립시킬 수밖에 없다.

■ 들뢰즈와 바디우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virtual과 possible의 구분이 중요하다. virtual에는 잠재성, 공집합, 사건ex라는 개념들이 포함되며 여기에 있는 것, 그러나 규정할 수 없는 것을 지시한다. 한편 possible은 언젠가(는) 여기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을 지시한다. 즉 fantasy이다. 후자의 개념군으로부터 들뢰즈와 바디우의 개념군을 변별해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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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홈페이지에 존재하는 모든 바디우 관련 목록

 

01. 2015년 2학기 바디우 수업 : 진리와 주체

 

02. 2015년 2학기 바디우 수업 :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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