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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학기 알튀세르 수업 정리
이 수업의 기초 텍스트 :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루크 페레터, 심세광, 앨피발행 : 2014년 07월 28일/
알튀세르는 카를 맑스의 작업에서 일어난 엄청난 이론적 혁명이 모호해졌거나 애초부터 결코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고 주장했고, 그 이론적 혁명을 이해하는 데에 자신의 연구를 바쳤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작업, 즉 그가 맑스 해석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한 작업을 이해하려면 맑스 사유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38) 맑스의 초기 작업에 등장하는 휴머니즘 문제에 알튀세르는 개입을 시작한다.
[청년헤겔학파를 비판하면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말하는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실상은 오히려 생산력과 생산관계이다. (41) 여기서 생산'력'이라 함은 생산의 재료와 도구이다. 그리고 생산'관계'라 함은 이 재료와 도구들로 자기 삶을 생산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조직되는 방식이다. (41) (41~42)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은 관념론적 사유, 다시 말해 인간 삶을 지배하는 근본적 실제가 관념이나 영혼 혹은 감지 불가능한 실제, 이를테면 영혼이나 정신, 마음 혹은 인격이라고 믿는 모든 형식을 추방하고자 한다. 유물론자들은 이것이, 각각의 모든 인간 존재들에게는 어떤 선천적 특성이 있다고 주장하려는, 이를테면 존엄성, 권리, 자유, 인간성, 책임 등이 있다고 주장하려는 교활하며 착취적인 미신이라 여긴다. (41~42) (43) 에드워드 7세 시대의 귀족과 그 하인들이 공통의 인간성을, 즉 두 그룹 모두 이 인간성에 고유한 자유와 존엄성 그리고 권리를 공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유물론자들은 주장한다. (43)
■ 상-하부구조
주어진 사회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총합이 그 사회의 '토대' 혹은 '하부구조', 즉 그 사회의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실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경제적 토대로부터 '상부구조'가 발전하는데 이 상부구조는 이 사회 내에서의 삶이 갖는 모든 각각의 양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로 상부구조는 헌법, 통치 형식, 입법 체계, 사법제도, 국방 체계 등과 같은 정치적이고 법률적인 제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제도들에 따라 사회가 구조화된다. 둘째로 상부구조는 모든 종류의 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법률 이론과 정치 이론들, 철학, 종교, 예술, 문학, 그리고 모든 종류의 문화적 산물을 통해 사회 구성언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그것을 타자에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 모든 종류의 의식은 맑스와 엥겔스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테면 철학과 종교 혹은 문학도 그 자체로 존재하거나 발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 등은 그것들이 발생하는 그 사회의 경제적 토대,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좌우되는 것이다. (44)
한 사회의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산물은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 양상들, 다시 말해서 여러 형태의 의식의 양상들이다. 이러한 여러 형태의 의식 내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그들의 삶을, 그 사회의 생산관계들이 결정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표현한다. 이것이 문학 연구와 문화 연구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맑스주의의 주된 주장이다. ...그들은 한 사회의 지적이고 문화적인 산물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는, 그 산물이 해당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되는 '생산방식' 혹은 생산력 및 생산관계의 총합이라는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고 쓴다. (45) '이리하여 도덕, 종교, 형이상학과 그 밖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것들에 대응하는 여러 가지 의식 형태들은 더 이상 자립적인 모습을 가질 수가 없다.'(GI:36-37)
어느 시대에나 지배적 사상은 곧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즉, 사회의 물질적인 힘을 지배하는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정신적인 힘도 지배한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지배하고 있는 계급이 결국 정신적 생산수단도 관리하며, 그리하여 정신적인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대체적으로 그 지배 사상에 종속된다. 지배적인 사상이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들의 관념적 표현, 사상으로서 파악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 그 자체일 뿐이며, 따라서 어느 한 계급을 지배계급으로 만들어주는 관계들의 표현이고, 따라서 그 계급의 지배 사상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GI:59) 그러므로 맑스와 엥겔스의 관점에서 이데올로기는 그것의 한 부분이기도 한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산물을 포함하여,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에 기반한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일련의 담론들이다. 즉, 이데올로기는 계급적 이해관계의 담론이다. (49)
“맑스와 엥겔스는 이데올로기적 개념의 예로써 오늘날 공적 담론에서 여전히 공명하고 있는 '자유'를 예로 든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영국의 산업자본주의 하에서 개인적 자유라는 것은 사실 산업자본가들 중에서도 가장 힘 있는 계급의 소유물일 뿐이었다”(49). “부르주아지(자본가계급)들이 귀히 여기는 이 개인적 자유는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신문 기사부터 철학적 작업에 이르기까지) 내에서 선천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으로 표상되지만, 사실 그것은 규제 없이 사고팔 수 있게 해 주는 특수한 자유였으며,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지배는 바로 이 특수한 자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자유 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역할은 바로 그들의 지배수단을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데 있었다” (50).
■ 휴머니즘의 테제들 vs. 구조주의
-휴머니즘 : (57) 맑스 휴머니즘의 특징은 고전적 학문과 르네상스 휴머니즘 특유의 웅변에 이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에 프랑스와 독일에서 발전한 휴머니즘, 즉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치해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신념과 비슷하다. 알튀세르는 휴머니즘을 “자기 세계의 주심에 있는 자”의 이론으로 기술한다. 휴머니즘적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의 삶은 자율적인 인간 이성의 원리에 의해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심급에서 질서화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이러한 방식으로 결정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체제로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한,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서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한, 청년 맑스는 휴머니스트이다. (57)
-구조주의 -> 알튀세르가 휴머니즘[calvez, p. bigo, 에마뉘엘 무니에, 장 라크루아,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을 비판하기 위해 처음으로 해야 했던 일은 초기 저작의 맑스의 휴머니스트적임[ <경제학-철학 수고>의 맑스에게는 자본주의의 핵심이, 마땅히 인간 존재의 소유여야 하는 것들로부터 노동자가 소외된다는 사실이었다 ]을 해석하는 것.
※유럽이 칸트 이래 내면화한 휴머니즘 전통의 개념들 : 이성, 도덕성, 자유, 존엄 (여기서 존엄만은 비판시 문제가 된다. 존엄하다고 해놓고 착취하는 게 위선이라는 문제의식이 구조주의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위에 대항하여 구조주의는...
ⓐ {이성, 도덕성, 자유} = 주체라면 주체의 유형이 하나가 되어 다양성을 상실. 주체라든가, 선험성, 본유관념이라는 개념은 개인의 고유성을 설명해내지 못하는 문제점을 가진다. 제대로 사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식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거나 비도덕적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상태로부터 '계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판받아야 할 엘리트주의다.
ⓑ 우수성과 열등성은 삶의 뼈대를 추려보니 동일하더라. (레비-스트로스)
ⓒ 인간이 본유적으로 합리적으로 태어났다는 입장에 반대. (푸코, 라캉)
ⓓ 휴머니즘적 비평의 전제가 '작가가 작품의 주인이다'라면 구조주의적 비평은 그에 반대. (바트, 『저자의 죽음』)
■ 구조주의(1960)가 알튀세르의 맑스주의에 끼친 영향
① 안티-휴머니즘성 : 구조주의자들은 문화 현상이 개별적 인간 존재의 의식적인 결정에서 비롯된 산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문화 현상은 추상적인 사회 규약의 산물이다. 개인들은 이 규약들에 지배당하는 사회 내 구성원의 자격으로서 이 규약을 이용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문학 텍스트는 문학적 의미의 초개인적 체계에서 비롯된 산물이지 개별적 저자의 창조물이 아니다. 알튀세르 역시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즉, 제대로 이해된 맑스주의에 따르면 사회 그 자체는 관계의 체계로서, 이 체계의 각 요소들은 오로지 동일한 체계 내의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의 문학적 산물(빅토리아 시대의 소설 같은)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회를 포함한 다른 모든 종류의 사회적 활동(빅토리아 사회의 경제, 정치생활, 법제, 교육제도, 결혼 및 가족제도, 식민 지배, 종교제도, 출판 산업 등)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이다. (74~75)
② 한 사회를 관계 내 요소들의 체계로 이해 : 그러나 알튀세르는 주어진 한 체계 내의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분류하고 이 요소들 및 조합 규칙의 '문법'이나 체계에 관심을 갖는 전통적 구조주의와는 의견을 달리한다. 알튀세르는 오로지 맑스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에만 ... 관심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의 혁명적 사회 이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설명은 구조주의의 문화 현상 설명과 공통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즉, 문화 현상이란 개별적 요소들의 체계이며, 그 요소의 의미는 체계 내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75)
■ 문제계Problematics
알튀세르가 보기에, 청년 맑스의 휴머니즘을 맑스가 1845년부터 발전시키기 시작한 이론에 통합하는 것은 오류이다. ...맑스의 말기 사유에 입각하여 그의 청년기 작업을 역사적으로 비판한다고 해서 ''맑스 전체를 상실할 [위험]''에 빠지는 것은 아니라고 알튀세르는 주장한다. (76) (77) 당시 진행되던 청년 맑스의 작업에 관한 모든 작업은 맑스의 초기 작업과 그의 후기 작업을 설득력있게 비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러한 작업에 따르면 <경제학-철학 수고>의 한 요소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처럼 맑스에게 영향을 준 당대의 사상가들에게서 나오고, 또 다른 요소는 맑스의 후기 작업에서도 확인되다시피 진정한 맑스의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종류의 비교 분석을 거부한다. ...알튀세르의 맑스 해석의 첫 번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즉, 모든 개별 사유 체계는 그 내부에서 사유되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규정하는 내적 정합성을 갖고 있다. (77) 알튀세르는 이러한 내적 정합성을 '문제계'라고 칭한다. (78) 한 저자가 그 안에서 사유하는 문제계는 저자가 제기할 수 있는 질문들을 주재하는, 그러므로 여기에 주어질 수 있는 대답들도 주재하는 개념들의 체계이다. 이에 따라 알튀세르는 문제계를 개별 저자가 제시하는 ''대답들을 주재하는 질문들의 체계''로 규정한다. (78)
맑스 초기 작업의 문제계는 1845년 이래로 맑스의 작업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라는 진정으로 맑스적이라 할 수 있는 문제계라기보다는 분명히 포이어바흐 철학의 휴머니즘적 문제계라고 알튀세르는 주장한다. … [그때] 그가 속해 있던 개념 체계는 포이어바흐의 체계이지 맑스 본인이 1845년에 전개한,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의 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80) 알튀세르에 의하면, 맑스는 1845년에 그가 여태까지 그 속에서 작업하던 휴머니즘적 문제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문제계, 즉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라는 문제계의 용어를 확립했다[인식론적 단절 ; 바슐라르의 패러다임 같은 개념]. 알튀세르는 이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를 과학 = 사회사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생산하는 개념 체계로서 이해한다.
맑스가 헤겔과 더불어 변증법적 방법론이 물구나무를 섰으며, 헤겔이 그것을 되돌려야 했다고 말할 때 의미한 바는 두 가지다. 첫째, 역사는 헤겔이 주장한 것처럼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진보한다. 둘째로, 역사는 헤겔이 믿었던 바처럼 근본적으로 관념의 역사인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물질적 역사이다. ...사적 유물론의 과학을 창시했을 때 맑스는 헤겔을 포함하여 그가 단절한 초기의 이데올로기적 문제계와는 전혀 닮지 않은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 체계를 창시했다는 것이다. (85) (86) 우선, 사적유물론의 문제계는 전적으로 새로운 일련의 용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알튀세르는 주장한다. 초기의 사회적, 경제적 사유가 사회를 각자가 하나의 주체(사람들이 갖는 생각들, 욕망들, 행위들의 근원)로 간주되는 개별적 행위 주체의 총합으로 이해했던 것과는 달리, 맑스는 생산양식을 통해 사회를 사유했다. ...한 사회의 생산양식은 “더욱 심층적이고도 더욱 구체적인 실제”로서, 맑스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사회 구성원의 모든 사유, 욕망,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86)
마찬가지로, 맑스는 처음으로 국가를 사회 계급 개념과 연관시켜 고찰함으로써 국가에 관한 정치적 개념을 전적으로 변형시켰다. 따라서 비록 맑스가 '국가'라는 말을 초기의 정치적 사유로부터 계속 간직해 왔지만, 그는 이 말에 전적으로 새로운 의미, 즉 지배하고 착취하는 계급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 제도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86~87) '국가는 더이상 인간 집단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것'(For Marx : 110).
■ 중층결정
경제적 토대는 이데올로기와 같은 한 사회의 상부구조적 요소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요인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항상 상부구조의 다양한 요소들의 원인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며, 이 요소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심지어 경제적 토대 그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 (87)
[1890년의 서신, 엥겔스 ; SC : 498] 역사 내에서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요소는 실제적 삶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누군가 경제적 요소가 유일한 결정적 요소라고 곡해한다면, 그는 이 명제를 무의미하고 추상적이며 몰지각한 문장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경제적 상황은 토대이다. 하지만 상부구조의 다양한 요소들 또한 역사적 투쟁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이 요소들의 형태를 결정하는 여러 주요 심급들에도 영향을 미친다.
문학작품처럼 한 사회의 상부구조 요소들은 오로지 최종 심급에서 그 사회의 경제적 토대에 의해 그 형태와 내용이 결정된다. 이 요소들은 또한 상부구조의 다른 모든 요소(정치적, 법적 형식, 철학, 종교, 과학, 미디어 등)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문학작품의 경우, 그것은 주어진 사회 내에서 활용 가능한 문학적, 문화적 전통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생산물들은 철학이나 정치학과 같은 다른 상부구조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경제적 토대 그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사회적 생산의 각 심급이 다른 심급들에 미치는 영향은,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경제적 심급으로 환원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상호 결정의 복잡하고도 변증법적인 관계망인 것이다. (88~89) 헤겔과 달리 맑스에게 있어서, (89) 한 사회 내에서의 삶이 갖는 다양한 측면들은 그 사회에 대한 어떤 근본적 진리의 표현이 아니다. ...모든 상부구조의 심급은 최종적으로 경제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 자체의 미래 발전, 다른 모든 상부구조의 심급 그리고 경제적 토대 그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알튀세르는 이를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과 ''특수한 실효성''이라 칭한다. (89)
맑스주의자들이 경제를 최종 심급의 결정적 요인으로 간주하는 이론에 입각해 주장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최종 심급'이란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FM : 113). [#]
어떤 문화적 생산물은 개인적 천재성의 산물(전통적 부르주아 비평에서처럼)도, 단순히 경제의 산물(전통적 맑스주의 비평에서처럼)도 아니다. 오히려 문화적 생산물은 알튀세르가 '정세conjucture[# 연접 ; therefore]'라고 칭한 것의 복합적인 생산물이다. 여기서 정세란 모든 역사적 시기의 사회를 포괄하는 상호작용적 사회 체계의 복잡한 관계망을 의미한다. (93) (94) 알튀세르가 “지배적” 심급이라 칭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회적 심급 역시 그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바뀐다. (94) (95) 맑스주의 문제계의 관점에서 한 사회는 바로 그 심급들 간의 일련의 불균형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95)
알튀세르는 말스주의 문제계 내에서 이 각각의 심급은 '실천'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알튀세르는 “사회적 실천”에 대해 말하는데, 이 말을 통해 그는 한 주어진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실천 형식의 총합을 의미하고자 한다. (95) '실천이라는 말로서 전반적으로 나는 어떤 일정한 원료를 일정한 생산물로 바꾸는 모든 변형 절차를 의미하고자 한다. 이 변형은 일정한 ('생산') 수단을 사용한 일정한 인간 노동에 의해 결과된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모든 실천 내에서 결정적 순간(혹은 요소)은 원료도 아니고 생산물도 아닌, 좁은 의미에서의 실천이다. 요컨대, 특정 구조 내에서 인간, 수단 및 이 수단을 이용하는 기술적 방법이 작동 가능하도록 설정해 주는 변형 노동 그 자체의 순간이다. (FM:166) [# 실천 / 원료 / 생산수단 구분]
■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이 개념은 '어떻게 피착취계급은 자신들이 이렇게 계속 착취당하도록 방치할 수 있단 말인가 ?'에 대한 대답으로 구상되었다. 맑스주의 이론에서 국가는 '국가장치'로 불리며, 이는 정부, 행정기관, 법원, 경찰, 감옥, 군대 등을 포함한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이론이 이제까지 국가장치로 여겨온,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억압적 제도로 이루어진 것을 “억압적 국가장치”라 칭하고, 국가에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또다른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 이는 푸코에서 전자는 “거시폭력”, 후자는 “미시폭력”으로 비슷하게 개념 전개된다.] 전자는 RSA, 후자는 ISA라 약칭한다. [# 종교ISA, 교육ISA, 가족ISA, 사법ISA, 정책ISA, 직능조합ISA, 언론매체ISA, 문화ISA]
알튀세르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RSA는 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즉, RSA는 지배계급 혹은 계급동맹이 무력 혹은 즉각적인 무력 사용 위협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 지배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만일 내가 경찰의 연행을 거부한다면 나는 유치장에 갇힐 것이다. 만일 법원이 내게 금고형이나 사형을 선고한다면 나는 그 선고에 따라야만 한다. 이러한 강제는, 내가 이 강제를 합법화하는 일련의 이데올로기적인 담론 속에 살고 있으므로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것이 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도 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결론적으로,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국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 ...비록 외관상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은 이질적인 상이한 형태의 제도들이지만, 그것들을 작동시키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통합된다고 알튀세르는 말한다. 미디어, 스포츠,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 학교, 대학, 정당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안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작동 중인 일련의 이데올로기적 담론들을 항상 지배한다. (158~159)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키는 근본적인 수단일 뿐만 아니라, 피착취계급의 이데올로기인 대립 이데올로기가 분명히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고 알튀세르는 부언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내에서 작동하는 담론들의 수준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계급투쟁의 장이다. (160) '피착취계급 또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내에서 저항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과 기회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피착취계급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모순을 이용함으로써 혹은 이 장치 내에서 공세적 입장을 확보해 냄으로써 자신의 저항을 표현할 수 있다.' (LP : 140)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실존을 가지고 있다”(LP : 55)고 주장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원래 담론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비록 그러한 담론들이 재현하는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할지라도 결코 관념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믿는 어떤 관념 체계 때문에 내가 어떤 규범적 실천에 참여하고,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며, 또 단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제도, 실천 그리고 종교의식이 내 관념 체계보다 선행하며 그 체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알튀세르는 주장한다. ...즉, 개인의 관념은 개인의 실천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162~163) [# 소라이 ; 유물론 ___ 개인적 생각이지만 정말 뻔하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서 맞이하거나 호명한다”(LP:164). 이 테제의 의미를 풀어 보기 전에 우리는 우선 프랑스어 동사 'interpeller'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이 동사는 첫째로 '큰 소리로 부르다' 혹은 '누군가에게 외치다'를 의미하며, 다음으로 '질문하다', 특히 경찰이 용의자에게 질의하거나 '심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찰의 맥락에서 이 용어는 '심문하기 위해 호출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프랑스어 'interpeller'를 영어로 번역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hail'이나 'interpellate'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경찰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위해 기능한다는 점. (164~165) (165~166)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서 호출하거나 호명한다'라는 테제를 통해 알튀세르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의 범주, 즉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적 범주와 개념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범주는 '주체'의 범주라는 것이다. '주체'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바로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에서였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전의 이데올로기에서는 '주체'라는 동일한 범주가 '영혼' 혹은 '신'과 같은 다른 이름으로 작동했다. 주체라는 개념 내에서 개인은 본인의 생각과 행동과 감정의 독자적인 근원으로 여겨진다. 알튀세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자유로운 주관성, 주도권의 중심, 행동의 창시자이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개인.(LP : 169)''...우리는 우리가 주체성, 개성, 심지어는 영혼 혹은 정신까지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실제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일까 ?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실제로는 일련의 복잡한 사회적 실천들 속에 삽입됨으로써 자신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는 이 개인으로 하여금 그가 자유로운 주체이고 본인의 생각, 감정 그리고 행동의 근원이자 원천이라고 믿게 만든다. (165~167) '이데올로기는 내가 호명 혹은 호출이라 명명한, 또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경찰(혹은 타자)의 호명, 즉 '이봐요, 거기 당신'으로 상상될 수 있는 매우 세밀한 조작을 통해 (모든) 개인들을 주체로 '구성'하거나 '변형'시키는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거나 '기능'한다.'(LP:162~163)
모든 이데올로기에서 주체는 일종의 모델이나 범례로서 상정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내에 이 모델이 실재인 것으로 상정되고, 개인들은 이 모델을 토대로 자기자신을 이해하고 행동한다. 개인들에 선행하는 상상적 주체에 근거하여 자신에 대한 이해를 체계화함으로써 개인들은 그들이 상상적 주체를 좋아하는 방식으로 그들 스스로르 사유하고 행동하게 된다. ...[한편] 주체는 절대적 주체the Subject에 종속된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우리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자유로운 주체로서 사유하게 한다는 그러한 의미에서만 우리를 주체로 호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또한 알튀세르가 정의한 주체, 즉 “종속된 존재이며 더 상위의 권위에 복종하고 그러므로 기꺼이 그의 예속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는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주체”라는 의미로도 우리를 호명하는 것이다. (168~169)
■ 저항의 문제
우리는 생산관계 체계 내에서 우리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다. 그 생산관계 체계는 뭔가 다른 관계 체계가 있을 수 있거나 있어야 한다는 논쟁 혹은 상상이 부재하는, 아주 명백하게 불신적인 착취의 체계이다. (169~170) [# 교수님 – 여기서 주체의 해방은 불편함을 느끼고 분열에 부대끼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와의 괴리가 느껴질 때, 진정한 자유의 근거는 거기에 있다.]
[# avec 라캉 – 이데올로기는 상상적 체계이므로 상상적 주체도 형성한다. 또한 나를 호명하는 그것은 상징적 관계 속에서 나를 호명하는 것이므로 상징적 주체도 형성한다. 마지막으로 실재. 이데올로기의 절대적 외부여야만 주체 구성에 포섭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저항 가능성을 이데올로기'들'에서 찾는다고 한다 by 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