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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요시유키 『권력과 저항』 5장 요약
다음은 사토 요시유키의 『권력과 저항』 5장-이데올로기에 대한 한국어역을 바탕으로 한 요약이다(15-07-06).
자신을 끊임없이 '공시적으로' 재생산하는 정적인 사회구조는 어떤 인과성에 기초해 변용될 수 있는가? 알튀세르에게 새로운 구조의 '생기' 문제는 라캉적 이론장치를 비판적으로 변경함으로써 해결된다. 라캉의 '실재계' 이론을 사회이론에 응용하여 대항정치를 말하는 지젝에게서 저항과 구조변동은 다룰 수 없는 문제이다. 버틀러의 「보편자를 다시 무대에 올리며」에 의하면, '실재계'가 항상 동일한 형식으로 주체와 구조를 규정한다고 말할 때 역사성의 영역이 말소되어버리고, 그로 인해 구조변동이라는 '통시적인' 문제를 다룰 수 없게 된다. 알튀세르는 이 문제에 대해 응답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담론 이론에 관한 세 가지 노트」에서 '담론'을 핵으로 한 일반 이론의 구축을 목표로 하며, 라캉적 시니피앙 이론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이 두 이론을 비교해보자. 알튀세르에게서, 무의식의 담론, 이데올로기의 담론, 미의 담론, 과학 담론은 “어떤 공통의 효과”인 “주체성이라는 효과”를 생산한다. 반면 라캉에게서, 시니피앙은 시니피앙 연쇄 속에 '부재'로 출현하면서 “주체성”을 산출하기 때문에, 주체는 '타자'에 의해 대행된다. 알튀세르에게서, 네 가지 유형의 담론은 관념이 그 형태를 취하는 물질적 존재이다. 그러한 물질적 성격을 취한 담론이 이데올로기를 체현한다. 반면 라캉에게서, 시니피앙은 '타자'의 욕망만을 체현하므로, '타자'의 담론인 무의식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담론 안에만 주체 개념이 속할 수 있다고 하면서 '주체'를 '자아'(전의식-의식 체계)와 동일시한다(그러면서 무의식적 체계와는 구별한다). 이렇게 본다면 라캉이 '무의식의 주체'라는 용어를 통해 표현한 것처럼 분열되고 균열된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알튀세르에게 '주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봉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알튀세르는 '자아'와 '주체'를 동일시하고, 주체를 이데올로기 담론에만 속하는 것으로 정의했는가? 이데올로기 담론은 '거울상적 중심화의 구조'를 소유하며, 이는 경험적 주체를 이데올로기적 최종법원인 초월론적 주체가 '거울상적으로' 반복 · 이중화하는 것이다. 주체는 이데올로기적 봉합의 메커니즘에 의해 반복 · 이중화된다. 이때 이데올로기가 개인들을 '호명'해 주체들로 바꾼다는 표현이 사용되는데, 지배적 이데올로기로의 복종화를 확보하는 '호명'은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다양한 수단들(가족, 학교, 교회, ….)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에 의해 (주체에게 '실천적 행위'를 규정함으로써) 실현되므로, 주체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봉합의 메커니즘은 물질적 기반에 의거한다.
이데올로기 담론의 '호명'이 실천을 통해 주체를 봉합한다면, '무의식의 담론'은 여기서 어떤 역할을 맡을까? 이데올로기 담론은 무의식의 담론을 통해서만 주체를 봉합한다. 이데올로기 담론은 무의식의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주체를 봉합하는가? 여기에 '전이'의 메커니즘이 사용된다. 라캉에게서 '중심화'는 자아를 '타자' 위에서 재구조화하는 전이의 메커니즘을 가리킨다. 그에 반해 알튀세르가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봉합을 '중심화'라고 정의할 때, 그 우월적 중심은 ('타자'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충분히 가르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다. 무의식적 '전이'의 메커니즘을 통해 지배적 이데올로기 위에 자아를 '재구조화'함으로써 주체는 봉합되며, 이 '전이'를 확보하는 것이 의례적 실천과, 담론의 물질성이다. 이것이 알튀세르가 라캉의 이론에 대하여 수행한 '유물론화'이다.
한편, 알튀세르가 라캉 이론에 대하여 수행한 이러한 유물론화를 지젝은 왜곡한다. 지젝은 '호명'의 물질성을 내다버리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다양체를 단지 '법적-담론적' 권력(외상적이고 무의미한 명령)으로만 환원한다. 그와는 달리,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은 다양하며, 때문에 장치들 사이의 모순들을 내포할 수 있다. 이 모순들은 저항과 구조변동의 관건을 이룬다.
알튀세르는 구조적 인과성과 환유적 인과성을 구별한다. 구조적 인과성에서 원인은 구조의 효과들 속에 현전하고, 환유적 인과성에서 원인은 구조의 효과들 속에 부재로서 존재한다. 라캉에게 주체는 '타자'에 의해 환유적으로 봉합되며, 주체는 하나의 시니피앙의 부재하는 효과에 의해 자신의 구멍을 봉합한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구조의 효과들에 있어서 원인의 '현전', 구조의 효과들에 있어서 구조가 '존재한다'는 측면을 강조하고자, 구조적 인과성을 채택한다. 바꿔 말하면, 구조적 인과성이란 어떤 구조(이 문단에서는 가령 주체)가 다른 구조(가령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문제이며, 주체를 효과로서 결정하는 원인이 되는 구조가 주체 속에 현전한다. 따라서, 주체를 규정하는 초월적 심급을 배제한 알튀세르에게,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가능성은 이데올로기 장치들의 호명 과정 한복판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알튀세르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아내는가? 『재생산에 대하여』를 참조하면, '1차 이데올로기'가 주체에게 주입될 때, '복합적 원인들의 결합' 즉 복합상황에 의해 변용되는데, 이것을 '2차 이데올로기'라 한다. 이데올로기는 순수 상태에서는 주체로 내면화되지 않으므로,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봉합은 항상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외재적인 다른 이데올로기들의 효과의 복합적 영향('2차 이데올로기') 아래서 실현된다. 거기에 저항의 효과('계급투쟁의 효과')가 나타난다. 설령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기능이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 이데올로기는 복합상황에 의해 변용을 겪고, 그 변용 속에서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이데올로기의 '일탈'로 부른다.
라캉의 경우 편지/문자가 '항상' 수신지에 도착하는 것은, 주체가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되면서(주체 → '타자'), 동시에 그 대리성에 의해 봉합되기 때문이다('타자' → 주체). 그러나 알튀세르는 '타자'라는 초월(론)적 심급을 비판하며, 이런 라캉 이론의 문제점을 '유물론화'로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의한 호명은 주체가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탈'을 허용하고, 우발성('복합상황')이 개입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는 모두, 알튀세르에 의한 라캉 이론 비판으로서의 논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