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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해외에서 학교의 발발과 기원을 다룬 연구들

 

 

(다음은 2014년에 접한 『일본의 교육사회사』에서 발췌한 것이다.)

 

  • 이학의 금은 막말에 이르기까지 근세 후기의 정치와 학문-사상-과 교육을 관련짓는 보다 큰 틀을 만들어낸 정책이었다. 이 정책의 교육사적 의미는 주자학 정학파의 교화론과 그 정책 구상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가령 <正學指掌>은 학문이 본래의 모습으로 기능하지 않을 때 풍속의 불순도가 높아진다고 말하며, 라이 슌스이의 <학통론>은 '속'에 대한 학문의 교화의 책임을 논한다. 슌스이는 '풍속'의 교화와 통합의 방법을 구두 언어에 의한 '강석'에 의존하기보다는 조직화된 '학교' 기관에서 찾았다.

 

  • 다나카 후지마로 등, 근대화의 총체적 계획을 그리기 위해 서구 열강을 실지조사하고 귀국한 사절단 단원들은 각각의 과제에 대응하여 관료 기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후지마로는 실질적으로 '문부성의 책임자'이자 국민교육의 구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제1인자였다. 미국의 당시 연방제나 각 주의 자치를 인정하는 교육법에 당황한 후지마로는 조사를 진행하면서 서구 국민교육 제도가 반드시 국가의 일방적 주도로 전개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했고 주민의 자발성에 기초한 행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에 착목했다.

 

  • 후지마로 등은 본디 그들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전면적 학교제도가 구상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정부가 '학제'를 반포한 과정 자체부터가 불만이었다. 특히 그들의 불만은 그것이 개화주의 일변도이며 서구의 교육제도에 대한 이해가 일면적이라는 점이었다. 의무 교육제도를 반드시 국가가 일방적으로 강제하는 식으로 보급해선 안된다는 점을 유의하지 않고, 서양예술과 동양도덕을 어떻게 정합할 것인지의 시점을 놓치고 있음에 불만이었다.

 

  • 1878년에 '교도'가 '교육'으로 바뀐 것은 다나카 후지마로가 '학제' 정책을 전면적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시점과 겹친다.

 

  • 1879년, '교학'과 '교육' 간의 논쟁은 각자가 그리는 인간 형성의 내용과 방법의 정면 대결이었다. 모토다는 자유민권운동 등의 사회질서 혼란은 '교육'이라는 계몽정책 때문이며 인의충효의 '교학'으로 고칠 것을 주장했다. 이노우에는 이는 유신의 변혁, 시민평등, 언론의 자유에 수반된 일시적 혼란일 뿐 '교육'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 근대국가와 국민의 창출을 의도하는 교육은 '입신'일는 사익을 유인책으로 전개된다. 일찍이 이 시기부터 일신출세주의 이념이 구 사족층을 중심으로 사회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고, 학교를 매개로 한 입신 열기가 고양되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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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에서는 입신에 상응하는 요소가 없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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