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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수업과 사회계층 : 초등학교 수업에 관한 참여관찰연구, 제8장과 결론, 김정원, 2006
(15년에 새로 요약한 것이다.)
1/ 수업의 사회적 조건
1] 학교 내적 조건
1995년 학교 내에서 학교장은 교사의 근무 상황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으며, 관련 법규상으로 근무 성적은 크게 자질 및 태도와 근무 실적으로 구분하여 평가하게 되어 있었다. 이런 법규상의 특징은 교사의 수업 행위가 학교장의 평가를 의식하여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게 한다. 학교장의 주요 관심은 기본적으로 학교 조직의 안정적 운영에 있다. 그는 전체 교육 조직 내에서 상급 기관이 내리는 지시, 협조 요청에 따르고 아울러 학부모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학교조직의 안정을 꾀한다. 본 연구에서 대상이 된 서민층 학교의 특성상 학부모의 개입이 적어, 학교장 밑의 교사에게 보다 직접적인 압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교실 내의 수업보다는 학교의 각종 행사, 공문처리, 업무 분장과 관련된 “일”을 문제없이 처리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수업 과정이 평가나 논의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하루에 4-5시간씩 서로 다른 교과의 수업, 수업 후 과제 검사뿐만 아니라 “숙제검사”, “일기검사”, “자습검사”, 40여명의 아동들에 대한 수업시간 내외의 통제와 학급환경 관리, 성적처리 및 기록, 잡부금 징수, 각종 조사, 글짓기, 그림 등 학교에서 요구하는 대회 출품용 작품 뽑기 등등은 담임교사에 부여된 “일”들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교사는 일정한 업무처리전략을 만들어간다. 이것은 교사가 관심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그것에 따라 관심의 대상을 줄여간다는 의미이다. 교사의 관심이 집중적으로 감소될 수 있는 부분은 교사의 '권한하'에 있는 것이다. 교사의 권한 밖에 있는 것은 교과서의 진도를 나가는 것과 시험이다. 진도와 시험을 의식한 “중요한 교과” 중심의 수업이 '교과서 해설식 수업'으로 나타난다. 교사용 참고서의 해설 자료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시험에 나올 수 있는 문제를 중심으로 “중요한 것”을 지적해주는 수업이, 수업 준비를 위한 노력을 최소화하면서 시험에서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수업 형태이다.
또한 교사의 업무처리전략 차원에서 '과제부과식 수업'이 나타난다. 이것은 수업 시간 동안 아동에게 과제를 내주고 교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수업 형태는 일차적으로 교사의 업무처리전략 차원에서 나타나며, 각 교과의 성격이나 각 교과를 대표하는 학문의 성격과는 관계가 없다. 교사는 교과서 내용에 대한 해설 이외에, 아동들의 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자원을 투여하지는 않는다.
L, McNeil은, 교사의 수업을 교사와 학교 행정가, 학생 사이의 협상(negotiation)의 결과 ; 즉 능력별 반 편성을 없애고 노동계급의 자녀를 학교에 끌어 들이면서도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나 지원 없이 학교의 질서, 규율, 학점 수만 따지는 행정가들에 대한 협상, 공부보다 알바를 우선시하는 학생들에 대한 협상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이 협상의 개념은 각 행위자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개념인 반면, 여기서 다루는 수업 형태는 수업과 관련된 각 집단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이해관심이 아닌 서로 다른 힘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수업은 그 힘의 관계가 표출되는 하나의 국면으로 보인다. 요컨대, 교실 내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의 '과정'은, 교사가 갖는 조직 속에서의 종속적 위치, 교사를 둘러싼 물리적 한계 등의 조건에 교사가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국면이다. 교사는 자신이 통제력을 갖는 교실에서 자신의 자원을 관리할 수 있는 방식을 고안해 내며, 그로 인해 특정 수업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학생은 이러한 수업에 결정적인 형향을 미치는 변수가 되지 않는다. 수업 내에서 수업에 적응할 수 없는 학생들의 행위는 “산만한 행동”으로 나타나거나 수업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교사의 힘에 의해 통제되거나, 교사의 관심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교수 활동으로부터 탈기술화(deskilling)된 교사들은, 현 학교 조직 내에서 보다 새로운 교육자료나 학교시설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수업 내용, 수업 절차, 평가를 위한 모든 교육 자료와 교구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그들은 주어진 단위 수업 시간 내에 요구되는 대로 실행하기만 하면 되는 상태이다.
2] 사회구조적 조건
학부모의 계층적 조건에 의해 학부모 집단이 교사나 학교에 대한 압력 집단의 성격을 지닐 수 있는 학교와 그렇지 못한 학교에서의 수업이 다를 가능성이 있다. 교사들은 “교과서 밖의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수준 높은 수업”은 이 학교 아동들의 평균적인 가정 배경과 그로 인한 아동들의 낮은 지적 수준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 연구는 서민층의 한 학교만을 대상으로 하기에 학부모의 개입을 비교하는 논의는 불가능하다.
김희복의 연구에 따르면, 중산층 초등학교 학부모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학교교육 과정에 대한 평가, 즉 교육과정의 운영에서부터 교육과정의 연계성, 학습난이도, 교수 방법, 학습시간의 배정, 교사의 교수능력 등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교사는 학부모가 개입한다면 일정정도는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는 새로운 수업 방식을 시도하는 것에 있어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교사의 수업에 질적인 평가를 가하는 학부모의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수업은 다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어진 학부모는 학교에 대한 '고객'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학교에 의무적으로 자녀를 보내야만 하는 위치에 있다.
2/ 수업 내의 학습기회 구조
1] 지식에의 접근 기회
학교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교과서를 잘 이해하는 것이다. 이에 아동들은 교과서를 해설해 놓은 “전과”가 가장 좋은 참고서라는 것을 터득한다. “전과”는 교사가 아동들에게 과제를 제시해주고 아동들 스스로 학습하도록 하는 '과제부과식 수업'에서 아동들에게 '제 2의 선생님'이 된다. “전과”에는 교과서에 제시되어 있는 각종 과제에 대한 답의 유형이 상세히 나와 있다. 또한, “공부를 많이 하는 아동”과 “공부를 하지 않는 아동”은 아동들이 푸는 문제집 개수와 관련되어 있다. “전과”와 문제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아동의 학교공부 방법은 '최소비용의 수업'이라는 교사의 수업 형태에 대한 아동의 대응전략이며, 많은 학부모들이 아동들에게 요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교사가 자신의 노력을 집중적으로 투입시키는 '이해'는 교가서의 '맥락에 갇힌 이해'이다. 수업 내에서 교과서 내용과 그것에 대한 참고서의 해설은 의심이나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교사의 해설은 교과서의 맥락 내에서만 이루어지며 아동들도 그 해설에 의문을 드러내지 않는다. 교과서 내용에는 항상 일정한 답이 있으며, 그것은 다른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교과서 해설식 수업'에서, 지식은 체계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각종 개념은 교과서의 맥락에서 설명될 뿐 다른 맥락에서는 어떻게 다르게 사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비교되는 다른 맥락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교사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는 동일한 개념이 갖는 차이를 서로 관련지어 설명하지 않는다. 아동들도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으며, 동일한 개념이 맥락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사용되며, 양 맥락 사이에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질문하지 않는다.
맥닐(1983)이 제시하고 있는 지식 통제의 한 형태로서의 지식에 대한 '단편화'는, 단순히 자료를 목록화하여 암기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나 서로 다른 관점에서의 이해 가능성을 배제한 채 정보를 '사실'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과 비슷한 메커니즘의 '교과서 해설식 수업'은, 교과 내용에 등장하는 개념들의 정의된 가치를 내면화하기 쉽다는 측면에서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가진다.
학교는 부모의 계층이 아동에게 부여하는 '지적 접근'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제도가 되지 못한다.여기서 '지적 접근'의 차이와 그것이 학교학습과 최종 학력에 미치는 영향 관계를 논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부모에 의해 부여되는 일상 대화 속에서의 합리적인 사고, 각종 개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이야기”(학교 교과서의 범주와는 관련 없는) 같은 것이, 아동이 교과서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적 경향을 내면화하는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때 교과서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 지적 경험만 제공하는 학교는, 가정 배경이 초래하는 서로 다른 사회화 과정에 어떠한 변수도 되지 못한다.
2] 학교학습에의 접근 기회
교사는 특정 아동만을 겨냥하여 수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도 결과적으로 특정 아동만 참여할 수 있는 수업이 된다. 수업 내에서 이루어지는 아동에 대한 분류는 수업의 수준을 결정하고 각 아동의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수업에서 아동들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상대적으로 서열화되고, 이 과정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아동들은 자신의 수준에서 가질 수 있는 의문을 드러내지 못한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비교되는 수업에서의 경험이 누적되면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업에 참여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공부가 보통인 아이”들은 교사의 가르침을 이해못해도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 지나침으로써, 그리고 교실수업 아동들에게 과제를 주고 아동들에게 맡겨 놓는 수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이들은 수업 내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이것은 교사의 업무처리전략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수업 형태가 만들어내는 결과이다. '최소비용의 수업'에서의 기준은 교과서의 “진도 나가기”와 “시험”이며 개별 아동의 학습수준의 향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제공되는 학습기회의 차이를 통해서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변할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동들에게 주어지는 학습기회의 불평등 정도는 분명하게 드러나며, 학년이 올라가면서 기회구조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확실하게 고착된다.
3] 학습 기회의 정의적 효과
교사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소수의 아동은 교사의 힘을 위임받을 수 있는 존재로서의 가치와 힘을 지니고 그렇지 못한 다수의 아동들 위에 군림하며 교사를 대신하여 동료 아동을 통제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부를 못하는 아이”에게는 학교수업이 교과서의 지식을 배우는 시간이라기보다는 동료 아동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시간일 뿐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힘의 관계는 각 아동이 차지할 미래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한 정체감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아동의 힘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선망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동들이 배우는 규범은 보편성과 독립심이 아니라 힘에의 순종이며, 동시에 힘에 대한 선망이다. (의문의 여지)
(끝)
(이하는 2013년에 적었던 생각)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상대적 서열화는 아동들 상호간의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그들이 수업 내용을 통해 가질 수 없는 학습욕구를 가질 수 있게 하는 효과를 지니기도 한다. 그러나 이 상대적 서열화에 의해 수업 속에서 교사와 상호작용할 수 없는 수준의 아동들은 자신의 수준에서 생길 수 있는 의문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고 그리하여 특정 아동들을 중심으로 하는 수업은 원만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경쟁은, 학습자들 서로가 비슷한 수준의 서로의 지식내용을 검열하는 기제로써의 경쟁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것일 수 있다. 즉, 학습자의 경쟁의 목표가, 자기의 위치 유지 (= 등수유지)라 한다면, 그 위치나 지위 자체에 대한 비판의 장치가 없기 때문에, 불모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 외의 경우에는 경쟁은 이로울 수 있는데, 학파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학문을 발전시키기도 하는 사례를 보면 그렇다. 그것과 성질이 다른, 등수에 맞추어진 경쟁이 어떤 의미에서 불모적일까?
가장 단순하게, 권력 비판의 능력이 굴절된 성장을 겪는다는 점을 직관할 수 있다. 등수에 맞추어진 경쟁 속의 학생들은 특정 지식을 절대화하기 쉬울 것이고, 다음으로 특정 권력(가령 하등생이 우등생에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힘)을 절대화하기 쉬울 것이다.
1] ‘단순히 자료를 목록화하여 암기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나 서로 다른 관점에서의 이해 가능성을 배제한 채로 정보를 ‘사실’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것 …… 에 입각해 볼 때 교과서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교과지식이 어떻게 특정 체제(정치적, 경제적) 지향적 가치에 의해서 분류, 통제되고 있는가 하는 우리나라 교육과정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에 대한 제반 연구의 결과들이 갖는 의미는 크다. 교실수업에 이루어지고 있는 개념의 학습은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구속받음으로써 아동들은 교과 내용에 등장하는 개념들의 정의적 가치를 내면화하기가 쉬울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교과 내용을 이쪽 저쪽에서 생각해보도록 만드는 수업”(이인효, 1993:259)으로서의 ‘지식의 체계적인 이해’가 이루어지는 수업과는 다르다.’
2] ‘초등교육은 특정 교과서에 한정된 폐쇄적 사고를 유도함으로써 학습목표를 학교교육에 두고 있는 계층의 아동들이 학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시 서민층 자녀들이 갖는 지식에의 접근 기회를 한정시킬 수 있다. 반면 중산층 가정의 아동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교과서의 수준과 범위를 넘어서는 지적 경험을 가질 수 있다.’ 반면 이런 식으로 지식 상대화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아동들이 어떻게 자기자신을 그러한 배제에 길들이는가? 학교는 또한 어떻게 그 아동들을 지적 기회의 장으로 섞어주지 못하는가?
3] ‘보다 중요한 의미에서의 학교학습기회의 차이는 한 학급 내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의 학습수준을 중심으로 아동들 사이의 학업능력의 차이가 끊임없이 상대적으로 서열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교사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고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항상 학습의 모범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아동들이다. 수업 내에서의 그들의 위치는 그들을 “공부를 하려는 아이”들로 만든다. 이에 비해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의 수업 내에서의 위치는 그들을 “공부를 하지 않으려는 아이”들로 만들어 간다. 이러한 아동들 사이의 “공부”에 대한 태도의 차이는 곧 그들이 전체 삶을 통하여 얻게 될 학습기회의 차이로 연결될 수 있다.’
‘학업 능력에 따른 범주화’는 ‘입학하기 전부터 갖고 있던 학업능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업은 이러한 범주를 변화시키기보다는 보다 확고히 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학습기회의 차이’는, 의도치 않았는데, 그리고 기회가 있었을 것인데(질문하고 문제푸는 것을 해결할 기회) 배제되는 구조를 만들어간다.
4] 주어진 공교육제도하의 환경에서 ‘최소한의 자원만을 투여하지 않을 수 없는’ ‘교사는 아동들 사이에 힘을 갖는-공부를 잘하는- 아동에게 자신의 권한을 이양하여 업무 처리나 학급 통제과정에 적극적인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맡기’고, ‘이러한 힘의 관계는 아동들이 갖게 될 미래의 자아정체감에 강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며, 이 힘의 관계 속에서 아동들은 합리성, 보편성을 배우기보다 힘에 대한 선망을 키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사회적 경쟁 과열로부터의 수업의 조정이나 어떠한 변화는 학생이 경험하는 학급의 문제가 아니다.
5] ‘아동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학교교육을 받아야 하며, 학교에서의 성취도를 중심으로 경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아동들이 같은 조건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며 처음부터 경쟁의 대열에서 배제되는 일정 집단들이 존재한다.’ 즉 ‘사회적 경쟁구조 때문에 학교에서의 특정 수업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내부의 조건에 의해서 수업은 특정 형태로 나타난다’.
한편, 재밌는 문제가 다음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구조가 우등생의 지적 자산도 파괴시킨다는 점이다. ‘학습의 효율성 측면에서 보면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에게도 ….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업시간을 보낸다는 측면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을 수 있다’.
나의 생각
ㄱ. 이러한 것까지 포괄하는 교실적 행위결정망에서의 문제는 일단은 교실이라는 것이, 특정한 사랑(리비도)의 보급 상황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학교교육을 넘어선 지적 경험을 제공해줄 수 있는’, ‘다양한 정보원을 지니고 그에 대한 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러한 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직접 가르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는 상태에서, 이상적 일치의 대상이 교사 1인이 되기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인용한 연구의 대상이 되는 교사-전형적 교사-는 모든 학생이 바라는 것처럼 모든 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교사는 수업을 통해서 아동들 사이에 형성되는 힘의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자 동시에 그 힘의 관계를 이용하는 존재이다. 아동들 사이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아동을 교사는 수업과 학급 통제에 이용’한다). 우리에게 진실한 사실은 이것이다. 교실에서 우리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건 교사 뿐인데, 교사의 권력에 환원적으로 편승한 아동이거나 이탈한 아동이거나 하는 이분법이 그토록 다른 말 할 수 없이 확고한, 밀실상황이 수업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평등한 사랑~권력론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ㄴ. 한 편 이 사랑의 배분 개연성은 교사의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다. 즉 ‘교사가 개별 아동들의 능력을 구분하고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학습기회를 차등적으로 제공하고자 한 결과는 아니다. 그것은 교사의 업무처리전략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수업 형태가 만들어내는 결과이다.’ 대체로 교육에 있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교사가 평가자가 아닐 때 일어나는 일들과 상관성이 있다. 교사가 출제하지 않거나 교사가 관할하지 않는데도 다르게 확립된 ‘시험’이나 상위교육기관의 요구나 승진에서의 교장의 ‘평가’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유형에 자신의 재량이 강하게 규제받을 수 밖에 없다. 한 편 사교육은 아무리 재량을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시험’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교육이 된다. 이것은 지식의 다른 맥락을 배제한다. 이 글에서 처음에 질문던진 대로, 지식의 다른 맥락을 쳐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적이나 교사평가와 같은 성과 기제는 매겨지는 사람들에게 최소루트를 상정하게 한다. 그것이 학생에게나 교사에게나, 너무 최소라는 것에 문제성이 있을 수 있다. 학생이 그의 말이 떨어지길 먼저 기다리는 교사, 그/녀에게 <최소>란 ‘’최소비용의 수업’에서의 기준은 교과서의 “진도나가기”와 “시험”이며 개별 아동의’ 어떤 개별적 향상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개별 아동에게 돌아가는 배려가 적은 구조다. 나는 이 ㄴ.의 문제, 즉 개별적으론 다 열정적일 터인 선생들이 어떻게 학교라는 조직 안에서는 기계가 되는가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한다.
어쨌든, 이런 류의 초등 교실의 상황 = 원초적 경험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 뇌속에서 발전하여 공교육을 받은 서민/일반인인 경우 대학 서열적 범주화 -> 기회차등의 인상적 씨앗이 된다.
보론. 계층결정론에 관하여.
‘우리는 우선적으로 물리학자 maxwell이 열역학 제2법칙의 효율성이 어떻게 정지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했던 이미지를 상기할 수 있다. 그는 자신 앞에 도착하는 운동 중에 있는 다소 뜨겁고 다소 빠른 입자들 가운데서 온도가 상승하는 가장 빠른 것들을 하나의 용기 속으로 보내고, 온도가 내려 가는 (생략) 즉 그것은 선별 작업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의 소비를 대가로 해서 사전에 존재하는 질서, 문화적 자본을 양적으로 불평등하게 부여받은 학생들 사이에 편차를 유지한다.’(실천이성, 제2장, 부르디외)
한 편 이와 같은 계층결정론은 어느 정도까지는 상대화될 수 있다. '현대에는 상위층<->하위층으로의 상호유입이 옛날보다 많이 일어난다고!' 같은 의견이다. 그러나 문제는 상호유입이 어떠한 조건에서 더 많이 일어나는가이다. 중요한 것은 현상의 관찰이 아니고, 조건의 관찰이다.
(끝)
권한이 학습자에게 없는 '힘의 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
교육은 언제나 더 큰 구조에 종속적인가? 그리고 교육이 종속적일 때 문제가 일어나는가? 혹은 교육과 구조는 생산적으로 병존 가능한가?
교사의 사랑을 얻기 위해선 권력을 얻어야 하고, 그것은 수단적으로 최소의 선택을 강구한다.
의문의 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