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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프톨레마이오스의 복수

 

   우리가 첫번째 장에서 끌어냈던 선조성의 문제, 혹은 원화석의 문제는 다음에 제시될 일반적인 질문들과 관련된다 : 세계와의 관계의 모든 인간적 형식에 선행하는 것으로서 제시된 세계의 소여와 관계하는 과학적 진술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혹은 생명적이고/이거나 사유적인 세계와의 관계를 시간성 안에 기입된 사실로 만드는 담화의 의미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그런 시간성 안에서 세계와의 관계가 여타 사건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연속 안에서 시원이 아니라 지표에 불과한 것으로 놓여있을 때 말이다. 어떻게 과학은 그러한 진술들을 그저 사유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관점에서 그런 진술들에 궁극적 진리를 부여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우리는 더 정확하게 이 질문을 공식화해야 한다. 사실상 질문을 더욱 면밀히 검토할 때, 원화석의 문제는 선조적 진술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왜냐면 원화석의 문제는 사유와 존재의 <시간적 간격>을 포함하는 모든 담화의 의미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즉 그 진술들은 인간의 출현에 선행하는 사건들과 관계할 뿐 아니라 인간 종의 소멸에 <후행적인> 가능한 사건들과도 관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예컨대 지구의 온갖 생명형태들을 말살하는 유성 추락에 기인하는 기후학적, 지질학적 결과들과 관련된 가설적 의미의 조건들을 규정해야 할 때 마찬가지로 제기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와의 – 지구적인 – 모든 관계에 선행하거나 후행적인 사건들과 연관된 그런 진술들을 일반적으로 특징짓기 위해서 <통-시성>dia-chronicite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용어는 상기한 유형의 담화들의 의미작용 그 자체에 개입된, 세계와 세계와의 관계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겨냥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탐문은 실제로 <일정 유형의> 과학적 진술들과만 – 혹은 예컨대 연대추적의 과학에 한정되어질 일정 유형의 연구들과만 – 관계하지 않는다. 왜냐면 통-시성 안에 걸려 있는 것은 실험과학 <일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통-시성의 문제는 과학이 실제적으로 존재와 지구적 사유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확립했다는 사실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과학이 그 기원에서부터 그와 같은 가능성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사실>에 의해 성립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의 문제 – 통-시적 진술들이 검증되거나 반박된다는 사실 – 가 아니라 원리의 문제이다. 그런 진술들에 대한 검증 <혹은> 반박에 의미를 부여하는 담화의 위상.

 

   사실상 과학은 원리상 인간과 세계의 공시성을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수학화된 물리학과, 우주만큼 오래된 인간 종과 같은 그런 가설의 양립 가능성을 그 어떤 것도 선험적으로 금지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통-시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과학이 그런 공시성을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본질적인 지점은 바로 과학이 그것을 <발견했어야 했을> 것이라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수학화된 과학<으로서> 현대과학이 사유와 존재의 가능한 시간적 간극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는 것>을 – 그것을 합당한 가설로 삼고 그것에 의미를 제공하고 그것을 다루기에 적합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 허락했음을 의미한다. 반박하기 위해서든 확증하기 위해서든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학적 담화의 그런 능력 – 통-시성의 <가능성>에 의미를 제공하는 것 – 이지, 그런 가능성이 확립되는지 거부되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선조성은 현대 철학이 현대 과학의 어떤 유형의 담화를 사유하는 데 있어 갖게 되는 어려움이 부각되도록 했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어떤 속성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무엇, 갈릴레이주의의, 즉 자연의 수학화의 본질적 특징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무엇과 관련된다.

 

   그러한 속성의 본성을 잘 파악하기 위해서 어째서 갈릴레이주의가 그때까지 선례가 없었던 영역에 통-시적 담화를 부여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은 확실히 인간의 실존에 앞설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실험과학을 기다리지 않았다(키클롭스, 티탄, 혹은 신들). 그러나 현대 과학이 그 기원에서부터 제시했던 근본 요소는, 그러한 진술들이 이제부터 <인식 과정>에 통합될 수 있다는 사실로 이루어진다. 그것들은 신화, 신통계보학, 혹은 환상작품들에 속하기를 그치고, 현행적 실험들에 의해 확증되거나 거부될 수 있는 <가설들>이 된다. 우리는 이 ‘가설’이라는 용어를 그런 진술들에 독특한 검증 불가능성의 어떤 유형을 참조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해하지 않는다. 분명히 말해서, 우리는 통-시적 진술이 참조하는 사건들이 정확히 인간 경험의 실존보다 선행적이거나 후행적인 것으로서 놓이는 한 그런 통-시적 진술들에 대한 그 어떤 ‘직접적’ 검증도 정의상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주 적은 수의 진리가 직접적 경험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한, 그리고 일반적으로 과학이 이미 단순한 관찰들이 아니라 점점 더 정교화된 측정 도구들에 의해 취급되고 계수화된 소여들에 근거를 두는 한 ‘직접적 검증’의 부재는 현실적으로 다른 많은 과학적 진술들에 있어서도 타당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진술들을 가설이라는 용어로 규정하면서, 그것들의 인지적 타당성을 약화시키려고 애쓰기보다는 역으로 그것들에게 인식의 온전한 타당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사실상 실험과학들은 합리적 <토론>이라는 이념에 처음으로 의미를 부여한 담화인데, 그 토론은 우리의 출현 이전에 존재할 수 있었거나 없었던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출현에 뒤따라 나올 수 있는 것과 관계한다. 이론들은 언제나 완벽해질 수 있으며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통-시적 이론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현대의 지식이 가능하게 만든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그때부터,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라도 존재할 수 있었던 무엇,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수 있을 무엇에 반대하는 게 의미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어떤 세계의 본성과 관련된 다른 어떤 가설보다 [통-시적] 가설을 합리적으로 선호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과학이 그처럼 통-시적 인식을 가능케 한다면, 이는 과학이 통-시적 관점의 진술들ㅡ적어도 비유기체적인 것과 관계하는 과학적 진술들ㅡ<전체>를 고려하는 것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어떤 물리적 법칙의 참이나 거짓은 사실상 우리의 고유한 실존의 관점에 입각해서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실존하는지 아닌지는 그것의 진리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물론 양자물리학의 몇몇 법칙들에 있어 진행되는 것처럼 관찰자의 현전이 법칙의 실현에 궁극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관찰자가 법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관찰자의 실존에 대한 의존이 전제되는 법칙의 어떤 속성은 아니다. 다시금 말하거니와 근본적 지점은 ㅡ 실로 모든 담화가 그렇기 때문에 ㅡ 과학이 자연적으로 실재적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과학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반면에 존재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의 과정을 전개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인식의 과정이 과학의 본래성을 구성하는 무엇(자연의 수학화)과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관해 보다 면밀해질 필요가 있다. 수학을 세계와 결합하는 고리에 대한 이해에서 갈릴레이가 가져온 근본적 변형은 무엇인가? 현상들에 대한 기하학적 진술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은 이미 기하학적 용어들로 천체의 궤도들을 기술했다. 그러나 그런 기술은 현상의 ‘직접적으로 기하학적인’ 부분과 관계했다. 사람들은 궤도의 변함없는 형태나 궤도면의 규정된 면적은 – 즉 부동의 연장들을 – 수학에 종속시켰다. 갈릴레이는 운동 자체를, 특히 겉보기에 가장 변덕스러운 운동 (지구적 물체들의 낙하 운동)을 수학적 용어들로 사유한다. 그는 위치와 속도의 변동 너머에서 운동의 수학적 상수를 – 다시 말해 가속도를 – 도출한다. 그리하여 세계는 <남김없이> 수학화될 수 있게 한다. 수학화될 수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수학화될 수 없는 것 속으로 파묻힌 세계의 일부(표면, 궤도, 유동체의 단순한 표면과 궤도에 불과한 그런 표면, 궤도)만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때부터 자율적 능력의 세계를 가리키게 된다 (그 운동들이 그렇듯이 그 감각적 성질들 – 맛, 향기, 열기 등-과 무관하게 물체들이 기술될 수 있는 세계). 데카르트적 연장의 세계 – 실체의 독립성을 획득한 바로 그 세계, 우리가 세계와 맺는 구체적이고 생명적인 관계와 일치하는 모든 것과는 무관한 것으로서 사유될 수 있는 바로 그 세계 - , <빙하의> 세계가 현대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데 거기엔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으며 중심도 주변부도 없다. 거기에는 인간에 바쳐진 세계를 만드는 그 어떤 것도 없다. 세계는 최초로 우리에 대한 구체성을 형성하는 그 어떤 것 없이도 존속할 수 있는 것처럼 제공되었다.

 

   인간과 <분리될 수 있는> 세계를 펼치는 수학화된 과학의 이런 능력 – 데카르트에 의해 그 모든 역량 안에서 이론화된 능력 – 은 갈릴레이적 혁명과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본질적인 연합을 허락했던 그 무엇이다.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용어를 통해 우리는 사실상 태양계의 중심에서 지구적 관찰자의 탈중심화라는 천문학적 발견을 이해했다기보다는 자연의 수학화를 책임졌던 훨씬 더 근본적인 탈중심화를 이해한다 : 즉 <인식의 과정 한가운데서, 세계와 관계하는 사유의 탈중심화>. 사실상 갈릴레오-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천문학적 탈중심화와 자연의수학화라는 저 <뚜> 사건들이 당대인들에게는 심층적으로 통합된 사건들처럼 파악되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통합은 수학화된 세계가 그 안에 파스칼이 자유사상가의 이름으로 무한한 공간들의 영원하고 무시무시한 침묵이라고 진단했던 바로 그것을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었다. 즉 그것은 우리의 실존이나 비실존이 전혀 영향 끼치지 않는 지속적으로 영속적인 어떤 역량의 발견이었다. 세계의 수학화는 그 자체가 처음부터, 인간의 실존과 가장 무관해져버린 세계, 따라서 세계에 대해 인간이 가질 수 있었던 인식 자체와 가장 무관해져버린 세계의 인식을 도출할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과학은 그 자체 안에 우리의 모든 경험 소여들의 통-시적 대상으로의 가능한 변환을 담지하고 있었다 : 존재하는 그것으로 있는 한에서, 소여의 여부와는 무관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세계의 구성요소로의 변환. 따라서 갈릴-코페적 혁명은 존재할 수 있는 무엇을 사유할 수 있는 사유의 능력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 무엇이 [이전에] 사유되었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근대 과학이 인간에게 자기자신과 우주에 대해 가질 수 있었던 표상들에 주입한 황폐와 버림의 느낌은 다음의 원인보다 더 근본적 원인을 갖지 않는다. 즉 세계에 대한 사유의 우연성에 대한 사유,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 – 사유되었다는 사실이나 사유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근본적으로 영향 받지 않는 세계 – 를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론의 끝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스스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믿음을 멈출 것이기에 모욕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때 그런 지구라는 중심자리는 우주의 수치스럽고 영광스럽지 못한 자리처럼, 우주 공간에서 일종의 지구적 쓰레기 처리장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수학화가 점진적으로 초래한 혼동은 실로 특권화된 모든 관점의 상실, 장소들의 모든 존재론적 위계의 상실에 기인한다. 이제 인간은 자신을 자신의 환경에 거주하게끔 허락했던 의미를 더 이상 세계에 투여할 수 없다. 세계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인간은 사르트르가 말하듯이 ‘잉여적de trop’이 되었다.

   또한 우리는 갈릴레이주의를 – 여전히 플라톤주의에 의해 침투되어 있는 갈릴레이의 사유, 즉 그 자체만을 보았을 때 고대인들이 가졌던 우주의 개념과 단절하지 않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갈릴레이의 사유가 아니라 – 갈릴레이에 의해 시작된 자연의 수학화의 일반적 운동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이 점 – 근대에서의 자연의 수학화와 갈릴레이적 사유 – 과 관련해서, 알렉상드르 코이레를 참조)

 

 

   이 명제의 의미를 정확히 해명해야 한다. 나는 근대 과학이 신화의 장이나 근거 없는 주장의 장이 아닌 인식의 장 안에 그런 진술들을 도입하는 것을 허락하는 한에서 통-시적 진술은 근대과학의 본질 자체와 관계한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 진술들은 인간적이 아닌 그 어떤 관계도 세계와 관련해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통-시적 사건들이, 비-인간이 그 사건들의 실존과 맺는 관계의 상관물들은 아니었다는 것(신이나 생명체가 통-시적 사건들의 선조적 증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진술들은 ‘증인의 문제’가 사건의 인식에 무관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분명히 방사성 물질들의 붕괴나 별들의 방출 본성이 기술되고, 그래서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사유하는 데 이르게 된 무엇에 꼭 들어맞는다고 추정된다. 그에 대한 증인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아는 질문은 그런 기술의 적절함을 판단하는 데 있어 중요하지 않다. 더 잘 말해본다면, 붕괴와 방출은, 그것들을 사유하기 위한 인간적 사유가 존재하지 않았을 지라도 우리가 그것에 대해 사유한 내용과 일치해야만 하는 식으로 사유된다. 여하간 그것은 과학이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 어떤 가능한 가설이며, 이 가설은 인식 주체의 <실존>에 대한 질문과 무관하게 법칙들을 진술할 수 있는 과학의 일반적 능력으로 보내어진다.

 

   그러므로 갈릴-코페적 혁명에 내재하는 탈중심화는 데카의 테제, 요컨대 <수학적으로 사유 가능한 것은 절대적으로 가능하다>라는 테제를 통과한다. 하지만 조심하자. 여기서 절대자는 필연적이라고 추정된 지시물이나 내속적으로 이념적인 지시물을 겨냥하는 수학의 속성과 관계하지 않는다. 이 절대성이 가리키는 것은 이렇다. 가설적 방식에 의해서일지라도, <소여된 것>가운데 수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가 그것을 정확히 ~에게 주어진 무엇, ~에게 현시된 무엇으로 만들기 위해 실존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사유하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통-시적 지시물은 <절대자처럼 정립되기를 그치지 않으며서도 우연적인 것>처럼 고려될 수 있다. 그것은 사건, 대상, 과정적 안정성을 구성할 수 있으며 거기서 중요한 건 무조건적 필연성을 증명하는 것 –이는 우리의 존재론에 상반될 것이다 – 이 아니다. 그러나 그에 반해 모든 지구적 생명보다 오래된 것인 방사성 물질들의 붕괴와 관련된 통-시적 진술의 의미는 그 사건을 대면하는 사유에 대한 절대적 무관심 속에서 고려되었을 때만 사유될 수 있다. 따라서 수학화될 수 있는 것의 절대성은 사유에 외부적인 본사실적인 가능한 실존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유에 외부적인 필연적 실존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학화될 수 있는 무엇은 우리와 무관하게 실존하는, 존재론적으로 파괴가능한 어떤 사실처럼 가설의 자격으로서 정립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근대 과학은 우리 세계에 대한 모든 수학적 재공식화로부터 <가설적이긴 하지만 사변적인 영역>을 우리에게 드러내 밝혀주었다. 과학의 갈릴-코레적 탈중심화는 이렇게 진술된다. 수학화될 수 있는 것은 사유의 상관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그때 여기에 사실 매우 놀라운 역설이 나타난다. 그 역설은 이렇다. 사유 안에서 칸트가 지도했던 혁명을 ‘코페적 혁명’이라 명명할 때, <그것의 의미가 우리가 정의했던 의미와 정확히 반대된다는 것>이다. 사실, 칸트가 사유 안에서의 자신의 고유한 혁명을 세우기 위해 *순수이성비판* 두번째 서문에서 코페적 혁명을 스스로에게 요구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대상에 대해 인식이 조정되도록 만드는 데 놓이는 것이 더 이상 아닌, 인식에 대해 대상이 조정되도록 만드는 데 놓이는 비판적 혁명.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사유 안에서 칸트가 지도한 혁명이 오히려 ‘프톨레마이오스적 반-혁명’과 비교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왜냐면 거기서 문제가 되는 건 사람들이 부동적이라고 믿었던 관찰자가 사실상 관찰되는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체가 인식 과정 안에서 중심적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데 철학 안에서 그런 프톨레마이오스적 반-혁명의 계획은 무엇이며, 목적은 무엇인가? *비판서*는 철학 전체를 어떤 근본적인 질문으로 초대했던가? 그것은 근대 과학의 사유 가능성의 조건들을 발견하는 것, <즉 문자 그대로의,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코페적 혁명의 조건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자신의 기획의 중심부에 근대 과학의 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한 이해를 위치시켰던 철학자는 또한 동시에 최초의 조건들의 폐지를 통해 그런 요청에 응답했던 바로 그 철학자이다. <근대과학에 내재하는 갈릴-코페적 탈중심화는 철학 안에서 프톨적 반-혁명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사유가 처음으로 근대과학과 더불어 실제로 세계와 맺는 모든 관계와는 무관한 세계 인식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발견했던 반면에, 초월철학은 물리 과학의 사유가능성의 조건처럼 그 세계의 비-상관관계적 인식 전체의 파면을 주장했다.

 

   실로 이런 모순의 ‘폭력’을, 이런 모순이 구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의외의 매듭을 파악해야 한다. 칸트의 혁명 이래 ‘진지한’ 철학자는 <근대 과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탈중심화의 사유 가능성의 조건이 사실상 프톨레마이오스적 사유의 중심화라는 것>을 생각해냈어야만 한다. 과학이 첨으로 사유에 있어서, 사유와 세계의 관계와는 무관한 세계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했던 반면에, 철학은 그런 발견에 대해서 자신의 고유한 오래된 ‘독단주의’라는 소박성의 발견으로 응답했다. 선비판적 형이상학의 ‘실재론’을 확실히 낡아빠진 개념적 소박성의 패러다임으로 만들면서 말이다. 상관관계의 철학적 시대는 탈중심화의 과학적 시대에, 마치 <전자가 후자의 해결책>인 양 응답한다. 실제로 철학이 상관관계의 다양한 양태들에 가담하는 것은 과학의 사실 자체에 대한 응답으로서이다.

 

   세계와 마주하는 사유의 과학적 탈중심화라는 사실은 그 동일한 세계와 대면한 사유의 중심화의 선례없는 방식에 의지하여 탈중심화를 사유하도록 철학을 결정지었다. 철학적으로 과학을 사유하는 것 , 그것은 1781년 이래(*비판서 초판) <철학적 프톨레마이오스주의가 과학적 코페르니쿠스주의의 심오한 의미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는 근대 과학의 분명한 실재론적 의미가 이차적이고 파생적인 외양상의 의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소박하고’ ‘자연적인’ 태도, 그것은 물론 어떤 단순한 ‘오류’의 결과가 아니다. 왜냐면 그런 태도를 택하는 것이 과학의 본질 자체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복하건데, 그런 태도는 이차적 태도이며, 철학자가 드러내야 하는 과제로서 원초적 세계와의 어떤 관계에서 유래한다. 칸트 이래 철학자로서 과학을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과학이 전달하는 것과는 다른, 과학의 보다 심오하고, 보다 본래적인 의미가, 따라서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하는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본래적인 그 의미는 상관관계적이다. 그것은 외양상 우리와 세계의 관계와는 무관한 요소들을 바로 그 관계 자체 안으로 다시 가져온다. 그것은 과학의 탈중심화를 중심화로 끌어내리는데, 후자로부터 전자는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내놓는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철학자는 자신도 또한 마찬가지로 칸트 이후 자신만의 ‘코페적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실현했다고 주장한다(그렇지만 그가 하는 건 어이없는 판단착오이다). 철학적 은어로서 코페적 혁명이 의미하는 것은 이렇다. 과학의 코페적 혁명의 심오한 의미는 철학의 프톨적 반-혁명이다. 우리가 이제부터 근대철학의 ‘분열schize’이라고 명명하게 될 것은 그러한 ‘전복의 전복’이다. 그것은 다음에 제시되는 모순을 표현한다. 즉 철학은 근대과학의 도래가 구성했던 지식의 영역에서 매우 엄격하게 혁명을 사유하려고 노력했던 때 이후부터 혁명의 본질을 구성했던 바로 그것 ㅡ 과학적 지식의 비-상관관계적 양태, 달리 말해서 <과학의 현저한 사변적 특징> ㅡ 을 포기했다.

 

   다시한번 칸트적 혁명의 놀라운 독특성에서 걸음을 멈춰야 한다. 그것은 실제로 오늘날 철학자들 ‘종족’ 안에 어떤 결과들을 계속 산출하고 있다. 그 혁명은 우선 인식의 영역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과학의 우위를 결정적으로 승인하는 데 있다. 어느 선행자보다도 극단적으로 칸트는 지식의 영역에서 형이상학으로부터 과학으로의 주도권의 인계를 사유한다. 철학자[칸트]의 고백에 따르면, 더 이상 형이상학자가 아니라 과학적 인간이 ‘인식의 마부’가 되었다. 실제로 칸트 이래 형이상학은 과학적 현실과 동등한, 혹은 상위에 있는 현실과 관련된 이론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신의 주장들을 개정했다. 칸트 이래 철학자들은 대체로 과학이 ㅡ오로지 과학만이ㅡ 자연에 대한 이론적 인식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 어떤 사변적 형이-상학도, 실험과학의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머물러 있는 현실보다 더 우월하다고 가정되는 현실(우주, 영혼, 신)에 대한 인식으로서 스스로를 제시할 수 없다.

 

   그러나 지식의 영역에서 철학에서 과학으로의 이런 주도권의 인계는, 사유의 역사상 전례 없는 반의미의 외관, 이를테면 정반대의 외관을 갖게 되었다. 철학이 자기자신을 위해 과학적 지식의 혁명적 특징을 구성했던 무엇(과학의 사변적 영역)을 포기했던 때는, 철학이 처음으로 과학적 지식의 우위를 아주 엄밀하게 사유했던 바로 그 순간이다. 철학이 ‘낡은 독단주의’를 포기하듯 ‘즉자적’ 대상을 사유하는 자신의 능력을 포기했던 것은 철학이 과학에 주도권을 넘길 생각을 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순간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 순간 사유는 바로 그 과학의 틀 안에서 인식의 가능한 위상에 접근했다. 탈중심화라는 자신의 역량을 통해 과학은 사유에게 자신의 사변적 역량을 증명했을 것이고, 철학은 그런 힘의 획득을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 모든 사변의 포기를 통해, 즉 그런 혁명의 자연을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포기를 통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형이상학에서 과학으로의 주도권 인계에는 ‘재앙’ 같은 것이 일어났다. 코페의 과학은 사변적 형이상학의 철학의 포기를 동기지었다. 그러나 그런 포기는 철학이 행한 과학에 대한 프톨적 해석처럼 철학에게로 되돌아왔다. 요컨대 철학은 과학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사변적 형이상학자가 아닌, 당신)은 인식의 고삐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의 심오한 본성은 당신에게 나타나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달리말해, 과학은 철학적인 사변적 형이상학의 파괴를 야기하는 동기가 되면서 자신의 본질 자체에 대한 가능한 모든 철학적 이해를 파괴했다.

 

   그런데 이런 분열이 칸트 이래 해소되기는커녕 악화를 멈추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실제로 과학이 모든 인류에 선행하는 세계 안으로 점점 더 깊이 탐사기를 넣을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을 우리에게 드러내면 낼수록 ‘진지한’ 과학은 칸트가 사용한 상관관계적 프톨주의를 심화시켰다. 상관물들의 궤도를 계속 조이면서, 점점 더 축소되는 그 공간을 점점 더 넓어지는 과학적 인식의 진정한 의미로 만들면서. ‘과학적’ 인간이 더욱 오래된 통-시적 사건들을 발견하면서 과학적 지식의 탈중심화를 강화하면할수록 ‘철학적’ 인간은 본원적으로 유한한 ‘세계에의-존재’로, 항상 더 제한된 존재의 어떤 한 시대, 어떤 언어적 공동체, 어떤 ‘지대’, 어떤 지반, 어떤 거주지로 상관물의 공간을 돌려놓았다. 그렇지만 철학자는 자신의 특수한 지식의 전제된 단독성에 의해 그것들의 주인으로 그리고 소유자로 남아 있었다. 코페적 혁명이 영향력을 전부 발휘하면 할수록 철학자들은 선행자들의 형이상학적 소박성들을 가차 없이 폭로하면서, 매번 더욱 가혹하게 인식을 인간의 현재적 상황으로 내리면서 그들 고유의 유사-코페적 탈중심화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프톨적 협소함과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코페적 탈중심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광대하고 현저하다.

 

 

   우리가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도대체 칸트 이래 철학자들이 –철학자들만이 그런 것 같다– 과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진정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되기까지 철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 철학이 초월적 관념론이나 현상학이 택한 길과 완전히 상반된 길, 이를테면 수학의 비-상관관계적 영역을 고려할 수 있는 사유의 길 – 즉 확실하게 사유의 탈중심화의 역량처럼 이해된 과학의 사실 자체 – 을 택하지 않았던 것은 어째서인가? 어째서 철학은 과학을 사유함에 있어 그런 초월적 관념론으로 흘러가게 되었는가? 마땅히 그래야 했듯이 과감하게 사변적 유물론으로 향하는 대신에 말이다. 어째서 과학이 철학에게 던진 가장 긴급한 질문이 철학에 대해 특별히 무익한 질문이 되어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사유가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떻게 사유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무엇을 사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거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 어떤 상관주의도, 아무리 자신의 반주관주의적 수사학을 고집할지라도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파괴하지 않는다면 통-시적 진술을 사유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상관주의가 통-시적 진술로부터 심오하다고 가정된 의미를 발굴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이미 보았듯이 사실상 통-시적 진술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며, 이것이 통-시적 진술의 가장 심오한 의미로 사유되어야 한다. 통-시적 진술이 갖는 의미는 이렇다. 사건 x는 사유가 출현하기 훨씬 전에 일어났다. 그리고 사건 x가 사유에 대한 사유가 출현하기 훨씬 전에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는 데 주의해야 한다. 실제로 첫번째 진술은 사건 x가 사유 이전의 사유에 대해서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건 x가 모든 사유 이전에 그리고 사유와 무관하게 실제로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을 사유가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버클리식의 주관적 관념론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아무리 주장할지라도 그 어떤 상관주의도 그런 진술의 문자그대로의 의미가 그것의 가장 심오한 의미라는 데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있는 그것이, 사유하는 존재에 대한 그 소여 형태들과는 무관하게 사유될 수 있다고 믿는 게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자마자, 과학이 말하는 것이 그 마지막 말이라는 것을 과학에게 인정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

 

   더 이상 철학에게, 과학의 통-시적 진술에서 그 궁극적 의미를 포착하는 과제, 어케 통-시적 진수링 궁극적 의미로서 기능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포착하는 과제 같은 그런 과제를 주는 게 가능하지 않다.

사실상 상관주의는 우리가 위에서 검토했던 양자택일을 통해 과학적 담화의 통-시성을 재파악해야하는 선고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1] 그 선행성이 실제로 우리 인류에 선행할 수도 있다. 우리의 경험적 실존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사유의 상관물의 자격으로서 말이다. 그때 우리는 후설의 초월론적 에고의 영속화와 비교될 만한 상관물의 영속화를 실행한다. 그것은 모든 경험적 에고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존속되리라고 가정된다.

   2] 그 선행성의 진짜 의미는, 사유에 선행하는 것으로서 사유에 제공되는 과거에 대한 현재적 사유의 회귀적 투사에 불과한 것으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첫번째 선택지 (상관물의 영속화)가 형이상학에로의 회귀(주관성에 있어 원초적이라고 가정되는 규정들의 절대화)로 되돌아오듯, 엄격한 의미에서 상관주의는 통-시적 과거의 소여의 생생한 현재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의 회귀투사라는 그런 결론에 항상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ㅡ 사유의 프톨주의가 과학의 코페주의의 심오한 의미이기를 원하는 ㅡ 근대의 분열자는 사유 안에서 수만 가지 방식으로 ‘뒤흔들리고’ 재사용되고 재활용된 그런 과거를 최고의 형태로서 과할 것이다. 그렇게 분열은 그 궁극적 형태 아래 말해진다. : 선pre-인간적 과거의 심오한 의미는 역사적 상황에 놓인 인간의 바로 그 현재로부터 출발한 회귀적 투사이다.

 

   자연의 엄격한 수학화와 함께 과학은 우리를 없애거나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시간을 우리에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자체를 변용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반면 철학적 시간은 그런 시간을, 본원적으로 상관관계적 시간성, 세계에의-존재의 시간성, 혹은 본원적이라고 가정된 역사성과 관계하는 시간성의 ‘파생적’이고 ‘통속적’이며 ‘표준화된’ 형태로 환원했다. (우리는 당연히 시간성에 대한 하이데거의 개념을 떠올리지만 그것만을 떠올리는 건 아니다. 여기서 현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의존이 ㅡ이것은 결코 완전히 극복되지 않는 의존이다ㅡ 상당히 문제적인 ‘유한성의 상관주의’로 현상학을 구속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세계와 세계와의 관계를, 자연과 인간을, 존재와 양치기를 본질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ㅡ함께 ‘존속’하거나 (아마도?) ‘명멸’하도록 예정된ㅡ 두 항들로 만들면서 말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다소 수수께끼같지만 설득력있는 성찰 : 나는 종종 인간이 없는 자연은 어떠할 것인지를,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다시 얻기 위해서 자연이 인간을 통과하면서 동요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를 묻곤 합니다*참고도서 참고)

 

   그리고 통-시적인 과거의 회귀투사된 상관관계로의 그러한 변환은 오늘날 사유를 얼마나 지배하는지 때때로 그런 변환이 철학자들에게 아직 남아있는 겸손한 지식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당신은 이전에 일어난 그것이 이전에 일어났다고 믿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면 보다 심오한 시간성이 존재하며, 그 시간성 안에서 세계와의-관계 이전은 세계와의-관계 양상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역방향의 시간성, 그것은 가장 뛰어난 학자들을 포함해서 비-철학자들의 자연적이고 소박한 태도에 고유한 의미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문제의 놀라운 점은 그런 생성-이런 생성의 중심에서 이전에 일어났던 것은 이전에 일어난 것이기를 그치고, 이후에 일어난 것은 이후에 일어난 것이기를 그친다-이, 진리를 파악한 자가 자신이 수용한 이념에 그것의 역행적 의미를 보급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선구자들이 그들을 뒤따르는 자들 이전에 세상에 나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왜냐면 선구자는 이전에 있었던 자가 아니라 이후에 그의 계승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고 주장했던 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구자로서 선구자는 계승자들 이후에 온다 등등. 그렇다. 그것은 철학자들의 이상한 지식이다. 철학자들의 그런 지식은 때때로 그런 식의 구르기roules-boules로, 즉 과학의 시간을 역방향으로 이중화함으로써 역전된 시간의 발명들로 환원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이상한 지식은 과학의 시간성 안에서 실제적으로 포착될 수 있는 것으로 남아있는 것을 포착할 수 없게 만든다. 말하자면 과학은 <이전에 일어났던 무엇을 이전에 일어났던 것으로, 그리고 우리 이전에 일어났던 무엇을 우리 이전에 일어났던 것>으로 정말로 사유한다. 그리고 과학이 폭로한 놀라운 <현시의 역설paradoxe de la manifestation)을 구성하는 것, 철학이 지난 이 세기 동안 열심히 사유해야 했을 그런 역설을 구성하는 건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사유의 그러한 역량이다. 모든 실험에 선행하는 세계에 대한 실험적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분석은 틀림 없이 폴리쾨르가 *시간과 이야기* 4부1장에서 제시한 훨씬 발전된 분서고가 유사하다. 그렇지만 이 텍스트를 참조할수도 있을 독자는 두 관점 사이에 (특히 칸트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존재하는 주된 차이들을 쉽게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의 요점 또한 매우 분명하다. 리쾨르의 전개는 모순적이고, 우리의 전개는 사변적이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칸트 이래 무슨일이 일어났기에 그런 경로가 중단되게 되었을까? 어케 해서 사변적 사유에 대한 초월적 거부가 철학의 사유장을 완전히 지배하기에 이르렀을까? 과학이 그 어느때보다도 자신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도출할 수 있는 그런 사변적 사유의 구축을 강력하게 요구했는데 말이다. 현재의 상관주의는 ‘칸트의 재앙’이 악화된 귀결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칸트의 재앙’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철학자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과학적 혁명의 열쇠를 제공한다고 가정된 상관관계적 환상을 받아들였을까? 과학적 혁명이 철학자들이 진술했던 것의 정반대를 해명하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우리는 단지 칸트의 말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의 고백을 살펴보건데 그를 ‘독단주의의 잠’으로부터 ‘깨어나게’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가 그리고 그를 뒤따르는 모든 상관주의자들이 사유에서의 모든 형태의 절대성을 포기하게끔 결정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칸트는 분명히 말한다, 그것은 흄이라고. 달리 말해서 흄에 의해 정립된 인과적 연결의 문제라고, <다시말해, 보다 일반적으로 충족 이유의 원리의 모든 절대적 타당성의 파괴>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칸트의 ‘재앙’의 근본적 세가지 시간적 계기가 어케 성립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 근원에 있는 환영의 본성과 함께 말이다.

 

   1] 코페-갈릴 사건은 자연에 대한 수학적 인식이라는 이념을 세운다. 그때부터 자연은 감각적 성질들을 박탈당한다. 갈릴레이 사건을 첫번째로 승인했던 인물은 데카르트다. 자연에 대한 수학적 인식과 유일한 사유의 속성들처럼 고려된 성질qualia의 인식 사이에서 데카가 엄격하게 행했던 분배를 통해 물리학과 형이상학 사이에 최초의 균형이 세워진다. 요컨대 데카는 자연은 사유없이 존재한다는 것을(또한 자연은 생명 없이 있다. 왜냐면 데카에게 생명과 사유는 동등하기 때문이다), 사유는 수학을 경유해서 그런 탈주관화된 자연을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을 승인한다. 그러나 수학의 절대적 중요성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진실하다고 추정된 신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증명에 토대를 둔다. 그런 신만이 新科學의 진리의 역량을 보증할 수 있다.

 

   2] 그런데 갈릴레이 사건의 지속은 옛 형태의 모든 형이상학적 지식이 기만적이었음을 증명하면서 또 마찬가지로 물리학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적 토대의 공허함을 증명한다. 사실상 갈릴레이 사건은 세계의 수학적 탈주관화에만 놓이는 게 아니다. 그 사건은 그처럼-존재하는 것에 대한 모든 선험적 지식의 파괴에도 놓인다. 우리가 이 세계에 실존하는 것에 대해 결정적으로 필연적인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 우리가 그것을 하나의 사실로서 복원하는 데 그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 이런 생각들은 과학이 오래된 지식들을 파괴할 수 있는 역량을 제시하는 만큼 그 세력을 서서히 잃게 된다. 그것이 신과학의 이름으로 제시된 데카의 소용돌이 이론처럼 아무리 발전된 형태를 띨지라도. 따라서 흄 사건은 갈릴레이 사건에 대한 이차적인 철학적 승인이며, 이는 합리성의 모든 형이상학적 형태의 무효함을 증명하는 방식, 즉 이성 원리의 절대성이 무효함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식은, 그처럼 소여된 것이 무조건 그처럼 존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선험적으로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모든 증명 형태를 포기해야만 한다. 세계의 그처럼-존재함은 경험이라는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을 뿐이며,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증명될 수 없다.

 

   3] 그리하여 칸트사건은 상관관계적 인식을 철학적으로 합법적인 유일한 인식 형태로 만들면서, 지속적으로 안정적이고 결정적인 형태를 통해 어떤 형이상학의 붕괴를 제시한다. 철학에서 상관주의는 유일하게 합법적인 형태가 된다. 그것은 우리와 세계의 관계의 <조건적>지식이 되었으며, 사변적 형이상학을 내려놓는 한에서 –그렇다고 모든 보편성의 형태를 보기하지 않으면서– 과학을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이 된다. 라이프니츠가 원했듯 우리는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진리에 (무한하게 완전한 신 혹은 최상의 세계) 더 이상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절대적인 모든 형태를 포기해야 하고 현상들이 소여된ㅡ 일반적인 조건들을 끌어내는 데 만족해야 한다. 달리 말해, 선험적 진술들의 가능성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선험성을 절대적 진리들과 결합시키는 것을 그만두어야 하며, 그것을 표상의 보편적 조건들에 대한 규정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그런 재앙을 주재하는 환상은 우리가 ‘탈절대화적 함축’이라고 불렀던 그것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즉 <형이상학의 종언으로부터 절대자들의 종언에 이르는 귀결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과학이 모든 형이상학은 환영적이라고 우리를 설득했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절대자는 형이상학적 유형에 속하기 때문에, 과학을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절대자 형태를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정확히 그로부터 수학의 절대적인 영역 –사실상 근대 과학이 사유에 가져온 혁명의 본질 자체로 드러나게 될 절대적 영역–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그 안에 붙들어 매는 칸트적 재앙은 실제로 모든 형이상학의 형태들과 모든 절대자 형태의 포기에 놓인다.

 

   그런데 근대 과학의 진정한 요청은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오래된 지식들을 파괴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서 근대과학이 우리에게 믿기를 멈추라고 명령했던 게 확실히 있다. 그 믿음은 규정된 현실이 절대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다르게가 아니라 그처럼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지식이 증명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근대 과학은 또한 코페적 탈중심화의 형태를 통해 최초로 사유에 도입시켰던 또다른 방식의 절대성을 사유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코페의 과학적 사태를 더 이상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데카가 했던 것처럼 수학의 사변적 영역을 사유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데카처럼 진리의 본래적 양태를 보증할 수 있는 유일자라고 가정된 완벽한 <존재>의 실존을 증명하는 형이상학적 주장을 거치지 않으면서. 철학에서의 과제는 ㅡ상관주의와는 반대로 코페적 탈-중심화에 충실하게 남아있기 위해서ㅡ사실상 시효를 상실한 형이상학적 유형의 필연성으로 인도되지 않으면서 다시 한 번 수학의 영역을 절대화하는 데 있다. 문제는 이성 원리를 재활성화하지 않으면서 데카의 테제, 즉 수학화될 수 있는 것은 절대화될 수 있다는 테제를 확고히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급한 본사실성의 원리의 과제인 것처럼 보인다: 가설적이라 할지라도 절대화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공식화할 수 있는 모든 수학적 진술의 능력을 <형상>figure의 자격으로 도출하는 것. <모든 수학적 진술의 본질적 기준 자체로부터 모든 존재자의 우연성의 필연적 조건을 포착하면서>, ‘유일한’le 논리학을 절대화하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유일한’le 수학을 절대화하자.

 

 

   우리는 이제 ‘칸트의 문제’라고 부르게 될 어떤 것의 <사변적> 재공식화가 어떻게 성립되어야 하는지를 파악한다:자연을 수학화하는 과학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이 문제는 다른 두 가지 문제들로 나눠지는데, 그 각각은 구별된 방식으로 수학의 사변적 영역을 다룬다.

 

   1] 우선 칸트의 문제에 대한 사변적 해결은 선조적인 것의 문제에 대한 본사실적(혹은 통-시성의)해결을 전제한다: 모든 수학적 진술ㅡ다시말해 그 진술이 수학적인 한에서ㅡ은 필연적으로 참인 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립하는 것. 이미 진술된 테제ㅡ수학적으로 사유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가능하다ㅡ를 본사실적 원리로부터 도출하면서 확립하는 것.

 

   2] 그러나 덧붙여야 할 것은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인과적 연결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사유로 돌아온다– 칸트의 문제가 흄의 문제에 대해 <가설적 해결만이 아닌> 사변적 해결을 가정한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동시에 자연 법칙들의 <안정성>이 (이것이 모든 자연과학의 조건이다) <절대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는 합법성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 실제로 경험과학들이 가능하다면, 이는 자연법칙들의 사실상의 안정성 덕분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그런 안정성이 사유와는 무관한 사실처럼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현대적 프톨레주의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면 말이다. 따라서 자연법칙들이 본사실적 안정성을 시간성의 절대적 속성 그 자체로부터 끌어온다는 것을 해명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속성은 우리의 실존과는 무관한 시간의 속성, 가능성들을 총체화할 수 없는 시간의 속성이다. 그런데 이는 수학의 사변적 영역을 이전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서 재확립해야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수학적 진술의 가설적인 <아무러한> 절대적 영역을 도출해내는 것이 더 이상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특정한> 정리의 <무조건적으로 필연적이며> 절대적인 영역, 초한수의 비총체화를 지지할 수 있게 하는 영역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학의 이중적 절대화의 요청과 대면한다. 통-시성의 문제에 내재하는 절대화는 모든 수학적 진술이 권리상 우연적인 존재자를, 하지만 인간이 없는 세계 속에 실존할 수 있는 존재자를 기술한다고 말하는 데 있다. 그 존재자가 어떤 세계, 어떤 법칙, 어떤 대상으로 확인되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존재적ontique>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절대화이다. 그것은 가능하고 우연적인 존재자들과, 그것의 존재가 사유와는 무관한 것으로서 사유될 수 있는 그런 존재자들과 관련된다. 그러나 칸토르의 비-전체의 절대화는 존재적이 아니라 <존재론적인ontologique> 절대화를 전제한다. 왜냐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저런 가능한 현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구조 자체>와 관련된 것에 대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진술되어야 하는 것은 이런저런 가능한 존재자가 아니라 <그러한 바로서의> 가능성le possible comme tel이 <필연적으로> 비총체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초한수를 거부하거나, 모든 부분집합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집합의 불가능성을 거부하는 수학적 공리 체계들이 사유될 수 있을지라도, 그런 사실이 비-전체가 다른 모든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립할 수 있는 본사실적인 어떤 도출을 제안하도록 강요한다. 이것은 그 가능성들이 총체화될 수 있는 어떤 세계들과 그 가능성들이 총체화될 수 없는 다른 세계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확립해야 하는 것은 비-전체를 승인하는 수학적 이론들만이 존재론적 영역을 가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전체>에 대한 어떤 사유 가능성을 승인할 수 있는 다른 수학적 이론들은 존재적인 영역만을 가질 것. 왜냐면 그런 이론들이 말하는 총체성, 혹은 그런 이론들이 승인하지 않는 비총체성은, 그 이론들이 총체화할 수 있는 어떤 존재자, 총체화할 수 있는 어떤 세계를 기술한다는 사실로부터 나오기 때문. 그런 이론들은 세계들의 총체화될 수 없는 존재를 기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칸트의 문제에 대한 사변적 해결은 통-시성의 문제 <그리고> 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학의 절대적 영역의 도출을 거쳐야만 할 것이다. 첫번째 문제는 일반적인 문제의 사변적 해결을 조건으로 하며(이 해결 없이 과학은 자신에 내재하는 코페적 의미를 잃어버린다), 두번째 문제의 해결은 일반적 문제의 비-형이상학적 해결을 요청한다(이 해결없이 과학은 실재적 필연성의 신비들 속에서 자기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따라서 두 가지 문제 모두 본사실적 해결을 요청한다. 본사실적인 것이 모든 형이상학에 배타적인 사변의 <공간 자체>로서 정의되는 한에서.

 

   틀림없이 사람들은 이와 같이 공식화된 질문이 모호하게 남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제는 여기서 해결 그 자체를 다루는 게 아니었다. 과학의 코페주의와 철학의 프톨주의 사이의 불일치가 –그러한 분열이 유지될수 있게 하는 否認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한없이 깊어만 가고 있는 시점에서, 사유의 절대적 영역을 재발견하는 게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시급하다는 것을 설득시키려는 시도만이 우리에게 중요했다. 흄의 문제가 독단주의적 잠으로부터 칸트를 깨어나게 했다면, 사유와 절대자 사이의 화해를 약속하는 선조성의 문제는 상관주의적 잠으로부터 우리를 깨어나게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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