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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형이상학, 신앙절대론, 사변

 

   선조성을 사유하는 건 결국 사유없는 세계ㅡ세계의 소여 없는 세계ㅡ를 사유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은 상관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이끌어낸 현대철학자들의 존재론적 요청과 단절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사유가 어떻게 비-상관적인 것에, 즉 소여되지 않으면서도 존속할 수 있는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는 또한 실제로 사유가 어떻게 <절대자>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매우 잘 <풀려 있고>(absolutus의 첫번째 의미 ~ 라틴어 : 해방하다, 분리시키다의 격변화형), 매우 잘 분리되어 있어서 우리에 대해 비-상대적인 것으로서 제공되는 존재다. (우리가 실존하든 아니든 실존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주목할 만한 결과가 있다. 선조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절대자에 대한 사유와 다시금 관계 맺을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선조성을 통해 우리가 이해하고 합법화하려는 것은 바로 실험과학의 담화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과학은 어떤 절대적 진리를 자신의 고유한 수단에 의해 발견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을 포기하도록 우리에게 권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실증주의가 원하는 것처럼 <우리가 절대자를 추구하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과학의 고유한 절대성의 원천을 발견할 것을 명령한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그 무엇도 사유할 수 없다면 나는 선조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것이고, 그 결과 그것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과학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자의 인식에 대한 요구를 회복해야 하며, 그러한 인식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초월적인 것과 단절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다시금 선비판적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 우리가 다시금 독단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 그런 회귀가 분명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는 데 모든 어려움이 놓인다. 우리는 더 이상 형이상학자일수도 독단주의자일 수도 없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칸트주의의 계승자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데카르트의 명제, 그러니까 독단주의적 명제ㅡ제1성질과 제2성질의 차이ㅡ를 그 명제를 실격시키려는 비판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어가 더 이상 데카르트적 논증에 의해 지탱될 수 없다는 것,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다. 그 논증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낡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선 그런 시효소멸의 심오한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 왜냐면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우리는 데카르트 주의가 충분하지 않은 까닭을 이해하면서, 동일한 과정을 통해 절대자와의 또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연장 실체의 절대적 실존이라는 테제를 ㅡ물체들과 관계하는 수학적 담화들의 비-상관관계적 영향력이라는 테제를ㅡ 어떻게 합법화하는가?

 

   1] 나는 더할 나위없이 완전한 신의 절대적 실존의 증명할 수 있다.

 

   우리는 *형이상학적 성찰*에서 신의 실존에 대해 제시된 세 가지 증명 가운데 하나가, 칸트 이래 존재론적 증명(혹은 논증)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원리는 무한하게 완전한 존재라는 신의 정의로부터 신의 실존을 추론하는 데있다. 신은 완전한 것으로 정립되고, 실존은 완전함이기 때문에 신은 실존할 수 밖에 없다. 신을 사유하기 위한 내가 존재하든 아니든 상관 없이, 데칼ㅡ트는 신을 전적인 필연성에 의해 실존하는 것으로서 사유하기 때문에 절대적 실재 –나의 사유에 비상관적인 <거대한 외계>-로의 가능한 접근을 내게 보증해준다.

 

   2] 신은 완전하므로 내가 나의 오성을 올바르게 사용할 때 ㅡ 내가 명석판명한 관념들을 통해 추론할 때 ㅡ 나를 속일 수 없다.

 

   3] 내가 삼차원적 연장이라는 속성만을 부여할 때 판명한 관념을 갖게 되는 그런 물체들이 나의 외부에 실존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따라서 그 물체들은 결과적으로 나의 외부에 실존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신은 진실되지 않을 텐데, 이는 그의 본성과 모순되므로. *6성찰, 철학원리2부를 볼 것*

 

   우리가 그 내용과는 무관하게, 데카르트에 의해 수행된 절차의 본성을 고려한다면 증명이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1. 절대자의 실존을 확립하기 : 완전한 신(이것을 ‘첫번째 절대자’라 부르자). 2. 완전한 신은 기만하는 자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로부터 수학적인 것의 절대적 범위를 도출하기(이것을 ‘도출된 절대자’라고 부르자). ‘절대적 범위’는, 물체들에서 수학적으로(산술이나 기하학에 의해) 사유 가능한 무엇이 나의 외부에 절대적으로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증명 형식만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수학적 담화를 다른 어떤 방식으로 절대화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한다.

 

   즉 우리는 절대자에 접근해야 하는데, 절대자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수학적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면(완전한 신) 그것은 우리가 거기서 절대성을 끌어내도록 허락할 수 있는 무엇이어야 한다(연장체들의 실존을 보증하는 진실된 신). 따라서 우리 자신이 그런 형태에 복종하는 증명을 산출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로부터 내용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데카르트의 증명의 내용이 어떤 점에서 상관주의 비판에 항거할 수 없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앞의 증명을 상관주의자들은 어떻게 논박하는가? 사실상 사람들이 채택한 상관주의의 <모델>을 따르는 적어도 두 가지 가능한 논박이 존재한다. 실제로 우리는 상관주의를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약한’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칸트 모델과 명확한 방식으로 항상 주제화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오늘날 우세한 것처럼 보이는 ‘강한’ 모델이 그것이다. 우선 존재론적 증명에 대한 약한 모델의 논박-칸트-을 소개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이 모델 자체가 더 엄밀한 상관주의 비판에 실마리를 제공하는지를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점에서 이 ‘강한’ 모델이 절대자를 사유한다고 주장하는 시도 전부에 대해 가장 극단적 논박을 제시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미 말했던 바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은 쉬운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상관관계적 원환’의 논증을 존재론적 증명에 적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데카르트의 논증은 절대적 실존에 접근한다는 그의 계획 자체 때문에 허위다. 왜냐면 그의 증명 ㅡ 신은 완전하기 때문에 존재해야만 한다 ㅡ 은 필연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근데 그런 필연성이 어떤 궤변론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할지라도 그것은 절대자의 실존을 조금도 증명하지 않는다. 왜냐면 절대자의 실존은 오로지 <우리에 대해서> 필연적일 수 있기 떄문이다. 그때 그 어떤 것도 우리에 대한 필연성이 즉자적 필연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과장된 회의에 의한 논증을 재개한다고 해도, 그 자체에 의한 논증, 효력이 없는 논증의 진리를 믿게 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나의 정신이 본래부터 우회되어 있지는 않은지를 알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혹은 덜 다채로운 방식으로 말해보자면, 절대적 필연성이 항상 우리에 대한 필연성이라는 유일한 사실 때문에 필연성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으며, 오로지 우리에 대해서만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상관관계적 원환은 모든 절대화 과정에 내재하는 악순환을 폭로하는 데 있으며, 이는 제출된 논증들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진행된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증명을 검토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면 논박의 핵심은 절대자를 사유한다는 주장과 관계하며, 증명의 결과에 사용된 양태들과 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변증론에서 존재론적 증명을 그런 방식으로 논박하지 않는다. 사실상 칸트는 데카의 논증 자체의 규칙을 따르면서 논박을 제시한다. 그는 데카의 논증의 고유한 궤변론적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어째서 저 논증방식에 만족하지 않는가?

 

   데카르트 논증의 핵심은 실존하지 않는 신은 하나의 <모순적> 개념이라는 생각에 근거한다. 비-존재자로서 신을 사유한다는 건 데카르트에게 결국 주체와 모순관계에 있는 술어를 사유한다는 것이다. 세 각을 갖지 않을 수도 있는 삼각형을 사유하는 것처럼 말이다. 삼항조의 각이 삼각형의 정의에 속하는 것처럼 실존은 신의 정의 자체에 속한다. 그런데 그런 논증을 실격시키기 위해 칸트는 신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있어 실제로 그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야만 한다. 왜냐면 모순이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데카가 결과적으로 절대자에게 접근했다고 인정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비판서의 저자가 사물 그 자체가 인식불가능하다고 주장할 때 동시에 그것이 <사유가능>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칸트는 논리적 모순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선험적 앎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우리가 범주적 인식을 사물 그 자체에 적용시킬 수 없다면, 이와 반대로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모든 사유의 논리적 선행조건에 종속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에게서 두 명제들이 절대적인 존재론적 범위를 획득한다.

 

   1] 사물 그 자체는 비-모순적이다.

   2] 사물 그 자체는 사실상 실존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근거 없이 스스로 현상하는 현상들이 실존할 것이기 때문인데, 그것은 칸트에게 있어 모순이다.

 

   그렇기에 데카르트의 테제를 논박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면 신이 없다는 게 모순이라면, 칸트의 바로 저 시점에서 신이 실존한다는 게 절대적으로 필연적일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이것은 우리에 대해서만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논리적 원리의 사용만으로도 사물 그 자체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 비판의 원리는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듯, 이미 실존한다고 전제된 사물과 그것의 술어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술어 사이에 성립하는 모순이 아닌 어떤 다른 모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 있다. 내가 삼각형이 실존한다고 전제한다면 모순 없이는 세 개 이상이나 이하의 각을 삼각형에 부여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그 삼각형을 삭제한다면, 즉 ‘내가 술어와 함께 주어도 제거한다면, 아무런 모순도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에 모순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어는 자신의 개념에 의해 자신의 실존을 결코 사유에 강요할 수 없다. 왜냐면 존재는 주어의 개념의 일부가 전혀 아니며, 주어의 술어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는 순수한 자리로서 개념에 부가되기 때문이다. 실로 사람들은 존재가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실존을 소유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ㅡ 완전함으로 사유되기 때문에 실존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실존을 그 수용자에게 선험적으로 수여할 수 있는 ‘굉장한 술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흄 이후에 칸트는 규정된 존재자가 실존하는지 아닌지를 우리가 언제나 모순 없이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존재론적 증명을 실격시킨다.

 

   존재자에 대한 그 어떤 규정도 그것이 실존하는지 아닌지를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무한정하게 완전한’이라는 술어로 어떤 것을 말한다고 해도 그로부터 그러한 술어의 주어가 실존하는지를 추론할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가 그로부터 주어가 실존한다고 추론한다면 이는 그러한 술어를 통해 이치에 맞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론적 증명에 대한 칸트의 이런 논박(772)이 실로 데카르트의 논증에 대한 비판 너머로 나아간다는 것을 안다. 문제가 되는 게 단지 신의 실존에 대한 증명을 거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규정된 존재자의 절대적 필연성을 입증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증명을 거부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존재자 – 규정된 res – 가 필연적으로 실존한다고 진술하는, 그런 필연성의 존재론적 체제를 ‘실재적 필연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런 유형의 필연성은 참으로 모든 독단주의적 형이상학에 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독단주의적이라 함은 이것 혹은 저것, 즉 규정된 모든 것이 ㅡ 이념, 순수 행위, 원자, 분할될 수 없는 영혼, 조화로운 우주, 완전한 신, 무한 실체, 시계정신, 세계역사 등 ㅡ 절대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인바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언제나 주장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형이상학을 ‘이런 저런 존재자는 절대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유형의 진술에 의해 최소한으로 특징짓는다면, 그때 우리는 형이상학이 존재론적 증명과 함께 ㅡ ‘존재자가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그것이 절대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진술과 함께 ㅡ 정점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존재론적 증명은, 그 자신의 본질만으로 자신의 실존 이유를 제공하는, ‘더할나위 없는’ 필연적 존재자를 정립한다. 신이 필연적으로 실존해야만 하는 건 신이 본질상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저 증명이 라이프니츠에 의해 최초로 정식화된 원리의 최고점과 내부적으로 연관된다고, 그렇지만 그것이 이미 데카의 저서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것은 모든 사물, 모든 사실, 모든 사건이 다른 식이 아니라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 필연적 이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성 원리>다. 왜냐면 그런 원리는 모든 세속적 사실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사유가 존재자와, 존재자의 그렇게 있음의 무조건적인 총체성의 이유를 밝힐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때부터 사유는 세계의 사실들의 이유를 세계의 이런 저런 법칙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사유는 이성 원리에 따라 그런 법칙들이 그렇게 존재하는 이유와, 결과적으로 세계 자체가 그렇게 존재하는 이유를 밝혀야 한다. 그리고 그런 ‘세계의 이유’가 제공된다 할지라도 다시 그 이유의 이유를 밝혀야 할 것이고, 이는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유가 이성 원리에 복종하면서도 무한정한 회귀를 피하려면, 사유 자신의 이유까지도 포함한 모든 것의 이유일 수 있는 어떤 하나의 이유에 도달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그 어떤 이유를 조건짓지 않는 이유, 존재론적 증명만이 끌어낼 수 있는 이유이며, 이는 그런 이유가 ‘x’의 실존을 –‘x’가 아닌 어떤 다른 존재자에 대한 규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것에 대한 규정을 통해서만 확인하기 때문이다. X는 완전하기 때문에 존재해야 하며, 따라서 causa sui의 자격으로, 자기자신의 유일한 원인의 자격으로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최소한 하나의>존재자가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는 테제(실재적 필연성의 테제)로 모든 독단주의 형이상학이 특징지어진다면, <모든> 존재자는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는 테제(이성원리)내에서 형이상학이 정점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와 반대로, 독단주의적 형이상학의 거부는 <모든> 실재적 필연성의 거부를 의미한다. 하물며 그것은 이성원리의 거부와, 필연성의 체계가 자기 안으로 닫히게 할 수 있는 요체인 존재론적 증명의 거부를 의미한다. 그런 거부는 규정된 존재자는 무조건 실존해야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그 어떤 합법적 방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지하도록 강요한다. 지나가면서, 우리는 그런 독단주의에 대한 거부가 모든 이데올로기 비판의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는데, 이는 미끼처럼 작동하는 모든 표상에서 이데올로기가 식별될 수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실존하는 무엇이 전적인 필연성에 의해 실존해야 한다는 것을 확립하려는 목표를 가진 온갖 형태의 유사 합리성에서 이데올로기가 식별될 수 있는 한에서 그렇다.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 비판은 언제나,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제시된 사회적 상황이 사실상 우연적임을 증명하는 데 있으며, 그것은 필연적 실체들의 환영적 생산처럼 이해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시대의 형이상학의 시효소멸을 다시 문제 삼으려는 게 아니다. 왜냐면, 이 신, 이 세계, 이 역사, 마지막으로 현실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이 정치체제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며 그것인바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런 독단주의, 그런 <절대주의>는 사실상 되돌아가는 게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사유의 어느 한 시대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조성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건들이 명확해지는 동시에 상당히 간추려진다. 사실상 독단주의로 회귀하지 않으면서도 선조적 진술들의 의미를 보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그 어떤 존재자에게로도 재인도되지 않는 절대적 필연성을 발견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절대적 필연성에 의해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을 사유하지 않으면서 절대적 필연성을 사유해야 한다. 이 진술의 역설적 외양을 당분간 그대로 놓아두자. 당장 우리가 의심하지 말아야 할 유일한 사실은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론적 증명처럼 이성 원리의 무조건적인 유효성을 믿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선조적인 것의 상관관계적 해석들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면 이는 실로 해결의 원리를 찾아야 하는 곳이 바로 그런 진술 – 절대적 존재자 없는 절대자라는 진술 –에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시에 그것을 이렇게 정식화 : 절대자 일반에 접근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유를 <사변적>이라고 명명하자. 절대적 존재자에 접근한다고 주장하는 – 혹은 이성 원리를 경유해서 절대자에 접근한다고 주장하는 – 모든 사유를 <형이상학적>이라 명명하자. 모든 형이상학이 정의상 사변적이라면 우리의 문제는 결국 역으로 <모든 사변이 형이상학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립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절대자 전부가 독단주의적이지는 않다는 것, 절대주의적absolutiste이 아닐 수 있는 절대화하는absolutoire 사유에 대한 검토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조성에 대한 질문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탈절대화적 함축’>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무엇, ‘형이상학이 낡았다면, 절대자 역시 낡았다’라고 생각하는 무엇에 대한 비판과 관련되어 다시금 나타난다. 우리는 오로지 독단주의적 형이상학의 종언으로부터 절대자들의 종언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그런 추론에 대한 반박을 통해서 원화석의 역설에 대한 해결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전에 상관주의의 가장 엄밀한 형태 그리고 상관주의의 가장 현대적 형태처럼 보이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왜냐면 상관관계의 가장 근본적 모델과 대결함으로써만 우리는 탈절대화가 모든 철학의 실제적으로 극복불가능한 지평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칸트의 초월 철학이 ‘약한’ 상관주의와 일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째서 그런가? 사유가 절대자와 맺는 모든 관계를 비판 철학이 금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판은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완전한 인식(초감성적인 것에 대한 범주들의 완전한 적용)을 배척하지만 즉자적인 것에 대한 사유가능성을 유지한다. 따라서 우리는 칸트를 따르면서 선험적인 것을 알며, 사물 그 자체가 비모순적이라는 것을, 그것이 실제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을 안다. 그와 반대로 상관주의의 강한 모델은 우리가 즉자적인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이 비합법적이 아니라 어쨌든 그것을 <사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동등하게> 비합법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탈합법화의 논증은 매우 간단하며 잘 알려져 있다.

 

   문제가 되는 건 여전히 그리고 늘 상관관계적 원환이다. 실제로 어떤 놀라운 작업에 의해 칸트적 사유가 마침내 자기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하기는 했던가? 우리에 대해 사유 불가능한 것이 즉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말이다. 모순은 사유 불가능하다. 이에 동의해보자. 그러나 칸트가 모순을 진리로 만들 수 있는 전능한 힘을 가진 –데카르트가 단언할 수 있었던 바와 같이 – 그 어떤 신도 실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허락한 것은 무엇인가? 칸트는 자기자신이 그렇게 했듯, 우리가 즉자적 사물을 비모순이라는 공허하고 전제된 원리에 종속시킬 때,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우리가 즉자적인 것 속으로 매우 깊숙하게 침투할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신의 역능이 논리적 비일관성으로까지 나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건 오만한 것처럼 보인다. 강한 상관주의가 그런 전능한 힘의 신을 확증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강한 상관주의는 신의 가능성에 대한 모든 논박을 실격시키는 데 만족한다.

 

   게다가 전능한 힘의 신이라는 저 가설과 ‘쌍을 이루는 허무주의’ 역시 옹호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문제가 되는 건 칸트의 두번째 절대 명제 ㅡ 우리의 표상 너머에 사물 그 자체가 <있다> ㅡ 를 거부하는 테제다. 사실상 사람들은 현상들 너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의 세계가 모든 것들이 종국에는 집어삼켜질 수 있는 어떤 무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무엇을 걸고 선험적으로 논박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현상이 그 어떤 즉자적 사물에 의해서도 지탱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들은 ‘현상적 영역들’만이 실존한다고, 다시 말해 저 영역들 사이에 부여된 초월적 주체들, 인간이 사라진다면 모든 것이 다시금 그 안으로 빠져들 그런 절대적 무 가운데서 진화하고 ‘부유하는’ 초월적 주체들만이 실존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한 관점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할 것인가? 우리는 그처럼 사용된 ‘무’라는 단어를 통해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는 것인가, 의미를 비워낸 어떤 한 단어를 말하는 것인가? 그러나 정확히 거기에 강한 상관주의에 있어서 합법적인 무엇이 있다.

 

   왜냐면 사유는 우리에게 있어 몰상식적인 것이 그 자체로 진실된 것일 수 있을 가능성을 배척할 그 어떤 수단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의미를 비워낸 무엇이 불가능한 게 되는가? 우리가 아는 한, 그러한 의미의 절대성을 우리에게 보증할 수 있단 생각을 가지고 즉자적인 것을 탐험하고 나서 되돌아온 자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다음의 진술들, ‘모순은 가능하다’, ‘무는 가능하다’는 완전히 의미를 비워내지는 않았는데, 왜냐면 그것들은 식별가능하기 때문이다. 모순처럼 보이는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은 무의 위협에 대한 믿음과 같지 않다. 왜냐면 저 두 테제들에 기인한 삶의 태도들은 서로 충분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유 불가능한 것은 신앙들과 신비들로 굴절된다.

 

 

   우리가 과감히 맞서야 하는 건 바로 그런 탈절대화의 강한 모델이다. 왜냐면 그것은 사유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는 무엇을 사유할 가능성을 가장 확고하게 금지하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그 모델은 사유의 두 가지 결정에 근거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번째는 충분히 연구되었지만 두번째는 아직 검토되지 않았다.

 

   첫번째 결정은 모든 상관주의의 결정이다. 그것은 사유내용과 사유행위의 본질적 분리불가능성이라는 테제다. 우리는 자기 원인에 의해 존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만 사유에 소여된 것과 관계한다.

 

   이러한 결정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실재적>이거나 <유물론>적인 유형의 절대자들 모두를 충분히 실격시킬 수 있다. 사변적이기를 원할 수도 있는 모든 유물론은 ㅡ 다시말해 일정한 유형의 <사유없는 실체>를 절대적 현실로 만들게 되는 유물론은 ㅡ 실제로 사유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어떤 것은 사유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과> 사유는 사유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해야만 하는 무엇을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해야만 한다. 따라서 유물론이 사변적 경로를 채택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사유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서 어떤 주어진 실재를 사유하는 게 가능하다고 믿을 수밖게 없게 된다. 모든 유물론의 패러다임인 에피쿠로스주의가 그런 경우다. 에피쿠는 사유가 공백과 원자의 개념들을 경유해서 모든 것의 절대적 본성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런 본성이 사유 행위와 필연적으로 상관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사유는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만, 심지어 원자적 합성물들로서, 다시말해 요소적 본성들의 실존에 비본질적으로 실존하기 때문이다(심지어 신들도 분할될 수 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상관관계적 관점은 실재가 언제나 이미 어떤 존재자에게 스스로를 소여한다는 사실을 실재로부터 제거하는 건 상상할 수 없다고 고집한다.

 

   언제나 이미 ~에 소여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사유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런 소여를 부여받을 수 없는 존재자 없이, 다시 말해 일반적 의미에서 이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ㅡ 세계를 직관하고, 세계에 대해 논할 수 있는 ㅡ 존재자 없이 세계를 사유할 수 없다. 우리는 강한 모델의 이런 첫번째 결정을 ‘비분리적인 것의 우선성’ 혹은 ‘상관물의 우선성’이라 명명할 것이다.

 

   강한 모델의 두번째 결정은 우리를 한층 더 몰두하게 만들 것이다. 실제로 강한 모델은 외관상 더욱 일관적이기에 더욱 위협적인 절대자의 두번째 유형을 물리쳐야만 한다. 우리가 1장에서 간단히 거론했던 저 두번째 형이상학적 전략은 <상관관계 자체를 절대화>하는 데 있다. 논증 일반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강한 모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칸트적 개념이 인식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유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 가장 현명한 결정은 그런 즉자적인 것의 이념 전체를 <삭제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사람들은 즉자적인 것이 사유될 수 없기 때문에 진리를 결여하고 있으며, 오로지 주체-대상 관계를 위해, 혹은 보다 본질적이라고 판단되는 또다른 상관관계를 위해 그것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 유형의 형이상학은 주체성의 다양한 심급들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어떤 지성적인, 의식적인, 혹은 생명적인 항이 실체화된다는 특징을 갖게 될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내에서의 표상, 셸링의 자연(객관적 주체-대상), 헤겔의 절대정신, 쇼펜하우어의 의지, 니체의 힘에의 의지(혹은 힘에의 의지들), 베르그손의 기억의 짐을 실은 지각, 들뢰즈의 생명 등. 상관물의 생기론적 실체들(니체, 들뢰즈)이 ‘주체’에 대한 비판들, 게다가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들과 쉽게 동일시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사변적 관념론과 동일한 이중의 결정들을 공유하며, 이 결정들은 그것들이 소박한 실재론 혹은 초월적 관념론의 어떤 변종과 합류되지 않도록 보호한다. 이중의 결정들은 이렇다.

 

   1] 세계와의 관계의 어떤 일정한 유형이 아닌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따라서 지성도, 의지도, 생명도 없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불가능하다.)

   2] 위의 명제는 우리의 인식에 상대적으로서가 아니라 절대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비분리적인 것의 우선성은 매우 강력해져서, 근대에는 사변적 유물론 마저도 생명과 의지의 반합리주의적 학설들의 지배를 받았다. 비유기체에는 생명적이거나 의지적인 것인 그 어떤 것도 있지 않을 거라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채택했을 ‘물질의 유물론materialisme de la matiere’에 손상을 입히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생명>의 형이상학과 <정신>의 형이상학의 대결은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물려받은 뿌리깊은 합의 –완전히 비주관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를 감춘다.

 

   우리의 모델에 대한 분석을 계속하자. 강한 상관주의가 실재론자라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쉽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주관주의적’ 형이상학자라는 ‘내부의’ 적으로부터 벗어나는 건 훨씬 힘든 일이다.

 

   사실상 저 외계가 근본적으로 사유에 접근 불가능하다고 분명히 주장했을 때, 무엇의 이름을 걸고 우리의 표상 너머에 무언가 존속한다고 확언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강한 모델의 두 번째 결정이 개입해야만 한다. 그 결정은 더 이상 상관물과 관계하지 않으며 상관물의 <사실성>과 관계한다.

 

   칸트로 돌아가 보자. 칸트의 계획 – 초월적 관념론 – 과 헤겔의 계획 – 사변적 관념론 - 을 뿌리깊게 구별하는 건 무언가?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러할 것처럼 보인다. 칸트는 우리가 인식의 선험적 형식들(그에게 그것은 공간-시간의 감성적 형식과 오성의 12가지 범주들이다)을 단지 <기술>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헤겔은 그 형식들을 <연역>하는 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칸트는 헤겔과는 반대로 사유의 형식들에 절대적 필연성을 부여할 수 있는 어떤 원리나 체계로서 사유의 형식들을 이끌어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형식들은 (발생적 의미에서) 연역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기술의 대상일 수 있는 ‘최초의 사실’이다. 그리고 즉자의 영역이 현상과 구분될 수 있다면, 이는 정확히 형식들의 사실성과 그 형식들이 단지 기술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왜냐면 형식들이 헤겔의 경우에서와 같이 연역될 수 있다면 그것은 형식들과 다를 수 있는 즉자가 실존할 가능성이 삭제됨으로써 형식들이 무조건적인 필연성에 속하는 것으로 계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관념론과 강한 상관주의는 동일한 테제, 다시 말해 즉자의 사유 불가능성에서 출발하며, 그로부터 상반된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낸다. 절대자의 사유 가능성 혹은 사유 불가능성. 두번째 결론에 유리한 방식으로 두 주장들을 분리시키는 건 바로 상관관계적 형식들의 회복 불가능한 사실성이다. 따라서 실제로 우리가 그런 형식들의 절대적 필연성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거부할 때 우리에게 소여된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즉자의 존재 가능성을 배제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강한 상관주의는 칸트주의처럼 형식의 사실성을 주장하지만, 그런 사실성을 논리적 형식, 말하자면 비-모순성에 부여한다는 점에서 칸트주의와 다르다.: 왜냐면 우리는 감성과 오성의 선험적 형식들을 단지 기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 가능한 모든 명제에 내재한 논리적 원리들의 절대적 진리를 연역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 논리적 원리들을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순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고 주장하는 건 무의미하다. 우리에게 소여된 유일한 것, 그건 바로 우리가 모순적인 그 어떤 것도 사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성의 본성을 보다 잘 파악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왜냐면 탈절대화의 과정에서 사실성의 역할은 상관물의 역할만큼 중요해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의 모델, 다시말해 강한 모델의 관점에서 저 사실성을 세계의 사물들의 단순한 소멸 가능성과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 실제로, 형식의 사실성은 물질적 대상의 파괴가능성, 혹은 생명력의 퇴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떤 존재자, 혹은 어떤 사건이 우연적임을 주장할 때 나는 실증적 앎을 소유한다. : 나는 이 집이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저 사람이 달리 행동하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임을 안다 등등.

 

   <우연성>은 물리적 법칙들이 일률적으로 어느 한 사건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것을 가능케 한다는 – 존재자의 창발, 존속, 소멸을 가능케 한다는 –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실성>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세계의 전제된 구조적 상수들 – 상관주의마다 달라질 수 있지만 표상에 관한 한 최소한의 구성적 역할을 매번 수행하게 될 상수들(인과성의 원리, 지각형식들, 논리적 법칙 등) – 과 관계한다. 그런 구조들은 고정되어 있다. 나는 그것들의 변이를 결코 경험하지 못하며, 논리적 법칙의 경우 그 법칙의 변형을 표상할 수조차 없다(예컨대 모순적인 존재 혹은 자신과 비-동일적인 존재를 표상하기). 그렇지만 그런 형식들은 고정되어 있을지언정 절대자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실을 구성한다. 왜냐면 나는 형식들의 필연성을 정초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식들이 정초의 담화가 아니라, 오로지 기술적 담화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형식들의 사실성이 계시된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건 저 사실인데, 그것은 내가 다른 존재를 경험할 수 있는 단순히 경험적인 사실들과 상반되는, 그 어떤 실증적 앎도 가져다줄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면 우연성이 세계의 사물이 다르게-존재할 수 있음에 대한 앎이라면, 사실성은 오로지 상관관계적 구조가 그처럼-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무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후를 위해 이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상관주의자는 상관관계적 형식들의 사실성을 지지하면서, 그 형식들이 실제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상관주의자는 다만 저 형식들이 변하는 게 어째서 불가능한지를 사유할 수 없다는 것, 어째서 우리에게 소여된 현실과 전혀 다른 현실이 선험적으로 배제될 수 있는지를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할 뿐이다. 따라서 이 두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 세계에 존재할 수 있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모든 것, 세계에서 일어나거나 혹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말해지는 세계내적 우연성 – 이것은 그것을 통해 세계가 나에게 소여되었던 저 언어와 표상이라는 상수들을 위반하지 않는다.

  • 그런 상수들 자체의 사실성, 이것은 저 상수들의 필연성<이나> 우연성을 확립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우리의 본질적 무능력과 관계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실성과 함께 객관적 현실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사실, 규정된 상수들에 의해 구조화된, 말해질 수 있고 지각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직면하는 객관성의 넘어설 수 없는 한계들을 경험한다. 그것은 세계의 논리성이라는 사실 자체, 혹은 세계의 표상 내적 소여라는 사실 자체이며, 그런 사실들은 논리적이거나 표상적인 이성의 구조들을 벗어난다. 즉자적인 것은 우리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할 수조차 없을만큼 불투명해진다. 또한 그때 즉자적인 것이라는 용어는 오로지 사실성만을 위해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사실성은 세계의 <전적인-타자>Tout-Autre의 가능성을, 바로 그 세계의 한 중심에서, 우리로 하여금 파악하게 한다. 그렇지만 ‘가능성’이라는 용어를 괄호 속에 놓는 게 좋은데, 왜냐면 사실성에서 문제가 되는 건 <전적인-타자>의 실제적 가능성에 대한 앎이 아니라 그 불가능성을 밝힐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에 대해 즉자적인 것과 관련된 모든 가설들 – 그것이 있다는 것, 그것이 필연적이라는 것, 그것이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이 우연적이라는 것 등등 – 이 동등하게 합법적으로 남아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가설적 가능성 자체이다. 그런 ‘가능성’은 <전적인-타자>에 대한 실증적 앎이 전혀 아니며, 그것이 있을 것이라거나 있을 수도 있다는 식의 어떤 실증적 앎도 아니다. ‘가능성’은 다만 우리의 본질적 <유한성>, 그리고 세계 자체의 <유한성>(세계가 물리적으로 무한하다 할지라도)의 표식이다. 왜냐면 사실성은 앎과 세계의 가장자리에 토대의 부재라는 장식을 다는데, 그 이면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그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으며, 심지어 사유될 수도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말해서 사실성은 존재론적 증명이 비합법적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비-모순 자체에 이유가 부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자격에서 비-모순은 우리에 의해 사유 가능한 무엇의 규범일 뿐이지 절대적 의미에서 가능한 무엇의 규범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성 원리에 대한 비판을 극단에까지 밀어붙인다. 사실성은 소여의 상수들로서의 소여의 ‘비이성irraison’[이유의 부재]이다.

 

   그러므로 강한 모델은 다음의 명제로 요약된다. <사유불가능한 무엇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모순적 현실의 절대적 불가능성이나 모든 사물들의 무의 절대적 불가능성을 이성 내에서 정초할 수 없다. 도대체 저 용어들에 의해 규정된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사실성은 명확하고 주목할만한 어떤 결과를 갖는다. 절대자에 대한 <비합리적> 담화를 그것의 비합리성을 핑계로 실격시킨다는 건 합리적으로 비합법적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강한 모델의 관점에서, 종교적 신앙은 세계가 어떤 사랑 행위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혹은 <신>이 신 자신과 자신의 <아들>간의 완전한 일치와 차이라는 외관상의 모순을 진리로 만들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가졌다고 당연히 주장할 수 있다. 그런 담화들은 비록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인 것에서 유래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신화적이거나 신비적이라는 점에서 어떤 의미를 보존한다. 그래서 강한 모델의 가장 일반적 테제는 합리적 의미에서는 측정할 수 없는 의미 체제의 실존과 관계한다. 왜냐면 그것은 세계의 사실들과 관계하는 게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사실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관주의 그 자체는 종교적이든 시적이든 ‘그 어떤’ 비합리적 입장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자에 대한 그 어떤 실증적 담화도 만들지 않으며, 사유의 한계들을 사유하는 데 만족한다. 언어에 있어서 저 한계들이, 우리가 단지 그 테두리만을 파악하게 되는 그런 경계선처럼 있는 한에서 말이다. 상관주의는 규정된 종교적 신앙을 실증적으로 정초하지는 않으나, 그 내용이 사유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신앙을 탈합법화하려는 이성의 모든 시도를 실제적으로 토대에서부터 무너뜨린다.

 

   그처럼 이해된 강한 모델은 하이데거만이 아니라 비트겐에 의해서도 –말하자면 20세기 철학의 두 주요 흐름 (분석철학과 현상학)의 저명한 대표자들에 의해 – 재현되는 것 같다. 그리하여 *트락타투스*는 세계의 논리적 형식은 세계의 사실을 말하는 방식으로 말해질 수 없으며 다만 ‘보여질 수’ 있을 뿐이라고, 다시 말해 그것은 논리학의 범주와 과학의 범주로부터 벗어나는 어떤 담화의 체제에 따라 지시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계가 말해질 수 있다는(논리적 구문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논리학의 담화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로부터 명제 6.522가 나온다. ‘확실히,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보인다, 그것이 <신비로운 것>이다.’ 그러나 저 신비로운 것은 세계-너머에 대한 앎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에 있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사유할 수 없는 불가능성의 표시이다. 명제 6.44를 보자.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로운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는 하이데거가 표상의 내밀한 균열로서,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와 존재자의 소여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을 보았다. ‘모든 존재자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존재>의 목소리에 의해 부름을 받아 기적들의 기적 – 존재자가 <있다는 것> - 을 체험한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존재자가 있다는 것 혹은 논리적 세계가 있다는 것은 논리학의 지배와 형이상학적 이성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이는 저 ‘~있다 il y a’의 사실성, 확실히 사유 가능한 사실성 덕분이다. 왜냐면 문제가 되는 건 어떤 초월적 계시가 아니라 다만 여기 이 세계의 ‘내부적 테두리’의 파악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존재하는 무엇의 절대적 토대에 접근할 수 없는 우리의 본질적 무능력에 의해서만 사유 가능한 한에서, 나는 사유불가능한 무엇을 사유할 수는 없으나 사유불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사유할 수 있다.

 

 

   요약해보자. 약한 모델은 무조건적 필연성에 대한 모든 증명을 실격시키면서 이성 원리의 탈절대화를 주장했다. 강한 모델은 이성 원리의 실격을 더욱 강화한다. 그것은 모든 표상을 상관관계적 원환의 한계 안에 종속시키면서 비-모순의 원리의 탈절대화를 주장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절대자의 포기에 대한 현대적 정당화에 내재하는 두 가지 작용들을 이끌어냈다. 모든 ‘소박한 실재론’과 대립하는 상관물의 우연성만이 아닌, 모든 ‘사변적 관념론’과 대립하는 상관물의 사실성. (나는 다음의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 ‘소박한’ 실재론과 ‘사변적’ 관념론을 이야기하나. 다시 말해 상관주의 내에서, 위치상으로 절대자의 실재론적 양상은 절대자의 관념론적 양상보다 하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첫번째가 상관주의의 모든 형식과 단절하는 반면 두번째는 상관주의를 절대화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충분히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강한 상관주의의 두 가지 주요한 유형이 고려될 수 있는데, 이 두 유형은 다음의 질문 주위에서 구성되고 서로 대립한다: 사유의 탈절대화는 동시에 사유의 탈보편화를 함축하는가?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대답하는 철학자는 비판주의의 유산 아래 놓일 것이며, 칸트를 따르면서 우리와 세계의 관계의 보편적 조건들을 확립하려 할 것이다. 그 조건들을 경험 과학의 조건들로, 개인들 간의 언어적 소통의 조건들로, 존재자의 지각 가능성의 조건들 등으로 설정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강한’ 상관주의자들은 비판주의 정신에 충실하기를 원할지라도 전제된 절대성에 의해 비-모순의 보편성을 정당화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비-모순의 보편성으로부터] 사물 그 자체의 속성을 구성하는 대신, 예를 들면 소여의 말해질 수 있는 가능성의 보편적 조건, 혹은 상호주관적 소통의 보편적 조건 – 가능성의 규범이 아니라 사유가능성의 규범 – 을 구성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모든 보편적인 것이 과거 형이상학의 신비화의 잔여로서 남아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 ‘근본적인 유한성’이나 ‘후근대성’의 신봉자들이 그렇다 – 우리와 세계의 관계의 사실성을 <유한한 상황 자체>의 양태 안에서 사유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면 상황은 권리상 변형될 수 있으며, 우리가 그런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와 모든 인간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동이한 타당성을 지닌 그런 진술들에 접근한다고 믿는 건 환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세계’를 규정하는 상관관계들은 존재 역사의 어떤 규정된 시대에 내속적인 상황, 고유한 언어적 유희를 갖춘 어떤 삶의 형태에 내속적인 상황, 어떤 규정된 문화적인 해석 공동체에 내속적인 상황에 일치하게 될 것이다.

 

   두 입장에 대한 합법적인 유일한 질문은 이렇다. 우리가 세계와 유지하는 관계에 대한 앎의 한계가 그 관계의 본성 자체와 관련된 담화의 보편성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격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인가 아닌가? 두 입장 모두는 무조건적 필연성의 시효소멸에 동의할 것이며, 그때 유일한 질문은 상관관계의 <조건적> 필연성의 위상, 다시말해 소여와 언어의 가능성의 조건들의 위상과 관계할 것이다. 형이상학적 진술 – 존재자가 이러저러하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 은 후-형이상학적 진술 – 존재자가 <직접적으로> 이러저러하게 주어진다면 (지각될 수 있게, 표현될 수 있게 등등), 그것은 더욱 일반적인 (더욱 심오한, 더욱 본원적인) 조건에 의해 (밑그림을 통해 소여된다는, 비-모순적이라는 등등의 조건)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 – 에 자리를 내어준다. 더 이상 ‘x는 이러저러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해야 한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로서의 x가 그처럼 주어진다면, 그것은 조건에 의해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가 중요해진다. 논쟁은 그런 조건들의 규정과 관계하거나, 더 나아가 소여와 언어의 보편적 조건의 존재 여부와 관계할 것이다.

 

 

   강한 상관주의가 지지자들에 의해 언제나 그런 식으로 주제화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강한 상관주의의 현대적 함축은 이제 종교적 신앙들이 개념의 제약들과 관련해서 누리고 있는 듯한 면책 특권에서조차 분명히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어느 철학자가 기독교의 삼위일체에서 어떤 모순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그것의 가능성을 반박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논리학이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전적인-타자에 대한 레비나스의 사유가 불합리하다고 고집하는 철학자는 레비나스의 담화의 적절한 수준에까지 오를 수 없는, 먼지투성이의 자유사상가처럼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을까? 그러한 태도의 의미를 잘 이해해보자. 많은 현대 철학자들에 의해 종교적 믿음은 반박이 불가능한 것처럼 간주된다. 이는 단지 신앙이 정의상 그런 종류의 비판에 대해 독립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반박을 시도하는 게 철학자들에게는 <개념적으로> 비합법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를 믿었을 수도 있는 칸트주의자는 삼위일체가 조금도 모순적이지 않다고 주장해야만 했을 것이다. 강한 상관주의자는 이성이 자신의 수단들을 가지고 저 도그마의 진위를 논의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칸트적 입장과 현대인들 사이의 이러한 ‘간극’은 – [칸트의] 비판적 유산에 충실하려는 현대인들 스스로가 인정할 수도 있는 간극은 – 하찮은 것이 아니다. 사실상 이는 그 사이에 우리가 사유에 대해 형성할 수 있는 개념화 내부에 어떤 중대한 미끄러짐이 일어났음을 전제한다. 사물 그 자체의 인식불가능성과 그것의 사유 불가능성 사이의 간극은 실로 사유가 <그 자신의 고유한 운동으로부터> 다음의 사실을 합법화하기에 이르렀음을 가리킨다. 존재가 지나치게 불투명해져서 사유가 존재를 <로고스>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들마저도 위반할 수 있는 것으로 전제하게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존재와 사유는 동일하다’는 파르메니데스의 공준이, 칸트까지 포함한 모든 철학의 명령으로 남아있었던 반면에, 강한 상관주의의 근본적 공준은 ‘존재와 사유는 전적으로 다른 것일 수 있는 것처럼 사유되어야 한다’고 표현되는 것 같다. 상관주의는 존재와 사유의 실제적인 통약불가능성 – 예를 들어 모든 개념들로 약분될 수 없는 신의 실제적 실존 – 을 진술할 수 있는 위치에 자신을 놓고 있는 게 아니다. 왜냐면 그것은 상관주의가 분명히 자신에게 전적으로 금지하는 즉자적인 것에 대한 앎을 전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관주의는 적어도 존재-사유의 상관관계의 매우 근본적인 사실성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원하므로, 사유가 포함할 수 있는 것과는 공통의 척도를 갖지 않는 존재의 궁극적 가능성을 즉자적인 것에게 금지시킬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생각한다.

 

   이같이 상관관계의 극단화와 함께 존재와 사유의 <가능한 전적인-타자화>tot-alterisation possible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난다. 사유 불가능한 것은 다르게 사유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으로만 우리를 인도할 뿐이며, 전적으로 다르게 존재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절대적 불가능성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런 운동의 결론이 절대자들을 <사유한다>는 주장의 실종이며, <절대자들의 실종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 실제로 회복 불가능한 한계에 의해 낙인찍힌 자신을 발견하면서 상관관계적 이성은 그 자신이 절대자에 접근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담화들을 합법화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담화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그 담화들의 타당성의 합리적 정당화와 유사할 수 없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기꺼이 ‘절대자들의 종언’이라고 명명하는 무엇은 절대자의 타당성을 폐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절대자들을 인정하는 놀라운 허가로 이루어진다. 철학자들은 절대자들로부터 한 가지만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절대자들에게는 합리성을 주장하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 신앙 자체만을 책임지기 시작하면서, ‘사유의 탈절대화’로 이해된 형이상학의 종언은 절대자에 대한 모든 종교적 (혹은 ‘시학적-종교적’) 믿음에 대한, 이성에 의한 합법화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형이상학의 종언은 절대자에 대한 모든 주장들에게서 이성을 몰아냄으로써 종교적인 것들의 어떤 과격한 회귀의 형태를 얻게 되었다.> 혹은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들의 종언은 종교심의 무제한적 승리의 형태를 얻게 되었다. 물론 종교성의 현대적 회복은 역사적 원인들을 갖기 때문에 그것을 오직 철학의 변화로 환원시키는 것은 순진할 수 있다. 그러나 사유가 상관주의의 압력에 의해 비합리적인 것이 절대자와 관계할 때조차 비합리적인 것을 비판할 권리를 자신으로부터 몰수했다는 사실은 저 현상의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한 ‘종교적인 것들의 회귀’는, 우리가 결정적으로 빠져나와야만 하는 강력한 역사적 굴성 때문에 종종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저 굴성, 저 개념적 맹목성은 이렇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형이상학에 대한 모든 비판과 종교에 대한 비판이 ‘자연스럽게’ 나란히 진행될 것이라고 믿는 듯 하다. 그러나 그런 ‘비판들의 결합’은 실은 형이상학과 종교 사이의 특수하게 규정된 관계의 모습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실제로 절대자들에 대한 ‘형이상학적-종교적’ 비판을 행할 때마다 존재신학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둔다. 존재신학에 대한 비판이 동시에 유대-기독교적 신학의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인도되는 한에서 말이다. 왜냐면 후자는 모든 것의 원인인 최고 존재자의 이념에 전적으로 기초하면서, 유일신 신앙의 근거를 합리적이라고 전제된 진리들에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한 가지 지적을 해야만 하는데, 도대체 이상한 것은 그 지적이 더 이상 자명하지도 자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절대자를 사유한다는 형이상학의 주장을 비판할 때 결정된 <어떤 한> 종교를 약화시킬 수 있다 –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그때부터 후자는 다른 신앙들에 비해 자신의 신앙 내용이 우월하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자연 이성’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최고 존재자의 실존에 대한 모든 형식의 증명을 파괴함으로써, 일신론적 종교가 모든 다신론적 종교에 비해 우세해질 수 있게 되는 합리적 지탱물을 제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사실상 형이상학을 파괴하면서 결정된 어떤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에 반대하면서 유사-합리적 논증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움직임에 의해 – 바로 이 점이 결정적이다 – 당신은 신앙 일반의 주장, 자신만이 절대자로의 접근이 가능한 <유일한> 경로라는 주장을 정당화하게 될 것이다. 절대자에 대한 사유가 불가능해지면서, 절대자에 대한 방식으로 신의 비실존을 겨냥하는 무신론조차 신앙의 어떤 단순한 형식으로 환원될 것이다. 허무주의적 종교일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근본적인 선택들을 규정하는 무엇과 관련하여 더 이상 증명할 게 전혀 없기 때문에, 각자는 다른 자에 대해 자신의 신앙을 대립시킨다. 달리 말해서, 사유를 탈절대화하는 건 <신앙절대론적>fideiste 논의를 산출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논의는 단순히 ‘역사적’인 것이 아닌, ‘본질적’인 <신앙절대론>fideisme이다. 신앙절대론은 말하자면 결정된 어떤 종교적 사유(16세기 가톨릭의 신앙절대론의 경우처럼, 혹은 적어도 그러기를 원했던 자들의 경우처럼)에 의한 지탱물이 아니라 종교들 일반의 사유에 의한 지탱물이 된다.

 

   신앙절대론은 실제로 신앙의 타당성을 떠받칠 수 있는 (하물며 부인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에 접근한다는 형이상학의 주장에,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이성의 주장에 반대하는 <회의주의적 논의>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형이상학의 근대적 종언은 형이상학에 대한 신앙절대론의 승리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확신한다. 신앙절대론은 실제로 오래 전에, 반종교개혁contre-reforme에 의해 개시되었으며, 그 ‘정초자의 이름’은 몽테뉴이다. 여전히 빈번하게 행해지듯, 우리는 신앙절대론에서 반형이상학적 회의주의가 본질상 비종교적인 것으로 계시되기 이전에, 그 초기에 공공연히 드러내었을 수도 있을 단순한 외관적 형태를 발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회의주의에서 진정한 신앙절대론을 본다. 그것은 ‘본질적’이 되어버린 어떤 형태 아래에서, 다시 말해 <결정된 어떤 하나의 숭배에 특징적인 전적인 복종으로부터 해방된> 형태 아래에서 오늘날 우세를 점하고 있는 신앙절대론이다. 역사적 신앙절대론은 비종교성이 처음에 취하게 되었을 ‘가면’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러한바 종교성이며, 사유에 비한 신앙심의 우위라는 일반적 논의로서 계시되기 전에 (다른 무엇이 아닌 어떤 종교나 예배를 위한) 결정된 호교론의 ‘가면’을 취했을 그런 종교성이다. <형이상학의 근대적 종언은, 회의주의적인 한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종교적 종언일 수밖에 없었던 종언이다.>

 

  그리하여 형이상학적 절대자에 맞서는 회의주의는 절대자에 대한 온갖 신앙 형태 – 최악의 형태이든 최상의 형태이든 상관없이 – 안에서 신앙을 합법적으로 정당화한다. 기독교 신학의 형이상학적 합리화에 대한 파괴는 일반적이 되어버린 사유의 종교 되기를, <온갖 종류의 믿음에 대한 신앙절대론>을 낳았다. 역설적이게도 극단적인 회의주의적 논증에 의해 지탱되는 바 사유의 종교되기를 우리는 이성의 <종교화>라고 명명할 것이다. 합리화라는 용어와 대칭적이기를 바라는 저 용어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진] 유대-기독교 주의의 점진적 합리화에 정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사유 운동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철학은 신학의 노예처럼 외부적인 신앙의 압력 아래 놓이지 않으며, 철학 자체로부터 사유되는 것처럼 진행된다. 지금의 철학이 이제는 여하한 형태의 – 무신론일지라도 상관없이 – 신학의 자유주의적 예속자이기를 바란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형이상학의 영역을 떠나면서 절대자는, 지식의 관점에서, 그리고 오로지 믿음들이기만을 바란다는 사실에 의해서 동등하게 합법적인 무차별적인 다양한 믿음들로 쪼개져 버린 듯하다.

 

   그로부터 불신앙에, 다시말해 불신앙 논의의 본성에 심원한 변형이 일어난다. 회의주의와 형이상학의 주장들에 대한 비판 내에서 경쟁이 지나치게 고조된 나머지 우리는 결국 신앙선언들 모두에 대해 진리의 합법성을 부여했다. 그것들의 외관상의 내용이 터무니 없더라도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하여 <계몽의 시대>가 광신이라고 명명했던 것에 반대하는 투쟁은 모조리 <도덕화>의 기획이 되었다. 광신에게 내리는 유죄선고는 그 내용의 궁극적 허위성에 의해서가 결코 아니라, 그것의 실천적 (윤리-정치적) 결과들을 고려하면서 행해졌다. 이 점과 관련해서 현대 철학자들은 그와 반대로 믿음의 인간에게 철저하게 양보했다. 믿음의 인간이 사유를 대체하게 되었는데, 이는 사유가 자신의 최초의 결정과 관련해서 믿음에 기대기 때문이다. 최후의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기대할 수 있는 건 사유로부터가 아니라 오로지 신앙심으로부터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몽매주의에 대한 단순히 도덕적인 비판들이 무력해진다. 왜냐면 절대적인 그 어떤 것도 사유될 수 없다면, 우리는 최악의 폭력들이 몇몇 선택된 자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초월성을 요청하지 못할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화가 신앙 행위 자체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신앙 행위는 자체적으로 고귀한 가치에 속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종교화는 사유에서 신앙으로의 <분절>의 현대적 형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앙을 대하는 <사유> 자체의 변화를, 다시말해 <신앙에 대한 사유의 비-형이상학적 종속>을 가리킨다. 혹은 더 낫게는, 형이상학의 파괴라는 특수한 방식을 경유한 사유의 신앙에의 종속을 가리킨다. 그것은 탈절대화의 의미다. 사유는 더 이상 결정된 신앙심의 내용의 진리를 선험적으로 증명하지는 않으나 최후의 진리를 겨냥하는 여하한 형태의 신앙심의 동등하고 배타적인 권리를 확립한다. 서구의 현대성에서 교회로부터의 분리라는 사유의 광범위한 운동을 바라보는 의례적 판단과 거리를 두면서, 우리는 현대성의 뚜렷한 특징이 오히려 이렇게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탈기독교화됨에 따라 종교화되었다>. 현대인은 다른 모든 종교들에 대한 기독교 종교의 우월성이라는 이데올로기적(형이상학적) 주장을 기독교주의로부터 제거하는 한에서, 진실에 대한 모든 종교들의 동등한 합법성을 위해 심신을 바쳤다.

 

   그리하여 형이상학의 현대적 폐쇄는 – 우리가 <전적인-타자>라고 명명할 수 있었던 무엇에 의해 지배된 – 형이상학의 ‘회의주의적-신앙절대론적’폐쇄처럼 우리에게 나타났다. <전적인-타자>의 사유들의 주인들의 이름은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다. 왜냐면 이 두 철학자들의 사유 내용은 과거와의 근본적 단절을 구성하기는커녕 사실인즉 확증된 과거의 신앙절대론적 전통의 직접적 유산 아래 있기 때문이다. – 이 유산은 저 두 철학자들에 의해 그 잠재성의 최고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미 말했듯 몽테뉴에 의해 개시되고 가상디와 바일에 의해 확실하게 연장된 신앙절대론적 전통, 그 반형이상학적 성격에 의해 합리적인 것의 온갖 침입으로부터 신앙심을 보호하려는 경향을 늘 지니고 있었던 저 전통 말이다.

 

   *논리철학논고*에서 환기된 ‘신비로운 것’ 혹은 하이데거가 – ‘존재’라는 낱말까지도 포함하는 철학적인 그 어떤 것도 도입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 오랫동안 서술하기를 꿈꾸었다고 고백한 신학은 절대성을 향한 열망의 표현이며, 그 절대성은 형이상학적인 그 어떤 것도 그 속에 지니지 않게 될,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또 다른 용어로 명명하려고 심혈을 기울이게 될 그런 절대성이다. 그것은 내용을 비워낸 신앙심, 더 이상 내용을 채우기 위해 관여하지 않는 그런 사유에 의해 그 자체로서 찬양된 신앙심이다. 왜냐면 신앙절대론의 궁극적 계기는 신앙심의 그 어떤 내용도 거기서 특권화되지 않으면서, 실로 사유에 대한 신앙심의 우위에 의해 사유되는 계기기 때문이다. 왜냐면 사유를 통해 구축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내용들을 정립하는 신앙심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적인-타자>(그 자체가 신앙 선언들을 비워낸 대상)에의 현대적 귀속은 절대자를 발견하는 데 있어 이성 원리의 근본적 무능의 발견처럼, 이성 원리의 시효 소멸에 대한 해석의 불가피하고 엄밀한 이면이다. 신앙절대론은 강한 상관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역설적 의미를 구분해 내려고 한다. 사유는 독단주의에 대항하여 무장하면 할수록 광신에 대항할 힘을 잃어버리는 듯 하다. 회의주의적-신앙절대론은 형이상학적 독단주의를 격퇴시키는 바로 그 순간 종교적 몽매주의를 강화시키기를 멈추지 않는다. 모든 상관주의자들을 종교적 광신으로 비난하는 건 불합리할 것이다. 모든 형이상학자들을 이데올로기적 독단주의로 비난하는 게 불합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째서 형이상학의 근본적 결정들이 – 과장된 형태를 띨지언정 – 언제나 어떤 이데올로기 안에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해야만 한다) 재발견되는지, 어째서 몽매주의적 믿음의 근본적인 결정들이 강한 상관주의의 결정들에 (<전적인-타자>가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다) 근거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현대적 광신은 단순히 서구의 비판 이성의 성취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의고주의의 재부상처럼 간주될 수 없다. 왜냐면 오히려 현대적 광신이 비판적 합리성의 <결과>이기 때문인데, 이는 – 이 점을 강조해야 한다 – 비판적 합리성이 <결과적으로 어떤 해방 원리>인 한에서, 그리고 결과적으로, 다행스럽게도 독단주의의 파괴자인 한에서 그렇다. 독단주의가 철학 내에서 효과적으로 진압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상관주의의 비판적 힘 덕분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철학은 본질적으로 광신과 구분될 수 없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데올로기에 대해 승리를 거둔 비판은 맹목적 신앙이라는 개정된 논의로 변질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탈절대화적 함축(형이상학의 시효가 소멸되었다면 모든 형태의 절대자의 시효도 마찬가지로 소멸되었다)에 대한 비판의 문제가 선조적 진술들의 정당화라는 문제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다. 실제로 ‘비판적 의미의 전제들’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무엇을 다시금 사유하는 게 시급해 보인다. 말하자면, 비판적 힘이 필연적으로 늘 절대적 진리들의 타당성을 아래로부터 무너뜨리는 자들 쪽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독단주의와 회의주의적 광신을 <동시에> 비판하는 데 성공할 수 있는 자들 쪽에 있다는 것 말이다. 독단주의에 반대하면서 모든 형이상학적 절대자를 계속해서 거부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다양한 광신주의들이 늘어놓는 폭력에 반대하면서 사유에서 <약간의 절대자>를 되찾는 게 중요하다. 어쨌든 단지 몇몇 계시의 결과에 의해 자신들이 배타적인 수탁인들이기를 바라는 자들의 주장에 반대하기 위해 충분한 아주 약간의 절대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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