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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counter between philosophy and the outside >> 

공동체, Nation, Etat, 권력, 헌법체제, 개인성, 이데올로기장치, 국제화, Boundary, Self-image >>

 

   다음은 <폭력의 고고학>에 대한 이종영의 번역본이다. 나는 이 책을 2014년에 읽으면서 밑줄긋는 셈 옮겨적었다. 후반부의 내용은 밑줄본에서 부실한데, 밑줄그으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흡입력이 강한 인상깊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모두 재구성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버려 잊어, 일단은 밑줄본을 바탕으로 기록해 둔다(15-07-02). 차후에 수정된 요약본을 게시할 가능성이 있다. 

 

(1장)

   03 푸시웨라는 인물은 우리의 권력 개념과 완전히 다른 인디언의 권력 개념을 잘 보여준다. 집단이 우두머리와 강제권을 분리시키고 권력을 약화시키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지도자나 안내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우두머리는 그가 불러일으키는 존경심이나 위세의 힘을 제외하면 자신의 부족들에게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엘레나의 이야기의 행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우두머리와 집단 사이의 미묘한 게임이 비롯되고, 우두머리는 시시각각으로 집단의 의도를 파악해서 그것을 대변해야 하는 것이다.

 

집단은 조그마한 권력의 잘못(권력의 사용)이라도 발견하면, 그것을 우두머리의 위세 때문에 일어난 일로 여긴다. 사람들은 그를 버리고 자기의 의무에 더 투철한 다른 우두머리를 찾는다.

 

   04 이러한 유형의 사회에서 권력의 문제를 적합한 용어로 제시하는 것은 아카데미즘의 단순한 묘사 (고도의 이국취향에 공범적이고 인접한 관점) 와 결별하는 것이고, 우리 사회의 인간들에게 친숙한 기호를 보내주는 것이다. 즉, 고대사회와 “서구” 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은 기술의 발전보다는 정치적 권위의 변형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 과학이 그곳에 거주할 줄 알아야 할 장소가 부각된다.

 

그러나 인디언 사회에서 우두머리가 일시적으로 권력을 갖는 것이 허용되는 상황이 존재한다. 전쟁 상황에서는 우두머리가 명령을 하는 것이 허용되며, 그때가 부족이 우두머리의 명령을 집행하는 유일한 상황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전쟁이라는 단어가 사실을 적합히 묘사하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 서로 싸우는 단위가 인척 관계에 있는 지역 집단, 즉 여자를 주고받아 친족관계를 맺은 집단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매형과 처남들이 심하게 싸우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여자들은 절대로 죽이지 않는 인디언의 <전쟁>은 확실히 여자들의 교환에서 비롯되는 듯 하다.

 

   야노아마족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은 가능하면 활을 쏘는 피비린내나는 대결을 몽둥이로 때리는 의례적 전쟁으로 대체하여 복수심을 해소한다. 그결과 평화/폭력, 결혼/전쟁의 경계가 매우 희미해진다.

 

(다음장)

 

   05 민족말살에 대한 연구작업들을 읽다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인상을 갖게 된다. 그 저자들에게 있어서 서양문명은 사회역사적 뿌리도 없는 일종의 추상물이라는 인상, 언제나 자신 속에 민족말살적 정신을 담고 있는 막연한 본질이라는 인상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문화는 결코 하나의 추상물이 아니다. 우리의 문화는 역사를 통해 오랫동안 구성된 결과인 것이고, 계보학적 연구를 필요로 한다.

 

무엇이 서양문명을 민족말살적인 것으로 만들었는가? 사실들에 대한 폭로를 뛰어넘어 우리의 문화적 세계의 역사적으로 규정된 성격을 탐구할 것을 요청한다. 서양문명은 탈시간적 추상물이 아니듯 하나의 동질적인 현실, 그 모든 부분을 동일한 무차별적 덩어리가 아니다.

 

  06 민족말살은 다양성을 하나로 해소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국가는 그 본질에 있어서 구심적 힘의 집행이다. 그 구심적 힘은 상황에 따라 반대의 원심적 힘들을 제거한다. 국가는 사회의 중심, 사회적 몸체의 전체, 사회적 몸체의 다양한 기관들의 절대적 지배자이길 원하고 또 그렇게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의 실체적 핵심 속에서 유일자의 능동적 힘, 다양성을 거부하는 성향 사이에의 불안과 공포를 발견한다. 서양 문명과 국가의 형태 하에서 우리는 언제나 차이와 타자성을 축소시키려는 의지 그리고 동일한 것 및 하나를 향한 감각과 애호를 식별할 수 있다.

 

  07 프랑스문화는 군주제와 공화제 하에서의 국가기구의 확장/ 강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형성되었다. 중앙권력의 모든 발전에는 문화적 세계의 전개가 증폭된 방식으로 상응한다. 국가 권위 확장은 국어의 확장으로 나타난다. 국가권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때, 민족이 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또 국가는 권력의 배타적 소유자로 스스로를 내세울 수 있다. 이러한 통합의 과정은 차이의 제거를 거친다.

 

   08 프랑스 민족의 여명기에, 즉 프랑스가 “프랑스에 대한 염원”에 불과했고 그 왕이 루아르강 북부의 창백한 영주에 불과했을 때, albi 지방의 십자군은 남부를 공격하여 그 문명을 제거했던 것이다. 카페 왕가의 확장을 위한 핑계이자 수단이었던 cathare 이단 종파의 멸절은 프랑스 국경선을 거의 확정시켜주면서 순수한 민족말살의 사례를 구성했다. 그리하여 종교, 문학, 시를 포함한 남부 지방의 문화는 결정적으로 파괴되었고 larguedoc의 주민들은 프랑스왕의 충성신민이 되었던 것이다.

 

   1789년의 혁명은 지롱드 연방주의자들에 대한 자코뱅 중앙집권주의자들의 승리를 보장해주면서, 파리 행정부의 정치적 지배권을 확립시켜 주었다. 당시 지역적 통일체로서의 지방들은 언어, 전통, 정치 등 문화적으로 동질적인 과거의 현실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제 그러한 지방들은 행정 구역의 추상적 분할로 대체되어 특수주의에 모든 준거가 붕괴되기에 이르고, 그리하여 도처에서 국가권위의 침투가 용이하게 전개된다.

 

   국가의 위력 아래 차이들을 하나둘씩 소멸시키는 이런 운동의 종국적 단계는, 제3공화국에 들어 의무적이며 무상인 세속화된 교육과 징병제도를 통해 주민들이 시민으로 완전하게 변화하는 것이다.

 

지방과 농촌 세계에서 자율적 존재로 지속되던 것이 이제 무릎을 꿇는다. 전통적 언어가 낙후된 방언으로 박해당하게 되고, 촌락생활이 관광객들을 위한 민속적 구경거리로 강등되면서, 국가(명)화가 완성되고 민족말살이 완수된다. 국가기계는 개인들에 대한 관계를 단일화한다. 즉, 국가는 오로지 법 앞에 평등한 시민만을 알 뿐이다.

 

   09 모든 국가조직은 민족말살적이다. 그것이 국가의 정상적 존재양식이다. 따라서 민족말살의 일정한 보편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춰야 할까? 민족 말살은 바로 국가라는 것, 이 점에서 모든 국가는 마찬가지라는 것에 만족해야 할까? 그것은 우리가 “민족말살 학파”에게서 비판했던 추상화의 오류에 다시 빠지는 것이고, 우리 자신의 문화적 세계의 구체적 역사를 다시 한 번 몰인식하는 것이다.

 

   10 미개한 국가들 (잉카, 파라오, 동양적 전제주의 등) 과 문명 국가들 (서양세계) 을 동일한 수준에 위치시키는 것, 동일한 포대에 넣는 것을 금하는 차이는 무엇일까? 우선 우리는 국가기구들의 민족말살능력에서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다. 미개국가들의 경우, 민족 말살 능력은 국가의 허약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국가의 힘에 의해 제약된다. 즉, 민족말살적 행위 -대립으로 전화된 차이를 제거하는 것- 는 국가의 힘이 더이상 어떤 위협도 받지 않을 때 중단된다. 잉카족은 황제의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인정받는 한에서 안데스 공동체들의 상대적 자율성을 보장한다.

 

   반대로 서양국가들의 경우 민족말살능력은 제한되어 있지 않고, 고삐가 풀려 있다. 무엇이 …. 그것은 바로 한계 없는 공간으로서, 경계의 부단한 후퇴로서의 장소들 없는 공간으로서, 항구적인 도주의 무한한 공간으로서, 그 경제적 생산 체제이다. 즉, 서양을 차별화시키는 것은 경계 내부에 머무르는 것의 불가능성으로서,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통로로서 자본주의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기를 그만두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는 생산체제.

 

   생산을 위한, 가장 멋진 기계로서의 산업 사회는 바로 그렇기에 또한 가장 가공할 만한 파괴 기계이다.

 

바로 그렇기에 세계를 원초적인 조용한 비생산성 속에 방치하는 사회들에게 어떤 휴식도 주어져서는 안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양인의 눈에는 엄청난 자원을 착취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낭비는 용납될 수 없다. 그러한 사회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은 생산에 양보를 하거나 아니면 사라지거나 해야하는 딜레마이다.

 

(5장)

 

   11 사회는 자신을 스스로 재생산하기는 하지만, 스스로를 창건하지는 않는다. 특히 전통적인 규칙과 규범에 따르는 사회의 재생산, 즉 사회 자신의 반복을 확보해주는 기능이 성인식 의례에 부여된다. 그러나 사회의 창건/설립은 전사회적인 것ㅡ메타사회적인 것에 속한다. 사회의 창건은 인간 시대 이전의 시대에 인간에 앞서 존재했던 존재들의 작품ㅡ조상들의 작품이다. 조상들이 사회를 창건했던 이야기를 다룬 신화는 조상들의 격언, 규범, 법으로서의 성인식의례에서 젊은이들에게 전달되는 지식의 총체로서의 사회의 토대를 이룬다.

 

   12 모든 성인식 의례의 주요 인물인 조상들은 사실상 통과의례의 숭배대상이다. 젊은이들은 조상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한다.

 

   13 남아메리카의 원시사회들은 공동체를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는 종교/의례적인 생활에 열중한다. 의식을 행할 때마다, 사회가 풍요롭고 살기 좋은 것은 과거에 조상들이 물려준 규범을 잘 준수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환기시킨다. 신화적 담화와 조상들의 말만이 사회의 영속성과 영원한 반복을 보장해준다. (#롤즈의 족장)

 

   14 정복자는 자신들의 권력이 커져감에 따라 과거의 신앙체계를 새롭게 손질했다. 즉, 신전의 특정 인물들을 기리고 전통축제와 의식을 장엄하게 거행했다. 또, 철저히 위계화된 많은 성직자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많은 사원과 예배처를 건립함으로써, 백성이 잉카족에게 바친 공물의 대부분을 성직자에게 분배함으로써, 종교에 상당한 사회적/정치적 무게를 부여했다.

 

   15 태양숭배에 의해 잉카의 종교는 국가종교가 된 것이다. 한 민족을 정복했을 때 잉카족은 즉시 몇 가지 행정적인 조치(인구와 자원 등에 대한 조사)와 종교적인 조치를 취했다. 피정복민들은 태양숭배를 그들의 종교체계에 통합시켜야 했다. 그들은 사원을 건축했고 그곳에 거처할 성직자를 배당받았다. 자신의 생계를 보장하고 태양 숭배에 요구되는 희생 제사를 행하기 위한 막대한 자원을 성직자가 사용함으로써 문화적 하부구조가 정착되었다. (#권위와 종교의 문제)

 

   16 왜냐면 종교적 차원에서도 지배 카스트의 고유성을 나타내기 위해 민중종교보다 덜 감각적인 반면 훨씬 더 추상적이고 신비적인 신앙을 제도화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라코챠 숭배는 민중종교와는 달리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지속되지 않았다. (# 문화 멸망, 위상 멸망, 권위....)

 

(다른 장)

 

   17 원시사회들은 권력의 분리된 기관을 갖지 않는다. “권력은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원시사회들에서 사회적인 것의 영역과 구분되는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확인할 수 없다. 알다시피, 이미 고대 그리스 여명으로부터 서양의 정치사상은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사이의, 유식한 자 그리하여 명령하는 자와 무식하고 복종하는 자 사이의 사회적 분업으로 파악하면서, 인간적 사회성의 본질을 정치적인 것(인간은 정치적 동물)으로 간주했다. 사회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고, 정치적인 것은 한 사람 또는 몇몇 사람들이 사회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이들을 위해서건 아니건) 권력(정당하건 아니건)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회란 왕의 보호하에서만 존재가능한 것이었고, 명령하는 자 / 복종하는 자 사이의 사회적 분업이 없는 사회란 사고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권력 행사가 결여되어 있는 곳은 사회 이하의 것, 비-사회였던 것이다.

 

   18 사실상, 야만적 우두머리가 명령권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두머리가 아무일도 하지 않음을 뜻하는 건 아니다. 반대로 우두머리는 사회로부터 몇 가지 임무를 부여받아 일종의 무보수 공무원처럼 일한다. 기본적으로 권력이 없는 우두머리는 사회의 의지가 <하나의 전체>처럼, 즉 공동체의 확고하고도 일치된 노력처럼 나타나도록 하여 자기 사회가 다른 공동체들에 대해 고유성과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부여받는다. 달리 말해, 원시적 지도자는 정황과 사건이 그의 사회를 다른 공동체들과 관계맺도록 할 때 사회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이다.

 

   그런데 다른 공동체들은 모든 원시적 공동체에서 그러하듯이 친구와 적이라는 두 부류로 나뉜다. 친구들과는 동맹의 관계를 맺거나 강화해야 하고, 적들과는 만일의 경우 전쟁을 잘 치러내야 한다. 즉, 우두머리의 구체적 / 경험적 기능이란 비유컨대 국제적 영역에서 수행되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자질들이 요구된다. : 공동체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동맹을 강화하는 외교적 능력으로서의 능숙성 / 적의 공격에 맞서 효과적 방어를 하고 출병시에 가능하다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군사적 자질로서의 용기.

 

   원시적 우두머리는 결코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린 후 그 결정을 공동체에 부과하지는 않는다. 그가 발전시키는 동맹 전략이나 그가 취하는 군사 전술은 결코 그 자신의 것이 아니며, 부족의 욕망 또는 명시적 의지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것이다. 모든 거래 또는 협상은 공공적 성격의 것이고, 선전포고는 사회가 그것을 원할 때에만 행해질 수 있다. 만약 지도자가 순전히 자신의 의도에 따라 이웃에 대한 동맹 또는 적대의 정치를 펼치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계획을 사회에 부과할 수 있는 수단을 결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전략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는 오로지 대변인으로서의 권리 또는 차라리 의무만을 지닐 뿐이다. 즉, 자기사회의 욕망과 의지를 타자들에게 전달하는 것.

 

   19 헤겔주의 비판 - 즉, 역사란 서로를 기계적으로 산출하고 도출시키는 형상들을 통한 인류의 '필연적' 운동이라는 관념 말이다. 우리는 역사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신학, 그 광신적 연속주의를 거부한다. 더이상 정치 이하적인 맹아가 아니라 완전한, 완성된, 성숙한 사회들로서의 원시사회들이 국가를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이 국가를 거부하기 때문이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도 사회적 몸체가 분할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야만인들”의 정치는 권력의 분리된 기관의 발생에 끊임없이 제동을 거는 것이고, 우두머리와 권력 행사 사이의 치명적일 만남을 가로막는 것이다. … 자신의 내부에서 지배자, 예속민, 우두머리와 부족 사이의 불평등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의 전체로서의 사회가 권력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20 권력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권력행사의 대상이 되는 자들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원시사회들이 원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불평등의 거부, 분리된 권력의 거부, 바로 이것이 원시 사회들의 동일한 그리고 부단한 염려이다. 원시사회들은 매우 잘 알고 있다. 바로 이러한 투쟁을 포기한다면, 권력의 욕망 그리고 복종의 욕망이라고 명명되는 은밀한 힘들 – 지배와 복종은 바로 이 힘들의 해방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 – 을 가로막는 것을 그친다면, 자신들의 자유를 잃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22 우리 역사의 어떤 문화권과 어떤 시기는 커다란 국가장치들과 관계되는 몰락과 쇠퇴의 항구적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국가는 붕괴되거나 봉건영주의 권력들로 찢어질 수도 있고 게다가 지역적인 우두머리 지배 체제들로 나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관계는 결코 소멸되지 않고, 사회의 핵심적 분화는 결코 해체되지 않으며, 앞-국가적 시기는 결코 회귀하지 않는다.

 

   23 우선 권력만이 그 실질적 행사 속에서 존재한다. 그 이후 권력에의 욕망은 오직 그 필수적 보완물인 예속에의 욕망의 호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때에만 실현된다. 지배에의 욕망은 그 상관적 욕망인 복종에의 욕망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

 

   24 부족은 그들의 아이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모두 동등하다, 너희들 가운데 그 누구도 다른 누구보다 잘나지 않았고 또 못나지도 않다, 불평등은 거짓된 것이고 금지되었다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원시적 법의 기억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법을 전수받은 젊은이들의 몸에 그것을 새겨준다. 고통과 함께 받아들여진 동등한 표식으로. 성인식 때 법이 기입되는 표면인 개인의 몸은 사회 전체에 의한 집합적 투자의 대상이다. 이는 언젠가 법의 언표를 위반하는 개인적 욕망이 사회적 장에 침투하는 것을 가로막기 위한 것이다.

 

   25 누군가가 지배자가 되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쫓아내어 사회에서 배제시킨다. 그가 만약 계속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그를 죽여버린다.

 

   26 원시사회들이 그들의 자유를-향한-존재를 보수하길 원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분화된 사회도 권력에의 욕망과 예속에의 의지가 부단히 실현되는 가운데 스스로를 변화로부터 보존한다.

 

   28 언제나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부단히 분출되는 이러한 사랑의 흐름은, 지배자를 향한 예속민들의 이러한 사랑은 예속민들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탈자연화한다. 모든 자유를 결여한 그러한 관계는 사회를 지배하는 새로운 법을 강요한다. 즉, 압제자를 사랑하라는 법이 그것이다. 사랑의 불충분성이란 곧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각자가 법이 지켜지는지 감시하며, 각자가 자신의 이웃을 법에의 충실성에 따라 평가한다. 전제자에 대한 복종은 예속민들 사이의 우정을 축출한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발언)

 

(다른 장 _ 살린스 논의에 관한 이해불가요소 포함)

 

   29 원시적 생산기계는 짧은 시간내에 느슨한 강도로 사람들의 물질적 필요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 그러니 원시적 생산기계는 원하기만 한다면 더 오래 더 빨리 작동하면서 잉여를 생산하고 저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시사회에서 그러한 것이 가능하면서도 그것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30(#) 가구적 생산양식의 공통된 특질들은 다음과 같다 : 성적 노동분업의 우위, 소비를 목적으로 한 분리된 생산, 생산수단들의 자율적 사용, 생산단위들 사이의 원심적 관계.

 

   살린스는 경제적 현실(가구적 생산양식)을 설명하면서 원시적 사회조직의 핵심을 건드리는 고유한 정치적 범주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분리성, 자율성, 원심적 관계들.

 

   사실상 원시 경제를 정치적인 것 외부에서 사고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화전 농경민들의 생산양식을 묘사해주는 특질들이 수렵민족의 사회조직도 마찬가지로 식별해준다는 것이다. 즉, 그런 관점에서는 유목집단은 정주부족과 마찬가지로 성적 노동 분업이 지배적인 생산과 소비의 단위들 - “집” 또는 “가구” - 로 구성된다. ...결국 우리가 가늠해야 하는 것은 유목적 수렵이나 화전 농경과 같은 서로 상이한 생산기계들이 동일한 성격의 사회구성체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이다(#).

 

   모든 원시공동체는 그들의 소비의 생산이란 관점에서 완전한 자율성을 열망한다. 즉, 모든 원시공동체들은 그들의 이웃집단에 대한 모든 의존관계를 거부한다. 가구적 생산양식은 “잉여의 형성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체제”면서 동시에 필요충족을 보장하는 최소치 이하로 생산이 떨어지는 것도 거부한다.

 

   31 따라서 관대함의 의무를 충족하기 위해서 빅맨은 그가 필요로 하는 재화들을 혼자힘으로 생산해야 한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를 위해 일해주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친족들이 그와 고객관계를 맺게 된다. 또한 우두머리의 외로움과 관대해야 하는 필요 사이의 모순은 일부다처제의 매개로 해결된다.

 

   일부다처제는 단지 특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두머리에게 지도자로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주된 수단을 이루는 필수적인 것이다. 즉, 우두머리는 아내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잉여적인 소비재를 생산한 뒤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원시사회에서 경제는 가구적 생산양식의 운동 속에 기입되어 있지 않고(#), 단지 정치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원시사회에서 생산행위는 권력관계에 종속된다. 잉여생산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나타내는 것은 단지 족장제의 수준에서일 뿐이다.

 

   살린스는 거기에서 올바르게 가구적 생산양식에 내재하는 원심적 힘과 족장제에 내재하는 반대의 힘 사이의 이율배반, 생산양식의 측면에서의 분산의 경향과 제도의 측면에서의 통일화 경향 사이의 이율배반을 드러낸다(#). 권력이 가정된 장소에 중심이 자리잡고, 끊임없는 해체의 힘에 의해 관통되는 사회가 그 중심의 주위에서 통일체이자 공동체로 제도화된다는 것이다. 즉, 족장제의 통합적 힘이 가구적 생산양식의 해체적 힘에 맞서는 것이다. “빅맨과 그의 대단한 야심 덕분에 환절적이고 '머리가 없고' 작은 공동체들로 조각나 있는 사회가 자신의 칸막이들을 해소할 수 있다. 그리하여 더 넓은 관계의 장이 형성되고 더 고차적인 협동의 수준이 달성된다.”

 

   32 빅맨이 추구하는 것은 위세이며, 그처럼 관대하고 열성적인 우두머리의 영예를 찬양하는 사회의 거울이 비추어주는 훌륭한 이미지다. 자신의 관대함에 대한 보답으로 빅맨이 얻는 것은 권력에의 의지 실현이 아니라 명예욕의 위태로운 충족일 뿐이고, 명령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가 땀흘려 유지하는 영예의 결백한 향유일 뿐이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영예를 위해 노동한다. 사회는 그에게 영예를 부여하면서, 그의 노동의 생산물을 탐식한다.

 

   권력관계는 우두머리가 영원히 갚아야 하는 빚의 형태를 취한다. 우두머리가 영원히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두머리가 권력에 외재적이라는 것, 우두머리가 분리된 기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사회에 대해 보장해준다.

 

   위세에 대한 자신의 욕망의 포로가 된 “야만인”의 우두머리는 권력에 의해 설정된 빚을 갚으면서 스스로를 사회의 권력에 예속시킨다. 부족은 우두머리를 자신의 욕망의 덫에 걸리게 하면서, 정치권력이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사회에 대립하게 되는 치명적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 원시사회는 국가에 대항한다.(#)

 

   33 왜 특정한 시점에서 원시사회는 권력의 흐름을 규제하기를 멈추는가? 왜 원시사회는 여태까지 방어해왔던 것과는 달리 불평등과 분화가 죽음을 사회적 몸체에 새겨놓는 것을 방치하는가? 왜 “야만인들”은 우두머리의 권력에의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가? 예속성의 수용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35 민족학자들이 맑스주의자인 경우에 그들은 자신들의 도구, 맑스이론과 그 경제적 결정론에 따라 원시사회를 분석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들에서도 경제가 중심적, 결정적 위치를 점했다고 주장한다. 경제는 원시사회들에서 중심적인 것인가? 원시사회들에서 생산력의 발전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가?

 

   36 원시사회들에서 경제는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다. 즉, 경제를 사회적, 의례적, 종교적 생활 등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제적 삶은 원시사회의 존재를 결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가 경제의 장의 장소와 관계들을 결정한다. 원시사회들에서 생산력은 발전하지 않는다(# 알튀세르이론에 비판?). 오히려, 과소-생산에의 의지가 가구적 생산양식에 내재적인 것이다. 원시사회는 생산력의 눈먼 놀이의 장난감이 아니다. 반대로, 원시사회는 자신의 생산능력에 대해 부단히 엄격하고도 숙고된 통제를 하는 사회이다. 즉, 경제활동을 규정하는 것은 사회적인 것이고, 종국적으로는 정치가 경제적인 것을 결정한다. 원시사회들은 '반-생산의 기계들'이다.

 

(다른 장)

 

   37 종교는 이 법을 전달하고 또 영원히 준수되도록 하는 사명을 갖는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이는 곧 사회가 자신의 외부에 토대를 갖는다는 것, 사회는 자기자신의 창립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원시사회의 성립은 인간의 결정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행위에 속하는 것이다. 종교가 아편이 아니라는 것, 종교적 사실이 사회에 대해 “상부구조”로 작용하기는 커녕 원시사회의 존재에 내재적이라는 것. (#이해불가)

 

   38 어떤 조건 하에서 비분화된 사회로부터 사회분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야만인들”로 하여금 지배자와 예속민들로의 분화를 받아들이도록 몰고가는 사회적 힘들의 성격은 어떤 것일까? 비분화된 사회로서의 원시사회의 사멸의 조건들은 어떠한 것일까?

 

   재난의 계보학 / 사회적 변화를-일으키는-빗나감은 원시사회의 존재에 대한 탐구로부터 발전되어야 한다. 즉 기원의 문제는 철저하게 사회학적인 것이고, 그러니 꽁도르세, 헤겔, 콩트, 엥겔스, 뒤르켐, 비른봄은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39 친족의 기능은 어떻게 원시적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특수적 인간인지를, 원시사회는 왜 다른 사회들로 환원될 수 없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친족의 연결망은 동등한 자들로 구성된 비분화된 사회인 원시사회 자체에 내재한 특정한 기능을 충족시킨다. : 친족, 사회, 평등, 심지어 전투.

 

   40 레비-스트로스의 신화분석은 어떤 조건아래 전개되었던 것일까? 신화들이 하나의 동질적인 체계를 형성한다는 조건과, 신화들이 “그들 사이에서 서로 사고한다”는 조건 하에서이다. 즉 신화들은 그들 서로간에 관계를 갖는 것이며 사고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신화(특정한, 특수한 신화)는 자기의 이웃신화들에 대해서만 사고할 수 있고 신화학자만이 신화들 전체를 사고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또다시 구조주의적 관념도 특수하게 명료한 방식으로 사회적인 것에 대한 관계를 소멸시킨다. 즉, 사회를 생략하면서, 신화들 서로간의 관계가 단번에 특권화된다는 것이다. … 신화들은 그것들 속에서 사고되는 사회를 우선 사고하고, 또 그것이 바로 그것들의 <기능>이다.

 

   41 구조주의는 사회없는 사회학이다.

 

   42 고들리에 비판 - 이데올로기는 16세기에 나타난 현대적 현상이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발생과 동시대적이다. (# 따라서 종교가 이데올로기인 것이 아니다.)

 

   44 전쟁의 기능 – 집단들의 분산, 파편화, 원자화를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원시전쟁은 종종 무장갈등으로 표현되는 원심적 논리의 노동, 분리의 논리의 노동이다.

 

   45 따라서 원시사회의 논리는 원심력의 논리, 다수성의 논리이다. “야만인들”은 다수성의 다수화를 원한다. 그렇다면 원심적 힘들의 발전이 행사하는 주된 효과는 무엇일까? 더 많이 분산될수록, 통일성은 더 적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원시사회의 내부정치와 대외정치를 결정하는 것이 똑같은 엄밀한 논리임을 알 수 있다.

 

   46 전투행위는 전사들의 공동체가 명령자와 실행자로 나누어지는 것을 용납치 않는다. 우두머리에겐 어떤 명령권도 없다. → 우두머리는 전쟁시를 제외하곤 어떤 권력도 갖지 모한다는 널리 유포된 의견과는 달리.

 

   47 전사적 차원에서 “야만적” 우두머리의 진정한 형상 (전쟁 지도자는 어떠한 역할을 할까?) 을 그리는 것은 특별한 연구를 요한다. 일단 전쟁이 사람들 사이의 정치적 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지 않음을 기억해두자. 전쟁 지도자와 전사들 사이의 관계는 동등하다. 전쟁은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결코 원시사회서 지배자와 복종자의 분화를 초래하지 않는다. 자유에의 의지는 결코 승리에의 의지로 인해 폐기되지 않는다.

 

더 참고할 문헌

삐에르 끌라스트르, <폭력의 고고학>

마셜 살린스, <석기시대 경제학>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이종영 <정치와 반정치>

인류학, <경제인류학을 생각한다>, 외

국가론들, 내셔널리즘 항목 참조

 

개인적 논증을 위해 참고할 문헌

알튀세르, <재생산에 대하여>

롤즈, <정의론>

마르셀 모스, <증여론>

미드, <정신, 자아,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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