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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아래는 15년 1학기 철학시간에 배운 내용의 요약이다.)

 

A. 실천 개념을 통한 포이어바흐(기계적 유물론) 비판.

 

 

맑스가 보기에 이것은 대상이나 현실을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고정적인 객체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 포이어바흐는 대상을 정태적인 것, 지각에 의해 관조하기만 하면 올바로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맑스는 대상을 활동적인 생활 과정, 실천 과정으로 파악하려 하며, 의식과 대비되는 물질, 주체와 대비되는 대상이란 개념에서 벗어나, 물질 또는 대상 자체를 물질적 생산방식으로 전환시킨다 이로써 대상은 사회적 맥락과 역사 속에서 정의될 수 있게 된다.

 

 

지각과 감성은 대상과 목적을 갖는 '활동'이자 '실천'이다. 지각은 대상을 수동적으로 그저 비추기만 하는 거울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양식이나 일상적인 실천 혹은 목적을 갖는 실천 속에서 사물을 지각하게 마련이다.

 

 

B.역사유물론 (내용부족)

 

 

인간을 특정한 주체로 만들어내는 사회 역사적 요인을 다루는 새로운 이론적 틀

 

 

지식해체에도 기능 : 지식을 형성하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지식의 형성과 기능을 다룰 것이다.

 

 

C. 진리해체

 

 

인간이 대상적 진리를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

 

 

실천이란 개념은 대상에 대한 이해를 바꾸기 위해서 쓴 말. 그것은 사람들의 관계, 사회적 지위 사이의 관계, 사회적 시스템 전체를 지칭.

 

 

어떻게 실천하느냐,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사물을 다른 것으로 경험할 것이다.

 

 

사람들 각자는 자기 식의 실천을 통해 자기 주장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맑스에 의하면 그 물건에 대해 '영원한 진리'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떤 판단이나 지식의 현실성과 타당성(옳음)을 확보하는 것이다.

 

 

D. 주체해체

 

 

인간이란 자유를 구가하는 초월적, 자기정립적, 이성적, 계몽될 수 있고 합리적 판단 가능하던 그런 것이었는데, 맑스가 보기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개인들이 어떤 사회적인 특징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맑스는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말하는데, 외곽의 실천들에 의해 한 인간이 구성된다고 생각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란 선천적이고 항구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관계가 달라지면 다른 존재로 될 수도 있다.

 

 

맑스에 의하면 자명하고 확실한 항구적 기초이자 출발점인 '주체'가 따로 없고, '주체'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구성물/결과물이다. ;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

 

 

(끝)

 

Q1. 사회적 세력관계서 비롯된 물질적 지배가 반드시 의미의 지배형태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즉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을 동경함으로써 지배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 맑스의 실천 개념은 이 가능성을 도외시한 것으로 보인다. 맑스로부터 의식이 물질관계적 기반과 조응하는 그 간섭적 과정을 파악할 수 있을까?

 

(이하는 2014년 초에 읽고 요령부득이었던 통치성과 자유에서 이해할 수 있었던 '비물질노동과 대중지성' 파트의 일부를 당시에 발췌한 것이다. 이책은 맑스주의 이탈리아 사상가들과 홉스, 롤즈 등 정치철학, 푸코 등 프랑스이론을 다룬다.)

 

  • 자본주의는 지의 프로세스로부터 노동자를 배제하는 테일러주의 원리를 떠받쳐 온 자본의 충동을 거듭 전개하는 한 편(신테일러주의) 기묘한 형태로 공장의 핵심에 ‘산 노동’을 다시금 편입시키고 있다. -> 테일러주의적인 노동과정에서 탈각하려는 이 포스트테일러주의적 공장을 marco revelli는 ‘통합공장’이라 부른다. ‘통합공장’의 철학은 테일러주의와는 달리 일원론적이다. 즉, ‘통합공장’에서 노동자는 구상이라는 앎의 프로세스에서 나와 육체로 환원되는 일이 없다. 오히려 자본은 적극적으로 노동자의 신체에 앎을 되돌려보낸다.

 

  • 그런데 현대의 ‘성숙된’ 시장은 ‘유한’하며, 이 상품수급능력은 경직/포화돼 있다. 따라서 시장 흡수력을 넘는 것은 모두 배제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순조로이 진행될지 여부가 자본에게 사활적 문제이다. 이렇게 되면 기업은 필연적으로 minimalist가 된다. 생산은 과도하게 양을 증대시키지 않는 동시에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형태로 구조화될 필요가 있다.

 

  • 포디즘 시기와는 달리 처음부터 생산을 프로그래밍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 공장은 자신을 시장에 직접적으로 연결하여 그것과 공명함으로써 변형가능한 자기조직적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 이제 생산과정에 직접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편입되기 시작한다. ; 생산-소비, 수요-공급의 관계를 ‘역전’시켜, ‘재고 제로’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이다. 여기서 노동자는 일찍이 포디즘 시기 공장노동에서 부정되던 ‘구상’의 요소를 갖추도록 요청받는다.

 

  • 노동자는 이른바 ‘인터페이스’(네트워크 조직론에서 말하는 ‘매개적 기업가’)가 되어야 하며 다양한 기능과 정보의 흐름, 워크팀, 위계제 사이를 임기응변으로flexible 횡단하면서 선택/연결/삭제해야 한다. 노동자는 지적 기술/육체적 기술/스스로 협동관계를 조직하고 운영관리한다는 의미에서 기업가적 기술스킬을 자신 안에서 연결해나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의 특징이 현대에서 주류적으로 볼 수 있는 ‘비물질노동’이, 물질적 생산에 주안을 두지 않는 정보 서비스 문화산업에서의 노동이 가지는 현저한 특징이긴 해도, 이 특징은 물질적 노동을 포함한 모든 노동형태가 공유한다.

 

  • 또한 생산의 의미 그 자체도 변화된다. 인터페이스로서의 노동은 공장에서 흘러넘쳐 network, 흐름이라는 형태의 pool로서 전체사회에 분산돼 있다. 이 안에서 임시로 특정 프로젝트를 위해 소규모 ‘생산단위’가 선별되어 조직된다. (예 ; 확대되는 파견업, 컴퓨터계 소규모 오피스 같이) 프로젝트를 마치면 그 ‘생산단위’는 생산능력과 풍부화를 추구하는 network와 흐름 안으로 해소된다).

 

  • 가치생산은 이같이 가치생산과 직결 되지는 않는 한층 폭넓은 network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공장 안에 한정되지 않는 사회 전체와 그 외연을 나란히 하면서 확대되는 수평적 평면이 자본우위의 유연성, 자본주의에 의한 고용유연화의 조건이다.

 

 

  • 오늘날 노동자의 활동은 항상 이윤생산을 위한 기능으로부터 불거져(연원해? 탈구해?) 나오고 있다. 또한 이는 노동자의 능력이 양산되는 장의 변화를 동반하고 있다. 일찍이 노동자의 능력이 배가되는 장은 직장 내부였다. 하지만 오늘날 이 능력은 직접적 생산과정의 외부, 즉 ‘생활세계’에서 확보되어야 한다. ‘일반적 사교성, 인간관계 형성능력, 정보를 구사하며 언어적 메시지를 해독하는 재능, 예기치 못한 부단한 쇄신을 향한 적응력’ 이것이야말로 현재 ‘사회적 노동자’에게 필요한 능력이다. 따라서 “자본은 비물질(적)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언제나 필요할 때 구하기보다, ‘과잉’ 네트워크, 앎, 커뮤니케이션의 ‘공정’ 안에 들어가, 관련활동을 구사하고 비물질노동과 함께 각각의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 원래는 운동에서 시작된 요구가 이제는 자본의 요구와 명령으로서 경제신문, 주간지, tv광고에 매일같이 울려퍼지고 있다 ; 앎을 획득하고 연고를 만들어 더욱 자립하라는 식이다.

 

  • 오늘날 이미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은 확연히 구별될 수가 없어졌다. 정도의 차는 있으되 누구나 대부분 체험하고 있는 일이겠지만, 지적 노동 혹은 비물질 노동은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이런 시간의 애매함이 나타내는 평면이 이른바 우리 존재의 ‘영도’이다 ㅡ 생활과 노동, 생산과 재생산,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뚜렷이 구분되기 힘든.  

 

  • <요강>에서 맑스는, 일반지성을 고정자본에 체화된 것, 따라서 ‘산 노동’에 대립된 ‘죽은 노동’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지성은 ‘산 노동’과 일체다.

 

  • 네그리 등에 따르면, 오늘날 자본의 명령의 전제가 되는 것은 테일러주의처럼 자본(구상) 뒤에 협동(실행)이 조직되는 게 아니라, 구상과 실천의 기능을 함께 자기것으로 취하는 사회적 협동에 있다. 자본이 육체노동으로부터 지적 노동 혹은 지적인 것으로 초점을 이동시킴에 따라, 자본의 명령은 가치형성과정에 외적인 것으로 될 수 밖에 없다. 네트워크는 자본에 ‘앞서’, 이윤 형성의 전제로 조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고용자는 어떤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 자본의 이런 외적인 앎의 네트워크와 앎의 사회화를 표현하는 용어가 ‘대중지성’이다. 라차라토는 대중지성을, ‘운동’이 가져온 ‘자기가치화’의 요구와 자본주의적 생산의 요구 사이의 결합으로 정의한다. 대중지성이란 ‘수평적으로 사회를 횡단하며 확대되는 집단적 지성이자 지적으로 축적된 능력’이며, 가령 지적노동자 등과 같은 특정 집단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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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discussion) _ 신지영 교수님 

Marx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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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2015년 1학기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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