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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discussion) _ 신지영 교수님
LEVINAS
(아래는 15년 1학기에 다루었던 내용을 내가 요약한 것이다. 『20세기 프랑스철학』, 에릭 매슈스, 김종갑 역, 서울;동문선, 1999)
A. 레비나스를 배우는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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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의 타자는 전혀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것으로 다가오는 절대적 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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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가 절대로 동일화될 수 없는 항을 개발했고, 이것이 이전 철학자들이 간주한 동일성에 대한 비판이다.(타자는 끝까지 이해되지 않음을 그때까지 철학자는 무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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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타자와 대면하게 되면서 사물 전체를 하나의 단일한 체계 안에 가두어 놓기가 불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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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타자성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존재를 넘어서는 진정한 초월성을, '존재가 아닌 다른 무엇'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절대적타자 혹은 무한성은, 이해될 수 없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타자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파악하고자 시도하였다. 형이상학은 파악의 문제가 아니라 담론(이것은 지식체계가 아니고 느슨한 일상대화와 같은 것)의 문제이다(따라서 이 교수님에 의하면, 경험주의는 형이상학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B. 존재론 vs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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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존재론은 “주체와 객체 사이에 중립적인 제3의 개념을 설정함으로써 존재를 파악이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결국 타자를 동일성 속으로 환원시킨다.” : 다시 말해 나와 타자 사이의 차이가 무시되는데, 타자가 그의 고유성을 잃고 단순히 나의 의식의 '대상'으로 중립화되는 셈이다. (A에도 B에도 속하는 중립함, 가령 '인간'으로 A와 B를 파악함으로써 두 인간이 몰개성화) ; 그러한 존재론에 기초한 형이상학은 '초월성'에 집착하는데, 초월성이란 전체성, 즉 존재의 전체를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한꺼번에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체계 안에서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가 해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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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윤리학이란 타자 앞에서 나의 자발적 행동과 생각을 의문시하는 것이다. “나의 자발성을 의문시함으로써, 즉 윤리적 요청을 받아들임으로써 타자의 낯설음, 나의 생각이나 소유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타자의 낯설음이 존중되는 것이다. 형이상학, 초월성, 즉 동일자가 타자를 받아들이고 내가 타자를 환영하는 것은 타자가 동일자를 심문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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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자발적인 존재이거나 자율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면 윤리학은 성립되지 않는다. 타자와의 관련 속에서, 다시 말해 나 자신(동일자)이 아닌 다른 존재자와의 관련 속에서 나 자신을 파악할 때 비로소 윤리학이 시작된다. 이 타자가 나의 자율성, 자유행동 능력을 제한하고, 심문하기 때문에 타자성을 의식하는 것이 윤리학이라 할 수 있다. (타자와 상관없이 나의 자율성을 발휘하는 것이 윤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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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는 나의 의식을 초월해서 존재하며, 나의 의식 속으로 절대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지식과 형이상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타자성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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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윤리적일 수 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그 관계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가진 이기주의를 넘어선다.(행동의 시작 자체가 타자로부터 비롯되므로 이기적이지 않다) 비록, 그것이 서양철학의 특징이었던 초월적 이기주의일지라도 말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기주의는 '동일자'와 '타자'의 차이를 무시하기에 진정한 의미의 개인성을 훼손한다.
C. 타자성이 현현하는 '얼굴'
'얼굴'은 단순한 관상이나 인상이 아니라, 그러한 인상을 통해서 타자와 나 사이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수단을 뜻한다. 서로 의사를 소통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가 부정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차이가 긍정된다.
D. 칸트 윤리학에 대한 비판
칸트의 보편성 = 나의 의지 --- 나와 옆의 타자에 일치시키지 않는다. (관계 속 요청이 아니다.) 윤리 근거가 나로부터 시작된다.
반면 레비나스에게는 윤리의 근거나 타자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어떤 타자를 만나는가에 따라 달라지고, 내가 마주치는 타자의 얼굴을 보고 그 얼굴이 무엇을 요청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E. 규범 비판
뒤르켐에 따르면, 도덕성은 집단적인 것의 산물이다. 뒤르켐은 이 타자의 특수성을 오해하고 있었다. ( 타자가 인식할 수도 없고 이해가 안 가면, 내 책임을 미리 지지 않고 의문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적인 것의 산물인 도덕성일 경우 인식할 수 있고 자명하게 이해가 가는 것으로서 타자의 특수성과 관련되지 않는다.)
규범 관습은 우리가 그것의 공통성을 인지하는 이해가능한 것이므로 타자성을 내포하지 않는다. 법은 공통성만 추린 것이고 그것만 지키는 것으로 타자성이 왜곡될 수 있다.
F. 인본주의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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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가 무한하게 책임을 지는 절대적 타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과 흡사해 보인다. 전통적 형이상학은 존재론과 존재에 대한 지식에만 치중하였기 때문에 신과의 관계도 근본적으로 인식적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런 형이상학 속에서 신이 이론화되어 신학으로 발전하였다. 레비나스는 그런 형이상학적 신학은 신의 본질적인 타자성과 신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부정하기 때문에 '무신론적'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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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의 무신론적 전통은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직접적인 결과가 바로 '인본주의=휴머니즘(인간이 사물을 기술적으로 지배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조장 ; 중립적 인간의 하나의 사례로서의 나 ; '나 같이 남도 생각할 것'이라는 논리적 유비가 심화된 논리학적 동일성이 깔려 있다)'로서, 그것은 진정한 개인성에 적대적인 '개인주의'로 흐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반-인간적이다. 이들은 '동일자'와 '타자'의 차이를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한다. 모든 개별적인 인간을 단지 '인간성'의 실례로서, '전체성'의 일부분으로서 취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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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인간주체도 본질적인 인간 이성의 표현으로서 간주될 따름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의 사물들을 그대로 경험하는 대신 그것을 항목별로 분류하고,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데 그친다(->존재를 중립적으로 이해함). 윤리학에 있어서도 각 개인이 타자에 대해 떠맡는 무한한 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 이성에 의해서 규정된 일반적 행동법칙을 지키는 문제, 그것만 실행하고 아는 세계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G.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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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는 합리적 논증 뒤에 '이기주의' 혹은 타자를 무시하는 성향이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극단적인 주장이 논리적인 비판(정당성 판단)도 불가능한 공간에 놓여 있다. 또한 형이상학적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논리적 추론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타자의 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 도덕적인 결함 때문에 그러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H. 레비나의 <사건과 타자>에서 수업 시간에 다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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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앞에서 주체는 주체로서 자신의 지배를 상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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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uvoirs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nous ne pouvons plus pouvior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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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성[복수성]은 여기서 존재자의 다수성이 아니라 바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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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예절이 작동하는 건 사회생활로부터 타자성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타자가 이렇게 되면 공감에 의해 또 다른 내 자신으로 인식되고 다른 자아로서 인식될 뿐이다(상호성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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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타자성은, 우리의 사회적 관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타자와의 관계 한 복판에서 이미 비상호적(바꿀 수 없는) 관계로, 즉 동시성과 정반대의 관계로 모습을 드러낸다.
(끝)
Q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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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타인에게서 '나도 저렇게 되어야겠다'는 이상적 자아를 형성하고 그것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타인에게서 '나는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 타인에게서 이상적 자아에 부합하는 요소를 찾지 않게 되며 그 타인을 열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되며 내 그러한 이해수준에 만족한 나머지 더이상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이상적 자아라는 도구를 통해 타인에게서 진정한 타자성을 덜어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상적 자아가 되고자 노력할수록, 이질적인 무언가에 대해 진정한 타자성을 찾아내기란 어렵게 느껴진다. 혹은 우리가 자기 나름대로의 이상ideal을 생각하는 한, 그것으로부터 타자성이 배제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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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는 우리에게 어느 부분을 제한하는 것인가? 그가 우리에게 (굳어진) 정체성에 관한 생각을 (타자성을 통해) 덜 확고히 할 것을 요구한다면, 우리가 되어야 할 것 -우리의 이상- 을 생각하는 것까지 덜 확고히 할 것을 요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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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입장에서 상상계와 환상은 실재의 타자성으로 인해 부서지거나 가로질러지긴 할지언정 인간을 구성하는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그것조차 제한하려고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