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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본능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어감이 이상하여 물리적 본능이라는 용어로 고쳤으나, 이 역시 내게는 회의적인 단어 결합이다. 

본능과 충동에 대한 setting.

-가 붙은 항목들은 선생님의 가르침.

따라서 마지막 항목은 과학적 과정에 대한 선생님의 setting.

1. 프로이트 (15년 1학기 수업시간)

 

  • 프로이트는 “언어 속에서 인간은 행동의 대체물을 발견한다”고 함. 뒤집어 말해 이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것이 무의식적 행위 = 신체적 증상으로 전환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 무의식과 언어의 상관관계 통찰. (not 물리적 본능의 집합)

  • 프로이트는 히스테리같은 무의식은 억압된 물리적 본능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언어적 가치와 구조를 갖고 있음을 발견. 무의식적 기억으로 보존되어 있는 관념이나 언어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히스테리 증상이 생겨난다는 것. 예컨대 히스테리 발작은 상징적 – 언어적 가치를 갖지 않는 순수한 생리학적 작용 때문이 아니라, 관념이 불러일으키는 연상 작용 때문에 생겨남. ; 히스테리자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외상적 기억들을 연상시키는 유사 체험을 새로이 하게 되면 히스테리 발작이 일어날 수 있음.

     

  • 프로이트는 성인에 의한 유아의 유혹을 히스테리를 발생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보았다. ; 히스테리는 유아기의 외상적 체험 때문에 발생한, 불쾌 혹은 고통스러운 무의식적 '관념'과 이것이 의식으로 등장하는 것을 막는 '방어' 사이의 심리적 갈등의 산물이다. [관념이 신경증의 원인]

     

  • 모든 아버지를 심각한 성도착자로 만드는 유혹설은 설득력이 없지만, 어떤 의미에서 모든 아버지는 딸의 유혹자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아버지가 딸을 '욕망'한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자신의 여성적 매력 때문에 아버지에게 사랑과 보호를 받은 기억이 여자로서의 자긍심과 자아정체성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다지 분노할만한 주장은 아닐 것이다.

  • 히스테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아주었던 아버지를 향한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히스테리자는 어린시절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아주었던 아버지가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자신을 그렇게 완벽하게 사랑하고 돌보아주기를 원하는 주체이다. 히스테리자는 완전한 아버지를 원한다. 하지만 히스테리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의식의 차원에서 그렇게 하긴 해도 무의식은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히스테리는 근친상간의 금지규범을 통해 무의식에 채울 수 없는 심리적 틈을 갖게 되고, 이것으로 인해, 이룰 수 없으므로 포기해야만 하는 완벽한 사랑으로 인해, 그리고 완벽한 사랑을 기대했던 파트너로부터 버림받았다는 환상 때문에 생기는 분노와 불안으로, 고통받는 주체이다. 히스테리는 자신이 완전한 사랑이라고 여기는 '근친상간(완벽한 합일에의 욕망)'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심리적 틈과 결여는 결코 채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 외딥스 컴플렉스 : 어린아이가 부모에 대해 느끼는 사랑의 욕망과 적대적 욕망의 총체. 프로이트는 바로 이 컴플렉스를 정신분석학의 주춧돌로 보았으며, 신경증은 외딥스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

  • 통속적 반론1 - 외딥스 컴플렉스라는 개념이 우리의 상식적인 도덕의식에 맞지 않는다.

  • [재반론] 성행위, 성적 결합이라는 좁은 의미의 성만이 아니라, 육체적 접촉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양육행위, 관심과 애정의 표현도 정분학의 의미에서 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어린아이의 성적'지식'은 성인들의 애정 어린 양육과 돌봄('유혹')을 통해 아이의 무의식과 육체 속에 각인된다.

 

  • 반론2 – 인간을 과거에 고착되어 자유를 상실한 존재로 만든다. 모든 걸 외딥스로 설명하려 한다. [재반론] 프로이트 글을 읽다보면, 이런 단순한 해석은 잘못. 우선 프로이트는 본능과 충동을 구분하는데, 본능은 순수 생물학적 개념. 따라서 '프로이트가 남자아이는 어머니를, 여자아이는 아버지를 사랑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본능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는 건 프로이트에 대한 오해. 프로이트는 본능이 아니라 충동을 말하고 있다.

  • 본능은, 인간을 미리 정해진 특정한 행위로 이끈다. 여기는 어떤 예외나 상징적 의미도 있을 수 없다.

  • ↔ 충동은 본능과는 달리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목이 마르면 음료수를 마신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떤 음료수를 마시는가에 따라 상이한 사회 상징적 의미가 부여된다. 어떤 음료수에 해당하는 것이 라캉의 용어를 빌려 기표이다. 바나나나 사과와 연관된 상징적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바나나를 먹고 싶은 경우에도 본의 아니게 사과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능은 결정론적으로 작용하지만 충동은 상징계와 접하고 있으므로 예외와 일탈을 허용한다.(또한 이런 맥락에서, 전환히스테리에서 성적의미를 지니지 않는 육체의 한 부분이 강한 성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육체가 상징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본능의 개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 충동이 상징적 차원에서 작용한다 = 충동의 대상이 실제 대상을 필요가 없다. 여기서 충동의 발현은 환상과 관련되며, 환상의 심리적 현실성/실재성 같은 것에 대해 위에서 언급되었다.

 

  • 그리고 환상은 좁은 의미의 물질/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말을 설명해보면 이렇다. ; 아버지의 거세위협으로 고통받고 있는 신경증자의 경우, 그 신경증자의 어린시절에 그의 아버지가 '실제로' 거세위협을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거세 컴플렉스는 이 신경증자의 환상 속에 존재한다. 거세 컴플렉스가 사후적으로 재구성된다는 것의 의미는, 기껏해야 아버지는 자위행위를 하는 어린아이에게 그다지 악의없는 경고만을 할 뿐이라 할지라도 아이가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이 말을 '심각한 거세위협'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경증의 발현).

  • 요컨대, 거세 컴플렉스는 아버지의 실제적 위협의 결과라기보다는 환상(적 해석)의 결과이다. 이런 의미에서 외딥스 컴플렉스는 '보편적 현상'이 아니라 '우연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론2에 대한 재반론].

 

2. 「무의식에 관하여」 인용

- 무의식의 정당화. (무의식에 대한 필수적 근거들, 증거가 충분하다고 주장하기를 목표로 함.)

- 표상 -> 억압 -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 : 무의식은 이렇게 영향력 행사 가능

- 무의식 정당화에 대한 과학적 방법(과정)

: 해명하고 싶은 이상한 현상을 해명할 수 있을 것 같아 가설 -> 검증 -> 다른 가설 -> 검증의 과정

: 철학자와 상이하다. (무의식을 가정함이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

 

  • 인용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 가정을 과학적 작업의 목적에 적용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곳곳에서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그러한 반발에 대해 우리는 무의식에 관한 우리의 가정이 <필수적> <정당한> <증거> 충분하다고 맞받아칠 수 있다.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가정은 의식의 자료에 단절되는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필수적>이다.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 모두에게는 종종 의식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어떤 작용을 미리 전제해야만 설명이 가능한 정신적 활동이 종종 일어난다. 건강한 사람의 경우는 실수행위나 꿈, 병든 사람의 경우는 어떤 정신적인 증상이나 강박 등으로 나타나는 모든 행위가 그런 정신적인 활동에 속한다. …..............이해 x. 의식의 활동들 사이에 무의식의 활동을 삽입시킨다면 그 의식의 활동들은 입증 가능한 정연한 연관 관계 속에서 이해 가능한 것이 된다. 이처럼 단절된 의식 활동이 무의식의 개입으로 어떤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가 직접적인 경험의 경계 너머로 들어설 수 있음을 정당하게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된다.

….더 나아가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가정은, 그런 가정을 내세우더라도 기존의 관습적이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고 양식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 <합당한> 가정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의식을 통해 우리 자신의 마음 상태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도 의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 유추 과정을 통해 우리가 관찰한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이끌어 낸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을 심리학적으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특별한 반성적 사고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의 성향을 부여하고, 따라서 우리자신의 의식 또한 그대로 부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동일시가 바로 타인을 이해하는 <필수조건>이다). 이런 추론 과정(동일시 과정) 은 이미 예전부터 자아에 의해 다른 사람들, 동물들, 식물들, 무생물들, 그리고 세계 전체로까지 확대 적용된 것으로, ---증명 불가한 헛된 생각--- 자아와 타자 세계의 유사성이 크면 클수록 유용한 것이고 자아와 <타자>와의 차이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된다.

/ 그렇다고 무조건 그런 동일시의 과정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판적 사고를 통해 동물의 경우 의식이 과연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이미 회의적인 시각을 표명하기 시작했으며, 식물의 경우엔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무생물에게 의식을 부여하면 그건 신비주의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유추과정시 발생 --- 다만 그 <타자>가 동료 인간인 경우 본래적인 동일시 성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 추론의 과정(타인에 대한) 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다고 해서 무의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논리적으로 볼때는 그와 같은 적용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의식과 자기자신을 연결시켜주는 또다른, 제2의 의식을 가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제2의 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에는 부재하는 또다른 정신활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정신분석에서 정신과정이란 본질적으로 무의식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의식을 통한 무의식적 정신 과정의 지각을 감각 기관을 통한 외부 세계의 지각과 비교할 도리밖에 없다. …...우리의 인식이나 지각은 주관적으로 조건지어진 것이며, 따라서 인식 불가능한 인식 대상을 우리의 인식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칸트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 또한 의식을 통한 인식을, 인식 대상인 무의식의 정신과정과 동일한 것으로 보지 말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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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홈페이지에 존재하는 모든 프로이트 관련 목록

01. 2015년 1학기 수업에서 다룬 내용

02. 프로이트 vs. 심리학 (내용보강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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