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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counter between philosophy and the outside >>
공동체, Nation, Etat, 권력, 헌법체제, 개인성, 이데올로기장치, 국제화, Boundary, Self-image >>
다음은 카야노 도시히토가 쓴 『국가란 무엇인가』의 '3장. 부의 사유화와 폭력'에 대한 요약과 나의 생각이다. 카야노의 이 논의는 다소 거칠고 강한 논의이다.
나는 우선 카야노가 주장한 바를 요약해보려 한다. 그리고 옆 컬럼에서 번호에 따른 코멘트를 기재할 것이다. 카야노에 의하면, 폭력은 질서와 지배를 보장한다고 하는 사회적 기능을 가지므로 단순한 파괴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고 집단적으로 조직화된다. 그러나 폭력의 사회적 기능은 질서와 지배의 보장에만 머물지 않고 부의 획득을 가능하게 한다. 부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강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며, 폭력의 조직화 운동은 이를 목표로 해서 생겨난다. 그리고 이것이 적과 친구의 구별을 만들어내어(슈미트 비판), 국가 성립의 기반이 된다. 따라서 정치단체에 내재된 수단이 왜 폭력적인지가 설명된다[1].
국가는 부의 사유화와 폭력의 조직화가 순환적으로 운동하면서 출현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본성에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찾고자(홉스의 계약론) 하는 시도는 실패한다. 인간의 본성이 선이든 악이든 관계없이 순환운동은 일어난다[2]. 즉, 부의 사유화가 있기만 하다면 폭력도 존재하게 되는데[: 숨은 전제], 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와는 떨어져 있다. 폭력을 통한 약탈은 부의 자가생산보다 더 많은 부를 사유화할 수 있게 해주므로 합리적이다. 그리고 국가의 기초는 (이러한 합리적인 충동을 가지고) 군사적으로 승리한 자가 다른 주민들에게 부의 지불을 강요하는 행위를 통해 다져진다[3]. 따라서 국가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깨달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목표로 설립(홉스의 계약론)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행위주체가 주민을 지배하고, 그들로부터의 수탈을 위해 그들을 보호하는 행위가 파생됨으로써 국가가 나타난다[4][: 전제].
이후 카야노는 홉스의 계약론 안에서 “설립”에 의한 것이 아니라 “획득”에 의한 국가생성론의 도식을 설명한다. 그리고 “획득”에 의한 국가생성론에 있어서, 스피노자와 홉스의 관련성을 언급한다. 카야노는 계속하여 국가를 주민들의 합의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계약론을 비판한다[5]. 한편 “설립”에 의한 국가생성론이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이유는 국가가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행위가 국가의 본래 성격(폭력)으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의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성격은 은폐되는데, 그러한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 폭력에 의해 부를 자기것으로 만들 수 있는 행위주체를 그 지역에서 오로지 하나만 존재하게 하기 위해, 국가는 주민 차원에서의 폭력을 금지한다[6]. 따라서 주민 차원에서 치안을 유지한다는 것은, 개인의 소유를 보호하고, 대신 그들로부터 부를 징수하는 것이다. 사회 내의 폭력이 가능한 한 국가만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최소화된 상태는 '치안이 좋은' 상태이며, 국가가 원활하게 자신의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주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에서 국가의 존재근거를 찾고자 하는 발상은 전도되어 있으며[7], 국가의 존재는 폭력을 그때마다 행사하지 않아도 부를 징수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8][: 귀결].
마지막으로 카야노는 두 가지 논점을 비판한다. 첫째는, 국가를 상부구조에 대한 하부구조의 규정성으로 파악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카야노에 의하면, 국가는 경제적 토대 위에 형성된 보완적인 장치가 아니라, 이미 자체가 고유의 논리를 가진 운동체이다. 그리하여 국가의 활동 자체에 의해 경제의 발전이 정체되는 경우는 늘 일어난다. 둘째는, 국가 없는 사회의 설정에 대한 비판이다. 카야노는 <천개의 고원>(p.415, 486)에서 진행된 들뢰즈-가타리의 클라스트르 비판을 예로 들며, 국가와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 순수한 '국가 없는 사회'를 상정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혹은 '국가 없는 사회'에 대한 클라스트르의 논의는 다음을 참조하라)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들뢰즈-가타리의 비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원시사회의 구성원은 국가의 형성을 방해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어떻게 국가가 형성되었는가? 어째서 국가는 승리했는가? 클라스트르는 이 문제를 너무 깊이 파고든 나머지 해결을 위한 수단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 '원시공동체의 자급자족, 자율성, 독립, 이미-존재함-성 등은 민족학자의 꿈일 뿐이다. 원시공동체가 필연적으로 국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국가와 공존하고 있다.' , '국가의 안과 밖에서 국가로부터 멀어지고자 하거나, 국가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거나, 혹은 국가의 방향을 전환시키거나 없애 버리려는 경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시사회에서도 국가를 '구하'고자 하는 경향이나 국가의 성립을 추진하려는 힘이 늘 존재한다'.
참고할 문헌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국가론>
홉스, <리바이어던>
들뢰즈-가타리, <천개의 고원>
피에르 부르디외, 「국가정신의 담당자들」, 『環』(vol. 5)
피에르 끌라스트르, <폭력의 고고학>
다음은 '4장' 국가고찰의 방법론에 대한 요약중 날려버려, 잔상(?)에 의거한 간단한 맥락만 기록해두기로 한다.
베네딕트 앤더슨, 에릭 홉스봄 등의 국민-국가 비판론은 '국민적이지 않은 국가'를 상정하지 않은 결과 국민의 외연을 국가의 외연과 동치시켜 국민을 비판하면 국가를 비판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그리고 알튀세르는 폭력적 국가장치에 기반한 이데올로기(알튀세르적 의미에서는 자기이미지 혹은 어딘가에 소속된 '나'라는 것의 역할)의 호명 효과를 주장하며, 푸코의 언설 분석은 지식의 고고학에도 그 방법론이 명시되어 있듯 언설의 분석에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언설과 비언설의 경계지점을 사유한다. 따라서 국가를 국민의 외연과 동치시켜, 국민이 허구임을 증명한 뒤, (카야노에게는 단단한 물리적 폭력의 기반을 가지고 부의 수탈과 폭력을 기반으로 한 운동체인) 국가도 허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알튀세르와 푸코를 인용하는 것은 오류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카야노가 국가를 그러한 운동체라고 말하는 것은 물질을 개재시킬 지언정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또한 카야노는 국민의 외연과 국가의 외연을 동치시키는 등의오류와, 국가-허구론을 비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념화가 먼저 성립되어야 하고, 그를 위해선 국가의 성립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원리를 파악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원리의 파악은 카야노의 경우 성공했는가? 카야노의 '원리'에 대한 사고실험에서 구체적인 실례는 여전히 부족해 보이며, 국가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것에 대한 생략적/암묵적 전제가 너무도 많은 듯 보인다.
[1] 인류학에서 부유한데 호전적인 민족이 보고되었다. 그리하여 폭력은 부와의 관련 없이도 성립할 수 있다.
또한, 국가의 성립 기반에 폭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해도, 정치단체에 내재된 수단 역시 폭력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비약이다.
[3] 호전적 집단들은 '영예' 자체를 위해 군사적일 가능성은 없을까?
[4] nation-building의 여러 차원들을 고려해볼 때, 문화로서의 지배는 폭력으로서의 지배로만은 말해질 수 없다.
[5] 홉스, 로크 계약론의 비판은 정의로운 사회의 사람들이 계약을 추상화시킨 합의를 통해 한 사회를 성립시킨다고 주장하는 롤즈의 정의론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즉, '계약'을 이상론으로 추상화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6] 이것은 사고실험으로서 '실례'가 부족하다.
[7] 국가를 독립적 행위주체로 놓는 것은 (별다른 근거 없이도) 합당한가? 본 텍스트에서 '국가'가 무엇인지는 전제되지 않는 사항이다. 따라서 '국가'를 '정부'와 혼동할 위험도 있다.
'국가'를 '정부' 혹은 '정치단체'와 혼동할 경우, 국가에서의 엘리트를 행위주체로 놓고, 국가에 등록된 시민들은 국가의 동력과는 무관한 수동적인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엘리트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내셔널리즘이 '국가'를 재생산하고, 엘리트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