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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15년 1학기 심리철학 수업

1. 수업시간에 다루었지만 노트서 누락된 부분에 대한 보충

 

  ㄱ. 심적 현상의 종류와 심적인 것의 특징의 존재 유무에 관한 논의 (요약발표본 + 복습본)

 

  ㄴ. '속성/유형 간 상관관계'의 이론들을 적용한 심신 상관관계 이론들

 

          ⓐ 부수현상론을 심신 인과로부터의 동일론 논변과 관련시켜 이해해보자.

          ⓑ 동일설 혹은 심뇌동일설

          ⓒ 중립 일원론(neutral monism)

 

  ㄷ. 감각질 허무주의에 대한 논의

 

2. 책에 있지만 다루지 않은 몇몇 부분에 대한 공부

 

  ⓐ 123p. 심신동일론에 대한 반론 중, "고정 지시어"로서의 "고통"에 관한 논의

  ⓑ 심적 인과 (6장) [외부 링크 필요]

  ⓒ 심성 내용 (8장) [외부 링크 필요]

  ⓓ 비환원적 물리주의 (9장) [외부 링크 필요]

1. 수업시간에 다루었지만 노트서 누락된 부분에 대한 보충

ㄱ. 심적 현상의 종류와 심적인 것의 특징의 존재 유무에 관한 논의

: 이 부분은 1장 5절과 6절에 해당하며, 전세리와 내가 요약하여 발표하였다.

(아래는 나의 발표 요약. 많은 지적을 감사하게 받았으며, 피드백은 옆 컬럼에, 더 나은 내 요약은 아래에.)

 

5 절) 심적 현상의 종류

 

   이 절은 심적사건과 상태를 몇 가지 범주로 나누기를 목표로 한다. 우리는 그걸 (ㄱ)감각을 포함하는 심적 현상들, (ㄴ)that-clauses(주로 접속사 that 에 이끌리는 명사절)절을 사용해서 사람이나 생물에게 귀속시키는 심적 상태들로 나눌 것이다.

 

   (ㄱ) 일단 감각을 포함하는 심적 상태들은 현상적 phenomental 이거나 질적 qualitative 인 면모를 가진다고 여겨진다. 즉, 그 상태들이 느껴지는 방식 the way they feel(1)이거나 그 사물들이 보여지거나 드러나는 방식 the way things look or appear(2)을 감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의 경우 고통에 특화되어 다른 감각과 변별될 수 있는 특수한 느낌으로 감각된다(1 의 예). 또한, 색깔을 볼 경우에도 초록색은 초록색에 특화되어 다른 색깔과 변별될 수 있는 특수한 색깔로 감각된다(2 의 예). 이것들이 감각인데 우리가 직접 in a direct way 확인할 수 있는 감각적인 질 sensory quality 을 통해서 고통이며 초록색이며 하는 것들이 규정된다.

 

   (ㄴ) that-clauses 절이 사용되면서 사람이나 생물에 귀속되는 심적 상태들의 예를 들어보자. 빌 클린턴은 '바란다'hopes that 이하. 이러한 영어 문장에서 '바란다'라는 심적 상태는 빌 클린턴에게 귀속된다. 빌 클린턴은 that 절 이하에 대하여 그러한 태도를 취한다. “명제 태도”는 '바란다'hopes 와 같은 것, "내용 문장”은 that 절 이하를 일컫는다. 이 내용들은 지향적 intentional, 내포적 intensional, 내용적 contentful 으로, 이것들은 느낌의 상태로 감각할 수 없는 믿음과 욕구를 나타내는 “명제 태도”를 (ㄱ)과 구별시킨다. '바란다' 외에 '분노한다' 등의 정서 emotions 상태들 역시 “명제 태도”로 치환될 수 있다. 또한 '~를 의도하고 있다'라는 말의 경우도 주어가 그런 식으로 자유 의지 volition 의 상태를 표현할 때, 주어는 that 이하를 행위하여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명제 태도"이다.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적절한 사회적 관습과 믿음과 욕구를 가질 수 있는 생물에 국한되며, 특정한 종류의 욕구를 형성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행위하는 주어의 성향이 그 주어의 심적 특성이 된다.

 

   이 (ㄱ)과 (ㄴ)은 감각과 지향적 상태를 각각 명시하기 위한 기초작업인데,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앞으로 여러 문제를 논의할 때 심적 상태의 사례 를 제공해주게 된다.

 

 

6 절)

 

   이 절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 심적인 것의 특징 a mark이 있는가에 대하여, 즉 심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보편적 필요충분적 기준을 만드는 걸 목표로 하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를 목표로 한다.

 

   [1] 인식론적으로 우리는 심적 상태나 현상을 다른 믿음이나 지식이나 증거나 추론에 근거하지 않고 직접적direct/immediate 으로 안다(I). 당사자인 A 는 현재의 자기 심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고 제삼자인 B 는 A 의 체험을 인지할 수 없다. 심적 상태에 대한 이러한 직접성은, 내 앞에 흰 종이가 있다는 식의 물리적 상태에 관한 지식이나 내 과거의 심적 사건에 대한 지식에는 성립하지 않는데, 이것들은 내가 이미 다른 사람과 똑같거나 거의 비슷한 -즉, 증거가 요구되는- 위치에서 그 사건들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내 심적 상태의 경우 사밀성이 보장되며, 그것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위의 예와 구별된다(II).

 

   또한 내 자신의 고통(그러한 mental states)에 대해 거짓 믿음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때, 나는 내 고통에 관한 “오류불가능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내가 -증거가 제시되어야 하며, 그것을 관찰할 수 있는 복수의 타자가 존재하는- 물리적 사건과 관련된 믿음을 가지는 경우, 그것은 오류가능하다(그러나 내 자신의 고통은 생리학적이거나 물리학적인 외부의 실재에 관계없이 “오류불가능”하다). 비슷하게 "자기-고시성"은 if m occurs, the person believes that m occurs 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고통의 정상적인 물리적 및 생리학적 원인들이 모두 갖춰져 있더라도 당신이 어떠한 고통도 의식하지 못할 때 당신은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라는 결론이 이것으로부터 나올 수도 있다(iii).

 

   다만 심적 사건 모두가 이러한 특징을 가지지는 않는데, 하의식 / 정서의 불확실성 / 감각의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애매한 고통을 느낄 때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나만이 가진 특별한 근접권, 즉 일인칭(나)의 특권의 성립은 여전히 심성과 다른 것을 구별시켜주는 핵심이 된다.

 

   [2] 데카르트는 '심적인 것의 본질을 사유'로($) / 물리적인 것의 본질을 공간성(%)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심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비공간적이고($) / '물리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사유능력을 결여한다(%)'고 결론내렸다. 물리주의자는 데카르트의 '심적인 것의 본질은 사유($)'에는 동의하면서, '물리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사유능력을 결여(%)'한다는 것은 거부하였다. 그런데, 심성 개념은 심성을 가진 대상이 공간적으로 연장성을 갖는 물체여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므로, 심적인 것의 특성으로 비공간성 nonspatiality 을 내세운다면, (그것이 연장성을 가지는 물체를 반드시 수반할 필요가 없다는 점으로부터) 심적 실체를 가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심성을 가지는 것들이 공간적으로 연장성을 가지는 것은 '우연적'일 뿐이고, 다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연장성을 가지지 않는 천사가 믿음 욕구 등의 심적 상태를 가진다는 것에도 논리적 일관성이 있다. 한편 심적 상태가 아닌 물리적 상태(속성)의 경우 연장성을 가져야만 하는데, 기하학적 점, 수, 명제는 연장성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가 공간적인 연장성을 가지지 않는 존재에 의해 사유되는 가능세계를 인정할 때, 그 존재=사유의 주체 subject 는 수 같은 연장성 가지지 않는 존재일 수 없으므로, 유일한 가능성으로 데카르트적 심적 실체 개념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3] 우리가 x 를 믿는다고 해서 그 x 가 반드시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어떤 대상이나 내용을 향하고 있는 심적 상태들에게 그 대상이나 내용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특징이 심성의 “지향성 intentionality”이다. 그 대상이나 내용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모두가 똑같이 사랑을 (공통된 실재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지칭 지향성”은 잘못 알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현재의 정정된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일하게 지칭될 것임을 예고하는 개념이다. “내용 지향성”은 심적 상태가 그것의 외부에 외재해 있는 사물이나 사태를 어떻게든 표상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두 종류의 지향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심적 상태가 존재한다. 가령 낱말과 문장, 또한 컴퓨터와 같이 각각 지칭 지향성과 내용 지향성을 가지는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 여기에 대한 (*1)번째 대답은, 타고나면서 지향성을 결여한 대상들에 해당 언어 사용자들이 부여하는 후생적인, 가장된/파생된 지향성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낱말과 문장은 인간의 매개로 존재하고, 컴퓨터의 경우 인간이 은유적인 용법을 통해 contentful 한 속성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 여길 수 있는 것이다. (*2)번째 대답은, 어떤 물리적인 시스템이 사물을 지칭하고 사태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는 한 그것이 심성을 표출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이것을 기초로 그 시스템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자들에게 지향성이 심성의 조건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물리적인 게 심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얘기로 앞의 진리는 타파되지 않는다.

 

   [4] 이 (ㄱ)과 (ㄴ)에서 다룬 감각적 상태와 지향적 상태를 공통된 '심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해주는 통합적인 속성은 찾을 수 없다. 감각적 상태는 사밀성 등 인식적 기준을 만족하고, 지향적 상태는 지향성 기준을 만족시키는 전형적 사례다. 우리가 이 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이상 단일한 심성 개념을 확보할 수 없다.

 

(끝)

 

(아래는 전세리의 발표 요약이다. 내 의견은 옆 컬럼에 적겠다.)

 

제 5절 심적 현상의 종류

 

   첫 번째로 “감각을 포함하는 심적 현상”들이 있다. 고통과 가려움(통각), 간지럼(압각), 어떠한 것을 봄(시각), 소리를 들음(청각)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심적 상태들은 현상적이거나 질적인 면모를 가진다. 즉, 각각의 심적 상태들이 느껴지는 방식과 각각의 사물들이 보여지거나 느껴지는 방식이 독특하다. 가령 '가려움은 가렵다, 간지러움은 간지럽다'라는 독특한 느낌을 가진다.

 

   두 번째로 “목적격의 절을 사용해서 표준적으로 사람이나 생물에 귀속시키는 심적 상태”들이 있다. 어떠한 것을 '바란다', '믿는다', '걱정한다' 등이 이에 포함된다. 빌 클린턴은 의회가 올해에 보건 복지 법안을 통과시켜줄 것을 “바란다”(Bill Clinton “hopes” that Congress will pass a health care bill this year.)가 한 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태는 한 명제에 대해서 어떤 주체가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명제 태도”라고 부른다. 위의 예를 보면, 주체인 빌 클린턴이 '의회가 올해 보건 복지 법안을 통과시킬 것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바란다'라는 태도를 취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심적 상태들에는 앞에서 언급한 현상적이고 질적인 면이 없는 것 같다.

 

   세 번째로 “느낌과 정서라는 심적 상태”들이 있다. 분노, 기쁨, 슬픔 등이 이에 포함된다. 어떤 정서 상태들은 명제 태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클린턴은 몇몇 기자들이 화이트 워터 사건을 가지고 지나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을 매우 “불쾌해하였다”를 보면, 주체인 클린턴이 '몇몇 기자들이 화이트 워터 사건을 가지고 지나치게 물고 늘어진다.'라는 명제에 대해 '불쾌하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명제 태도'의 형식이 나타난다. 그리고 일부 정서나 느낌이 독특한 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모든 정서와 느낌이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네 번째로 “'의지적인' 상태라는 심적 상태”들이 있다. 의도함, 결정함, 자원함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상태들 또한 명제 태도이다. 예를 들어, 나는 내일 뉴욕행 10시 기차를 탄다(I 'intend' that I take the ten o'clock train to New York tomorrow.)을 보았을 때, 나라는 주체가 '내일 뉴욕행 10시 기차를 탄다'는 명제에 대해 '의도하다'라는 태도를 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의지적 상태들은 행위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것을 의도했다면 반드시 그것을 하거나 그것을 하지 않을 경우 나의 의도를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 6절 “심적인 것의 특징”이 있는가?

 

   먼저, “인식론적 기준”에서의 심적인 것의 특징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로, 심적인 것은 ”직접적 지식”이다. 왜냐하면 '치통을 앓고 있다'와 같은 심적인 지식은 증거나 추론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앞에 있는 붉은 원을 보는 것과 같은 아주 단순한 물리적 사실에 대한 지식도 직접적인 것은 아닌가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두 번째로, 심적인 것은 “사밀성, 또는 일인칭적 특권”을 가진다. 위에서 제기된 물음은 사밀성으로써 답변할 수 있는데, 사밀성은 임의의 심적 사건에 대해서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심적 사건이 발생한 사람뿐이라는 심적 사건에 대한 일인칭적 특권으로 설명된다. 즉, 사밀성이란 어떤 사람의 심적 사건에 대해서는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붉은 원을 보는 것을 직접적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 또한 나와 같은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붉은 원을 보는 것과 같은 아주 단순한 물리적 사물에 대한 지식은 사밀성을 결여한다.

 

   세 번째로, 심적인 것은 “오류 불가능성과 자기 고시성”을 그 특징으로 가진다 (이해 지적). 오류 불가능성은 적어도 고통을 비롯한 감각과 같은 심적 사건들은 우리가 이 사건들을 경험하는지의 여부에 관해서 우리가 틀릴 수 없다는 심적 사건의 특징이다. 반면, 자기 고시성이란 심적 사건이 그 심적 사건의 주체의 믿음과 관련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고통의 조건을 가지고 있더라도 주체가 이를 믿지 않으면 그 주체는 그 조건으로 인한 고통을 느낄 수 없다. 이 둘을 묶어 “마음의 투명성주의(마음은 오직 한 사람에 대해서만 전적으로 투명한 매개체가 된다.)”라고 한다.

 

   다음 심성의 특징은 '비공간적'이라는 것이다 (이해 체크). 심성 개념은 심성을 가진 대상이 공간적으로 연장성을 갖는 물체여야 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심적인 것의 기준으로 비공간성을 받아들인다면, 심적 실체 개념을 일리가 있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심적 속성들이 비물질적인 존재에 의해서 예화되는 가능 세계의 존재를 허용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심성은 “지향성”을 그 특징으로 갖는다. “지향성”이란 심적 상태들은 어떤 대상이나 내용을 가지거나 그것을 향하여 있으며, 그 대상이나 내용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는 심리적인 것의 특징이다. 지향성 개념은 지칭적 지향성과 내용 지향성으로 나누어진다. 지칭적 지향성은 생각, 믿음, 의도 등의 심적 상태가 어떠한 대상을 지칭함을 뜻한다. 반면, 내용 지향성은 믿음, 희망, 의도(체크) 와 같은 심적 상태들이 내용이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이러한 지향성에 대해 어떠한 심적 현상들은 두 종류의 지향성 중 어느 것도 나타내지 못하는 것 같다는 문제와 심적 상태만이 지향성을 표출하는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가능한 두 가지 답변이 있다. 첫 번째 답변은 우리의 마음과 심적 상태가 가지는 진정한(또는 고유한) 지향성과, 타고나면서 지향성을 결여한 대상과 상태에 대해서 우리가 귀속시키는 가장된(또는 파생된) 지향성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떤 물리적인 시스템이 사물을 지칭하고, 사태를 표상하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것이 심성을 표출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 시스템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심적인 것의 특징에 관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난제”가 존재한다. 심적인 현상은 감각적/질적인 상태와 지향적 상태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심적인 것의 인식적 기준을 만족시키는 전형적인 경우이고, 후자는 지향성 기준을 만족시키는 심적 상태의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감각적 상태와 지향적 상태가 “심적”인 것이 되게 해주는 공통의 속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하였다.

 

 

질문 1. 저자는 아주 단순한 물리적 사실에 대한 지식도 직접적인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에 사밀성으로 답변할 수 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아주 단순한 물리적 사실이 직접적일 때 사밀성을 결여한다는 것은 그 사실이 직접적이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사밀성으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진술로 보인다.

 

질문 2. 저자는 비공간적인 것으로서의 심성을 설명하며 '물리주의의 의문을 그대로 남겨 둔 채 비공간성을 심적인 것의 특성으로 보는 관점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부분의 결론부분에서 심적인 것의 기준으로 비공간성을 받아들인다면 심적 실체 개념을 일리가 있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둘은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끝)

 

(내가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어서 다시 한 번 요약해본 것이다. 15-08-06)

 

   심적 사건과 상태의 범주들

 

   1] 감각을 포함하는 심적 현상들. 이런 심적 상태들은 현상적 (vs. 실재) 이거나 질적(qualitative)인 면모를 가진다. 초록 색점(푸른 부위)을 볼 때에는 그 색점이 당신에게 보여지는 독특한 방식이 있다. 색이 있는 게 아닌데 우리가 색을 본다. 따라서 시각적 경험은 정신현상이다. 맨 느낌(raw feel)과 감각질(qualia)이라는 표현은 이런 질적인 심적 상태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2] 목적격의 절을 사용해서 표준적으로 사람이나 생물에 귀속시키는 심적 상태들이 있다. 바라거나 믿거나 걱정하는, 이런 상태들을 '명제 태도'라고 부른다. 이 상태들이 동사로 오고 뒤에 목적격의 절이 오는데 이것들은 ('명제 태도'의 내용을 구성하므로) '내용 문장'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예를 들어 밥 돌의 염려 내용이 “의회가 보건 복지 개정안을 통과시킬 것이다”라는 것일 때, 이 내용을 “지향적” (또는 “내포적”) 상태라고 하기도 하고, “내용적” 상태라고 하기도 한다. 이 심적 상태들에는 현상적이고 질적인 면이 없다. 또 한가지 주의할 점은, 통속 심리학은 대부분 명제 태도를 포함하며 '믿음과 욕구'는 가장 중요한 명제 태도로 꼽힌다는 것이다.

 

   3] '느낌과 정서'에 들어갈 심적 상태들은 다양하다. 어떤 정서 상태들은(불쾌해 하였다든가 당황해 하였다 같은) 목적격 절과 함께 사람에게 귀속되므로, 명제태도이기도 하다. 또 어떤 정서에는(분노와 질투 같은) 독특한 질적인 요소가 있기는 있다. 하지만 '느낌과 정서'에 들어갈 모든 상태들이 감각질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4] '의지적인' 상태라고 불려지는 심적상태가 있는데, 의도함, 결정함, 자원함 등이 이 그룹에 속한다. 이 상태들은 명제 태도이고, 내용을 갖는다. 이 의지적 상태들은 '행위'와 밀접히 관련을 맺고 있다. 행위는 단순한 신체적 움직임과는 구별된다. 적절한 사회적 관습과 제도를 이해하고 믿음과 욕구를 가질 수 있는 생물들만이 구매나 판매와 같은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반면, 신체적 움직임은 이러한 조건사항을 가지지 않는다. 행위라는 것은, 사회적 관계와 관습에 대한 이해라든지 믿음, 욕구, 의도 등으로 이루어지는 풍부하고 복잡한 배경을 전제한다.

 

   5] 심적으로 집어넣을 수 있기에 모호한 것들. 성격과 인격의 특징(정직함, 강박 관념에 사로잡힘 ,재치있음, 내성적임 등), 습관과 성향(부지런함, 세심함 등), 지적인 능력, 예술적인 소양. 한 사람의 의식과 한 사람의 됨됨이는 다른 것이기에 이것들은 모호하다. 그런데 정직 같은 경우, 파생적인 의미에서 심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진리를 말하려는 욕구 등을 형성하고 자기가 믿는 것을 말하는 행위를 하는 성향이나 경향성이기 때문에 파생적이다.

 

   이제 아래에선 심적인 것을 나타내는 탁월한 특징들을 살펴볼 것이다. 먼저 인식론적 기준을 살펴보자. 당신이 경험하는 치통이 심적 사건인 반면 어금니의 상태는 그렇지 않다. 이런 구별을 가능하게 하는 게 뭘까 ? 한 유력한 답변에 따르면, 이 두 현상들에 대해서 당신이 가지는 지식이 근본적으로 차이나기 때문에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직접적 지식 : 당신이 치통을 경험하고 있다는 당신의 지식은 증거나 추론에 근거하지 않는 '직접적'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어금니의 상태(물리적인 조건)에 관한 당신의 지식은 증거에 근거해 있을 것이다. (요약에서 빼먹은 부분 :) 그런데 치통 같은 심적 사건들에 관한 지식만이 '직접적'이지는 않고, 아주 단순한 물리적 사실에 관한 지식도 똑같이 직접적일 수 있지 않을까 ? 당신 바로 앞에 있는 벽에 그려져 있는 큰 붉은 원을 당신이 바라보고 있을 때, 당신은 자기 앞에 붉고 둥근 색점이 있다는 것을 다른 증거에 의하지 않고서 직접 아는 것이 아닐까 ? 이는 심적 특징에 사밀성, 또는 일인칭적 특권을 추가해야만 함을 시사한다.

 

   2] 사밀성, 일인칭적 특권 : 임의의 심적 사건에 대해서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심적 사건이 발생한 사람뿐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붉고 둥근 색점의 경우, 그 벽과 적당한 거리에 서 있는 나나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다. 심적 사건들은 당사자와 제삼자 사이에 '비대칭성'을 드러내는 반면, 후자의 물리적 상태에 대한 지식은 그렇지 않다.

 

   3] 오류불가능성과 자기고시성 : 이 둘을 묶어서 “마음의 투명성주의”라고 하며 이 이론에 의하면 마음은 오직 한 사람에 대해서만 전적으로 투명한 매개체가 된다. 오류불가능성은, 예를 들면 당신이 자기가 지금 고통스럽다고 '믿는다'면 → 당신이 고통스런 상태에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할 때, 당신 자신의 고통에 관한 당신의 지식은 '오류불가능'하다는 성질을 가리킨다. 자기고시성은, 예를 들면 당신이 고통스런 상태에 '있을' 때 → 당신이 자기가 지금 고통스럽다고 '믿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할 때, 고통스런 상태는 당신에 대해서 '자기고시적'이라는 성질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신체적 사건은 심적 사건과 달리 이 두 성질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팔다리의 위치를 “자기 자극 감수성(proprioception)''을 통해서 감지하는 것은 심적 사건인가 신체적 사건인가 ?

 

   위에서 열거한 1~3 인식론적 특성들은 매우 강한 속성들이어서, 모든 심적 사건들이 그처럼 특별한 속성들을 갖지는 않는다. 첫째로 “무의식 or 잠재의식적”인 믿음, 욕구, 정서의 주체는 이런 심리 상태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지만 이런 상태가 그 사람의 외적 행위를 구체화시키고 영향을 미친다. 둘째로,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정서가 많은 정서 중 어느것에 해당하는지 똑부러지게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때로는 우리가 진짜로 무언가를 믿거나 바라는지 확신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이걸 인식적인 불확실성이라 할 때, 인식적인 불확실성은 감각의 경우에도 똑같이 일어나서, 경험하는 감각이 무엇인지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내성을 통해 확인될 수 있는 것들이라 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오류 불가능성이나 교정 불가능성(어떤 독립된 증거도 그의 믿음을 뒤집지 못한다)을 결여할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투명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심적 사건의 특별한 인식적 성격에 대한 철학자들 사이의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일인칭적 특권(우리가 우리 심적 상태의 중요한 일부 집합에 대해서 특별한 근접권을 가진다는 것)이라는 특징을 부각시켜 본다면, 우리는 물리적인 것과 차이나는 심성 개념을 확보할 수 있다.

 

   이제 심성의 기준으로서의 지향성의 문제를 살펴보자.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자르거나 차지 못한다. 우리가 x라는 것을 발로 차기 위해서는 x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x를 믿는다고 해서 x가 반드시 존재할 필요는 없다. 브렌타노는 심적 상태들이 어떤 대상이나 내용을 가지거나 그것을 향하여 있는데, 그 대상이나 내용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특징을 “지향성”이라고 불러 왔다. 그리고 이것이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지향성 개념은 '지칭 지향성'과 '내용 지향성'으로 나뉘며, 지칭 지향성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관해서도 그것에 대해 향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없는데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내용 지향성은 나의 사고와 믿음이 방향성을 가지고 내용에 초점이 맞춰지며, 사실이 아닌 어떤 것에 대해서도 믿음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지향성을 심적인 것의 특징으로 삼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번째 문제. 고통의 감각은 어떤 것을 가리키거나 어떤 것에 '관한' 것 같지는 않고, 믿음이나 의도가 내용을 갖는 방식처럼 내용을 갖지도 않지만, 심적 상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심적 상태인데 지향성을 나타내지 못한다. 두번째 문제. 심적 상태만이 지향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낱말과 문장은 사물을 지칭할 수 있고 내용과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컴퓨터 같은 물리적인 것도 뭔갈 지칭할 수 있고 내용을 가질 수 있다. 이 반론에 대한 답변은 i과 ii에서 다루기로 하자.

 

   I] 우리의 마음과 심적 상태가 가지는 진정한(고유한) 지향성과, 타고나면서 지향성을 결여한 대상과 상태에 대해서 우리가 귀속시키는 가장된(파생된) 지향성을 구별할 수 있다. 이 구별은 컴퓨터의 지향성을 인간의 지향성과 구별하게 해준다. 그리고 언어 사용자가 런던을 지칭하기 위해서 “런던”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런던”이 런던을 지칭하는 것이고, “런던”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권역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떠한 지칭적 기능도 지니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언어의 지향성은 언어 사용자들(이 지니는 심적 지향성)에 의존한다.

 

   Ii] 물리적 시스템들과 그것들의 상태가 진정한 지향성과 심성을 가질 수 있다. 이때 우리도 복잡한 물리적인 시스템이라고 한다면, 우리 두뇌의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상태는 두뇌에 외재해 있는 사물과 사태들을 지칭할 수 있고, 그것들의 표상을 기억 속에 저장할 수 있다.

 

(끝)

 

ㄴ. '속성/유형 간 상관관계'의 이론들을 적용한 심신 상관관계 이론들

 

   ⓐ 부수현상론을 심신 인과로부터의 동일론 논변과 관련시켜 이해해보자. : 심신 인과로부터 동일론을 논증하는 방식은 아파서 손을 뒤로 뺀 행동의 실제 원인은 c-fiber activation 하나만이지, 통증과 c-fiber activation 둘 다가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인과적 중층결정의 거부'와 관련이 있다. c-fiber가 그 자체로 충분한 원인이라면, 통증은 분리된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c-fiber가 원인일 때 통증도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 동일론자이고, 통증을 인과적으로 무력하게 보는 것이 부수현상론자이다. (3장 5절) (#)

 

   ⓑ 동일설 혹은 심뇌동일설이란, 심뇌 문제에 관한 입장의 하나로서, 마음 상태 & 프로세스란, 뇌의 상태 & 프로세스 그 자체를 일컫는다는 입장이다. 심적인 것을 물리적인 것의 존재에 환원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환원주의이기도 하다. type physicalism과 token physicalism으로 나눈다 (아니다, type physicalism만이 심뇌동일설이다). 행동주의의 실패를 반성하고, 물리주의의 일종으로서 이원론 일반과 대립하는 문맥에서 얘기된다.

 

   심뇌 동일설은 성질 이원론이나 중립 일원론(아래B)과 유사한 생각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큰 차이가 있다. 성질 이원론이나 중립 일원론에서는, 심적 상태와 뇌 상태는 동일한 실체의 두 측면이고, 가령 동전의 앞뒤와 같은 관계이다. 그러나 심뇌 동일설에서는, '구름이란 물 입자이다', '번개는 전하의 운동이다'라는 예가 사용된다. 구름과 물 입자의 집합은 개념으로서는 차이나되, 그것들이 지시하는 대상은 같다. 즉, 심적 상태와 뇌 상태는 개념이 차이나되, 완전히 동일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 이와 유사한 질문을 '심신 상관관계 논제와, 속성/유형 간 상관관계의 이론들을 적용한 심신 상관관계 이론들'을 수업할 때 전세리가 던졌다. ; 스피노자식 사고와 심신 동일론(심뇌 동일설)의 차이는, 어림잡건대, 한 실체가 두 개념으로 가고, 두 개념이 한 실체로 가는 그러한 역방향성에 있는 듯 하다.]

 

심리철학에서는 심적 인과의 문제가 중요한 토픽으로서 논의되나, 동일설에서는 심적 상태가 뇌의 상태와 '동일한 것'으로서 존재하는 까닭에, 마음은 인과적 효력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 중립 일원론 neutral monism

 

   심신 문제에 관한 이론 중 하나로, 심적이라든가 물리적이라는 건 어떤 하나의 실체, 혹은 사건의 두 성질이라고 하는 이론. 성질이원론과 거의 같은 입장이다.

 

   중립일원론은 물질적인 것과 심적인 것이 실재한다는 실체이원론과 대립한다. 또한 존재론적으로는 일원론이되, 물리적인 것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물리주의나, 심적인 것만이 존재한다는 유심론과 대립하면서, 그 양자의 중간적 위치에 있다. 러셀, 제임스, 스트로슨이 이 입장이다. 차머스의 자연주의적 이원론은 중립일원론의 일종이다. 스피노자는 범신론적 일원론이나 심신문제에 관해서는 중립일원론이라 말해진다.

 

   중립일원론은 심적인 것에 대한 설명이 곤란한 물리주의의 결점과, 물리적인 것의 실재성과 대립하는 관념론의 결점을 피한다는 점에서 지지하는 이가 많다.

 

   그런데 현대의 물리주의자는 물리영역의 인과적 폐쇄성을 전제로, 중립일원론자가 말하는 '성질로서의 마음'도, 인과적으로 제외가능하다고 논하기 때문에, 심적 인과를 옹호할 수 있는지, 혹은 Causal dangler이나 현상판단의 패러덕스를 회피할 수 있는지가 과제이다. (# 물리적 영역의 인과적 폐쇄성을 전제한 위에, 현상의식이나 감각질의 위치를 찾을 경우, 가장 심플한 해답으로서 수반현상론이 있다. 수반현상론에서는 의식이나 감각질이라는 주관적 체험은 물리현상에 대해 어떤 인과작용도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주관적 체험이 물리 현상의 원인으로 나타나는 일은 없다는 입장에서 보면 주관적 체험의 포지션은 닫힌 물리영역에 대하여, 공중에 떠있다. 때문에 수반현상설에서의 심적인 것은, 물리영역에 부수되어 있을 뿐인 부속물의 의미로서, Causal dangler라 불린다. 그런데 현상의식이나 감각질을, 물리상태에 어떤 인과작용도 일으키지 않는 수반현상으로서 위치잡을 때, 패러덕스가 생겨난다. 그것은 현상의식이나 감각질에 관해 뇌가 행하는 판단이나 보고에는 현상의식이나 감각질 자체가 인과적으로 일체 관계되지 않게 된다. 이 문제는 Causal exclusion problem 혹은 Paradox of phenomenal judgement라 불린다.)

 

   중립일원론의 다양체중 하나인 트롭설(# ?)에서는, 심적 성질과 물리적 성질은 동전의 앞뒤처럼 불가분한 것으로서 심적인과를 옹호하려고 하는데, 그 불가분성의 강조는 심적성질의 물리적 성질에의 의존에 지나지 않는다고 물리주의자는 비판한다.

 

ㄷ. 감각질 허무주의에 대한 논의

   : 이론적 감각질 허무주의는, 감각질의 본성적 속성들이 아무런 인과적-이론적 역할을 하지 않지만, 우리의 식별 행위에서 감각질의 구조적인 속성들이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고 인정한다.

철학적 감각질 허무주의는, 마치 연소의 산화 이론이 정립되었을 때 플로지스톤을 믿는 것이 포기되었듯이, 신경과학이 내적 정신 생활을 언급함 없이 인간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할 때, 감각질을 믿는 것은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들은 감각질은 오직 인간 행동들을 설명하기 위해 상정된 이론적 구성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가 상호 주관적인 의사소통을 위하여 어떻게 감각질에 대한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는지는 하나의 미스터리이다. 감각질이 무엇인지 단어를 사용해서 발견하기를 진정하게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마음없는 인간들(좀비)가 형이상학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 안에서도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김재권은 7장 의식절을 '재밌게 끝내려고'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우화를 인용하며 이러한 문장을 기술한다).

 

2. 책에 있지만 다루지 않은 몇몇 부분에 대한 공부

 

ⓐ 123p. 심신동일론에 대한 반론 중, "고정 지시어"로서의 "고통"에 관한 논의

 

이 반론을 이해하려면 스마트와 암스트롱에 의한 심신동일론 논증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문장 논리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먼저 스마트의 동일론 논변은 다음과 같다. - [#]

다음으로 암스트롱의 동일론 논변은 다음과 같다. - [#]

 

 

 

   그리고 크립키의 반론이다. - 동일론자들은 고통 = c-fiber activation가 우연적인 것이지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고통 = not c-fiber activation인 가능세계도 있을 수 있었다. 상이한 가능세계들에서 상이한 대상들을 가리킬 수 있는 지시어를 '비고정지시어'라 하고, 고유명과 같이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이나 사람을 지시하는 지시어를 '고정지시어'라고 한다. 그렇다면 x = y가 우연적인 동일성이 되기 위해서는, x, y 중 어느 하나가 비고정 지시어, 즉 상이한 세계에서 상이한 대상들을 가리킬 수 있는 표현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C-fiber activation는 비고정적일 수 없다. 그리고 “고통”은, (4) 현상적 속성의 재고찰에서 다룬 스마트와 암스트롱의 접근법에 따르면 비고정적이다. “고통”을 임의의 주어진 세계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인과적 역할으로 이해하면, 실제로 고통인 상태가 고통이 아니었을 수도 있게 된다. 인과적 역할은 법칙들에 의존하고 법칙들은 세계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이런 설명은 타당할까? 만약 고통을 그것이 가지는 아픈 성격이라고 규정한다면, 고통은 바로 그 아픈 성질을 가진 사건/상태를 고정적으로 지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표현은 모든 가능세계를 통해서 그러한 아픈 종류의 사건을 가리키며, 이때 그게 임의의 세계에서 어떤 인과적 역할을 수행하든지는 상관이 없다. 그래서 지금 논의하는 반론의 힘은 (4)와 연관해서 논의된 심적 표현들에 대한 암스트롱과 스마트의 접근법의 타당성에 달려 있다. [# 기능주의에 대한 반론]

 

   유형물리주의자가 심신 동일성이 우연적이지 않고 필연적인 동일성이라고 말하게 되면, 고통 = c-fiber activation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성립한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가능세계를 생각할 수 있다. [# 기능주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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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적인" 상태에 대한 설명에서 심적 상태는 행위와 관련된다. 

 

심적 상태에 넣기에 모호한 파생적 심적 상태들에 대한 설명이 누락되었다.

나와 차이나는 부분이다.  정서라는 심적 상태를 독립적 변수로 구별했다.

 

 

 

 

 

 

 

 

 

의지적인 심적 상태를 구별했다.

 

 

 

 

 

 

 

교수는 모호한 파생적인 심적 상태에 대한 누락에 대한 지적을 하였다. 

밑줄 부분은 저자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한 틀린 요약이다. 직접성은 물리적 상태에 관한 지식에 성립하기 때문에, 심적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사밀성이라는 추가 사항이 필요하다.

오류불가능성과 자기고시성이 뒤집어진 관계라는 것을 잘 포착하지 못한 단락이다. 또한, 오류불가능성의 개념형성을 제대로 못한 까닭에, 밑줄 부분의 창조적 해석을 하게 되었다.

 

자기고시성은, 그 사건이 일어날 때, 정신현상의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이고, 오류불가능성은 정신현상의 믿음이 있을 때, 그 사건은 일어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어렵게 요약한 기억이 나지만 수업시간에 다루지 않고 넘어갔다.

이 형광펜 부분 또한, 저자를 모독하고(?) 창조적 해석을 했던 부분이다. 지칭 지향성에 대한 정의는 하단의 새로운 내 요약을 참고하라.

 

또한 밑줄 쳐진 내용 지향성 역시 잘못 요약되어 있다. 내용지향성은 어떤 명제가 사실에 대한 지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감각질에 대한 설명이 빠진 것이 감점 요인이 되었다.

이 단락은, '명제 태도'와 '정서' 간의 구분이 필요하다고 감점되었다. 모든 정서가 명제 태도인 것은 아니다. 

내 예상으로는 나와 함께 자기고시성과 오류불가능성의 논리적으로 거꾸로인 관계를 포착하지 못해서 감점되었을 것이다. 밑줄 부분은 '관련'된다는 것만 말하지 오류불가능성과 어떻게 차이나게 '관련'되는지는 말하지 않는 요약이다.

직접성이 완전한 지표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반박으로, 물리적 사실이 직접적일 때 사밀성은 결여한다고 기술하며, 사밀성이라는 지표를 보완한 것이다.

According to trope monism, mental and physical types are distinct, and mental events are physical events, but in addition, every mental trope is identical with a physical trope. This helps to avoid the epiphenomenalism of the mental.

 

일본어 링크

부수현상론

avec 인과적 폐쇄성

 

그러나 부수현상론과 중립일원론은 구별해야 하지 않는가?

 

부수현상론 복습과 이런저런 키워드를 더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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