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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타르의 『지식인의 종언』, (법정대학본) 중 「지적 유행(mode)」번역

by 강경원 (* 능력이 부족했던 2014에 번역한 것으로 원본과 대조한 바 없으므로 오역이 있을 수 있으며, 차후 수정할 가능성이 있다. 2015-07-15)

 

   고전주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적 유행은 각각 거기에 맞는 제도 -궁정, 살롱, 신문, 잡지, 매스미디어-를 동반해왔다. 이러한 제도들은, 사상idee이나 작품을 퍼뜨리기 위한 방도였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는, 그러한 사상이나 작품을 요약하고, 정리하고, 일단 역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나 레토릭이, 남다른 떠들석한 웃음을 흩뿌리면서, 어지럽게 날리며 교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이나 레토릭은, 통행 수표 [언어적 약속]가 되고 있다. 어디를 통과하기 위해서일까? 그것은 상징적인 가치를 지고 있는 것이다. 즉, 그러한 말이나 레토릭을 교환하는 공동체는, 그 말이나 레토릭이 의미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신용가치, 그 차별화 능력에 의해서, 자기를 자기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왕후의 궁정으로부터 잡지, 선언 문서, 전위적인 기관지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유행어의 신용가치도 어떤 변용을 겪어 왔다. 그러한 유행어가 불러일으키는 신용은, 단지 단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힘일뿐 아니라, 상업상의 [돈을 모으는] 힘도 제공하는 것이다. 출판업자, 영화의 프로듀서, 티비 딜렉터, 신문 편집자, 그 이상으로도 이러한 사상idee의 <제작자> 들은, 말의 유행에 동반하여 잇속을 챙기고 있다. 상업주의적 교환은, 이른바 문화라는 것에 침투하여, 최적의 차이라고 하는 교환의 규칙을 강압하고 있다. 사람들은, 옷 차려입는 방식이나 생산양식, 그리고 화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물을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 사이에 있는 뒤틀림에 대해서도 투기를 한다. 이러한 뒤틀림으로부터 생겨나오는 가치의 차이는, 시간의 선취 [절약] 안에 있다. 타인보다 빠르게 앞을 넘겨다보고, 그것을 손에 넣은 공동체가 어떤 한 시기에 자기를 차별화할 수 있는 말 (의복, 화폐) 을 가장 빠르게 제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금 차이에의 욕망이 충족되어 버리면, 정확히 그것에 의해 차이는 붕괴한다. 언어적 약속의 생명은, 정확히 덧없는 것이다.

 

   지적 유행은, 사상에 관해서 다른 사람과 같고 싶지 않다, 고 하는 욕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공통의 문화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공통의 문화가 과거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공통의 문화는 자기를 차이화하여 [분화하여] 갖가지 서브컬쳐를 산출하고, 이 서브컬쳐들은, 갖가지 사상조류나 사상계열, 당파(sector), 소집단으로 세분화된다. 이탈리아의 고대자치 도시는, 일단 이런 경합관계에 매우 적합한 활력을 갖추고 있었다. 늦지 않는 것. 최신의 말 하나를 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댄디즘의 극치라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선,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유행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즉, 사람들은 폴리스의 이름과 그 이름을 준 아테네의 영광을 위해 죽어갔던 것이다. 유행은, 고유명사와 같은 가치를 가지는, 갖가지 이념idee을 나타내는 표현방법term (기호signe, 구조, 어용론pragmatic=언어행위론) 을 만들어낸다. ㅡ 그러나, 그러한 경쟁관계는, 차이가 평가되는, 하나의 공통 문화를 기반으로해서밖에 성립되지 않는다. 반목으로까진 말할 수 없을지라도, 이러한 불일치는 바람직하다, 는 점에서 사람들은 일치한다. 견해의 상위함(desensus) 이라는 것의 이점에 관해서, 견해의 일치(consensus)가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군락은 다 같은 주민들, 즉 <지적 계급>으로부터 성립하고 있다(#).

 

   모던과 클래식의 대립은 연대적인 것이 아니다. 클래식은, 오래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모더니즘(근대성)이란, 테이블 매너라든가 사고의 매너라든가 우리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 선상에서, 시간의 매너(양태)인 것이다. 모더니즘(근대성)은, 단순히 전통보다도 미래에 특별한 주의를 쏟는 것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학은 클래식한 것으로서, 새로움 (혁신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된) 의 전통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다. 모던이란, 사건 자체 – 돌연한, 긴급한 것, 앎에 더욱이 의식에조차, 도리를 잃어버린 듯한 것 – 에 대한 감수성을 일컫는다. 사건은 무조건적으로 수행적인 것이다. 즉, 사건은 생겨나오는 [일어나는] 것이다. 유행은, 사건적으로 되려는 욕망에 의해 긍정된다.

 

   사건은, 그것이 일어나건 안 일어나건, 사건임을 멈추고, 정보가 되어 유통하며, 안정화된 상황을 파괴하는 힘을 잃어버린다. 가령 추리소설은, 범죄를 사건의 패러다임으로서, 시간의 의표를 찌르는 것 즉 불의의 사건으로서 다룬다(#).

 

   유행은 미학과 친척 관계에 있다. 미학은, 19세기중엽, 시학의 쇠퇴와 동시에 발전했다. 작품의 가치는, 받아들이는 자 (<대중 (publique)> - 독자, 관중) 에 의한 평가가 어떨지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서, 보내는 사람 (작가, 예술가, 사상가) 이 각각의 장르의 규칙을 존수하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취향 (취미) 는, 규칙에 의해 고정화된 공통의 감수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공통의 취미는, 전적으로 보편성의 지평으로서 필요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것은 아름답다'고 말할 때, 누구든 이 작품을 아름답다, 바르다 등등이라고 생각해야만 한다. 사상의 분야 -적어도 이론 분야- 에서의 유행이란, 진리를 목적으로 하고, 원리적으로는 논증에 호소하는 듯한 작품에서조차, 일정의 감정의 체제(régime)와 그 감정이 이견없이 공유되는 체제의 영향을 받아서 전해진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공유도, 소수의 선출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한정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소수파 지향은 근대성(모더니티)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근대성은 예술, 과학, 기술, 정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상에 있어서도, 이미 확정 완료된 것이라고 믿어지고 있는 것의 한계에 작용하는 동안에 존재한다(#). 모던한 화가란, 그 화가에게 회화예술이 되거나 안 됨을, 자신이 제작한 회화작품(tableau) 에 부과하고 있는 화가를 일컫는다. 아마, 철학은, 적어도 비판으로서의 철학은, 항상 모던해 왔다. 이러한 한계를 시련에 노출시키는 작업은 또한, 전위(아방가르드)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있다. 현대의 유행은, 많은 경우, 아방가르드라는 칭호를 몸에 두르고 있으나, 가끔은 그것이 항상 액면 그대로라고는 하기 어렵다.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을 칭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는, 비판적 작업의 결과, 사상을 흔드는 일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의해 판단된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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