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주관성의 문제
(도입 시작)
유아론은 근대 이후 철학의 중요한 과제였다. 이 유아론은 어떻게 해서 성립하게 되었던가? 그를 추적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던질 수 있는 물음은 데카르트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세계-인간 관계 방식을 설정했는가에 있다. 데카르트는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학문의 단초를 확립하기 위해, 그 방법론을 의심가능한 모든 것을 의심한 후 의심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채택하고, 자기자신의 사유활동 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도출해내었다. 즉, 사유한다는 사실은 내게 직접 알려지는 것으로서 (신체와 달리) 확실하다. 데카르트에게서 내가 나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바로 사유이다. 사유존재는 나를 주체/주관으로 만들어준다. 여기서 문제는, 외부세계 사물의 존재를 일단 부정 + 수학적 사유도 부정한 상태에서 가장 확실한 것을 찾았다는 데서 발생하는데, 그것(cogito)만 가장 확실하다면, 인간은 cogito의 섬과 같은 부분을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그 cogito를 토대로 놓고 신을 매개로 하여 세계를 연역해낸다고 해도, 사물의 존재가능성을 인간이 직접 증명할 수 없게 된다.
데카르트에게서 인간 앎의 일차적 대상은 관념이다. 외부의 사물은 내게 간접적으로 관념을 매개로 알려지며, 관념 너머의 존재를 인간은 직접 경험/인식할 수 없다. 사물의 존재를 내가 직접 증명할 수 없으므로 타자가 나와 같은 주체라는 것도 증명할 수 없다. 현상을 통해서는 사유 밖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 사물의 실재성은 신 쪽에 있다). 이러한 골격으로 설명한 것이 유아론의 문제이다.
이후 흄의 현상론에서는, 앎의 직접적 대상은 감각을 통한 인상 또는 관념이 된다. 이것이 바로 현상이다. 감각 밖의 실재성에 대해서 흄은 회의하며, 내가 만나는 관념 외에 외부세계가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흄에 있어서, 감각에 주어진 주관적 관념이 곧 세계라고 하는 유아론적 근대 인식론의 문제는 조금 더 불거진다.
(도입 끝)
(1) 독일관념론의 길 ㅡ 헤겔을 중심으로 : 헤겔은 물질(인식대상)과 정신(인식주체)라는 이분법적 조건에 물질을 정신으로 흡수함으로써 대응한다. 인식주체로서의 정신이 인식객체로서의 정신을 파악한다. 물질은 정신의 외화이기에, 우리는 외부세계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 가능하다. 그 여정을 정신현상학이 밟아간다.
(2) 후설을 비판하는 구도
: 타자의 사유는 데카르트의 구도 속에서 내 감각(현상)으로 주어지지조차 않는다. 그랬을 때 A의 노에마는 A에 대한 것이고 B의 노에마는 B에 대한 것이 되어, 자기의 구성물을 자기가 넘어나아갈 수 없다는 비판이 따를 수 있다. 후설의 구도 역시 인식론의 문제를 되풀이한다는 비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3) 아이디어
i. 나와 분리된 대상으로의 타자를 곧 인식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이전에, 내가 행위하는 방식, 인식하는 방식 안에 이미 타자가 들어와 있으면 된다. 즉 이것이 가능하면 타자와 내가 분리되기 이전의 조건을 찾은 것이 된다.
ii. 나의 노에마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대상의 어떤 본질이 내 노에시스에 의해 그 의미가 드러난 것이다. 의미는 세계를 그것의 성립조건으로 하고 있다. 반면 인식론자에게는 후설과 같은 세계 개념이 없다.
iii. 나의 노에마와 상대의 노에마의 상호주관성을 인정한다면 교탁에 대한 나의 노에마는 내가 순수하게 마든 것이 아니다. 내가 만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은 주관적이지 않고, 상호주관적이다. 상대의 교탁이라는 노에마를 만든 상대의 사유 역시 직접 나에게 경험될 수는 없지만, 대상을 보며 똑같은 노에마를 구성한 고로 상대 역시 의미구성의 축을 가지고 있다고 내가 유비추론해낼 수 있게 된다.
(4) 후설과 인식론자의 구도 비교
ㄱ. 초월적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
초월적 대상 <-------(x구간)-------> 질료 <--------(y구간)-------> 의식
a. 후설에 의하면 y구간에서 노에시스(의식활동)에 의해 노에마(의미)가 드러난다. 이 노에마는 노에시스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거기서 질료는 음영으로 의식에 주어진다.
b. 인식론에서 초월적 대상은 의식 밖에 독립해 있는 실재성을 지칭한다(예 : 버클리). 반면 후설에게 바깥의 사물은 나에 대한 의미체로서 실재한다. 즉, 바깥에 있는 교탁 자체가 나에 의한 의미구성물인 것이다. 이는 후설이 인식론의 주/객 구분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다.
c. 후설에 의하면 노에마는 내 쪽에 있으면서 내가 만나는 바깥의 사물이기도 하다. 한편 인식론자에게 '관념'과 '현상'은 주관적으로 내 쪽에만 있어야 하는 것이다.
d. 후설의 선험적 관념론에 의하면 실재인 외적 사물과 의미구성물인 노에마가 일치한다. 따라서 노에마는 주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e. 노에마와 노에시스의 관계는 지향적이다. 인식론자들이 주관에 대립하여 객관적으로 있다고 생각했던 초월적 대상을 후설은 의미구성물이라는 의식의 지향적 대상물로 흡수해버린다.
ㄴ. 노에마는 어떻게 해서 상호주관적일 수 있을까?
a. 노에마는 인식론에서 말하는 감각의 대상인 주관적 인상(관념)과는 차이가 나는 개념이다.
b. 인식론자들은 인식의 대상을 감각에 의해 주어진 관념으로 본다. 그것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 자체가 객관적 인식을 성립시키지 않기에 근대 인식론자들은 감각에 의해서 주어진 관념과 고유한 사유 능력을 통한 개념을 구별시켰다. 이 분리는 사유가 밖으로 나가려면 감각을 경유해야만 하는 구도를 만들어낸다(by kantian).
c. 후설은 우리가 무언갈 '본다' 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의미라고 하고 있다. 이 의미는 상호주관적 의미구성물로서, 한 세계 안의 상호주관적 이해에 바탕한다. 즉 의미는 세계라는 공통 토대 위에 성립하므로 상호주관성을 확보해낼 수 있는 개념이다.
d. 지향성에서 후설 주장의 단초를 발견해보자. 지향성에 의하면 의식은 처음부터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인식론자의 경우 의식과 세계가 분리되어 존재하지만 후설의 경우 의식과 세계는 처음부터 함께 있다. 그리고 이때의 세계는 의미 세계이다.
ㄷ. 어떻게 나 안에서 내 영역에서 배제된 타자의 의미가 구성되는가?
a. 자아는 하나의 모나드이다. 각자의 모나드는 각기 그 자체 내에 타자, 즉 다른 자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 자아 속에는 타자의 의미를 그대로 내포하고 있어야 된다.
b. 나는 나 자신의 모나드 내에서 유비통각을 통하여 타자의 의미를 구성한다.
ㄹ. 어떻게 타자의 의미에서 공동체의 의미가 구성되는가? 또 어떻게 하나의 객관적 세계가 누구에게나 동일한 세계로 구성되는가?
a. 우리가 경험하고 살고 있는 이 객관적 세계 역시 모나드의 공동체이다.
b. 각자는 객관적 세계의 의미를 다소간에 완전히 구성하고 있다.
c. 우리는 공동으로 그것을 인정하는 객관적 세계에 산다.
d. 의미구성물 속에 그 의미를 구성한 나와 타자가 더불어 있으므로 의미는 상호주관적이다.
e. 따라서 모나드의 상관자는 선험적으로 구성된 공동주관적 혹은 객관적 세계이다.
(정리 시작)
내가 의미를 구성하는 주체라면 타자 역시도 의미를 구성하는 주체여야 한다.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타자는 나에게 직접 주어지지 않는다. 후설의 선험적 관념론의 '관념' 역시 타자로 구성된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면, 다른 주체를 직접 알 수 없다면, 유아론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런 반론에 대한 후설의 대답은 '유비추론'과 관련된다. 노에마는 항상 노에시스와의 관련 속에 존재한다. 노에시스는 의식활동이기에 그것은 주체 측에서 보면 나에게 직접 주어진다. 노에마 역시 의식활동 내부에 존재하므로 나에게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이처럼 노에시스와 노에마는 나에게 명증적인 것이다. 또한 이것이 성립할 수 있는 토대, 즉 명증성의 극이 '선험적 자아'다. 후설에게 노에마는 그저 의미가 아니고, 노에시스와의 관련 속에 있는 노에마이다. 물론 타자의 노에시스를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타자의 행동을 보고 타자가 의미구성한 것을 살펴본다면 타자가 구성한 노에마 역시 노에시스와의 관계 속에 있을 것이라고 유비추론 가능하다. 이렇게 의미의 상호주관성을 확보해낼 수 있다면, 의미를 토대로 해서 상대방의 노에시스와 선험적 자아를 유추 가능하다. 관건은 의미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임을 보이는 것이고, 이것이 후설이 유아론을 극복해가는 방식이다.
(정리 끝)